이승섭 칼럼

[시대의 논리를 전환하는 고독한 의식 : 인간은 글을 왜 쓰는가182]

{소음 사이의 독백, 시대를 관통하는 펜촉.}

이분희 취재본부장 2026.10.08 10:08

 

[필자]

어느 날 불쑥 던져진 제자의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인간은 왜 글을 써야 하는가? 글을 쓰면 대체 우리 삶에 무엇이 주어지는가?"

이 질문은 일기를 끄적이는 밤의 몽상가부터, 치열하게 시대의 단면을 베어내는 칼럼니스트, 인간의 심연을 탐구하는 소설가, 그리고 대중문화의 이면을 해부하는 평론가에 이르기까지, 백지 앞에서 고뇌해 본 모든 이들이 평생을 걸고 대답해야 할 거대한 화두다.

 

시라는 서정의 영역을 넘어 산문, 에세이, 희곡, 평론, 심지어 투박한 마을의 소식지 원고에 이르기까지,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는 단순히 정보를 기록하는 차원을 아득히 벗어난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가장 정밀하게 세공하는 작업이며, 파편화된 사회 속에서 온전한 나를 지켜내는 투쟁이다. 긴 시간 글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읽고,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온 사유의 궤적을 빌려, 인간이 기어코 펜을 쥐어야만 하는 그 필연적이고도 깊은 이유를 세밀하게 직조해 본다.

 

1. 무의식의 평행을 맞추는 자아의 해부학

 

인간의 내면은 결코 고요한 호수가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숱한 폭력과 오해, 억눌린 분노와 이루지 못한 욕망의 찌꺼기들을 마음 밑바닥에 퇴적시킨다.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이 감정들은 무의식 속에서 똬리를 틀고 우리의 정신을 어지럽힌다. 이때 글쓰기는 가장 날카롭고도 안전한 수술칼이 된다.

일기장이든 에세이의 초고든, 나만의 언어로 첫 문장을 밀고 나가는 순간 우리는 일상의 거친 소음 사이에서 완벽한 '독백'의 공간을 창조해 낸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추상적인 감정들은 모니터나 종이 위에서 구체적인 명사와 동사로 치환된다. '알 수 없는 우울'은 '어린 시절의 결핍'이라는 문장으로 해석되고, '타인을 향한 맹목적 분노'는 '나 자신의 열등감'이라는 활자로 해부된다.

이처럼 글을 쓰는 행위는 내면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무의식 속에서 엇갈리고 충돌하던 파편들이 언어라는 형태를 입고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비로소 우리의 정신은 잃어버렸던 '무의식의 평행'을 되찾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가장 적극적인 심리적 정화(Catharsis)이며, 이 지난한 자아 해부의 과정을 견뎌낸 사람은 어떠한 외부의 시련이나 타인의 날 선 비난 앞에서도 쉽게 요동치지 않는 육중한 내면의 닻을 내리게 된다.

 

2. 타자의 심연으로 걸어 들어가는 훈련 : 공감과 배려의 영토 확장

 

글쓰기는 고독한 밀실에서 시작되지만, 그 시선은 필연적으로 타인과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간다. 특히 소설이나 드라마 원고, 혹은 타인의 삶을 조명하는 기사나 평론을 쓸 때, 작가는 철저하게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보아야 한다.

나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인물의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 시대의 모순에 짓눌린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타인의 영혼 속으로 횡단해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지적 인내와 상상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글을 쓰기 위해 끈질기게 타인을 관찰하고 그들의 상처에 공감하는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현실 세계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극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활자를 통해 인간 군상의 다양한 바닥을 경험해 본 사람은 누군가를 함부로 정죄하거나 재단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무례함 뒤에 숨겨진 방어기제를 읽어내고, 타인의 침묵 속에 담긴 비명을 알아챈다. 이처럼 글쓰기가 길러준 웅숭깊은 이해심과 상상력은,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조차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인품으로 발현된다. 진정한 배려란 막연한 친절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 나를 완벽히 대입할 수 있는 '능력'이며, 글쓰기는 이 능력을 벼려내는 가장 훌륭한 숫돌이다.

