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면(栗面)에서 띄우는 공동체와 인간에 관한 현상학적 삼사(深思)
서론: 관계라는 비극적 조건과 '신(新)전쟁'의 시대
인간은 타자의 존재를 통해 비로소 스스로를 완성하는 미완의 존재다. 태어나는 순간 누군가의 체온과 손길에 의존해야만 생을 시작할 수 있고, 마지막 순간 역시 타인의 시선과 나눔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애는 언제나 관계의 연쇄이자 얽힘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 가장 지독한 상처와 치명적인 균열을 가져다주는 존재 역시 다른 누구 아닌 ‘사람’이다. 사랑을 가르쳐 준 이가 증오의 씨앗을 뿌리고, 신뢰를 건넨 손길이 배신의 단도를 품는다. 인간의 역사가 곧 관계의 역사이자 끊임없는 갈등의 투쟁사로 기록되어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래부터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적(敵)’으로 명명된 존재는 없었다. 낯선 이는 존재했을지언정, 그 낯섦이 곧 괴멸시켜야 할 타자는 아니었다. 서로 다른 생애주기와 세계관이 존재했을지언정, 차이가 곧 적대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문제의 시작은 ‘이해’의 조용한 정지(停止)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언어에 귀 기울이기보다 자신의 신념만을 절대화하는 순간, 인간은 대화라는 온화한 다리를 파괴하고 냉혹한 판관의 자리에 앉는다. 그 순간 이웃은 동반자에서 경쟁자로, 마침내 제거해야 할 적으로 전락하고 만다. 적대감이란 이처럼 거창한 이념의 대립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경청이 멈춰 선 지점, 그 소소하고 미세한 균열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인류의 역사는 적을 규정하고 배척하는 수단의 발달사이기도 했다. 야만의 시대에는 칼과 창이 상대를 겨누었고, 근대의 전쟁에서는 총구와 포탄이 생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사회가 직면한 전쟁은 그 어떤 고전적 폭력보다 조용하고 치명적이다. 물리적 지평을 마주하지 않고도 손가락 하나로 타인의 존엄을 해체할 수 있으며, 단 한 줄의 익명 언어로 한 인간이 평생 쌓아 올린 명예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문명의 상공에서 손가락은 칼날이 되고,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는 비수가 되어 공동체의 허파를 찌른다. 타인을 향해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차가운 칼날을 품고 살아가는 시대. 이것이야말로 현대문명이 직면한 가장 비극적인 초상이다.
과거의 싸움에는 적어도 정당한 수순과 서사가 존재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연유를 묻고, 명분을 겨루며, 마침내 화해로 다가설 수 있는 여백이라도 남겨 두었다. 그러나 가속화된 현대 사회는 변명할 기회조차 박탈한다. 맥락을 상실한 기호와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가짜 소문이 진실의 속도를 앞지르고, 오해의 왜곡은 순식간에 공동체의 영혼을 점령한다. 단 몇 시간 만에 한 개인의 삶이 파탄에 이르고,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사회적 신뢰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눈떠 마주하는 새로운 양상의 상시적 전쟁이다.
제1장: 소문의 지리학과 작은 공동체의 고밀도 충돌
이러한 상처와 적대의 풍경은 거대한 메트로폴리스나 여야가 맞서는 정치적 광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대와 연대의 공간이어야 할 작은 시골 마을과 농촌 공동체에서 그 골은 더욱 깊고 아프게 파고든다. 농촌과 같은 소규모 공동체는 사람의 수가 적은 만큼 관계의 밀도가 촘촘하고 서로의 생애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촘촘한 유대의 망(網)은 오해와 소문이 전이되는 가장 빠른 통로가 되기도 한다. 작고 밀폐된 사회일수록 왜곡된 정보는 순식간에 전파되고, 한번 새겨진 주홍글씨는 세월이 흘러도 쉽게 씻겨 나가지 않는다. 충돌의 거리가 가까운 만큼 상처의 깊이 또한 가혹할 정도로 깊어지는 것이다.
지방의 작은 마을, 가령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 율면(栗面)의 현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현대 사회 갈등의 구조적 아포리아(Aporia)가 그대로 condensed(축약)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마을의 터전을 지켜온 토박이 주민들은 자신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올린 삶의 궤적과 마을의 전통을 숭고하게 여긴다. 그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당연하고도 숭고한 보존의 욕망이다. 반면, 최근 새로운 꿈을 안고 귀농·귀촌하여 정착한 이들은 새로운 문화와 다각적인 시선으로 마을의 변화와 혁신을 기대한다. 이 역시 더 나은 삶의 공간을 가꾸고자 하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열망이다.
문제는 이 두 부류의 주민 중 어느 한쪽도 악의를 품거나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갈등의 진짜 원인은 '누가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살아온 시간의 결'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의 불통에 있다.
두 집단 모두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기호와 언어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과 다른 낯선 언어를 마주할 때 그것을 존중하기보다 오해하거나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본능적 경향을 가진다. 그리고 그 오해가 거듭 쌓일 때 마음에는 굳건한 벽이 들어서고, 마침내 그 담벽은 마을을 둘로 쪼개어 버린다.
