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문화재]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 정무공 오정방(1522∼1625), 천파공 오상(1614~1672), 충정공 오두인(1624∼1689) 등 해주 오씨의 이름난 학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이 위치하는 덕봉마을은 사액서원인 덕봉서원과 오정방 고택, 종친의 무덤이 모여 있어 해주 오씨의 역사를 보여준다. 오정방의 손자인 오핵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고택은 덕봉리 입향조 오현경에 의해 1510년에 처음 지었으며, 165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사랑채에 걸린 ‘퇴전당(退全堂)’이라는 현판은 오정방의 호를 1662년에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이 가옥은 문간채가 전면에, 그 안쪽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있으며 사랑채 뒤쪽으로 사당이 별도의 담장을 두고 자리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 가옥은 건립된 시기와 경위가 잘 기록돼 있으며, 16세기에 건립된 원래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더라도, 건물의 목재를 다듬은 상태가 좋으며, 안채의 툇마루와 부엌의 다락에 달아둔 창호에서 높은 수준의 목조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사랑채에 기둥의 모를 깎아 팔각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의 사랑채에서도 나타나는 방식으로 유사한 시대에 인근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코리안 쿠튀르: 세대를 이은 혁신(Korean Couture: Generations of Revolution)’ 전시장 입구. 1]경기도박물관 제공 한국 복식 특별전 ‘코리안 쿠튀르: 세대를 이은 혁신(Korean Couture: Generations of Revolution)’으로 지난 달 28일 개막한 이 전시는 한국 패션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조망한다. 전시는 한국의 패션을 선도한 현대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이상봉, 이진윤, 이청청 등의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디자이너들의 창의력과 역사의 만남을 선보인다. 한국 ‘쿠튀르(고도의 재단·봉제 기술을 사용해 정교하게 만들어 낸 고급 의상)’의 아름다움과 현대적인 면모를 함께 살펴보며 패션의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리로, 관람객은 전통 복식과 현대 복식을 비교하며 한국 패션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코리안 쿠튀르: 세대를 이은 혁신(Korean Couture: Generations of Revolution)’ 전시 전경.2] 경기도박물관 제공 앞서 도박물관은 지난 3월까지 선보인 기증 복식 특별전 ‘오늘 뭐 입지?(OOTD: Outfit Of That Day)’에서 심연(沈演, 1587년~1646년)과 그의 부인 전주 이씨 묘에서 출토된 복식을 선보였다. 2017년 청송 심씨 사평공파 문중이 박물관에 기증한 이들 17세기 복식 유물은 400년 전 조선 사대부의 일상은 물론 그들의 사유 세계까지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청송 심씨 사평공파 기증 유물은 수습 과정부터 도박물관의 전문 학예사가 참여한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과 윌리엄 그리스올드 클리블랜드 미술관장이 ‘경기도박물관 -클리블랜드 미술관 해외문화교류 업무협약’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3] 경기도박물관 제공 특히 도박물관과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상호 교류를 촉진하고 대중을 위한 문화 및 교육 활동을 증진하기 위한 ‘경기도박물관-클리블랜드 미술관 해외문화교류 업무협약’을 했다. 업무협약은 ▲교류 전시 및 공동 기획 전시 ▲소장품 및 전시·교육 분야의 정보 교류 ▲직원 연수 및 상호 방문을 통한 인적교류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자연과 여유를 입고 있는 한국 패션의 고전과 현대 거장들의 걸작이 한국에서조차 한자리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며 “특별전이 기능에 치우친 서구 옷의 미래에 큰 영감을 던져주는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일 병영면 성남마을에서 마을주민들과 지역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유두제가 열렸다. 성남마을 유두제는 전라병영성 유적인 조산(造山)에서 행해지는 전통 민속행사이다. [유두제 행사1] 황정숙 마을이장은 성남마을 유두제는 조선시대부터 조산에서 개최해온 민속행사로 전남마을공동체 활동지원사업과 연계하여 유두절 행사와 함께 한다고 말했다. 유두절이란 음력 6월 15일로 북중에 들어 있으며, 유둣날이라 불리는 세시풍속이다. 