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섭 칼럼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은 무엇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가?]

기술은 인간을 닮아가지만, 인간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

이분희 취재본부장 2026.11.07 19:29

 

[필자]

인간은 언제부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던 존재가 어느 날부터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지, 얼마나 빠르게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은 또 하나의 거대한 질문 앞에 서 있다.

인간보다 더 빠르게 계산하고,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하며, 인간의 언어와 문장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공지능의 출현 앞에서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인가.

인공지능은 인간이 오랫동안 축적해 온 지식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며, 복잡한 자료를 분석하고, 인간의 질문에 답한다.

과거에는 오랜 시간 공부하고 경험을 축적해야만 가능했던 일들이 이제는 몇 번의 질문과 명령만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지적 노동이 기계의 연산 능력 앞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공지능이 얼마나 인간을 닮아가고 있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대신할 수 있게 된 이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잃어가고 있으며, 무엇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기술의 진보는 언제나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불을 발견했을 때 인간은 자연의 어둠을 극복했고, 문자를 만들었을 때 기억의 한계를 넘어섰으며, 인쇄술을 통해 지식의 문을 넓혔다.

산업혁명은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대체했고, 디지털 혁명은 인간의 정보 처리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이제 인간의 사고와 창작이라는 가장 내밀한 영역까지 들어오고 있다.

문제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인간의 정신적 성숙을 앞질러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 편리한 세상을 만들었지만 반드시 더 깊이 사유하는 인간이 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하게 되었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판단하는 능력은 오히려 흔들리고 있다.

수많은 정보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지만 정작 자기 삶의 의미를 묻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인간은 정보를 많이 아는 존재이기 전에 그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지식은 축적할 수 있지만 지혜는 삶을 통과해야 얻어진다.

문장은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문장에 자신의 삶을 걸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공지능이 슬픔에 관한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인간의 상실을 대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에 관한 수천 편의 글을 분석할 수 있다고 해서 한밤중 홀로 눈물을 삼키는 인간의 고독을 살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남긴 언어와 지식, 경험의 흔적을 학습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삶을 통해 그 결과물에 책임을 지고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의 존재는 단순한 지능의 총합이 아니라 기억과 상처, 사랑과 후회, 선택과 책임이 서로 얽혀 만들어낸 하나의 고유한 서사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고통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며, 때로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다.

이것은 효율성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적 가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인간을 지나치게 기능적인 존재로 평가하고 있다.

얼마나 빠르게 일하는가,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내는가,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가가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에게 또 다른 불안을 안겨준다.

기계보다 빠르지 못하고, 기계보다 정확하지 못하며, 기계보다 많은 것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러나 이 질문에는 위험한 전제가 숨어 있다.

인간의 가치를 생산성과 능력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생산하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함께 밥을 먹고, 아픈 사람의 손을 잡아주며, 아무런 목적 없이 길을 걷는 일에도 인간의 존재는 충분히 빛난다.

늙어가는 부모의 걸음을 기다려주는 자식의 마음, 힘든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가족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이름 없이 마을의 골목을 쓸고 공동체의 어려움을 함께 걱정하는 사람들의 손길 속에도 인간의 존엄은 살아 있다.

세상은 이러한 일들을 위대한 업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대부분 이러한 이름 없는 선의와 배려다.

인류의 역사를 움직인 것이 위대한 영웅들의 기록만은 아니듯, 한 사회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도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만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타인의 삶을 지켜주는 평범한 사람들의 존재가 공동체를 유지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을 다시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법률과 규칙을 분석할 수는 있어도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는 결단은 인간의 몫이다.

수많은 갈등의 원인을 분석할 수는 있어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화해하기 위해 내미는 손의 온기까지 계산할 수는 없다.

특히 정치와 사회의 영역에서 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등의 언어가 지나치게 커져 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조정하고 공동의 미래를 모색해야 할 정치가 상대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순간, 정치는 공동체의 희망이 아니라 갈등의 생산자가 된다.

국민의 삶보다 진영의 이해가 앞서고, 공공의 가치보다 권력의 유지가 중요해지는 사회에서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 정책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들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정치는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경제도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며, 교육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어야 한다.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인간을 수단으로 만들고 인간의 존엄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진보의 이름을 빌린 또 다른 퇴보일 뿐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가.

나는 그 답이 사유하는 능력과 공감하는 능력,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인간은 스스로 질문하는 존재여야 한다.

인공지능은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인간은 답을 얻기 전에 질문의 본질부터 고민해야 한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아름다운가,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정보 검색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시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질문하지 않는 인간은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생각하는 수고를 포기하고,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세계를 자신의 세계라고 착각할 위험도 커진다.

그러므로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이다.

둘째,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존재여야 한다.

