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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的論이라는 것은 언어(言語)를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해야 하기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길을 가려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말하고 싶다. 사실 아픔,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으로 포장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현재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하면서 대가연, 하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풍경이 참으로 안쓰럽고 난망이 그지없다. 중보자의 평론가로서 시인 논을 쓰고 있는 필자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된 작품이 없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많지만, 품격에 맞는 작품에서는 낮은 수준의 모습을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이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공부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을 담은 있는 지부에도 젊은이들이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 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 캐션 마크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은이들에게 바톤 터치로 넘겨준다면 지금보다 더욱 활발한 지부가 활성화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지만 필자가 속한 지부는 아직도 우물 안에 개구리 마냥,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끼리끼리 노는 작태가 한심스럽다.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차원 5차원 나노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재차 강조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1. 봄바람 자리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 꽃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 아! 가벼워라 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꽃 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 마음의 자아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상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시어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가 않다는 것에는 늘 허전이다. 수많은,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좌고우면 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오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에 마음의 자아는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는 일탈을 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며 나를 변명하는 일로 에필로그 한다. 2026.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주식으로 밥, 김치, 된장국을 먹어도 또다시 되풀이가 정작 맛깔스럽다거나 아니면 식성에 맞아서 먹는다고 해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싫은 것을, 반복적으로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외식을 한다 해도 일상적일 수는 없으며 간혹 즐기는 정도이지 다시 밥, 김치, 혹은 된장국으로 돌아가는 회전의 일상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선대 조상이 그렇게 습관화했기 때문에, 따라 한다는 말도 그럴싸하고, 다른 방도가 없기에 관습의 길을 갈 뿐이라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굳이 외국 여행 중에도 꼭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풍경을 목도(目睹)할 수 있다. 단 며칠의 여행도 그런 감정을 갖는 이유는 우리 것에, 대한 맛이 이미 체질적으로 굳어진 현상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뜻을 우리 시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도 생각이 든다. 밥, 김치, 된장국 같은 끈질긴 맛이 떨어질 수 없는 절대의 인자를 내포한 것일까? 필자는 김소월의 1920년도 을 오늘에 명작으로 추켜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의 여성상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관습에는 당현함이 오늘에 와서 이별의 주체가 그렇게 나약한 모양을 현대의 자유 발랄한 여성에게 지표로 강요시키기에는 무리라 보기 때문이다. 문학에 보편성의 문제는 시간을 극복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보편성의 기준 잣대에 어긋난 결과라는 뜻으로 보면 시를 창작하는 시인들의 흐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실 명작의 조건은 오늘에서 내일로 혹은 미래로의 시간으로 등성이를 넘어가는 일은 보편성의 범주 속에서 설정될 것이다. 우리의 맛은 결국 보편성의 범주 속에서 입맛으로 느끼는 일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시간의 등성이를 넘어서 좋아하는 맛깔의 시- 그런 바람의 시를 만나면 어디서나 맛깔스러워 좋다. 얼치기 표정의 시가 아니라 순수한 쌀밥에 김치와 된장국을 곁들인 시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에 비유의 간격이 멀수록 신선한 맛을 전달하는 것은 시가 갖는 특권이다.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산문과는 달리 시는 있음 그대로가 시치미 속에서 상징이나 은유의 의상을 입혀 시인이 의도를 전달하는 묘미는 확실히 시가 갖는 특징이다. 더구나 장황한 진술이 아닌 응축의 표정에서 길고 긴 의미가 있을 때, 시는 산문이 갖는 농설(弄舌)을 잠재우는 매력이 있다. 세상사는 모두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설명된다. 바둑의 돌에 대한 운행에 천만의 길이 있고 운동선수의 손짓발짓에도 다양한 의도가 명백한 것은 삶의 길에서도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2등은 없다. 이겨야 한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승리의 요건이 곧 스포츠라는 이름에 승부를 위한 전략과 고도의 전술을 내장한 싸움의 세계- 16세기 이전부터 스콜틀랜드의 얼음판에서 상대의 돌을 밀어내는, 이른바 스포츠의 이름이 최근에 주목받은 스포츠, 경기이며 전략이 필요한 경기이다. 돌이 돌을 밀어내고 때로는 피하기도 하면서 돌아온 탕자처럼 미끄러지면서도, 어떡하든 한 발짝이라도 더 가야 할 집이 있다. 알몸으로 얼음 바닥 차디찬 승부의 세계에서 돌 하나가 가야 할 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 강우식 중 도달해야 할 ‘집’은 목적지이고, 어떤 방법이든 빨리 집에 이르는 비유는 곧 삶의 일상이 겹쳐진다. 탕아처럼 미끄러지면서도 ‘어떡하든’에 수단과 방법을 스포츠의 룰에 맞추어 온갖 기교를 동원하여 목적지에 빨리 당도할 때, 비로소 성공의 이름이 따라올 것이기에 컬링이라는 운동을 통해 삶의 교훈을 오버랩한 시인의 시적 의도는 세태를 비판하는 의도가 명료하다. 오리발과 변명에 악다구니로 상대의 잘못을 적폐라는 이름으로 분풀이를 일삼는 자들- 그들이 권력을 잡았다고 온갖 칼날을 번뜩이는 망나니의 춤을 바라보는 선한 사람들의 눈엔 슬픔의 길이 비극으로 다가온다. 포용과 용서를 통해 올바른 질서를 구축하는 길이 곧 삶의 길이라는 것을, 운동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일이지만 무지의 두꺼운 의상을 입은 오늘의 사회 판도를 휘젓는 자기 사상이 없는 자들의 춤판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3. 이미지 구축에 바람은 많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시어이며 낱말이다. 자유로움과 보이지 않음, 그리고 시, 공을 넘나드는 무한의 표정을 감지하는 것은, 시인의 예리한 통찰에서 나오는 언어일 뿐 바람의 실체는 잡을 길이 없다. 때문에, 신라의 바람과 고려의 바람 혹은 조선의 바람이 교차하면서 오늘에 다가올 때 바람의 기능은 변신을 자유자재로 하며 운용하는 도구의 역할을 볼 수가 있다. 샛바람, 하늬바람, 마파람, 높새바람은 방위에 따른 이름이고 고대인들은 하늘 기운 즉 우주의 숨소리로 파악했고 바람의 신인 영등(靈登) 할미와 물 할미, 산 할미와 더불어 민간 신앙에서 3대 신앙 할미 중에 자연 현상인 바람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농경사회에 풍요와 관계가 있다. 구름을 부르고 비를 몰아오는 바람은 우주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바람의 관념인 것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촉한의 정치가이자 유비의 자는 공명 직위는 무량후, 시호는 와룡이라 불렸으며 유비의 책사 재갈량이 형주 전투에서 바람을 불어와 위나라 조조를 적벽대전을 화공으로 승리한 것처럼 바람은 신비한 대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네 개의 바람벽이 네모난 방에 버티고 살아도 들어오는 바람을 막지 못해 바람이 방안으로 쏟아지고 나는 거리에 나가 홀짝홀짝 뛴다. 바람이 뒤쫓아 와서 내 품속으로 파고들다가 길가 백화점 안의 통유리 속으로 들어간다. 통유리 저쪽에는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가고 새 옷을 입은 마네킹들의 옷자락에는 쇠 파람 소리가 난다 모자를 벗어 나에게 던지는 점원들 붕대를 감으며 패션쇼를 시작하는 킬 힐 신은 마네킹들 바람을 데리고 길게 불어오는 시간이 빈집 모퉁이에 집을 짓고 끝없는 명상에 들어간다. 네거리에 갑자기 자동차가 막히는 것은 바람이 쌓여서 교통사고 없는 고속도로를 바람이 가로 막아서 뜬구름 한 점마다 어린 친구의 얼굴이 삐죽거려서- 김규화 중 시에서 관념은 주인공이 아니고 시를 이루는 요소로 작동되는 잔가지의 역할이다. 또한 관념은 정서를 내포하면서 상호 보완으로 시인의 의도인 사상이 하나로 통합될 때, 이미지 구축에 공고한 줄기를 갖고 뼈대를 완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김규화의 바람은 사위(四圍)가 벽에 막힌 상태에서 심리적인 조정을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바람과 ‘대결의 몸짓’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홀짝홀짝’으로 바람의 행위를 방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층 심리학의 기저(基底)에서 볼 때 나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이고 바람을 회피할 때, 또 다른 장면이 마네킹의 고독한 모습으로 시인의 의식에 겹치는 그림자의 길이가 길어진 인상을 배태 (胚胎)한다. 시적 화자나 ‘나’와 ‘바람’의 상관관계가 ‘마네킹’과 ‘점원들’의 행위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고 ‘나에게 던지는’‘붕대를 감은’ 불편한 행위를 일삼는 것은, 시인과 대상의 관계망이 불안 징후이면서 자유로운 바람으로 살고 싶은 시인의 심리적인 소망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이에 증거가 되는 시어는 마지막 연에 ‘바람이 쌓여서’ 바람이 가로 막아서 ‘얼굴이 삐죽거려’ 등은 시인의 속내를 보여주는 막힘의 의미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4. 추리고 나면 자기만큼의 기준을 갖고 산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리라 왜냐하면, 줄이거나 늘이거나 살아가는 일은 결국 그 둘 중 하나로 정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자기를 쓰고, 자기만큼 표현한다를 주장하면 결국 시 또한 ‘나’를 말하는 방도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자기를 부풀려 살아가기를 되풀이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를 얼마나 아는가의 무게는 결국 인격이라는 말로 정리될 곳이다. 자기 수양의 노력이 필요한 소이가 바로 풍선 부풀리기의 모순을 벗어나려는 일이 삶의 참된 길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장편 소설도 모자라 대하소설이 될 거라고 그런 사람일수록 이야기를 추리고 나면 단편 소설도 못 되는 사람 수두룩하다. 윤수천 중 직설적으로 말하면 나를 돌아보면서 살아라. 그리고 과장의 풍선을 하늘 높이 띄우지 말아라. 더 나가면 겸손이라는 인격을 갖고 살아라.의 간명한 교훈이 펄럭인다. 다변(多辯)으로 꾸미는 사람들의 말은 언제나 자기선전의 도구로 장황하지만 줄이면 빈 공허만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정리의 시인 것이다. 윤 시인의 시는 정적이면서 에피그람을 동원한 짧은 시어가 폐부를 찌른다. 장황한 요설로 알맹이가 없는 언어유희의 시들이 판을 치는 요즘 우회하고 비비 꼬는 것이 아니라 솔직 담백한 표현미가 오히려 우리에게 긴 여운을 주고 있는 것은 왜일까? 5. 변증의 직선 논리는 언제나 비논리와 친할 때, 논리의 역설이 곧게 펴지는 것이다. 이런 모순은 곧 다른 길을 만들면서 진행의 선상에 설 때, 침묵을 불러오는 이유를 우리는 알게 된다. 물론 찿아 오는 것도, 있고 더불어 찿아 오는, 것도 있지만 그 중심에 무엇을 항상 생각하게 하는 자세 - 시는 결코 논리로 쓰는 작업이 아니지만, 그 결과물 - 감동은 논리로 살아나는 것이다. 여기서 논리와 비논리의 상관은 언제나 문을 열어 두어야 한다. 양파껍질을 벗기면 눈물이 난다는 말에는 대상화가 나의 관계에 비논리가 논리로 다가오는 길이 보이는 이치가 있다. 상관없음에서 상관있음으로 길을 만들기 때문이다. 양파를 벗긴다. 정갈한 마음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진실을 찾아 미망의 시간을 벗겨 낸다. 내가 보고 싶었던 열정은 보이지 않고, 양파를 벗기는 일은 눈물을 벗기는 일이다. 오랜 슬픈 날들의 저녁 어스름을 벗기는 일이고 몸 안의 갈증을 벗기는 일이며 사막을 건너는 신기루를 벗기는 일이다. 모레들의 안쪽,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서걱거림의 행방을 벗기는 일 양파를 벗기는 일은 그리하여 그 변증의 직선이다. 홍문숙 중 양파를 벗기는 본질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홍문숙은 ‘정갈한 마음’을 보는 것과 ‘진실을 찾는’일이 시작되고 더불어 눈물의 길을 만난다. 이 눈물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 사물과의 접촉으로 강요된 눈물이다. ‘갈증’과 ‘신기루’와 ‘서걱거리는 행방을 벗길 때, 그 라인은 우회로 갈팡질팡이 아니라 곧게 직선으로 예고 없이 다가와 있는 만남의 길이 보인다. 대상을 시어로 포착할 때, 시인의 내면에서 오랜 기다림의 길이 있는가 하면 거침없이 직선으로 다가오는 의식의 행보 중에 시인은 후자 쪽에 거침없는 시화로 느껴진다. 서술형 종결 어미’다‘는 확신의 정신을 의미한다면, 11행의 시 중에 ’이다‘가 6번 출몰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시에 투영한 의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물 통찰의 지혜가 넉넉한 것도 사실로 보인다. 지적인 기다림이 시인에게 보이는 것은, 그의 진실성이 돋보이는 말로 가름을 하면 에필로그 한다. 2026.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를 쓰면 시인이라 말하며 또는 작가라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 가치는 전래적으로 동양 사회에서는 시는 심신 수양의 방편(方便)이었고, 또는 인격 혹은 품성의 발로를 나타내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 이는 시의 정신 가치 즉 Poetry에 가까운 의미라면 시인의 인격이 시의 품격과 어울리는 의미로 환치(換置)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시를 쓴다고 해서 시인이라는 칭호를 헌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금에 정신 가치가 투영되지 않는 시를 접하는 일은 부지기수로 대면하지만 감동하는 시는 희소하다는 점이다. 시와 작가의 상관이 삶의 질박함과 순수 그리고 시의 완성도에 따라 감동의 이미지가 살아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그가 짊어진 생의 의미 또한 시의 숙성과 등식으로 정리될 것이다. 시는 지식이 아니며 오히려 지혜라는 측면에 근접하기에 생의 숙성과 시의 완성도를 분리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처음으로 시집을 상재(上梓)하는 이경순의 시는 순수가 첫 번째 목록으로 다가오며 복잡하고 다기(多岐)한 갈래로 엉킨 생의 현장에는 혼탁한 악다구니의 물살이 순수의 함량을 용인하지 않는 격랑과 맞서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오연(傲然)하게 자기를 지키는 일 또한 지난한 일이라면 순수는 자기를 지켜내는 개성의 의미로 살아나는 일이기 때문에 시적 가치와 궤를 함께하게 된다면, 이경순의 시 정신에는 그만의 성을 구축하는 순수의 이름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두 번째는 언어의 감각성이다. 시의 표현 도구가 언어일 때, 시적 의장(意匠)을 갖추는 일은 일상의 언어와 시적 언어의 구분을 이해하는 절차로 시작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적인 차이를 구분하고 실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와 대면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뜻이다. 시인의 언어 감각은 그런 조건을 충족한다. 세 번째는 사물을 바라보는 투시(透視)의 눈이 치밀하고 형형한 깊이 혹은 사물의 정상적인 내면의 승화- 시인은 그런 경지를 방문했을 때, 시의 이미지가 친근 미로 다가든다. 