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문학은 삶의 표현인가, 정치의 시녀인가
본론 Ⅰ: 한국 문학과 정치사의 연대기적 궤적
1단계: 일제강점기 — 신념의 순절(殉節)과 학문주의의 위선
2단계: 1960~70년대 격랑기 — 참여와 순수의 이분법, 그리고 변종 기득권의 탄생
3단계: 현대 정치의 퇴행 — 곡학아세(曲學阿世)와 '내로남불'의 악순환
본론 Ⅱ: 현대 시 4인에 투영된 비평적 아우라(Aura)와 존재론적 성찰
⑴ 낮의 존재론: 시대의 어둠을 깨우는 노동과 실천 — 장승재의 〈낮의 의미〉
⑵ 기억의 고고학: 천 년 전의 햇살과 마주하는 의식 — 김우영의 〈출토, 창성사지〉
⑶ 굴욕의 정치학: 이념의 잣대로 재단당한 보복의 시대 — 기청의 〈보리 굴비〉
⑷ 순환의 철학: 공허의 길 위에서 피어나는 신생의 인연 — 박영하의 〈달음박질〉
결론: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거리 조정, 그리고 예술적 심미의 복원
1. 서론: 문학은 삶의 표현인가, 정치의 시녀인가?
"문학이 삶의 표현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가와 평론가들이 끊임없이 마주해 온 거대한 화두다. 예로부터 시인들은 사회의 지성인이자 시대를 깨우는 소금으로 추앙받았다. 국가적 위난이나 비극의 정점에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었고, 평화롭고 번영하는 시절에는 삶의 화려함과 인간애를 노래하는 가객(歌客)이 되었다.
그러나 문학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세계는 늘 순수하지만은 않다. 문학의 본질이 인간 정신의 구현이자 표현이라 할 때, 정치라는 인간 삶의 가장 거칠고 후진적인 영역은 언제나 문학의 훌륭한 소재인 동시에 파멸의 덫으로 작용해 왔다.
본 비평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정치와 결탁하고 변질되었는지를 엄밀하게 추적하는 데서 출발한다. 나아가, 정치에 오염된 우리 문단의 일그러진 지평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가치 중심을 잃지 않은 현대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문학이 회복해야 할 진정한 '아우라(Aura)'와 예술적 심미성이 무엇인지 규명하고자 한다.
2. 본론 Ⅰ: 한국 문학과 정치사의 연대기적 궤적
1단계: 일제강점기 — 신념의 순절(殉節)과 학문주의의 위선
한국 현대사에서 문학과 정치의 첫 번째 거대한 충돌은 민족의 생존이 걸려 있던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다. 이 시기 문학은 단순한 예술을 넘어 민족 정신을 사수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만해 한용운의 저항 정신과 이육사의 절창(絶唱) 속에는 단순한 개인의 감수성을 넘어, 민족애와 조국의 해방이라는 미래를 향한 예언자적 빛이 서려 있었다. 이들의 시는 지고지순한 가치로 승화되어 오늘날까지 우리 지성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빛나는 저항의 역사 뒤편에는 지식인의 뼈아픈 변절과 위선이 존재했다. 일제 말기, 육당 최남선을 독립선언서의 33인에 이어 34번째 인물로 포함하려 했을 때, 그는 "나는 학자로 남고 싶다"며 구차하게 뒤로 물러섰다. 이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나라가 없는데 학자는 무슨 학자냐"라며 통렬히 탄식했다.
이는 정치적 위기 앞에서 '학문주의' 혹은 '예술 지상주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 뒤로 숨어버린 지식인의 나약함과 위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시인에게 부여된 존경과 사랑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신념을 지켜내는 준엄한 도덕성에서 비롯됨을 역정(歷程)은 증명하고 있다.
