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인간사는 세사의 모든 물상에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영혼을 붙어 넣으면서 기도의 물목(物目)으로 삼아 또 다른 상상의 영역을 탐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은 또 다른 길을 만들면서 사고의 복잡성을 부추기어 문화의 중심으로 채색하는 것이다. 또한 이름이란 부를 때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속에 무엇인가 영혼이 있음을 신념으로 공고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1이라는 이름을 굳이 1이라 고집하는 이유는 인습이라는 장벽 때문에 고칠 수 없는 이유를 내장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름이 관습의 의상을 걸치고 거기에 안주할 때, 상상의 길은 차단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시인은 이런 기준의 질서를 거부할 때, 신명을 불러올 수 있고 이 신명의 불꽃 위에 시인만의 성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시적허용은 산문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시는 관습적인 것이나 기존의 사슬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맞이할 때, 선도적인 시인의 임무가 발휘되고 여기서 시의 길은 또 다른 변화의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상(李箱)의 [오감도]에는 띄어쓰기, 맞춤법 등이 기존의 질서에서 역으로 상상을 자극할 때, 새로운 출현의 시를 높이 상찬하는 이유가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시인은 언어 혁명의 기질을 가져야 하고 의식의 변화를 과감하게 자극하는 질서의 파괴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성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개성 있는 시인의 이름이 되지 않을까? 똑같은 혹은 아류의 시는 아무런 개성도 갖지 못한 무의미의 의상을 걸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인의 의식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매의 눈을 기저야 하며, 먹이를 찾는 사자의 배고픈 방황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시와 똑같으면 이유가 변화에서 신선함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첫 시집을 상재한 노길순의 시는 그만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시인인 듯하다. 봄 향기 가득한 봄바람처럼 상쾌하며 안정감이 있는 인상으로 언어 조합의 묘미를 상기시키면서 그만의 영역을 노리는 탐색이 전제될 때, 다가오는 기운은 삽상을 자극시킨다. 이제 노길순의 정신 추구를 운위 하는 길로 만나러 들어가보자. 2. 【Dream [꿈], 제조기 1> 자신의 영역 길 찾기 예술은 본질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의 다양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백적 형태로 기교를 표현하고, 선과 색채로는 미술 작가의 사상이나 신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학은 문자를 통해서 결국에는 자기를 그리는 작업이라 보기 때문에 지속한다는 뜻이다. 물론 표현된 결과물은 저마다 개성의 차이에 따라 톡특한 양상을 갖는다. 삶이란 결국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고 이 여정을 어떤 뜻으로 받아 드리고 또 삶의 중심을 어떻게 잡는가는 시인의 표현 목적과 의도로 표상될 뿐이다. 이길순의 시에 첫 번째 목록에서 자기를 위한 탐구의 길이 보이는 것은 그가 어떻게 시의 진로를 이끌고 나갈 것인가를 암시하는 의미에 가깝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곧 전체 속에서 어떤 위치에 이를 끌고 나갈 것인가는 목적에 맞추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보이질 않는다. 내가 창가에 서 있는 나 거울에 보이는 분명 서있는데 무더운 염천이 몰고 오듯 그저 땀을 흘린다. 잠시 짧은 흔들림이 머리카락 움직이고 이리저리 내 곁에 있는 나 이제 떠나 주기를 한 번 두 번 기다림에 지쳤건만 오늘도 나를 자꾸 기다린다. <내가> 중에서 나를 알면 가장 위대한 인간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정의할 것이다. 모든 성인들은 “너”라는 대상에 질문을 던지면서 혹은 직간접으로 지적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삶의 중추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에 철학의 중심을 두었다면 노길순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자기를 “안 보인다며” 면서 스스로에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거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표정의 대면에서 시인은 스스로 찾아 나서는 노력이 집중된다. “그저 땀을 흘린다.” “나를” 강조하면서 비로소 머리카락이 “움직인다” 의 탐구에 대한 대답을 듣고 있음이다. 더불어 “기다림이 지쳤는데”에서 지속적인 삶의 탐험이 스스로의 동력을 얻어가는 단계로 들어간다. 인생은 오로지 자기가 살아가면서 해답을 얻는 길이 있을 뿐이지 타인이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때문에 신열을 감내하면서 길을 가는 나그네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를 버릴 때, 기를 얻게 되는 역설적인 방법도 있지만 노길순은 직접 자기와 대면- 거울에서 나르시스의 방황을 해쳐 가는 용기가 가상하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도 나를 기다린다는” 자기애(自己愛)의 길을 넓히는 발상이 두드러진다. 어느새 벌써 과거가 나를 비웃는다. 나는 아직 존재하는 숨 쉬는 인간 돌아보니 벌써 과거가 비웃는다. 땅에 붙어버린 발이 언젠가 가장 멋지게 함께할 저 끝 오늘도 나는 내일을 이끌고 무거움이 힘겨운 줄 모르고 앞으로 전진 또 전진 <살아가는 일> 중에서 인간은 세상에 현존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탄생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일 뿐 실제로는 미지의 공간에서 다시 미지의 공간으로 길을 만드는 존재일 뿐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라는 구분이 생의 이름으로 다가든다. 노길순은 자아를 확립하는 방도로 과거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톡특한 듯하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증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숨 쉬고 있다는” 면을 강조하고 다음 수순으로 진행하는 미래지향이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 중간의 현재를 인식하는 점이 이채롭다. 흔히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특징인데 이런 유약함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톡특한 개성의 의상을 입고 “땅에 붙어버린 발”이라는 현실을 의식하고 가장 멋지고 오늘과 내일을 끌고 출발하는 보폭- “무거움이 있을지라도 전진” 앞으로 독촉하는 시심이 희망의 날개를 달고 전진하는 발상이 희망의 발걸음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를 대상으로 어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감동의 목록으로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는 항상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호소하는 반복성에서는 독자도 수용미학적인 마음으로 파도를 일으키면서 질서 있는 형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작품의 내면에 수용된 의식의 갈래는 ambiguity(모호함)이라는 시적 형식 속에 내면의 질서를 살려야 한다. 이는 유기체인 생명에는 다양한 요소의 결합이 통일될 때 황홀한 감성의 바다를 독자에게 전달 수 있다면 여기서 시의 성공은 담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적 반응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된 의식이 명확해야 하고 균제(均齊)의 형식이 가지런했을 때, 비로소 미의 모범 원리로써 형식적인 통일감이 주어진다, 노길순의 시는 우회적인 기교가 아니라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진솔함이 특징일 것 같다. 홀로 잠든 내 곁에 살며시 별이 왔다. 깊은 밤 숨소리조차도 사랑스럽다. 모른 척 힘들지 말라고 침대 모서리를 잡는다. 어느새 작은 새처럼 내 안에 안긴다. 사랑해 난 괜찮아 손발이 차가운데..... 내일은 좀 더 큰 행성으로 가자 아니 난 괜찮아 너만 있음 되니까 밤새 나를 밝혀주며 지켜주다 잠이 깨면 사라질까 드려워 가만히 문을 닫고 홀로 뜰로 나간다. <내 사랑> 중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매우 보편적인 어의이다. 그러나 이 보편성 속에서 본인의 마음에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을 때, 비로소 사물을 바라보는 대상에도 전이된 사랑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치는 자발성의 이치로 인식된다. 시인 스스로의 마음에서 사랑의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바라보는 모든 물상에 사랑의 기운이 퍼지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이치와 같다는 뜻이다. 깊은 밤, 별과 속삭이는 마음에는 동화의 세계가 순수로 포장된 노길순의 시심이 또 다른 에너지의 공급처이기도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랑의 에너지원이 [깊은 사랑] [장미꽃 사랑] [어리석은 사랑] 등 가족에서도 오고 자연에서도 오며 다양한 사랑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친밀도가 시인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귀결이 된다는 점에서 일일이 일거 하지 않아도 희망의 사랑이 진원지일 것은 분명한 것 같다. 3. 에필로그 자아의 문법 구축 예술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상상의 길을 만들어 미감(美感)으로 처리하는 노래인 것이다. 그 노래들에는 진실, 사랑, 배려, 등이 담겨 있을 때, 감동의 길이 보편성으로 전달되면서 독자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 되는 것이다. 정작 시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지만 시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진솔성과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의 중심이라는 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동은 그처럼 강한 태풍도 될 수가 있고 또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결합에서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꿈을 전달하는 시인의 힘은 여기서 정점을 마련하는 능력자이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부추기는 꿈의 제조자는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런 꿈을 부추기는 기능을 하는 시인인 것 같다. 이같이 전체적으로 자기 발견의 성실성과 자기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이룩할 수 없는 이유가 내장되었기 때문에 자기애의 확신성과 신뢰 찾기는 미래의 문을 향하는 옳은 길이라 하겠다. 또한 사랑의 중심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를 아는 일은 현명하고 아름다운 시인이다. 이는 사물의 내면을 통찰하는 촉수에서 시심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뢰를 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분리하면서 다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를 보내는 시가 바로 정신 문법인 것이다. 앞으로 절차탁마로 정진하여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시를 그릴 수 있음을 기대하면서 내 책임에서 벗어나련다. 2025. 05. {금요저널 주필/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배낭여행 하는 필자] 시를 쓴다는 것은 엑스터시(ecttasy)의 경지 즉 신의 경지를 방문으로 입구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행로는 여기서 표정 관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의 심연은 곧 시를 대변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자아의 평정심을 찾는 길이 도는 것이다. 또한 시는 자아의 평화가 온다면 사랑의 시연을 찾게 되는 것은 시를 그리는 사람은 모두 알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단순히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속에 비로소 언어의 평화 심연을 운위하고 시의 위의(威儀)를 갖추고 사랑의 심연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시의 심연은 곧 시인 정신의 깊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를 발휘한다. 하기에 독자는 시인의 비밀을 찾기 위해 일정한 도식을 동원하려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가질 때 독자와 시인의 관계는 소통의 행복, 즉 감동을 만나는 일이다. 생활의 주변 상황이 주조를 이루면서 전개되는 홍미선의 감수성과 줄기를 가까운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의 깊이와 삶에서 느끼는 일 등이 시의 행로를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꽃에 대한 자아의 심연은 자연의 향기로 전환하려는 의미가 연결된다. 이제 홍미선의 자아의, 평화, 사랑의 심연 찾기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2. <시에 허무 자아의 허기 사랑 의미 찾기> 1) 허기와 허무의 자아 허무는 인간의 삶에 필연으로 따라오는 인자(因子)이면서 삶의 요소를 결정하는 몫을 다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도달될 수 없는 간격만큼 허무를 갖게 된다. 홍미선의 시에는 허기와 허무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시집의 서문부터 이런 냄새가 물씬 풍긴다. 품 안에 자식 연민에 빠지니 때론 용서가 자아 층층 감겨온다. 그리움은 하얀 달에 스며들고 다시 가득 담아야 할 기다림이 머뭇거린다. <부모의 마음>-중에서 엄마의 곁을 떠난 자식에게 보내는 호소가 용서와 갈등에서 심각하게 교차하고 허기를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달픔이 길들여진다. 품 안에 자식이 떠난 고백은 그리움을 만들고 채워야 할 기다림이 옮겨온다. 기다림에는 고독이 물씬거리고 머뭇거리는 행동의 주저에서 용기가 아닌 후회의 기다림만이 앞장서는 이유를 자식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정의 진실이고 아픔이지만 자식은 쉽게 이해와 정리를 못하는 것이다. 그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될 때 깨달음이 있을 뿐이기에 자식과 모정의 관계는 이해나 설명을 넘는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2. 갈등의 자식 사랑의 결정체는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이면서 영원한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도(道)와 함께, 자식과 부모와는 점차 간격이 벌어지는 일- 성장의 나이에 따라 부모와의 사이엔 강(江)을 만들게 되면서 점차 밀려나는 일이 부모의 몫이 된다. 이러한 일들은 유사 이래 진행된 자식과 부모의 관계 보모는 자식을 항상 어린 시절에 묶어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에서 뒤처진 이유로 실망과 때론 절망을 맛보게 된다. 특히 성장의 절정인 결혼, 무렵에는 의견 대립이 극에 이르면서 더러는 벽과 마주치며 외면이거나 – 부모는 시련의 시절을 감당하게 된다. 이런 갈등은 대화의 소통 문제에서 기인 하지만 쉽게 정리되지 못하는 아픔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자꾸 맴도는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숫자에 노작 거림의 해답은 가물거리고 이것이 인생이고 저것이 무엇인가? 쏟아짐에 젖어보고 강렬하게 띄어본다. <모정> 중에서 이유와 원인 그리고 해답은 몰라도 된다. 어떻든 갈등의 요인이 자리하고 풀이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모정의 슬픔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자식과 부모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를 명확하게 처리가 가능한 것인가? 기실 해답은 없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자식과 부모의 문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논리로 풀이할 수 없는 오로지 정(精)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간은 정(精)을 용해하는 일면 다시 접합하는 능력을 발휘는 어떤 힘을 가진 관계가 자식과 부모의 관계일 것이다. 고운 손끝에서 자라 훌쩍 자유가 되어 떠났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에 있구나 <자식 사랑>-중에서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을 대수롭게, 생각되지만, 부모는 이를 애달프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안아서 키워 보지만 자식은 부모를 정으로 느끼는 것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만으로 사는 이유가 된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속 사랑으로 키우는 일 때문에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유인으로 떠나는 간격은 항상 애달픔을 유발하는 이유를 제공하기에 모정은 떠나는 자식에게 섭섭한 마음이 무늬를 그리게 된다. 시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의 소재가 자식과 상관을 갖는 이유의 대부분이 모정의 따스함에 이유를 돌릴 뿐이다. 자식에게 향하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머니의 정은 상처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런 증거는 결국 상처 의식으로 드러날 때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자식들은 모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 그리고 끝없는 모정이 슬픔에 젖는다면 이는 아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이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 모정을 깨닫는다 해도 그때는 이미 강물의 흐름이 멀리 가 있기 때문이다. 3) 삶의 방향 살아 있다는 것은 허기와 허무가 존재하고 고민이 있다는 뜻이고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헤아리게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고민도 없다. 결국 생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문제로 귀결될 때 경험의 층이 쌓이게 되고 성숙의 이름을 얻게 되는 길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높고 낮은 자리 아파 우는 허기의 자리네요 먼저 가는 길 떨치지 못한 원망 이래저래 한잔 술 끝내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다 그런 건가요. <생(生)> 중에서 생의 문제는 시인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때, 허기와 평화와 원망이 교차되는 것이다. 홍미선 시인의 경우도 높거나 낮거나 자리를 막론하고 “아파서 우는 “허기의 자리”라는 평범의 고백에 젖어든다. 이런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술은 위무(慰撫)의 방편으로 작용을 하며 술에 의지해서 우열을 우기는 상태로 진행되는 듯하다. 상상력의 발동이 “한잔”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시는 때로 간접 체험- 상상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가공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은 창조주 때문이다. 물론 생에는 의지가 공고해야 함은 사실이지만 의지를 약화하는 일을 자초하면서 고통의 밀물에 휩쓸리는 경우엔 운명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들쑥날쑥 거리는 바퀴 힘겹게 밟아대는 틀에 낀 씨름일진대 돌고 있는 모질게 살아온 땟물 올망졸망 절규가 건네는 정 이렇게 굴러온 시간을 태우면 까맣게 그을린 마음 가난을 태우고 노을 자락 매어둔 삐걱거리는 페달 <삶의 바퀴> 중에서 시인은 바퀴를 힘겹게 고통의 진행을 체험하는 느낌을 적은 것 같다. “힘겹게 밟아대는”의 유추로 볼 때 “모질게 살아온 땟물”의 이미지가 삶의 아픔을 상기하는 연상 작용을 하면서 “절규”로 이어질 때 고통의 심연을 지나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시간의 흔적을 “까맣게 그을린 마음”과 “가난”의 상관이 힘겹게 살아온 상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가난의 아픔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이기에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야만 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짐이면서 그런 의미를 교환하는 인상이 짙다. 결국 가난으로 인해 “절규” “그을린 마음”이 아픔을 동반하는 연속적인 의미 -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의 비유에 삶의 이름이 실리어 가는 인상을 준다. 살아가는 길엔 순풍이 있는가 하면 파도의 거센 물결을 넘어야 하는 일이 번다히 진행된다. 이런 반복은 곧 세월이라는 층을 이루면서 내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월의 주인공이자 때로는 나그네의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4) 사랑의 심연 사랑은 막연한 추상성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절실한 명칭으로 따라오는 이름일 수도 있다. 어떻든 사랑은 포근하고 따스함을 전달하는 이미지의 명칭 - 꽃이거나 바람이거나 홍 시인은 추상적인 뉘앙스가 강한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한 명확한 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떠난 짝에 대한 절실함도 아닌 또 꽃에 대한 암시 - 사랑의 의미가 추상적이듯 홍 시인은 사랑의 암시도 다소 추상적 전달이 아닌가 한다. 사랑은 빛 사랑은 꿈 사랑은 욕망 사랑은 파도 사랑은 눈물 사랑은 비밀 <사랑> -중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가 6가지인지는 모르나 사랑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답안은 있을 수 없지만 그만큼 폭넓은 이름으로 인식이 된다. “빛”으로 “꿈” “욕망” “파도” “눈물” “비밀” 긍정적 보다는 아픔이 수반되는 의미가 앞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는 홍 시인의 사랑에 담긴 상처는 겉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안으로 숨기는 은밀한 표현이 더욱 짙음을 느낀다. 