이 날은 일가 친지들이 맑은 시내나 산간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뒤, 가지고 간 음식을 먹으면서 서늘하게 하루를 지내는 것을 유두잔치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여름에 질병을 물리치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하는 설이 전해져 온다. [유두제 행사,2] 성남마을의 유두제는 1989년 11월 윤갑현 면장때 조산에 세운 비문에 따르면 ‘이 조산에서 매년 병영을 지켜 온 조상들의 얼을 추모하고 번영과 풍년을 기원하는 성남 주민들의 정성어린 유두제가 전승되어 오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조산에서 열리는 유두제는 조산제로도 불렀다. 조산은 인위적으로 만든 산이다. 전라병사가 부임 후 주변 도암에는 만덕산, 장흥에는 억불산, 인근 군동에는 천불산이 있는 것을 보고 병영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조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제 이곳에는 높이 10여m의 조산에는경관 좋은 수령이 약 300여 년 이상된 아름드리 귀목이 우거져 마을을 지키고 있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유신 장군은 서기 611년(17세), 단석산 중악 석굴에서 신검에 영험을 받아 이듬해 열박산에 들어가 기도하여 신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서기 617년(23세)부터는 경상남도 산청 왕산 기슭에 있는 양왕릉을 보살피면서 말타기, 활쏘기 등의 무예를 7년간 닦았다. 사서(史書)를 통한 김유신 장군의 충의 정신을 보자 서기 629년(35세) 8월에 신라 진평왕은 김용춘(金龍春)과 김서현(金舒玄)의 두 사람을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부 장군으로 임명하여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게 했다. 낭비성은 청주 지역, 파주 칠중성(七重城), 포천 반월성(半月城) 등으로 지목하나, 최근의 연구에서 7세기 초까지 포천 지역은 고구려 영토였고, 포천 청성산 반월성에서 발굴된 유물로 보아 낭비성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낭비성은 신라와 고구려가 뺏고 뺏기는 성이었다. 낭비성에 있는 고구려 군사들은 매우 용감하고 수가 많았다. 처음 싸움에서 신라 군사들은 죽은 사람이 많았고, 전세가 불리하여 사기가 꺾였다. 다시 싸우려 하지 않자, 김유신 장군은 아버지인 김서현 대장군 앞으로 나아가 투구를 벗고 꿇어앉아 “우리 군사가 패배했습니다. 소자는 평생에 충효를 맹세하였는데 싸움에 임하여 용맹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옷깃을 정돈하여야만 털옷이 바르고, 벼리를 당겨야만 그물이 펴진다는 옛말이 있사오니, 소자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즉시 말을 타고 천룡검(天龍劍)을 빼 들고 날개 돋친 범처럼 적진을 향해 들어가 적장인 고복(高福)을 치고 적군의 깃발을 빼앗아 오기를 세 번이나 했다. 이 모습을 본 신라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북을 울리고 고구려 군사 진영으로 쏜살같이 쳐들어가 5천여 명을 무찌르고,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낭비성 안에 있는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 우왕좌왕하다가 모두 성 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서기 632년(38세) 봄에 신라 진평왕이 붕어하고, 아들이 없어 맏딸인 덕만(德曼) 공주를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했다. 나라 사람들은 왕으로 추대한 덕만 공주를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 성조황고는 선덕여왕의 호(號)로 ‘성스러운 임금 큰어머니’란 뜻이다. 덕만 공주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는 성골(聖骨)이란 출신 성분에 의해 왕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서기 642년(48세) 가을 8월에 백제 윤충(允忠)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현재 합천인 대야성(大耶城)을 빼앗고 도독인 김품석(金品釋)과 죽죽(竹竹), 용석(龍石) 장군 등을 죽였다. 겨울에 선덕여왕은 대야성 싸움의 보복을 위해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요청하게 된다. 김춘추는 고구려로 떠나려 할 때 김유신 장군에게 말하기를 “나는 공(公)과 함께 나라의 팔다리가 되어 있는데 고구려에 갔다가 화를 입는다면 공(公)께서는 무심할 것입니까?” “공(公)께서 만약 돌아오시지 않으면 나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의 왕정(王庭)을 짓밟을 것입니다.” 라고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머금고 맹세했다. 두 사람의 결심이 삼국을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가 헤어진 뒤 김춘추는 사간(沙干)인 훈신(訓信)을 비롯한 호송군들과 함께 고구려로 떠났다. 김유신 장군은 현재 경산시 압량읍인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임명되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착하여 보장왕에게 군사의 도움을 요청하자 왕은 김춘추에게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디 우리나라 땅이니 돌려주면 군사를 주겠다.”