2단계: 1960~70년대 격랑기 — 참여와 순수의 이분법, 그리고 변종 기득권의 탄생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1960~70년대 산업사회의 격랑 속으로 진입하면서 한국 문단은 커다란 구조적 왜곡을 겪게 된다. 이 시기는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참여문학(민중문학)' 계열과 예술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순수문학' 계열이 날카롭게 대립하던 때였다. 존 밀턴이 청교도 사상가로서 《아레오파기티카》를 통해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주장하고, 자신의 옳은 신념을 위해 군주제에 반대하며 공화제를 부르짖다 온갖 시련 끝에 《실낙원》이라는 마침표를 찍었듯, 이 시기 많은 문인 역시 신념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기의 숭고한 저항 정신이 세월이 흘러 권력화되면서 발생했다. 70년대 이후 민중 그룹을 표방했던 일부 문인들은 더 이상 작품의 문학적 예술성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쟁취한 도덕적 우위와 목청, 그리고 정치적 세력에 기대어 문단 내에 견고한 패거리 문화를 형성했다.
소수의 권력 집단이 다수의 순수한 문인들을 집어삼키는, 이른바 '백모'와 '고모' 등 원로 문인 중심의 카르텔은 경천동지할 수준의 문화적 특혜를 독점했다. 국가가 집을 지어주고 문학관을 건립해 주었으며,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들은 이들에게 석좌교수 자리를 헌납하느라 안달했다.
그 결과, 문단은 순수한 창작의 공간이 아니라 이권과 정치가 판치는 장마당으로 타락했다. 양심의 신호는 꺼졌고, 집단화된 모순 속에서 위선적인 여류 시인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는 등 문단의 도덕적 파산이 도래했다. 반면, 권력의 단맛에서 소외된 채 1956년 등단하여 시집 《청자 수병》을 펴냈던 작고 시인들의 가난과 가정사적 불행은 한국 문단이 짊어진 거대하고 아픈 상처로 남게 되었다.
3단계: 현대 정치의 퇴행 — 곡학아세(曲學阿世)와 '내로남불'의 악순환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랑을 지나, 2026년 현재에 이른 한국 정치는 누구나 공감하듯 가장 후진적인 퇴행을 반복하고 있다. 정치란 본래 공동체의 삶을 새롭게 만들고 갈등을 조정하는 고도의 기술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는 다수결이라는 숫자의 횡포 뒤에 숨어 자신들만의 '어천가'를 부르는 오만한 권력자들의 노랫가락에 취해 있다. 그들은 자신과 뜻이 다른 상대를 고립시키는 '패싱(Passing)'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며, 국가의 슬픔과 백성의 비참한 처지를 외면하고 있다.
더욱 참담한 것은 지식인들과 일부 문인들의 태도다. 공중파와 각종 매체에 기어 나와 얇은, 지식을 늘어놓는 자들은 그것이 날카로운 강평(講評)인지 저열한 논리(論理)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이분법적인 잣대로 상대를 재단한다. 자신들이 행하는 것이 빤히 눈에 보이는 이율배반, 즉 '내로남불'임을 알면서도 권력자의 입김에 나팔을 불어대며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다.
민초들과 자영업자들은 삶의 도처에서 아우성치고 있으며, 대학을 나와도 취업을, 하지 못해 부모 그늘, 아래 머무는 젊은이들, 혹은 밤거리를 헤매며 대리운전을 뛰는 29세 청년마저도 설 자리가 없어 타들어 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 비참한 빈부 격차와 시대적 고통 앞에서, 정당한 논평 대신 권력의 단물만을, 쫓는 지식인들의 파렴치한 담합은 민족사의 죄인으로 기록될 만큼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3. 본론 Ⅱ: 현대 시 4인에 투영된 비평적 아우라(Aura)와 존재론적 성찰
정치가 이처럼 타락하고 문단이 권력화될 때, 우리는 문학의 본질인 '아우라(Aura)'로 눈을 돌려야 한다. 아우라란 독특한 영적 분위기이자 시인만이 풍길 수 있는 고유한 개성의 문패다. 시인은 누가 시켜서 혹은 의무감 때문에 시를 쓰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좋아서"라는 자발적이고 순수한 열정이 시의 신(神)에게 헌신하는 업보가 될 때, 비로소 시는 시대를 위로하는 생명력을 얻는다. 여기 현실의 왜곡에 굴하지 않고 자기만의 아우라를 지켜낸 네 시인의 작품을 통해, 문학이 정치를 어떻게 비추고 정화할 수 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⑴ 낮의 존재론: 시대의 어둠을 깨우는 노동과 실천 — 장승재의 〈낮의 의미〉
시간의 경계를 쪼갤 때 낮과 밤은 순환의 고리이지만, 인간의 의식 속에서 낮은 '가시(可視)적인 세계'를 뜻한다. 장승재 시인은 현실이라는 낮의 세계를 회피하지 않고 가장 뜨겁고 치열하게 살아내야 함을 역설한다.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 눈을 뜨게 하는 낮은 밤보다 더 고마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낮이 끝나기 전에 더 움직이고 더 보도록 해야 한다.
