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소방서장 한창완] 최근 경산지역에서 주택과 컨테이너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인명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주택화재는 일상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며, 최근 10년간 통계에 따르면 전체 화재건수의 약 18%를 차지하고 있고, 인명피해는 약 4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통계는 주택화재로 인한 인명피해의 위험성이 타 화재에 비해 월등히 높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택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시민들의 화재예방 안전수칙 준수 및 노력과 관심이 중요함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소방시설법 제10조 시행 이후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가 의무화되면서 주택화재 발생률이 1.5% 감소하고, 주택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10% 줄어든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시민들의 작은 관심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경산소방서는 새해를 맞아 주택화재 예방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소방서에서는 화재예방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화재예방 캠페인도 진행하고 있다. 이는 주택화재의 위험성을 알리고, 안전 수칙을 준수하도록 유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주택화재의 주요 원인인 부주의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시민들이 화재 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안전한 생활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주택화재 예방을 위한 우리 모두의 세심한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 소방시설을 제대로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등 시민들의 관심과 소방서의 노력이 결합된다면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관심이 큰 안전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산소방서장 한창완
[이천시 김경희 시장] 언제부터인가 이천에는 명품(名品)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명품 설봉공원, 명품 캠핑장, 명품 분수대 오거리 광장 등. 물론 사업 주체가 대중적인 홍보를 위해 이를 명명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천 시민은 물론, 우리 시를 방문하는 내방객들 사이에서도 명품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고 있다. 사실 이천은 유구한 역사와 함께 쌀, 도자기, 온천, 복숭아 등 전국 제일의 특산품과 세계 최고의 반도체 인프라를 보유한 경쟁력 있는 강소도시다. 하지만 수정법 등 중첩 규제로 좀처럼 발전의 활로를 모색하기 힘들다. 하지만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이제는 우리 스스로 발 벗고 나서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지금은 이천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된 설봉공원과 분수대오거리 추진에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필자는 평소 집 밖을 나가면 시민들이 쉴 수 있는 공원과 광장, 도서관은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빈부의 차이 없이 누구든지 쉬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이천 시민 모두에게 공통의 추억을 만들어 준다. ‘설봉공원’이 대표적인 예다. 이곳에 가면 시민 누구나 평등하게 여가를 보낼 수 있다. 세계의 유명 관광지를 가면 그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있다. 우리 이천시에는 새롭게 재탄생한 분수대오거리 광장이 있다. 서울 강남에서나 볼 수 있었던 미디어 파사드, 로마 트레비 분수를 연상케 하는 유럽형 분수, 주차장으로 시야를 막았던 도심 스카이라인과 만남의 광장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복하천 수변공원 캠핑장과 계획 중인 도심 숲, 둘레길이 조성되면 굳이 주말에 교통체증을 감수하며 다른 지역에 갈 필요 없이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여가를 보내고 힐링할 수 있다. 또한, 예술의 전당에서나 볼 수 있었던 유명 오페라와 뮤지컬, 콘서트, 다양한 장르의 대형 공연을 이제는 이천아트홀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시민들에게 고품격 공연문화를 향유시켜 줌으로써 명품 도시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려 주고 있다. 이천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전형적인 도농 복합도시로 전통과 첨단산업이 공존하며,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로 인적자원도 풍부하다. 단언컨대, 앞으로 이천은 품격 있는 명품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다. 이제 명품 도시로 가기 위해 남은 과제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교육인프라다. 현재 이천시가 경기형 과학고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다. 우리 시 교육의 백년대계와 미래 첨단·인재 양성의 중심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학고가 이천에 들어와야 한다. 2025년 이천시는 문화, 관광, 첨단산업,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대한민국의 명품 도시로 우뚝 설 것이다.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모임에서 부산에 있는「재한유엔기념공원」에 갔다.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 때 우방국의 젊은이 수천 명이 영면하고 있다. 이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의 무덤 앞에 숙연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우리는 참전국 국기가 게양된 곳으로 갔다. 유엔기 게양대 앞에서 한국을 위해 목숨 바친 용사들의 명복을 빌며 각각 국화꽃 한 송이를 바쳤다. 고개를 들고 게양한 각 나라의 국기를 보는 순간 제일 뒤편 오른쪽에 독일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독일 국기를 주목했다. 