즉,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피상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mind’s sye 즉 심안으로 바라보는 데서 사물은 새로운 표정과 신선한 의미의 맛을 내는 참신한 재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시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의 방법론이며 이를 독창적인 개성으로 표현할 때, 독자는 동화로의 손을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친근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인자(因子)에 내장된다. 끝으로 시의 잡다함 혹은 요설이 판치는 일이 시의 슬픔이라면 조사와 어미 그리고 간결함을 시의 요건으로 생각하는 간결성의 처리는 시의 가치를 높이는 시로 살아나는 일- 산문 같은 설명의 시가 아니라 시 같은 시- 이미지의 간결성에서 많은 의미를 수반하는 기교적인 특징이 있다. 이는 시적 특징이 애매모호성이(ambiguity)라는 뜻을 대입하면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제 이경순의 목소리를 직접 대면하면서 생생하게 시의 속살에 도달하는 즐거움을 얻게 된다. 2. 표정 그리기 1) 봄 그리고 가을 의식 시의 표정은 곧 시인의 표정과 같은 것이기에 시인은 자기 삶의 이미지를 환치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상력의 의상을 화려하게 꾸미고 내면으로 성숙한 표정으로 외출 길에 서면, 행인은 단번에 어떤 사람인가를 헤아리는 일이 시작되면서 호불호의 단정이 준비된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표정은 거짓이 아닌 진정성이 주요한 모티브로 작동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경순의 시에 봄 의식은 화려함보다는 순수하고 스미듯 다가오는 정서와 자연스레 만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교언영색(巧言令色)의 기교가 아니라 내면에서 발원하는 자연스러움의 이미지라는 뜻이다. 봄은 생명의 시작과 더불어 꽃을 준비하는 일면 향기로 승화의 정점을 마련하게 된다. 그럼, 다음 시로 시작을 알린다. 사 알 살 간질이는 향기 으흠 흠 파고드는 순수 꽃바람 솔 시 레로 부르는 합창 『찔레꽃 1』 중 봄의 이미지는 생명의 출발이 담기고, 만물은 비로소 시작의 길에 서게 된다. 이는 겨울의 대척점에서 희망의 메시지가 꽃으로 접점을 이룬다. 꽃은 비단 화려한 의미뿐만이 아니라 생명의 고귀한 이미지로 탄생하는 길을 만들게 될 뿐만이 아니라, 엄혹하고 강고한 겨울의 층을 뚫고 세상과 대면하는 출발의 여정은 꽃으로 생명의 궁극에 이르게 된다. 시인은 이런 예비적인 겨울을 감추고 곧바로 꽃의 향기로 제시한다. “사 알 살 간질이는 향기”는 수동적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다가오는 암시- 능동적인 상징이다. 더불어 “향기”의 고귀성이 “순수”로 포장되어 시심을 물들이는 역할을 감당하면서 다음 단계인 환희에의 합창을 이루면서- 봄날의 풍경화를 만들게 될 때,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합창으로 이어지는 조화미를 구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꽃과 향기와 순수 그리고 합창으로 진전하는 단계별마다 의미의 확장이 유난스럽게 다가온다. 『찔레꽃』 『목련』 『봄이 오는 소리』 『봄비』 『오월』 『봄의 의미』 등에 담긴 시적 이미지에 생명의 역동을 가져오는 시가 많은 이유는 이경희의 정서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뜻하는 시들이다. 왜 그런가 하면 관심이 많은 사물은 늘 시를 이루는 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눈이 부시다 눈물이 난다 너를 보면 부서질 것 같아 손자국 날까 봐 입만 벌리고 너를 맞는다 네가 나에게 온다면 나는 어느새 꽃잎이 된다. 네 안에 내 안에 『목련』 중 의식이 균일하게 통합되면 균제미를 이루게 된다. 사물과 의식이 하나로 결합하면 너도 없고 나도 없고 환상적 경지를 만들게 된다. 시의 완벽성은 이런 상태- 무아경 혹은 불이(不二)의 상태를 이룰 때, 완전한 통합에 즐거움을 만끽하게 될 뿐만 아니라 황홀경을 구체화한다는 뜻이다. 시는 이런 정서의 통합을 위해 항상 시인은 절제된 의식과 언어의 탄력을 요망한다. “눈이 부신다.” “눈물이 난다.” 는 상황은 언어로 사실상 나타낼 수 없는 엑스터시의 경지를 방문할 때 나타나는바 시인은 가장 고조된 정서의 기쁨에 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경희는 봄에서 시의 신명을 불러오고 가을에서 삶의 숙성을 이해하는 것 같다. 순수를 강화하면 눈물이 보인다. 이 눈물은 슬픔의 질축한 뜻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가장 깨끗함을 의미한다면 이경희의 가을 의식은 그런 정서가 마음의 바탕을 구성하고 있다. 가슴이 아파서, 아파서 문은 닫으면 지나던 바람도 다리 아파 절룩, 절룩 『낙엽 길에서』 중 비감(悲感)이라는 말은 정서적으로 맑음과 순수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오감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정서가 모였을 때, 마음 안으로 다가오는 소리는 이 세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순진무구가 자리하게 된다. 이 시인은 가을에서 시의 순수한 정감을 획득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투명성을 만나는 고조된 경지를 접촉하게 된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가을의 정서와 사물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이미지로 환치한다는 점에서 시의 품격이 보이며 시를 고조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의미이다. 가을이 타는 것은 풍경소리가 아니다 푸른 체온 물 드리는 소리 가을을 물 드리는 것은 낙엽의 비명이 아니다 그리움의 책장 가슴으로 넘길 때 시리다 못해 아픈 사랑 입김으로 남는다. 『가을에서』 중 위의 시는 “탄다.”와 “소리” 그리고 “그리움”의 이미지가 시인이 느끼는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가을의 풍광을 소리도 느끼는 것은 내면에서 받아들이는 정서의 감수성이고 그리움 또한 시인의 정신에서 느끼는 갈증의 의식일 것이다. 즉 대상을 생각하는 그리움도 갈망일 것이고, 가을이 낙엽으로 물든 상태에서 소리를 불러오는 일 또한 애착으로의 탐닉에서 오는 정서의 갈증 현상에 해당된다. 이런 경우 사르트르가 말한 “언어는 곧 사물일 것”이라는 유추가 성립된다. 시인은 언어로 사물을 보고 사물에 의상을 입혀 정신세계의 성주로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경희의 시에서 봄은 생명으로의 약동을 감지하고 가을에서는 시인의 정서가 고양되는 높이에서, 천진하고 순수함과 조우(遭遇)하는 이미지의 중심이 되는 것 같은 가을의 투명성이 들어있다. 2) 그리움의 사랑 인간은 스스로 깨닫는 인지 능력이 있어 대상에 접근하는 양상이 공격일 수도 있고 부드러운 양상을 나타낼 수도 있다. 전자에는 힘의 논리가 작동되고 후자는 부드러운 마음이 대상에 스며들려는 열망의 호소가 될 것이다. 시에서 후자에는 자기의 정서를 대상과 통합하려는 투사의 경우가 우선일 것이다. 그리움을 사랑의 전 단계인 일이라면 사랑에 의한 필수적인 현상이 그리움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난다. 애착에는 그리움이 나타나며 이는 대상이거나 사물에 접근하기 위한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움은 스스로를 낮게 그리고 약(弱)한 척하는 의미가 더욱 승하다. 만나지 못하는 친구나 혹은 연민의 감정을 가진 대상 또는 사랑에 갈증이 있을 때 그리움은 표정을 숨기면서 일정한 의도 혹은 구체적인 의식의 통로를 찾아 나선다. 잠든 별빛 가슴으로 헤는 밤 양파 껍질 벗기듯 한숨 한 커플 벗기면 꽃 한 송이는 눈물 위에 머물고 별 하나 가슴으로 내리면 온 밤 주르륵 흐르는 그리움 『눈물』 중 이경희 시인의 시 의식은 동적이기보다는 정적(靜寂)인 데서 명확한 시의 의도가 빛난다. 왜 그런가 하면 요란하게 치장하고 꾸미는 것보다는, 오히려 안으로 감추고 바람결에 언뜻 나타나는 것 같은 대상의 출현에 놀람을 주는 기교라 보는 것이다. 예로 들자면 밤이 부정적인 상징이기보다는 모든 물상을 포용하고 감싸는 모성적인 상징- 별이 뜨고 의식의 헤아림으로 발동되고 또 꽃과 같은 사물을 고르는 정밀이 오히려 소곤거리는 밤의 이미지와 어울려 더욱 두드러진다. 별은 하늘의 꽃- 이런 정서는 밤이 되어 오히려 살아 숨 쉬면서 속삭이는 고독이 눈물로 이어진다. 물론 칙칙한 비극 눈물이 아니라 카타리시스의 순수가 눈물을 불러오고 이런 상황이 그리움의 통로를 만들면서 미지의 길을 내려는 발상이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배려의 나래로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일이다. 한사코 절룩거리는 아픔을 침묵으로 끌어안을 일이다. ...(중략... 사랑한다는 것은 울창한 잎이 없어도 그늘을 만드는 일이다 머리로 푸른 하늘을 이고 부지런히 물을 찾으며 말없이 기다리는 일이다. 지친 날개 접으며 스르륵 날아오르는 그댈 기다리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중 시라는 것은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느낌을 보편적인 감동으로 바꾸는 길에서 감수성의 특성과 만나는 일이라면 이경희의 시는 항상 조용함으로 길을 만들려는 속삭임이 있다. 때문에, 파도와 격랑이 아니라 조용한 파문으로 물살을 만들기 때문에 안온하고 정겨움을 뒷맛으로 남긴다. 『사랑한다는 것은』의 시적 뉘앙스는 “아픔”에서 “향기”를 유추하고 마지막엔 “그늘과 기다림”의 뜻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이런 특징은 식물적인 정서-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서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을 불러들이는 나무의 이미지에 닿고 있다. 사랑을 찾아 나서는 투사적인 이미지보다는 다가오기를 바라는 점에서 여성적인 섬세함이 이경희의 의식을 요소들이라는 뜻이다. 3. 에필로그 한 사람의 시에는 그 사람의 전 생애가 담겨 있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길이 보인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순수하고 투명한 의식을 포장하는 진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마치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언어일 때, 그 사람의 궤적은 감동을 잉태할 수 없다는 뜻에서 시는 진실에의 기준이기 되기 때문이다. 이경희 시인의 시는 화려하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하고 투명하다. 이는 삶의 가치와 시의 가치가 일치하는 동일성을 느끼기 때문에 나타나는 감동- 순수의 여정인 것 같다. 봄의 정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마음, 봄의 생기로 가득한 꿈 꾸기의 일환이라면 정서의 환치가 정신으로 이어진다. 가을은 순수를 나타내는 내면 정서의 모습일 것이고 이런 정서는 미지의 그리움에 맞닿고 있다. 인생의 상념에는 고단하고 슬픔의 칙칙함보다는 희망과 꿈에 집착하는 건강이 유다르고, 정밀한 시적 특질과 통로를 같이하는 일에서 감동을 생산한다. 가정의 소중함이 행복의 목표로 설정될 때, 살아 숨 쉬는 존재로 크게 각인된 일이 일상의 모습처럼 보이는바 이경희의 시는 가정에서 호흡하고 써내려 가는 행복한 작업으로 풍경으로 연출하는 시인- 그렇게 느껴지는 시인이라 느끼며 장문의 평보다는 여기서 줄이고 에필로그 한다. 2025.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인간에겐 저마다의 표정이 있고 변증법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대화술, 문단법” 등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사유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인간은 삶의 모습을 나타내며 개성과 삶의 압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시 또한 그런 도정(道程)을 문자로 표현하는 자기화의 방법에서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는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인생을 압축하면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단면으로써 생의 전부를 보여주는 압축성- 단면으로 생의 전부를 보여주는 방법은 시의 재능을 요구하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풀이나 꽃에서 허무 또는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고, 길가의 돌멩이에서 굳은 신념과 의지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철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하는 특징 때문에 시적 장치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시의 위의(威儀)는 비유나 상징 또는 역설 등의 적절성에서 삶의 모습을 독자가 느낄 수 있을 때 감동의 허니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시적 감동은 목적이자 결과이기에 1. 생의 체험에서 독자에게 추체험의 길을 제시하고 2. 시적인 압축성에서 산문과는 다른 의미의 다양성-Ambigeyty에서 시의 특성이 나올 수 있다면, 시는 과학이 아니고 다만 시적인 여백을 가질 때 비로소 시만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 시는 시라야 한다. 그렇다면 시는 정작 무엇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 시일뿐- 시는 정답을 갖지 않은 표정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논리 이전의 논리가 정치(情致)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과학 이전의 과학- 현상이지만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을 아우르는 삼라만상의 우주의 모두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누리는 영예는 이러한 시를 쓸 때 비로소 지고(至高)한 자리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김수자의 시는 다양하고 감각적인 표현 에스프리를 접하는 일인 듯하다. 시는 사물을 바라보는 감수성을 어떻게 포장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서 시인의 개성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하늘 높이 매단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긴 줄도 없는데..... 훤하게 비춘다. 너무 높아 끌 수가 없어 밤낮 자유로이 놓아두니 새 떼들이 늘 놀다 간다. 중 시는 응축(凝縮)에서 탄력이 생기고 그 탄력은 생동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상력의 지평은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시의 맛을 높은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지각의 자동화 현상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이기 때문에 시의 위의 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나무}에서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비유의 시어가 나오는 것은 사물을 변용하여 상상의 지평을 넓히는 시적 장치에 의해 감각적인 신선미를 자극한다면 김수자의 “연시 나무”는 매우 신선한 듯하다. 60자 조금 넘게 불과한 어의 구조에서 붉은 연시 감의 전기가 통해서 불이 켜지는 “훤하게 비춘다”의 생각과 훤한 불빛 아래 “새 떼들이 놀다 간다.”의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 구조를 파악할 수가 있다. {2. 시 의식의 파노라마} 1) 비움과 채움의 허무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기다리고, 비움에서 미래는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알고 난 후에 허무라는 의복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는 예수의 허무나 공자의 천상(川上)의 탄식 등은 본질에 눈을 돌리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색증시공의 지혜- 바누아 –진리의 이름 앞에서는 비움과 채움이나 없음이나 있음 등 현대 물리학의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이다. 물론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감득하게 함으로써 감동과 순수 그 자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챙기지 마라 원래 내 것이었던 것 하나도 없다. 가져가게 두어라. 집어갈 것 있으면 잘 산 것이고 줄 수 있을 때가 행복한 법인 것을 버릴 것 있으면 버려라 덜 버린 것 찾아 새 떼들 날아들면 그것도 행복인 것을 버린 것 그리워하지 말고 빈 마음이라 채워라 중 비워 있음이나 채워있음은 다만 그대로의 현상일 뿐이다. 교실은 비워 있기 때문에 채움이 있고 수레는 비웠음의 바퀴 때문에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빈 들녘”이 허무라면 채움이 지난 뒤에 나오는 의미일 것이지만, 큰 개념에서는 결국 의미와 무의미가 교차하는 우주의 본질일 뿐이다. 이 교차의 왕래에서 인간은 다만 오고 가는 길을 바라보는 혹은 추체험으로 지나가는 존재- 이런 명상적인 현상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없음”에서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고 이기(利己)의 처연(凄然)함이라면 시인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은 행복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체득하고 있다. 이는 삶의 달관자의 의해 발성할 수 있는 음성이다. 결국 버린 것은 채우는 일이고 채우는 것을 줄 수 있을 때의 행복- 시혜(施惠)의 즐거움을 얻는 길을 주장- 비움의 가벼움이 아니라 오히려 채움이 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남은 볏짚으로 부끄러운 데 대충 가리고 그냥 아무 감정 없는 척 살 생각이다. -중략- 중 발가벗음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가리고 위장함으로써 단순성이 복잡으로 변했고 과학이라는 이름에서 처절한 자기 위장에 슬픔을 쌓게 되었다면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의 가벼움은 자기와 만나는 진솔함이고 이런 진실에 다가가면 감동이 일렁이게 된다. 