아주 독특함으로 은유와 압축을 시키지 않으며 자신의 추상적 암시를 주는 듯하여 애매모호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 등을 집약하여 좀 더 확실성이 수반되는 시였으면 하는 바람이며 긍정 마인드로 바꾸어 시향을 그린다면 지금보다 더 빛나는 시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에필로그= 시인은 정(精)이라는 언어를 사물에 투사하여 독자 앞으로 보내는 메신저의 기능을 완수하는 시인이 아닐까? 유추하면서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노래할 때 그 가락은 흥겨울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다면 홍 시인의 가락은 후자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삶이 이별에서 그리움을 낳았고 사랑에 대한 추억은 손짓처럼 먼 거리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삶에 허기와 그리움의 교차는 모두 생활의 깊이에서 나오는 가락이면서 시심(詩心)의 나래가 화려를 갈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 자식에 대한 정감이 깊고 사랑 때문에 때로는 단절된 것 같은 고독을 대면하면서 자아의 심연을 대면하면서 용기와 신념을 안으로 키우는 가락의 주인공 - 홍 시인의 깊은 내면을 보고 또 다른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요인이 되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긍정의 마인드 사고를 갖고 시심을 발휘한다면 더욱 빛나는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의 저서] [필자의 저서] [필자의 저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詩的論이라는 것은 언어(言語)로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대체적으로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독자와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치 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云爲)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하여야 하여야 하기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적으로 받아 드리는 시인의 길을 가려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아픔,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으로 포장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금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현실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물음표이다. 이제 겨우 30여 명의 시인 논을 쓰고 있는 본인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이 되고 투영된 작품이 없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많지만 걸맞은 작품에서는 수사가 너무 많아 작품성의 가치가 없음이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 일게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공부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지부에도 젊음의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는 물음표(?)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은이들을 찾고 찾아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지부가 될 것이라 확신하며 찬란한 빛이 내려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일로, 개인의 아집을 보이는 모습이 필자가 보기에는 희망이 없음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다. 물론 연세가 많다 하여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필자 또한 나이가 익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편들끼리 모여 편들끼리 지부를 운영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곳에 정착한 지, 어언 여러 해가 되어 가지만 하나도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해 본인 스스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지만 공연히 평지풍파 아니 잘난 척하다는 모양새에 그냥 보고 듣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본인은 여러 지부에서 함께 생활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여기처럼 부자연스러운 지부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여 예술의 도시인 지부가 된다면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될 것이다. 4차, 5차원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강조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가 반목하면서 눈치만 살피고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 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잠시 현실의 안위를 생각하는 의미로 일탈을 한 것은 아닌지? 다시 평론으로 들어간다. 1. 봄바람 자리 <김영미>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꽃 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 아! 가벼워라. <꽃바람/김영미> 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꽃 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마음의 자아<박시연>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을 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신적,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時語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 않다는 데에 허전이다.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이유가 나타난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박시연>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 일게다. 좌고우면 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오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시라는 존재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의식과 일체화를 꿈꾸는 작업이라 본다. 다시 말하면 1+1은= 2가 아니라 3의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화학적인 결합의 일체화인 것이다. 이는 시적 장치인 비유나 역설, 은유, 직유 등의 장치를 가동하여 시인의 재능을 나타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지를 앞세우면 자아는 곧 시적 화자인 시인으로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순백이어야 하여야 때문만은 아니나 현실에 대한 의미를 내장한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시어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3.에필로그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를 대중들에게 바치는 가수이기에 비록 서툰 곡조라도 신명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과 희망을 향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릴 줄 알아야 하고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fr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첫 시집에서 의도를 명료화하는 이미지 구성은 건강하고 튼튼한 재료를 배열하는 설계도를 완료한 것이다. 다음 건축은 확연하게 다른 시의 개성 그리고 우리나라 시의 의미를 위한 발성이 두드러질 때 기대하는 가 위의 논지들에서 재촉이 된다. 또한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는 비밀성이 낯설게 표현하지만 비유나 은유의 장치를 분해할 수 있다면 결국 시인의 모든 정서가 표백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인 자신을 말하는 우회적인 언어의 포착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향기를 발산하는 시인들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며 문을 닫으려 하며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에 마음의 자아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일탈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며 오늘은 나를 변명하는 일로 맺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가설 1)정서는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오늘의 나로서는 사실 아버지를 닮았고 또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잇는 꼬리로 추적하면 결국 사회의 공통, 혹은 민족성에서 공통점에 이른다. 이러한 정서는 현재까지 함께 살아오면서 형성된 유사상의 측면에서 파악이 된다. 이를 한마디로 민족의 특성 혹은 사회 관습의 일치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바닷가에서 생존을 영위하기 위한 사람, 산속에서 삶을 지속한 정서는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특성이 도출된다. 환경이 주는 영향은 인간의 심성이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이론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기에 - 물론 약간의 차이는 내포하지만 유사성의 접근에서는 특성 혹은 자기 개성을 짜 맞출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가령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시를 서구적인 사람들은 절대로 감동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나를 버리고 가는 사람에게 꽃으로 카펫을 깔아주는 정서가 서구인에겐 보편성을 가질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순종 미학이 참되고 착한 도덕적이었던 것을 대입한다면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는 1920년도의 합리성이지만 현대인에겐 전혀 다른 반응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서 또한 변화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변화의 길은 있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 가설2)변화는 어떻게 오는 것인지 정서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시대적 변화에 따라 변모한다. 예를 든다면 1592에서 7년 동안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의 변화 – 임란 이전의 문학은 양반의 문학이었고 이후로 내려오면서 서민문학으로서의 변화를 갖게 된다. 언어도 된소리나 거센소리로의 변화, 가령 갈(力)이 칼로 변하는 것들은 전쟁의 참화를 지난 후에 나타난 의식의 현상 등이다. 양반만 문학을 하느냐 서민인 나도 할 수 있다는 자각에서 산문으로의 진행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격식의 파괴는 사회변화의 매듭에 따라 나타나는 추수(追隨)적인 현상인 것이다. 작가도 평탄한 일생을 살아온 것보다는 굴곡의 삶을 살아 이것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실감이 필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위대한 명작은 대체로 체험의 원숙한 인생 후반기에 나타나고 시(詩)의 경우는 상상의 산물로 인해 인생 전반기에 왕성한 욕구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2.의식의 집중화–이별과 자연 그리고 물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또 자연으로 돌아간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작품은 자연을 소재로 역할뿐만 아니라 중요한 배경으로 작동 혹은 대상화가 된다. 강이 있고 강은 바다로 가고 다시 증발하여 하늘로 순환한다. 너무나 풀밭의 초록 등 흡수력을 갖는 자연의 이름은 작품의 주요 배경을 이루고 용해된다. 이별은 만남의 반대이면서 이 또한 순환의 사이클로 인생사를 이루는 요소일 것이니, 인연 법의 고리를 형성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문학은 휴머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의 축도(縮圖)를 그리면서 비판과 긍정의 모양을 실감으로 재현하려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가는 과정은 인간과 인간의 마주침이 문제를 만들고 다시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고 비판하는 과정도 모두 건전한 사회의 구축을 위한 일과 더불어 문학의 영원한 명제인 휴머니즘 구축에 모든 의식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학의 영원한 사명일 것이다. 1)이별의 평행 이별이라는 말은 만남의 반대편 개념일지라도 생로병사 혹은 우주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즉 계절의 순환에 해당할 개념인 것이다. 만남은 떠남이 이어지고 다시 만남으로 돌아오는 길이 일정한 궤도로 작동할 때, 인간은 거기에 감정을 개입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며 삶의 열정을 매진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줄기에 얽매여있기 때문에 그 줄기를 벗어나는 일이 매우 힘겨운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뜻이 이별이다. 부재(不在)로의 거리(距離)를 가질 때, 이별은 문학작품 속에서 비극적인 개념으로 줄거리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문학의 표현은 만남에 대한 사랑과 떠남에 길을 아쉽게 표현하는 관념이 주요 대상이 될 뿐이다. 그 이외는 무대를 장식하는 소품의 개념일 것이다. 여기서 이별이나 만남은 줄거리의 본질에 질서를 형성하는 인자(因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학작품에 이별은 고구려 2 대왕인 유리왕의 <왕조가>는 서정시의 바탕을 찾을 수 있는 이별의 노래이다. 여자의 질투가 가져온 이별이 남자 <왕>의 가슴을 물기로 적시는 줄거리가 한국의 이별 문학의 모태가 되었다면 신라 시대는 향기와 정서에 의한 누이의 죽음을 슬퍼한 <제망 대가> 등은 일찍이 이별로 서정시의 근간을 이루었다 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날러는 엇디 살라 고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잡 와 두어리마 선 면 아니 올셰라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셜온님 보내 노니 나 가시 도셔 오쇼 셔 나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가시리>중에서 우리가 알다시피 고려 475년은 초기 100년을 제외하고 375년이 전쟁과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 환과고독(鰥寡孤獨)의 시대였으니 고려의 시인 정지상 또한 대동강에서 이별을 노래한 <송인도> 이별의 문학이었으니 백성 양반, 평민 모두가 참상의 아픔을 감내한 슬픔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짙은데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님 보내며 서글픈 노래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이 언제 마르랴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 더하는 것을 정지상(宋人) 대동강을 건너 진남포로 떠나는 임과의 이별에서 대동강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애절 성은 친구 김부식이 시기할 만큼 명작이 틀림이 없겠다. 슬픔의 마음이 묻어 있어도, 질 축 하지 않고 애타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깨끗한 마음의 진정성이 담겨있어 “청록파에서 이별에 건강성이 슬픔의 고개를 넘어가는 시인의 정신이 빛나는 것 같다. 양반인 시인이 얼마나 깊고 아픔의 시대가 절절했으면 명작의 이별이 탄생할 수 있을까는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다시 말하면 멀리서 오는 파도는 점차 다가오면서 모두에게 파급력을 갖는 이치와 같이 아래로 천민 백성에서부터 높이로 양반에 이르기까지 이별이 거의 전 영역에 아픔의 물살을 덮어 씌었다는 뜻일 것이다. 반면에 당시 양반의 술타령은 <한림별곡>에서 부패한 냄새가 얼마나 자심(滋甚)한가를 알 수 있는 모순의 시대였다. 아마도 우리말로 쓴 <가시리>는 이런 시대의 고통을 가장 잘 쓴 시랐는데 일치할 것이다. <서경별곡> 또한 이별의 주체가 여성이면서 좀 더 강한 의사가 담겨있음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다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이별은 아픔이고 슬픔의 언덕을 넘는 한탄과 장탄식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반복 후렴을 제외하고 67자의 <가시리>는 단순히 이별을 아픔으로 노래한 내용이 아니라 빨리 가는 것처럼 “빨리 돌아오라는”는 뜻으로 구속력을 갖고 있음에 현대의 김소월의 <진달래꽃>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서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지르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진달래꽃 1920년대의 사회는 여자는 남자의 종속처럼 대접을 받던 시대였다. 이른바 절대의 복종은 고려의 여인상과는 오히려 더욱 순종적인 유교적 문화의 사상 속에 여자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모순의 속내가 <가시리>와 <진달래꽃>과의 거리가 역전되는 전도 현상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의 기류에 삶에 가치도 발전적인 진행이 아니라 역류될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왜 그런가 하면 1920년 대의 여인은 거의 숨을 죽이고 남자의 처분에 따르는 ”역겨워 가실 때에는” 진달래꽃으로 카펫을 깔아주는 속내 – 사실 속으로는 안 가면 좋은 것이지만 적극적인 요구는 깊이 감추어 두는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완전 수동적인 자세가 1920년대 김소월의 이별 방식으로 시대를 반영되었던 것이다. 고려 <가시리>는 오히려 현대적인 적극성의 여성상이라면 <진달래꽃>은 에이츠의 <꿈>과 유사하다는 이양하의 지적은 솔직히 말해서 ‘나의 생각’ 가득한 꿈 위를/ 그대여 가만히 밟고 내라 ‘ 지내라라는 점 - “꽃을 밟고의” 김소월과 ’ 꿈을 밟고 ‘ 지나가라는 에이츠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로드 바이런의 <maide of Athens>와는 이별에서 같은 주제이지만 이스탄불로 시인은 떠나갈지라도 나의 마음을 간직해 달라는 부탁하는 것은 아픔이기보다는 작별에 일반적인 형식이 재치(才致)로 담겨있는 듯하다. 이러한 이별의 노래 중에서 아마도 <가시리>는 짧은 형식 속에 강, 약의 되풀이에서 가장 뛰어난 백미(白眉)를 창조한 이별 문학으로서 출중하다는 데에는 누구나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이별에서도 자식과의 이별은 아마도 가장 심대한 통증이 나타날 것이기에 허난설헌 <곡자>에 이르면 처절의 농도는 극치에 이르는 이별이 아니겠는가.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디 슬픈 광릉 땅) 雙墳相對起(쌍분상 대기)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은 일고) 鬼火明松楸 (소나무 숲에는 도깨비불 반짝이고) 紙錢招汝魂(지전초여 혼) (지전을 태워서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네들 무덤에 맑은술을 올린다)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그래, 안다 너의 남매의 혼이) 夜夜相追遊(야야 상추유) (밤마다 서로 따르며 함께 놀고 있음을)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비록 지금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安可冀長成(안 가기 장성) (어찌 제대로 자랄지 알겠느냐)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하염없이 슬픔의 노래 부르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 나오는 슬픈 울음 삼키고 있네) 허난설헌 <곡자> 함종임 <채련>에서 경기도 초월리에 있는 남편 김성립과 후처 홍 씨의 묘가 나란히 있고 난설헌은 맨 아래 안장되었고, 그 오른쪽에 두 남매의 무덤이 있어 죽은 뒤로 비로소 함께 지정을 나누는 모정의 애달픔 - 먼저 떠나보낸 자식의 죽음은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에 시(詩)의 슬픈 가락으로 이어지며 애석하게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응어리진 한(恨)이 버릴 수 없는 이별의 최고의 정점을 꾸미는 시(詩)의 형태가 허초희의 운명적인 비극의 극치를 대변한다. 천붕지통(天崩之痛)을 넘어선 슬픔의 가락에 뼈가 슬어지는 느낌이다. 사전적으로 이별은 “서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을 사전적 의미라 하지만 드라이한 측면이 감동을 일탈(逸脫)한다. 사랑이라는 말도 남녀가 좋아함에 이르면 느낌이 매우 삭막함을 느끼듯이 그렇듯 문학적인 수용으로의 이별은 ”아픔과 눈물“ 그리고 회색의 절망이 깊은 상심을 유발하는 지경에 사전을 간과(看過)한 점에서 깊이가 없는 것이다. 얼마나 깊고 처절한 인상을 창조하는가의 문학 - 시(詩)의 가치를 가져올 수 있다면 이는 체험의 농도가 결정 요소로 작동하리라 본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이별의 용어일지라도 비극적인 인식과 재치의 인식에서 차별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식의 슬픔을 슬퍼한 어머니로서의 허난설헌의 이별은 남녀 사랑에 대한 이별과는 또 다른 절망의 길이 넓어지는 느낌이고 바이런, 에이츠, 김소월의 이별에는 처절성의 농도가 얕은 이별의 형식일 것 같다. 2)대 자연 모든 인간은 자연에서 자라고 자연에서 산다고나 할까 다시 말하면 자연을 응감(應感)하면서 대상으로 바라보는 소재와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갈망과 자신도 대상화로서의 소재가 되기 때문에 이 무한대의 대 자연의 넓이에서 문학은 언제나 배경의 역할 - 인간이란 주체로 활동하고 자연은 인간이 어떤 상황에 처 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다. 