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감히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보장왕은 김춘추의 말이 불손하다 하여 별관에 가두었다. 김춘추는 60일이 되어도 돌아가지 못했다. 김춘추는 몰래 신라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선덕여왕에게 알렸다. 왕은 김유신 장군에게 김춘추를 구하라고 명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보면, 김유신 장군은 3천 명의 군사들을 뽑아 놓고 “사람의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열사의 할 일이다. 대장부 한 사람이 죽기를 결심하면 백 사람을 당할 수 있고, 백 사람이 죽기를 결심하면 천 사람을 당할 수 있고, 천 사람이 죽기를 결심하면 만 사람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가히 천하를 좌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신라의 어진 재상이 고구려에 잡혀 구속당하고 있다. 신라에 화가 미칠지 모르는 일이다.” 라고 말하니 모든 군사가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곳으로 간다고 한들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김유신 장군의 충의는 모든 군사를 따르게 했다. 마침내 떠날 날짜를 정했다. 이때 고구려 첩자인 승려 덕창(德昌)은 사람을 시켜 고구려 왕에게 알렸다. 왕은 김춘추가 군사를 요청하러 올 때 김유신 장군과의 맹세한 말을 들은 바 있다. 또 첩자의 보고를 받고는 더 이상 김춘추를 억류할 수 없었다. 왕은 김춘추를 후하게 예를 갖추어 대접하여 돌려 보냈다. 한 알의 씨앗이 자라 거목이 되듯이 김유신 장군의 충의가 나라를 구하고 사람을 구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상을 볼 때 김유신 장군의 충의 정신은 본받을 만하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한민족문명진흥원․마한문화원(원장 이현채)은 지난 6월 29일 광주 5.18 기록관에서 ‘마한백제 천년사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마한과 백제가 1천년 동안 이명동체(異名同體)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백제는 마한이 스스로 건국하고 통치했던 나라였다는 점에 대해 주제발표와 토론 및 집담회를 벌였다. 동 학술대회는 전라도천년사와 관련해 수많은 논란이 제기되는 가운데 과연 마한과 백제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행사 주최자인 이현채 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양직공도』 백제국사의 첫 머리에 ‘백제는 래이마한에 속한 나라였다.[百濟舊來夷馬韓之屬]’고 기록하고 있다면서, 백제는 건국된 이후부터 멸망시까지 마한과 이름만 다른 같은 나라였다.”고 주장했다. [마한 백제1천사 연구 학술대회.1] 주제 발표자인 박동 박사(마한문화원 학술위원장)는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의 묘지에 백제 역사가 1천년으로 기록되어 있다면서, 이는 기원전 296년 연나라 진개의 공격을 계기로 건국된 마한의 역사를 서기 660년 멸망한 백제 역사와 합한 것(956년)이라고 주장했다. 1919년 낙양 북망산에서 출토된 「부여융묘지명」(682년 기록)에는 “양곡에서 처음 나라를 열어 영웅을 칭하며 할거하여 군림한지 1천년이 되었다.[啓祚暘谷稱雄割據一方跨躡千載]”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백제 멸망 후 “마한의 남은 무리들이 이리와 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고 요동 바닷가(遼海)에서 올빼미처럼 폭력을 행사했으며, 환산 지역에서 개미떼처럼 세력을 규합하였다...이에 공을 웅진도독으로 삼고 백제군공에 봉하였으며, 이어서 웅진도총관 겸 마한도안무대사(馬韓道按撫大使)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한 백제1천사 연구 학술대회.2] 박동 박사는 중원의 모든 사서에 백제의 시조는 구태(仇台)로 기록되어 있다며,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도 김부식이 “구태가 백제시조 중 한 사람이며, 자신은 누가 시조인지 모르겠다.”고 기록했다는 점을 들어 대륙을 망라한 백제 시조는 구태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서기 200년 북경 남쪽 대방고지 또는 마한고지에서 구태백제가 건국되었다면서 이는 마한과 실제로 한 몸을 이루던 나라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강단사학에서는 백제 시조와 관련해 온조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 왜 중원 사서에 구태가 시조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백제 사신이 수시로 드나들던 중원의 모든 사서에 시조가 구태라고 기록된 것은 백제 사신들이 자신들의 출자를 그렇게 밝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열도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마한의 