순수란 시의 본질이고 시가 순수의 이름일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른들이 색깔이 좋다. 혹은 무늬가 좋다느니의 찬탄으로 위장할 때 “임금님이 벌거벗었네”의 우화는 그대로 아이의 마음이 바로 어린애의 눈과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시인이 되는 것= 김수자의 마음에는 순수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에서 “아무 감정 없는 척”-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없는 척”이 다소 걸리는 표현이지만. 2) 사는 법 길 찾기 살아있는 자는 길을 가는 방법이 선택되기 때문에 어떻게 목적지에 이를 것인가의 대한 자기만의 방법이 적용되면서 삶의 도정을 이어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명료하게 혹은 애매하게 등등 선택의 여지는 개성과 환경이 복합되어 한 사람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시는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지만 그 방법은 시적 장치에 의해 위장하는 절차로 나타나기에 그 껍질을 벗기면 시인의 모습이 나타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파리는 가시를 만들고 가슴 적셔 줄 물이 없어 차라리 몸이 타들어 가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강한 척 내심 그리운 것 많아 아닌 척 자존감 그 힘으로 산다. 선인장처럼 산다. 바보처럼 말이야. 중 가시 선인장에 접근의 용이성이 아닌 이유는 “가시”를 내보이는 것과 “물”이 없지만 갈증의 내색을 보이지 않고 강한 척하는 몸짓의 슬픔과 그리운 갈망이 많지만 그런 모습이 혹여 “자존감”을 상실한 모습으로 투영될까 조바심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가시 선인장처럼 산다”는 평가를 “바보처럼 말이야.” 와 등가를 이루는 대입은 스스로 불러들인 광장의 고독 같은 인상이다. “강한 척”의 행위는 자기변호의 논리를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따라나서는 서글픔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이란 그 미지수} 사랑이라는 말에는 이성 간의 관계를 넘어 헌신의 아가페적인 넓이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종교는 사랑을 말하고 시는 순수의 진리를 말하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M.A moid는 말했다. 인간은 죽는다는 필연의 법칙을 지혜로 터득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 더 넓은 사랑의 이상을 설정하고 고지를 향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은 인간이 지고함에 이르고자 하는 사랑의 목표일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종교적인 사랑이나 사랑은 단순하다. 진리는 복잡을 단순으로 처리하는 데서 나오는 이름이라면 사랑도 그 자체의 단순함에 벗어나서는 안되기에- 꾸밈은 이미 순수를 일탈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돌이키기 어려울 때 사랑이 다시 든 후에 그 때서 알면 안 되리라 세상일 힘들어 깊은 통증을 느끼기 전에 사랑이 모자라 슬픈 운명되기 전에 힘껏 힘껏 사랑해야 하리라 가슴 밑바닥에 남모르게 숨긴 가는 인연의 끈 그마저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사랑해야 하리라 사랑 그 질긴 운명을 위하여 중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비우면 비울수록 충만으로 가득해지는 이치에서 진실한 사랑은 문패를 달게 되는 것이다. 이기와 질투 혹은 자기 것을 고집하는 허위 앞에서 사랑은 이미 이름을 버리고 달아나기 때문에 인연의 소중함- 헌신의 의미를 내면으로 알게 된다. 더구나 인연이라는 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헌신이 주는 행복을 아는 일이 보다 고귀한 행위의 뜻일 것이다. 사랑은 이심전심- 동양에서는 원래 말이 아니고 마음의 전달이라면 서양은 사랑을 날마다 혹은 순간마다 확인하고 증명하는 점에서 신체 접촉이나 사랑한다는 말로 끓임 없이 증명하는 방법이고, 동양은 증명이 아니고 다만 눈으로 마음으로 – 이심전심이나 심상상인의 방법에 서 정적(靜的)이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알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가 되고 맘속의 말도 다 들을 수 있는 것 가진 것 다 주다 못해 마음속까지 주고도 아깝지 않고 받을 계산도 하지도 않고 줄 것이 더 없는 것만 아쉬운 것 그런 것이 사랑이지 중 스탕달의 {연에론]에 생리적인 연애가 서구적인 방법이라면 동양은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거리에서 사랑이 잉태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서양은 접촉에서 시작하고 동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근미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의 차이요. 생활의 축척된 방법에서 오는 것이지 어느 것이 우선한다는 발상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랜 관습과 시간이 경과한 뒤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가페적인 헌신에서 참된 사랑이 탄생되는 것이다. “가진 것 다 주고 주다 못해” 더 줄 것이 없어 애타는 마음은 순수요. 깨끗함이고 질박함이다. 사랑은 지위나 명예 혹은 자랑이 아닌 다만 주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자발성의 이름이기에 참된 사랑은 마음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투명한 에너지의 이름이다. 김수자의 시는 사랑의 이름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을 투척하고 있음은 일상에서 그런 체험의 가치를 아는 데서 나온 모습으로 보인다. [3. 에필로그 ]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변용을 거칠 때, 화려한 변신을 맞게 된다. “나를 나은 여자”가 어머니라는 정의나,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인 결합물인 액체를 물이라고 설명하는 사전적 의미에는 삭막한 느낌이 오지만 그러나 시적인 어머니나 물에서는 기쁨과 자애를 느끼는 것이 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는 삶의 윤활유요 생의 의미를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이 시의 효능이다.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도래하기 때문에 감동이 물길을 내는 이치처럼 시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임무- 시인은 이런 임무에 헌신하는 사람인 것이다. 독자는 이 같은 감동의 물길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 더 큰 세계와 조우(遭遇)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인의 시에는 자기 표정과 허무의 의미가 자리하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순수와 투명한 손짓에 감동을 맡기면 예술혼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움에서 채움의 원리를 터득했고 이는 상징과 이미지의 손짓에 삽상하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해지는 느낌이다. 삶의 문제를 천착(穿鑿)하는 시인의 노력은 항상 긴장과 신념의 불을 켜고 내일로 다리를 놓으려는 발상으로 땀을 흘린다. 이 같은 순리에 우선하면서 기다림의 눈빛이 선명하다. 사랑를 숙고하는 김수자의 시는 헌신과 아가페적인 넓이에 자유정신이 숨 쉬고 있어 따스하다. 아울러 인연의 소중함을 신념으로 앞세우고 자연의 이치를 시에 수용하며 섭리를 따르는 시인의 모습에 찬사를 보낸다. 이 모두를 하나로 결합하면 시는 변증법의 기법으로 안내의 길을 내는 인도자의 모습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느끼면서 나가려 한다. 2025. 06. 금요저널 주필/칼럼니스트/이승섭
by 수원본부장 손옥자詩라는 존재(存在)는 화학적(化學的)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다르게 설명하면 1과 2를 더하면 3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번호가 바뀔 때 변하는 감동(感動)을 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는 방법 - 즉 상상과 창작(創作)이라는 작용(作用)이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 詩를 쓰는 일은 이런 이치(理致)이고 시의 상상력은 사물을 물활적으로 살아나게 하는 역할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意味)로 탄생(誕生)하는 일정한 절차(節次)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能力)은 시인 개인의 전적인 역할이면서 시인의 능력에 귀속(歸屬)되는 이유가 될 것 같다. 또한 시는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의 따라 개개인 눈이 작용하는 것이다. 보는 시인 마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얼마나 창조적(創造的)이고 상상적(想像的)인 물상(物像)을 보느냐에 따라 창조의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想像力)의 한계를 한층 높일 때, 詩는 나타내는 이름일 것이기에- 이연숙의 시는 다소 애매모호 하지만 일정한 詩的 구축(構築)의 탄력을 가지고 명료한 이미지 구축과 변형(變形)의 길을 점검(點檢)하기로 하자. 무엇이 무엇을 가져온다는 형태는 가장 기초적(基礎的)인 (意識)의 전달경로이다. 구름이 바람을 가져올 수도 있고 바람이 그리움을 실어 오는가 하면 바람, 구름, 물 등이 사랑을 실어 오는 형태로 詩心을 옮기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네가 내 곁에 없어도』나 『비로 오시나이까』 등이 시인의 정서를 승화(昇華)시키거나 혹은 이미지 공간(空間)으로 끌고 가는 일정한 메신저 역할이 있어 목적지(目的地)에 이르는 형태를 취하는 구성에서 그를 엿보게 된다. 너를 보내고 설레는 마음 눈 감아도 모습 그대로인데 세찬 바람이 불어도 나 마지막 잎새로 남고 싶다. 나 네가 없어도 그날을 기다리련다 중 역설적(逆說的)인 방법(方法)을 동원하여 “네가 내 곁에 없어도”라는 뜻은 너의 크기를 강조하려는 발상(發想)으로 출발하여 그리움의 간절함을 토하고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싶다. 詩는 역설(逆說)의 특성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가는 시인의 재능이며 시의 제작(製作)에 (透映)되는 의식의 집중화를 위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상징을 위한 문맥(文脈) 상호관계 속에서 모호함을 가지면서도 전달하는 의미의 기교가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너와 나의 결합(結合)은 허상(虛像)의 네가 없어도 “눈을 감아도” “혹은 없어도” 반복에 따라오는 그리움은 하나로 길을 만들고 詩의 구조에 응집(凝集)되는 것이다. 먼 시야에 스치는 소리가 반가운 마음으로 가슴 열었더니 보고 싶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뿌연 빗물이 되어 오시나이까 그저 가슴까지 차오르는 그리움 애타게 불렀는데 멀지 않은 길 이제야 찾으시나요. 질퍽 이는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어도 이 밤 기억에 고이 간직하겠나이다. 〈비로 오시나이까〉중에서 이연숙의 詩는 물(水)과 그리움의 특성을 잘 이해하면서 시인의 정서를 잘 이끌고 가면서 어떤 미지(未知)의 공간을 방문하여 변화(變化)를 맞게 되는 상황 상황에 적응(適應)을 잘하는 것 같다. 그저 가슴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을 부르는 애절한 형상(形像)을 빗물로 인해 비로소 만남을 이루는 절차가 수행된다. 그리고는 “기억에 고이 간직하겠나이다” 의 절규가 승화되어 경이로움마저 든다. 또한 후회가 없는 만남 즉 간직이라는 단어가 주는 메시지에서 나와 함께 일치한다는 뜻이기에 선택 또한 “이 밤”이 막다른 골목이지만 “고이 간직한다.”는 마음의 정서가 시인의 아름다움만이 남는 것이 아닐까도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의 고운 마음이라 할 것이다. 웃음마저 잃어버리고 숨 쉴 수 없이 늑골 뼈속 아픔일 때 네가 그리우면 빗물로 찾아가 느릿한 거북이 되어 알몸으로 눕고 싶다. 비 내리는 바다의 바람으로 눈물 삼키듯 온몸 섞어 하얗게 부서지는 泡沫(포말)이 되고 싶다. 〈바다 네가 그리우면〉중에서 이연숙은 바다나 혹은 파도와 상관관계가 있는 듯하다 아니면 그러한 곳에서 살고 있거나 - 왜냐하면 주로 등장하는 바다, 혹은 파도, 강, 등의 이미지가 많은 것은 환경적인 요건(要件)에 의해 詩의 이미지를 유추할 수 있다. 『보고 싶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고향 바다는』 등은 물의 이미지가 주는 이동성을 통해 그리움의 추구 등 상당한 詩語에 이러한 정서를 동원하는 것은 시인의 삶의 직접적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기가 하나도 없는 푸석한 마음에서 바다를 부르는 것은 파도에 의해 목마른 정서를 옮기고 싶은 감수성(感受性)의 절실성이 정신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인자(因子)라는 점이다. 이러한 열망(熱望)의 정서는 “알몸”이라는 상황까지 설정해 가면서까지 “섞어 섞어”가 반복적으로 나와, 바다가 한 몸이라는 것을 호소하는 듯하다 물론 하나의 결합하는 ‘한 몸’은 파도가 되어 “부서지는” 포말이 되고 싶다는 완벽한 통합체의 실현을 꿈꾸는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눈물로 하나가 되는” 것과 “바다” 혹은 파도가 하나이기를 지향하는 것은 결국은 물의 속성을 통일체를 이루려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詩語가 다를지언정 목적을 향하는 의도 에서는 동일한 구조로 결합하는 은유의 원리가 아닐까 한다. 자아에서 흐르는 뜨거운 입김 품어내며 네 전신을 지날 때 구겨진 가슴 움츠린 것에 적당히 젖은 채 펼쳐진 날개 위로 눈물은 다시 하얀 입김 피워 올리고 감추어진 지난 이야기 다시 기쁨이 되고 사랑이 되어라. 중에서 자아(自我) 즉 마음이라는 상징이 인간의 심장을 휘 돌아서 눈물로 변하고 다시 그 눈물은 수증기로 기화하여 하늘에 이르면 사랑의 기쁨을 가져오는 순환의 이어짐은 계속되는 것이기에 이런 현상은 사랑의 영원성을 뜻하는 원 으로서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보고 싶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고향 바다는』 등은 사랑의 순환은 언제나 노래로 다가오는 길을 만들고 있으면서 듣려 오는 소리의 감각(感覺)에서 다시 천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사랑의 고귀함은 시인의 정서를 따스하고 포근함으로 감싸는 온기의 삶의 길을 채색(彩色)하는 인상이 풍긴다. 이는 고귀함으로 세상을 포장하고 詩語로서 그리려는 자아(自我)가 형성되어 있기에 향기와 같은 사랑의 그런 아름다움이 아닐까 한다. 2. 詩는 마음의 그림을 그릴 때 아름다운 정서가 채색(彩色)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채색의 아름다움을 그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화려한 유채색(有彩色)의 공간을 그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인 개개인들만의 개성이고 창조의 기법(技法), 상상의 기법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이연숙의 詩는 화려하기보다는 검소하고 열정적(熱情的)이기보다는 따스한 것 같다. 이런 현상은 그만의 개성이며 삶의 모습을 詩로 투영하는 결과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詩는 마음이 그리는 자아가 창조하는 고백(告白)을 문자로 포착(捕捉) 하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詩는 물기가 젖어 있다. 다시 말하면 물에 의해서 정서를 이동하는 특성이 있으며 시적 대상에 물기가 젖으면 화학적(化學的) 반응(反應)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변화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물은 곧 아름다운 꽃으로도 변할 수 있고 무지개로 변화를 시키기 때문에 물로서 전달하는 기교야말로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는 과학적인 개념(槪念)이 우선하고 영원성을 믿는 의도를 느끼게 하기에 - 특히 바다, 강, 모두 물로서 이루어져야 하기에 아름다움을 그리려 하는 아니 전달하는 독특한 시인- 이연숙의 시는 아마도 그렇게 물처럼 맑고 영원하다. 그리고 신선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길이 보이는 것 같아 흐뭇한 기분으로 나가련다. 2025.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시는 사람의 삶을 그리는 예술이다. 물론 언어라는 포장을 통해 미적 감수성을 발동하는 점에서 기교도 필요하며 진실함도 무엇보다 시에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시는 언어의 응축을 통해 시인 자신을 그림으로 그려낼 때 기교가 앞서는 사람도 있고 또는 있는 그대로 목 눌(木訥) 할지라도 친근함을 낳게 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논어(論語)의 자로(子路) 편엔 ‘강의(剛毅) 목 눌(木訥) 근인(近仁)’ 즉 굳세고 소박하고 말을 뜨게 하는 일은 어눌함도 가깝다 ‘는 말을 했다. 청산유수의 유창한 말이나 억지로 굳센 척하는 사람은 믿음을 보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소박(素朴)하고 다감한 사람에게는 믿음을 보낼 수 있다는 뜻이 강조된다. 시는 사람을 그리고 말하는데 진실이 가장 큰 무기라는 설법이 유효하다면 이태연의 인간미는 그렇게 시로 녹아들어있으며 진실성에 가깝다 할 수 있겠다. 시를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이고 유교가 왕성할 때 배운 시인의 연배는 그럴 것이다. 