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차면 비우라'는 오랜 격언이 있다. 그러나 정작 삶의 현장에서 깨닫는 진실은, 무언가를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이 몇 배는 더 고통스럽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능은 끊임없이 결핍을 느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욕망을 채워 넣으려 하기 때문이다. 늘 욕심의 틈새에 새로운 집착을 끼워 넣는 것이 우리의 가련한 일상이라면, 진정한 수양이란 그 비좁은 틈을 다시 벌려 여백을 만드는 '비움의 미학'이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다짐을 매일 밤 되풀이하면서도 돌아서면 다시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하는 내 초상은 차라리 하나의 자학적인 자화상에 가까웠다. 우리는 늘 욕망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 경계하지 못하고, '적당함'이라는 삶의 황금 분할을 방어해 내지 못한다. 문득 한 고명한 작가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내면의 여백이 지닌 미학을 이해할 때 비로소 비우는 손길이 가벼워진다. "이처럼 스스로 조절점을 갖출 때 비로소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생겨나지만, 그 안목이 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삶은 여전히 우리에게 거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날마다 자문자답하며 거울과 같은 맑은 마음을 갖는 것이 일상의 소망일진대, 세상의 소음 속에서 마음은 끊임없이 흐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고귀한 자정 능력이다. 위선에 빠지기 쉬운 나약한 마음을 날마다 닦고 또 닦는 일이 삶을 바르게 지탱하는 도리라면, 이 지난한 과정이야말로 삶이라는 거대한 교향곡의 중심을 잡아주는 본질적인 지정곡(指定曲)이 되지 않겠는가.
2. 서재의 통유리로 들어오는 풍경: 일직선이라는 태만과 굴곡의 미학
서재에서 올라가면 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시야는 막힌 속을 트이게 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매일 아침 이 고요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고대하지만, 현실로 내려오는 순간 마음은 다시 요동친다. 마음이란 자동차의 부품처럼 언제든 꺼내어 닦고 새것으로 갈아 끼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의 행로는 참으로 고단하고 가련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더 많기에, 이 유리창 앞에서의 침묵은 때로 깊은 푸념의 언어로 변하곤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의도한 대로 모든 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처리된다면, 삶의 어려움이나 고통은 사라질지언정 그 삶은 얼마나 건조하겠는가.
그것은 산과 언덕이 없는 황량한 평지만을 끝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같을 것이다.
긴 인생 여정에서 굴곡 없는 일직선의 길은 우리에게 방심과 졸음, 그리고 영혼의 태만을 가져다준다. 장애물이 없는 길을 걷다 보면 인간은 쉽게 옆길로 벗어나 위기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적당한 위기와 난제가 삶의 전면에 다가올 때, 비로소 인간의 인격체는 단단하고 굳건하게 완성된다. 그리하여 생(生)이라는 캔버스에는 비로소 다채로운 명암과 색채를 지닌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 캔버스 위에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릴 것인가는 결국 스스로 결정하는 안목에 달린 문제이지, 타인의 지시나 제도적인 교육에 의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수동적인 인간과 능동적인 인간의 차이는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소음과 굴곡을 어떻게 스스로 소화해 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마음을 닦는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화백이나 글을 쓰는 작가 모두에게 공통된 일념이다. 그것은 오직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삶을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변환시키는 숭고한 노동이다.
3. 마음의 종적(蹤跡): 백월산의 고사가 건네는 깨우침의 본질
사람들에게 마음을 보여달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기 어렵다. 마음은 해부학적 장기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스스로 느끼는 ‘지각(Perception)’과 ‘의식’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없다, 하고 지나치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굳이 마음을 붙잡으려 애쓰지 않는다고 해서 해로울 것은, 없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다듬는 생각은 한 인간의 인품을 훨씬 가치 있게 만든다.
옛 수도승들이 하나의 화두를 앞에 두고 용맹정진하는 것은 결국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행위다. 자신의 마음자리를 알고, 그것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그 누구도 '마음을 찾는 과정'에 있었을 뿐, "내가 마음을 완전히 붙잡았다"고 단언한 사람은 없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 마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긍정적인 흐름과 따뜻한 유대를 유추해 내는 정신적 활동이다.
"마음자리가 밝으면 어두운, 방안에도 푸른 하늘이 있고, 생각 머리가 어두우면 백일천하라도 도깨비가 나타난다"는 옛말이 있다. 고요함을 찾는 일은 결국 '마음자리가 밝아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 조건이 갖춰질 때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청천(靑天)의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은 반드시 깊은 산속이나 적막한 서재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조용해야만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론가의 시선은 소란스러운 시장 통이나 소외된 노숙자들의 거친 삶 속에서도 유연하게 문장을 길어 올린다. 그것은 내면의 강력한 집중이 가져오는 소득이며, 환경을 탓하는 변명의 마음과는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
불가의 좋은 예가 있다. 신라 선덕여왕 시절, 백월산에서 수도하던 두 청년 '달달박박'과 '노힐부득'의 고사다. 밤중에 폭우 속을, 헤매던 한 처녀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을 때, 엄격한 계율과 경전을 앞세워 문을 굳게 닫아걸었던 달달박박의 길과, 늦은 밤 산속에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처녀를 안으로 들여 윗목에 재우고 이내 산고(産苦)를 느끼는 그녀를 위해 따뜻한 물을 데워 헌신적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준 노힐부득의 길.
결국 처녀로 화현(化現)했던 관음보살의 시험을 통과하여 먼저 득도한 것은 자비의 마음을 실천한 노힐부득이었다. 이 고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진리의 길은 고정된 경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마음으로 현실에 임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경전을 기계적으로 따르면 교조적인 안정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시대와 인간을 향해 자기만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옳은 집중'이야말로 깨우침의 진짜 본질이다. 목적지에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어떤 방법이 무조건 우선적이라고 재단하는 것은 평론가적 오만이다. 마음의 길도 이렇듯 정해진 궤도가 없으며, 스스로 찾아 자정(自淨)하는 그 행로 위에 비로소 가치 있는 길 현현한다.
4. 에필로그: 바람 길을 따라가는 표표(飄飄)한 사유
아직 그리 긴 시간은 아닐지라도, 내게 남은 생의 시간 동안 추하게 욕망을 쫓지 않고 담담하게 세상을 관조하며 살아가고 싶다. 바람이 부는 길을 따라 흩날리는 그 표표(飄飄)한 깃털처럼,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작지만, 소박한 마음의 밭을 성실히 갈아 의미의 씨앗을 심는 하루. 그것이 필자가 현재를 살아내는 유일한 방식이다.
필자가 끊임없이 글을 쓰는 행위는 어쩌면 내 삶이 지나온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길이자, 흔들리는 생의 기둥을 단단히 세우는 신성한 의식이다. 비록 세상에 거창하게 내세울 것도 없고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지만, 오로지 흰 종이와 글 앞에 겸손하게 순응할 뿐이다. 세상이 아무리 소란스럽게 변하고 내 삶의 궤적이 어디로 파생된다, 할지라도, 나는 나만의 개성과 지성으로 채워진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 독자의 선택을 받을 것이다.
세상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들판을 정직하게 응시하며 묵묵히 나만의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마음의 안정'이 아니겠는가. 소음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 여러분의 마음자리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으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