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섭 칼럼

[작가는 왜 성주(城主)가 되어야 하는가]136

— 사유의 영토, 문학적 자존, 그리고 타협 없는 영혼에 관하여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6.08.27 12:09

 

[필자]

제1: 문학이라는 영토의 고독한 주권자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과 세속의 가치관에 의해 침범당하는 영역 싸움의 연속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특정한 색깔을 강요하고, 시류라는 거센 바람에 맞춰 고개를 숙이라고 야속하게 종용한다. 이 끝없는 바람의 언덕 위에서, 문학을 업으로 삼은 이—즉 작가(作家)라는 존재는 과연 어떤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가?

나는 감히 단언한다. 『작가라는 대상은 반드시 자기 영토를 다스리는 성주(城主)’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주란 타인을 지배하거나 권력을 휘두르는 세속적 군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의 영혼을 통치하고, 사유의 정체성을 수호하며, 세상의 비굴한 타협 요구로부터 자신의 진실을 지켜내는 ‘정신적 주권자’를 뜻한다.

성주가 없는 땅은 주인이 없는 황무지이거나, 지나가는 외세가 언제든 유린할 수 있는 무방비의 들판에 불과하다. 자기 성을 구축하지 못한 글쟁이는 세상의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풍경경(風景)이 되거나, 세속의 유혹과 이권이라는 외적의 침입 앞에 스스로 문을 열어주는 유랑자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가 자기 문학의 성주가 되지 못할 때, 그의 글은 독자에게 울림을 주는 사상의 거처가 아니라 세속의 인기를 구걸하는 기마차로 전락하고 만다. 인생의 수식어를 다 떼어내고 온전히 홀로 서야 하는 문학의 길에서, 작가가 스스로 성주라는 자의식과 주권적 신념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 문장은 이미 뿌리를 잃은 가련한 풀잎에 불과한 것이다.

 

2: 왜 작가는 성주가 되어야 하는가 세속의 공성전(攻城戰)과 타협의 유혹

 

우리가 살아가는 세속의 무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작가의 내면을 향해 공성전(攻城戰)을 벌인다. 부유함의 대문 앞에서 구걸하도록 만들고, 권력이라는 허망한 명칭 앞에 고개를 숙이도록 유혹하며, 패거리를 지어 세력을 과시하는 속물적 유행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이 거센 공성전 앞에서 작가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어선은 바로 ‘견고한 신념의 성벽’이다.

『첫째, 문학적 자존의 보존을 위해 성주가 되어야 한다.성주가 없는 성은 존재할 수 없듯, 확고한 문학적 푯대가 없는 문인은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의 생존 법칙에 마비되기 쉽다. 계산된 이익과 타협하기 위해 굽히는 삶은 순간의 편안함을 줄지 몰라도 작가의 영혼을 탈색시킨다. 직장의 불합리와 불의 앞에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고독한 투쟁처럼, 작가는 세속의 가치관이 자신의 문학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성벽을 높이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 사유를 위해 성주가 되어야 한다.현대 문단과 사회는 유행과 세속적 재미, 그리고 가벼운 에피소드만을 소비하려 든다. 그러나 깊이 없는 글, 세속적 타협으로 조율된 글은 잠시 눈길을 끌 수는 있으나 세월의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쓸쓸히 스러져 간다. 성주는 자기 성 안에서 창고를 채우고, 고유한 언어와 깊은 사상을 다듬으며 세월과 겨루는 존재다. 남이 보든 안 보든 자기만의 속도와 신념으로 삶을 다스리는 결기가 바로 성주로서의 작가가 지녀야 할 마땅한 태도이다.

 

『셋째, 문학의 고결성을 파괴하는 속물주의에 대한 거부로서 성주가 되어야 한다.오늘날 현실 문단의 풍경을 들여다보면 깊은 탄식과 역겨움이 치밀 때가 많다. 깊은 경지로 들어갈수록 스승은 제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속물적 풍토, 자리와 권력에 연연하며 이권을 찾아 눈을 두리번거리는 행태는 문학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저해하는 세속의 악습이다. 작가가 성주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패거리 문화와 이권 다툼의 무리로부터 기꺼이 스스로를 유배시키고, 자기 성 안에서 문학의 순수성과 엄숙함을 고수하겠다는 불퇴전(不退轉)의 선언이다.

 

3: 성벽 안의 수원지(水源地)와 어둠이라는 거룩한 요람

 

성주가 다스리는 성 안에는 외세가 결코 오염시킬 수 없는 단 하나의 깊은 우물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 우물을 ‘마르지 않는 생각의 수원지(水源地)’라 부른다.

