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평

[비평의 뒷면, 해석되지 않는 밤의 기록]

필자는 일정 기간 타인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 여백에 독설 혹은 찬사를 채워 넣으며 살아왔다. 나의 언어는 언제나 차갑고 명징해야 했으며, 대상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는 ‘언어의 화살’이어야 했다. 평론가라는 문패를 달고 사는 동안, 나는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왜?’라고 물었다. 이 구도는 왜 불안한가, 이 문체는 왜 이토록 서늘한가. 하지만 질문의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논리라는 이름의 딱딱한 벽이었다. 정작 나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소중한 것들은 대개 ‘왜’라는 질문 앞에 침묵하는 것들이었음을, 나는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서재 깊숙한 곳, 화려한 양장본들 사이에 끼어 있는 빛바랜 노트 한 권을 꺼내 본다. 그 안엔 비평적 문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메모들이 적혀 있다. “오늘 엄마가 보내준 김치 상자에서 흙, 냄새가 났다.” “가로등 불빛 아래 흩날리는 눈발이 꼭 누군가의 한숨 같다” 같은 것들이다. 평론가의 눈으로 보자면 이 문장들은 형용사가 과하고 주관이 지나쳐 폐기되어야 마땅한 쓰레기들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의 날 선 비평문들이 세월의 파도에 씻겨 내려갈, 때에도 이 서툰 감각의 조각들은 내 영혼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앙금처럼 남아 나를 살게 했음을 말이다. 언젠가 한 원로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평생을 ‘여백’에 매달려온 노장(老長)이었다. 나는 직업적 본능을 발휘해 그의 텅 빈 캔버스 앞에서 ‘공(空)의 미학’이니 ‘존재의 부재’니 하는 화려한 수식어들을 쏟아냈다. 나의 유창한 해설을 가만히 듣던 노화가는 허허 웃으며 낡은 찻잔을 내밀었다. “평론가 양반, 저 빈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나? 저건 내가 그리지 못한 것들이 아니라, 차마 그릴 수 없어서 남겨둔 마음들이라네. 말로 다 하면 향기가 날아가는 법이지.” 그 순간, 나는 내가 휘두르던 언어들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절감했다. 나는 대상을 이해한다는 명목하에 그것이 가진 ‘신비’를 난도질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억지로 이름을 붙이고, 규정할 수 없는 슬픔에 논리적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일. 그것은 어쩌면 대상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오만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자각이 뒷덜미를 스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시장 어귀에서 낡은 양은 냄비 그릇 하나를 샀다. 작고하신 할머니가 쓰시던 것과 꼭 닮은, 금방이라도 찌그러질 듯 얇고 가벼운 냄비였다. 할머니는 그 냄비에 미군이 준 딱딱한 우유를 데워주시며 늘 말씀하셨다. “음식은 손맛이 아니라 마음 맛으로 묵는 거다.” 그 시절, 할머니의 우유는 늘 그때 그 당시 제일 단백질이 많은 음식이었으며 제일 맛난 우유였기에 잊을 수가 없다. ` 평론가의 잣대로는 결코 ‘맛집’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맛이었다. 하지만 그 투박한 양은 냄비 안에는 손자의 허기를 채워주고 싶어 안달 난 한 노인의 지극한 생애가 끓고 있었다. 그것은 해석의 영역이 아니라 체험의 영역이었으며,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었다. 이제 필자는 글을 쓸 때 조금 더 자주 멈춘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일부러 빈틈을 낸다. 독자가 그 틈새에 자신의 기억을 채워 넣기를, 나의 마침표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물음표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비평은 대상을 ‘정의(定義)’하는 일이지만, 수필은 대상을 ‘기억(記憶)’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차가운 해부학자의 가운을 벗고, 온기 있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인생은 결코 한 편의 완벽한 논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수많은 오타와 비문(非文), 그리고 차마 다 쓰지 못한 채 얼룩진 눈물 자국들로 가득한 비망록에 가깝다. 나는 그 무질서한 생의 기록을 이제는 사랑하려 한다.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을 억지로 분석하지 않으려 한다. 어느덧 창밖의 어둠이 짙어졌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끝자락을 바라본다. 저 어둠 속에는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해석되지 않는 마음’들이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밤, 비평가로서의 예리한 펜촉을 내려놓고 투박한 연필 한 자루를 쥐어본다. 그리고 종이 위에 조심스럽게 적어본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린 봄날이었다.” 이 문장에는 근거도, 논리도 없다. 하지만, 이 비논리적인 문장이 주는 아릿한 여운이야말로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진실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필자는 이제야 알 것 같다. 해석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해석되지 않기에 인생은 이토록 눈부시고 애틋한 것이기에- 2026. 02. -오랜만에 에세이를 쓰면서-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리스트 이승섭