미국의 삼림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매사추세츠의 콩코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은 시인이자 철학자인 그가 1854년 2년 2개월에 걸친 월든의 숲 속에서 홀로 오두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기록한월든〗은 대 자연과 인생의 참된 삼의 천착에 바친 실험의 저서가 아니겠는가. 이 책은 많은 사람들과 자연의 위대한 에너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철학적인 명상이자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물론 동양에 노자와 장자의 철학 또한 대 자연의 대상화를 비유로 살아나게 한 철학서이지만 난해의 숲이 울창한 것이 일반인에게는 난도가 높은 단점이지만 소설에 처음 도입은 항상 전체 줄거리의 예보적인 역할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음산한 영국의 날씨와 줄거리의 전개가 안개 자욱한 날씨로 시작하는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WutheringHeights>는 도입부의 자연 묘사는 남자 주인공 히이드클리프와 주인공 나와의 운명적인 전개를 예고하는<폭풍의 언덕>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소설의 도입부터 전개를 해보겠다. <웨더링 하이츠>란 히이드클리프 씨의 집 이름이다.<웨더링>이란 그 지방에서 쓰는 함축성이 많은 독특한 형용사로서, 폭풍이 불 때는 위치 관계상 그 집이 정면으로 그 바람을 받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 집 사람들은 줄곧 그 꼭대기에서 일 년 내내 그 맑고 상쾌한 바람을 쐬고 올 것이다. 집 옆으로 서너 구루 자라지 못한 전나무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나,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 모두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가를 알 수 있으리라 - 다행히 이 집을 지은 건축가도 그것을 생각해 집을 정말 튼튼히 지었던 것 같다. 좁은 창틀은 벽에 깊숙이 박혀있고, 집 모서리는 크고 울퉁불퉁한 돌로 튼튼하게 지어 있었으니 말이다. <웨더링 하이츠>는 요오크사 지방의 황야를 무대로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가 주변의 환경 묘사와, 일치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사실 핵심구절은 '집 옆으로 서너 구루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전나무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나,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 모두 한쪽으로 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산등성을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 것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에 앞으로 전개될 인간관계의 설정이 음산하고 거센 북풍에 주인공들의 개성과 맞닥트리는 암시를 엿볼 수 있는 황량한 대자연의 설정이 아니겠는가. 반면에 김동인의 단편<배따라기>은 다소 미숙한 형태로 도입부터 흔들리면서, 화창한 봄날의 묘사로 서두가 시작된다.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할 위험성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그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리고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 인 듯이 낮추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김동인 <배따라기> 서두 우선 서두가 너무나 장활하게 나열된 듯하다. 가령 <마지막잎새>의 오헨리 같으면 간편하게 『It’s fine spring day』의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묘사가 장황하게 6행을 추가한 것은 그 미숙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불구이거나 죽음의 그늘이 있는 3.1 운동이 실패로 끝난 1920년대의 우울한 사회 풍토에서는 화창한 봄 날씨의 전개가 어색하지 않은가. 신석정 시인은 대 자연과 밀접한 시적 접근이 그의 수필에서는 더욱 강조점을 마련하고 있다. 40평 남짓한 앞뜰에 그저 되는대로 질서 없이 심어놓은 나무가 시누 대, 식나무, 수수꽃다리, 태산목, 꽝꽝나무, 북 가시나무, 칭영수, 백목련, 독일가문비, 이팝나무, 치자나무, 뽀뽀나무, 동백나무, 호랑가시나무, 낙우송, 산수유, 국로, 감나무, 모란, 청매, 벽도, 은행나무, 후박, 철쭉, 박태기나무, 개나리, 서향, 파리똥 나무, 죽도화 등 30 여종이 있고 이밖에 장미 10 여종이고 보니 그 면적에 비하면 초만원인 셈이다. 이 나무들 사이에 수선화, 백합, 국화, 파초, 등 숙근초(宿根草)가 자리를 잡고, 콘크리트 항아리에는 백련이 있어 모두 제철을 기다리고 있다. 신석정 수필 <정원이야기>에서 신석정의 시는 우아하고 정서적인 노란색《촛불》과 《슬픈 목가》에 주류로 등장하고 있고,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이런 현상이 사라진다. 나무를 주체로 보면 신석정의 정원은 초만원의 욕심이 자연의 구성을 이루고 있다. 가짓수로 보면 나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을 것인가를 염려해야 할 지경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초목을 사랑하는 신석정의 시심(詩心)을 유발하는 대상으로 노장사상의 침투와 연결 고리를 가질 것으로 유추가 된다. a)산 경관,초목 경관 유명한 시인들은 자연을 소재로 선택하는 시적 표현이 압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연과 경관을 떠나서는 시심의 근거가 작아질 뿐만 아니라 주제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평생 산천초목을 바라보아도 앞산은 앞산으로 있고 뒷산은 뒷모습으로 우뚝 서 있지만 인간은 다른 감각을 동원하는 것은 마음의 탓이기 때문이다. 2.30대에 보는 산이 다르고 4.50대에 보는 산이 또 다를 것이기에 60의 마루턱을 넘어 올라보지 않고서는 누가 감히 산천초목의 산의 진미를 안다고 할 것인가, 는 신석정 시집 《산의 서곡》에 머리말로 쓴 조지훈의 글이다. 산을 현상으로 바라본 시선과 나이 들어 산을 바라보는 산의 모습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산은 정복으로 올라보고 싶은 충동이라면, 나이 60 넘어 산은 정복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의 체온과 같이 친근 미를 갖는 것이 사실일 것이기에 - 조지훈은 이런 산의 묘미를 서문에 새겨 놓았음은 매우 조숙하고 가치판단이었을게다. 그는 50 이전에 운명(殞命)했기 때문이다. 산 <파이랗다> 2. 넌지시 뻗어 나간 저어 산맥(山脈)을 보아라 <햇볕이 강물처럼 흐른다> 3. 아슬아슬 저어 봉우리를 보아라 <휘휘 칭칭 구름이 감았다. 4. 말없이 얼싸 않은 산협(山峽)과 산협을 보아라 < 퍽은 다정도 하이...> 5.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껴안은 산 <따스한 체온이 돈다.> 6. 볼과 볼을 문지르고 있는 산 <연거푸 주고받는 뜨거운 kiss> 7. 이윽고 정상(頂上) <정상에 나는 서있다. <신석정 <푸른Symphony>에서> 17까지 이어지는 산의 노래 중 7까지만 옮겼다. 신석정을 정원 시인 혹은 목가 시인이라 칭하는 것도 시(詩)의 대상이 거의 모두가 자연을 소재로 했고 4.19. 이후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은 시들은 비교적 각광을 받지 못한 것도 지나치게 경도(傾倒)한 자연현상의 탐닉(耽溺)때문일 것 같다. 전북 부안의 바닷가에 살았어도 산의 시맥(詩脈)을 두고 자연의 소리를 취합한 신석정의 정서는 자연을 떠나서는 그의 정신이 혼미(昏迷) 해지는 느낌과 감정을 갖게 된다. 그만큼 애착으로 자연에 동화되어 그의 시는 형해(形骸)를 담아 표현미를 구축했을 것 같다. b)강 혹은 바다 물이란 인간 에너지 정신의 중심인 것이다. 강이 바다로 이어지고 바다는 파도와 파고를 가져오면서 이방(異邦)에의 갈망을 전달하면서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바다가 서구적 향내 대한 동경(憧憬)으로 이어지고, 어둠으로 상징되는 나라 형편을 깨우침으로 방법 논을 삼았던 예지적인 견해와 선지적 사고가 돋보인다. 새로운 문물이 바다를 통해 이입되는 계몽의 길목이었음을 잘 알았던 판단이었을 것이다. 정지용은 내륙 충북 옥천을 그리움으로 채색한 <고향(故鄕)>의 시인이다. 그의 <향수>에는 실개천이 흐르는 어린 시절의 향수가 짙은 음영으로 배어 있지만 <바다 1~5>와 <갈릴레아 바다>와 <호수 1~2> <호면> 등 그의 시에 비해 물의 소재가 많은 편인 것 같다. 고래가 이제 횡단(橫斷)한 뒤 해협(海峽)이 천막처럼 퍼덕이오. -히나 물결 피여 오르는 아래로 바둑돌 자꼬자꼬 나려 가고.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 종달새 한나절 노려보오 흠켜잡어 고 빨간 살 빼스랴고 정지용 <바다 1>에서 고래로 배로 환치(換置)하면 - 배가 지나는 길에 파도는 은방울 날리듯, 종달새의 노래를 떨어트리고 가는 모양이 마치 바둑돌의 하얀 포말, 연신 올랐다 내려가는 반복에서 볼 때 외로운 표상으로 그리움을 안고 배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그네의 표정 -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완상(玩賞)으로 가까움을 대상화하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인 것 같다.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정지용 <호수,2> 순수가 절정을 이루면 천진의 극치에 오르는 것이다. <호수>는 정지용의 마음을 대변하는 아주 간결하고 순수함을 나타내는 시화(詩化)이다. 한국시는 비로소 정지용에 와서 거추장스러운 의상을 벗어던지고 깨끗하고 아름다움의 신비경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호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의 정서와 이미지가 결합하여 천의무봉 시심으로 자리 잡았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의 신체 조직은 약 80% 정도가 물로 구성된 5대양 6대주로 되어 있고 물로 구성된 지구의 모습을 함께하는 인간의 신체 조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물은 곧 생명이고 삶의 모든 진행을 영위하는 원소이기에 동물이나 식물은 곧 물에서 존재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비가 내리면 강물이 되고 강에서 다시 바다로 흐르는 것이 또다시 증발하면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인영법의 절차가 물에서 암시되는 것이다. 물은 될 수 있는 대로 힌돌이 퍼져있는 곳을 가려서 걸어 다닙니다. 조이 밭 속에서 그 소리를 엿듣는 팔이 부러진 허수아비는 여기서는 오직 한 사람의 시인이외다. 김기림<물> 다소 관념적인 시이지만 추구점은 물에서 “가려서” 다닙니다. 에 이르면 시인이 추구하는 물과 가는 것의 지향점이 떠오른다.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답은 흐름을 유지하면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노자 적 철학을 꿈꾼다. <<보물섬>>과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쓴 로봇 루이스 스티븐슨은 <rain>이란 평이한 시(詩)를 썼다. The rain is raining all around lt falls on field and tree lt rains on umbrellas bere And on the ships at sea <R.L.Stevenson <Rain> 들이나 나무 위에 그리고 온 바다에 혹은 우산에도 눈은 변함없이 고루 내린다. 차별이나 구분이 없는 점에서 수주 변영로의 <봄비>와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변영로는 봄비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암시가 되어 있는 반면 스티븐슨은 온 세상을 적시는 비의 모양에 초점이 모아진다. 어떻든 비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에너지의 근원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바다와 친화적인 인간의 삶은 항상 그리움의 공간이 설정되기도 한다. 일주일 동안쯤 파도와 놀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가자는 청에 처음엔 그러마 하더니 몇 걸음 지나니 마음이 변하여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는 말에 섭섭하여 놓아주니 깔깔거리면서 손을 흔드는 작별은 너무 아쉬운 것 같아 한참을 바라보노라니 다시 만날 날을 통보해 달라는 부탁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안도감이지만 내 생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을 몰라 입을 다물고 뒷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졸 시><바다의묘망(渺茫) 친밀도라는 것은 시인과 대상에 어떤 교감을 나눌 것인가의 달려있다. 대상을 적개심으로 바라볼 때 무서운 파도의 위압에 지릴 수 있지만 바다와 놀이로 삶을 이어갈 때면 바다는 놀이터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필자가 쓴 졸 시는 죤 메이스필드의 <바다의 열병>에 “나는 아무래도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 의 첫 구절부터 친밀도인 것 같아 흐뭇하다 두려움이 없고 친구와 외로움을 달래는 대상화일 때 <바다의 묘망>처럼 하나로 결합을 꿈꾸는 평안하고 시원함을 가져온다. 떼오필 고띠에의 <바닷가에서>도 시각적인 기교의 바다의 정감이 담긴 것들의 대한 동경과 정서가 서려 있는 듯하다. 모두 바다에서 정서의 고양(高揚)을 추구하고 있음이 공통적이다. 어떻든 비에서 물 그리고 강으로 변화를 이루면서 다시 바다에서 커다란 꿈의 이름이 순환의 곡조로 되풀이될 때, 시인의 선택은 항상 자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논(中論)> 3.사회적 의식 또는 휴머니즘 인간이란 생각으로 삶의 터전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작은 단위인 나로 출발해서 가정 그리고 마음 또는 사회로의 확대 현상이 일정한 집단을 형성한다. 하여 사회적인 존재로 군집(群集)- 일종의 사회학적 출발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사는 일을 고해(苦海)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평안하고 아늑한 세상이기보다는 고통과 신음이 넘치는 아비규환의 공간이 인간사라는 뜻인 것이다. 여기서 어떤 추구의 길을 선택하는가의 따라 마음 - 아무튼, 마음으로 길이 결정되면서 자기의 삶에 무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픔의 피륙을 짤 것인가 아니면 화려한 색상의 비단을 만들 것인가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가 만든다는 자기 책임설이 곧 삶인 것이다. a)부정과 칼날 사물을 바라보는 사물에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는 것이 답일 것이다. 전자를 낙관의 태도라 한다면, 후자는 긍정보다는 저항의 칼끝으로 심장을 찌르려는 복수가 때로 시적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른바 권력에 항거하는 형태를 저항이라 말하고 순응하는 모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모순의 시대에 목소리에 칼날을 감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도가 지나칠 때는 자기를 찌르는 비수(匕首)로 둔갑하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70년대부터 모순의 극치에 항거의 목소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시인은 김수영시인이라 말들을 한다. 죽기 전에 쓴 (1968. 05.29) <풀>은 마포구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그해 06. 16. 사망. 48세 때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수영은 평가 이상의 평가를 누리고 있지 않나 한다. 이는 한국 시(詩) 문단의 판단에 병폐가 아닌가 하지만 엄밀한 분석과 평가에 의해 명성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로 명망의 성가를 높이는 것이 대부분이라 생각되지만 - 사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는 구절은 췌사(贅辭)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앞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틀림없이 그 구절은 삭제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뿌리가 누워서는 논리상 안되기 때문이고 이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한번 전문을 인용해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지난 60년대 말은 흐린 날씨의 사회라 하겠다. 모순과 불합리가 권력자에 의해 또는 가진 자에 의해 침탈(侵奪)당하는 슬픔의 시대라고 해야겠다. 이때 바람은 훼방의 이미지라면 풀은 저항의 탁월한 이미지 구축의 시어였다. 그러나 맨 마지막 구절은 삭제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상의 방해가` 안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김철수의 <잡초>와 비교가 되는 - 영문학 전공에 미국의 국민시인 월터 휘트먼의 시집 <<풀잎 속에서>>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두 사람의 일치된 이미지는 오히려 김철수에서 잡초는 불에도 또는 마차의 바퀴가 지나가도 끄떡없는 저항의 이미지가 단단하다. 물론 시적인 완성도에서는 김철수의 <잡초>가 뒤처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미의 전개에서는 건강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b)긍정과 휴머니즘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을 했다. 모든 전제(前提)는 실존의 형태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하면 존재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이면서 벗어날 수 없는 “고기 잡는 항아리”의 처지가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詩) 또한 결국에는 휴머니즘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설득하고 말하는 길을 제시할 때, 감동은 더 커다란 사랑의 뜻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문학의 영원한 숙명은 결국 휴머니즘의 실천에 방법론의 전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시인은 순수와 깨끗함, 영혼이 맑아 추구하는 사랑과 용서하는 사도(司徒) 일뿐, 고함치고 거드름 피우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감싸는 보자기를 펼칠 때 추위를 가려주고, 목마름에 물이 되는 것이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니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하는 불타는 향수(鄕愁) 네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젠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려니 네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자 김동명 <파초> 조국을 벗어나 이국의 외로운 고독이 밀물 지는 처지를 파초로 의인화되었다. 갈증이 있고 또 남방을 떠난 몸은 추위에 가릴 수 없는 노출에서 휴머니즘의 뜻이 시인의 마음으로 감싼다. 샘물로 갈증을 시켜주고 추위를 가리기 위해 방안에 기거함을 허락한 시심은 곧 사랑의 마음이다. 더구나 종처럼 시중을 위해 “우리”로 펼치는 마음에는 사랑이 넘치는 시심(詩心)에 꿈이 더불어 피는 듯하다. 고함치고 욕지거리하면서 살벌한 아우성이 아니라 뜻깊은 호의로 감쌀 때, 세상은 의지할만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서로의 체온 나누기에 바른 사회가 될 수 있음을 <파초>는 역설하고 있다. 나는 얼마나 깨끗한가 나는 얼마나 순결한가 대답이 머뭇 거린다 죄 없음도 죄가 되는 사는 일이 그렇기 때문 욕망이 문을 닫을 수는 없지만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말라는 부탁 더불어 고개만을 숙이고 살아 예 이르렀어도 희색 빛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내 그림자의 길이에 안도감이 다시 부끄럽다. 졸 시 <순결과깨끗>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잘해도 때로 비난의 화살이 빛발 치는 경우도 있고 너무 정직해도 아픔을 폭포로 맞을 때도 있다. 너무 깨끗하고 순수하며 백지이기 때문에 비난의 과녁은 피할 수 없는 경우도 너무 많다. 그러나 순결함이 미덕이고 깨끗함이 옳은 일이라면 감수의 파도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옳은 일이며 바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어렵다는 뜻은 이러한 경우에도 적용될 것이지만 신념을 개성으로 내세울 때 구름은 항상 비켜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결하고 깨끗함이 인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기에 곧 휴머니즘의 정도에 이르는 말이 아닐까? 시와 모든 문학의 본질은 휴머니즘의 밝은 표정을 찾아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 문학의 숙명인 이유가 아닐까? <결론> 4.에필로그(epilogue)–인간 사랑의 그림 그리기 문학에서 만남이란 기쁨이며 이별은 아픔의 표적일 때, 거기에는 인간사의 복잡 다기(複雜多岐)한 전개가 감동의 줄거리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별은 만남으로 순환하는 길에 이어질 때, 우주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라야 이별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인간은 그리하여 섭리에 따라 이어질 때 비로소 감동이 정당한 길로 다가들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생의 터전이며 이를 통해서 생로병사(生老病死) 회전이 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연 속에서 생의 가치를 구축하고 발견하는 일은 곧 자기를 찾는 일이며 이를 운명이라는 굴레에서 모두가 받아들이는 밭갈이에서 생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개성으로 용해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푸른 생명을 키우고 강은 물로 바다로 이르는 우주의 법칙에 따르는 표현미는 곧 문학의 질서이며 올바른 한국문학의 평행이론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이 이 질서를 벗어나 순응치 않는다면 비극일 수밖에 없으며 질서에 순응한다면 그것을 희극이라 할 수 있겠다. 문학은 언제나 사랑을 말하고 질서에 순응을 가르친다. 비단 도덕적인 가치 우선의 공리주의자 플라톤이나 공자에 이르러도 문학은 인간 우선에 이름을 강조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예술은 사진을 모사(copy)하는 것이 아니라 “ 있음 직한(probability) 현실”을 그린다는 점에서 예술론의 출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설득력 있게 주장되는 것이다. 평행이론이란 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운명이 같은 패턴으로 전개되는 이론으로 웨이브헴 링컨과 존 F. 케네디의 평행이론이 대표적이라 하지만 삼라만상 평행우주라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어제의 태양이나 오늘의 태양은 변함없이 우리 앞에 와서 서 있으나 이는 우주의 질서의 개념일 뿐이지만,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신기한 개념을 추가하려는 점이다. 모든 작가라 하는 자들이 선택하는 소재는 삼라만상 우주와 고향, 사랑, 부모, 등을 빼고 나면 과연 글이란 어떻게 진행이 될지는 글쎄올시다 이런 절대 필요성의 반복성에서 평행이론은 근거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평행이론의 원천인 근간을 이루는 삼라만상의 우주 틀 안에서 섭리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현실에서 평행을 이루는 근대사회 우리 문학을 본다면 우리 문학의 근본이 민주라는 허울에 둘러싸여 이념에 노예가 되어 서로 갈라지는 문학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아쉽고 두렵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통일이 되면-? 언제까지 남북이 서로 으르렁 거리며 하나 되는 문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다는 것에 이제는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이방인이 되어 아름다운 강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오히려 신관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모든 예술의 목적은 인간의 사랑인 휴머니즘의 실천에서 한치도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 독자의 감동은 배가 될 것이며 작가라는 타이틀도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도 문학이란 숙명을 안고 변화의 현상을 그려나갈 수 있다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바로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 이루지는 계기라 보면서 논고(論告)를 마치려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2]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3]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4]