심지어 벼슬길의 시험 과목조차 시였다면 시는 곧 지혜를 담고 있는 도구라는 뜻이고 이를 통해 인간의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시의 특성이 곧 인격이나 품성의 뜻이라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시경(詩經)에 소재한 305수는 한마디로 사무사(思無邪)라는 정의에 이르면 시는 인격 수양 도구라는 척도(尺度)에서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이라는 뜻이 앞선다. 풍자와 해학 그리고 심성을 파악하는 도구로 시를 생각한 동양문화는 그만큼 시의 가치를 우선하는 풍조를 뜻한다면 서양은 음악적 기교의 그릇쯤으로 생각한 데서 차이가 있다. 더불어 인간을 강조하는 뜻이 아니고 시는 항상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형상화에서 그 가치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 응축(凝縮)의 표정과 수축』 시가 산문과 외형상 다른 것은 응축(凝縮)이라는 시각적인 특성에 있다. 다시 말해서 산문은 팽창적이지만 시는 응축 적이고 수축 적인 특성을 갖는 언어 표현이다. 응축을 위해서 시론의 논리는 여러 장치를 마련한다. 리듬의 필요성과 율격 혹은 이미지의 창출을 위시해서 비유라거나 상징, 인유, 패러디 혹은 어조의 문제, 퍼소나, 아이러니, 역설 등등 많은 이론의 등장은 결국 시적, 언어는 줄임으로의 원리와 같다는 설명이 따라온다. 미상불 시는 언어의 형태가 산문과 달라야 한다면 결국에는 짧은 호흡으로 소화하는 장치가 필수적인 문제로 등장한다. 물론 이런 절차를 수행하는 시 쓰기는 사실 산문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행과 연을 끊어 시라는 표정을 만드는 일은 무지의 일환일 뿐-정작 시를 쓰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얀 구름 위 떠다니는 그대 모습 그려봅니다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잔상에 눈을 감아보나 흔적 없는 잔흔만 남기어 잔상으로 떠도는 그대 모습 잡으려 짓무른 눈 비벼보나 모두가 허상이라 애써 풀 죽은 모습 감추고 살며시 눈물 훔치니 나 여기 있어하며 잔상으로 보입니다 그대가 중에서 4연 12행에 담긴 내용은 그대라는 미지의 대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린 시이다. 찾으려 하나 찾을 수 없는 얼굴을 구름으로 형상화하기도 하고 결국 모두가 허상으로 남는 허무를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마지막 연에서는 찾을 수 없던 ‘그대가’ ‘나 여기 있어’라는 역접의 형태로 나타날 때, 마음에서는 항상 자제하고 있는 그대를 설명하고 있다. 결국에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으로 그대가 내 마음속에 들어 있다는 형태의 설명이지만 어떻게 언어를 배열하는가의 문제에 따라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갖는 것이 시의 특성이다. 심지어 맞춤법이나 마침표의 있고 없음에 따라 시의 맛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태연의 모든 시는 비교적 단문으로 형성되었다. 무엇은 무엇으로 끝나는 형태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전달의 묘미를 줄 수 있는 요소가 되는 것도 독자를 지루하게 끌고 가는 것을 자제하고 있음을 칭찬하고 싶다. 또 다른 특성은 시의 탄력이 응축에서 나오는 장치라면 이런 일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때 신선감을 줄 수 있어야 함도 따라오는 조언일 것 같다. 3. 계절의식 봄은 만물이 생성하는 점에서 시작이라면 방위상으로는 동쪽이고 해 뜨는 공간이 된다. 얼었던 땅은 풀리고 어둠에 숨어있던 싹은 이름을 알리기 위해 분주한 때가 된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계절이 따로 있다. 어떤 사람은 눈 내린 겨울을 사랑하고 또는 낙엽이 지는 쓸쓸함의 가을 혹은 태양의 계절 여름 등등 저마다 다른 이유로 좋아하는 계절이 개성에 따라 기호로 선택된다. 이승섭의 계절은 봄이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시의 구성으로 보면 그 나름의 사연이 들어있는 것 같다. , , , , 등 상당한 빈도의 봄 시가 시인의 정신과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봄은 비로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겨울을 단절하는 것은 비가 내림으로 인해 모든 생명을 깨우는 역할이 비로부터 시작된다. 아울러 굳은 땅을 녹이는 절차가 구체적으로 시작하는 일은 비의 소식으로부터가 된다. 요란했던 시간 지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어둡고 괴로웠던 모진 시간 기억 저 너머 버려지고 아지랑이 꽃 되어 바람 든 이내 마음 활짝 핀 봄이 되고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리운 오월이라 예쁜 구름 흐르고 내 가슴에 햇살이 살며시 아지랑이 되어 만개한 푸른 잎 꽃이 되어 활짝 웃더니 속삭이며 손짓하네 중에서 오월은 정신없이 꽃들이 아우성치는 계절이다. 봄이 무르녹았고 그 봄의 중심에 오월은 화려한 이름의 정원을 꾸미는 시간에 시인의 마음은 부풀어 오르는 구름이 된다. 이를 일러 ‘그리운 오월’로 명명하고 꽃들이 속삭이는 의인의 눈짓을 친숙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봄은 시인의 정서를 용약(勇躍)하게 하고 마음의 에너지를 충만으로 이끄는 계절의 봄은 특별한 의미로 진전된다. 만개한 꽃들은 바람에 의지해서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특성을 설명하게 된다. 바람이 시인의 의도를 전달하기도 하고 또 미지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봄 내음 향기 취해 봄의 사랑 가슴에 안고 그대 곁으로 향해 봅니다 봄이 오는 멜로디 따라 당신의 마음 알 것 같이 싱그러운 그대에게 가봅니다 중에서 4 연중 2연을 옮겼다. 그 모티브는 향기로 그대에 이른다는 뜻이 압축되었다. 물론 바람에 의해 향기로 변모하고 이내 그대 앞에 이르면 그대의 반응은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연상하는 이미지가 천상의 높이로 솟아오르는 뜻을 전달하고 싶은 시심(詩心)에는 시인의 마음이 담긴다. 시는 곧 대상과 시인과 일체화를 꿈꾸는 일이기에 향기에 젖는 일은 곧 일체화의 조화 속에 들어있다는 암시를 만나는 일이다 가을이나 겨울로 접어들면 의식은 작아지고 안으로 어둠을 불러들이는 절차가 바람으로 시작한다. 차디찬 바람에 아리고 시린 마음 네게 쫓아가본다 떨어진 꽃잎 한 장 우는 가슴에 갈피 끼워 두었노라 훗날 내 모두 다 잊는다면 조심스레 펼쳐보리 중에서 겨울은 그리움을 저장하고 또 우편으로 보내려는 마음이 조바심의 때가 된다. 바람은 서성이면서 아우성이고 세상은 숨죽이고 잠이든 양 고요한데 오로지 바람의 햇살이 아픔을 더해주는 기승에 두려움이 거칠어진다. 때문에 떨어진 꽃 잎 한 장을 갈피에 끼워 저장하는 그리움의 아름다움이 상상의 나래를 타게 된다. 4. 전달의 이미지- 물과 바람 물은 스미는 것이 특징이다. 술 또한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점에서는 물과 같을 것이다. 다만 물은 흙으로 스며든다면, 술은 인간의 몸으로 스며 들어가는 점에서는 모두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태연의 시에는 이런 전달의 메시지가 시인의 의식을 이동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바람도 물과 같이 공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역할에서 동일시되며 제한이나 막힘이 없는 자유자재의 특성이 여타 이미지와는 다르다. 삭풍에 땅에 내린 혹한(酷寒) 숨죽이며 동면하는 사이 숱한 사연들 주마등을 넘습니다 깊은 연무로 변한 시림(사람)을 곡주에 고운 빛 품속인 듯 그대에게 녹아들어 갑니다 중에서 술이 물처럼 스며드는 속성- 이는 그대라는 대상에게로 지향하는 점에서 애절 성을 간직하게 된다. 더구나 겨울의 얼음장 같은 시절의 혹한 속에서 ‘숱한 사연’을 보내는 일은 불가능의 벽이 가로막힐 때 술은 위안이자 그대라는 체온과 마주하는 상상의 공간이 될 것이다. 결국 ‘곡주의 고운 빛 품속인 듯/그대에게 녹아들어 갑니다’의 도달점이 그대라는 대상과 일체화의 꿈을 이루게 된다. 바로 술의 힘에 의지해서 말이다. 5. 세월 그리고 마음 인간은 누구나 세월 속에서 살고 또 세월의 공간을 벗어나는 방법이 없다. 마치 존재는 일정한 공간 속에서 운명을 이끌어야 하는 숙업(宿業)의 길을 가고 있음에서 한계의 삶이 곧 인간사일 것이다. 세월은 곧 삶에 약속의 이름이고 이 약속에 충실할 때 희망의 끈이 펄럭이는 삶으로의 환치(換置)가 달성을 향해 문을 연다. 내 마음 씻어 엉켜지고 흐트러진 마음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살며시 숨겨놓고 싶습니다 고뇌와 번뇌와 가득한 그 무엇을 봉오리가 꽃이 되듯이 깨끗이 씻기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씻어 버려 그냥 잔잔한 맑은 물처럼 사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습니다 중에서 ‘씻어버려’와 ‘씻어 버려’는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씻다. 의 의미이고 후자는 씻어서 버린다의 뜻이라면 후자에서 시인은 왜 버려야 하는가를 모를 일이다. 물론 씻어 깨끗한 마음을 갖고 살고 싶다는 소원의 뜻이 강조되면서 세월 속에 담겨 혼탁한 마음을 정화하려는 의도가 승(勝)하다는 인상이 앞선다. ‘깨끗이’ 살고 싶다는 소원은 인간 누구나 갖는 보편적인 심사일 것이라면 마음의 순화를 염원하는 일은 삶의 본질이고 근원이 될 것이기에 추구점이 확실한 목표로 작용된다. 시인은 이런 정화와 순화를 위해 자정의 노력을 갖고 삶의 언덕을 넘는 일이 일상적일 때 세월의 벽을 넘는 승리의 깃발이 예약되는 것 같다. 마음이 깨끗하면 곧 아름다움을 만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에필로그 -성숙을 위한 가락 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언어로 표현하는 실행의 예술이다. 때문에 시인이 쓰는 언어는 창조라는 말로 대신하듯 진정한 아름다움에 조건 없이 헌신해야만 한다. 이태연의 시는 물과 바람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이동을 도와주는 메신저의 역할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의미의 공간으로 전달을 수행하는 길잡이가 되는 인상을 준다. 모든 시인은 표현 대상에 그리움을 보내면서 애타는 마음이 시의 구성요인을 이룩하지만 누구나 성공의 메시지 작성은 아닐 것이다. 여기엔 진실한 체험의 요인들이 복합적 혹은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이미지를 완성할 때 시인은 후면에서 조종 혹은 지휘의 총책임자의 역할을 다할 수가 있다. 이태연의 시는 이런 면에서 세월을 끌어와 성숙을 위한 가락을 창조하는 임무가 다양한 표정으로 삶의 기억을 심고 있는 시인이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와 시를 변화로 인식하는 노력은 앞으로 이태연의 시적 무게라는 조언을 남기면서 책임을 벗어나려 한다. 2025. 06. 대중문화 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정서 균제미(均齊美] 글을 쓰는 일이란 엑스터시(Ecstasy) 즉 감정의 경지 또는 신의 경지나 무아지경을 방문함으로 입구를 방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의 행로는 삶의 과정과 표정을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글이란 글의 표정은 곧 작가의 생을 대변하는 일이며 인생을 묘사하는 글이며 시는 인생을 압축하는 일이라고 들 하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렇기에 1편의 시에는 전 생애가 들어있는 것이며 감정의 추이와 생의 전개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의도를 내장하는 명제는 글을 쓰는 이유이면서 본질로 길을 내는 상징의 숲을 건설하는 것처럼 시의 건축의 의미를 찾는 이치라는 뜻이다. 단순한 언어로 조합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시인 자신의 체험을 담고 이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질서를 균제미로 담아 의미의 숲을 이룩할 때, 비로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정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조감을 할 수는 없지만 언어의 표현을 통한 흔적(trauma) 찾기는 심리학적인 원조를 받을 때는 가능한 해법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시는 고백의 특징을 예외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고백적인 현상을 시적 장치로 객관화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詩는 정신의 에센스를 나타내는 기교에서 시인 자신의 감수성을 고양(高揚)하는 면밀하고 정치(情致)한 계산에서 의미의 논리를 갖출 때 독자의 뇌리를 장악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공 즉 생’ “있는 것은 없는 것이라” 순환의 논법은 우주의 질서 원리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단독이나 전체와 부분은 언제나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우주의 진행은 앞으로도 앞으로 진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드라마에서 때로는 관객이고 주인공이라는 상관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우주의 주인공처럼 사고하는 것도 모순이기에 관찰자의 자세로 바라보는데서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라면 과학의 결국은 인간을 성숙의 단계로 올려주는 계단일 수 있지 않을까? 이만치의 거리(距離)는 저만치의 상대적인 개념일 때 이만치의 자각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시는 원래 단순한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치밀한 생각과 계획 속에 비로소 언어의 경제성을 운위(云謂)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詩 의 심연(深淵)은 곧 시인 정신의 깊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를 낯설게 표현하려 하고 기교를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시인의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일정한 도식을 동원하려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가질 때 독자와 시인의 관계는 소통의 행복과 감동을 만나는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고민정의 시는 주변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주조를 이루면서 관계에서 빚어지는 감수성의 줄기와 주위에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그리움의 깊이와 일상 삶에서 느끼는 일 등이 시의 행동을 장악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더불어 주위의 환경과 꽃에 대한 시화(詩化)는 자연에 일부를 향기로 전환하는 의미로서 고민정의 시적 감성을 탐방하려 한다. 2. 순환의 의미 찾기 1> 허무와 배고픔 허무라는 것은 인간이 살면서 필연으로 따라오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삶의 요소를 만들면서 인자(因子)에 의해 결정하고 요체를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인간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는 간격만큼 허무(虛無)를 갖게 되는 것이다. 고민정의 詩에는 허무라는 허상이 마음자리에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고민정의 詩集부터 앞문에 이러한 비유가 보인다. 품에서 떠난 자식 연민에 늪에서 때로는 관용이라는 마음 층층 감겨온다 -중략- 그리움은 허연 함에 스며들고 다시 채워야 할 기다림이 망설여진다 중 어머니 곁을 떠나 자식에게 보내는 호소이다. 관용과 사랑의 심각하게 교차하며 여기서 허기를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달픔의 허무가 들어 있다. “내 품을 떠난 자식” 의 고백은 그리움을 만들고 ‘다시 채워야 할’ 필연의 기다림이 있게 되는 것이다. 기다림에는 고독과 허전이 마음을 파고들고 머뭇거리는 행동의 주저에서 용기가 아닌 후회의 기다림만이 앞장서는 이유를 자식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정의 진실이고 아픔이지만 자식은 쉽게 이해 불가인 것이다.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될 때 깨달음이 있을 뿐이기에 모정의 관계는 이해나 설명이 훨씬 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2> 갈등 사랑의 결정판은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이면서 영원한 기쁨의 산실인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성장하면서 모정의 관계는 점차 관계의 빈틈이 생기는 일이 자식이 커감에 따라 서로의 강이 생기는 일은 다반사이다. 늘 부모는 자식이 성장해도 어린 시절에 묶어두려 하고 있기에 괴리가 생기는 것이며 때론 실망과 회의감이 들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자식의 결혼 무렵에는 의견이 대립되며 더러는 벽과 벽 사이가 되는 대화의 소통 문제로 의견 소통이 원활하지 않기에 아픔이 동반되어 허무가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성성 맴도는 이유는 무얼까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숫자의 노작처럼 해답은 가물거리고 이것이 인생이고 저 것이 무엇인가? 허전함에 젖어보고 허전에 띄어 본다. 중 원인과 맴도는 이유 그리고 답은 몰라도 된다. 여하간 갈등 요인이 자리하고 풀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모정의 슬픔이 놓여 있어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움이다. 자식과 모정 사이에서 가로놓인 문제를 어떻게 해야 만이 명확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시간이라는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문제는 논리로 풀이를 하겠지만 자식과의 문제는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오로지 情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은 情을 용해하는 일면 다시 접합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그 무언의 힘을 가진 관계가 자식과 모정의 관계일 것이다. 