제2장: 두 개의 시간, 하나의 숲 — 전통의 뿌리와 변화의 새순
오늘날 우리 사회 전체가 겪고 있는 온갖 양극화와 갈등의 뿌리 역시 이 율면의 작은 담벼락과 결코 다르지 않다. 정치적 이념의 대립, 지역 간의 균열, 세대 간의 단절 역시 결국 ‘자신의 가치관에는 무한히 관대하면서 타인의 사유에는 지극히 인색한’ 태도에서 출발한다. 현대인은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신의 주장을 쏟아내는 데 몰두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 비판하고 단죄하는 데 익숙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타자를 설득하거나 공존의 방식을 찾으려 하기보다, 상대를 제압하고 이겨야 할 '적'으로 규정하며 편을 가르는 거친 승패의 논리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러나 사유의 고찰을 거친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목소리의 크기가 결코 진실의 깊이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거세고 자극적인 고함은 야윈 진실의 침묵을 짓밟고 덮어버리기 십상이다.
본래 민주주의란 가장 큰 목소리를 낸 이가 전리품을 챙기는 약육강식의 제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이념과 상이한 가치관이 한 공간에서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가를 성찰하고 지혜를 모으는 고도의 철학적 틀이다. 법은 거친 감정의 범람을 자제시키기 위한 규범적 울타리이며, 제도 역시 권력자가 힘을 과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약자와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약속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사회적 현실은 어떠한가. 이성적 사유와 차분한 담론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오직 자극적인 감정과 선동만이 광장을 점령하고 있다. 논리는 단편화되고 구호는 포악해졌다. 타자의 맥락을 헤아리려는 노력보다 상대를 효율적으로 타격하고 깎아내리는 공격의 기술만이 발달한 사회—이것이 과연 지속 가능한 문명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비이성적 광기는 정치판을 넘어 가정과 학교, 그리고 우리네 마을 공동체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고 타자를 품어 안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그 어떤 완벽한 법과 제도도 무용지물이다. 구호나 제도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인간성(Humanity)의 회복이며, 법조문보다 먼저 숨 쉬어야 할 것은 인간 내부의 양심(Conscience)이다. 양심이 잠들어버린 사회에서 정의는 결코 오래 머물지 않으며, 오직 힘의 논리만이 판을 치게 된다.
제3장: 양심의 회복과 관계의 현상학
그렇다면 우리는 이 미증유의 대립과 갈등의 시대에 어디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하는가?
필자는 거창한 제도적 개혁이나 정치적 구호에 앞서, '인간의 순수한 마음과 양심'을 다시 돌아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이고 치유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인간의 따뜻한 체온과 진정성이다.
컴퓨터가 복잡한 수식을 계산할 수는 있으나 인간의 도덕적 양심을 대신할 수 없으며, AI가 무한한 정보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영혼을 울리는 따뜻한 눈빛과 손길을 대체할 수는 없다. 공동체를 재생시키는 근본적인 동력은 결국 '사람'이라는 원천에서 시작된다.
동양의 성현 공자(孔子)가 사람을 바르게 세우는 인(仁)의 교육을 나라를 바로 세우는 '백년대계(百年大計)'라 칭했던 까닭도, 서양의 소크라테스(Socrates)가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사유만이 정의로운 이성 사회를 만든다고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고전적 가르침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상실한 것은 지식의 부족이나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양심이자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따뜻한 공감 능력이다.
공동체의 최소 단위이자 출발점은 다름 아닌 가정(Home)이다. 부모가 서로를 깊이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사회에 나와서도 타인을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반대로 날 선 갈등과 분열, 타인에 대한 비난을 일상적으로 보며 자란 아이에게 세상을 관통하는 원리는 전쟁터의 법칙뿐일 것이다. 교육은 학교라는 제도권 건물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정의 식탁에서 나누는 따뜻한 대화, 부모가 이웃을 향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진정한 교육의 싹이 튼다.
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순수한 원리를 우리는 눈앞의 이익과 경쟁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다.
제4장: 율면(栗面)의 비전 — 뿌리와 새순이 이루는 건강한 숲
다시 필자가 살아가고 사랑하는 터전, 율면의 이야기로 돌아오고자 한다. 오랜 세월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일구며 자리를 지켜온 주민들은 그 자체로 대체 불가능한 공동체의 귀중한 자산이자 거목의 '뿌리'이다. 한편, 새로운 비전과 감각을 품고 들어온 새 정착민들은 공동체에 새로운 생명력과 활력을 불어넣는 '새순'과 같다.
이 둘 사이에는 우열도, 옳고 그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적인 문제는 서로가 가진 가치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못하는 시선의 협소함에 있다.
건강한 생태계와 울창한 숲은 단 하나의 요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깊고 튼튼한 뿌리만 있고 푸른 새순이 돋아나지 않는 나무는 결국 고사하고 말며, 반대로 뿌리가 허약한 채 새순만 무성한 나무는 작은 폭풍우에도 뿌리째 뽑혀 나가고 만다.
