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섭 칼럼

『문화비평 에세이』 [비움의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는 문학]

― 채움과 비움, 창작의 배고픔에 관한 사유

이분희 취재본부장 2026.08.13 10:48

 

[필자]

문학의 종점은 어디까지일까.

나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 앞에서 자주 멈추곤 했다.

문학에 시작은 있을지언정 과연 끝이 있을까.

한 편의 시를 완성하고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 문학은 끝나는 것인가.

아니면 한 작품이 끝나는 자리에서 또 다른 문장이 시작되고, 한 시대의 문학이 저물어가는 자리에서 새로운 문학의 씨앗이 다시 움트는 것인가.

돌이켜보면 인간의 삶 자체가 비움과 채움의 끊임없는 반복이었다.

배고픔은 채움을 요구하고, 채움은 다시 비움을 낳는다.

계절도 그러하고 자연도 그러하며 인간의 정신 또한 그러하다.

꽃은 피고 지며, 잎은 돋아나고 떨어진다.

강물은 흘러가고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물이 흐른다.

자연은 무엇인가를 영원히 움켜쥐지 않는다.

생성은 소멸을 품고 있고, 소멸은 다시 생성의 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문학도 자연의 한 부분일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를 비우고 다시 채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세상을 바라보고 경험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언어로 채운다.

그러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지나친 설명을 버리고, 불필요한 수사를 버리고, 자기 과시를 버리고, 때로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문장까지 버려야 한다.

그렇게 비워낸 자리에서 뜻밖의 문장이 찾아온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를 텅 빈 것으로 말하면서도 그 비어 있음이 결코 무능한 공백이 아님을 보여준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수 있고, 비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문학에서 비움은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를 위한 가장 적극적인 상태다.

가득 찬 그릇에는 더 이상 물을 담을 수 없다.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기 어렵고, 자신의 문장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작가에게는 새로운 문장이 찾아오기 어렵다.

창작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야 한다.

그래야 낯선 세계가 들어오고, 타인의 삶이 들어오며, 자연의 침묵과 인간의 고독이 들어온다.

따라서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비울 수 있는가에 있다.

그러나 비움은 채움을 전제로 한다.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비울 것도 없다.

삶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만이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결국 문학은 채움과 비움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판단하는 정신의, 과정이다.

여기에서 지혜가 필요하다.

부족할 때는 채워야 하지만 넘칠 때는 비워야 한다.

중요한 것은 채움의 양도 아니고 비움의 양도 아니다.

어느 순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차리는 판단이다.

이것이 곧 지혜다.

 

 

인간의 삶도 그렇다.

지나친 결핍은 인간을 무너뜨리지만 지나친 충족 역시 인간을 병들게 한다.

욕망은 언제나 ‘조금 더’를 요구한다.

그러나 자연은 ‘적정’을 요구한다.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욕망은 필요를 넘어 집착으로 변한다.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문장을 더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욕망이 지나치면 문장은 장식으로 무거워지고, 더 많은 이야기를 담겠다는 욕망이 지나치면 작품은 오히려 핵심을 잃는다.

많이 말하는 것이 반드시 깊은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문장을 덜어내는 일이 열 문장을 더 쓰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므로 좋은 문학은 채우는 기술 만큼 비우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창작자는 왜 계속 쓰는가.

나는 그 원인을 ‘배고픔’이라고 생각한다.

육체의 배고픔이 음식을 찾게 하듯 정신의 배고픔은 언어를 찾게 한다.

무엇인가를 알고 싶고, 보고 싶고, 표현하고 싶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작가를 책상 앞에 앉힌다.

작가에게 배고픔은 결핍이면서 동시에 창작의, 원동력인 것이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창작은 멈춘다.

더이상 궁금한 것이 없고, 더이상 발견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작가의 눈은 늙기 시작한다.

반대로 세상을 오래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낯선 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시인은 그래서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나뭇잎 하나에서 계절의 죽음을 보고, 오래된 담장 하나에서 인간의 시간을 읽으며, 한 사람의 침묵 속에서 말보다 깊은 사연을 발견해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다시 모르는 것을 발견하는 능력, 그것이, 상상력이다.

 

문학의 창조성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무에서 만들어내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에 가깝다.

같은 가을을 보면서도 누구는 낙엽을 보고 누구는 이별을 본다.

같은 바람을 맞으면서도 누구는 날씨의 변화를 느끼고 누구는 지나간 사랑의 흔적을 느낀다.

자연은 하나이지만 인간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

문학은 바로 그 차이에서 태어난다.

 

여기에서 칼 융의 무의식에 관한 사유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인간의 정신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만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 아래에는 기억과 경험, 욕망과 상처, 원형적인 이미지들이 깊은 층위를 이루며 존재한다.

창작자는 때때로 그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그곳은 어둡다.

그러나 그 어둠은 공허한 어둠이 아니다.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수많은 이미지가 잠들어 있는 창조의, 심연이다.

나는 여기에서 노자가 말한 깊고도 텅 빈 도의 이미지와 융이 말한 무의식의 심층 사이에 하나의 흥미로운 접점을 발견한다.

둘 모두 표면에 드러난 것보다 보이지 않는 깊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창작자는 그 깊이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건져 올려 다시 언어의 세계로 가져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잊음’도 필요하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창작에는 잊는 능력도 필요하다.

