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규격화된 삶을 거부하는 인간의 기질과 상상의 출발점
이 대지를 딛고 살아가는 인간은 저마다 고유한 삶의 궤적을 그린다. 개인의 성품과 기질, 그리고 환경적 배경에 따라 삶의 모양새는 저마다의 특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통제된 시스템이나 하나의 규격화된 틀에 맞춰 모든 인간이 일률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의 의식은 고정된 고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유체(流體)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 자라면서 마주하는 성품의 도야, 내면화된 체득, 그리고 온몸으로 부딪치며 겪어낸 직접적인 체험이 결합할 때, 그 영혼이 뿜어내는 상상(想像)의 질과 소유의 크기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라. 어떤 이는 매일 밤 꿈속의 화려한 르네상스를 그리며 이상향을 쫓아 부유하고, 어떤 이는 준엄한 뜻을 세운 뒤 어떤 풍파에도 굽히지 않고 현실의 최선에 도달하고자 발을 붙인다. 또 어떤 이는 시공간을 초월한 상상의 나래를 펴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색한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삶이 표출되는 까닭은, 꿈과 상상이라는 영역이 수학 공식처럼 단 하나의 값으로 산출되는 일정치(一定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경과 배경, 타고난 기질이 복합적으로 가미되면서 매 순간 팽창하고 수축하는 동적인 에너지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가지는 체험과 체득의 범주에는 저마다의 한계령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태생적으로 소심하거나 방어적인 사람은 행동에 수반하는 영역이 좁을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상상의 범주 역시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심리적 경계선 안에서 사고를 진정시키는 명확한 한계를 드러낸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우주가 있고, 어른에게는 어른의 삶이 투영된 꿈과 상상이 존재한다. 결국 사람의 상상력은 자신이 처한 현실적 환경에 끊임없이 자기를 연결하려는 본능적인 회귀 경향을 지니며, 그 치열한 연결의 끝에서 비로소 '딱 자기 존재의 크기만큼'의 상상의 이름이 탄생하는 법이다.
2. 예술의 생명력과 의식의 비약(飛躍)이 가지는 묘미
이러한 상상의 원리를 '예술(藝術)'이라는 거대하고도 숭고한 명제에 대입해 본다면, 상상력이라는 인자는 표현하는 당사자의 작품이 지니는 구조적 무게 및 예술적 가치와 직결된다. 만약 예술가가 상상의 고삐를 쥐지 못한 채 현실의 규격과 평범성이라는 타성에 안주해 버린다면, 그가 내놓는 작품 역시 식상한 모방과 재현의 굴레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예술이라는 용광로를 거쳐 표출된 작품에 저마다 고유하고 독특한 개성이 용해되어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단순한 사물이 아닌, 스스로 숨을 쉬고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세상에는 객관적인 기준에서 얼굴이 수려하고 예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중의 시선에서 다소 외면받는 투박한 얼굴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모든 얼굴이 저마다의 내면을 반영하는 생생한 '생명의 표정'을 짓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히 우열로 나눌 수 없다. 그 자체로 독창적인 개성에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관건은 작가가 현실의 도식에서 벗어나 의식의 지평을 얼마나 과감하게 확장할 수 있는가, 즉 '비약(飛躍)'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필자가 오랜 세월 사유하고 고찰해 온 상상의 진정한 묘미는 바로 이 대담한 비약이 가져오는 짜릿한 파격에 있다.
여기서 비약이란 단순히 공상의 크기를 키우는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이 무한의 영역으로 진전할 수 있도록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는 일이며, 그 길을 통해 타인의 삶과 시대의 아픔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동화되는 '추체험(追體驗)의 인자'들을 내면화한다는 숭고한 뜻을 품는다. 이러한 의식의 비약이 확고한 원인으로 작용할 때, 예술의 표정은 비로소 박제된 과거에서 벗어나 가장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상태로 꾸며진다. 반대로 대담한 비약이 거세된 예술은 그 가치가 급격히 감소할 수밖에 없으며, 타성에 젖은 의식을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재촉하는 것 자체가 예술가가 지녀야 할 마땅한 덕목이자 숙명일 것이다.
