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일별(一瞥)한다는 행위는 단순히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시인의 영혼에 새겨진 무늬와 그 생의 지문을 읽는 일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듯이, 시인이 선택한 시어의 빈도와 그 행간의 질감 속에는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신념의 궤적과 내밀한 상처가 투영될 수밖에 없다.
특히 시집이나 칼럼을 통해 나타나는 언어의 집요한 흐름을 추적해 보면, 우리는 한 지식인의 정신적인 추이와 그가 지향하는 궁극의 좌표를 가늠하게 된다.
문학은 결국 인간 정신이 토해내는 가장 정직한 고백의 형식이다.
시인이 제아무리 화려한 수사학으로 자신을 꾸미고, 치밀한 은유와 난해한 알레고리, 혹은 거창한 상징의 옷을 덧입혀 분칠할지라도, 그 본질의 심연에는 결국 '나'라는 존재의 날 것 그대로가 자리 잡고 있다.
포장지가 화려할수록 그 안의 진실은 더욱 간절한 법이며, 그 심리적 표현의 종착지는 결국 자기 고백이라는 투명한 거울 앞에 서게 된다.
2. 바람의 촉매에서 그리움의 본류로
나의 시적 편력의 초창기를 돌아본다.
그때의 나는 계절의 순환이나 바람의 결에 기대어 세상을 보았다.
바람이라는 매개체에 의지해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투사하며, 때로는 현재의 모순을 풍자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때의 바람은 단지 감정을 실어 나르는 촉매이자, 저편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월의 두께가 나이테처럼 몸에 새겨질수록, 내 사유의 본질을 요동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은 외부의 바람이 아니라 내면에서 솟구치는 ‘그리움’이었음을 깨닫는다.
점차 나이를 먹어가며 시와 수필, 그리고 냉철한 비평의 칼럼 속에서도 어김없이 배어 나오는 이 그리움의 정체를 마주할 때면, 나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짓곤 한다.
이 웃음은 허무의 표현이 아니라, 비로소 내 본질의 얼굴을 마주한 자의 겸허한 수긍이다.
나의 그리움은 결코 질펀한 세속의 추문이나 찰나의 가벼운 연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애(愛)의 본질을 향한 숭고한 갈구였다.
돌이켜보면 젊은 날의 나는 겉만 번지르한 허세와 근거 없는 허풍, 그리고 공허한 허영에 눈이 멀어 본질을 놓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사실은 여린 내면이 품었던 막연한 동경이자, 존재론적 결핍이 낳은 처절한 생존 증상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3. 결핍의 풍경 속에 피어난 꽃
愛가 결핍되어 홀로 앓던 날들을 기억한다.
그 시절,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마냥 어둡고 습했다.
하지만 그 어둠을 뚫고 지나와 다시 뒤돌아볼 때, 비로소 나는 그 고통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눈물겨운 이름으로 피어난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다.
愛가 결핍되어 앓던 날 풍경의 풍광이 마냥
어두워 다시 지나 돌아보면
그것이 눈물겨운 이름 아름다운 꽃이었네
저 멀리 돌아간다면 풍경화로 보듬는 향기
자아에 숨겨 혼자 펴보는 추억
바람난 그리움으로 오롯이 젖고 있네
- <내 그리움> 중에서 -
이 시의 행간을 흐르는 정조는 단순히 첫사랑이나 과거의 연인에 대한 미련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이 시를 연애시로만 읽는다면 그것은 나의 ‘그리움’이 가진 광활한 영토를 오해하는 것이다.
나의 그리움은 특정한 대상에 매몰된 행위가 아니었다.
실질적인 사랑의 열병에 몸을 던져 발을 담그기보다는, 상상의 벌판을 자유롭게 달리는 망아지처럼 나는 늘 이상(Ideal)이라는 안개 속에 머물기를 자처했다.
그리하여 나의 그리움은 때로는 사회적 불의를 향해 휘두르는 서슬 퍼런 비판의 칼날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이루지 못한 꿈들의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한 채 떠도는 이 아득한 상념들은, 토착화되지 못한 유목민의 정신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그리움의 영토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4. 비판적 지성과 고독의 유산
나의 어린 나날은 정도(正道)와 의무감, 그리고 의리라는 가치에 유달리 천착했다.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옳은 길을 가고자 했던 갈망은 너무도 컸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늘 교과서적인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적 기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나의 비판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조직과 사회 내에서 이단적인 사고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직장 생활과 사회적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나의 에고(Ego)는 늘 비판의 칼날을 번뜩이며 서 있었다.
현실의 비겁한 무기력과 안일한 침묵을 목도할 때마다, 나는 문학비평의 시선을 빌려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난도질했다.
그것은 올바른 '바라보기'가 거세된 시대에 대한 지식인의 통증이었다.
나는 침묵의 안락함보다는 실행의 고통을, 비겁한 순응보다는 예민한 비판의 기능을 선택했다.
이러한 기질은 나를 늘 주류의 중심이 아닌, 춥고 외로운 변방과 외곽에 머물게 했다.
비판의 대가는 처절한 고립과 고독이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엎드려 천수를 누리느니, 고개를 꼿꼿이 들고 만경창파의 거친 파도를 마주하는 고단함을 택하는 것, 그것이 나의 태생적 성질머리이자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5. 이루지 못한 꿈, 그리움의 증폭 장치
결국, 내가 도달하고자 했던 목표에 대한 끝없는 갈증이 나의 그리움의 진원지였다.
성공적인 결과물보다는 불만족과 미완의 시간이 더 길었기에, 나의 그리움은 그 빈공간을 채우기 위해 더욱 강력하게 증폭되었다.
내 글의 화려한 수사들은 결국 삶이라는 험로를 통과하며 얻은 영혼의 흉터를 가리기 위한, 혹은 그 흉터를 훈장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언어의 포장인 셈이다.
이제 나는 이성 간의 사랑을 갈구하는 차원을 넘어, 생의 길 위에서 놓쳐버린 아득한 가치들을 그리워한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떨까"라는 가느다란 유추의 문이 열릴 때, 상념의 길은 더욱 간절하게 열리고 나는 다시 그 길 위로 유배되기를 기꺼이 자처한다.
이 그리움의 동력은 늘 내 마음의 애간장을 끌어당기며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나를 인도한다.
무작정 그 뒤를 따라가며 불러보는 그리움의 표정은 언제나 선하고 따스함을 향해 있다.
감정은 늙지 않는다는 말처럼, 내 안의 소년은 여전히 그 아득함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이 애달픈 고독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인생이라는 거대한 물음표 앞에 서 있다.
6. 종착역은 없다: 아득함이라는 영원한 귀결
내 그리움의 최종 종착지는 결국 손에 잡히지 않는 '아득함' 그 자체이다.
나의 본질은 이 아득함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루지 못한 것이 많을수록,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가 깊을수록, 나의 시는 그리움이라는 비단 옷을 걸치고 더욱 애틋한 표정을 짓는다.
때로는 스스로를 보며 철없는 늙은 시인이라 실소(失笑)하기도 하지만, 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안개 속을 헤매는 행위 자체가 내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움의 종착역은 도달해야 할 지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살게 하고 쓰게 하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루지 못한 꿈들의 잔해 위에서, 나는 오늘도 그리움의 붓을 든다.
그 아득함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그곳을 향해 걷는 나의 발걸음은 고독할지언정 당당하다.
나의 그리움은 이제 개인의 정서를 넘어, 이 시대를 향한 가장 뜨거운 고백이자 비판이며, 동시에 구원이다.
2026.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시인 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