[문학 사상의 가치 심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admission 하려고 병원에 갔다고 가정해보자, 한국 의학의 경우는 한방이나 양방이나 맥을 짚고 난 후에 그 사람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는 문진과 맥진 방법이 지금까지의 진단이었다면 이는 종합에서 얻은 인간의 시체를 우주로 파악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서양 의학의 경우엔 아픈 부의와 판단에 따라 집중적으로 메스와 항생제가 치료의 주요 수단이다. 우리도 의학이 발전하여 세계적 수준이 되었지만 이는 분석과 해체에서 전적으로 얻은 서양의 치료 방법이라면 동양은 종합과 분석의 결합에서 제3의 의학적 처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대체 의학이라 말한다. 어느 것이든 전적으로 옳은 일방성은 없다. 문학에서도 이런 이론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서양적인 이론의 추구뿐만 아니라 동양적인 전통의 결합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론에 필요성이라 하겠다. 현재 한국문학은 갈림길에 있다는 생각이다. 2000년 초부터 우리 문학의 판도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액티브(activist)한 다양성이 부재한 듯하다. 민중문학이 잠들고부터 정체의 긴 시간이 무료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뚜렷한 이슈가 없는 현실에서 예언의 말은 들리지 않고 침묵처럼 조용한 현상이 과연 좋은 것인가는, 차치(且置)하고라도 발전을 위한 모티브가 없으며 고민 없음을 대변하는 현실인지는 글쎄올시다.이다. 물론 우리 문학의 주소를 언급하는 데에는 남한과 북한의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북한은 문학이 아니라 아첨 혹은 정권 잡이의 문학 – 이도 문학이라면 문학인지 모르겠지만 엄밀한 잣대로 말한다면 거론할 말은 제한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표현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정해진 명령의 하달을 실천하는, 이른바 노동당의 기준에 적합한 경우, 충실한 문학인으로 대접받는 일종의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우상 같은 표현만 있는 문학은 이미 문학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광고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이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하느냐의 함량에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이 달성된다고 믿는다면 남한의 경우 상업성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구가되는 현상은 올바른 징조이고 미래를 낙관하는 결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한국문학의 문제는 심도에서 사상의 승화가 부족하다는 말을 되뇐다. 감각적인 표현에서는 진전을 이루었지만 정작 그 작품 속에 진지한 사상의 깊이에 고갈 현상이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는 간단히 언급하기에는 어렵지만 우리 자신의 표현에 전통이 아직도 깊은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는 자기를 해체하거나 분석하기보다는 라는 문화에 녹아 있는 생각의 문제이기에 참혹한 전쟁을 겪었어도 레마르크의 같은 전쟁 문학이 없고 – 이런 전통은 고래로 올라가면 더욱 자명하다. 이른바 신라 통일 - 나는 통일이라는 말에 시비를 걸고 싶다. 당나라를 끌어드린 신라통일의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의 정립에 따른 각축을 다룬 진정한 역사적인 통찰의 안목이 없었고 근대로 와서는 온갖 전쟁의 참화 – 7여 년의 임진왜란도 그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항복 문서를 바친 병자호란 또는 6.25의 비극은 너무 통렬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는 둔감하고 남의 시비에는 민감한 정서를 라는 두루뭉술술로 포장하는 관용이 있기 때문에 어느새 나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징후가 사상의 심화에 미흡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서구의 사상사는 결국 자기의 문제로 시작해서 객관을 바라보는 접근법, 귀납적 논리학이 주류를 이룬다면 우리는 연역적 논리에 가깝지만 – 보편에서 특수로 가는 결말이기보다는 보편에서 시작하여 다시 보편에 머무는 논리에 익숙한 것이 추상적인 현상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귀납적 논리도 아니고 연역적인 논리도 아닌 중간에 머무는 일 때문에 특성이 없는 결말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 문학이 심도는 돌부리에 체아는 안타까움을 맞는다. 