명칭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구다라(큰나라) 백제가 바로 마한백제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전방후원분 등 묘제, 새발 문양의 생활토기, 나주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의 물고기 문양 금동신발과 흡사한 후지노키 고분 출토 물고기 문양 금동신발, 나주 영동리 고분 출토 인골의 DNA 분석 결과 등은 모두 열도가 영산강 나주 반남에 치소를 두고 있었던 월지국 마한백제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병도씨가 『일본서기』신공왕후 49년조에 입각해 한성 십제의 근초고왕이 가야 7국을 정벌하고 전남의 마한 침미다례를 도륙했다고 해석한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위라면서 가라 7국 정벌전쟁은 나주 반남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한 월지국 진왕이 벌인 포상팔국전쟁을 신공왕후기에다 옮겨다 적은 것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포상팔국전쟁은 209년과 212년에 벌어졌으며 나주의 보라국(保羅國), 즉 발라국(發羅國)이 주도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신공이 마한 진왕의 장수였던 목라근자에게 명령한다고 기록한 것은 고대 사회 군대의 지휘계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엉뚱한 기록으로 『일본서기』가 『백제기』 등을 참조해 짜집기된 사서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더 중요한 것은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대당평백제국비명」에 백제 멸망시 나·당연합군 장수들인 소정방과 조계숙의 직책이 각각 우이·마한정벌총사령관과 우이도부총관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구당서』와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신라 김춘추의 직책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이족은 산동 등주 일대의 토착세력으로 래이족과 함께 고조선을 건국한 구이의 대표세력이다. 이들은 영산강 유역과 산동성, 하북성 등지에 둥지를 틀었던 월지족과 동일한 부여족으로 마한의 핵심 씨족이었다. 그동안 사학계에서는 한강 유역에 위치한 강력한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켰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박동 박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 고대 문명은 수시로 범람하여 엄청난 뻘이 형성된 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강은 영산강에 비해 고대 문명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하였으며, 왕성의 기초인 주춧돌 하나 발굴되지 못해 유네스코에 등재되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했다면서, 실제의 백제는 공주와 부여 일대에서 영산강 마한 월지국의 지원을 받으며 중원의 대륙백제를 운영해왔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구당서』와 「흑치준묘지명」에 의자왕의 백제는 뻘의 나라(澤國)로 북경 남쪽의 요택에서도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부여융묘지명」에는 백제가 건국된 곳이 양곡(暘谷)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상서』요전에서 “{요임금이} 희중에게 명해 우이(嵎夷), 즉 양곡에 살게 했다”는 기록, 그리고 『사고전서』에서 ‘고조선은 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 등과 일맥상통한다. 즉 마한백제는 고조선을 승계한 나라로 영산강 유역에 근거를 두었고, 한반도의 공주와 산동성의 거발성[현 치박(淄博)시)] 등 두 곳에 왕성을 두고 있었던 연방국가였다. 실제로 『북사』 백제전에는 백제의 선대가 대대로 마한의 족속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태가 시조로서 왕성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공주)으로 부른다[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영산강 우이 마한 세력의 지원을 받아 나라를 운영하였으며, 실제로 중국의 다수 학자들도 백제를 우이족의 나라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민족문명진흥원․마한문화원은 연내에 ‘마한 월지국(月支國)의 성립과 발전’, ‘고조선과 마한의 역사를 품은 영산강 고대 문명’을 주제로 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해 마한백제의 정치적 위상을 올바로 정립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화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용인시박물관이 오는 20일부터 ‘의령남씨, 문예의 대가’ 기획전을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이번 기획전은 박물관 측이 마련한 ‘용인의 명가 시리즈’의 일환으로 용인 지역의 역사와 유명 인물인 약천 남구만을 비롯한 ‘의령남씨’ 일가 문인들을 소개한다. [3. 