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시평

[비평] 영혼의 탁마(琢磨)와 유년의 망명

1. 시대의 한복판에 몸을 던지는 언어: 시의 존재론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6.06.02 18:45

 

[필자의 조락]

시는 스스로 걸어와 시인의 어깨에 앉는 영적 계시인가, 아니면 시인이 고독한 추적자가 되어 붙잡아야 하는 미지의 실체인가. 이 해묵은 질문은 시인의 실존적 운명과 그가 받아 적은 언어의 유기적 관계를 사유하게 만든다. 사제(司祭)가 속세와 구별되는 영적 개성으로 신성한 지위를 부여받듯, 시인 또한 남다른 직관과 예민한 촉수를 지닌 존재다. 이 천부적인 감수성이 시대의 열망과 결합할 때, 시인은 범부(凡夫)들은 미처 듣지 못하는 우주의 미세한 영혼을 노래하게 된다.

 

시인의 응시가 닿는 순간, 세상의 무모(無毛)한 사물들은 비로소 생명의 숨을 쉬기 시작한다. 시가 영감으로 찾아오는 순간과 시인이 사물로 걸어 들어가는 실천적 접점(接點)에서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시를 향한 집요한 열정은 시인이 남긴 미학적 궤적의 깊이와 언제나 비례한다.

물론 시의 성격은 시인 고유의 실존적 개성에서 비롯되지만, 위대한 시는 단순히 독자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의 수면 위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다. 시는 산문처럼 서사적 논리로 타협하지 않는다. 우주를 직관하고 시대를 예언하는 선지자적 기능을 수행할 때, 시의 에너지는 폭발적인 미학적 파괴력을 획득하며 독자의 심장을 일렁이게 만든다.

시인이 현실 안주에 평화롭다면 그의 언어는 장식적인 수사에 머물 뿐이다. 역사의 어둠 속에서 예언자의 길을 걸었던 선대 시인들의 궤적이 이를 증명한다. 만해 한용운이 그러했고, 이육사와 윤동주가 그러했다.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의 제단에 소설가보다 시인이 유독 많았던 이유는, 시야말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정신의 순수한 응축’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순수 정신의 연금술을 보여주는 이길선 시인의 정서적 여정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자 한다.

 

2. 존재의 피할 수 없는 궤적

 

인간이 이 지상에 던져진다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자 우주의 절대적 질서다. 우리는 탄생을 선택할 수도, 삶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임의로 조종할 수도 없다. 그저 주어진 실존의 조건 속에서 슬픔과 기쁨, 생성과 추락의 번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일생이라는 무늬를 그려나갈 뿐이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앞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거나, 혹은 거대한 타의의 흐름에 실려 가면서도 끝내 자기 안의 중심을 지켜내는 고독한 여정이다. 어느 쪽이든 삶의 본질은 서글프고 고달픈 법이며, 인생은 늘 상반된 감정들을 교차시키며 우리를 시험한다. 이길선 시인은 이 고달픈 생의 교차로에서 도망치지 않고, 인간 실존의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3. 현실의 아수라를 건너는 미학적 환치

 

이길선 시인에게 '오늘'이라는 공간은 결코 다정하지 않다. 거칠고 황량한 삶의 현장이자, 신산(辛酸)한 아픔과 한계가 줄지어 다가오는 가혹한 시공간이다. 이러한 현실의 아수라 속에서 자아를 꺾지 않고 곧추세우는 일은 지난(至難)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시인은 비극적 현실을 그대로 모방하는 대신, 그것을 미감(美感)으로 환치하는 예술적 기교를 통해 상상력의 영토로 탈출을 감행한다. 역경과 고난을 역설적인 아름다움의 창(窗)으로 바꾸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 획득한 자유 정신의 승리다.

 

거친 숨 몰아쉬며 하늘을 향한 긴 코에서내뿜는 독기 심호흡과 함께 벗어던진 몸체는시뻘건 노기가 들끓고 있다.

 

— <난로> 전문

 

시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내면이 완벽하게 결합하는 화학적 연금술이다. 시인은 비유와 역설, 은유와 직유라는 장치를 가동하여 대상의 속성을 전복시킨다. 이 시에서 ‘난로’는 더 이상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주체적 자아로 환치된다. 난로가 내뿜는 ‘거친 숨’, ‘독기’, ‘시뻘건 노기’는 부조리하고 거친 세상을 향한 시인의 뜨거운 분노이자 결연한 거부의 몸짓이다. 사물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육화(肉化)하는 시인의 시선이 날카롭다.

