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섭 칼럼

[속도의 시대, 문학은 무엇을 구원하는가?]122

― 퓨전과 하이퍼 문학, 변형의 시대를 건너는 인간의 언어

이분희 취재본부장 2026.08.09 09:09

 

[필자] 이천 설봉공원 분수대에서

문학은 언제나 인간이 살아온 자리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삶이 변하면 문학의 표정도 달라지고,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면 문학의 문법 또한 새로운 길을 찾는다. 그러므로 문학의 역사는 문체의 변화만을 기록한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의식이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보여주는 정신사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원시의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농경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오는 동안 인간의 변화는 비교적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한 시대가 자신을 이해하고 다음 시대에 자리를 내어주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인공지능의 등장은 이러한 시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과거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졌던 변화가 불과 수십 년 안에 압축되어 인간의 일상으로 밀려들었다.

 

문제는 변화 그 자체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변화의 속도이다. 인간이 변화를 만들어내던 시대에서 변화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시대로 넘어왔다는 데 있다. 근대의 인간은 속도를 얻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지만, 현대의 인간은 자신이 만든 속도에 쫓기고 있다. 속도는 더이상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환경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문학은 중요한 질문 앞에 선다. 기술이 인간의 표현 능력을 무한히 확장한다면 문학 역시 그 확장에 따라 어디까지 변해야 하는가. 그리고 변할 수 있는 것과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퓨전 문학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한 징후다. 장르와 장르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시와 소설, 산문과 영상, 텍스트와 음악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든다. 과거에는 혼합이 예외적인 형식이었다면 이제는 혼합 자체가 하나의 미학적 방법이 되었다. 문학은 더이상 닫힌 방 안에서 완성되는 순수한 텍스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히 디지털 환경은 문학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종이에 인쇄된 문장은 한 방향으로 읽히지만,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의 선택에 따라 다른 경로를 열어놓는다. 독자는 더이상 완성된 작품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존재에만 머물지 않는다. 클릭하고 선택하고 이동하면서 작품의, 일부를 구성한다.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창작과 독서의 관계가 새롭게 재편되는 것이다.

하이퍼 문학의 등장은 문학이 공간의 예술에서 경로의 예술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의 이야기가 하나의 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길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이때 독자는 작품을 읽는 사람이면서 작품의 이동 경로를 결정하는 참여자가 된다. 문학은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이동하는 과정이 된다.

 

그러나 새로운 형식이 등장했다고 해서 문학의 본질까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형식은 변할 수 있지만, 문학이 인간의 내면을 다룬다는 사실까지 폐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기술이 인간의 외부를 빠르게 변화시킬수록 문학은 인간의 내부를 더욱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디지털 문학의 가장 큰 장점은 접근성과 상호작용성이다. 그러나 바로 그 장점이 문학의 약점으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쉽게 쓰고 쉽게 고치고 쉽게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창작의 문턱을 낮추지만, 동시에 사유의 시간을 짧게 만들 위험을 갖는다. 문학은 즉각적으로 만들어지는 정보와 다르다.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는 것이라면 문학은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가 가장 잃기 쉬운 것은 기다림이다. 클릭 한 번으로 정보를 얻고, 검색 한 번으로 답을 찾으며, 짧은 영상 하나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습관은 인간의 의식을 빠르게 만들지만, 반드시 깊게 만들지는 않는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역할을 해야 한다. 문학은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 속도를 멈추게 해야 한다.

문학의 깊이는 언어의 양에서 나오지 않는다. 한 문장이 오래 남는 것은 그 안에 인간의 경험과 사유와 감정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문학은 많은 말을 하는 문학이 아니라 독자가 읽은 뒤에도 말이 끝나지 않는 문학이다. 문장이 끝난 자리에 사유가 시작될 때 문학은 비로소 독자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퓨전과 하이퍼의 시대에 문학이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인간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은 무엇이든 연결할 수 있지만 무엇을 연결해야 하는가까지 결정해주지는 않는다. 인공지능은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문장이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스스로 책임질 수는 없다. 문학의 마지막 판단은 기술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과 감수성에 놓여야 한다.

문학에는 늘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작품을 쓰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작품이 독자의 마음속에서 숙성되는 시간이다. 디지털 시대는 첫 번째 시간을 놀랍도록 단축시켰지만 두 번째 시간까지 단축할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천천히 변하고, 상처는 천천히 아물며, 감동 역시 천천히 깊어진다.

그러므로 문학의 미래를 기술의 승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가가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얼마나 새롭게 발견하는가이다. 퓨전은 문학의 경계를 넓힐 수 있고 하이퍼텍스트는 문학의 길을 여러 갈래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길이 많아진다고 해서 목적지가 반드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학은 결국 인간의 영혼이 머무를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에게는 멈추어 자신을 돌아볼 공간이 필요하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 자신의 목소리는 무엇인지,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인지 묻는 일이 필요하다. 문학은 바로 그 질문을 대신 살아주는 정신의, 공간이다.

 

 

그래서 문학은 기술을 거부할 필요도 없고 기술에 굴복할 필요도 없다.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되 인간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종이에서 화면으로, 활자에서 하이퍼텍스트로, 단독 창작에서 상호작용적 창작으로 이동하는 것은 문학의 외형적 변화일 뿐이다. 그 모든 변화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오래된 질문이 놓여 있다.

문학의 영원성은 변하지 않는 형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형식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과 만나는 데서 비롯된다. 사랑, 고독, 죽음, 욕망, 상실, 자유, 구원이라는 문제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기술과 더 가까워질수록 이 질문들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결국, 문학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문학이 인간의 삶에서 멀어지고 단순한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면 아무리 화려한 기술을 입힌다 해도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 반대로 새로운 기술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더 깊이 탐색하고,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을 연결하며, 잊혀가는 감정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면 문학은 새로운 시대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문학의 영토는 넓어질 수 있다. 장르의 경계도 사라질 수 있고 작가와 독자의 구분도 달라질 수 있다. 종이책이 화면으로 옮겨가고 문장이 영상과 음악과 결합하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의 끝에서 문학이 인간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은 결국, 하나다.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다.

속도가 인간을 앞질러 달려가는 시대에 문학은 오히려 느려야 한다. 세상이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낼 때 문학은 침묵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모두가 쉽게 말할 때 문학은 한 문장을 오래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잃어갈 때 문학은 조용히 인간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영원성이다.

문학은 시대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질문을 끝내 놓지 않는 힘으로 영원해진다. 퓨전도 하이퍼도 결국 문학의 새로운 옷일 뿐이다. 옷은 바뀌지만, 인간의 영혼까지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문학의 미래를 묻는 일은 기술의 미래를 묻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앞으로도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다. 문학은 그 질문 앞에서 마지막까지 인간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2026. 08.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니스트· 이승섭]

[연꽃 습지]

 

이분희 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