한국에 직접 전투병을 파병한 나라는 열여섯이고 의료진을 보낸 나라는 다섯 나라로 알고 있었는데 독일이 추가되었다. 왜 독일이 추가되었나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연유를 알아보았다. 독일은 왕권 국가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다. 히틀러는 다시 독일로 국호를 바꾸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평화협정인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도 패했다. 패전 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담당으로 분할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한 지역은 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으로, 소련이 담당한 지역은 공산주의 체제인 동독이 되었다. 1990년에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한 후 같은 민족으로서 강대국이 되었다. 한국도 평화통일로 더 발전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서독은 6•25전쟁 중에는 의료진을 파견하지 않았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긴 서독은 1953.7.27. 정전협정이 있기 몇 달 전에 자기들도 의료진을 파견하겠다고 유엔에 제안했다. 유엔에서는 서독의 의료진 파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휴전이 된 후에 서독은 자진해서 부산에 의료진을 도착시켰다. 그들이 치료하던 곳을 부산 시민은 서독병원이라 불렀다. 공식 명칭은 적십자병원이다. 일백여 명의 의료진이 1953년부터 5년간 30여만 명의 부산 시민과 피난민을 무료로 치료하고 약도 제공했다. 6천 명 이상의 임산부도 돌봐주었다. 그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그들의 봉사 정신이 지금도 빛나고 있다. 서독 의료진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는 최신 의료 장비를 그대로 우리나라에 기증했다. 또한 의학 지식도 모두 전수했다. 그들의 인류애가 나의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그후 한국은 독일의 위대한 의료정신을 빛내기 위해 통일된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2018.6.부터 재한유엔기념공원에 독일 국기를 게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공원은 유일한 유엔 묘지로 평화의 성지(聖地)다. 이러한 성지에 자기 나라 국기가 게양된다는 것은 큰 경사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은 폴란드에 아우슈비츠(Auschwitz), 헤움노(Chełmno) 등의 절멸수용소를 세웠다. 거기에 유대인들을 가두었다가 틈만 나면 죽이곤 했다. 독일군의 유대인 대우는 매우 잔인했다. 목욕탕으로 위장한 가스실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유대인들을 가두고 가스를 살포해 한 번에 수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였다. 후에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과를 한 것으로 보아, 그들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뒤늦게나마 사과를 한 것에 조금은 내 마음이 풀린다. 전쟁은 서로가 희생당한 사람이 많게 마련이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전쟁 트라우마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 국민이 평화의 성지에 자기 나라의 국기가 게양된 것은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것으로 본다. 2022.11.에 독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 내외도 재한유엔기념공원을 방문했고 계속해서 독일 국민이 단체 참배를 많이 오고 있다고 한다. 특히 독일 군인들이 참배를 많이 오는데 그들이 들어올 때의 표정은 어두운데 자기 나라 국기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환해진다고 한다. 독일은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64.12.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총리와 박정희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에르하르트 총리가 “한국은 산이 많은 지형인데 산업 발전을 하려면 일본과 손잡고 고속도로를 놓는 게 나라를 발전할 수 있다.”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거절하자, 에르하르트 총리가 “독일은 프랑스와 열여섯 번을 싸웠는데 그래도 전후에 양국은 손을 잡았다. 지도자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한다.”라고 했다. 독일은 패전국이었다. 독일의 부활을 위해 프랑스의 지원이 컸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국은 1965년 한일(韓日)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이 체결되자 일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라며 상식을 벗어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국은 일본의 지배에 의한 배상 청구권자금과 서독 차관으로 1970년 포항 종합제철소가 착공됐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으며, 포항제철이 생산한 철강 제품으로 ‘포니’ 자동차가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지도자는 소신이 있고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숙한 마음으로 유엔기념공원을 계속 둘러보았다. 미국은 6•25전쟁 때 전사자가 수만 명이었다. 이곳에 묻힌 병사가 적었다. 미국은 전사자가 발생하면 그들의 유해를 자국으로 가져가서 봉안한다고 했다. 이곳에 묻혀 있는 40여 구는 전쟁 후에 한국에서 생을 마감한 병사들이었다. 한국에서 사망한 미군들이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거나 가족들이 한국 땅에 봉안하기를 원하는 경우라 한다. 자국의 전사자를 모국의 영토에 묻히도록 하는 미국의 병사 사랑 정신도 본받을 만하다. 미군들의 부부 합장묘가 다섯 쌍 있는 것은 부인이 모두 한국인이었다. 우리는 현재 한국을 도운 임들이 있었기에 자유롭고 발전한 한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희생과 봉사 정신이 고마움으로 내 가슴에 새겨진다. 오늘따라 이 공원에 핀 붉은색의 겹벚꽃이 임들의 고귀한 정신을 한층 더 빛내 주는 듯하다. [부산 재한유엔기념공원,]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광주 전남 가정평화 지구 조병석 회장] 5월 가정의달을 맞아 가정평화협회 광주 전남지구(회장 조병석)는 회원 100여 명과 함께 지난달 전국적인 행사가 4/27-28, 문경리조트에서 '한국가정평화협회 FPA지도자 한마음축제'가 열렸다. 