용인박물관이 개최하는 _의령남씨, 문예의 대가_ 기획전 포스터] 약천 남구만은 조선 후기 숙종 시대를 대표하는 문신으로, 안용복이 일본 ‘에도 막부’로부터 울릉도의 조선 영유권을 확인받는 공을 세웠음에도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적극 변호한 인물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용인시박물관과 의령남씨 종중 소장품 등 31건의 관련 유물을 선보인다. 이 가운데 박물관이 최초로 공개하는 남구만이 직접 그린 남씨의 시조 영의공의 초상화와 조선 개국공신 남재의 왕지(임명장), 남은의 유서, 남구만 친필 시문, 남구만 초상화, 남계우 편지, 남영로 시문은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문화재다. ‘의령남씨, 문예의 대가’는 20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내년 1월 13일까지 6개월 동안 진행된다. ‘용인의 명가 시리즈’는 용인특례시에서 대를 이어 생활한 명망있는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획됐다. 용인특례시에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분묘는 400기 이상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집성촌을 형성해 생활했던 조선시대의 전통에 따라 용인에는 다양한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박물관 측은 용인에서 생활한 명망있는 가문을 소개해 지역의 역사와 선조들의 문화를 시민들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한 활동을 펼쳐왔다. 용인시박물관 관계자는 “조선시대 다양한 유물과 이야기를 통해 의령남씨 가문을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획전을 마련했다”며 “가문의 역사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어 “관람객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이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기획전의 목표 중 하나다”고 덧붙였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안성시는 경기도지정문화재인‘안성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 지정(2023년4월28일)됐다고 밝혔다. 김보라 시장은 지난달27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청룡사에 지정서를 전달했다. 김보라 시장은“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문화재 지정서를 전달하게 되어 기쁘다.청룡사와 함께 문화재 보존과 활용을 위해 힘써 나가는 동반자로서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94cm,폭은52cm이다.관음상은 그동안 조선 전기에 조성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분석 결과 고려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룡사 관음전에 모셔진 금동관음보살좌상. 1]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화문을 화려하게 장식한 높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불신(佛身)은 어깨와 무릎이 좁은 편이고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를 하고 있다. 양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가슴과 무릎 위에 올려 하품중생인의 수인을 결하고 있다. 얼굴은 비교적 갸름한 편이지만 치켜뜬 눈매와 작은 코·턱·양 뺨에는 양감이 느껴진다. 가슴에는 원형의 화문 장식을 중심으로 세 줄의 수식을 늘어뜨린 세밀한 영락 장식을 표현했고,균형 잡힌 신체와 영락 장식 등 정교한 조각 기법 등 전반적으로 우수한 고려 후기 보살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청룡사 관음전에 모셔진 금동관음보살좌상. 2]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의 가장 큰 특징은 소위 변형통견식 착의법이다. 착의법을 보면 오른쪽 팔에 편삼을 걸치고 그 위에 편단우견의 대의를 양어깨를 감싸듯 입은 모습인데 오른쪽 대의 자락은 어깨에서 반달형으로 걸치고 그 한 자락이 겨드랑이로 돌아 다시 왼쪽 어깨 위로 걸쳐지는 형식이다. 즉 이러한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 위의 대의가 반달을 이루며 왼쪽 어깨로 돌아가는데 왼쪽 팔꿈치에서 깊은 홈의 오메가형 주름을 만들면서 어깨 뒤로 길게 흘러내린 것이 특징이다. 노출된 가슴의 아랫부분에는 수평으로 가로지른 형상의 승각기와 군의를 묶은 띠매듭이 보인다. 이러한 착의법은 현존하는 고려 후기 보살상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유형이다. 