공동체라는 이름의 숲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오래된 세월의 뿌리와 새로운 변화의 새순이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공존할 때, 비로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숲'을 이루게 된다.
필자는 우리의 율면이 바로 이러한 상생의 숲이 되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주민자치나 마을 공동체 사업 역시 단순한 물량적 예산 집행이나 시설 건립에 그쳐서는 안 된다. 주민자치의 참된 본질은 주민과 주민의 마음을 잇는 '공동체의 마음 다리(Bridge)'를 놓는 일이어야 한다. 갈등을 억지로 눌러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성숙한 대화와 소통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여백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마을의 진정한 발전은 화려한 보도블록이나 거대한 콘크리트 복합시설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시설을 짓고 번듯한 도로를 확충한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마음이 둘로 쪼개져 있다면 그 마을의 미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반면, 시설은 다소 허름하고 부족할지언정 주민들이 길가에서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신뢰가 살아 있다면 그곳에는 반드시 희망의 싹이 자라난다.
공동체의 참된 경쟁력은 시설의 규모가 아니라 ‘신뢰의 깊이’에서 나온다.
결론: 에필로그 —
가장 깊이 귀 기울이는 자가 주인이 되는 내일
정치와 사회적 삶의 본질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민주주의는 상대를 괴멸시키는 유능한 전쟁 기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이, 한 하늘 아래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차원 높은 삶의 지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현실은 여전히 자극적인 언사와 큰 목소리가 여론을 호도하고, 차분한 이성의 소리를 기만하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 여와 야, 보수와 진보, 토박이와 이주민을 막론하고 상대를 단지 적으로 규정하는 증오의 정치가 계속되는 한, 그 폐해는 결국 우리 자신과 후손들에게 돌아올 뿐이다. 정치는 승패를 다투는 치열한 게임이 아니며,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삶과 안녕을 책임지는 거룩한 천직(天職)이다. 그 출발점은 오직 상대방의 존재와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상호 존중'에 있다.
필자는 '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다. 인간이 모여 살아가는 한 갈등과 차이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갈등을 증오와 파괴의 폭력으로 키울 것인가, 아니면 대화와 상생의 계기로 승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의지적 선택에 달려 있다. 지혜로운 공동체는 갈등을 인위적으로 소멸시키는 곳이 아니라, 갈등이라는 진통을 통해 모순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깊은 성숙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아는 공동체다.
우리 민족과 사회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국난과 위기를 극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전쟁의 참혹한 폐허 위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고,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을 동시에 달성했다. 그 위대한 위기 극복의 동력은 타인을 향한 칼날 같은 증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절박하고 따뜻한 공동체적 연대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필자는 우리 가슴속에 그 위대한 연대의 DNA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단지 잊고 있었던 그 마음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할 뿐이다.
누군가를 타복하고 이기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며, '함께 따뜻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생의 가장 순수하고 엄숙한 목적이라는 진실을 기억해야 한다. 목소리를 높이는 고함꾼보다 귀를 낮추어 경청하는 파수꾼이 많아질 때, 공동체는 비로소 상처를 치유하고 진정한 평화를 회복할 것이다. 법과 규범은 사회의 외형을 유지할 수 있지만, 오직 인간의 양심만이 공동체의 영혼을 성장시킨다.
돌이켜보면 우리 개개인의 삶 역시 하나의 길고 고독한 여행이었다. 때로는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때로는 타인을 용서하며 눈물 흘리기도 했다. 무수한 인연이 맺어지고 풀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오만을 덜어내고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숙해 왔다.
결국 인생이란 승패의 전리품을 챙기는 기록이 아니라, 타자와 나누었던 따뜻한 '관계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 엄중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아직도 가장 크게 외치는 자가 이 마을과 사회의 주인인가?“
아니다. 이제 우리 공동체의 참된 주인은 가장 크게 고함치는 이가 아니라, 가장 깊고 낮게 타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상대를 이기려고 칼을 가는 이가 아니라,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내일의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한 사람의 따뜻한 진심이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을 울릴 때, 갈등은 비로소 화해로 승화되고, 대립은 눈부신 상생으로 변모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율면과 이 땅의 수많은 공동체는 하나의 거대한 희망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인간은 평생에 걸쳐 타인이라는 낯선 적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끝내 이겨내야 할 진짜 적은 타인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이름의 적이다.
거센 목소리는 허공의 바람을 흔들 수는 있을지언정, 타인의 깊은 마음까지 움직이지는 못한다.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참된 힘은 무력이나 예산이 아니라 오직 '신뢰'이며, 신뢰는 '이해'에서 태어나고, 이해는 타인을 향해 '귀를 낮추는 경청'에서 시작된다.
역사는 결코 가장 크게 소리 지른 이를 기억하지 않는다. 가장 깊은 침묵으로 타인의 아픔에 귀 기울였던 이를 기억한다. 그 조용한 한 사람이 죽어가는 공동체를 살려내고, 그 한 사람이 격랑의 시대를 바꾸며, 그 한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는 율면의 눈부신 내일을 만들어 갈 것이다.
경청의 낮음을 강조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6. 07.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리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