고운 마름질 손끝에서 자라 훌쩍 자유인으로 품 떠났다 자식을 늘 속사랑으로 물들이는 가슴 걸러 걸러도 그 자리에 있다. 중 늘 자식은 곁을 떠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도 부모는 이를 애달프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언제나 가슴으로 안아 속마음으로 키우고 자식은 부모를 정으로 느끼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식은/늘 속사랑으로/물들이는/가슴만으로 사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속사랑으로 키우는 일 때문에 ‘훌쩍/자유인으로/품 떠났다. 의 당황이 속절없는 안타까움이 되기에 “걸러 걸러도”/제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유인으로 떠나는 간격은 항상 애달픔을 유발하는 이유를 제공하기에 모정은 떠나는 자식에게 섭섭한 마음이 무늬를 그리게 된다. 『소용돌이』는 아들과의 갈등을 나타냈고 「갉아 먹히는 일」은 부모의 역할이 한계에 이를 때, 서글픔을 갖는 모정이 그리움으로 드러난다. 시 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의 소재가 자식과 상관을 갖는 이유 대부분이 모정의 따스함에 이유를 돌릴 부분이다. 자식에게 향하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모정의 정은 상처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런 증거는 결국 상처 의식으로 드러날 때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나게 된다. ‘녹지 않은 자락/까닭 놓인 일/운명으로 엮는다. “자식의 흔적” 같은 운명의 문제 – 지난(至難) 한 일이지만 시간이 경과함으로써 치유되는 방법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자식들은 모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 그리고 끝없는 모정이 슬픔에 젖는다면 이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가 되어 아기를 키울 때 모정을 깨달아도 그때는 이미 강물의 흐름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3. 생의 방황 살아 있다는 것은 고민이 많다는 것과 뜻이며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는 고민이 없고 방황의 길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생사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될 때 경험의 층층이 쌓이게 되고 성숙의 이름을 얻게 되는 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높고 낮은 자리 아파 우는 설움의 자리네요. 먼저 가는 길 떨치지 못한 이 원망 이래서 한잔 저래서 한잔 끝내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다 그런 건가요. 중 생사의 문제는 시인에게 무거움과 짐이라고 생각할 때 원망과 허전과 ego의 마음에 들어서는 것이다. 고민정 시인의 경우에도 높거나 아니면 낮은 자리이거나를 막론하고 ‘아파 우는 설음’ 의 자리라는 평범한 고백 앞에 도달된다. 이러한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술은 위무(慰撫)의 방편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술에 의지해서 우열을 우기는 상태로 진행이 된다 고민정 시인은 술로 표현을 했으니 비유가 아닌 그대로의 현실인 것이다. 물론 삶에는 의지가 공고해야 하며 의지를 약화하는 일을 자초하면서 고통의 밀물에 쏠리는 경우 운명을 허전과 속상함으로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바퀴가 두 번 또 힘겹게 밟는 틀에 낀 씨름인데 도는 삶 모질게 살아온 땟물 옹기종기 절규가 건네지고 이렇게 또 구르는 시간을 태우면 까맣게 숱이 된 마음 가난과 고통을 태우고 노을 매어둔 삐걱거리는 바퀴여 삶이 시인은 바퀴와 바퀴 사이에서 힘겹게 고통의 진행을 체험하는 느낌을 적는다. ‘힘겹게 밟아대는’의 유추로 볼 때, 모질게 살아온 ‘땟물’의 이미지가 삶의 아픔을 상기하는 연상 작용을 하면서 ‘절규’로 이어질 때, 고통의 심연을 지나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시간의 흔적을 ‘까맣게 그을린 마음’과 ‘가난’의 상관이 힘겹게 살아온 상징으로 나타난다. 물론 가난의 아픔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 때문에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야만 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짐이면서 그런 의미를 교환하는 일상이다. 종국은 가난의 사투로 인해 ‘삐걱’ ‘절규’ ‘숱이 된 마음’ 이 아픔을 동반하는 연속적인 의미, 바퀴가 구르는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 비유에 삶의 이름이 실리어가는 인상이다. 삶을 살아가는 길에는 순풍이 있는 반면에 파도의 거센 물살을 넘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반복은 곧 세월이라는 층을 이루면서 내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인간은 이 세월의 주인공이자 때로는 나그네의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인연 연결에 울고불고해보나 숨어든 미로에 싸여 파도만 일고 부표만 남는 삶 중 살아가노라면 무서운 파도와 싸워야 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평탄은 위력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지만 태풍이나 비바람이 오거나 파도는 거센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이런 도정(道程)을 거치면서 자기의 세계를 확보하는 것은 곧 삶의 신성한 의미가 될 수 있기 에 신념이라는 의지에 다지고 또 다지는 것이다. 생의 문제는 해결이 아니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삶의 자세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악착스럽게 혹은 선량함으로 또는 비우고 비우면서 아니면 채우고 채우면서 사는 일 등 삶의 자세는 개인의 품성에 따라 선택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욕망의 이름에 실려 갈 것인가. 아니면 선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자기 개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민정의 일생은 비움에서 그의 명상적인 생의 진로를 확정하는 느낌을 준다. 다음에 詩는 그런 증거로 보이는 흔적 지혜에서 얻어진 이름일 것이다. 굴비 엮어 놓은 길 파이고 갈라진다면 끝내 흩어져 사는 것 도려내지 못하고 견디어야 하는 그것이 사랑이라 하는데 묵언의 자락 고운 잎 하나 기다림을 심는 날 숨겨둔 심 채우려 잠재운다 중 누구나 채움을 열망하는 일상을 갖지만, 욕망은 더 큰 욕망으로 불러오고 다시 욕망의 포로가 됨으로써 결국은 욕망에 먹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 같은 생은 높이로 오르려는 것 때문에 자칫 높이에서 떨어지는 비극적인 결말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비우면서 사는 일은 낮은 곳으로 향하기 때문에 고통의 이름이 반감되거나 아예 없는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비우는 일은 비우는 크기만큼 만족이 채워지지만 채우는 일은 채움의 크기만큼 오히려 짐이 되는 무게에 시달리는 생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고민정의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체득한 지혜의 결과를 발견하게 된다. ‘묵언’의 자락과 ‘숨겨둔 마음’/채우려 잠재운다. 의 노력에 따라 사랑이라는 불빛을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안도감은 평안과 안정을 주는 요인이 되는 인상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르지 않는 아픔 진실을 말할 수 있나요? 그대의 벼랑 끝자락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대의 속울음 안은 길 단 하나 사랑뿐인데 그대가 다시 오는 날 피워내는 것 진심이었나요. 중 가을이 오색 단풍으로 요란을 떨다 아주 순식간에 허허로움을 가져다준다. 이는 시인과 가을의 단풍과 유사적 정서의 대비라는 점에서 가을의 낙엽이 구르는 허허로움의 허전과 다시 온다는 기다림은 곧 시인의 정서에 부합되는 듯하다. 기다림과 속울음은 모두 사랑이라는 진실에 있음이지만 이를 전달하는 갈등 속에서 통로가 없는 시인의 애절한 정서는 발동되는 듯하다 ‘다시 오는 날’의 기다림은 허무와 허전과 같은 손짓이며 진실을 묻는 일은 허무에 대한 아픔의 호소라는 데서 가을은 사랑을 기다리는 시인의 정서에 내포되는 상징물인 셈인 것 같다. 4. 에필로그 시인은 精을 사물에 투사하여 독자들 앞으로 보내는 메신저의 기능을 완수하는 시인인 것 같다.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노래할 때 그 가락은 흥겨울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다면 고민정의 가락은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이는 그의 삶이 이별에서 그리움과 허전을 낳았고 사랑에 대한 추억은 손짓처럼 먼 거리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삶에 허전과 허기에 그리움의 교차는 모두 생활의 깊이에서 나오는 가락이면서 시심(詩心)의 나래가 화려함을 갈망하는 태도를 보이기에- 그리고 자식에 대한 정감이 깊어 때로는 단절된 것 같은 고독을 대면하면서 용기와 신념을 안으로 키우는 가락의 시인은 詩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요인들이며 시인의 오늘의 표정을 확인하는 징표가 되면서 내일로 가는 희망과 행복을 갖고 詩에 대한 열정과 정성을 다하기를 기대하면서 고민정의 정서를 보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인간사는 세사의 모든 물상에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영혼을 붙어 넣으면서 기도의 물목(物目)으로 삼아 또 다른 상상의 영역을 탐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은 또 다른 길을 만들면서 사고의 복잡성을 부추기어 문화의 중심으로 채색하는 것이다. 또한 이름이란 부를 때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속에 무엇인가 영혼이 있음을 신념으로 공고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1이라는 이름을 굳이 1이라 고집하는 이유는 인습이라는 장벽 때문에 고칠 수 없는 이유를 내장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름이 관습의 의상을 걸치고 거기에 안주할 때, 상상의 길은 차단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시인은 이런 기준의 질서를 거부할 때, 신명을 불러올 수 있고 이 신명의 불꽃 위에 시인만의 성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시적허용은 산문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시는 관습적인 것이나 기존의 사슬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맞이할 때, 선도적인 시인의 임무가 발휘되고 여기서 시의 길은 또 다른 변화의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상(李箱)의 [오감도]에는 띄어쓰기, 맞춤법 등이 기존의 질서에서 역으로 상상을 자극할 때, 새로운 출현의 시를 높이 상찬하는 이유가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시인은 언어 혁명의 기질을 가져야 하고 의식의 변화를 과감하게 자극하는 질서의 파괴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성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개성 있는 시인의 이름이 되지 않을까? 똑같은 혹은 아류의 시는 아무런 개성도 갖지 못한 무의미의 의상을 걸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인의 의식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매의 눈을 기저야 하며, 먹이를 찾는 사자의 배고픈 방황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시와 똑같으면 이유가 변화에서 신선함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첫 시집을 상재한 노길순의 시는 그만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시인인 듯하다. 봄 향기 가득한 봄바람처럼 상쾌하며 안정감이 있는 인상으로 언어 조합의 묘미를 상기시키면서 그만의 영역을 노리는 탐색이 전제될 때, 다가오는 기운은 삽상을 자극시킨다. 이제 노길순의 정신 추구를 운위 하는 길로 만나러 들어가보자. 2. 【Dream [꿈], 제조기 1> 자신의 영역 길 찾기 예술은 본질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의 다양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백적 형태로 기교를 표현하고, 선과 색채로는 미술 작가의 사상이나 신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학은 문자를 통해서 결국에는 자기를 그리는 작업이라 보기 때문에 지속한다는 뜻이다. 물론 표현된 결과물은 저마다 개성의 차이에 따라 톡특한 양상을 갖는다. 삶이란 결국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고 이 여정을 어떤 뜻으로 받아 드리고 또 삶의 중심을 어떻게 잡는가는 시인의 표현 목적과 의도로 표상될 뿐이다. 이길순의 시에 첫 번째 목록에서 자기를 위한 탐구의 길이 보이는 것은 그가 어떻게 시의 진로를 이끌고 나갈 것인가를 암시하는 의미에 가깝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곧 전체 속에서 어떤 위치에 이를 끌고 나갈 것인가는 목적에 맞추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보이질 않는다. 내가 창가에 서 있는 나 거울에 보이는 분명 서있는데 무더운 염천이 몰고 오듯 그저 땀을 흘린다. 잠시 짧은 흔들림이 머리카락 움직이고 이리저리 내 곁에 있는 나 이제 떠나 주기를 한 번 두 번 기다림에 지쳤건만 오늘도 나를 자꾸 기다린다. 중에서 나를 알면 가장 위대한 인간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정의할 것이다. 모든 성인들은 “너”라는 대상에 질문을 던지면서 혹은 직간접으로 지적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삶의 중추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에 철학의 중심을 두었다면 노길순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자기를 “안 보인다며” 면서 스스로에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거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표정의 대면에서 시인은 스스로 찾아 나서는 노력이 집중된다. “그저 땀을 흘린다.” “나를” 강조하면서 비로소 머리카락이 “움직인다” 의 탐구에 대한 대답을 듣고 있음이다. 더불어 “기다림이 지쳤는데”에서 지속적인 삶의 탐험이 스스로의 동력을 얻어가는 단계로 들어간다. 인생은 오로지 자기가 살아가면서 해답을 얻는 길이 있을 뿐이지 타인이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때문에 신열을 감내하면서 길을 가는 나그네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를 버릴 때, 기를 얻게 되는 역설적인 방법도 있지만 노길순은 직접 자기와 대면- 거울에서 나르시스의 방황을 해쳐 가는 용기가 가상하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도 나를 기다린다는” 자기애(自己愛)의 길을 넓히는 발상이 두드러진다. 어느새 벌써 과거가 나를 비웃는다. 나는 아직 존재하는 숨 쉬는 인간 돌아보니 벌써 과거가 비웃는다. 땅에 붙어버린 발이 언젠가 가장 멋지게 함께할 저 끝 오늘도 나는 내일을 이끌고 무거움이 힘겨운 줄 모르고 앞으로 전진 또 전진 중에서 인간은 세상에 현존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탄생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일 뿐 실제로는 미지의 공간에서 다시 미지의 공간으로 길을 만드는 존재일 뿐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라는 구분이 생의 이름으로 다가든다. 노길순은 자아를 확립하는 방도로 과거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톡특한 듯하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증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숨 쉬고 있다는” 면을 강조하고 다음 수순으로 진행하는 미래지향이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 중간의 현재를 인식하는 점이 이채롭다. 흔히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특징인데 이런 유약함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톡특한 개성의 의상을 입고 “땅에 붙어버린 발”이라는 현실을 의식하고 가장 멋지고 오늘과 내일을 끌고 출발하는 보폭- “무거움이 있을지라도 전진” 앞으로 독촉하는 시심이 희망의 날개를 달고 전진하는 발상이 희망의 발걸음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를 대상으로 어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감동의 목록으로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는 항상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호소하는 반복성에서는 독자도 수용미학적인 마음으로 파도를 일으키면서 질서 있는 형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작품의 내면에 수용된 의식의 갈래는 ambiguity(모호함)이라는 시적 형식 속에 내면의 질서를 살려야 한다. 