낮은 부지런한 사람 낮은 곳에서도 제 할 일 하는 사람처럼 밝고 뜨거운 오늘의 해는 오늘을 뜨겁게 사는 사람들의 것우리는 낮을 더 깊게 고맙게 살아야 한다.— 장승재, 〈낮의 의미〉 중에서
시인이 예찬하는 '낮'은 게으른 자나 권력의 그늘에 숨은 자들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낮은 곳에서도 제 할 일 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공간이다. 눈을 뜨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며, 더 움직이고 더 보아야 한다는 단언적인 촉구는 평론가인 필자에게 지식인의 실천적 의무를 상기시킨다. 시인은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기만의 공고한 도덕적 성을 지키며,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뜨겁게 헌신하는 평범한 민초들의 삶이야말로 진짜 역사의 주인임을 나직 하지만, 강한 아우라로 설파하고 있다.
⑵ 기억의 고고학: 천 년 전의 햇살과 마주하는 의식 — 김우영의 〈출토, 창성사지〉
정치가 목전의 이익과 당리당략에 매몰되어 역사적 깊이를 상실할 때, 문학은 과거의 기억을 발굴하여 현재의 삶에 두께를 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수원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묵직한 토운(土音)의 음성으로 시대를 논했던 김우영 시인은 유적지의 발굴을 통해 인간사 기억의 푸른 무늬를 복원해 낸다.
발굴단이 조심스레 파헤쳐간 흙 속에는 돌멩이 속에는 기와 조각도 깨진 사기그릇도 잠자러 들어간 애벌레들도 있지만 잠에서 아웅 기지개하며 깨어난 천 년 전의 바람과 그때 그 가을 햇살도 보였다. 푸스스스 머리칼 털며 고개 든 생각도 나와 눈을 맞췄다
— 김우영, 〈출토, 창성사지〉 중에서
발굴단이 조심스레 파헤친 흙과 돌멩이 속에서 흘러나온 것은 단순한 기와 조각이나 깨진 그릇이 아니다. 그것은 '천 년 전의 바람'이자 '그때 그 가을 햇살'이며, 시인과 눈을 맞추는 '고개 든 생각'이다. 시인은 현재라는 시간의 웅덩이 속에서 과거의 숨소리를 찾아내며,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지닌 전인미답의 가치를 일깨운다. 정치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로 단장하려는 만용을 부릴 때, 문학은 이처럼 오래된 기억과의 눈 맞춤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유대감과 역사의 유구함을 복원해 내는 고고학적 임무를 수행한다.
⑶ 굴욕의 정치학: 이념의 잣대로 재단당한 보복의 시대 — 기청의 〈보리 굴비〉
문학이 정치를 표현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 비판적 가능성이 가장 날카롭게 살아난 작품이 바로 기청 시인의 〈보리 굴비〉다. 시인은 보리 뒤주에 갇힌 굴비의 형상을 통해, 오늘날 한국 정치가 보여주는 이념적 대립과 보복의 악순환을 기가 막힌 은유로 포착해 냈다.
