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꿈은 1편의 시를 위해 정성과 혼심을 다해 경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은 소망은 항상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하고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영예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의 주인이기를 바란다면 몇 개의 조건을 합치시켜야 한다.
첫째는 공감의 영역이 넓을수록 호감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공감이란 보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둘째는 시의 완성도 즉 시적 조건에 합치하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정적 언어의 선전이 아니라 평범하면서도 누구에게나 공통의 이해를 넓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의미의 내포- 결국 의미가 마지막에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의미 없는 시는 공허함만 부추길 수 있음도 명심할 일이다.
전 세계 많은 인구가 자리하듯 시 또한 많은 표정들로 세상을 부유(浮游)하는 것이기에 개성을 갖춘 표정을 만나기란 매우 희소(稀少)하기에 개성은 시인 자신만의 표정이 아니라 시인이 만든 유일한 자기 분신일 수 있기 때문에 누구의 작품이라는 명패를 패용함과 동시에 무한의 책임을 갖는 것이다.
시는 시인의 운명과 동일한 여건으로 살아가는 이름일 수 있음을 의미함이다.
유기연 시인의 시에는 여러 가지의 표정이 묻어난다. 식물 정서, 사랑정서, 환경 정서 등이 가장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삶의 애환과 정신의 지향 사랑에 대한 애착 등이 표출하는 것으로 유추가 된다. 시는 낯설게 표현하는 점에서 의도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지만 시의 표현은 종국에는 정신적인 흔적을 예외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관념적인 표현이 다소 있겠지만 시인의 의식을 점령하는 세 가지의 축이 시집을 채우는 말들의 향연이다.
이러한 정서는 아무래도 전원의 정서가 지배적인 현상을 유지하면서 다감한 성격, 혹은 그런 성품에서 나오는 사랑 또는 정서적인 흐름이 도시의 복잡한 정서를 외면하고 살고 싶은 사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제 그 흔적들을 만나 보기로 하자.
『2. 정서의 표정들』
1> 식물 정서
시인은 누구나 개성의 따라 일정한 취향을 갖는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정서가 어디로 관심과 집중을 하는 가의 여부에 따라 문자로 표현하는 길은 그런 쪽으로 언어를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심리적인 현상이 지배하는 길에 따라 예술의 형성은 탄생의 길을 마련한다. 대체로 식물 정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성은 다이나믹한 것보다는 정적(靜的)이고 사색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다. 바다를 좋아하기보다는 강을 좋아하고 높은 산보다는 작은 산의 정취에 마음이 더 쏠리는 일은 유 시인의 시 제작의 정신 문으로 정신의 문으로 들어 가보자
텃밭 끝자락에 실하게 여문 호박 하나
살며시 집에 옮겨 놓으니 텃밭이 따라왔다.
혹여 허기를 채워주었던
비우며 살았던 세월이 미소 지으며
굶주림 세월 견디었던 부모님
가뭄과 폭염을 견딘 커다란 호박
온 집안에 가득하다.
<과거의 상념>
사실 호박 하나가 일상에서 줄줄이 풀려지는 이야기는 과거의 길을 넓게도 채색 되는 듯하다.
가난한 시절 허기를 채워주던 “호박 하나가” 서글픈 지난날들의 파노라마로 일어나는 길에 부모님의 가난을 슬픔의 물살로 살아나는 애환의 갈증-
가난과 갈증의 아픔으로 누선(淚腺)을 자극하면서 현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회상하는 시가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호박이 지난 추억을 상기시키면서 부모님의 가난과 아늑하고 포근한 농촌의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드는 듯하다
이런 풍경과 추억은 시인의 마음에 매달렸던 동화된 마음과 사랑의 감성이 식물 정서와 지배적인 양(量)으로 시적인 허기를 채우는가를 증명하는 예로서 감흥이 솟아 나는 듯하다
하냥 걷는 길에 만상의 태고의 신비에
산길도 꽃으로 돋아 이리도 고왔는가?