by 수원본부장 손옥자1. 말하는 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사람이란말로써생활과 축적된 문화의 옥탑을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겠다.하나시인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사물을 불러와 의식의 형상화를 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미지를 조탁(彫琢)하면서 새로운 사물 에로의 끈질긴 갈구에서 이미지의 구성은 탄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일상의 범인과는 달리 언어의 영혼을 투영하면서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하며, 말하는 법이 달라야 하고, 생각하는 길이 달라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된다 해도 시는 항상 신기루의 몸짓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된 생각, 인고의 나날을 끝없이 견디는 아픔, 혹은 생의 환희에 작약(雀躍)하는 기쁨 등은 모두 시혼(詩魂)을 이루는 요소들이면서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모여한 편의시를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의 기도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에 필적한 만큼 깊이와 넓이에서 접신을 만나야 그릴 수 있는 시라 하겠다. 하나갈구하는 마음 혹은 절대의 진정성을 향한 순수의 마음은 동일한 궤적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 조립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이미지의 성을 만들고 당당한 성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임무는 정열과 신념의 나무를 내면에서 키울 줄 아는 선하고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었을 때 비로소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출발에 앞서 설레는 의욕이 앞서고, 이미지 축조의 땀이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 가는 길에 망설임과 헤매는 것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오히려 내일을 열어가는 기대치로 인식될 때, 작은 흠결은 희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더욱 정진하고 섬세한 정서가 남다름을 직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의 이미지 사냥에 남다름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꽃은 저만큼 지는데 이유 모른 채 애태우더니 잎 지는데 잎은 지는데 이유 모른 채 가슴 아파라 작년은 그렇게 가더니 올해 또한 잎처럼 져버려 내후년 또 내후년 꽃피고 지면 알 수 있으려나 하나생을 다 살아야만 알 수 있으려나 꽃 필적 사랑이 들더니 잎 질 때 사랑 떠나가 꽃피던 그해 너무 아련하여 잎 지던 그해 너무 야속해 <꽃잎은 지는데>중 꽃이 피면 사랑의 감정이 일렁이고, 잎이 지면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간명하게시화되었으며,감수성과 그리움과 아쉬움의 애증이 매우 여린 것 같고 섬세하다. 사물에 시심을 의탁하는 것은 시인의 내면 정서가 작용하면서 매우 감각적인 효과음을 내는 현악기와 같이 민감성을 들어내는 듯하다. 꽃이 지면 ‘가슴 아파라’의 예민성은 시심을 불러오는 영감(靈感)의 촉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자산은 시인으로서의 먼 길을 예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는 인간의 정서를 포착하여 일체화를 이루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숲 속을달려가는 한 자락의 바람이나 향기에 실려 가는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또한 얻을 수 있다면 시와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자동문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은 모든 어려움과 애로 사항을 커버하고 구체적인 정서의 흐름을 만나는 지름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그리움 만나기 인간에게 그리움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는 방편이면서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려는 발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대상이 인간이거나 아니면 어떤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될 때, 거기에는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이를 정신의 갈증 현상으로 지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리의 짧음과 긴 파장에 의해 긴밀도의 농도는 얼마나 간절한가의 여부 즉 열정으로 전환한다. 열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안으로 작용하는 두 가지 중에 대체로 후자일 경우 미지(未知)에 대한 거리를 좁히려는 발상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움이 짙어질수록 그리움의 농도는 행동으로 나타날 여지를 갖지만 항상 정적인 태도로 작용한 인상으로 남는 듯하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 그리우면 스쳐 지나간 여운조차 숨기려 해도 감추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 <짝사랑> 중 오직 사랑이라는 제목에서 정서를 안으로 감추고 사랑의 깊이를 간직하려는 발심인 듯하다. 물론 짝사랑이라는 일방적 의미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겉으로 동일하지 않고 진심을 표출하려 하지만 그런 행위까지에는 상당한 거리와 여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에서 발각의 경우놀랄 일은아닐지라도 곱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상대에게 굳이 알리지 않으려는 생각인 듯하다. 아울러 ‘거울에도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라는 서술에서 작심의 농도는 매우 강하나 그러나 감추는 일은 항상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움의 마음은 향기와 같이 무언가 표정으로 드러나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유종필은내면의 향기를 겉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감추면서 애가 타는 심성이다. 이러한 내성적인 정서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성품에서 보이는 특성이 아닐까 한다.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조차 아름답기만 하네 우리 언젠가는 소소한 것으로 만나 다음 어느 날에 둘이라도 하나처럼 이름 짓고 싶네 곁 바람, 겸 잎 같이 짝지어 가슴속몸짓으로 하나이고 싶네 끝없는 그리움이 추억 보듬는 날 첫눈의 눈발도맨가슴에날아드는 기억뿐일지라도- <그리움은 끝이 없어>중 아름다움은 마음에서발동하는정서의 일종이지만 기억을 윤나게 하는 인자(因子)를 가지고 있어 항상 내면에 숨어 있고, 언젠가는 나타날 순간을 포착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심성이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의 얇은 층을 뚫고 나타나는 순간 마치 봄날의 개화처럼 아름다움의 연상을 펼칠 수 있는 놀람 앞에 서 있는 듯하다. 그리움은 연속작용이면서 이 연속성은 항상 아름다움을 채색하는 좋은 기억과 손을 잡으려 하는 모습이다. ‘소소한 것으로 만나’와 같이 작은 것- 여기서 발생하는 인연의 소중함이 점차 커지는 의식을 확장하기 때문에 작은 그리움들이 추억으로 쌓이면서, 아름다움의 옷을 입게 된다. 결국 유종필의 그리움은 ‘겹 바람’ 혹은‘겹잎’처럼 둘이 ‘하나이고 싶네’의 소망을 달성하려는 정서로 앞축된다.왜냐하면 ‘추억’이라는 시어가 ‘기억뿐일지라도’의 상상으로 배회하는 그리움- 멀리 있는 미지(未知)를 향하는 호소가 아닐까 한다. 3.동화(同化)와 변화 이미지 아이덴티티는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는 일체화를 뜻한다. 시를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 즉 사물과 시심을 결합하는 데서 미감(美感)을 획득하는 일니다. 때문에 아이덴티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언어 장치를 필요로 하고 여기서 시인의 재능은 확실한 담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본질로 향하기 위함에서 시어의 모순이 발생하지만 이는 시적 허용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다. 그리움이나 사랑에서는 대상과 하나의 결합이 동화의 이름이 되고 시에서도 그런 집념이 초점을 맞추게 되면 시는 완성의 문패 즉 성주가 되는 것이다. 녹음의 임자 여름 지고 따라나선 푸름이 변색하여 요염해지거든 가을이 오니 유혹에 넋을 잃고 찬 서리 날리는 어느날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 하염없이 높이만, 높이만 오르나 너닮은마음이라 나 또한 치솟기만 하네. <하늘>중 하늘과 시인이 하나로 결합을 이루면 푸름이라는 물이 든다. 이런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짙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열망이 결합하는 것은 시인의 마음속에 간직된 순수와 투명한 정서가열린마음을 필요로 한다. 여름의 푸름과 녹음, 그리고 하늘의 이미지가오버랩되면두 개의 사물은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변모가 된다. 이런 시의 변화는 화학적인 결합이고 변모이기 때문에 신선함과 언어의 탄력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시의 성공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높이만’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에서 치솟는 마음의 상태는 정화된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고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4.자아(ego)찾기 나를 찾는 것은 철학의 시작이며 철학의종점 이러고들한다. 즉 나를 아는 일은 곧 시의 입구이며 철학도 결국에는 시의 가슴에 안기는 절차가 아닐까? 시란 그런 넓이와 깊이가 있기 때문에 철학도 시의 표정을 수용하는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결국 종국에는 사는 것, 그것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은 철학이지만 시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시인은 방랑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 관리를 포착하여 의미의 성을 구축하려는 노력과 열정이 있기에- 내 속에 내가 없다 내가 없는 속에서 존재하는 나는 이미 몰가치의 상념만 존재하고, 은행나무 곁을 지나는데 잎은 지고 가로수 본연의 충실함으로 길가를 노랗게 물들여놓았는데 .... 중략.....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내 속에 내가 출타하고 기약 없는 세월은 흘러갈 일이고 그렇게 또 흘러가겠지 그때쯤이면 나에게 돌아와 무엇이라 말할 것인지 궁금하구나 자아여..... <내 안에 없는 자아>중 만약 내가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로 갔을까? 찾아 나서도 어디로 가야 할 방향이 없을 때, 망연함과 절망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은 항상 희망의 이름을 부르는 길을 만들기 때문에 나를 찾는 여정은 계속할 수밖에 없다. 자아가 없는 내 인생은 이미 인생이 아니라 허울을뒤집어쓴마네킹과 같다면 여기서 개성의 기대는 불가능한 것이다. 시는 참된 인생이 무엇이고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이고,감동받는호소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지난한 난관이 있더라도 내가 무엇이고 내가 어디로 가는 방향의 가늠은 삶의 가치에 직결되기 때문에 알아야 할 영원한 숙제로 남는 것이다. 자아 즉 내 안에서 나를 찾는다는 일은 절망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서 나를 찾는 일 또한 공허의 이름일지라도 나를 향하는 그림자 찾기는 필연으로 엮어진다. 왜냐하면 내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없는 운명이기에- 이 슬픈 여정은 생의 이름으로 진행형일 때, 삶의 이유는 분명해진다. 유종필은 자기(ego) 찾기의 숙제를 달성하기 위해 물음을 던지는 일- 그렇게 시는 이어져 가는 듯하다. 시는 그런 여정을 포착하는 이름일 뿐이기에 길을 묻는 여정은 곧 시로 가는 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다는 것 달콤한꿈 속에놓인 불안한 몽환처럼 알 수 없음이라 <인생의여정?> 중 인생의 맛 삶의 맛을 분류한다면 아마도희로애락의오욕에 칠정(七情)에 따라 인생에 대한 희비는 생성할 것이다. 그러나 쓴맛과 단맛의 구분은 가장 평범한 구분이라면 결국 생에 대한 각자의 구분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맛이 타인에게는 쓴맛으로 다가올 수 있는 구미(口味)의 문제는 개인차로 한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안한 몽환처럼/알 수 없음’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것 같다. 개개인은 하나의 완전한 우주라 보기 때문에 비교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귀한 삶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고 어디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개개인 자신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찾는 것도 아니면 버리는 것조차 개인의 문제로 터널을 건널 때, 욕망이라는 자기 확장의 방법만이 있는 것이다. 원래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겠는가? 마음 한 구석 식지 못할 열정 남아 자꾸 먼 산 엿보네 머리 깃털 날리면 길을 가다가도 하늘을 보며 ‘날자꾸나, 날아보자꾸나, 하며 하늘만 우러러보지요. 하늘만 우러러봅니다. 오늘도 <메말라 가는 자아>중 누구나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날 수 없는 제약의 그믈에서헤어 나오지못하고 다만날갯짓이고작인 슬픔의 일상은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의 현실 앞에서 고뇌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현상을 돌파하고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은 의지와 신념 그리고 지혜라는 도구를 통해 남보다 다른 개성의 성주가 될 수 있다. 이는 나이라는 켜가 아니라 열정의 에너지를 얼마나 충전하고먼 길을갈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유종필은 이런 현상을 일찍 터득하고 인생에 삶에 서 있는 듯하다. 그도 이상이 슬픈 고백처럼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고 창공의 주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피력한다. 그러나 하늘은 누구나 오르고 싶은 공간이지만 쉽게 도달의 열쇠를 가질 수는 없다. 하여 ‘하늘만 우러러본다’라는 체념의 언덕에 주저앉아 높이만을 동경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성찰의 조숙한 인상이 대답을 마련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5.나를 대면하기 시인은 세속을 버려야 하고 묵언의 진리를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경지를 방문해야 할 듯하다. 다시 말하면 말의 운용지가 아니라 글을 재료로 인생이나 우주를 담아야 하는 창조자의 임무가 주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명시인』 『시의 배고픔』 등은 스스로의 위치와 처지를 알고 시에 대한 소회를 대변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비 오는날의 신호등은 홀로 서서 봐주는 이도 없는데 연신 몸짓 간절하여 아무도 없는 밤 장대비가 오는 그런 날에는 내 모습 같아 처량하여 애달프기만 하네 <무명시인>중 무명의 설음은 어느 분야에서나 인간은 같다. 춥고 외롭고 그리고 무관심의 냉정함이 서럽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것은 무명의 대부분의 삶이다. 평범한 시인이 쓰는 간절함의 애달픈 시어가 필자 또한 겪었기에 느끼는 바가 너무 크다. 싹이 나올 무렵의 신산한 고통을 혼자 견디고 나서 그런 연후에 비로소 자존의 문패를 달 수 있는 것이다. 처절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없다면, 웃자란 식물의 운명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가의 여부는 결국 성장의 동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춥고 때로는 참담한 경지를 벗어날 때 건강한 존재로 일어설 수 있다는 진리와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6.에필로그 새는 창공을 날고 싶어 한다. 그러나 비상을 하기 위해서는 땅에서 걷는 법을 알아야 하고 땅의 이치를 알고 하늘의 이치를 대입하면 두 공간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 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이치가 둘의 이치를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우주의 이치가 아닌가?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의 가락을 인간에게 바쳐야 할 이유-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을 위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해야 하며 오늘에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계의 이미지 구축을완료했다면 이다음은 건축의 마무리를 확실히 하는 발성이 기대되는 소이(所以)가 위의 논지를 재촉이 된다는 것을 말하며 더는 숙제가 될 것 같아 설계도의마무리해줄것을 기대하며 나가려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이승섭 시평집 2] [이승섭 시평집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평정심의 미소 “언어의 성숙은 정신과 행동에 수반하는 것”이라고 (T.S, Ellot)는 <고전이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했었다. 왜냐하면 정신의 원숙은 행동의 원숙으로 이어지고 모든 조건이 언어로 표현될 때 비로소 글의 무게를 감당하는 역할을 갖는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둘의 상관은 인간의 가치와 문학의 가치와 비례 되는 등식(等式)을 도출하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고 선한 사람이 선한 시를 쓰는 것만은 아니다. 사상의 고매성이 묻어나는 언어에는 깊이와 맛깔스러운 표현이 감동을 자극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왜 그런가 하니 고매함은 그런 격식을 갖춘 성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학의 언어는 곧 인격의 수용(受容)이라는 점에서 문학 표현과 인간의 상관성은 궁극의 도달점인 감동에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윤 시인을 말한다면 지적이면서 원숙한 성품을 가진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설픈 언어의 과시가 아닌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맛깔스러운 감수성으로 나타날 때 느끼는 삽상(颯爽)함과 풍미가 있는 점에서 남다른 시의 역할이 기대되는 시인이라 본다. 윤 시인 시에는 가을날의 청아한 소리가 메아리로 들리는 뉘앙스에는 안도감과 미소를 동시에 받아보는 반가운 편지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제 그 이유를 추적하는 길을 답파(踏破) 해보기로 하자 2. 여정의 상상 속으로 1) 성품의 성찰 시는 지적인 결과물이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감수성이 시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현학적 욕망의 과시에는 냉소가 발생 하여 비록 눌변일지라도 진실을 내포할 때는 소통의 미학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윤길상의 시에 담긴 정신의 요체인 듯하다. 왜냐하면 도시적인 냉철함이나 과학의 칼날이 번뜩이는 자세가 아니라 체온과 체온이 부딪치는 우리네 시골 장바닥의 다감하고 따스한 인정이 스며있는 그런 정서가 시인의 마음에 유려(流麗)한 흐름으로 다가드는 듯하다. 지금 난 먼 곳까지 가지 못했어요. 고향이 코앞이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어둠 속에 많은, 별들이 주의만 맴돌고 먼 곳만 보이는 아스라한 인걸요.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누군가 그 안에 있을 것만 같아 한참을 망설이다, 문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나 아닌 나가 되어 금방 나간 것같이 무서워 내 기억 속엔 왜 엄마의 모습이 없나요? 