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섭 칼럼

[독선의 요새에 옹고집의 시대를 넘어 숙의와 공존의 광장으로]

부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망각한 정치권에 고함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6.06.12 08:54

 

 

[필자의 여행]

세상은 본디 다양한 빛깔이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모자이크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다름 속에서 교집합을 찾아가는 고단하지만 숭고한 과정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 특히 국가의 방향타를 쥐고 있는 정치권을 바라보면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공동체의 나눔과 통합을 고민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분열의 최전선에 서서 갈등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정답만을 고집하며 타협을 거부하는 독선(獨善)의 함정, 그것이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를 옥죄고 있는 가장 무서운 병립이다.

 

I. 정상의 저주와 소통의 붕괴: 누가 지도자의 눈과 귀를 가리는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많은 이들이 '정상의 저주'에 빠지곤 한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경험과 판단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한 번 도그마(Dogma)에 갇힌 지도자는 전후좌우를 살피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이 바라보는 좁은 시야 속 맹목의 깊이로 침잠할 뿐이다.

진정한 지도자의 가장 위대한 덕목은 '경청(傾聽)'이다. 의사결정의 칼자루를 쥐고 있다 하더라도, 그 칼을 빼들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반대파의 목소리를 듣고, 참모들의 직언을 수용하며, 시민의 탄식에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내 말을 앞세우고 상대를 가르치려 들 뿐, 듣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소통(疏通)이란 단순히 내 뜻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스피커의 역할이 아니라, 타인의 주파수에 내 라디오를 맞추는 수신기의 역할에서 시작된다. 상대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만의 확고한 성을 구축한 지도자는 결국 우군을 잃고 실패라는 간판을 단 채 침몰하게 된다. 역사가 증명하는 이 비일비재한 비극을, 지금의 정치인들은 마치 남의 일인 양 외면하고 있다.

 

지도자는 필연적으로 고독한 결단의 순간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결단은 오직 '공유된 가치'와 '원만한 공동체의 번영'을 향해 있을 때만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는 이성과 감정의 밸런스가 철저히 붕괴되어 있다. 이성적 합의보다는 지지층의 맹목적인 감정에 영합하고, 분노를 자양분 삼아 세력을 결집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주체적 목적의식은 사라지고, 오직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 상대 진영에 대한 적개심만이 정치의 유일한 동력이 되어버린 아노미(Anomie) 상태다.

 

II. 21세기 여의도에 환생한 '옹고집': 팬덤 정치와 이성의 마비

 

삶의 주변을 둘러보면 지능이나 학력과는 무관하게, 오직 자기만의 아집과 고집으로 소통의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버린 이들을 보게 된다. 사고의 폭과 생각의 양이 특정 시점에 멈춰버린 채, 남과의 관계 설정에서 철저히 사회성이 결핍된 독선의 인간 군상들이다. 놀라운 것은, 동네 어귀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이러한 '성 안에 갇힌 자'들의 모습이, 지금 대한민국 정치의 심장부인 여의도에서 매일같이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대 풍자 소설 <옹고집전>을 보라. 옹고집은 심술궂고 인색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인간의 전형이다. 걸인과 승려를 내쫓고, 심지어 진위를 가리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탐욕만을 좇다 파멸 직전까지 간다. 작금의 정치판은 이 가짜 옹고집과 진짜 옹고집이 뒤엉켜 싸우는 난장판과 다를 바 없다. 상대 진영의 정책은 무조건 '악(惡)'으로 규정하고, 내 편의 허물은 궤변을 동원해 감싸기에 급급하다. 도덕과 상식이라는 보편적 기준은 사라지고, '내 편이냐 네 편이냐'라는 천박한 진영 논리만이 득세하고 있다.

 

특히, 강성 지지층에 휘둘리는 이른바 '팬덤 정치(Fandom Politics)'는 현대판 옹고집들을 양산하는 숙주가 되었다. 정치인들은 확증편향에 빠진 소수 극단주의자들의 환호에 취해, 침묵하는 다수 국민의 합리적 목소리를 외면한다. 자신의 신념이 지나쳐 소통의 문을 닫아버린 정치인, 나이와 경륜이 무색하게 아집만 남은 정치인은 더 이상 국가의 동력이 아니라 사회의 숨통을 조이는 흉기일 뿐이다. 인색하고 아집에 찬 옹고집에게 미래가 없었듯, 베풂과 타협(선업과 공덕)의 정치를 외면한 세력에게 국가의 안위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III. 위기의 진단과 평론가의 제언: 파국의 늪을 건너 숙의(熟議)의 광장으로

 

이처럼 일그러진 정치 현상을 타개하고, 후퇴하는 대한민국을 다시 전진시키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통찰과 혁신이 필요하다. 평론가의 시선으로 볼 때, 지금의 꽉 막힌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처방전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적대적 공생'의 사슬을 끊고 '숙의(熟議) 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현재 거대 양당은 서로를 악마화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기형적인 구조에 기대어 있다. '저들이 너무 나쁘기 때문에 우리가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정치는 이제 한계에 달했다. 정치인들은 타협이 배신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령임을 깨달아야 한다. 제도를 고쳐서라도 극단적인 대결 정치를 완화하고, 다당제적 요소나 연정, 협치의 모델을 강제하는 시스템적 쇄신이 시급하다.

 

둘째, '언어의 품격''공감의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

 

정치의 수준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에 비례한다. 상대를 향한 저주와 조롱, 혐오 발언이 난무하는 현 상황은 한국 사회 전체의 도덕적 하향 평준화를 초래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칼날 같은 언어로 상대를 베는 것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민생의 현장으로 내려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공감의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경청하는 지도자만이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셋째, 깨어있는 시민의 '차가운 분노'와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하다.

 

결국 옹고집의 몽매함을 깨우는 것은 도사의 지혜였듯, 정치권의 각성을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주권자인 국민이다. 정치가 아무리 실망스럽더라도 냉소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진영에 갇히지 않은 합리적 시민들이 선거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여론 형성을 통해 정치권의 일탈을 엄중히 꾸짖어야 한다. 투표라는 행위를 넘어, 일상 속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천하고 감시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이 절실하다.

 

나가며: 역사를 기록하는 자의 책임감으로

 

소통이 부재한 지도자는 사회의 동맥을 경화시키고, 결국 그 화(禍)는 고스란히 백성의 몫으로 돌아온다. 정치판의 아우성을 걷어내고 이 사회의 잠자는 이성을 깨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과 깨달음이 한 개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듯, 국가 역시 냉철한 자기반성을 통해서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목적 역시, 비록 한 줄의 글일지라도 그것이 모여 어두운 터널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를 쓰고 있다. 작지만 단단한 민주주의의 틀을 세우기 위해, 부조리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기록하는 일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지식인과 시민의 사명이다. 지도자들의 행동이 맑은 거울처럼 투명해지고,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며 경청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의 펜 끝은 현실의 타락을 매섭게 꾸짖으면서도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웃사이더의 무전 여행]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