뉘, 있기에 그리운 길을 같이 걷고 싶다 –중략-
<산속 길에서>
시의 구조란 길-꽃-그리움으로 이어지는 짧은 단형의 시이다. 산속 길을 걷는 목적의 좌표가 시인은 태고의 신비를 만나 산길도 꽃으로 펼쳐진 길을 유영하며 산길을 걷는다.
아무튼 꽃은 지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미지칭으로의 꽃이기 때문에 그 꽃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을 표하면서 “고왔는가”의 새삼 발견에서 역시 꽃은 그리움이라는 먼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표백되는 듯하다
시인은 고달픈 인생의 비유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랑을 말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마지막 잎새 하나 욕심없이 내어준
노을 진 들녘에 찬비마저 내리고
아픈 잔등 쓰다듬다 한기 견디며
삶의 골짜기에 철새처럼 머문다
까마득히 저 산등성이로
차마 닿을 수 없는 달빛시린
헛된 꿈도 가고 내 삶의 이랑에 고인
욕망도 쓸고 간다. 세월이-
<삶의 뜰>
다소 관념적인 시이지만 겨울 독목(禿木) 한기 젖은 모습을 바라보며 비극적인 무의식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독목이 있으므로서 봄을 예비하는 안온함이 자리하는 느낌이다.
이런 순환의 법칙은 곧 우주의 운행 원리와 상통을 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궤도와 다름이 없을 때, 비유가 생동감으로 일어난다
마지막 잎새하나 바람이 스치면 엄혹(嚴酷)한 시련의 줄기가 칭칭 얽히는 일상을 넘어 “삶의 뜰”은 봄을 기다리는 희망의 자리가 보인다.
식물 정서는 특히 여심을 나타내는 향기와 유연함을 이미지로 작용하여 시인의 시에 특성으로 자리하는 듯하다.
어머니 손때 묻은 항아리
그 안에 수련 있어,
고단한 삶을 이고 청초한 빛 쓸어낸 그 안
수려한 어머니의 자태가 있다.
물그림자 뜬 자리 물 배추 펴놓고 가을 햇살이 와서
사랑으로 아픈데 창문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어머니 분냄새 처럼 함초롬 향기 듣는다
<수련>(차분하고 고운 상태)
어머니와 수련의 향기가 동가(同價)를 이루면서 작고 아담한 또는 사랑의 향기로 돋아 오르는 연상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바람과 어머니의 내음과 가을 햇살 그리고 향기가 함초롬이 돋아나는 이미지의 결합엔 시심이 누리는 연상작용이 복합적인 것 같다.
이는 조용한 어머니를 그리기 위해서는 수련의 향기와 자태에서 사랑의 이름은 더욱 애달픈 상을 남긴다. 시인의 시는 이렇게 식물에서 느끼는 자태-
아름다움과 향으로 오르는 천상으로의 이미지는 고귀함을 자극하는 기교가 되지 않을까?
+
2> 부모
가랑잎에 하얀 서리 내리면 깊은 골짜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 시름을 보듬어 소쩍새처럼
소쩍새처럼 못내 서러워 운다 –중략-
<아버지>에서
잘은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가난의 굴레를 짊어지고 형극(荊棘)의 나날에서 끌려가는 형상-
가족을 책임진 신음을 생각하는 딸의 모습이 너무도 가련하다.
이는 “소쩍새처럼”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가 고난의 아픔이 연상 된다.
더구나 “서러워 운다.”의 내포는 풀어낼 수 없는 고통과 참혹성을 나타내는 비유일 것 같다
누구나 과거는 무겁고 회상하는 삶의 그늘이 무게와는 달리 친근하고 애착이 가는 그런 경향이 다분하다. 왜 그런가 하면 나의 소중한 추억이기에 비록 가난이나 아픔조차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발동된다는 점에서 시름이나 서러움일지라도 동화되기를 염원하는 뜻이 된다. 아울러 부재한 부모에 대한 회상은 더욱 무게가 가중되는 것도 사실이다.