글을 쓰는 상상의 작위는 이 수원지에서 고인 물을 끊임없이 퍼 올리는 고단하고도 거룩한 작업이다. 샘물이 가만히 고여만 있으면 갇힌 물이 되어 이내 이끼가 끼고 부패한다. 그러나 성주가 된 작가가 매일같이 깊은 두뇌와 영혼의 수원지에서 바가지로 물을 길어 올릴수록, 우물은 더욱 맑고 신선한 신수(神水)를 끝없이 내어준다. 처음부터 인색하게 글을 적어 내려가는 자는 그 깊이를 확장할 수 없다. 성주는 자신의 영토를 크고 넓게 일구어, 더 많은 상상의 스펙트럼을 성벽 안에 포진시키는 자다.

 

그리고 이 모든 창조의 작업은 『어둠이라는 고독의 성채안에서 완성된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이때의 어둠이란 결코 절망이나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조명할 때 어둠이란 ‘빛을 내포한 태생적 어둠’이다.어머니의 뱃속이라는 정적과 어둠의 보호막 속에서 생명의 원형이 점차 자라나 마침내 찬란한 빛으로 세상에 나오는 것처럼, 작가가 지닌 성 안의 어둠은 빛을 안전하게 감싸 안고 키워내는 요람이다.

성주로서의 작가는 홀로 성채의 깊은 밤을 견디는 자다. 세속의 번잡한 소음이 침범할 수 없는 어둠의 태반 속에서, 작가는 수많은 문장들을 낳고 여유를 두어 다듬어낸다. 세상의 눈에는 그 성주의 작업이 지루하고 재미없어 보일지 모르나, 그 고독한 어둠 속에서 퍼 올린 문장만이 마침내 독자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깊은 울림의 빛으로 완성된다.

 

4: 명품(名品)의 글을 향한 고독과 성주로서의 자존심

 

주변에서는 종종 내 글을 향해 "깊은 사상과 철학은 담겨 있으나 세속적인 재미가 부족하다"는 식의 가벼운 평을 내리곤 한다. 나는 그 평가를 겸허히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성의 가치를 세속의 기준표로 재려 하는 시선에 대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성주가 짓는 성은 하룻밤 사이에 세웠다가 허물어지는 세속의 비닐하우스가 아니다. 그것은 세월이 흐르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는 ‘명품(名品)의 석성(石城)’이어야 한다.

내 글을 읽는 단 한 사람이라도 지식의 지평을 넓히고 통찰의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 성주로서의 내 소명은 이미 달성된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조차 흔들지 못하고 세속의 가벼운 흥미에나 부합하는 글이 어찌 세월을 견디며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겠는가?

살다 보면 정치나 선거라는 세속의 무대에 올라 번듯한 명칭과 권력을 얻고 싶은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속의 화려한 손짓이 올 때마다 나는 성벽 위에서 가만히 내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허망한 명예보다 더 본질적인 문학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 성주로서의 내 사명임을 알았기에, 나는 언제나 거부와 회피로 일관할 수 있었다.

 

이 외골수적인 고집, 타협하지 않는 치기(稚氣)가 결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려한 에피소드나 세속적인 이름값으로 한때 문단을 풍미하던 이들이 결국 미량의 작품성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비극을 나는 수없이 목도해 왔다.

비록 내 문학의 등판이 늦었고, 세상이 보기에 내 성이 초라하고 쓸쓸해 보일지라도, 오로지 작품 그 자체의 토양에 최종 목적지를 두고 굳건히 성을 지켜낸 자만이 마지막에 웃을 수 있다. 세상의 허잡한 글들이 아무리 범람한다 해도 괘념치 않는다. 비굴하게 부당한 타협을 하지 않았던 내 삶의 이력이 곧 내 성을 받치는 가장 튼튼한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5: 절필(絶筆)이란 없다 진화하는 성주, 진화하는 문학

 

인생의 계절이 익어갈수록, 사고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고, 인류 역사상 위대한 천재들이 남긴 작품의 높이 앞에 절망을 느낄 때도 있다. 성주로서의 고독이 도를 넘어 갈증과 아픔으로 다가오는 순간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주에게 ‘성채를 버리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듯, 작가에게 ‘절필(絶筆)’이란 있을 수 없다. 절필이라는 말은 작가에게 거짓이자 사치이다. 스승께서 가르쳐주신 경구처럼 휴식은 있을지언정 문학을 향한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성주는 아무리 고단할지라도 성벽의 돌 하나를 더 다듬고, 우물에서 물을 한 바가지 더 퍼 올려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지금까지 써낸 문학적 성취가 세속의 기준으로는 번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는 타협하지 않은 신념의 깊이와 진정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청춘의 청량함은 이미 지나갔을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서정이 묵직하게 익어가는 문장을 나는 오늘도 내 성문 밖으로 내어놓는다.

작가는 성주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사유를 통치하고, 세속의 타협으로부터 영혼을 수호하며, 어둠 속에서 빛을 퍼 올리는 홀로 높고 고독한 성주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펜을 들고 성벽을 지키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세월의 비바람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문학,』 그리고 ‘진화하는 성주’로서 살아가는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2026.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박두진선생 동상에서]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