그런데 자꾸 엄마가 보고파 저요 아마도 내 몸에 흐르던 엄마의 피였나 봐요. 엄마 이 냄새가 나를 살아있게 하나 봅니다.- 중략- <엄마의 연서> 윤길상의 시는 부드럽고 지적이고 고운듯하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에는 다양한 언어의 의미를 감추는 기교가 보인다.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쉬운 형태를 만드는 일은 확실히 고급한 방법이고 지혜가 동원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마치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그런가 하면 간과의 헤픔이나 어설픔과는 거리가 멀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우리 곁에 있으므로 느낄 때 정신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다면 윤 시인의 <엄마의 연서>는 그런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다 엄마의 그리움을 마음으로 안으며 끈질긴 주위만 맴돌고 먼 길만 보이는 아스라한걸요. “엄마를 만나지 못한 애절함이 기다림을 피 같다는 주장에는 수구초심과 그리움이 물씬 풍기는 엄마의 품이 그립다는 정신의 핵심에는 온갖 애절한 마음이 냄새를 맡는 엄마의 품속으로 돌아간다. 요즘은 너무도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도시인- 도시 체질은 항상 망각을 앞세우는 것 같다. 결코 떠날 수 없는 심상 깊은 곳에 귀향의 에너지는 인자가 길을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아마도 윤길상의 정신 인자(因子)는 고향에서 만들어졌던 추억 엄마를 그리는 애잔한 맥락을 이루는 길을 만들면서 시로 연결되는 듯하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밤이면 슬며시 다가가 입 맞추고 싶어서 그 고운 얼굴 한순간도 놓칠 수 없어서 날마다 매달려 바라만 보는데 나비 한 마리 날아와 그 꽃에 입을 맞춥니다. 약이 올라 거미줄로 사방을 엮어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나비는 영영 다시 오지 않고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던 꽃 끝내 시들어 버리고 그 순결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어둠에다 제 몸만 옭아맵니다. <나만의 사랑> 중 ‘글은 사람이다. 는 말은 프랑스 뷔 풍의 말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시인이다.라는 말도 외도 된 말은 아니다. 시 속에 시인의 전 인생을 투척하고 또 사상과 미래조차 내포된 의미의 숲이 곧 시라는 뜻을 첨가하면 한 편의 시는 곧 시인의 모든 면을 파악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요즘 애완동물들과 함께하는 현대인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그 꽃에 입을 맞추지 못하게 거미줄로 사방을 엮어 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나비는 영영 돌아오지 않고” “죄책감으로 나비의 기다림을 깨우치는 일은 대상을 포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면하려는 기다림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윤길상의 정신이 펼치는 지도인 것 같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공식이 대입되는 사물 관찰법이라는 뜻이다. 이를 굳이 휴머니즘이라는 말대로 대신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말이 될 것 같다. 2) 자연의 식물 정서 시인마다 개성의 진로에 따라 관심의 분야가 다르게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생적인 환경에 의식의 지배를 조종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아는 것에 대한 것을 탐구하고 관심의 집중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만든 음식을 많이 먹던 시절이 성인이 되어서도 그 음식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우리 모두 증명되는 사실 아닌가? 윤길상은 평택에서 자라나 조그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추억을 쌓고 성인이 되어서는 도시에서 생활하다 고향으로 귀향하여 전원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세상의 아귀다툼 속에서의 시는 별로 없으며 거의 모든 작품은 전원에서 『달맞이꽃』 『자귀나무』 『제비꽃』 『연꽃』 『들꽃』 등 대부분 식물로 구성된 향기로 나타내는 시로 구현되는 듯하다. 너에게서 우주는 붉은빛으로 펼쳐지고 모두가 침묵에 잠기는데 네 안에서 언어들은 꽃이 되고 나비가 되고 새가 되어 어느새 낯선 것들은 친숙히 다가왔지. 어릴 적 돌담길을 걷는 것처럼 초가집과 골목 사이 아이들 소란함과 어른의 기침 소리 계집의 봉긋한 가슴 수줍은 듯 잔잔히 머물던 햇살까지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영상들 꽃잎 위에 끝없는 몽상으로 펼쳐졌지 한참을 신비 속에 길 잃고 헤매 이다가 사랑으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 네 우주에 끝없이 여행하는 실바람이 되고 만다. <자귀나무> 중 시는 사물의 비유에서 변형(deformaton)의 기법인 것이다. 물론 비유와 상징 혹은 역설 등 모든 기교를 다하여 사물의 본질에 이른바 몰개성의 이론을 더하면서 의미의 확장을 꾀한다. 가장 핵심어가 시인의 시적 의도와 맥을 같이 하는 이유- ’ ‘어릴 적 돌담길” “아이들 소란” “초가집” “골목들” 들이 다가오는 소란스러운 영상의 중심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의 돌담 풍경이 있는 골목이다. 그 공간을 돌아보니 “한참을 신비 속에 길 잃고 헤매다/사랑으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로 현재의 공간이 화면으로 펼쳐진다. 정신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모든 동물이 갖는 특징이다. 회귀(回歸) 의식과 더불어 자아의 중심을 거기에 놓고 의식의 넓이를 확대하는 것이 곧 삶의 공식이라면 사람은 항상 원점에서 지향을 갖는 것이 정신으로 압축된다. “자귀나무”는 어디에나 핀다. 다시 말하면 공간을 배타적으로 받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평균율로 나누어 위치를 정하지만 자귀의 이미지는 도시나 시골을 불문하고 같은 계절에 꽃이 피고 향기를 발산한다. 그러나 시인은 수평적인 공간에서 자귀나무를 꺼내어 고향에 절절함에 자신의 사고와 추억을 의탁 하는 고백이 선행된다. 일종에 상상의 승화라는 뜻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잘 아는 것은 정확하게 또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잘 알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애매모호한 것을 표현하면 결국 실패의 문패를 달게 되는 위험 때문에 경험했던 것 혹은 익숙한 것이 맨 앞으로 나오는 표정이 곧 시의 주재료가 된 것. 이런 요소가 전체 맥락을 지배하는 요소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마음대로 다가와 온통 흔들어 놓고는 말도 없이 떠나가 터진 심장 끌어안고 이렇듯 애만 태운다. 모습 볼 수 없어 행여 다시 찾아올까? 그 길에 무성히 피어납니다. <들꽃> 중- 흔한 것은 때론 그리운 것이다. 아무 이름도 없는 풀꽃일지라도 언젠가는 반가운 이름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오래전에 기억으로 묻어 있는 인연일 것이다. 더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들어 있는 요소들이 기억의 층을 뚫고 나올 때 시간의 벌판에는 이미 과거라는 이름으로 문패를 바꾸어 달았을지라도 함께 있던 정서가 춤을 추게 된다. 어린 날 등의 추억이 말이다. 자연미는 자족성과 자발성의 특성이 있지만 예술은 이와 달리 노력이라는 담론을 개입하여야 성립된다. 자연미를 노래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에 애정의 결과- 이는 인간의 손이 개입하지 않을 때 가장 순수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예술성은 자연과의 대립이 아니라 공존과 조화에서 미적 순수성은 더욱 고양되는 경지를 방문하기 때문에 시인은 자연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재료로 시인의 감수성이 하나로 통합되는 질서의 구축을 용해하는 작품이 윤길상의 자연관이자 놀이가 되는 것 같다. 3. 작가의 상표<작품> 시는 시인 정신의 바로미터(barometer)라 한다면 한 편의 시에 대한 분석은 항상 치밀한 뇌수(腦髓)의 조력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는 종합적인 정서의 흐름을 느끼는 일에 더욱 깊이를 느낄 수 있다면 윤길상의 시는 산뜻한 명칭을 감지할 수 있는 조짐이 넉넉하다. 물론 곰삭은 깊이와는 다르겠지만 정서 균형의 안도감과 언어 운용의 진지 성과 더불어 사물을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나 언어 탄력의 요리 솜씨는 더욱 많은 진전을 가질 수 있는 밑바탕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앞으로 윤 시인만의 상표를 부착한 독특한 시가 생산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논지를 내려놓는다. 2024.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2]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시는 사실 역사는 아니지만 시인의 일생은 역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시인이 살아온 세월이 곧 상상의 나래를 타고 시로 안착하면 시인의 역사는 변용의 이름으로 시(詩)에 용해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시(詩)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시인은 이를 재료로 새로운 공간의 창조를 위해 새롭게 정신을 투척한다. 한 사람의 시인은 때로 역사를 넘어 미지(未知)의 공간을 유영하면서 시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이는 상상의 힘에 의지할 때, 비로소 가능한 입구를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영주(英主)로서의 역할 - 시적 성공은 정신 서정에 건설의 완성일뿐만 아니라 시인을 영생의 이름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내 스승이라 해서 예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후백) 황금찬 시인은 1918년생, 미수(米壽)를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문학 행사에서 축사를 빈번하게 하실 그뿐만 아니라 필자 시집 상재(上梓) 시 참석을 하셨으니 왕성한 집필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놀라운 모습을 뵐 때마다 경의(敬依)와 존경의 이름으로 느꼈다. 대체로 시집을 발간하는 평균치의 기간이 3년쯤인데 비해 (후백) 황금찬 시인은 이를 상회하는 것으로 보면 모두가 알 것이다. 더구나 나이가 들면 시니어 때는 감수성에 매달리는 앙상한 표현이 대부분이지만 황금찬 시인의 시는 새로운 변경을 찾아 두리번거림 - 되돌아보는 추억이 많은 함량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고희(古稀) 무렵에 발견했던 정신의 흔적(Trauma)이 20년 후에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현상일 것 같은 호기심으로 논지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큰 윤곽에서 볼 때 1956년 박두진 시인이 지적한 대로 “평범한 주제와 인생을 보는 눈도 일부러 기발(奇拔)함을 꾀하지 않는” 황금찬 시인의 시는 여전히 동일 선상에서 정서의 평형을 유지함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에 따라 인간이 변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면, 첫 번째 변화는 회고(回顧)의 시들이 많은 비중으로 분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대화에서 원숙한 내면의 소리가 들리고, 시 공화국 서정 논 건설의 포부가 두드려진다. 이울러 새와 나비, 그름 그리고 호수 등이 여전히 시 의식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2. 정신의 중심 표정 1) 회고의 길 찾기 돌아보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물론 아픔이 있는 돌아봄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움의 추억이 아니겠는가? 고향, 어머니, 등을 생각하면 고향의 이미지는 차라리 숙연한 정서를 동원하는 미감(美感)에 포위되곤 한다. 더구나 젊은 날들의 친구에게서는 눈물겨운 기억이 풀려나고 그 이야기는 애달픔으로 부추기는 길을 헤매게 될 때, 무거운 추억의 무게 앞에 스스로를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다. 또한 아스라함이 더욱 심각할수록 돌아갈 수 없는 길 찾기는 아름다움과 애절함을 가중하는 방황- 황금찬 시인은 청록파 삼가 시인 중에서도 묵월에 대한 추회(追懷)가 남다르다. 시적인 증거를 통해 정신의 입구로 들어가 본다. 낡은 책장을 넘긴다. 잠들지 않고 있었다. 음성은 옛날 병들지 않고 시간은 시집 안에 정지되어 있다. 목월 시집이다. 『음악이 열리는 나무』 『목월의 시집』 첫 시집 『현장』에서의 목월이 2살 아래인 황금찬 시인에게 쓴 발문(跋文)의 글이나, 『무제』라는 시에 들어 있는 절절한 우정과 존경의 뜻을 보면, 감회의 깊이가 평생에 얼마나 깊게 각인(刻印)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52년 강릉에 계실 때, 1953년 처음 데뷔를 하였으니까요?. 시를 가지고 박목월 시인을 만나려고 대구에 갔어요. 문인협회 사무소인데, 남의 집 2층입니다. 헌병들이 사용하는 트럭을 타고 가는데, 가다가 철사에 걸려 바지가 찢겨 졌어요. 그런데 그 바지는 어떤 바지냐 하면, 광목 같은 데다가 물감을 들인 겁니다. 검정 물인데 새까맣지요. 푸르딩딩한 그런거지요. 말이 아니지요. 그 찢겨진 바지를 바늘이 없으니까 철사로 꿰매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꼴이 말이 아니지요. 그걸 입고 대구 시내로 들어가니까 다른 사람들이 웃는 것 같아요. 웃지는 않겠지만 마음이 그렇게 느껴집디다. 그 집으로 찾아갔어요. 악수를하더니 나의 찢 겨진 바지를 보면서 이게 왜 이렇습니까? 오다가 찢겨졌었지요. 그러니까 울기 시작합니다. 눈물을 막 흘리면서 이래요 ·····” 『공상일기』 《나의 시화 인생》에서 최초 목월과의 조우(遭遇)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한 아픔을 눈물로 대변하는 모습이 처연하다. 이런 인연은 황금찬 시인의 깊은 우정이 되었고, “세상에서 나는/사람을 만났네/평생 어질게 어리석은 눈을/보았네”(『무제』)에서는 황금찬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 또한 유치환과의 우정 – 서울에 사는 황금찬이 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을 인솔하고 경주에 수학여행을 가면 음식을 대접했던 고마움의 우정이 순수로 포장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우정은 황금찬 시인의 다정함이 빚은 추억일시 분명하다. 더구나 1950년 서울에 문인의 숫자가 165명이었음을 감안 하면 시인의 관계는 친밀을 넘어 우정의 각별함이 요즘의 계산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의 특별함이 있었지 않았을까? 박목월에 대한 언급은 『성탄절』에서도 1959년 12월 24일 갈채 다방에서 시인 양명문과의 에피소드로 나타난다. 『3시 30분』에서 목월의 추억은 회상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의 이름으로 문을 두드린다. “박목월 시집/산도화를 들고 새벽까지 않아있다. /내 젊은 날의 복장으로/구름이 찾아온다. ····중략···/그래, 좋은 생각이야/열려있던 시집을 덮었다./새벽이다./시집 속에는 어제와 오늘이 없다.”(『3시 30분』) 새벽 3시 30분은 불면의 시간이다. 물론 잠 못이루는 시간에 과거의 우정이 상념으로 일렁이면서 과거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저변에는 피할 수 없는 고독이 자리한다. 왜 그런가 하면 과거와 멀리 떠나온 시간의 간격- 더불어 우정을 나눌 수 없는 고독 때문에 과거의 집착이 나타난다. 이는 오늘을 위로하는 인자(因子)이면서 지나온 삶의 가치를 더하는 생각이 더 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박목월과의 관계는 더 할 수 없는, 어찌 보면 일방적으로 정리될 수도 있겠지만 『밤이 깊도록』은 송욱 시인과의 추상을 느낄 수 있다. 송욱 시인과 강가에 않아 밤을 새운 일이 몇 번 있었다. 그 해가 1975년 여름이다. 7월26일(?) ···중략··· 송욱이 일어서며 저 은하의 강물이 곧 쏟아질 것 같은데 그 시각이 새벽 3시 30분 그 송욱 시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 『공상 일기』 《밤이 깊도록》에서 시인은 정에 굶주린 사람일 것이다. 따스하고 안온함에 쉽게 잠이 드는 정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감동의 파동에서 쉽게 점령당하는 사람 - 황금찬 시인은 그런 정서에서 항상 갈증을 느끼는 거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평범함이나, ‘기발(奇拔)함이 없는 진솔’ 혹은 ‘수월한 당신에 서정(抒情)에 압도당하는 행복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격이다. 기교를 부리고, 호기와 허세 앞에 초라해지는 시가 아니라 친숙하고 다정다감한 그리고 나긋한 속삭임의 시를 쓰는 황금찬 시인의 시는 항상 변함없는 정감으로 길을 넓히는 이유 때문에 지난날들의 우정에 갈급함을 느끼는 현재가 아쉬움으로 길을 넓히는 것 같다. 『그 집 앞』은 학자 강 인산의 소박하고 어눌한 추억을, 『시인의 집』은 지금도 평창에서 살았던 김시철 시인의 경우를 『금원에서』는 화가 박수근, 손웅성, 그리고 지산에의 추억을 애달파 한다. 황금찬 시인의 시에는 실명이 많이 들어간다. 운명(殞命)을 달리한 김종문, 장호, 조지훈, 정한모, 조병화, 김영태 혹은 후배 문인들, 또는 『미완성 교향곡』에 조영숙이나 『벽시계』에 최규창이나 바이런 혹은 블란서 3대 비련(悲戀)의 아벨라르와 에로이즈 혹은 음악가 등이 다양성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시인의 천성적인 다정 다감성이 드러난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굴곡(屈曲) 없이 대하는 마음, 그리고 사랑으로 앞서가는 마음이 없다면 누구도 황금찬 시인의 면모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황금찬 시인은 순수하고 질박(質朴)한 인간성으로 살아온 면모가 시인의 표정이고 시의 모습이 아닐까? 2) 시의 세상 – 시의 모든 것의 상상 상상(Imagenation)과 공상(Fancy)의 차이는 Coleridge로부터 들을 수 있는 사실 이론의 정론이다. 즉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해방되어 나온 기억의 형태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공상이라 칭한다면, 상상력은 1차 적인 것 - 감각과 지각을 중개 시켜주는 기능으로 무의식적인 것이라면 2차의 문학적 상상은 1차적인 것의 변형으로 시적 상상력일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의지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라 본다. 물론 상상력이나 공상이 서로 연결 고리를 얼마나 유기적으로 설정하는가의 여부가 구분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면, 셱익스피어는 ‘광인과 연인과 시인에 동류항을 지적하고 있음도 구분에 대한 모호성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광인은’ 아무것도 아닌데‘ 비해 시인은’의식적인 의지에서 차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황금찬 시인의 시(詩)의 표정은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차 구체화 된다. 물론 조급증이나 급한 느낌의 생각은 드러나지 않지만 일종의 지향을 꿈꾸는 상상이 길을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기 성주(城主) 즉 자기만의 나라 세상을 건설하여 그 공간에서 주인이기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 - 일종의 현실을 따라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꿈을 꾸는 일 - 공상으로 시작하여 구체적인 상상의 조감도를 만들게 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는 지번 도가 없었다. 나무, 풀, 꽃 토끼, 사슴, 노루, 이들의 영혼들이 세운 꿈의 세계 어느 곳에 가나 지 번도가 없었다. 그 까닭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음악이 열리는 나무』 「지 번도가 없는 나라에서」에서 나무, 풀, 꽃들의 이미지는 순하고 예쁘다는 느낌을 준다면, 토끼나 사슴 그리고 노루 또한 착하고 선량한 비유적 인상이 겹친다. 그러나 호랑이, 사자, 악어, 뱀 등은 강하고 약육강식의 기피적 사고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상반된 개념은 전자에서는 평화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고, 후자에서는 원칙을 무시하고 ’내가 하늘이요/곧 법이고/내가 하는 일은 진리라고/생각하는/그런 동물들은‘ 싸움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일삼는 악의 축이라면 시인은 이런 동물들을 멀리하고, 나의 것이나 네 것이 없는 평화의 공간을 염원하는 뜻을 가진다. 이런 공간을 천국, 혹은 유토피아라 칭한다면’ 이 세상에는/지, 번이 없다‘와 같이 염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 마치 ’고향을 두고 떠났던/새들도 돌아와/날개를 펴고/구름은 국경도 없었다‘. 『주님의 뜻을 따라』처럼 자유 왕래의 땅을 그리워하는 뜻이 구체화할 수 있는 나라에 대한 시인의 꿈인 것이다. 태평양 바다 어느 곳에 섬이 하나 솟아올랐다. 하늘 새의 오른쪽 날개 만한 터를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구름으로 집을 짓고 상아로 장식한 다섯 칸의 시실(屍室)을 꾸민다. 시인들을 초대한다. 국적을 묻고 연대를 덮는다. 소포클레스, 단테, 밀튼, 괴테 테니슨, 롱페로우, 이백, 두보, 도연명, 말라르메, 릴케, 발레라, 아폴리네르, 북원백추, 칼 슈미텔러, 서정주, 박두진, 청마, 박목월 『공상 일기』 「공상 일기」 중에서 무의식적인 왕래 - 즉 비현실적인 이유 - 구름으로 집을 짓고’와 ’상아로 장식한‘에서 현실성을 일탈한 공상의 근거가 제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꿈은 비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하등에 장애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국적이나 언제, 어디서 살아있는 가는 중요한 조건이 아닐 수 있다. 다만 시인의 이름 - 착하고 선량한 식물이나 토끼, 사슴 혹은 노루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이기에 잘났다는 행동이나 위압적인 위협이 없는 오로지 사랑과 평화의 목적을 위해 헌신하고 노래하는 시인의 세계 - 이상을 향한 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꿈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주요 임무라면 현실성 혹은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을 것 같다. 오로지 사랑과 평화의 공간을 향해 꿈을 노래하는 일이면, 인간사는 악의 땟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시인은 세계 평화의 방 그리고 인류의 자유, 절대 사랑, 핵 반대 운동과 마지막에는 모든 악을 몰아내고 하늘에 있는 사람의 마음으로 받아 드리는 다섯 개의 방에, 시인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방에서 작업을 하면 된다는 뜻을 내포한다. 