북한의 세습 정권을 보면 금세 그 뜻을 알게 된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면서 3대 세습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의 간판이 될 수 있는가 말이다. 오로지 독재자 김정은이 향하문 이외는 모두 차단하는 인간 지옥이 유지되는 것은, 결국 신앙 문화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서 그 원인은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한 명분 아래 온갖 수사를 통하고 동원하여 합리 둔갑 될 때 용해되는 정서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최면이 깊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를 벗어나면 악이 되고 나는 우리에 소속된 혹은 없어야 당연해지는 일이 어떻게 문학이 추구하는 휴머니티의 소산이 되겠는가? 한때 남한에서 극심했던 저항의 문화도 그렇다. 결국 끼리끼리의 문화였지 발전적인 로 이르지 못한 것은 편 가르기의 우리에서 너는 적이고 나는 선이란 이분법만 작동되었을 뿐 진정한 용해의 공동에 터가 없는바 일방성 때문에, 공통의 선이 없어지고 독선적인 메아리를 던지다가 소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에서 출발해서 우리로 가는 공동의 광장이 서구적인 사상의 모델이라면 우리 문화는 우리에서 출발하여 결국 우리로 돌아가는 공허만이 남게 되었으니, 우리의 문학 작품에는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현상만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한때 유명했던 대하소설도 대부분 가족사의 나열이나 이데올로기의 분열상만 파노라마적으로 보여 주었을 뿐이지 정작 작가의 고뇌 어린 해답은 없었다고 느낀다. 소설은 갈등을 다루면서 시간의 정리라면 결국 그 스토리의 깊이엔 작가의 사상이 뼈대를 이루지 못하면 사랑방의 이야기 수준이고 고작이라는 뜻이다. 톨스토이 작품에는 그런 대답이 가득하다는 예를 들면 결론은 자명해진다. 그는 러시아 귀족으로서 자기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땅을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나 , 등은 결국 언행이 일치된 사상적 표현의 결집이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농민 혁명의 도화선이 된 톨스토이 – 그가 추운 1월 우랄 철도의 시골 역장실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때 그의 마부도 따라 죽은 감동은 그의 깊은 인간미에 대한 참된 삶의 실현이었다. 그의 유언은 마지막 말이 “진리를 나는 열애한다.” 왜 저 사람들은,. 이란 마지막 말에도 그의 사상은 녹아있다. 나를 찾는 여행은 문학인의 영원한 사명이다. 현실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구현되는 주인공과 등가를 이룰 때, 비로소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획득하는 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최대 소설인 의 작가 멜빌은 살아있을 때 온갖 모멸과 굶어 죽다시피 했고 죽었을 때는 신문에 부고한 줄도 안 나올 만큼 무시와 고독을 감내했었고, 생전에 1,775수의 시를 쓴 미국의 여류 시인 에밀리 딕킨슨은 살아 7편쯤 발표한 시인이었지만 70년 후에 평론가의 연구에, 의해 빛나는 미국의 시인이 된 일이나 우리의 한용운은 1962년 을 발표한 것은 3.1 운동의 실패, 감옥살이 3년을 겪은 후에 모조리 변절한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감을 백담사 오세암에서 쓴 고독한 사랑에의 뜻을 담은 88편은 연작 시라는 점, - 1965년 – 40년 후에 박노순 인권 항의 에 의해 유명 애국 시인으로 등극했고, 생전에는 동요 몇 편을 발표한 윤동주도 해방 이후 유고 시집으로 살아난 시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애라는 휴머니즘의 사상에 깊은 감동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시인 – 이육사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문학의 표현은 언제나 자기를 고백하고 또 주장하면서, 자기만큼 표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결국에는 나를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객관적인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표현의 심도에 감동의 파문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아울러 자기에 몰입하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도그마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경계의 몫이라는 조언이 뒤따를 것이다. 명작의 조건은 하나같이 자기를 버리고 제3의 공간을 창조하는 길을 얼마나 진정성으로 표현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인간애의 따스함도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강조가 옳은 대답이 될 것이다. 대부분 문학은 정신이라 한다. 그렇다. 문학의 본질은 결국 사상의 실현이고 이를 어떻게 구조화하는가에 소설이 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결합하여 의미로 만드는 비유가 시가 된다면 자기라는 본질에 대한 “찾음”은 결국 문학적 표현의 깊이와 유관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넋두리로 자기를 감추는 것은, 문학적인 깊이와는 멀리 있는 표현일 것이다. 즉 자기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정신 가치 사상이라 말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6.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 시평집] [필자칼럼 집]

