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시인 칼 부세(Karl Busse)는 그의 시 <저 산 너머(Über den Bergen)>에서 모두가 말하는 행복이 정작 '저 산 너머 더 멀리'에 있다고 노래했다. 행복을 찾아 끊임없이 국경을 넘고 시선을 멀리 던지는 현대인의 고질적인 방랑을 이보다 더 서정적으로 짚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2026년의 현실은 그 산자락마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자연 속으로 침잠하여 자정(自淨)을 꿈꾸는 이들의 발길이 늘어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사회의 소음이 한계치에 다다랐다는 방증이다.
인간은 본디 실수를 축적하며 단단해지는 존재다. 돌아보면 우리의 일상이란 허전함과 후회가 켜켜이 쌓인 퇴적물 아래서 나지막이 신음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은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일상의 디폴트(기본값)가 되었다. 문제는 그 무너짐을 대하는 우리의 '양식(良識)'이다.
오늘날 공공매체와 정치의 문법을 들여다보는 일은 곤혹스럽다. 소위 '잘나간다'는 이들의 화려한 수사학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그 속에서 악취를 풍기며 웅크리고 있는 시커먼 까마귀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도 되는 양, 뒤틀린 입으로 엇나간 말을 뱉어내는 특별한 집단들을 마주하는 일은 이제 경악을 넘어 무감각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이 왜곡된 거울 속에서 세상이 여전히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며, 지구라는 집합체는 점차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처럼 변해가고 있다.
2. 두 발의 보행, 그리고 훈육의 딜레마
인간이 삶의 궤적에서 언제나 곧은 길로만 갈 수는 없다. 생물학적으로도 두 발로 중심을 잡고 걸어야 하는 보행의 숙명은, 필연적으로 미세한 흔들림과 옆으로의 일탈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갯벌의 게가 옆으로 걸으면서도 끝내 목적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가듯, 인간의 방황 또한 어쩌면 본질을 찾아가는 또 다른 방식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의 오류는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다. 규칙을 벗어날 때마다 어른의 지적을 받으며 아이는 성숙의 이치를 깨닫는다. 과거 우리 세대가 아이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가차 없는 훈육의 역할을 자처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하는 인간사의 사리 속에서, 때로 엄격함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어느 서구 소설에 등장하는 대대로 내려오는 교육용 가죽 혁대처럼, 혹은 노예선 선장의 채찍처럼, 체벌과 엄격함은 그 자체로 잔인한 현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관절이 부러지는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한 방어기제였는지, 아니면 순수한 교육적 열망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빗자루와 혁대의 차이는 잔혹함의 밀도 차이일 뿐, 본질은 세상을 향한 정직한 나침반을 쥐여주려는 어른의 고단한 책임감이었다.
한때 전교조의 초심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같은 맥락의 정의감 때문이었다. 권위주의에 맞서 교육의 곧은 길을 찾으려 했던 그들의 첫걸음은 옳았다. 그러나 조직이 비대해지고 정치가 사유를 잠식하면서, 그들은 어느새 삐뚤어진 사고에 갇힌 비교육적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도와 조직이 본질을 삼켜버리는 이 세태 속에서, 내 안의 뜨거운 피는 여전히 거친 혁명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 혁명의 에너지를 내면으로 침잠시켜 글이라는 정교한 메스로 현실의 정치를 짚어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비록 그것이 거대한 벽 앞의 가소로운 몸짓일지라도, 고루함에 주저앉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안간힘인 것이다.
3. 어둠 속의 가로등, 그리고 마지막 오골(傲骨)
이 모든 사유는 결국 내 삶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자 아픔이며, 여전히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고백이다. 참고, 인내하고, 삼켜내느라 거친 언덕을 넘어가는 것이 내 삶의 일상이었다. 변명을 위해 또 다른 변명을 보태다 보니 잘못은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를 집어삼키기도 했다.
한적한 시골, 어둠이 짙게 깔린 집 뒤편의 가로등을 볼 때마다 깊은 고민이 밀려온다. 환한 불빛이 비추는 텅 빈 길 위에서, 코앞이 집인데도 생리적인 급박함을 이기지 못해 하우스 옆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가 바지춤을 내릴 때의 그 생경함.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이라 할지라도, 명색이 글을 쓰는 평론가이자 작가라는 자의식이 발동하는 순간 밀려오는 실소와 부끄러움.
결국 인간은 대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자연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다시금 반복하는 것은, 어쩌면 나약한 인간이 부르는 기대와 변명의 외침일지 모른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한 치 앞의 어둠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꺾이지 않는 뼈, 오골(傲骨)을 낮추지 못한 채 글을 쓴다. 이미 세상이라는 거미줄에 걸려 허송세월의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내세울 깃발 하나 없는 하루의 끝자락에서 두려움을 마주한다. 차라리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자세가 마음 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2026년의 오늘, 차가운 소음 속에서도 부끄러움을 아는 이 염치야말로, 우리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평론가로서의 오골(傲骨)이 아닐까. 텅 빈 길 위의 가로등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를 비추는 그 불빛이야말로 이 어두운 시대를 건너는 유일한 이정표일 것이다.
2026.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