물론 시간의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유로운 선택과 주제로써 꿈을 그리는 목적에 일치하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세계는 제한이나 구속 혹은 선택의 강요에서는 꿈의 길을 훼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공상은 허무한가? 라는 의문 앞에 서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시인은 꿈꾸는 사람, 오로지 꿈을 꾸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시인에게 간섭이나 꿈의 종류를 묻지 않는다는 간명한 자유인의 해답이 도출(導出)되는 것이 아닐까 서술 해본다. 3) 자연의 육화 바라보는 모든 자연과 느끼는 자연이 있다면 전자보다 후자에서 더욱 심화된 의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감의 80%가 시각에 의존하는 양이라면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우리는 흔히 과학이라고도 하고 현상적 표현이라고들 한다. 작두 무당이 시퍼런 작두날에 올라가 맨발로 서서 춤을 추는 이치나, 시인이 시의 신을 불러오는 것 – 이를 Ecstasy라 한다면 이에 대한 정확도나 과학적인 설명은 벽에 부딧치고 만다. 그렇기에 눈으로 현상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심안(心眼)(mind’s eye)에서는 천리길도 투시할 수 있는 것이 시인 마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을 마음으로 볼 때, 오히려 새로운 것 그리고 신기한 것, 그리고 창조적인 것을 찾아내는 인간의 마음을 과학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금찬 시인은 사물을 마음으로 바라보는 담담(淡淡)함을 발견한다. 이는 모가 나거나 각(角)이 져서 명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물을 포용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정에서 발견되는 표현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약 20년전 (그 당시 70세)의 시와 다른 특징이 되는 것 같다. 시(詩) 창작에 원숙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 같은 논리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오는 것이기에 - 눈이 내리는 소리는 어느 마을의 발자국소리 네가 내 곁을 떠나던 날 그 발소리 위에 눈이 내리고 어디쯤 가고 있느냐 눈이 내리는데 소리도 없이 눈은 울고 있구나 네 마지막 음성이다 창 앞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울고 있구나 -『고향의 소나무』 「눈 내리는 소리」 시(詩)는 감각의 통합 작용이 빚은 조화미(調和美)라면 편양성을 넘어선 또 다른 지평을 만나는 일이 감각의 지평을 넘는 조화(調和)의 일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따로따로 구분되는 의식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 속에서 다양함의 특색을 만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감각의 통합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칫 혼합해서 오는 혼란을 부추기는 우를 범할 수 있지만, 원숙의 길이 열리면 이러한 이치는 염려를 넘어 조화를 이룩하게 된다. 시(詩)에서 결점 중 장식적(裝飾的)인 요소는 이미지의 과시 혹은 꾸밈으로 인해 시적 팽창을 방해 한다고 하며 한약에서는 독약조차 적절한 배합으로 양약(良藥)이 되는 경험의 배합은 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눈이 울고 있구나.’는 시인의 마음을 의탁한 정서이고 ‘눈이 내리는 소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시심(詩心)일 때, 울려오는 조화의 소리로 들리며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달에도 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중략··· 아! 달에도 귀가 있어 다 듣고 있구나 그때 은행나무가 “나도 듣고 있는데” 하는 것이다. 달과 은행나무 풀벌레 다 울고 있구나 울지 않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구나 『공상 일기』 「귀가 있는 달」에서 풀이나 벌레조차도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미물(微物)들에게도 사랑을 보이면 활기찬 모양을 보이고, 사랑을 갖지 않고 무관심하게 대하면 우울한 양 표정을 짓는다. 인간만이 우월한 의식을 갖기 때문에 간과(看過)하는 점 – 독선적 인간 사고일 것이다. 자연과의 대화는 인간의 언어 이전에 언어가 존재한다. 시인은 이런 언어를 이해하고 해득(解得)하는 독특한 감수성(感受性)을 가지고 있다. 꽃을 노래하면 꽃은 즐거운 표정으로 살아나고, 우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울고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황금찬 시인은 자연과의 대화할 줄 아는 경지에 있다고 본다. 스승이 아니라도 그렇게 볼 것이다. 심지어 “달에 귀가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위로의 말을 찾고 있는 모습에서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달과 은행나무 그리고 벌레조차 “울고” 있지만 울지 않는 존재는 “나 혼자뿐”이라는 점에서 일체화를 위한 동화가 이룩되지 못했음도 있다. 왜냐하면 정서(情緖) 감염(感染)의 일치성이 안 되는 이유는 대상에 연민(憐憫)의 마음을 갖고 있기에 자연과 내가 하나로 결합 되는 관조(觀照)의 경지를 벗어난 것 같다. 연민은 나와 대상이 분리된 정서이기 때문이다. 4) 새, 나비, 호수 새와 나비나 호수 그리고 구름은 황금찬 시인의 시(詩)의 정신적인 흔적물이다. 왜냐하면 자기정화 혹은 수양의 방편이 되기도 하고 의식을 이동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시어들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는 자유 정신의 표상이면서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하늘의 길을 만들기 때문에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는 하늘의 의미와 결부되면서 신비감을 자극했고, 인간의 꿈을 실어 나르는 대상으로 미화도 될 수 있다. 그러나 황금찬 시인은 새는 과거와는 다르게 변했다. 비극의 잉태 속에서 울음을 우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지만 연세 90 여세에 이르러서는 보다 진보된 영생의 이미지가 겹치기 때문이다. 새들도 늙어 가는가. 그리고 삶의 문을 닫는가. 새들은 늙지 않는다. 병들지 않고 새들의 병원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새의 의사도 없다. 『공상 일기』 「새들의 일생」 스승 황금찬 시인의 작고 하시기 전에 전시에는 단호하게 마침표를 찍는 시가 상당한 빈도로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확신하는 시어이며 여백을 줄이는 기교일지도 모르겠다. 새들의 병원을 보았는가. 아니면 새들의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여 고통 시 하는 것을 보았는가. 그러나 새들은 하늘 나르며 자유롭게 날고 또한 세상을 유영(遊泳)하면서 내일을 맞는 꿈과 비상(飛翔)의 의미를 버리지 않는 듯하다. 이와 비교되는 인간은 병원 그리고 구원의 종교 간판이 즐비할지라도 악의 깊이는 더 깊어지고 슬픔의 넓이는 더욱 확장되는 삶에 목이 메이는 인간의 욕심과 갈망 - 갈수록 희망과 사랑의 반대편이 기승을 부리는 인간사와 다른 이유는 자연과 친화된 삶을 살아가는 새들의 정신에서 영생의 의미가 도출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황금찬 시인은 “새는 무덤이 없다/공동묘지도//종교가 없는 /새의 영혼은/어디로 갈까//꽃의 영혼들이 가는/그 나라 일게다/(새)와 같이 꽃과 새의 동일성은 곧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고착되는 듯하다. 호수가 있다. 그 호수엔 이름이 없다. 해가 뜨고 별과 달이 언제나 지기만 했다. 고향과 깊이를 모른다. 내 어머니와 그분의 어머니도 이 호수에서 머리를 감고 수경 속에서 웃었다고 했다. 나는 호수가에서 많은 사람을 많았다. 장자, 이백, 그리고 두보 박목월, 소월, 영랑, 라이너, 마리아, 릴케 폴 발레리 『공상 일기』 「호수」에서 무심(無心)의 호수는 관조(觀照)의 경지에서 만나는 이름일 것이다. 관조는 사고의 철저화라면 이는 구분이 없는 무경계의 경지를 가질 때, 만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의 티끌이 일렁이면 이미 파문에서 사물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왜곡되는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경지는 호수가 갖는 진경(眞景)일 수 있고, 또한 호수가 누리는 호사스러운 이미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진실이 숨 쉬는 곳이기에 그곳에서 어머니의 수경을 볼 수 있고 어머니의 웃음을 발견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고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위대한 시인들 - 장자, 이백, 두보, 목월, 영랑 등을 만나는 절차가 호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순수에는 순수의 길이 들어있고, 바람에는 바람이 길이 있는 이치처럼 시심(詩心)의 안온함에는 그런 시인들의 얼굴이 다가온다는 길을 확인한다. 황금찬 시인의 전반적인 시의 변화는 90길로 오면서 형이상학적인 형편이 많아지는 듯했다. 지상의 메시지가 줄어들고, 그리고 철학적인 암시가 앞장선다는 뜻일 것일 것이다. ‘평화와 기쁨’ 혹은 ‘생존의 무게’ 그리고 ‘꿈의 천사’를 암시했던 70세까지의 이미지인 나비가 시 속에서 줄어들었다는 변화는 즉, 자존의 메시지가 줄어들고 평안하게 사물 바라보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는 맹목의 인간 모습에서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변화의 상징이 아닐까 한다. 어느 꽃나무에서 이 꽃나무로 날아왔을까. 나비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않아 있는 꽃나무밖엔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 날개를 펴면 또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까. 그것도 정할 수 없다. 나비에겐 금지 구역이 없다. 이것은 나비의 절대 자유이다. 그리고 나비에겐 내일이 없다. 꽃향기가 날아오면 나비는 더듬이를 앞세우고 따라간다. 『나비』 「음악이 열리는 나무」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모든 미덕을 포함하고 또 완성한 인격의 극치를 의미한다고 본다. 자로(子路)편엔 이런 말이 있다. 원시적 인간 문명의 때가 덜 묻은 인간, 시골의 촌부 같은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 있다. 나비를 읽으면서 이런 원시적인 느낌이 앞서고, 여기에 곧 황금찬 시인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라 본다. 언제나 계산이 없고 눌 박하고 순수하기에 시인의 체취에는 언제나 믿음의 줄기가 솟아나는 듯하다. 그러나 강의(剛毅)라는 의지의 굳셈이 전제될 때라야 질 박과 어눌함이 있을 수 있고, 비로소 꾸밈이 없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스승 통해 배웠으니 이 또한 필자의 큰 양식이 아니겠는가. 또다시 말한다면 방향은 있으나 방향이 없는 곳을 지향하고 목적이 분명하나 그 목적의 길은 어디에도 없는, 오로지 무심의 경지를 찾아가는 길은 결코 있음과 없음을 나누는 일이 아니기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절대의 자유에서는 ‘내일이다.’ ‘오늘이다’의 의미는 필요가 없다는 개념 사실 논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3. [Epilogue 하면서] - 추억과 지난 시간은 언제나 질축한 정서를 이끌고 오지만 황금찬 스승님의 시는 이제 달관(達觀)의 숲에 들어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의 스승이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언어에는 무게와 정서 그리고 원숙의 경지에 들면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시인의 경지에서의 인상 바로 그것이다. 길을 재촉하는 인상이나 혹은 조급증이 없는 지상의 시인은 다시 세계의 미지 건설을 꿈꾼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경지에는 아름다운 순수와 투명한 의식을 가진 시인만을 위해 문을 열고 싶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상상으로 빚은 낙원의 이름일 때, 꿈꾸는 스승의 모습에서 숙연해진다. 자연의 육화는 대상과 대상이 경계를 갖지 않을 때 더욱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들 한다. 심지어 풀과의 대화나 새들과의 대화에서 있고 없음을 넘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을 지향하는 순수의 깊이를 방문하게 되는 순간, 스승인 (후백) 황금찬 시인은 시는 이제 그런 길을 열어놓고 손짓을 보내는 모습이 작고하신 지금의 이 순간도 모습이 선하다. 자상하고 인자하고 순진무구한 모습이 백수를 넘어도 상상을 초월하는 스승의 시를 지금도 나는 시가 아니라 상상의 세계라 불러야겠다. 2024.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필자 칼럼집] [필자 시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라는 언어를 통찰하고 시안에 들어가 시인들이 창조하는 나라 그런 나라는 감동을 잉태하는 공간이고 누구나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면서 손님이 방문하면 할수록 빛나는 문패를 달고 살아가는 공간이 시인이 파라다이스를 그리는 공간이라고 본다. 그래야만 시인의 시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시인 이름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라 할 수는 없지만 시 하나 가지고 평생을 자기 이름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시인도 있다. 그 시인의 시 하나를 가지고 권력도 얻고 머니(money) 도 쌓았으니 이 얼마나 성공한 시인인가 하는 이야기도 가끔 듣는다. 과연 이것이 성공한 작가인가는 기준을 정할 수는 없어도 정체성과 가치관을 보고 정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지만 그것이 꼭 정답인지는 필자는 글쎄올시다? 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꿈은 그런 한편의 시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경주한다. 그러나 이 소망은 항상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하고 대가(代價)를 지불 해야 얻을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영예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의 주인이기를 바란다면 몇 개의 조건이 합치시켜야 한다. 첫째는 공감의 영역이 넓을수록 호감을 갖는다. 공감이란 보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둘째는 시의 완성도가 비단 대중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시적 완성도 즉 시적 조건에 합치하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언어의 선전 도구가 아니라 평범하면서도 누구에게나 공통의 이해를 넓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의미의 내포- 결국 의미가 마지막에 감동을 줄 수 있기에 의미없는 시는 공허함을 부추길 수 있음도 우리가 명심할 일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구가 존재하고 살고 있듯 시 또한 많은 표정들로 세상을 부유(浮游)한다. 그러나 개성을 갖춘 표정을 만나기란 매우 희소하다. 왜 그런가 하면 개성은 시인 자신만의 표정이 아니라 시인이 만든 유일한 자기의 분신일 수 있기에 나의 작품이라는 명찰을 갖고 무한의 책임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한 편의 시는 시인의 운명과 동일한 여건으로 살아가는 이름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시에는 몇 가지의 표정이 있다. 식물 정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사랑이라는 단어가 만히 등장하는 것은 夫 군을 사랑하는 노래가 가장 많은 빈도로 등장하며 승가람마(僧伽藍摩)가 시어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환경적인 특징이거나 정신의 지향과 맞물릴 수도 있는 유추가 가능하다. 시는 낯설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시의 표현이란 결국 정신적인 흔적을 예외로 하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관념적인 표현이 다소 있지만 시인의 의식을 점령하는 세 가지의 축이 시집을 채우는 말들의 향연이다. 이러한 정서는 아무래도 전원의 정서가 지배적인 현상을 유지하면서 다정다감한 성격, 혹은 그런 성품에서 나오는 사랑, 또는 정서적인 흐름이 복잡한 도시의 정서를 외면하고 살고 싶은 사고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지면서 그의 그런 흔적과 시의 표정으로 들어가 본다. 『2. 표정과 사랑의 이름』 1) 식물 정서 시인은 개성에 따라 일정한 취향을 갖는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정서가 어디, 어디로 관심을 집중하는가에 여부에 따라 문자로 표현하는 길이 그런 쪽으로 언어를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서의 심리적인 현상이 지배하는 길에 따라 예술의 형성은 탄생의 길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식물적 정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성이라 본다면 역동적인 힘보다는 정적(靜的)이고 사색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다. 바다를 좋아하기보다는 강을 좋아하고 높은 산보다는 얕은 산의 정취에 마음이 더 쏠리는 일은 홍연희 시인의 시 제작의 정신 문법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필자의 추론, 앞 밭 자락에 잘 익을 호박 하나 거실에 옮겨 놓으니 아 밭도 따라왔다. 지긋지긋한 허기 채워주던 청빈의 시절 추억으로 남고 가난한 시절 견디었던 어머니 인생처럼 가뭄과 더위를 이겼던 둥그런 호박 거실에 가득 채웠다. <그때 그 시절> 사실 가격으로 치면 일상 반찬의 속한 호박에서 술술 풀어지는 이야기는 과거와 추억을 채색하게 된다. 가난의 허기를 채워주던 “호박”에서 서글픈 지난날들이 파노라마로 일어나는 길에 어머니의 가난은 슬픔의 물살로 살아나는 갈증- 가난과 갈증의 아픔이 누선(淚腺)을 자극하면서 현재의 모습 과거의 모습이 스크린 되어진다. 시인이 사는 거실에 호박을 놓으면서 추억의 일상이 살아나는 이유와 어머니의 모습이 비록 가난했을지라도 풋풋한 농촌의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든다. 이런 풍경은 시인의 마음에 매달린 사랑의 감수성이면서 식물 정서가 지배적인 양(量)으로 숫자로 허기를 채우는 증명이 되는 것- 인도에서는 연꽃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상징한다. 들판의 가을걷이는 인간의 노력이 얻는 풍요로운 의미와 시골의 구수함을 가질 수 있고, 동물이 동적인 변화와 현란함을 부추긴다면, 식물은 고요하고 수평적인 암시를 구유한다. 인간의 행로에 동반자 혹은 더불어 동행하는 길에 항상 풀들의 이름은 그 존재를 말함이라- 무심코 걷는 산책길에 태고의 전설 있기에 산길도 꽃으로 돌아 지금까지 그리도 고왔는가? 뉘가 있어 그리운 길을 같이 걷고 또 걷고 싶다. <산책길> 중에서 시의 구조는 길, 꽃 그리움으로 진행하는 짧은 단형의 시이다. 길을 목적으로 걷는 좌표가 있지만 시인은 “무심코 걷는 산책길”에서 전설을 만나는 여행을 하고 있다. 꽃의 지상은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물론 미지칭으로 꽃이기 때문에 그 꽃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으면서 “고왔는가?”의 새삼스런 발견에서 꽃은 역시 그리움이라는 먼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표백된다는 것이다. 홍연희 시인의 식물은 모두가 화려하거나 향기(香氣)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고달픈 인생의 비유로 나타나며 사랑을 말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특이하다. 독목(禿木)에 마지막 잎새 하나 욕심 없이 내어준 노을 들녘에 차가운 비마저 내리고 아픈 세월의 잔 등 쓰다듬다가 한기 견디며 인생의 골짜기에 철새처럼 머물고 까마득히 먼 산등성이로 차마 닿을 수 없는 달빛 시린 헛된 꿈도 가고 삶의 이랑에 고인 욕망마저 쓸고 간다. <뜰 겨울> 중에서 어쩌면 관념적인 시이지만 겨울 독목(禿木)의 한기(寒氣) 젖은 모습을 바라본다. 겨울나무는 비극적인 무의식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그러나 독목이 있음으로써 봄을 예약하는 안온함이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순환의 법칙은 곧 우주 삼라만상의 운행(運行) 원리와 상통하며 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궤도와 다름이 없을 때, 비유가 생동으로 일어난다. “독목(禿木)에 마지막 잎새 하나”가 바람에 스치면 엄혹한 시련의 줄기가 칭칭 얽히는 일상을 넘어 “뜰 겨울”은 봄을 기다리는 먼 희망의 줄기가 자리한다. 여성의 마음은 부드럽고 여리다. 식물 정서에 들어가면 특히 여심을 나타내는 향기와 유연함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작용함이 홍연희 시인의 시에 특성으로 자리하는 것이 아닐까? 밑은 썩어 때가 끼었는데 위는 화려한 수련이 그윽이 서 있다. 고단한 삶을 묻고 청초한 빛 쓸어낸 그 안에 수려함의 자태가 있다 그림자 뜬 자리 때 낀 물 자리가 가을 햇살에 사랑으로 아픈 듯 창문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에 어머니 분 냄새처럼 함처럼 향기가 돋는다. <수련> 중에서 어머니와 수련을 비유로 해서 등가(等價)를 이루면서 작고 아담한 또는 사랑의 향기로 돋아 오르는 연상이 그림의 수채화로 걸린다. 바람과 어머니의 내음과 가을 햇살 그리고 향기가 함초롬 돋아나는 이미지의 결합에는 시심이 누리는 연상 작용이 복합적, 융합적이다. 조용하고 자태가 유연한 어머니를 그리기 위해서는 수련의 향기와 자태에서 사랑의 이름은 더욱 애달픈 상을 남기는 것- 시인의 시는 이렇게 식물에서 느끼는 자태 모습에서 아름다움과 향기로 천상으로의 이미지는 고귀함을 자극하는 기교가 된다 2) 사랑의 표정 사랑의 종점은 배우자를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도착이 되는 것이다. 그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방황과 설렘이 교차하는 수많은 길을 가야 한다. 그렇기에 사랑의 안온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살면서 갚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하기에 사랑은 주는 것이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닌지- 사랑의 행로는 오로지 현재라는 지점에서 스스로가 선택하고 누리는 마음의 평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홍연희는 오로지 사랑을 위한 의미가 시에 모든 것을 투척하는 표정이라는 점,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알게 하는 재주가 있는 듯하다. 그 무엇도 태워버릴 것 같은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눈이 먼다 해도 사랑의 빛으로 길을 밝혀주는 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허전하고 고독함이 가득한 날 그 어떤 것이라도 태워버릴 것 같은 뜨겁고 향기로운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중에서 시의 구조는 사랑을 빼고는 그 목적을 위해 몇 개의 단계를 지나면서 공고해지며 단단한 사랑의 깃발로 세우고 있다. 