이는 유기체인 생명에는 다양한 요소의 결합이 통일될 때 황홀한 감성의 바다를 독자에게 전달 수 있다면 여기서 시의 성공은 담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적 반응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된 의식이 명확해야 하고 균제(均齊)의 형식이 가지런했을 때, 비로소 미의 모범 원리로써 형식적인 통일감이 주어진다, 노길순의 시는 우회적인 기교가 아니라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진솔함이 특징일 것 같다. 홀로 잠든 내 곁에 살며시 별이 왔다. 깊은 밤 숨소리조차도 사랑스럽다. 모른 척 힘들지 말라고 침대 모서리를 잡는다. 어느새 작은 새처럼 내 안에 안긴다. 사랑해 난 괜찮아 손발이 차가운데..... 내일은 좀 더 큰 행성으로 가자 아니 난 괜찮아 너만 있음 되니까 밤새 나를 밝혀주며 지켜주다 잠이 깨면 사라질까 드려워 가만히 문을 닫고 홀로 뜰로 나간다. 중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매우 보편적인 어의이다. 그러나 이 보편성 속에서 본인의 마음에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을 때, 비로소 사물을 바라보는 대상에도 전이된 사랑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치는 자발성의 이치로 인식된다. 시인 스스로의 마음에서 사랑의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바라보는 모든 물상에 사랑의 기운이 퍼지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이치와 같다는 뜻이다. 깊은 밤, 별과 속삭이는 마음에는 동화의 세계가 순수로 포장된 노길순의 시심이 또 다른 에너지의 공급처이기도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랑의 에너지원이 [깊은 사랑] [장미꽃 사랑] [어리석은 사랑] 등 가족에서도 오고 자연에서도 오며 다양한 사랑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친밀도가 시인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귀결이 된다는 점에서 일일이 일거 하지 않아도 희망의 사랑이 진원지일 것은 분명한 것 같다. 3. 에필로그 자아의 문법 구축 예술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상상의 길을 만들어 미감(美感)으로 처리하는 노래인 것이다. 그 노래들에는 진실, 사랑, 배려, 등이 담겨 있을 때, 감동의 길이 보편성으로 전달되면서 독자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 되는 것이다. 정작 시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지만 시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진솔성과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의 중심이라는 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동은 그처럼 강한 태풍도 될 수가 있고 또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결합에서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꿈을 전달하는 시인의 힘은 여기서 정점을 마련하는 능력자이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부추기는 꿈의 제조자는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런 꿈을 부추기는 기능을 하는 시인인 것 같다. 이같이 전체적으로 자기 발견의 성실성과 자기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이룩할 수 없는 이유가 내장되었기 때문에 자기애의 확신성과 신뢰 찾기는 미래의 문을 향하는 옳은 길이라 하겠다. 또한 사랑의 중심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를 아는 일은 현명하고 아름다운 시인이다. 이는 사물의 내면을 통찰하는 촉수에서 시심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뢰를 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분리하면서 다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를 보내는 시가 바로 정신 문법인 것이다. 앞으로 절차탁마로 정진하여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시를 그릴 수 있음을 기대하면서 내 책임에서 벗어나련다. 2025. 05. {금요저널 주필/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시를 쓴다는 것은 엑스터시(ecttasy)의 경지 즉 신의 경지를 방문으로 입구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행로는 여기서 표정 관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의 심연은 곧 시를 대변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자아의 평정심을 찾는 길이 도는 것이다. 또한 시는 자아의 평화가 온다면 사랑의 시연을 찾게 되는 것은 시를 그리는 사람은 모두 알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단순히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속에 비로소 언어의 평화 심연을 운위하고 시의 위의(威儀)를 갖추고 사랑의 심연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시의 심연은 곧 시인 정신의 깊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를 발휘한다. 하기에 독자는 시인의 비밀을 찾기 위해 일정한 도식을 동원하려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가질 때 독자와 시인의 관계는 소통의 행복, 즉 감동을 만나는 일이다. 생활의 주변 상황이 주조를 이루면서 전개되는 홍미선의 감수성과 줄기를 가까운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의 깊이와 삶에서 느끼는 일 등이 시의 행로를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꽃에 대한 자아의 심연은 자연의 향기로 전환하려는 의미가 연결된다. 이제 홍미선의 자아의, 평화, 사랑의 심연 찾기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2. 1) 허기와 허무의 자아 허무는 인간의 삶에 필연으로 따라오는 인자(因子)이면서 삶의 요소를 결정하는 몫을 다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도달될 수 없는 간격만큼 허무를 갖게 된다. 홍미선의 시에는 허기와 허무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시집의 서문부터 이런 냄새가 물씬 풍긴다. 품 안에 자식 연민에 빠지니 때론 용서가 자아 층층 감겨온다. 그리움은 하얀 달에 스며들고 다시 가득 담아야 할 기다림이 머뭇거린다. -중에서 엄마의 곁을 떠난 자식에게 보내는 호소가 용서와 갈등에서 심각하게 교차하고 허기를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달픔이 길들여진다. 품 안에 자식이 떠난 고백은 그리움을 만들고 채워야 할 기다림이 옮겨온다. 기다림에는 고독이 물씬거리고 머뭇거리는 행동의 주저에서 용기가 아닌 후회의 기다림만이 앞장서는 이유를 자식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정의 진실이고 아픔이지만 자식은 쉽게 이해와 정리를 못하는 것이다. 그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될 때 깨달음이 있을 뿐이기에 자식과 모정의 관계는 이해나 설명을 넘는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2. 갈등의 자식 사랑의 결정체는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이면서 영원한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도(道)와 함께, 자식과 부모와는 점차 간격이 벌어지는 일- 성장의 나이에 따라 부모와의 사이엔 강(江)을 만들게 되면서 점차 밀려나는 일이 부모의 몫이 된다. 이러한 일들은 유사 이래 진행된 자식과 부모의 관계 보모는 자식을 항상 어린 시절에 묶어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에서 뒤처진 이유로 실망과 때론 절망을 맛보게 된다. 특히 성장의 절정인 결혼, 무렵에는 의견 대립이 극에 이르면서 더러는 벽과 마주치며 외면이거나 – 부모는 시련의 시절을 감당하게 된다. 이런 갈등은 대화의 소통 문제에서 기인 하지만 쉽게 정리되지 못하는 아픔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자꾸 맴도는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숫자에 노작 거림의 해답은 가물거리고 이것이 인생이고 저것이 무엇인가? 쏟아짐에 젖어보고 강렬하게 띄어본다. 중에서 이유와 원인 그리고 해답은 몰라도 된다. 어떻든 갈등의 요인이 자리하고 풀이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모정의 슬픔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자식과 부모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를 명확하게 처리가 가능한 것인가? 기실 해답은 없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자식과 부모의 문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논리로 풀이할 수 없는 오로지 정(精)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간은 정(精)을 용해하는 일면 다시 접합하는 능력을 발휘는 어떤 힘을 가진 관계가 자식과 부모의 관계일 것이다. 고운 손끝에서 자라 훌쩍 자유가 되어 떠났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에 있구나 -중에서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을 대수롭게, 생각되지만, 부모는 이를 애달프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안아서 키워 보지만 자식은 부모를 정으로 느끼는 것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만으로 사는 이유가 된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속 사랑으로 키우는 일 때문에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유인으로 떠나는 간격은 항상 애달픔을 유발하는 이유를 제공하기에 모정은 떠나는 자식에게 섭섭한 마음이 무늬를 그리게 된다. 시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의 소재가 자식과 상관을 갖는 이유의 대부분이 모정의 따스함에 이유를 돌릴 뿐이다. 자식에게 향하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머니의 정은 상처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런 증거는 결국 상처 의식으로 드러날 때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자식들은 모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 그리고 끝없는 모정이 슬픔에 젖는다면 이는 아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이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 모정을 깨닫는다 해도 그때는 이미 강물의 흐름이 멀리 가 있기 때문이다. 3) 삶의 방향 살아 있다는 것은 허기와 허무가 존재하고 고민이 있다는 뜻이고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헤아리게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고민도 없다. 결국 생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문제로 귀결될 때 경험의 층이 쌓이게 되고 성숙의 이름을 얻게 되는 길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높고 낮은 자리 아파 우는 허기의 자리네요 먼저 가는 길 떨치지 못한 원망 이래저래 한잔 술 끝내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다 그런 건가요. 중에서 생의 문제는 시인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때, 허기와 평화와 원망이 교차되는 것이다. 홍미선 시인의 경우도 높거나 낮거나 자리를 막론하고 “아파서 우는 “허기의 자리”라는 평범의 고백에 젖어든다. 이런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술은 위무(慰撫)의 방편으로 작용을 하며 술에 의지해서 우열을 우기는 상태로 진행되는 듯하다. 상상력의 발동이 “한잔”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시는 때로 간접 체험- 상상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가공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은 창조주 때문이다. 물론 생에는 의지가 공고해야 함은 사실이지만 의지를 약화하는 일을 자초하면서 고통의 밀물에 휩쓸리는 경우엔 운명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들쑥날쑥 거리는 바퀴 힘겹게 밟아대는 틀에 낀 씨름일진대 돌고 있는 모질게 살아온 땟물 올망졸망 절규가 건네는 정 이렇게 굴러온 시간을 태우면 까맣게 그을린 마음 가난을 태우고 노을 자락 매어둔 삐걱거리는 페달 중에서 시인은 바퀴를 힘겹게 고통의 진행을 체험하는 느낌을 적은 것 같다. “힘겹게 밟아대는”의 유추로 볼 때 “모질게 살아온 땟물”의 이미지가 삶의 아픔을 상기하는 연상 작용을 하면서 “절규”로 이어질 때 고통의 심연을 지나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시간의 흔적을 “까맣게 그을린 마음”과 “가난”의 상관이 힘겹게 살아온 상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가난의 아픔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이기에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야만 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짐이면서 그런 의미를 교환하는 인상이 짙다. 결국 가난으로 인해 “절규” “그을린 마음”이 아픔을 동반하는 연속적인 의미 -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의 비유에 삶의 이름이 실리어 가는 인상을 준다. 살아가는 길엔 순풍이 있는가 하면 파도의 거센 물결을 넘어야 하는 일이 번다히 진행된다. 이런 반복은 곧 세월이라는 층을 이루면서 내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월의 주인공이자 때로는 나그네의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4) 사랑의 심연 사랑은 막연한 추상성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절실한 명칭으로 따라오는 이름일 수도 있다. 어떻든 사랑은 포근하고 따스함을 전달하는 이미지의 명칭 - 꽃이거나 바람이거나 홍 시인은 추상적인 뉘앙스가 강한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한 명확한 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떠난 짝에 대한 절실함도 아닌 또 꽃에 대한 암시 - 사랑의 의미가 추상적이듯 홍 시인은 사랑의 암시도 다소 추상적 전달이 아닌가 한다. 사랑은 빛 사랑은 꿈 사랑은 욕망 사랑은 파도 사랑은 눈물 사랑은 비밀 -중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가 6가지인지는 모르나 사랑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답안은 있을 수 없지만 그만큼 폭넓은 이름으로 인식이 된다. “빛”으로 “꿈” “욕망” “파도” “눈물” “비밀” 긍정적 보다는 아픔이 수반되는 의미가 앞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는 홍 시인의 사랑에 담긴 상처는 겉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안으로 숨기는 은밀한 표현이 더욱 짙음을 느낀다. 아주 독특함으로 은유와 압축을 시키지 않으며 자신의 추상적 암시를 주는 듯하여 애매모호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 등을 집약하여 좀 더 확실성이 수반되는 시였으면 하는 바람이며 긍정 마인드로 바꾸어 시향을 그린다면 지금보다 더 빛나는 시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에필로그= 시인은 정(精)이라는 언어를 사물에 투사하여 독자 앞으로 보내는 메신저의 기능을 완수하는 시인이 아닐까? 유추하면서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노래할 때 그 가락은 흥겨울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다면 홍 시인의 가락은 후자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삶이 이별에서 그리움을 낳았고 사랑에 대한 추억은 손짓처럼 먼 거리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삶에 허기와 그리움의 교차는 모두 생활의 깊이에서 나오는 가락이면서 시심(詩心)의 나래가 화려를 갈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 자식에 대한 정감이 깊고 사랑 때문에 때로는 단절된 것 같은 고독을 대면하면서 자아의 심연을 대면하면서 용기와 신념을 안으로 키우는 가락의 주인공 - 홍 시인의 깊은 내면을 보고 또 다른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요인이 되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긍정의 마인드 사고를 갖고 시심을 발휘한다면 더욱 빛나는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시를 쓴다는 것은 엑스터시(ecttasy)의 경지 즉 신의 경지를 방문으로 입구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행로는 여기서 표정 관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의 심연은 곧 시를 대변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자아의 평정심을 찾는 길이 도는 것이다. 또한 시는 자아의 평화가 온다면 사랑의 시연을 찾게 되는 것은 시를 그리는 사람은 모두 알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단순히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속에 비로소 언어의 평화 심연을 운위하고 시의 위의(威儀)를 갖추고 사랑의 심연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시의 심연은 곧 시인 정신의 깊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를 발휘한다. 