3. 사유의 건축과 비평적 렌즈 : 시대의 논리를 전환하는 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정보의 홍수이자 맹목적인 여론이 휩쓰는 광장이다. 대중문화의 범람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타인이 만들어 놓은 시각에 쉽게 동화된다. 그러나 비평, 칼럼, 논설과 같이 논리를 구축하는 글쓰기를 실천하는 사람은 이 거대한 휩쓸림에 저항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편적인 현상들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찾아내고, 그것을 기둥 삼아 나만의 견고한 사유의 집을 건축하는 과정이다.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대중이 맹신하는 기존의 질서에 물음표를 던지며 '시대의 논리전환'을 시도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안을 대할 때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다. 찬반의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사실과 거짓을 분별하며, 객관적이고 서늘한 이성으로 세상을 해부한다.

이러한 비평적 사유의 훈련은 사회생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선택과 판단의 순간에 강력한 무기가 된다. 위기의 순간에 문제의 본질을 가장 먼저 파악해 내고, 설득력 있는 언어로 대안을 제시하는 통찰력. 그것은 오직 읽고, 쓰고, 치열하게 논리를 구성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적 특권이다.

 

4. 공동체를 묶고 갈등을 조율하는 실천적 언어

 

내면이 단단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사안을 논리적으로 조망할 줄 아는 사람. 이러한 품성을 갖춘 이는 필연적으로 그가 속한 지역 사회와 조직에서 탁월한 적응력과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다. 글쓰기가 개인의 책상을 넘어 공동체의 광장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장 강력한 접착제가 된다.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마을의 대소사, 혹은 땀 냄새가 밴 체육관에 모여 치열하게 의견을 나누는 총회나 거점 사업의 현장을 떠올려 보라. 각자의 욕망과 주장이 부딪히는 그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진정으로 갈등을 봉합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결국 '정제된 언어'와 '진정성 있는 텍스트'다. 글쓰기를 통해 감정을 절제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체화한 사람은, 대립하는 양측의 입장을 아우르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할 줄 안다.

또한 이웃들의 소박한 일상과 마을의 사계절을 따뜻한 에세이나 소식지 원고로 담아낼 때, 그 활자는 단순한 소식 전달을 넘어 지역 공동체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나의 삶이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글로 기록된다는 사실은 주민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강한 소속감과 연대감을 부여한다. 글을 쓰는 한 사람이 마을 전체의 문화적 품격을 높이고, 사회적 반목을 치유하는 구심점이 되는 것이다.

 

5. 지적 연대와 불멸을 향한 갈망

 

마지막으로, 우리가 펜을 놓을 수 없는 근원적인 이유는 '망각에 대한 저항'이다. 우리는 모두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유한한 존재다. 그러나 내가 남긴 한 줄의 문장, 한 편의 글은 내 육신이 소멸한 뒤에도 누군가의 심장에 남아 박동한다.

과거의 문호들이 남긴 글을 읽으며 우리가 삶의 지혜를 얻고 위로를 받듯, 우리가 정직하게 써 내려간 치열한 기록들은 시대를 건너 미래의 누군가에게 닿는다.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지적 연대의 사슬에 기꺼이 편입되며, 그 속에서 개별적인 자아를 뛰어넘어 역사와 접속하는 황홀함을 경험한다.

제자에게 다시 답하고 싶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이 짐승의 굴레를 벗고 스스로를 가장 존엄한 존재로 격상시키는 숭고한 의식이라고 말이다. 일상의 소음 속에서 고요한 독백을 길어 올리고,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팍팍한 공동체에 온기를 불어넣는 그 모든 과정이 결국 당신의 삶을 구원할 것이다. 글을 씀으로써 당신은 가장 유연하고도 단단한 인격을 완성할 것이며, 세상 그 어떤 폭풍우 앞에서도 자신만의 안정적인 항로를 개척해 나가는 눈부신 조타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기어코 백지 앞에 마주 앉아 살갗을 베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글을 써 내려가야만 하는 가장 깊고도 아름다운 이유다.

그래서 더욱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이며 삶이라 말하고 싶다.

 

2026. 10.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소백산맥]

 

이분희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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