즉 태움-길-뜨거운 사랑의 단계마다 시인의 의지는 그 어떤 것이라도 변화할 수 있는 정서의 전개- 그만큼 초점을 맞추는 시기적절, 1연에서는 그 무엇도 태워버릴 것 같은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의 바람, 2연에서는 /눈이 먼다 해도 길을 밝혀주는/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생각을, 3연엔 /허전하고 고독함이 가득한 날 그 어떤 것이라도 태워버릴 것 같은/ 마음,- 수미쌍관(首尾雙關)의 연상법을 사용하면서 참된 사랑의 진수에 이르고 싶은 시인의 뜻이 하늘을 찌른다. 비유가 부적절하지만, 사랑의 희망이 너무나 강하다. 한 번의 사랑이 황홀경에 찾아 나서는 시인의 사랑은 끝이 특이함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길을 찾아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를 추적한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에 사랑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길을 만드는 듯하다. 이를 일편단심(一片丹心)이라는 뜻으로 정리할 수도 있지만 시인의 한 사람은 남편으로 집약된다. 이는 죽을 때까지 사랑할 이름으로 행복과 꿈을 선사하고 지켜주는 사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저녁을 기대어 있노라면 살포시 다가오는 얼굴 하나 차마 보고 싶다, 말할 수 없어 수줍은 마음 하늘 가득 붉게 물들고 다정한 마음이 먼저 마중을 나간다. 『그리움』 중에서 시인의 사랑은 빛나는 것으로 지향하며 빛으로 집약되어 시적 행로를 시작한다. 태움으로 빛을 찾아 나서고, 사랑은 오로지 행동으로 찾는 데서 가장 현실적인 의미를 완성한다. 홍연희의 사랑법은 동적이기보다 정적인 “미소”와 “달빛” 등의 수사에서 시의 무드를 잡고 대부분 구성하며 뿐만, 아니라 조용한 공간에서 만나는 정서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안으로 타오르는 열정은 매우 강렬한 특징으로 사랑이 남편임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남편의 가치와 개념으로 정리된다면, 시인의 사랑은 안온한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조용한 시인- 그런 시심을 안으로 감추고 부끄럽게 표출하는 시인으로 보인다. 『3. 에필로그』 홍연희의 시는 담담하면서도 가을날의 가을바람을 맞이하는 인상이다. 이는 시인의 감수성에서 나오는 시심이 조용하고 아늑함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한편 식물 정서에서 오는 정감이 부드럽고 정적(靜的)인 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푸르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따뜻한 정이 안으로 흐르면서 포근하게 다가온다. 이는 여심에서 보이는 감성이 유동하면서 객관 현실을 보여주는 효과- 이런 즐거움은 언어의 효과적인 비유와 장치를 만나는 반가움이다. 시인을 말한다면 시는 사랑의 노래로 집약된다. 물론 사랑의 표정과 요체는 한 사람을 향하는 절절함이 산뜻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시의 행로는 오로지 정성을 다 바치는 인상이다. 정결함과 식물 정서와 사랑이란 표정으로 언어의 긴축을 사랑으로 환치하는 점에서 감수성이독특한 시인임에는 분명한 것으로 살아 있는 사랑에 대한 열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인이라 기대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4.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를 만나는 일은 아름다우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시는 인간의 정서를 순화하고 정서의 상승을 부추기는 순수한 마음의 풍경화를 만나는 일이기에 그렇다는 것일 것이다. 시인은 사물과 온갖 우주를 심안으로 떠오르게 하는 삼라만상을 헌신할 때 비유로 나타나는 얼굴에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마음의 그림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를 바라보고 시를 보는 독자는 시인과 또 다른 정서의 상승효과를 경험하면서 시인이 그린 세계 내(世界內)에서 독특한 추수(追隨)적인 경험을 만나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일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정서의 상승이라는 효과에서 만나는 공간은 시가 갖는 가치의 개념으로 진전한다. 한 사람의 시인이 토해내는 언어의 그림은 일정하고 단순한 언어 조합이 아니라 세계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일면 그로 인하여 변화할 수 있는 공간의 창조에 힘이 부여 되기에- 시에 대한 유사 이래 인간의 곁을 떠난적이 없는 시의 가치는 이렇게 고귀하고 책임을 느끼는 임무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다. 물론 시를 감득(感得)하는 독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독자도 있지만 정서의 차이는 밝은 얼굴과 찡그린 얼굴의 차이는 크다. 순수하고 밝은 표정은 인간사를 아름답게 만드는 얼굴과 찡그린 얼굴을 대하는 독자들과는 반대일 것이다. 김선영 詩 - 그의 모습은 본 일도 없으며 다만 청탁 원고만이 전부이지만 그녀의 시에는 시니어라는 지긋한 경계에서 다가오는 순수하고 깨끗한 강물이 흐르기도 하고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연상 되며 여성의 시가 그렇듯 그리움, 사랑, 혹은 추상적인 정서가 흔한데 비해 현실성의 사물에서 느끼는 감수성이 많은 양상을 보인다. 생의 비유 혹은 식물 정서의 다양성 그리고 차(茶)에 대한 깊이의 음향을 추적하는 섬세함, 외국 여행에서 느끼는 삶의 고달픔을 보는 연민(憐憫)의 눈빛 등이 의식을 채우고 있는 정서에 목록을 본다면 더욱 알 듯도 하지만 나른한 감수성의 퇴락한 언어의 되풀이보다는 감각의 정서가 우월한 것도 독특한 특징에 속하는 부분일 것 같다. 이제 시에서 풍겨 나오는 바람의 향기를 접하는 길목에서 그에 본 모습을 들여다보자 『2. 동서의 감각적인 정서』 김선영의 시에 특징이라 한다면 동서의 감각적 정서가 언어의 조화미를 연출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 같다. 이는 사물과 사물을 결합하는 조화(調和)에서 비유의 언어가 살아남을 의미한다.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의 결합의 조건은 시인의 재능이다. 이를 촉매제로 이용하는 방법은 비유이거나 상징 혹은 이미지 결합을 주도하는 시심(詩心)의운용적 재능 - 여기서 시의 맛은 달라지는 것이다. 즉 같은 재료로도 음식의 맛은 주도자의 재능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연출할 수 있다. 비록 평범하고 날마다 접하는 재료일지라도 어떻게 요리하는가의 따라 그 결과는 호불호의 결말은 판연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한 편의 시를 만난다. 둥실 떠 있는 달 살짝 바가지로 떠다가 장독대 위 정화수(井華水) 띄어놓고 풋별 서너 개 간짓대로 돌려 따 달 위에 얹어 촛불 꽂아 불 밝혀 임 기다리면 이 밤 익지 않아도 좋겠네. 이 밤 석류처럼 익어 터지지 않아도 좋겠다네 <달을 떠서> 중에서 시란 궁극적으로 언어의 그림이다. 여기엔 감각이 들어 있어야 하고 언어의 긴축에 탄력이 수용되어야 한다. 달을 둥근 바가지로 떠다가 정화수에 띄어놓고 “풋별” 서너 개를 장대로 따는 묘미는 동심(童心)으로 돌아가는 추억의 깊이에 이른다. 이는 순수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기교이면서 “촛불”을 밝히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방안의 풍겨이 동화적인 세계로 흘러간다. 이는 무르익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정지된 정밀(靜謐)의 속삭임을 연상된다. 다시 말해서 출렁이고 요란함이 아니라 넘침이 없고 고요한 관조(觀照)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의 고요- 그런 고요의 나라에 도달하는 감수성이 아닌가 보게 되는 것이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계추를 잡아당겨 미끄러져 질펀한 진흙 펄에 주저앉는 거나하게 취해버린 반나절 번쩍 일어나 앉아 늦은 대여섯 시의 끈적이면 달라붙는 달디단 엿가락 신음의 소리 요란하다. <낮잠> 중에서 나른하고 낮잠의 깊이에 빠진 경험에서의 익살스러운 실눈으로 시계를 응시하다 “미끄러져 의” 긴 졸음에 깊이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 다시 “취해버린/나절”의 오수(午睡)에서의 대여섯 시의 시계 손가락을 바라보고 “달디단 엿가락” 같은 비유의 졸음이 익살스럽게 그렸다. 「골다공증」은 나이에 따라 뼈에서 나오는 신음의 소리가 공간을 자극하는 아픔이다. 슬픈 소리의 방문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일지라도 막상 자기에게 닥치면 지난날 할머니의 신음의 소리가 일치되는 서글픔이 된다. 병환을 앓으시던 소리/점점/뼈마디로 읽어낼 때/ 열 아흐래 날/ 야위어 가는 달빛/ “사묵/사묵”스미는 것이다. 같은 통증으로 창틈으로 “사묵 사묵”이라는 의태어의 묘미는 심각한 아픔이 오히려 친근감으로 접근한다. 이는 시심을 풀어내는 언어 운용의 재치로 돌릴 때 김선영의 시는 그만의 표현을 자극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은 안도의 시심으로 보인다. 시인은 시라는 대상을 의인화의 방법으로 바라볼 때 높고, 깊이를 위해 심각한 발성을 하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자신에 얼굴이고 분신(分身)이고 떠날 수 없는 절대의 대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를 향해 온갖 언어를 동원하여 경외(敬畏)와 동경의 표정을 짓더라도 시는 항상 냉철하고 냉엄한 모습으로 애달픈 시와 시인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어설픈 언어 꿰서 웃음 앞에 물구나무섰던 그날처럼 뚝 떨어진 시어 하나 줍지 못해 시간 위를 뒹굴 때 기억 저 너머 유년의 멋쩍은 미소 마음 밭에 찰랑댄다. <언어 미달> 중에서 시인이 선택하는 시어 한마디는 시인의 평생을 투척하는 에너지를 소유한다. 시어는 곧 생애의 호흡이 들어있기 때문에 시어는 시인 자신의 분신으로 길을 만드는 것이다 “뚝 떨어진 시어 하나”를 줍기 위해 김선영의 시의 길은 얼마나 감수성의 깊이를 방문할 수 있을 것인가 의 여부가 가로 놓인다. “유년의” 미소가 찰랑이는 공간을 찾아 나그네의 모습으로 시의 성문을 찾아가는 모습이 평안은 주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나(ego)와 삼라만상』 우리가 불교와 인연이 되어 불심을 갖으면 인연을 나타내는 영원의 개념은 원(圓)으로 나타난다.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渟), 부증불감(不增不減)의 결정은 공즉색(空卽色)으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땅위에 한 방울의 물이 증발하면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되고,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무거우면 구름은 비가 되어 땅위에 보이는 것으로 변한다. 이는 현대 물리학의 질량 불변의 법칙이 되기도 하고- 불경이나 노자의 철학은 이런 개념을 포괄하고 있음을 카프라나 쥬커브는 증명하고 있다. 원(圓 )- 이는 인간이 영원을 지향하여 만든 위대한 기호의 개념이라는 뜻이다. 세상 돌고 돌아 굴렁쇠처럼 달려왔다. 아침은 점심을 저녁을 밤을 향해 굴렁쇠를 굴리며 떠날 것이다. 굴렁쇠 안에 지구가 있고 궤적을 쫓던 혼이 이탈해 다른 궤도를 그려댄다. 내가 도는 것인지 지구가 도는 건지 레일 따라가다가 내려야 할 정거장에 옷깃 여미며 내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돌고 돌아 도는지 <돌고 돌아> 중에서 우주는 돌고 있다. 나 또한 일상이 돌게 되는 일로 살아야 하는 운명적 존재- 내려야 할 정거장에 옷깃을 여미며 작별해야 할 순명(順命)의 길이곧 삶의 의미(意味)라면 한계라는 경계는 슬픈 인생사가 아니던가? 그 말 『도랑 사구 안 작은 우주』 은 자기를 알면 철학의 완성자가 된다. 그러나 나라는 그림자를 이끌고 걸음을 걸을지라도 나를 만나는 일은 결코, 없기에 실망으로 점철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철학의 종점이고 시작이라면 시는 이런 의미를 노래하는 임무가 존재의 탐구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더욱 값진 시가 아닐지는? 늦은 봄날에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날마다 나를 찾는 일상을 찾아 헤매지만 나는 없다. 숨바꼭질만 하다 말고 또 나는 나를 찾아 숨바꼭질 -중략- <늦은 봄날에> 중에서 마치 봄을 찾아 들판을 방황했지만 끝내 봄을 못찾고 집에 들어와 정원에 핀 꽃을 보고 봄을 찾았다는 예처럼 나를 찾는 일은 일상- 날마다 헤매는 일이지만 나를 만나는 일은 항상 궤적을 달리 하면서 숨바꼭질한다. 그렇다면 나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한 인간의 숙제인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인 명제나 모든 철학은 나로 돌아오는 회귀의 말을 설파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닌 오로지 참고 사항일 뿐 정답은 바로 나 자신에 의해 터득되는 길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지” “날마다 찾는 일상을” 반복하면서 결국은 숨바꼭질 속에 이방인과 조우(遭遇)에서 무엇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정말 나를 찾는 일은 허상인가, 이런 의문은 결국 허망으로 끝나는 게임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찾는 일은 끝없는 삶의 궤적의 연관이 있고 또 수시로 변하는 현재는 곧 과거로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정지할 수 없는 나의 찾음은 마침내 체념으로 내려놓는 그 장소에 있을 뿐 어디에도 나의 모습은 액자 속으로 다가오지 않는 일생일 뿐이다. 그러나 나를 찾는 일은 반복적으로 계속될 때, 자아(ego)의 모습을 정립하는 방법이 나타난다고 가르치는 철학- 시는 노래하는 일이 의무(義務)이다. 『4. 질곡에 삶, 곡예의 삶』 사는 일은 중심의 의무이자 최종 종착지를 찾아가는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버리면 안되는 명제이고 벗어날 수 없는 숙제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고해(苦海)라 비유했듯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는 일은 고달프고, 슬프고, 참람(僭濫)한 진행이 있을 뿐, 기쁨이란 찰라(札剌)이고 행복이란 잠시의 그림자와 같은 일이 사는 일이 전부일 것이다. 돈, 명예, 감투로 해결하는 일이 아니며 오로지 스스로 힘에 의지해 헤쳐 나가는 일이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 대처하는 삶의 진수이기 때문이다. 설사 빙벽(氷壁)을 스스로 오른다 해도 훼방의 이름 - 비와 눈보라 혹은 강풍에 오르던 길도 허방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극은 누구나 경험할 수가 있다. 찻집에 느린 걸음으로 오르는 넝쿨 미끄러운 바닥의 구물구물 애벌레 아슬하게 유리 벽 슬금 기어오른다. 서두르지 않고 우쭐거리지도 않으며 슬슬 숨 고르며 느린 삶의 음계 움켜쥘 곳 없는 음벽 촉수로 더듬어 뱃살 붙여 밀어 올린다. 헛짚어 휘우듬 거리는 위태한 상황 어느 우연의 바람에 등 떠밀릴 수 있까? <담쟁이넝쿨> 중에서 절망의 상태, 담쟁이는 유리 벽 같은 의지할 곳 없는 곳을 기어오르는 길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이를 실존주의에서는 한계 상황(grandsituaation)이라 설정하고 마지막 한계 앞에서 인간의 특징을 포착하는 철학의 이름으로 말했다. 비유를 하자면 쥐가 마지막에 몰리면 돌아서서 고양이와 한판 싸움을 하자는 특징이 절망의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일 것이다. 애벌레처럼 담쟁이는 유리 벽을 기어 오르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결코 절망의 마지막이라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소망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을 만들게 된다. 시인은 “찻집에 느린 걸음으로 오르는 넝쿨” “돌아갈 수 없는 길” /슬슬 숨 고르며 느린 삶의 음계/를 가야 하는 선택은 때로 운명의 방향을 잘못 잡아 고행의 여로가 연속될 때, 두려움은 남의 것이 아닌 나의 몫으로 다가올 때도 그 길은 오로지 숙명의 숙제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필자는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의 비정한 순간이다. 내일을 당기어 오늘을 엮듯 실오라기 당겨가며 뜨개질을 한다. 그물을 짜는 어부로 앉아 한 사슬 한 사슬 가느다란 시간들은 바쁘게 주우면 코바늘에 걸리는 팽팽한 삶의 무게 -중략- <뜨개질> 중에서 여성적인 비유로 섬세하게 삶의 무게를 풀어 나간다. 베짜기와 같은 일-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삶의 하루하루가 한올 한올의 조직으로 직조(織造)되는 이치- 완성의 길에 도달하면 비로소 의복을 만드는 재료로 완성된다. 뜨개질 또한 한 땀 한 땀이 모아져서 “팽팽한 삶의 무게, ” 사는 일은 공짜가 없고 오로지 모든 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성실성이 투자될 때 삶의 가치는 소중한 자기 가치로 돌아온다는 교훈을 남긴다. 『5. 에너지 공급』 시인이란 자기가 살아온 환경에서 시적 에너지공급원을 설정하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오면서 접촉한 대상이 시의 주요 재료로 설정되기도 하고 아주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시골에서 살고 있다면 시골 관념적인 면이 지배하면서 전원에서의 생활 그 옛날 살던 고향의 향수에 젖어 식물 정서가 앞서며 강이나 꽃이나 주요 모티브로 나타나면서 이미지 군으로 자리하는 것도 환경적인 요소가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고향의 강』 『호수의 적요』 『시골 풍경』 등은 김선영의 시적 에너지를 이동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겹쳐 지면서 현실을 압도하는 시간에 오버랩 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렇기에 시간의 순서가 한몫으로 접근이 되는 듯하다. 서로 걸어온 길 달라도 가야 할 길 달라도 어느 정점에서 잠시 풀꽃 같은 인연으로 하얀 토끼풀 엮어서 걸어주며 투명한 웃음 -중략- 꽃잎 흐드러져 마음 비 내리는 날 가슴에 접어든 너의 향기 만져보리라 <들꽃> 중에서 지구상의 풀이 향기로 변화하여 사랑이 내포된 의미로 상승한다. 이 향기는 고귀함을 나타내고 숭고한 가치로 사랑의 옷을 입을 때, 꽃의 가치는 지상의 아름다움과 연결된다. “가슴에 접어둔 너의 향기”를 만지는 것으로 지상의 이미지와 천상의 이미지와 하나로 결합될 때, 궁극의 조화미를 이룰 수 있게된다. “가슴에 접어든 너의 향기 만져보리라” 꽃이 그리운 사람의 가슴에 향기로 만져보리라는 소망- 향기와 시심이 결합하려는 깊은 뜻을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기교이다. 그리운 사람에게 향기로 남고 싶은 정서는 모성애적인 발상이지만 세상을 감싸고 싶은 정서가 고귀함으로 포장되는 상상의 나래가 아닐까 싶다. 『6. 나가면서』 김선영의 시는 향기가 있고 그 향기는 일과성이 아니라 상승의 기류를 타면서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움을 가져오는 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적 감각은 더욱 순발력이 있는 깊이로 이끌고 갈 때 독자는 감동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시적인 넓이는 철학적인 암시를 상징으로 포장할 뿐만이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펄럭이는 기쁨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나는 삼라만상의 중심이고 개체는 전체를 이루는 본질이라는 점에서 김선영의 시는 “나(ego)” 는 개체의 가치에서 숭고함을 의미하고 시인의 고귀한 정신을 투사(投射)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식물 정서나 강의 이미지는 시인에게 영향을 준 추억들의 집합인 것 같고 이는 향기로 시의 넓이를 고정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이 모티브의 중요한 점인 듯하다. 이 모든 논지를 요약한다면 김선영의 시는 언어의 조화에서 삶의 높이로 지향점을 갖고 있으며 현실 가치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순수한 시인 감각적이면서 강인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그만의 자리를 확보한 시인이라 하겠다. 2024.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시평집]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詩的論이라는 것은 언어(言語)로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대체적으로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독자와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치 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云爲)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하여야 하여야 하기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적으로 받아 드리는 시인의 길을 가려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아픔,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으로 포장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금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현실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물음표이다. 이제 겨우 30여 명의 시인 논을 쓰고 있는 본인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세기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이 되고 투영된 작품이 없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많지만 걸맞은 작품에서는 수사가 너무 많아 작품성의 가치가 없음이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 일게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공부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지부에도 젊음의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는 물음표(?)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은이들을 찾고 찾아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지부가 될 것이라 확신하며 찬란한 빛이 내려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일로, 개인의 아집을 보이는 모습이 필자가 보기에는 희망이 없음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다. 