유기연 시인은 이런 정서를 시화(詩化)하는 점에서 다감한 성정으로 생각된다.
나를 찾으면 이미 나는 내가 아니고 더 큰 나로 변한다고 한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는 나를 위해 운행한다는 생각으로 바꾸면 나를 찾는 일은 곧 우주의 원리를 찾는 일과 같을 것 같다. 나를 아는 일이야말로 철학의 시작이고 종점이기에 시련을 감내하면서도 나의 의미는 삶의 가치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부끄러움에 전신을 감추었다.
되비친 것이 사랑이면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
...중략...
나는 무엇으로 거울 앞에 풍경을 피울 것인가
마지막 아름다운 고백이 되비치기를 기도하며
거울을 닦는다.
<거울> 중-
나르시스의 이름은 자기에게 대한 탐닉(耽溺)을 의미한다
거울은 자기를 반사하는 모습이지만 정작 그것이 자기라는 확신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대편에 영상으로 나타난 자기의 분신일 뿐이다. 그 분신 속에는 보이는 마음이 없기에 오로지 형태만으로는 완전한 자기의 의미는 아닐 것이기에-
그러나 자기와 반대편에 서 있는 거울 속에 자기를 부정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형태조차 부정하는 곳에 의미는 찾을 단서를 확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나 되비친 거울 속에 자기를 애착하는 관심의 농도가 강할수록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비칠 것을 염원하는 생각이 일상을 벗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3> 사랑의 진원
사랑의 종점은 배우자를 만나면 자연스레 도착한다. 그러나 그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방황과 설렘이 교차하는 수많은 길을 가야 하기에 그렇게 간다, 하더라도 사랑의 안온함을 누리기엔 지불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고개를 넘으면 다시 고개가 나타나는 사랑의 행로는 오로지 현재라는 지점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누리는 마음의 평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 시인은 오로지 사랑을 위한 의미가 시에 모든 것을 투척하는 표정이라는 점,
아마도 남편을 향한 노래로 한정 되어 있는 듯하다.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두눈이 먼다해도 사랑의 빛으로 길을 밝혀주는
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허전한 날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중
이 세상에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한사람이 있습니다.
<한사람> 중
저녁 노을에 기대어 있노라면
살포시 다가오는
얼굴 하나
차마 보고 싶다
말할 수 없어
수줍은 마음 하늘 가득
붉게 물들고 다정한 마음이
먼저
마중을 나간다.
<그리움> 중
유 시인의 사랑은 빛나는 사랑을 원하는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수사의 사랑을 하는 것 같다. 조용한 공간에서 만나는 정서를 보여주며 순수하고 담백한 뜻을 가질 때 사랑은 고귀한 가치의 개념으로 정리 된다면 유 시인은 안온한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조용한 시인- 그런 시심을 안으로 감추고 부끄럽게 표출하는 시인이 아닌가 한다.
3. 에필로그
유 시인의 시는 담담하고 서늘한 가을 바람을 맞이하는 인상이 짙다.
이는 시인의 감수성에서 나오는 시심이 조용하고 아늑함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는 식물 정서에서 오는 정감이 부드럽고 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점에서 푸르른 식물 같다.
부모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따뜻한 정이 안으로 남기는 점에서 포근하게 다가온다.
이는 여심에서 보이는 감성이 유동하면서 객관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효과-
이러한 즐거움은 언어의 효과적인 비유와 장치를 만나는 반가움이다.
시는 사랑의 노래로 집약되는 듯-
하지만 물론 사랑의 요체는 한 삶을 향하는 절절함이 산뜻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시의 행로는 오직 사랑을 향한 정성과 시로서 표현하는 인상이 전부이지만 언어의 조화에서 삶의 높이로의 지향점, 부모님의 애절한 마음과 사랑을 위한 현실의 가치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순수의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놓고 나가련다.
2022. 08. 03.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