하기에 독자는 시인의 비밀을 찾기 위해 일정한 도식을 동원하려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가질 때 독자와 시인의 관계는 소통의 행복, 즉 감동을 만나는 일이다. 생활의 주변 상황이 주조를 이루면서 전개되는 홍미선의 감수성과 줄기를 가까운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의 깊이와 삶에서 느끼는 일 등이 시의 행로를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꽃에 대한 자아의 심연은 자연의 향기로 전환하려는 의미가 연결된다. 이제 홍미선의 자아의, 평화, 사랑의 심연 찾기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2. 1) 허기와 허무의 자아 허무는 인간의 삶에 필연으로 따라오는 인자(因子)이면서 삶의 요소를 결정하는 몫을 다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도달될 수 없는 간격만큼 허무를 갖게 된다. 홍미선의 시에는 허기와 허무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시집의 서문부터 이런 냄새가 물씬 풍긴다. 품 안에 자식 연민에 빠지니 때론 용서가 자아 층층 감겨온다. 그리움은 하얀 달에 스며들고 다시 가득 담아야 할 기다림이 머뭇거린다. -중에서 엄마의 곁을 떠난 자식에게 보내는 호소가 용서와 갈등에서 심각하게 교차하고 허기를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달픔이 길들여진다. 품 안에 자식이 떠난 고백은 그리움을 만들고 채워야 할 기다림이 옮겨온다. 기다림에는 고독이 물씬거리고 머뭇거리는 행동의 주저에서 용기가 아닌 후회의 기다림만이 앞장서는 이유를 자식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정의 진실이고 아픔이지만 자식은 쉽게 이해와 정리를 못하는 것이다. 그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될 때 깨달음이 있을 뿐이기에 자식과 모정의 관계는 이해나 설명을 넘는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2. 갈등의 자식 사랑의 결정체는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이면서 영원한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도(道)와 함께, 자식과 부모와는 점차 간격이 벌어지는 일- 성장의 나이에 따라 부모와의 사이엔 강(江)을 만들게 되면서 점차 밀려나는 일이 부모의 몫이 된다. 이러한 일들은 유사 이래 진행된 자식과 부모의 관계 보모는 자식을 항상 어린 시절에 묶어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에서 뒤처진 이유로 실망과 때론 절망을 맛보게 된다. 특히 성장의 절정인 결혼, 무렵에는 의견 대립이 극에 이르면서 더러는 벽과 마주치며 외면이거나 – 부모는 시련의 시절을 감당하게 된다. 이런 갈등은 대화의 소통 문제에서 기인 하지만 쉽게 정리되지 못하는 아픔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자꾸 맴도는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숫자에 노작 거림의 해답은 가물거리고 이것이 인생이고 저것이 무엇인가? 쏟아짐에 젖어보고 강렬하게 띄어본다. 중에서 이유와 원인 그리고 해답은 몰라도 된다. 어떻든 갈등의 요인이 자리하고 풀이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모정의 슬픔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자식과 부모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를 명확하게 처리가 가능한 것인가? 기실 해답은 없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자식과 부모의 문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논리로 풀이할 수 없는 오로지 정(精)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간은 정(精)을 용해하는 일면 다시 접합하는 능력을 발휘는 어떤 힘을 가진 관계가 자식과 부모의 관계일 것이다. 고운 손끝에서 자라 훌쩍 자유가 되어 떠났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에 있구나 -중에서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을 대수롭게, 생각되지만, 부모는 이를 애달프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안아서 키워 보지만 자식은 부모를 정으로 느끼는 것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만으로 사는 이유가 된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속 사랑으로 키우는 일 때문에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유인으로 떠나는 간격은 항상 애달픔을 유발하는 이유를 제공하기에 모정은 떠나는 자식에게 섭섭한 마음이 무늬를 그리게 된다. 시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의 소재가 자식과 상관을 갖는 이유의 대부분이 모정의 따스함에 이유를 돌릴 뿐이다. 자식에게 향하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머니의 정은 상처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런 증거는 결국 상처 의식으로 드러날 때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자식들은 모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 그리고 끝없는 모정이 슬픔에 젖는다면 이는 아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이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 모정을 깨닫는다 해도 그때는 이미 강물의 흐름이 멀리 가 있기 때문이다. 3) 삶의 방향 살아 있다는 것은 허기와 허무가 존재하고 고민이 있다는 뜻이고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헤아리게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고민도 없다. 결국 생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문제로 귀결될 때 경험의 층이 쌓이게 되고 성숙의 이름을 얻게 되는 길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높고 낮은 자리 아파 우는 허기의 자리네요 먼저 가는 길 떨치지 못한 원망 이래저래 한잔 술 끝내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다 그런 건가요. 중에서 생의 문제는 시인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때, 허기와 평화와 원망이 교차되는 것이다. 홍미선 시인의 경우도 높거나 낮거나 자리를 막론하고 “아파서 우는 “허기의 자리”라는 평범의 고백에 젖어든다. 이런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술은 위무(慰撫)의 방편으로 작용을 하며 술에 의지해서 우열을 우기는 상태로 진행되는 듯하다. 상상력의 발동이 “한잔”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시는 때로 간접 체험- 상상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가공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은 창조주 때문이다. 물론 생에는 의지가 공고해야 함은 사실이지만 의지를 약화하는 일을 자초하면서 고통의 밀물에 휩쓸리는 경우엔 운명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들쑥날쑥 거리는 바퀴 힘겹게 밟아대는 틀에 낀 씨름일진대 돌고 있는 모질게 살아온 땟물 올망졸망 절규가 건네는 정 이렇게 굴러온 시간을 태우면 까맣게 그을린 마음 가난을 태우고 노을 자락 매어둔 삐걱거리는 페달 중에서 시인은 바퀴를 힘겹게 고통의 진행을 체험하는 느낌을 적은 것 같다. “힘겹게 밟아대는”의 유추로 볼 때 “모질게 살아온 땟물”의 이미지가 삶의 아픔을 상기하는 연상 작용을 하면서 “절규”로 이어질 때 고통의 심연을 지나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시간의 흔적을 “까맣게 그을린 마음”과 “가난”의 상관이 힘겹게 살아온 상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가난의 아픔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이기에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야만 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짐이면서 그런 의미를 교환하는 인상이 짙다. 결국 가난으로 인해 “절규” “그을린 마음”이 아픔을 동반하는 연속적인 의미 -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의 비유에 삶의 이름이 실리어 가는 인상을 준다. 살아가는 길엔 순풍이 있는가 하면 파도의 거센 물결을 넘어야 하는 일이 번다히 진행된다. 이런 반복은 곧 세월이라는 층을 이루면서 내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월의 주인공이자 때로는 나그네의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4) 사랑의 심연 사랑은 막연한 추상성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절실한 명칭으로 따라오는 이름일 수도 있다. 어떻든 사랑은 포근하고 따스함을 전달하는 이미지의 명칭 - 꽃이거나 바람이거나 홍 시인은 추상적인 뉘앙스가 강한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한 명확한 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떠난 짝에 대한 절실함도 아닌 또 꽃에 대한 암시 - 사랑의 의미가 추상적이듯 홍 시인은 사랑의 암시도 다소 추상적 전달이 아닌가 한다. 사랑은 빛 사랑은 꿈 사랑은 욕망 사랑은 파도 사랑은 눈물 사랑은 비밀 -중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가 6가지인지는 모르나 사랑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답안은 있을 수 없지만 그만큼 폭넓은 이름으로 인식이 된다. “빛”으로 “꿈” “욕망” “파도” “눈물” “비밀” 긍정적 보다는 아픔이 수반되는 의미가 앞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는 홍 시인의 사랑에 담긴 상처는 겉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안으로 숨기는 은밀한 표현이 더욱 짙음을 느낀다. 아주 독특함으로 은유와 압축을 시키지 않으며 자신의 추상적 암시를 주는 듯하여 애매모호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 등을 집약하여 좀 더 확실성이 수반되는 시였으면 하는 바람이며 긍정 마인드로 바꾸어 시향을 그린다면 지금보다 더 빛나는 시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에필로그= 시인은 정(精)이라는 언어를 사물에 투사하여 독자 앞으로 보내는 메신저의 기능을 완수하는 시인이 아닐까? 유추하면서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노래할 때 그 가락은 흥겨울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다면 홍 시인의 가락은 후자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삶이 이별에서 그리움을 낳았고 사랑에 대한 추억은 손짓처럼 먼 거리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삶에 허기와 그리움의 교차는 모두 생활의 깊이에서 나오는 가락이면서 시심(詩心)의 나래가 화려를 갈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 자식에 대한 정감이 깊고 사랑 때문에 때로는 단절된 것 같은 고독을 대면하면서 자아의 심연을 대면하면서 용기와 신념을 안으로 키우는 가락의 주인공 - 홍 시인의 깊은 내면을 보고 또 다른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요인이 되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긍정의 마인드 사고를 갖고 시심을 발휘한다면 더욱 빛나는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시는 마음의 거울로 출발한다.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아름다움과 고통, 아픔 또는 그리움과 사랑의 목록들이 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자극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가슴을 적시는 파문의 물살이 되기도 하며 더러는 가을 하늘 같은 투명하고 환한 미감(美感)으로 오감을 움직이게 된다. 이런 경우 시인은 단순히 언어의 조합을 지휘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언어의 중심이 되는 화학적 변화를 나타내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다시 말하면 사물과 사물의 이미지가 결합하여 전혀 새로운 제3의 이미지로 변모할 때. 시의 맛은 환상적인 여행을 떠나게 된다. 사실 시인 개인 성향에 따라 개성의 표현이 부드러운 개성의 시적 묘미가 있는가 하면. 딱딱하고 견고한 표정으로 오는 경우가 있다. 어느 것이든 시의 발성은 희망과 꿈 그리고 사랑의 체온이 담겨질 때, 비로소 시의 가치는 상승의 효과를 기대하게 된다. 이준영의 시는 부드러움과 상상의 깊이가 출렁이는 인상으로 출발한다. 언어의 감각, 예민한 촉수로 이미지의 사냥에서 건져 올린 언어의 싱싱함이 매우 리얼하다. 그러나 쉽게 다가오는 이미지가 아니라 찾아가는 노력이 배가 될 때, 더욱 빛나는 표정으로 살아난다는 점에서는 발길을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는 heart의 시가 아니라 head에서 심사숙고가 있어야 한다는 점과 같다. 2. 언어의 실마리 찾기 1) 시작(詩作) 문법 시인마다 시를 대면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다. 직핍(直逼)의 방법으로 이미지를 구사하는 시인이 있듯이 비유의 패각(貝殼)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시적 의미를 발굴하는 시인이 있을 수도 있다. 어느 방법이든 개성에 따라 작시의 태도는 달라지고 이에 대응하여 시의 성격도 다르게 다가온다. 이준영의 경우에 보다 더욱 치밀한 언어의 운용에 따른 비유의 현란성을 부가할 것 같다. 이는 시의 성숙에 이르는 표현미를 수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머리((head)에서 생각의 농도를 높여야 한다. 마치 T.S. ELIOT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치듯 지나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는데도 많이 씹을수록 단맛을 음미할 수 있는 것처럼 방법과 시의 맛도 같다는 의미이다. 이제 그의 시를 따라가 본다. 서해 파도가 옆구리를 찔러 간질이는 늘 겨드랑이 가려운 궁평항 혹시 가본 적 있나요. ...중략... 싱싱한 생굴에 궁평항 통고추를 갈아서 버무린 짭짤한 파란 궁평항을 몽땅 담아 맛을 낸, 그것 뜨거운 밥 위에 한 젓가락 빨갛게 올려 입 크게 벌려 씹다가 한 젓가락씩 먹는 것이 감질나 굴 젓 한 숟가락 푹 퍼넣고 따끈한 밥 한 그릇에 쓱쓱 비벼 먹다 보면 어느새 바다 내음이 입안 그득히 퍼지는 봄 - 『궁평항의 봄』 중 매우 감각적인 뉘앙스를 접하는 시이다. 신선감과 감각성을 주는 이유는 언어의 사용에 탄력적인 기교 그리고 리얼리터의 이미지가 부수적인 효과를 수반하면서 봄의 미각을 자극하는 방법이 매우 생동감 넘치는 인상을 가져온다. 싱싱한 굴 맛을 나타내기 위해서 서해의 파도가 “옆구리를 간지리는” 묘사에서 궁평항의 바다가 푸른 감수성을 자극하는 인상이며 시의 사실성에 일조를 더하고 더불어 봄의 기운이 온몸으로 다가오는 생동감을 느낄 때, 봄의 정서가 궁평항의 역동적인 상징으로 발길을 맞추면서 다가온다. 시가 감각이라면 이는 시인의 표현에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필수 요소 -이준영의 표현미는 뛰어난 감각성을 역동적인 효과로 처리하는 방법이 성공적인 시 쓰기에 일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신선하고 맛 좋은 봄 시라는 존재는 논리는 아니지만 의미의 확충을 꾀하는 감동을 유발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정치(情致)성- 구조의 통일을 갖추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감동의 요인은 사실에 접근되어야 하고 과학적인 근거를 의미에 내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징의 효과 혹은 비유의 적절성이 적재적소에 배치될 때 비로소 잘 지어진 한체의 집이 완성될 수 있다면, 시의 상징이란 감춤도 아니고 드러냄의 성질도 아니고 반 투명성(eranslucency)에서 결국 애매성(모호성) (ambguity)의 의상을 갖추는 조직- 이 특성에서 시는 마침내 질서의 예술이 된다. 즉 봄을 말하기 위해서 결코 봄의 재료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봄의 이미지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봄은 비로 출발한다. 이는 겨울의 살벌함을 씻어내는 역할의 상징이 되어야 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깨움의 요소로 작동되는 이미지가 바로 비이기 때문이다. 돋는 싹을 스치고 모든 생명의 풀포기를 만나 열어젖힌 내 창문을 두드린다. 진종일 물안개 뽀얗게 이는 산골 마을 오래도록 울고 또 울고 하느님처럼 산과 들을 거침없이 지나던 비 드디어 연둣빛 물세례로 산천초목이 춤을 춘다. 4월, 부활의 대지는 힘든 숨을 몰아쉬면서 -『봄비』 중 “부활의 대지”를 달성하기 위해 비는 제 역할을 다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생명의 풀포기”를 위해 창문을 두드리는 비유가 다가오면, 대부분 물상은 겨울의 긴 터널을 벗어나는 신호로 일제히 연둣빛 칼라의 행진이 “산천초목”을 덮는 효과를 만들게 된다. 이런 요인은 비의 속삭임이 아니라면 봄의 이미지는 살아날 수 없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시적 전환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기에 시인은 비와 봄을 위해 탄력적인 자연의 노래를 “비”로부터 만들게 된다. 봄비가 내림으로서 생명의 이미지로 이어지고 자연의 재현 앞에 “시”는 제2의 자연을 재생하는 역할이 수행된다. 왜 그런가 하면 비의 다음 순서는 꽃을 만나는 일이다. 