3. 자연이라는 거대 예술과 상상의 자유로운 권리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상에는 인간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예술로 구성된 대자연이 존재한다. 인간 또한 그 거대한 대자연의 미미한 일부분에 불과하기에, 본질적인 존재의 층위에서 우열을 따지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고 이를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그 행위 자체에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거기에는 어떠한 정신적 부가가치도, 창조적 더하기를 할 수 있는 흥미도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상상력이 거세된 표현의 결과물에서는 가치(Value)라는 숭고한 개념 자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예술은 단순히 가치를 논하는 관념의 유희를 넘어, 인간의 상상과 꿈의 파편들을 어디까지 정밀하게 조립하고 구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끝을 보는 치열한 끝장 보기다. 그렇기에 입체주의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추상화는 설령 액자를 뒤집어서 거꾸로 전시한다 할지라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뒤틀린 시공간 속에서 상상의 그물은 여전히 촘촘하게 펼쳐지며, 관객의 뇌리에 무엇인가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와 해석을 생산해 내는 일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선생의 작품 또한 훌륭한 예시다. 무수히 번쩍이는 TV 화면들이 무질서한 듯하면서도 정교한 전자기적 연결 고리를 이룰 때, 관객이 도달하게 되는 종착점은 다름 아닌 '상상의 자유로운 구사'가 주는 해방감이다. 만약 이처럼 상상의 자유로운 추출과 전위적인 시도가 보장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인류에게 피카소나 백남준 같은 혁명적인 예술가들이 필요했겠는가 파고들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은 상상의 자유로운 의식과 권리를 확보하면 확보할수록, 고정된 정답을 강요하지 않고 독자에게 무한한 사유의 여지를 남겨주는 위대한 작품으로 영원히 추앙받게 된다.
4. 타성의 성벽을 허무는 자아 혁명과 실천적 지혜
그러나 서글프게도 현실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을 옥누르는 사회적 강박과 내면의 불안을 풀어내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는 '타성의 성(城)'을 견고하게 쌓아 올린 뒤, 그 어두운 요새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다. 미지의 세계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모험을 포기한 채 오직 기득권과 관습을 지키는 수성(守城)의 주인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이들이 예술가라는 영예로운 칭호로부터 멀어지고, 정신적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가장 안타까운 이유다.
흥미로운 점은, 철저한 이성과 증명의 영역에 서 있는 과학자나 철학자, 심지어 극도의 논리성을 요구하는 수학자조차도 본질적인 도약의 순간에는 예술가적 기질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인 과학적 발견이나 패러다임의 전환은 언제나 기존의 논리를 뛰어넘는 대담한 상상력이 먼저 가설로 세워지고, 이를 현실에서 증명해 나가는 이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위대한 증명은 곧 상상의 구체화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일상에서는 예술이 오직 특정한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선을 그으며 사유하는 폐쇄적인 태도를 흔히 볼 수 있다. 문을 걸어 잠근 성주는 결코 영토를 넓히는 개선(凱旋)의 장수가 될 수 없다. 누구나 자신만의 방어 기제와 관습의 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해답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치열한 곳에 있다. 그 성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혁명의 서슬 퍼런 칼날을 타인이 아닌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는 '치열성(激烈性)'을 확보하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부정하고 깨부수는 자아 혁명을 통해 성 밖으로 걸어 나와 자유롭게 유영하는 주인공이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윤택한 문화의 진정한 향수자이자 주체자가 될 수 있다.
바다에 사는 주꾸미는 어부들이 쳐놓은 빈 소라껍질을 발견하면 그 어둡고 좁은 공간을 안전한 피난처로 착각하여 제 발로 기어 들어간다. 껍질 속 안락함에 안주하는 그 '맹목적인 타성' 때문에 주꾸미는 결국 어부의 손에 잡혀 파멸을 맞이한다. 이 주꾸미의 운명은 우리에게 거대한 경종을 울린다. 인간 역시 매너리즘과 타성의 벽에 갇히는 순간 정신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끊임없는 생존과 진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과감한 '자기 부정(Self-negation)'의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약이란, 나태해진 나의 영혼을 향해 서슴없이 메스를 들이대는 정신적 혁명 행위이며, 이는 곧 완고한 타성의 벽을 허무는 일과 병진(竝進)하는 필연적 결과다. 상상은 자유를 자양분 삼아 스스로 길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자유의 복판에서 또 다른 미지의 길로 이어지는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다. 이것이야말로 개인의 예술혼을 윤택하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숭고한 성찰의 작업이다.
본인의 성에서 걸어 나와 과거의 고착된 모습을 지워내고 새로운 존재론적 의미를 찾아 나서는 일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듬는 자기도량(自己度量)의 발현이자 시대를 살아내는 지식인의 책무다.
현실의 거친 풍파 속에서, 정신의 가치와 상상의 가치는 단순히 관념에 머물지 않고 육신의 한계와 삶의 품격을 품어 안으며 드높인다. 정신적 사유와 육체적 실천이 서로 유기적으로 보완 작용을 하며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칠 때, 인간은 비로소 어떤 어둠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의 불을 켤 줄 아는 위대한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타성의 벽을 깨고 의식의 비약을 이루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이라는 여정에서 상상력의 끈을 결코 놓지 말아야 할 당위성이자, 영원히 탐구해야 할 꿈의 이상(理想)일 것이다.
2026. 05.
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