 

지금 정지된 아라비아 숫자전설의 손짓이 안개처럼 흐르는동그란 거울을 닦고 있다.그 싱싱한 빛을 위해 닦고 있다.

 

— <갈대> 전문

 

시간마저 정지된 듯한 절망적 풍경 속에서, 화자는 묵묵히 거울을 닦고 있다. 그 둥근 거울 속에는 고독하게 자아를 응시하는 현대적 나르시스의 초상이 비친다. 이 슬픔은 단순한 나약함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처절한 성찰이자 고뇌다.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눈이 있기에 이 방황은 미학적 가치를 지닌다. 이길선 시인은 안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쉽게 답을 찾지 못하고 갈증을 느끼지만, ‘그 싱싱한 빛을 위해 닦고 있다’는 숭고한 신념을 잃지 않는다. 닦고 또 닦는 행위를 통해 황폐한 현실에 희망의 씨앗을 심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벌어진 알밤 터지는 소리와 할머니 동화는몇 소절이나 부풀어 올라 소소히 꿈으로 여물었는데고향 땅 멀리서 생각의 노를 저으면 슬픔인 듯 기쁨인 듯뻐꾸기 울음소리가 마음을 휘젓고 있다.

 

— <고향 그리움> 전문

 

4. 유년으로의 망명과 영원한 현재

 

문학철학자 한스 마이어호프는 현대인의 시간적 조망이 오직 '영원한 현재(eternal now)'로 축소되었다고 말했다. 서정시의 시제 또한 언제나 현재라는 시간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 시란 본질적으로 사유의 서사적 나열이 아니라 감정의 순수한 '응축(凝縮)'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단절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교감하며 때로는 신비로운 모호성(ambiguity)을 획득한다. 과거의 기억은 오늘이라는 시간과 연결되어 애잔한 향수를 자극한다. 현실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시인이 원초적 공간인 고향과 육친의 정감을 그리워하는 것은 필연적인 정신적 귀착이다.

 

묵었던 세월의 때가 밀리고그 안에서 굴렁쇠 굴러가는소리가 가벼이 소달구지 실려온다

 

— <창가> 전문

 

이길선 시인의 시적 정서는 유년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양상을 띤다. 시인이 어른이 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자꾸만 어린 날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문학적으로는 '체험의 순수화' 혹은 '사유의 집중'이라 부를 수 있다. 현실의 때 묻은 다양성에서 벗어나 유년의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리는 것은, 자아의 순수성을 끝내 지켜내겠다는 거룩한 갈망이다. 이 유년의 기억들은 시인의 지친 영혼을 적시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퍼내도 퍼내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감로수(甘露水) 같은 추억은, 척박한 생의 표면에 윤기를 더하는 강력한 활력소가 된다.

 

5. 에필로그: 맑은 샘물 같은 청량한 미학

 

정갈하고 깨끗한 시를 읽는 것은 독자에게 커다란 축복이다. 세속의 탐욕이 없는 순정무구한 영혼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깊은 감동을 안게 된다. 장미 향을 맡으면 내면이 장미로 피어나고, 푸른 하늘을 담으면 영혼이 푸른 그리움으로 물드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심리다. 이길선 시인의 시가 지닌 투명함과 소박함은 바로 이 깨끗한 정신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것이다.

탁한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공간에서, 그의 시심(詩心)은 가슴을 적시는 산골짜기의 물소리처럼 청량하게 울려 퍼진다. 이 맑은 음률 속에서 우리 문학은 공존의 가치를 깨닫고, 사유의 넓이와 깊이에 도달하는 아름다운 풍경화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길선 시인만이 가진 독보적인 미학적 특색이다. 한 편의 시 앞에서 우리가 숙연해질 수 있는 것은 언어의 탄력이 삶의 비극을 견뎌낼 만큼 단단하기 때문이다.

 

이길선의 시는 단순히 흘러간 과거의 추억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의 정신이 토해내는 생생한 이미지이며, 척박한 현실 위에서 새로운 언어적 탄력을 끊임없이 생성해 내는 미학적 원동력이다. 그의 맑은 언어들이 앞으로도 우리 문단의 황무지를 적시는 귀한 샘물이 되기를 기대하며 비평을 맺는다.

 

2026.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이승섭 베스트 시평집 25위]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