【숲의 詩 표정】

詩的論이라는 것은 언어(言語)를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해야 하기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길을 가려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말하고 싶다. 사실 아픔,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으로 포장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현재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하면서 대가연, 하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풍경이 참으로 안쓰럽고 난망이 그지없다. 중보자의 평론가로서 시인 논을 쓰고 있는 필자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된 작품이 없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많지만, 품격에 맞는 작품에서는 낮은 수준의 모습을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이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공부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을 담은 있는 지부에도 젊은이들이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 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 캐션 마크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은이들에게 바톤 터치로 넘겨준다면 지금보다 더욱 활발한 지부가 활성화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지만 필자가 속한 지부는 아직도 우물 안에 개구리 마냥,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끼리끼리 노는 작태가 한심스럽다.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차원 5차원 나노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재차 강조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1. 봄바람 자리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 꽃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 아! 가벼워라 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꽃 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 마음의 자아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상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시어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가 않다는 것에는 늘 허전이다. 수많은,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좌고우면 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오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에 마음의 자아는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는 일탈을 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며 나를 변명하는 일로 에필로그 한다. 2026.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만네리즘의 시적 함정]

주식으로 밥, 김치, 된장국을 먹어도 또다시 되풀이가 정작 맛깔스럽다거나 아니면 식성에 맞아서 먹는다고 해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싫은 것을, 반복적으로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외식을 한다 해도 일상적일 수는 없으며 간혹 즐기는 정도이지 다시 밥, 김치, 혹은 된장국으로 돌아가는 회전의 일상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선대 조상이 그렇게 습관화했기 때문에, 따라 한다는 말도 그럴싸하고, 다른 방도가 없기에 관습의 길을 갈 뿐이라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굳이 외국 여행 중에도 꼭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풍경을 목도(目睹)할 수 있다. 단 며칠의 여행도 그런 감정을 갖는 이유는 우리 것에, 대한 맛이 이미 체질적으로 굳어진 현상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뜻을 우리 시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도 생각이 든다. 