물론 연세가 많다 하여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필자 또한 나이가 익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편들끼리 모여 편들끼리 지부를 운영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곳에 정착한 지, 어언 여러 해가 되어 가지만 하나도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해 본인 스스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지만 공연히 평지풍파 아니 잘난 척하다는 모양새에 그냥 보고 듣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본인은 여러 지부에서 함께 생활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여기처럼 부자연스러운 지부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여 예술의 도시인 지부가 된다면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될 것이다. 4차, 5차원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강조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가 반목하면서 눈치만 살피고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 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잠시 현실의 안위를 생각하는 의미로 일탈을 한 것은 아닌지? 다시 평론으로 들어간다. 1. 봄바람 자리 <김영미>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꽃 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 아! 가벼워라. <꽃바람/김영미> 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꽃 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 마음의 자아 <박시연>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을 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신적,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時語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 않다는 데에 허전이다.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이유가 나타난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박시연>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 일게다. 좌고우면 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오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시라는 존재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의식과 일체화를 꿈꾸는 작업이라 본다. 다시 말하면 1+1은= 2가 아니라 3의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화학적인 결합의 일체화인 것이다. 이는 시적 장치인 비유나 역설, 은유, 직유 등의 장치를 가동하여 시인의 재능을 나타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지를 앞세우면 자아는 곧 시적 화자인 시인으로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순백이어야 하여야 때문만은 아니나 현실에 대한 의미를 내장한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시어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3. 에필로그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를 대중들에게 바치는 가수이기에 비록 서툰 곡조라도 신명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과 희망을 향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릴 줄 알아야 하고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fr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첫 시집에서 의도를 명료화하는 이미지 구성은 건강하고 튼튼한 재료를 배열하는 설계도를 완료한 것이다. 다음 건축은 확연하게 다른 시의 개성 그리고 우리나라 시의 의미를 위한 발성이 두드러질 때 기대하는 가 위의 논지들에서 재촉이 된다. 또한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는 비밀성이 낯설게 표현하지만 비유나 은유의 장치를 분해할 수 있다면 결국 시인의 모든 정서가 표백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인 자신을 말하는 우회적인 언어의 포착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향기를 발산하는 시인들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며 문을 닫으려 하며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에 마음의 자아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일탈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며 오늘은 나를 변명하는 일로 맺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7. 금요저널 주필/평론가/이승섭시인 [필자 시평집]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트 셀러] [필자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사랑은 눈을 멀게 하고 맹목적 사랑이라 한다. 옛 현자(賢者)나 범인(凡人)을 막론하고 사랑 앞에는 눈도 없고 귀도 없으며 오로지 방황만이 정답이라는 의미이다. 문호 톨스토이는 34세 때 궁정 의사인 베르스의 딸인 18세 소피야안드레예브나와 결혼했을 때 얼마나 기뻤으면 “결혼 생활의 행복이 나를 삼켜버리고 있다”라는 말로 솔직히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부인소피야와 갈등을 겪고 가출을 결정했으니 만년을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괴테는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의 사랑으로서 시(詩) <5월의 노래를> 만들었지만 이 여인과의 결별 후 그는 가슴속에서 자책의 염(念)이 자리 잡아 시작(詩作)의 모티브를 만들었다. 두 번째는 은행가의 딸인 시네망가에 사랑이 실패로 끝난 이후 괴테의 정신적인 변환의 계기가 되었으며 세 번째 여인은 궁정 관리 딸이자 7년 연상의 샤를로테폰 시타인과의 사랑은 조화인 인간성의 이상 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자유 정신의 방랑은 다시 4번째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조화(趙俰)를 만드는 집의 딸인 크리스티아 불피우스와 행복한 가정의 맛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자유 정신의 소유자인 괴테는 여행 중에 재기 넘치는 친구의 아내인 마르안느, 폰 빌레머와의 사랑은 괴테의 정신을 더욱 젊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늙은 말년에 그의 아내가 죽었고 아들마저 객사(客死)로 세상을 뜨자, 외로움에 지친 80세 넘은 괴테는 마리엔바트 온천에서 만난 18세 소녀 울리케 폰 레베조브에게 구혼했으나 그 할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해서 실패의 애틋한 시(詩)가<마르 앤 바트애가(哀歌)로 정리 되었다. 그리하여 사랑은 나이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며 돈도 아니라는 증명은 괴테의 경우 절실한 베터 하프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문호의 편력이자 방황이었다. 또한 플라톤의 <심포지음>의 대화편에서는 여러 입을 빌려 에로스의 이야기 중 <인류의 성(性)은 남성, 여성, 남녀 성의 3종으로 분류했다. 그들은 자기 힘을 믿고 신에게 반발하면서 신을 공격했다. 이것을 알아차린 제우스는 인간들을 어떻게 처벌할까, 다른 신들과 회의를 열었다. 만약 인간을 전멸시켜 버리면 신들에 봉사할 자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신사(神社)도 없어진다는 결론을 얻고 인간을 두 쪽으로 갈라놓아 힘을 약화 시키자는 결론이었다. 이렇게 분할된 인간은 이전의 하나된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반쪽을 열심히 찾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Better Half인 Eros]인 셈이다. 물론 에로스는 육육적인 사랑을 극복하고 소크라테스에 대한 정신적 사랑[Platonic Love]이 플라톤의 철학의 요체이자 학문에 대한 목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반쪽을 찾는 행위는 인간의 영원한 방황의 근거를 제시하는 본능에 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이른바 낭만파 3인 중에 영국의 바이런은 숱한 염문을 뿌린 불구인 절름발이 시인이다. <차일드 헤롤드의편력, <1812년>은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작품으로 모두 여성에 대한 아픔이 들어 있다. 그는 캐롤라인 램 납작 부인이나 이복누이 오거스터리 부인 옥스퍼드 부인 등과 염문을 뿌렸고<1815년> 양가의 딸인 에너벨러밀 뱅크와 27세에 결혼, 이듬해에 이혼한다. <1819년>엔 테레사귀지올라, 백작부인과 동거했고, 좋아하는 나라 그리스에 내전이 일어나자 불구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전하여 결국 말라리아로<1824년> 이국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스에서 쓴 연애 시(詩)는 재치와 심금을 울리고 있다. 아테네의 처녀여 그대와 작별함에 앞서 돌려주오. 내 마음 다시 돌려주오. 그러나 내 마음 내 가슴속에서 떠난 지 이미 오래이니 그대 간직해 주오. 하나 어찌 그것뿐이랴 내 떠나기 전 나의 맹세를 들어주오. (Maid of Athesns, ere we patt, Give O, give me back my heart! Or, since that has left my breast, Aeep it now and take my rest! hear my before l go,) <Lord Byron: Maid of Athens>4 연중 1연 바이런은 1차 대전을 불러일으켰던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일생을 통하여 그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을 만큼 좋아했고, 통일 이탈리아의 거인 가발이나 마니치로 하여금 울면서 그의 시를 읽었고, 빅톨위고를 감동케 했으며, 독일의 괴테로 하여금 19세기 최대의 천재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북유럽 해적의 후손이었다. 영국의 낭만파 3대 시인에 셀리는 명문학교 옥스퍼드에서 재학 중 무신론의 필요성을 써서 퇴학을 당했고 16살의 소녀 Harrict와 결혼했으나 당시의 혁명적 사상가 Godwin과 교류하다 그의 딸 Mary와 연애 헤이르트와세 사람이 공동으로 살기를 바랐으나 헤이르트가 거절, 결국 하이드파크 연못에 빠져 자살로 마감하자 <1816년> 매리와 결혼, 세간의 비난을 견디지 못해 이탈리아로 도망가게 된다. <종달새>, <서풍에 부치는 노래>등이 결실로 남아 있다. 셀리의<사랑의 철학>은 처음이 The fountains mingle wich the river,/Andthe rivers whith theocean <샘물이 모여서 강물이 되고, 강물이 모여서 바다가 되네>는 너무나 잘 알려진 작품이다. 시인의 사명은 예언적이라는 사고는 19세기 시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3대 낭만파의 마지막 막내는 Keats로 25세기에 요절한 천재이자 불운한 삶을 살았던 시인으로 폐결핵에 걸려 유명을 달리했다. 세 동생을 거느린 키이츠는 불운한 마차 대여업자의 아들로 유복한 것도 넉넉한 것도 없는 가난과 신음하는 그의 정신세계는 미적 아름다움에 생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알려져 있다. 막내 동생이 죽자, 런던의 헴스테드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처녀 파니 브론을 알게 되었고 약혼을 했으니 키엘케골, 처럼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건을 겪은 후에 경이적인 상상의 발동이 <하이피리언>등을 창작하는 시적 영감을 발휘했다.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 ever, lts loveliness increases; it will never pass into nothgness; but still will keep A bower quiet for us, and a sleep full ofsweet dreams, and health, and quite breathing.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 사랑스러움은 늘어나고, 결코 없음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법,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조용한 내실에 머물도록해야 한다. 다디단꿈이 가득한 잠과 건강과 그리고 조용한 숨결 속에 있도록 <Keats <Endymion>에서> 짠 생애를 아름다움에 헌신한 시인의 숨소리는 영원을 향한 구두의 노랫가락이었던 셈이다. 프랑스의 3대 비련(悲戀)에는 석학 아베라르와 에로이즈가 있고 두 번째는 쇼팽과 시인인 조르조상드와 나폴레옹과 죠세피느를 들고 있다. 셋 모두 맺지 못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비련의 이야기이지만 모두 진정의 사랑에서 애달픈 사건들이었던 같다. 정말 시인에겐 사랑이란 영감의 원천이고 상상의 창작이다. 사랑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는 상상력의 진원지가 된다는 뜻일게다. 사랑이 없는 예술이란 딱딱하고 굳은 법률 조항처럼무미 건할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는 자유 정신을 부추기는 데서 때로는 어긋난 길도 있겠지만 대체로 사랑을 위한 마음에는 순수하고 깨끗한 물이 솟구치는 진원이 바로 사랑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시와는 손잡고 가야 하는 것이라며 굳게 믿으며 논지를 내려놓으려 한다. 2024.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시평집]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2]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시작에 들어가며 시는 언어의 소리가 아니라 사물의 획득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언어와 일체화를 이룰 때 시인은 단지 언어의 매개자로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결국 사물과 이미지의 연관을 일체화- 이를 이루고 완성하면서 시의 맥을 짚고 정서를 찾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의 능력은 얼마만큼이고 시의 효용 가치는 인간의 가슴을 얼마나 따스하게 위무(慰撫)하는가? 또한 현재 과거 미래까지 안목을 보는 종합된 상상의 그림인 것이다. 산문과는 다르듯이 보편성의 그릇에 담아 독자를 향해 얼굴을 내민다. 물론 개인의 고백이라 해서 자기만의 암호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식의 기준 잣대를 갖추고 소통이 될 때, 시의 이름은 친밀한 행보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이다. 그렇기에 심리적인 내면을 그릴 때 체온의 담는 풍경화를 그리는 작업이 시일 것이다. 그러나 산문은 현실을 리얼리티 하게 그린다는 점에서 시과 비교할 수 없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자신을 감추는-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을 예외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인 내면의 통찰이 필요한 소이(所以)인 것이다. 물론 대상을 나로 끌어들여 동일화를 이루는 방법에서 시는 일정한 어조(語調)- 즉 소통의 대화이다. 이를 담화(Discourse)의 양식- 화자의 의미와 감정 혹은 의도를 일컫는 말로 총체적인 특성을 찾아 나서는 일은 persona 즉 탈을 만나는 데서 발생하는 감정의 반응을 벗겨 보아야 한다. 그러나 감정은 독자에 따라 다른 수용의 특성을 내장할 수도 있고 또 같을 수도 없다. 시인도 개성이 있지만 독자의 수용 또한 개성이기 때문이다. 2. 숲으로 들어가 언어 찾기 시는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자연의 숲을 만드는 행위일 것이다. 그것도 의미의 숲을 만드는 일은 시인이 생각하는 의식과 실제의 건축물- 숲의 모습은 다르게 나타난다. 근거리와 원거리에서 느끼는 사고의 차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시인은 고도의 건축사라는 말을 헌증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시의 의미는 건물이며 이 건물의 주변을 치장하는 것은 돌과 나무와 건축사의 뇌리에서 나온 미감일 것이다. 한 편의 시에는 이러한 조망의 모든 요소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정인진의 생각의 숲에는 이런 건축물이 들어 있으며 거기엔 사람이 살고 있는 풍광인 듯하다. 얼마나 다정한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가는 전적으로 정인진이 그리는 상상의 공간인 셈이다. 독자는 이를 감상하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1) 봄의 언어 시 여러 편 중 『봄의 편지』『서곡 찬가』 『노을』 등이 있다. 이는 봄 의식에 시인의 내면세계를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약동, 혹은 희망, 다이나이믹한 의식, 그리고 로맨스 등 젊음이라는 정서를 시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물론 거울 강, 가을은 10월의 밤, 그루터기, 가을빛 등 몇 편인데 비해 봄이 압도적인 이유는 시인의 정서가 봄을 지향하거나 특별한 이미지로 확정하고 삶의 지속성과 상곤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봄옷으로 치장한 바람이 해금강을 찾아와 강 오리를 묶어놓고 마른 갈대 깃을 끌어 신나게 춤을 춘다. 와락 떼로 몰려온 바람이 나의 옷깃을 들치며 실랑이를 벌이고 바람이 끄는 대로 정신없이 돌다가 몸살을 앓는다. 왕버들 허리를 감고 물비늘을 돋우는 바람 꿈만큼 물이 올라 움이 튼다. 바람은 춤이고 봄이며 꿈이다. [봄의 세상] 중에서 봄이 가득함으로써 신명을 돋우는 시심의 발동이 역력하다. 왜 그럴까? 이는 시심이 안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에너지로 의해 자연스레 약동하는 봄의 정서를 부추기는 정서인 것 같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나오는 바람에 의해 봄의 신명이 돋워지는 자발성의 에너지가 오른 감성이다. 물로 이 에너지의 유인은 바람에 의해서 지상의 배회를 감행한다. 『신나게 춤을 춘다.』의 1연에서 옷깃을 만드는 바람의 광분이 『몸살을 앓는다.』는 봄의 터널 속으로 깊이 들어가며 점차 봄은 세상을 뒤엎으면서 한 가지의 통일을 위한 채색을 준비한다. 『왕 버들 허리를 안고』의 육감적인 무드를 끌어와 바람과의 결합에서 탄생되는 『움이 튼다』와 생명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결국 바람의 역할에 의해 봄은 완전히 세상을 장악하는 신비의 정경이 전개되는 것이다. 『바람은 춤이고 봄이며 꿈이다.』의 마지막에서 봄의 완성을 지향하는 정점에서 시인의 마음 또한 동화되는 일체화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입춘 지나고 살바람이 실려 오는 봄을 찾아 언덕에 서 있다. 낯선 듯 낯익은 청매 홍매 산수유가 봉긋이 입 오물거리며 밤새 쓴 편지를 읽는다. 살포시 다가서는 향기에 잠 꼬리 놓쳐버리고 까맣게 언 가슴 하얗게 열린다. [봄에 편지] 중에서 실바람이 가득한 화평의 무드를 조성하며 부드러움이 유익한 바람에 의해 다가온 편지를 읽은 홍매 청매- 이는 시인에게 다가온 봄소식을 의인화의 기교로 변화하여 편지를 읽는 화상이다. 물론 봄소식이고 이들이 향기로 다가들 때, 향기는 얼었던 가슴을 녹이는 순간 마음이 열리는 색채- 하얗게 순수로 포장된다. “까맣게” 가 “하얗게”로 변하면 이는 생명의 이름이 열리는 순간이고 삶의 전환을 받아 드리는 구체적인 암시로 다가든다. 봄은 점차 시인의 의식을 가득 체우는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삶의 지속을 화려함으로 채우려는 정감이 발동되는 듯- 아울러 봄은 꿈을 꾸는 상상의 여백을 넓히는 계절로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박용을 하는 것 같다. 봄 터지고 벌어지고 찢어지는 전쟁터 내 봄 여물지 못해 참전을 못한다 『아직 멀었어』중에서 시인에게 봄은 가장 의미 있는 꿈을 꾸는 계절이자 생명의 용약을 가져오는 계절이지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바라보는 거리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아직 멀었어』에서 모든 사물이 봄기운으로 불타고 있을 때 정작 시인은 용감하게 자신을 던져 뛰어들지 못하고 그냥 바라보는 이유- 제약과 한계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부적으로는 봄에 신명을 갖고 있지만 정작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한계 앞에 시적 화자는 머물고 있다. 아마도 삶의 제약 혹은 그런 환경적인 요소가 행동을 만드는 심리적인 현상일 것 같다. 때문에 정작 화려한 봄을 그냥 바라보는 즐거움, 꿈꾸는 일로 혹은 향기를 감상하는 일로 지나치는 아쉬움이 시인의 법인 것 같다. 2)가을 그리움 시인의 시에 편지의 시가 많이 나온다, 아침을 역고 온 편지를 받는 『행복』과 시인이 직접 쓰지 않고 가을비에 의해 쓴 『가을 편지』 홍매, 청매가 쓴 편지를 읽는 『봄 편지』 등 편지의 형태는 시인이 상대를 향해서 쓰는 적극성의 사연이 아니라 보내온 것을 읽는 소극성의 정서가 시심을 말한다. 이는 시인의 성품이면서 내면으로 향하는 정서를 확인한다는 점이다. 설익은 가을에 앉을 자리가 어줍어 어느 창가에 서성이는 바람 짓이다가 나의 곰삭은 그리움만 건드려 애절한 몸부림을 치게 하더니 그예 풋 가을 몸살을 먼저 안겨주고 있다. [풋 가을] 중에서 “어줍어” 와 바람이 “서성이는 짓” 등의 행위가 다음 단계인 시인의 정서를 흔드는 것- 그리움을 부추기는 일로 정리되는 듯하다. 그리움이 몸살에서 진전될 때, 가을의 무드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바람과 가을의 “풀벌레”의 소리에서 촉발된 시인의 감수성이 그리움을 불러오는 일이 가을 편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귀뚜라미 울음으로 밤을 지킨 그리움 노을 진 가슴마다 가을비로 쓴 편지 나들목 신호등 아래 수북이 쌓인다. 『가을 편지』중에서 시조의 패턴은 일정한 형식 속에 정서를 펼칠 때, 언어 및 탄력의 팽창적 의미의 확산을 가져와야 한다. 한계의 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칫 형식 논리에 빠질 위험이 있지만 3, 4음의 연속은 곧 우리 민족의 정서에 가장 합당한 리듬으로 체취에 맞는 형식의 시인 듯하다 시의 리듬을 중시하는 특징이 시조의 운율을 체득한 데서 그의 시적인 또 다른 면을 보는 셈이다. 귀뚜라미의 울음은 가을의 청취를 나이브하게 만들고 처연한 마치 처풍고우(凄風故友)의 서글픔을 불러온다. 그리움의 체온, - 따스함이 열망되는 계절적인 특징이 시인의 정서 속으로 다가온 듯하다. 이는 울음이 그리움을 불러오고, 이 그리움은 편지로 삭여지면서 낙엽이 수두룩이 쌓이는 형상으로 그리움의 높이와 비례하는 느낌이다. 불빛이 주는 무드는 처절한 고독을 더욱 아프게 하면서 말이다. 『물소리』 『그리움』 등이 많지만 특히 시인은 자연의 시적 정서는 자연의 음을 터득한 소리로 기득 한 질서를 융합하여 상징으로 일체화를 이룬 이름일 것 같다. 3. 에필로그(나가면서) 인간도 자연의 일 부 이 듯 시 또한 자연의 일부로 귀환하는 것이다. 치밀한 정서의 편린들을 모아 조합하는 기교에는 날카로운 비유의 기교가 돋보이고, 자연을 육화 하는 조화의 묘미는 부드럽고 순수함으로 포장된 이미지가 소리로 전환할 때, 정서의 확장은 더욱 친밀도를 높이는 것이다. 봄의 의식이 주요 모티브로 작용하면서 시인의 내면 의식을 펼치는 방법 안으로 삭이는 감성의 줄기가 안온하고 따스할 뿐만 아니라 언어의 탄력을 받아 확대 재생산하는 정서가 언어 마감으로 다가 온다. 봄 이미지에 대한 시인이고 이는 내성적인 성품이 주는 부드러움의 진원이 그리움으로 편지로 받아 읽으려는 정적인 시인으로 자연의 조화를 아는 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 더 이상 시평을 할 수 없는 깊숙이 박힌 충만한 내면의 인자가 있는 시인이라 하겠다. 2024.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시집]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