안성시는‘안성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의 효과적인 보존·관리를 위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 지정하고자2020년 연구조사 용역을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해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봤던 기존 인식과 달리 세부적인 표현과 양식적 특징을 비교한 결과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했다. ‘안성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안성시 소재 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1건,보물16건,사적1건,국가등록문화재2건,국가무형문화재1건으로 총21건이 늘어났다. 그중 청룡사는6건의 보물을 보유하게 됐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축만제’는 조선후기 수원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에 축조한 저수지로 1799년(정조23)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일련의 사업으로 내탕금 3만 낭을 들여 축조하였다. 이에 앞서 정조는 1795년(정조19)에 장안문 북쪽에 만석거(萬石渠))를, 1797년(정조21)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만년제(萬年堤)를 축조했었다. [축만제 저수지(일명 서호)] 대규모 수리시설과 둔전 개간이 크게 성공하자 "농가의 이로움은 수리(水利)만한 것이 없다"고 인식한 정조는 만석거와 만년제의 3배 규모에 달하는 축만제를 조성했다. 축만제의 규모는 문헌상 제방의 길이가 1천246척, 높이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돼있다. 제방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듯 아직도 고목들이 서 있다. 아울러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해 이곳에서 생기는 수입은 수원화성의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했다는 것을 보면 제방 아래 몽리구역(물이 들어와 관개의 혜택을 받은 곳)의 농지는 국둔전(國屯田)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수원화성 서쪽에 있어 서호로 불리기도 한다. 축만제의 가치는 2016년 ICID(국제관개배수위원회)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2016년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됐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뮤지컬 '멸화군'이 재연 무대로 관객을 찾는다. 세조 13년 대화재와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단 한 줄의 기록에서 시작된 팩션 '멸화군'은 실제 조선시대 정원 50명으로 24시간 화재 감시와 예방, 화재 발생 시 진압 등을 종합적으로 담당했던 국가 소방조직이다. 작품은 백성들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던 시대,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의문의 연쇄방화범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사명을 지키려 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뮤지컬 '멸화군' 캐스팅 /시작프로덕션 제공] 한양도성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화재에서 동료와 무고한 백성을 지키지 못하고 이후 더 완벽하게 불로부터 백성을 지키려는 멸화대장 '중림' 역에는 박민성, 조성윤, 고상호가, 금화군이었던 형을 화재로 잃고 형의 뒤를 좇아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평범한 삶을 회복하려는 '천수' 역에는 최재웅, 김민성, 이석준이 캐스팅됐다. 화재로 아버지를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 새로운 뜻을 이루기 위해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연화' 역에는 안유진, 김청아, 5년 차 선임 멸화군 '강구' 역에는 강동우, 구준모, 이기현이 출연한다. 초연 창작진이 다시 모인 '멸화군'은 의상과 무대 등을 보완하고 넘버를 개편해 한층 매끄러운 서사를 펼쳐낼 예정이다. 재난을 막기 위해 숙명과 사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영웅들을 그린 뮤지컬 '멸화군'은 6월 23일부터 9월 10일까지 유니플렉스 1관에서 만날 수 있다.20세기를 대표하는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가 오는 25일부터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오지 않는 고도를 한없이 기다리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한정적인 삶의 시간에서도 끝없이 기다림을 지속하는 인간의 아이러니를 나타낸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처럼 '굴뚝을 기다리며' 역시 해고노동자들의 '실존'을 위한 저항적인 행위로서의 기다림에 대해 말한다. [굴뚝을 기다리며 포스터 /극단 고래 제공] 작품은 굴뚝이라는 고공의 공간에서 기다림의 삶을 살아내는 '누누'와 '나나'라는 두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로, 그곳에 찾아오는 세 명의 방문자인 굴뚝 청소노동자, 청소 로봇, 심부름해결사 소녀를 통해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의 노동의 의미와 현존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공연 내내 언어유희와 놀이를 통해 실소와 폭소, 비극성과 희극성을 넘나들며 기술로 대체되는 인간노동의 문제와 동시대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노동 현실을 독특한 방식으로 증언하는 이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삶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일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우리의 '실존'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고민해 볼 수 있는 지점들을 담고 있다. 