인공지능은 감정의 언어를 분석하고 공감하는 표현을 생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공감은 표현의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타인의 아픔 앞에서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때로는 자신의 편리함을 포기하는 실천 속에서 비로소 공감은 윤리적 가치를 갖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에는 수많은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

농촌의 고령자, 경제적 어려움에 놓인 이웃, 사회적 경쟁에서 밀려난 청년들, 질병과 가난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을 데이터로 분석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함께 아파하며 현실을 바꾸려는 사람이 더욱 필요하다.

인간의 존엄은 강한 사람의 능력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오히려 그 사회의 진정한 수준이 드러난다.

셋째,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존재여야 한다.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답변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과 책임까지 기계에 맡길 수는 없다.

어떤 선택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어떤 결정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가 누구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인지 판단하는 일은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책임이 없는 지능은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정교한 기술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윤리가 결여되어 있다면 사회를 발전시키기보다 파괴할 수 있다.

결국 인공지능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은 기술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만 있지 않다.

그 기술을 어떤 목적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떤 윤리적 기준으로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서 문학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오래된 창문이다.

한 편의 시가 인간의 고독을 깨우고, 한 편의 소설이 시대의 부조리를 드러내며, 한 편의 수필이 평범한 삶 속에 감추어진 존엄을 발견한다.

문학은 인간을 효율성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과 실패한 인생,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이를 보여준다.

인공지능이 문장을 만들어내는 시대일수록 문학은 더욱 깊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아름다운 문장을 생산하는 능력만으로 문학의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이 어떤 시대적 고뇌를 품고 있으며, 어떤 인간적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문학은 인간의 상처를 기록하고, 권력의 오만을 비판하며,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

인간이 인간을 잊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정신의 마지막 울타리이기도 하다.

나는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문학이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은 세상을 설명할 수 있지만 문학은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묻는다.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면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특히 시는 더욱 그렇다.

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한 송이 꽃의 흔들림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저녁노을 속에서 지나간 시간의 슬픔을 읽으며, 짧은 한 문장으로 인간의 긴 생애를 응축한다.

시의 언어는 효율적인 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효율성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가장 깊이 움직이기도 한다.

인간은 결국 기억하는 존재이며, 사랑하는 존재이고,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존재다.

우리는 인공지능과 경쟁하기 위해 인간다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기계보다 빠르게 생각하려고 애쓰기보다 더 깊이 생각해야 하고, 기계보다 많은 문장을 생산하려고 하기보다 한 문장이라도 자신의 삶을 통과한 진실을 담아야 한다.

기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려고 하기보다 그 정보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데 있지 않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고,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존엄을 먼저 생각하며, 절망적인 순간에도 희망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데 있다.

어쩌면 인공지능의 시대는 인간에게 새로운 위기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인간의 본질을 다시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자신을 설명해 왔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았는가를 성공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을 때 사람의 가슴에 남는 것은 소유의 목록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에게 어떤 사람이었으며,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하는 기억일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존재의 본질을 다시 배우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앞서가는 것이 중요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무엇을 위해 걸어왔는지가 중요해진다.

더 많은 것을 가지는 것보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깨닫게 되고, 남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자신의 양심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을 확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우리의 선택을 대신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인생까지 대신 책임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다운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양심,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함께 살아가려는 관용,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몫을 다하는 책임감.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오래되고도 가장 위대한 가치다.

이제 인류는 새로운 문명의 문턱에 서 있다.

인공지능은 더욱 정교해질 것이며, 인간의 일과 생활, 교육과 예술, 정치와 사회의 구조까지 끊임없이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문명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을 통해 더 인간다워지는 문명이어야 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계가 인간처럼 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이 기계처럼 되어가는 일이다.

계산하고 비교하며 경쟁하는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사랑하고 성찰하고 용서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기술적으로는 진보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퇴보한 문명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든 가장 놀라운 도구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은 어떤 도구의 성능으로도 측정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인간은 무엇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가.

나는 인간이 남긴 업적의 크기보다 타인의 삶에 남긴 온기로, 소유한 재산의 무게보다 지켜낸 양심의 깊이로, 세상을 지배한 권력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었던 사랑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기계는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은 인간만이 살아낼 수 있다.

기계는 수많은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진실한 생애가 남기는 울림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결국 인간의 마지막 경쟁력은 인간다움이다.

기술이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하더라도 인간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따뜻함이 사라지지 않으며, 불의에 맞서 진실을 말하려는 양심이 살아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위대한 지능은 어쩌면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며, 가장 위대한 문명은 서로의 존재를 존중할 줄 아는 사회일 것이다.

인간은 기계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의 시대에 책임을 지며, 끝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을 인간의 존엄이며, 우리가 다음 세대에 남겨야 할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다.

 

2026. 1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이승섭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이분희 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