밥, 김치, 된장국 같은 끈질긴 맛이 떨어질 수 없는 절대의 인자를 내포한 것일까? 필자는 김소월의 1920년도 을 오늘에 명작으로 추켜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의 여성상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관습에는 당현함이 오늘에 와서 이별의 주체가 그렇게 나약한 모양을 현대의 자유 발랄한 여성에게 지표로 강요시키기에는 무리라 보기 때문이다. 문학에 보편성의 문제는 시간을 극복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보편성의 기준 잣대에 어긋난 결과라는 뜻으로 보면 시를 창작하는 시인들의 흐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실 명작의 조건은 오늘에서 내일로 혹은 미래로의 시간으로 등성이를 넘어가는 일은 보편성의 범주 속에서 설정될 것이다. 우리의 맛은 결국 보편성의 범주 속에서 입맛으로 느끼는 일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시간의 등성이를 넘어서 좋아하는 맛깔의 시- 그런 바람의 시를 만나면 어디서나 맛깔스러워 좋다. 얼치기 표정의 시가 아니라 순수한 쌀밥에 김치와 된장국을 곁들인 시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에 비유의 간격이 멀수록 신선한 맛을 전달하는 것은 시가 갖는 특권이다.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산문과는 달리 시는 있음 그대로가 시치미 속에서 상징이나 은유의 의상을 입혀 시인이 의도를 전달하는 묘미는 확실히 시가 갖는 특징이다. 더구나 장황한 진술이 아닌 응축의 표정에서 길고 긴 의미가 있을 때, 시는 산문이 갖는 농설(弄舌)을 잠재우는 매력이 있다. 세상사는 모두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설명된다. 바둑의 돌에 대한 운행에 천만의 길이 있고 운동선수의 손짓발짓에도 다양한 의도가 명백한 것은 삶의 길에서도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2등은 없다. 이겨야 한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승리의 요건이 곧 스포츠라는 이름에 승부를 위한 전략과 고도의 전술을 내장한 싸움의 세계- 16세기 이전부터 스콜틀랜드의 얼음판에서 상대의 돌을 밀어내는, 이른바 스포츠의 이름이 최근에 주목받은 스포츠, 경기이며 전략이 필요한 경기이다. 돌이 돌을 밀어내고 때로는 피하기도 하면서 돌아온 탕자처럼 미끄러지면서도, 어떡하든 한 발짝이라도 더 가야 할 집이 있다. 알몸으로 얼음 바닥 차디찬 승부의 세계에서 돌 하나가 가야 할 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 강우식 중 도달해야 할 ‘집’은 목적지이고, 어떤 방법이든 빨리 집에 이르는 비유는 곧 삶의 일상이 겹쳐진다. 탕아처럼 미끄러지면서도 ‘어떡하든’에 수단과 방법을 스포츠의 룰에 맞추어 온갖 기교를 동원하여 목적지에 빨리 당도할 때, 비로소 성공의 이름이 따라올 것이기에 컬링이라는 운동을 통해 삶의 교훈을 오버랩한 시인의 시적 의도는 세태를 비판하는 의도가 명료하다. 오리발과 변명에 악다구니로 상대의 잘못을 적폐라는 이름으로 분풀이를 일삼는 자들- 그들이 권력을 잡았다고 온갖 칼날을 번뜩이는 망나니의 춤을 바라보는 선한 사람들의 눈엔 슬픔의 길이 비극으로 다가온다. 포용과 용서를 통해 올바른 질서를 구축하는 길이 곧 삶의 길이라는 것을, 운동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일이지만 무지의 두꺼운 의상을 입은 오늘의 사회 판도를 휘젓는 자기 사상이 없는 자들의 춤판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3. 이미지 구축에 바람은 많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시어이며 낱말이다. 자유로움과 보이지 않음, 그리고 시, 공을 넘나드는 무한의 표정을 감지하는 것은, 시인의 예리한 통찰에서 나오는 언어일 뿐 바람의 실체는 잡을 길이 없다. 때문에, 신라의 바람과 고려의 바람 혹은 조선의 바람이 교차하면서 오늘에 다가올 때 바람의 기능은 변신을 자유자재로 하며 운용하는 도구의 역할을 볼 수가 있다. 샛바람, 하늬바람, 마파람, 높새바람은 방위에 따른 이름이고 고대인들은 하늘 기운 즉 우주의 숨소리로 파악했고 바람의 신인 영등(靈登) 할미와 물 할미, 산 할미와 더불어 민간 신앙에서 3대 신앙 할미 중에 자연 현상인 바람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농경사회에 풍요와 관계가 있다. 구름을 부르고 비를 몰아오는 바람은 우주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바람의 관념인 것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촉한의 정치가이자 유비의 자는 공명 직위는 무량후, 시호는 와룡이라 불렸으며 유비의 책사 재갈량이 형주 전투에서 바람을 불어와 위나라 조조를 적벽대전을 화공으로 승리한 것처럼 바람은 신비한 대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네 개의 바람벽이 네모난 방에 버티고 살아도 들어오는 바람을 막지 못해 바람이 방안으로 쏟아지고 나는 거리에 나가 홀짝홀짝 뛴다. 바람이 뒤쫓아 와서 내 품속으로 파고들다가 길가 백화점 안의 통유리 속으로 들어간다. 통유리 저쪽에는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가고 새 옷을 입은 마네킹들의 옷자락에는 쇠 파람 소리가 난다 모자를 벗어 나에게 던지는 점원들 붕대를 감으며 패션쇼를 시작하는 킬 힐 신은 마네킹들 바람을 데리고 길게 불어오는 시간이 빈집 모퉁이에 집을 짓고 끝없는 명상에 들어간다. 네거리에 갑자기 자동차가 막히는 것은 바람이 쌓여서 교통사고 없는 고속도로를 바람이 가로 막아서 뜬구름 한 점마다 어린 친구의 얼굴이 삐죽거려서- 김규화 중 시에서 관념은 주인공이 아니고 시를 이루는 요소로 작동되는 잔가지의 역할이다. 