지나간 경험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공간이 사라진다.

기억이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면 망각은 정신에 새로운 방을 만들어준다.

잊는다는 것은 없애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오래된 것을 깊은 곳에 내려놓는 일이다.

그것이 무의식이라는 토양 속에서 다시 발효되고 변형되어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작에서 비움은 단순한 삭제가 아니다.

그것은 변형을 위한 숙성이다.

한 편의 시를 쓰고 난 뒤 찾아오는 공허함도 어쩌면 같은 의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쏟아낸 것 같은 순간 작가는 빈 그릇이 된다.

그러나 그 빈 그릇이야말로 다음 작품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나는 한때 이런 생각을 시로 표현한 적이 있다.

 

“시를 관조하며 밖으로 내보낸 뒤
빈 배에 출렁이는 뱃살이 시원하여
밀물로 다가온 파문의 고요 앞에
Ego가 흔들린다.”

 

무언가를 떠나보낸 뒤 찾아오는 허전함은 반드시 상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것이 들어오기 위한 공간일 수 있다.

바다는 파도를 밀어내면서 동시에 새로운 파도를 받아들인다.

인간의 마음도 그렇다.

하나의 생각을 떠나보낼 때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고,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할 때 다음 작품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래서 창작자는 완성에 만족하면서도 완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작품을 끝냈다는 것은 문학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다작’에 대한 문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많이 쓴다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인가.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이 쓰는 것 자체를 부정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생산량이 아니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정신의 움직임이 들어 있는가이다.

누군가는 평생 몇 편의 작품만 남기지만 그 몇 편이 문학사에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다.

또 누군가는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기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계속 만들어낼 수 있다.

다작과 과작을 단순한 숫자로 구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작자의 생산성은 공장의 생산량과 다르다.

예술은 정신의 노동이며, 때로는 집중과 열정이 거의 광기에 가까운 상태로 작동하기도 한다.

창작에 몰입한 사람은 시간의 감각을 잃고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써 내려간다.

나는 그러한 상태를 일종의 ‘신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신명은 자기 파괴적인 광기와는 다르다.

창작의 신명은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확장시키는 힘이어야 한다.

많이 쓰되 자신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생산하되 작품의 질을 놓치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다.

결국 문제는 ‘얼마나 많이 쓰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쓰는가’이다.

 

문학은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한 문장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수천 문장보다 강하다.

반대로 수많은 문장을 쏟아냈지만 아무도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 양은 문학적 가치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노력의 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

천재적인 상상력도 노동을 만나지 않으면 작품이 되지 못한다.

영감은 찾아오지만, 작품은 만들어야 한다.

영감은 순간이지만 문학은 지속적인 수련의 결과다.

결국, 창작자는 자신의 배고픔을 매일의 노동으로 바꾸어야 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때때로 내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세상을 채우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를 비우는 일이었다.

한 문장을 쓰면 내 안에 있던 생각 하나가 밖으로 나온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면 마음속에 쌓여 있던 감정 하나가 정리된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또 다른 질문이 들어온다.

그렇게 문학은 나를 비우고 다시 나를 채운다.

 

문학의 종점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질문이 끝나지 않는 한 상상도 끝나지 않는다.

상상이 끝나지 않는 한 문학 역시 끝날 수 없다.

시인은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신을 갱신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문장이 내일의 문장보다 반드시 낫다고 말할 수 없듯이,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학은 종점이 아니라 순환이다.

채우고 비우고, 쓰고 버리고, 기억하고 잊으며, 멈추었다가 다시 출발한다.

자연의 계절이 그러하듯 문학에도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다.

어떤 때는 문장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고 어떤 때는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그러나 침묵의 계절 역시 창작의 일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가 자라고 있듯이 아무것도 쓰지 않는 시간에도 정신은 다음 문장을 준비한다.

따라서 비움은 문학의 죽음이 아니다.

비움은 다음 문학을 위한 탄생의 자리다.

마지막으로 나는 문학의 종점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문학의 종점은 마지막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궁금해하지 않는 순간이다.

질문을 잃어버리고,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언어에 만족하여 더 이상 자신을 비우지 않는 순간 문학은 그 자리에서 멈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작가가 여전히 배고프다면 문학은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향해 한 번 더 눈을 들고, 낯선 바람 하나에도 귀를 기울이며, 아직 만나지 못한 문장을 기다리는 한 문학에는 종점이 없다.

비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채움은 완성이 아니라 다음 비움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창작자는 그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사람이다.

나는 오늘도 쓰면서 나를 비운다.

그리고 비워낸 자리에서 다시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그것이 한 편의 시일 수도 있고, 한 문장의 사유일 수도 있으며,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어떤 감정일 수도 있다.

문학은 결국 그 기다림에서 태어난다.

배고픔이 채움을 부르고, 채움이 비움을 부르며, 비움이 다시 새로운 배고픔을 만들어내는 것.

 

그 끝없는 순환의 한가운데에서 시인은 오늘도 자신의 빈 그릇을 들고 세상을 바라본다.

아마 문학의 종점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문학의 종점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다.]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향해 열려 있는 한, 비워진 자리마다 새로운 문장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안그런가?

 

2026.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연변 윤동주 제막식에서]

 

이분희 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