공연은 6월 11일까지 이어진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4.19 문화원(원장 김기일) 주최로 4월 26일 오후 2시 4.19기념혁명기념관에서4.19문화원창립 32주년 및 제3회 문화원의 날 기념식이열렸다. 김기일 원장은 기념사에서 미국제3대대통령토머스제퍼슨은"민주주의는피를먹고자란다!“고했습니다.그리고"불의가제도가될때저항은국민의의무가된다!”라고했습니다.63년전4.19민주혁명은학생들이주도하고국민들이뒤따르며민주주의권리를되찾고자목숨을걸고독재정권을무너뜨린최초의민주주의운동이였습니다. [제3회 4.19문화원의 날 기념식. 1] 1960년4월26일일제의잔재을청산하지못하고친일세력의등에업혀독재의길을걷던이승만정권은하야하였습니다.이땅에민주주의뿌리가내릴수있었던최초의사건이였고,정의와자유와민주의승리였습니다.이제우리에게주어진시대적사명은현대사의전환점이었던4.19민주혁명정신을되살리는것입니다. 그리고,전통의가치가존중되어야하고,왜곡된역사를바로잡아민족의평화통일의시대를열어가야하는데있습니다.그래서우리는4월26일을4.19문화원의날로선언하고기념하는것입니다.요즈음검찰공화국의사법권남용은민주적이어야할주권재민을기본조차지키지못하고있습니다. [제3회 4.19문화원의 날 기념식 2] 또한망국적외교참사와안보실종,그리고철없는젊은세대의무분별한'니뽄필(japanfeel)'찬양현상은63년전젊은이들의희생으로새겨진4.19혁명정신에부합하지못하고국민을더욱참담하게하고있습니다.오늘우리의민주주의를한단계더성숙하게한청년들의희생이지금우리에게어떠한가치와교훈으로다가오고있습니까? 우리는역사를베우기보다는역사에서베워야합니다.무등산에내리는빗물이바다에이르기까지분명한목표가있어야하듯속도와효율성이지배하는냉혹한논리보다는길이곡선이고더디게가더라도민주,자유,정의가숨쉬고모든생명을끌어안을수있는보람된길로4월혁명영령들의뜻을받들며한걸음한걸음나아가야하겠습니다.우리모두함께나아갑시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예천의 가야 고분군을 답사했다.경상북도 예천에도 가야의 무덤 양식이 많다.예천은 경상북도 북쪽 지역이다.대구에서 문경을 거쳐 예천으로 가는 중부내륙고속국도로 달렸다. 서기2023년4월 중순인데 고속국도변 산은 푸르다 못해 초록 물감으로 채색한 듯하다.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광경이 평안해 보인다.나들이 관광버스도 줄을 이었다. 가야의 여러 나라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따라 주로 서쪽 지역에 건국했다.상주시(尙州市)함창에 있었던 고녕가야도 낙동강의 서쪽 지역이다. [예천 대심리 도굴된 가야 고분, 촬영 서기 2023.4.16.(일)] 함창은 여러 고서에 고녕가야 지역이라 했는데 식민 사학자들은 함창 고녕가야를 지웠다. 함창은 경상북도 북쪽 지역이고 신라 땅이라서 가야 지역이 될 수 없다는 견해이다.어느 사학자는 경상남도 진주가 고녕가야라 했다.우리의 가야사를 부정했다.함창에서 동쪽에 있는 안동으로 연결하는 낙동강 위쪽에 예천이 있다.예천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 있는 내성천 위쪽에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저 멀리 동쪽에는 낙동강이흐른다.예천도 안동호로 흘러들어오는 낙동강의 서쪽 지역이다.상주에서 함창을 거쳐 예천으로 들어서면 예천군청이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집터에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군청 북쪽에는 해발373.6m인 봉덕산과 동쪽에 흑응산,서쪽에 봉화산과 백마산이 감싸고 있다.예천에도 가야의 무덤 양식이 대거 발견됐다.예천은 신라 지역이었기 때문에 가야 세력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예천군청사 바로 뒤편은 봉덕산 기슭이다.이 기슭에 가야 고분 양식인 무덤이 수십 기가 도굴당한 채 무덤 형태만 남아 있다.예천읍 대심리 무덤군 입구에는 서기2009년6월에 예천군에서 세운 안내판이 있다.안내판에는‘이 일대가1,500여 년 전 삼국시대의 옛 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대심리 고분군 지역이다.이 고분군은 예천의 역 사와 문화를 간직한 소중한 유산으로써 군민 모두가 보존해야 할 자산’이라고 쓰여 있다.안타깝다.소중한 유산이라면 어느 시대의 고분이고 유물은 어떠한 것이 출토되었는지를 더 상세한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밝힐 일이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이천시 창천동 현 이천시립도서관 앞에 자리를 하고 있는 이천향교. 그 역사만큼이나 고풍스런 멋을 지니고 있는 향교이다. 향교란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조까지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향학이라고 했다. 