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시평

휴머니스트: 숫자의 폭력과 이광수의 고독

프롤로그 : 우주의 소멸과 산술적 정의의 기만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6.07.06 18:51

 

[필자]

 

마이클 센델이 제기한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는 잔인한 사고 실험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가 질주한다.

선로를 바꾸면 5명의 인부를 살리고 1명의 인부를 희생시킨다.

당신은 레일 변환기를 당길 것인가.

공리주의적 가치관과 집단의 도덕률은 주저 없이 '5명'의 손을 들어준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합리적 '정의'로 포장한다.

하지만 묻고 싶다.

희생당한 1명에게 우주는 어떤 의미인가.

단 한 명의 개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가 품고 있던 우주 전체의 소멸을 뜻한다.

다수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1명의 우주를 지워버리는 폭력.

우리는 이 산술적 정의의 기만을 직시해야 한다.

 

1: 다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시스템의 폭력

 

1. 희생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사회는 5명을 선택한 행위를 의롭다 칭송한다.

하지만 희생된 1명이 인류의 지도를 바꿀 아인슈타인이라면, 혹은 시대를 위로할 위대한 예술가라면 집단의 계산은 정당한가.

우둔한 5명과 특수한 1명을 동일한 무게로 저울질할 수 있는가.

사물과 인간의 가치에는 늘 두 가지 이상의 층위가 존재한다.

표면적 리듬(Rhythmical)에 휩쓸려 5명을 선택하는 사회적 기류는 국가 미래의 생산적 가치라는 엄격한 잣대 앞에서는 치명적인 오답일 수 있다.

2. 책임지지 않는 사회의 위선 현대 자율주행 자동차의 사고 알고리즘 역시 이 딜레마의 연장선에 있다.

정치인과 언론 매체는 다수를 살리는 선택의 당위성을 선전한다.

그러나 다수를 위해 날벼락을 맞은 1명의 슬픔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1명의 개인적 아픔은 다수의 생존이라는 거대한 서사 앞에 철저히 묵살된다.

이것이 집단이 지닌 도덕률의 서늘한 이면이다. ]

 

2: 시대의 선로 위에 내던져진 고독한 사색가

 

1. 영웅을 강요받은 유약한 지식인이 참혹한 딜레마를 한국 문학사의 가장 아픈 손가락, 춘원 이광수의 삶에 대입해 보자. 딸 이정화 박사의 인터뷰와 그의 수필 『인생의 향기』를 돌아보면, 춘원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는 온갖 시련의 늪을 건너오며 형성된 '유약한 성품의 사색가'였다. 활달하고 과감한 성격을 지닌 아내 허영숙의 경제적, 심리적 보호 아래 안온하게 글을 쓰고자 했던 휴머니스트였다.

2. 사상과 투쟁의 괴리 춘원의 정신적 기저는 도산 안창호,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의 생명 사상에 맞닿아 있었다.

그는 명상을 통해 글로 사상을 정리하는 작가였지, 피를 흘리며 선봉에 서는 투쟁의 영웅이 아니었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비극적 선로는 그에게 '순교자'라는 영웅적 궤도를 강요했다. 1919년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며 옳은 길을 알았음에도, 상해 임시정부의 투쟁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귀국을 택한 것은 그의 기질적 한계이자 필연이었다.

 

3: 레일 변환기를 당긴 자의 비극, 수양동우회 사건

 

1. 41명을 위한 1명의 자발적 희생,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은 이광수 삶의 가장 극적인 트롤리 딜레마였다. 41명의 동지가 일제에 체포될 절체절명의 위기.

이광수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레일 변환기를 당겼다.

'친일'이라는 파멸의 선로로 자신의 몸을 던진 것이다. 41명의 다수를 살리기 위해 1명(자신)을 희생시킨 철저한 공리주의적 결단이었다.

2. 대중의 배신과 고립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동지들을 온전히 구제하지도 못한 채, 그 자신만 외로운 선택의 책임을 떠안았다.

대중은 41명을 살리려 했던 그의 고뇌를 읽지 않았다.

오직 친일이라는 결과의 값, 만을 두고 비난의 화살을 쏟아부었다. 5명을 살리기 위해 레일 변환기를 당긴 자를 살인자라 손가락질하는 대중 심리의 모순이 이광수에게 정확히 꽂힌 것이다.

 

4: 허영숙의 선택과 이광수의 대비: 강인함과 유약함의 변증법

 

부인 허영숙의 삶은 춘원의 유약함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하는 거울이다.

일제 치하를 지나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끌려갈 위기에서 허영숙은 아들 영근을 지키기 위한 강인한 결단을 내린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적극적으로 타협하고 투쟁했던 아내의 모습은, 철저히 내면으로 침잠했던 남편 이광수의 성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허영숙이 생존을 위해 현실의 레일 변환기를 힘차게 당긴 '투사'였다면, 이광수는 레일 위에서 기차가 다가오기를 고스란히 기다려야만 했던 '슬픔의 작가'였다.

그의 기회주의적 친일 행적 이면에는, 이처럼 가혹한 시대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던 한 개인의 처절한 유약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 평론가의 시선으로 딜레마를 다시 쓰다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트롤리의 고민을 거론해야 한다.

사회가 5명을 선택하는 것을 당연시할 때, 평론가의 시선은 마땅히 짓밟힌 1명에게 향해야 한다.

다수의 가치만큼이나 소수의 가치도 존엄하다.

이광수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거대한 폭력적 시대 앞에서 한 명의 유약한 지식인이 내린 선택을, 우리는 안전한 현재의 자리에서 얼마나 정당하게 재단할 수 있는가.

다수를 위한 희생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의 개인적인 우주를 쉽게 지워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사물과 역사에는 늘 이면이 존재한다.

정답을 강요하는 사회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단 한 명의 고독한 행간을 읽어내는 것.

그것이 딜레마를 마주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2026. 07.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노을]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