봄의 마음이 되고 싶어 죽은 듯 하나 소생하는 아름다움 생명으로 돋아나는 계절이 싶으며 햇살처럼 가슴 따뜻한 4월, 산 벚꽃 닮아 맘 고운 사랑의 사람이고, 싶다. -중략- -『산 벚꽃 고운 날에』 중 이준영 시인은 4/5월에 가장 시적 흥취를 느끼는 듯하다. 『봄비』 『봄』 『길목에 선봄』 등의 시는 절로 일렁이는 감수성이 가락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인의 정서가 봄에 가장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남기고 있기 때문에 4/5월 자연을 시로 나타내는 뜻이 된다. 인용하자면 “봄의 마음이 되고 싶어.”의 소망은 2연에 “꽃잎의 속삭임”이 되고 3연에선 “사랑의 사랑”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 아울러 4연에서는 ‘봄을 짓고 사랑을 짓고’의 봄과 사랑의 결합 그리고 5연엔 ‘맑은 눈 가지고 싶다.’ 6연엔 ‘정갈한 여자’ 소망을 꼭 껴안은 여자로 양적(兩敵) 의 암시를 봄으로부터 갖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 모든 의미를 집합하면 ‘봄엔 순수한 여자의 사랑’이 연상되기도 한다. 더불어 4월에 피는 꽃들의 이미지가 숨어 있지만 향기를 배제할 수 없는 것 같고 꽃의 시각성과 향기의 후각이 결합한 공감적인 효과는 고귀한 사랑을 봄에서 얻고 싶어 하는 시심의 발동이 왕성한 정서를 부추기는 상징의 계절이 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사랑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3) 인내의 기대와 희망을 절망은 희망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면, 희망을 절망의 토대 위에서 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절망은 희망의 순서를 대기하는 이해에서 희망은 인내의 시간을 가질 때 다가오는 순서일 것이다. 아울러 시는 희망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또 사랑을 위한 방법을 내포할 때, 비로소 시의 가치는 고귀한 이름으로 득(得)할 수 있다. 시를 읽는 것은 희망과 행복을 읽는 것이고, 사랑을 읽은 일이라면, 더불어 따라오는 꿈과 소망의 그림자는 행복을 준다. 이런 이유로 시의 소용(所用)이 있기 때문에 활력과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시라는 의식의 높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단, 한번 놓은 적 놓은 적 없는 희망에 살았다. 사방이 꽉 막힌 터널 속이다. 지금 지레 겁에 질려 눈앞이 아찔한 순간에도 잠시 정신 차리자고 속삭인다. 여전히 하늘 떠 있는 강물 위를 바라볼 때 희망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꽉 막힌 벽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면 스스로 열리던 나날의 하늘 문 어설픈 한 손이 공기를 때리고 허공을 휘젓게 하지는 않으리라, 왼손으로 창을 열고 하늘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아침 - 『희망은 늘 그 자리』 중 희망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상은 아픔과 시련이 있을 때 가능한 역설적인 생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즐거움이나 행복 속에서는 희망의 이름이 부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설의 이름은 항시 대기 상태에서 밖으로 나올 기회를 엿보지만, 인간은 희망의 가까움을 신념으로 키우지 않으면서 탄식만 길어지는 경우가 절망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정신을 차리자고”의 다짐이 있기 때문에 희망의 싹은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의 기회를 다짐하는 경우보다 탄식하는 순간에 질리면 “하늘의 문”은 열릴 방도가 묘연(杳然)해지는 일이지만 이 시인의 신념은 이런 처지에서도 앞을 주시하는 일면 “창을 열고 하늘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아침”의 준비를 마련하기 때문에 밝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인자(因子)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침묵의 시간 땅에서 자란 하늘을 뚫고 긴 장대에 메어단 긴 목 나무의 키만큼 자란 꿈 땅에서 하늘로 이어주는 길을 내고 새의 깃털을 입은 소망 하늘을 난다. -『솟대』 중 인간은 늘 하늘을 날아야 하는 소망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은 구원의 이미지가 들어있고 꿈에 대한 열망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험을 감행하면서 날아야 하는 하늘에 동경의 역사로 점철, 되었다는 데에 있다. 하늘이란 원래 고귀한 혹은 정착해야 할 마지막 개념일 때, 새들은 이를 대신하는 이름으로 자유롭게 비상한다. 이는 인간의 뇌리에 정착한 소망이 곧 하늘로 지향점을 마련하는 상징으로 대체될 때, 새는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는 임무에 헌신했다. 왜 그런가 하면 지상에서 하늘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새의 형상을 갖추면 인간은 여기에 기도를 올리는 경건함을 신앙으로 삼아 왔다. 이 꿈은 곤궁한 현실에서 구원의 하늘로 이어지는 메신저의 역할이 새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이 시인의 시에는 희망의 발언이 많은 편이다. 『기다림』 『소망』 등은 꿈과 사랑을 찾아 나서는 인간의 노력이 투영되어 미지로 향하는 정서들이 건강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2. 에필로그 – 자유와 소망의 꿈들 시는 마음을 그리는 퐁경화이다. 라는 데에는 이견은 없을 것이다. 무슨 그림을 그리는가는 시인의 상상이 빚는 소재라면 이를 기교를 어떻게 표현할 것 인가는 시인의 재능에 귀속된다고 볼 수 있다. 문학적인 상상은 현실의 상상과는 다른 차원의 깊이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라- 이는 시인의 삶이 축약될 수도 있고 오랜 습작의 소산으로도 돌릴 수 있는 이유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소재와 기능이 우수하고 시인의 체험이 상상과 결합 된다면, 그가 빚어내는 시는 탁월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인의 상상은 매우 재치가 넘치고 또 사물의 수용에 감각적인 특징이 보인다. 특히 봄에서 느끼는 생동성에서는 의욕이 분출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고 계절에서 느끼는 편안한 표정으로 사물을 대면 하기가 다양하게 이채롭다. 물과 바다 자연을 재료로 떠나는 여행이 조급하지 않고 한가롭고 너그러운 마음을 주는 인상이라면, 가을의 깊이는 심사(心思)한 사색의 길이 열리고 색깔의 자유가 편안하다. 그러나 겨울은 백색으로 포장된 성주(城主)- 그가 꿈꾸는 성안의 모습은 평화와 아늑함을 주면서도 따스함이 따라오는 그런 투명의 시를 그리는 이준영 시인의 표정이 정겹고 속이 보이는 그런 시인인 듯하다. 장문의 시평이라 일부 잘린 상태에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4.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는지 물음에는 거의 명확한 대답을 마련하는 시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필자도 막상 왜 시를 쓰는지 물으면 답을 어떻게 줄 것인지 몰라 생각나는 대로 무한 상상이 내게 들어와 시를 쓴다는 신을 떠올리며 설명을 해주게 된다. 물론 스승께 배운 말이지만 사실 자기 시에 대한 논리를 구축하고 거기에 맞추어 시를 쓴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시를 생산하고 나면 그 결과에 따라 시를 분석하고 해제 또는 정리 이후에 비로소 객관적인 관점으로 탄생된 시에 대한 평론가의 조언에 따라 할 뿐이다. 이 경우 시에 대한 객관화는 쉽지 않으며 모든 시인이 이런 절차를 통해서 시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기에 마치 잉태 전에 어떤 꽃을 만들겠다고 꽃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삼라만상 우주 섭리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을 따르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시를 그리는 일은 아이의 잉태, 또는 꽃을 만들 수 없는 일과 같은 것이다. 시인 누구나 멋진 시 좋은 시 쓰기 위해 신명을 다하지만 그런 소망은 쉽지 않은 결말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멋진 시와 좋은 시를 그릴 수 있는 조건은 간단하다. 내면을 통찰하여 사물의 특성을 시로 환치하는 일에 부단한 집중력과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누구나 그리고 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시인이란 명칭을 가진 사람만이 시를 그리고 쓰는 것은 아니다. 시는 누구나 찾아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모든 인간은 내면에 시심을 감추고 살고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 시심을 어떻게 꺼내어 이미지화 시킬 수 있는가의 집중력 상상에 의해 아마추어와의 차이는 증명되는 것이기에 증명이 되는 것이다. 서길순 시인은 공예방에서 작품을 만들며 깨끗한 시를 쓰는 시인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잡티가 섞이지 않고 순수를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나 투명하다. 이는 그의 직업과는 완연히 다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넓은 견문으로 시화화 하는 독특한 입지를 만들고 있다. 공예라는 작업은 섬세하고 작품을 완성하는데 많은 창작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 시곗바늘처럼 행동하는 조용한 조건에서 일을 하며 창작이라는 사명감 속에서 매시간 순간의 고통을 수반하는 일에서 체면을 지켜야 했던 순간의 아픔들이 밤낮을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던 나날들을 발췌하는 순간의 환희- 에서 다소 체계적인 글이지만 시인의 내적으로 아파했던 시절을 말하고 싶은 글들이 응축되어 시로 표현한다. 이렇게 시를 쓰기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생동감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볼 때 함축된 언어로 그려지는 그의 특성을 만나기로 한다. 2. 시의 언어 시는 언어로 이어진다. 그 구성이 언어일지라도 시인의 정신이 투영되는 점에서 그만의 영역을 나타낸다. 이때 단순한 언어의 조합, 조립이 아니라 시인의 영혼을 모두 투척하는 일이면서 생명과 고통을 맞바꿀 수 있는 신념의 진행이라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한 편의 시는 곧 시인의 자화상이고 영혼의 불빛과 같은 가치를 갖는다. 서길순 시집을 보면 계절별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계절에 따른 시인의 의식은 계절과는 다른 심리적인 상태로 의지하며 봄에 꽃을 보면서 사랑을 생각하고 사계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꽃봉오리마다 솜털이 보송보송 꼭대기까지 단물 적시며 양지뜰 푸른 꿈 꾸더니 어느새 바람을 이기고 이쁘게 세상으로 나온다. 아직 웅크린 벌 나비 날개 짓 처마 끝 매달려 앵앵거린다. 꼼지락, 꼼지락 양지바른 돌담 아래 키다리 쑥이 터진다. 어머니가 끓여준 쑥국이 문득 생각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가 이른 봄에 -중- 물이 오르는 봄날의 허박한 풍경화이며 의식을 풍경과 어머니를 그리는 방법은 서정시의 흔한 작시법이지만 실감으로 다가오는 일은 희소한 일이다. “꽃봉오리”가 “바람”과 싸우고 1연 2연 오면 “벌” “나비”라는 혼란스러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생동감 넘치는 것으로 어머니의 추억이 개입되면서 상상의 나래로 펼쳐진다. 서길순 시인의 시는 전반적인 작시법이면서 그의 시적 정신과 의식을 투영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1) 삶에 깊이 모든 시에는 삶에 대한 호흡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 자신의 고백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우회라는 말은 낯설게하기라는 문학적인 기교를 뜻하기 때문에 시는 시인의 말이 되고 그 말은 감동의 방법으로 직조된 아름다운 무늬와 같은 것이다. 그의 정서는 아마도 꾸밈이 없어 단조롭게 보일지는 몰라도 아주 깨끗한 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빙글빙글 잘도 돌아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지구가 돈다. 중략- 빙글빙글 새 희망이 익는다 팔랑팔랑 벚꽃 익는 냄새가 향긋하다. -중- 모순으로 부풀려진 세상에서 자연의 섭리는 구분과 칸막이도 없이 잘도 돌아간다. 때문에 시인은 빙글빙글 띄어쓰기를 안해도 그냥의 의미를 구축해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인간의 구분일 뿐, 누가 가을이라고 하지 않아도 사계절은 오고 있다. 누가 시켜서 그러는가? 다만 자연적인 현상으로 더불어 팔랑팔랑 벚꽃이 지는 섭리 앞에 숙연해지는 모습- 시인의 얼굴에 가득한 희망의 메시지로 남으며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이를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개인의 정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한다. 해와 달 끌어안고 우린 달렸다. 지구촌 너무 좋아 낮과 밤 구분 없이 우리는 그렇게 산다- 중략- -중- “우리”라는 의식은 분야가 다르다 해도 질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불평 불평 없이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이는 그의 삶에 적용된 의식이 투영된 것과 동일한 문제로 정리되는 듯하다. 그의 시는 담백하면서 이미지를 건져 올리는 이치가 대입된다. 2) 의식의 정감 시는 인간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시의 무드는, 결국 시인의 정신 무드를 표현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시인의 정서는 다감성을 포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는 두루 관심을 나타내지만, 지극히 절제된 표정을 관리하는 것 같다. 등을 보게 되면 주변의 지인이나 육친에 대한 정감이 다감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도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친구야 오늘 하루는 시원한 감로주 한 사발 거나하게 나누고 날 저문 고향길 함께 걸어가 보지 않으련? 나이테가 몰라보게 두꺼워진 네 눈망울 속에서 새 봄맞이 분주한 고향 땅을 그리련다. -중- 친구와 감로주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속언이다. 우정은 곰삭은 맛처럼 깊이가 있고 따스한 체온이 교감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옛 친구의 우정을 찾아 방랑의 길을 터벅터벅 가는 것 같은 시적 감각이 돋보인다. 그러나 결국 도착한 곳은 고향 땅, 이는 친근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의 고향을 못잊어 하는 인간의 여린 심정에서 시인 또한 예외가 아닌 듯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얼굴을 그릴 수 있지만 결국 그릴 수 없는 어머니의 가슴에 이르면 서러움 같은 밀물에 점령당하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술래놀이 즐겁던 미루나무 아래로 가리라 돌아가리라 꼬까옷 반짝반짝 차려입고서, 고향 땅 산과 들녘이 반가이 다가와 벌써 내 곁에 있네.-중략- -중- 추억은 늘 즐겁다. 왜냐하면 추억에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여기서 어린 날들의 “술레놀이” 혹은 “꼬까옷” 등의 기억들이무리지어 “벌써 내 곁에 있네.”라는 생각- 생각만 해도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고향이 된다. 순수와 아름다움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어린 날들의 순수와 추억들이 어울려서 오늘에 다가온 이름- 추억 속으로의 여행은 정 깊은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풍경화이다. 이 풍경화는 바라볼수록 다정하고 깊은 애수를 자아내기도 하며 돌아가고 싶은 강한 충동으로 점철 되지만 인간은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희망의 손짓을 보내는 것이다. 돌아갈 길이 묘연함과 긴 시간의 간격 때문에 애절함을 더하는 요소로 인상을 장악한다는 뜻이다. 3. 자화상의 노래 “만추” “겨울 일상” “그리움” 등을 보게 되면 시인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일을 노래한다고 할까? 때문에 그의 노래는 단순한 가락이 아니라 명상의 숲을 구축하는 이미지의 조화를 이루는 듯하다. 아울러 생각하는 것만이 시의 몫은 아닌 것이다. 행동의 길을 안내하면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시의 자리를 항상 견고(堅固)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면, 서길순 시인의 시에는 생동감으로 포장된 정서가 신선미를 자극한다. 인생에 대한 발언은 때로 에피그람의, 목청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깊이를 갖춘 희망의 깃발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정감이 그의 시심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시에서는 고향을 회상하는 따스하고 안온한 이미지의 옷을 입은 시적 행보에는 즐거움이 따라오는 듯 하다. 다시 말한다면 서길순의 시는 노래로 부르는 자화상의 그림일 것이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모든 이들의 따스한 시상을 전해주는 시인이 되기를기대 하며 나의 숙제와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하며 마음 내려놓으며 나가려 한다. 2025.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