또한 관념은 정서를 내포하면서 상호 보완으로 시인의 의도인 사상이 하나로 통합될 때, 이미지 구축에 공고한 줄기를 갖고 뼈대를 완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김규화의 바람은 사위(四圍)가 벽에 막힌 상태에서 심리적인 조정을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바람과 ‘대결의 몸짓’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홀짝홀짝’으로 바람의 행위를 방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층 심리학의 기저(基底)에서 볼 때 나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이고 바람을 회피할 때, 또 다른 장면이 마네킹의 고독한 모습으로 시인의 의식에 겹치는 그림자의 길이가 길어진 인상을 배태 (胚胎)한다. 시적 화자나 ‘나’와 ‘바람’의 상관관계가 ‘마네킹’과 ‘점원들’의 행위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고 ‘나에게 던지는’‘붕대를 감은’ 불편한 행위를 일삼는 것은, 시인과 대상의 관계망이 불안 징후이면서 자유로운 바람으로 살고 싶은 시인의 심리적인 소망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이에 증거가 되는 시어는 마지막 연에 ‘바람이 쌓여서’ 바람이 가로 막아서 ‘얼굴이 삐죽거려’ 등은 시인의 속내를 보여주는 막힘의 의미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4. 추리고 나면 자기만큼의 기준을 갖고 산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리라 왜냐하면, 줄이거나 늘이거나 살아가는 일은 결국 그 둘 중 하나로 정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자기를 쓰고, 자기만큼 표현한다를 주장하면 결국 시 또한 ‘나’를 말하는 방도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자기를 부풀려 살아가기를 되풀이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를 얼마나 아는가의 무게는 결국 인격이라는 말로 정리될 곳이다. 자기 수양의 노력이 필요한 소이가 바로 풍선 부풀리기의 모순을 벗어나려는 일이 삶의 참된 길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장편 소설도 모자라 대하소설이 될 거라고 그런 사람일수록 이야기를 추리고 나면 단편 소설도 못 되는 사람 수두룩하다. 윤수천 중 직설적으로 말하면 나를 돌아보면서 살아라. 그리고 과장의 풍선을 하늘 높이 띄우지 말아라. 더 나가면 겸손이라는 인격을 갖고 살아라.의 간명한 교훈이 펄럭인다. 다변(多辯)으로 꾸미는 사람들의 말은 언제나 자기선전의 도구로 장황하지만 줄이면 빈 공허만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정리의 시인 것이다. 윤 시인의 시는 정적이면서 에피그람을 동원한 짧은 시어가 폐부를 찌른다. 장황한 요설로 알맹이가 없는 언어유희의 시들이 판을 치는 요즘 우회하고 비비 꼬는 것이 아니라 솔직 담백한 표현미가 오히려 우리에게 긴 여운을 주고 있는 것은 왜일까? 5. 변증의 직선 논리는 언제나 비논리와 친할 때, 논리의 역설이 곧게 펴지는 것이다. 이런 모순은 곧 다른 길을 만들면서 진행의 선상에 설 때, 침묵을 불러오는 이유를 우리는 알게 된다. 물론 찿아 오는 것도, 있고 더불어 찿아 오는, 것도 있지만 그 중심에 무엇을 항상 생각하게 하는 자세 - 시는 결코 논리로 쓰는 작업이 아니지만, 그 결과물 - 감동은 논리로 살아나는 것이다. 여기서 논리와 비논리의 상관은 언제나 문을 열어 두어야 한다. 양파껍질을 벗기면 눈물이 난다는 말에는 대상화가 나의 관계에 비논리가 논리로 다가오는 길이 보이는 이치가 있다. 상관없음에서 상관있음으로 길을 만들기 때문이다. 양파를 벗긴다. 정갈한 마음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진실을 찾아 미망의 시간을 벗겨 낸다. 내가 보고 싶었던 열정은 보이지 않고, 양파를 벗기는 일은 눈물을 벗기는 일이다. 오랜 슬픈 날들의 저녁 어스름을 벗기는 일이고 몸 안의 갈증을 벗기는 일이며 사막을 건너는 신기루를 벗기는 일이다. 모레들의 안쪽,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서걱거림의 행방을 벗기는 일 양파를 벗기는 일은 그리하여 그 변증의 직선이다. 홍문숙 중 양파를 벗기는 본질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홍문숙은 ‘정갈한 마음’을 보는 것과 ‘진실을 찾는’일이 시작되고 더불어 눈물의 길을 만난다. 이 눈물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 사물과의 접촉으로 강요된 눈물이다. ‘갈증’과 ‘신기루’와 ‘서걱거리는 행방을 벗길 때, 그 라인은 우회로 갈팡질팡이 아니라 곧게 직선으로 예고 없이 다가와 있는 만남의 길이 보인다. 대상을 시어로 포착할 때, 시인의 내면에서 오랜 기다림의 길이 있는가 하면 거침없이 직선으로 다가오는 의식의 행보 중에 시인은 후자 쪽에 거침없는 시화로 느껴진다. 서술형 종결 어미’다‘는 확신의 정신을 의미한다면, 11행의 시 중에 ’이다‘가 6번 출몰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시에 투영한 의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물 통찰의 지혜가 넉넉한 것도 사실로 보인다. 지적인 기다림이 시인에게 보이는 것은, 그의 진실성이 돋보이는 말로 가름을 하면 에필로그 한다. 2026.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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