너는 억울해도 참지! 참을 만큼, 참아도 더는 참을 수 없는 것
다만 그 맑고 빛나는 세상 새끼들 부푼 꿈을 풀기 위해 잠시 칠산 앞바다에 왔을 뿐
한밤중 영문도 모르게 거친 새끼줄에 줄줄이 묶여 볕도 안 드는 보리 뒤주에 갇혀 죄목도 모른 채
그제나 지금이나 줄줄이 묶여가는 것들 입만 살아남은 굴비의 굴욕
본시 텅 빈 것을 둘로 갈라 오른쪽으로 엮인 것이거나 왼쪽으로 엮인 것을 삿대질하며
— 기청, 〈보리 굴비〉 중에서
칠산 앞바다에 잠시 왔을 뿐인 굴비들은 영문도 모른 채 거친 새끼줄에 줄줄이 묶여 볕도 안 드는 보리 뒤주라는 감옥에 갇힌다. 이 '죄목도 모른 채 묶여가는 굴욕'은 다름 아닌 권력이 바뀔 때마다 포토 라인에, 서서 대척적인 보복을 당하는 한국 정치인들과 그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는 민초들의 초상이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 "본시 텅 빈 것을 둘로 갈라 오른쪽으로 엮인 것이거나 왼쪽으로 엮인 것을 삿대질"하는 모습은 좌와 우, 진보와 보수라는 허울 좋은 미명 하에 복수의 칼날을 겨누는 정치꾼들의 이분법적 잣대를 통렬하게 폭로한다. 내가 모든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오만함, 상대를 뒤주에 가두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 한심한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지식인들이 나팔수 노릇을 할 때, 시인은 입만 살아남은 굴비의 씁쓸한 맛을 통해 시대의 비극을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⑷ 순환의 철학: 공허의 길 위에서 피어나는 신생의 인연
— 박영하의 〈달음박질〉
인간사의 역사는 길에 대입된다. 길은 또 다른 갈래의 길을 만들며 내일을 연결하는 브리지(Bridge) 역할을, 수행하고, 그 위에서 역사의 부피는 두꺼워진다. 박영하 시인은 도로 위를 질주하는 물상들을 통해 존재의 이동과 순환의 철학을 노래한다.
질주하는 도로 낙엽이 날린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맹렬한 달음박질도 누구를 찾아서 온몸을 감추고 마는 걸까? 싹 쓸어버려진 황량한 차도는 낙엽들이 삼켜 버리고 뻔한 거리를 달린다.
— 박영하, 〈달음박질〉 중에서
맹렬하게 달음박질치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낙엽의 모습은 속도에 미쳐 질주하는 현대 사회의 단면이자, 권력의 허무함을 쫓아 달리는 정치적 군상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공허에 머물지 않는다. 바람에 의해 싹 쓸려나가 '텅빈, 공간'이 된 황량한 차도는,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것이 찾아올 수 있는 신생(新生)의 자리를 마련한다. 물방울이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내리는 인연법(因緣法)처럼, 시인은 소멸이 곧 새로운 채움으로 이어지는 대자연의 순환 논리를 통해, 비록 현실 정치가 비바람에 엉망이 될지라도 일관성을 유지하며 묵묵히 길을 가야 한다는 구도의 자세를 보여준다.
4. 결론: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거리 조정, 그리고 예술적 심미의 복원
결론적으로 문학인이 정치에 관심을 두고 현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삶의 궤적이 곧 문학의 소재이자 시와 소설의 뼈대가 되기 때문이다. 현실의 세계와 문학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상보적인 관계망 속에서 존재한다. 현실을 떠나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로 일관하는 작가는 결국 음풍농월에 중독된 공소(空疏)한 공상주의자에 불과할 뿐이다. 참혹한 북한 동포들의 인권법을 당리당략으로 미적거리는 정치꾼들의 허풍을 외면하는 문학 역시 민족사의 죄인이다.
그러나 문학이 정치의 시녀가 되거나, 패거리를 지어 권력의 단물을 빠는 장마당의 장사꾼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문학과 정치 사이의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철저한 거리 조정이 지식인의 절대 명제이자 덕목으로 대두된다. 정치를 표현의 대상으로 삼되 비판의 가시를 잃지 않는 것, 권력에 유착하지 않고 민족과 보편성이라는 가치 위에 굳건히 서는 것이 문학의 올바른 태도다.
우리 문단이 지난날의 일그러진 변종 기득권을 과감히 털어내고 가난하지만 순수하게 글을 쓰는 현장 문인들을 위로할 때, 그리고 정치가들이 위선과 독선을 버리고 백성들을 위한 진정성의 조치를, 취할 때, 비로소 문학의 정치학은 퇴행을 멈추고 내일을 향한 찬란한 빛을 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2026년 이 혼돈의 시대에 철저한 정신적 중심을 잡고, 실천적 설득력을 다해 문학의 올바른 길을 열어가야 하는 마지막 이유다.
2025.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