향교의 구성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으로 앞에는 교육을 하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뒤편으로는 공자를 비롯한 명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인 문묘가 있다. 이천향교는 조선조 태종 2년인 1402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곳으로, 망현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망현산을 아리산 혹은 위후산이라고도 부른다. [이천향교, 대성전 문을 활짝 열다 변인달이 처음 신축한 지 600년이 지나1] 변인달이 처음 신축한 지 600년이 지나 이천향교는 감무 변인달이 신축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이천이 도호부로 승격이 된 세종 26년인 1444년에는, 관헌인 교수 1인을 두고 학생은 90명이나 되는 큰 교육기관이었다. 권근이 지은 <이천신치향교지>에 의하면 1401년인 신사년 봄에 감무로 부임한 변인달이, 안흥정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직접 향교 터를 물색하고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변인달은 공무를 보면서도 틈을 내어 직접 관리감독을 하였다고 한다.향교의 홍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명륜당이 있다. 명륜당의 옆에 있어야 하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처음의 형태에서 많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명륜당의 뒤로 돌아가면 대성전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는데, 계단 우측에는 <동계승서계강(東階升西階降)>이란 비석이 보인다. [이천향교, 대성전 문을 활짝 열다 변인달이 처음 신축한 지 600년이 지나2] 즉 대성전으로 올라가려면 3단으로 구분이 되어있는 계단의 동쪽으로 올라가서, 내려올 때는 서쪽 계단을 이용하라는 뜻이다. 향교의 대성전을 드나들 때는 반드시 이 예의를 지켜야만 한다. 우리는 어딜 가나 이런 길이나 계단의 의미를 남다르게 부여하고 있다. 즉 길이나 문도 중앙의 것은 일반인이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활짝 열린 이천향교 대성전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경사진 곳에 터를 잡은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은 모두 3단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 한단 밑으로는 동무와 서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대성전으로 오르는 축대를 보면, 600년이 지난 이천향교의 역사가 한 눈에 보인다. 큰 화강암을 이용해 쌓은 축대는 보는 것만으로도 그 세월을 짐작할 수가 있다. 장대석으로 쌓아올린 계단이며, 축대, 그리고 기단 등이 고풍스럽다. 계단을 오르면 동무와 서무 앞에는 각각 '헌관위(獻官位)' '집사위(執事位)'라고 쓴 비석이 서 있다. 즉 문묘제향을 지낼 때 헌관과 집사들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배울 수 있는 곳이 이천향교다. [이천향교, 대성전 문을 활짝 열다 변인달이 처음 신축한 지 600년이 지나3] 4월 4일 이천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향교를 찾아갔다. 처음으로 간 것은 아니지만, 문화재란 그곳을 지날 일이 있으면 곡 잊지 않고 들여다본다. 그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 훼손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항상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이천향교, 대성전 문을 활짝 열다 변인달이 처음 신축한 지 600년이 지나4]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대성전 문이 활짝 열려있다. 전국에 있는 향교를 수없이 다녀보았지만 아직 대성전의 문이 열려있는 것은, 제향을 지낼 때를 빼고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걸음을 재촉해 관리를 하는 분에게 촬영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먼저 대성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천향교, 대성전 문을 활짝 열다 변인달이 처음 신축한 지 600년이 지나5] 이천 향교 대성전에는 모두 25명의 성현을 모시고 있다. 대성전 정면에는 중앙에 공자를 비롯해. 맹자와 증자 등을 좌우에 모시고 있다. 우측 벽에는 문정공 동춘당 송준길을 비롯해 10분을, 좌측 벽에는 문순공 남계 박세채 등 10분을 모시고 있다. 처음으로 들어가 본 이천향교의 대성전. 아마도 퍽이나 운이 좋았던 날이었다는 생각이다 [이천향교, 대성전 문을 활짝 열다 변인달이 처음 신축한 지 600년이 지나6] 어디를 가나 문화재란 일부만 보아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저 속속들이 살펴보아야 비로소 그 진면목이 보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본 이천향교 대성전. 이런 일이 있어 문화재 답사가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