저출산, 고령화 대한민국의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시점에 열린 이번 행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층이 함께한 동심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듯한 재미있는 분위기로 모든 세대, 연령층이 참여한 행사여서 서로가 공감대가 형성되어 더더욱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행사였다. '가정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는 계몽슬로건으로 가정의 위기를 타파하자는 어느 지도자의 소감발표는 제2의 새마을운동 정신으로 전국민이 함께 극복해 가자는 말처럼 의미있게 다가왔다. 내 가정부터 참된 가정을 꾸려 주변 이웃에 실천하자는 홍익인간 정신을 살려 한국형 가족주의의 근본을 되살리자는데 있다. 한국인의 정체성, 홍익인간 정신을 실현해 나가는 가정 이상을 올바로 세워 글로벌 가족공동체로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의 큰 이상은 우리가 노력하고 실현해 가야 하는 과제다. 세계를 선도하고 리드하는 정신문명 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우뚝서서 가기위해서는 나 자신과 가정을 둘러봐야 하고 '가화만사성' 한자어를 늘 되새겨 봐야 한다 이제, 가정가치회복운동의 큰 깃발을 올리고 올바른 가치관 정립으로 결혼.성, 가정에 대한 정립과 축복된 가정 만들기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그리고, 가족 속에 나 자신의 정체성과 가정의 소중함을 어린 자녀에서부터 가르치고 가정 행복의 아름다움을 사회적으로 더 드러나게 해야 한다. 또한, 모범적 부부.부모, 자녀 발굴하고 칭송해 주는 사회적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 국가 사회발전은 가정평화로부터 온다는 단순하고 평범한 이슈를 대중적인 사회화 운동으로 확대해 가는 K- 가족 축제 한마당으로 진일보해 가기를 희망해 본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문학 단체에서 대구에서 먼 거리에 있는 충남 태안군 천리포수목원에 갔다. 수목원과 접해 있는 천리포 해변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무인도 닭섬을 보았다. 우리나라 남과 서해안에는 많은 섬이 있다. 각 섬에는 나름대로 이름이 붙어 있다. 특히 닭의 볏처럼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무인도 닭섬이 여러 개 있다. 그중에서 천리포 해변에서 보이는 닭섬은 거북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닭의 볏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은 닭의 볏처럼 생겼으므로 주로 닭섬이라 부른다. 닭섬 서쪽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도 전한다. 나는 이곳을 낭새섬이라 들었다. 수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미국에서 한국에 귀화하여 천리포수목원을 조성한 밀러(Call Ferris Miller)가 섬 낭떠러지에 집을 짓고 사는 ‘바다직박구리’인 낭새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낭새섬이라 불렀다고 했다. 천리포 해변에서 닭섬까지는 약간 떨어져 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는 해변에서 닭섬까지 바닷물이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직접 눈으로 바닷물이 좌우로 갈라져 모래사장이 드러나는 광경은 신기했다. 달의 인력에 의한 밀물과 썰물의 현상이 규명되기 전까지는 이곳 주민 모두가 이곳에도 신통한 힘이 존재해 있으리라 믿었을 것 같았다. 오늘은 닭섬과 천리포수목원 사이를 바닷물이 꽉 채워져서 바닷물 밑이 어떠한 모습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평소처럼 평범한 바다의 모습으로만 보인다. 맑고 푸른 바닷물의 파도 소리는 나의 내면을 뽑아내려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밀려 나가는 파도에 평소 불쑥불쑥 올라오는 부정적인 마음과 생각을 훌훌 던져 버리게 한다. 마음이 정화된다는 것은 이러한 느낌인지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닭섬에 살았다는 낭새의 모습이 궁금했다. 낭새의 수컷은 등, 목의 앞쪽, 위쪽 가슴은 잿빛이 도는 파란색이고 가슴 이하 아랫면은 진한 밤색이다. 암컷은 수컷보다 옅은 밤색의 바깥꽁지깃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닭섬에 직접 가 볼 수 없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멀리서 바라볼 기회가 주어져서 이 또한 즐거움이 채워진다. 낭새는 주로 해안 절벽에 살고 내륙으로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암수 단독으로 생활하고 각자 세력권을 형성한다고 한다. 번식기에는 계속 지저귀며 수직으로 날아올라 과시하는 행동을 한다니 동물의 수컷이 과시하는 행위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낭새는 자기들 영역에 사람이 침범하면 ‘삐이익~~, 삐이익~~’ 소리를 내면서 경고한다고 한다. ‘저리 가라’는 뜻의 울음소리로 들린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예쁜 소리를 낸다고 한다. 낭새들의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다. 간혹 산행하다가 보면 자연의 경치와 청명한 새소리에 내 마음이 황홀감 속으로 빠질 때가 있다.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이 즐겁고 힐링 되는 듯했다. 이럴 때는 나도 그 새의 소리처럼 내면 가만히 있다가 똑같은 소리를 내어준다. 그 새의 이름과 소리의 뜻은 모르지만, 새와 함께 자연 속에 동화되는 느낌이었다. 바다낚시를 좋아하는 사람 4명이 썰물 때 닭섬에 들어가 낚시하다가 밀물에 갇혀서 고립되었다는 보도는 가슴을 조이게 했다. 얼마 후 태안해양경찰서 구조대에 의해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는 소식은 나의 가슴을 안정시켜 주었다. 나도 오래전 썰물 때 남해 해변 바위 위에 선글라스를 두고 나온 후 생각이 났을 때는 선글라스 둔 자리가 흔적도 없이 바닷물이 차 들어와서 안타까운 일을 경험했다. 소리 없이 밀려오는 밀물의 힘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단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힘 앞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도 현명한 삶인 것 같다. 닭섬에 낚시꾼과 해산물 채취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낭새가 날아간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생태계를 지키는 방법일 것이다. 닭섬은 천리포 해변에서 보면 바다에 조그마하게 떠 있다. 닭섬과 닮은 뭍닭섬도 있다. 뭍닭섬은 천리포 해변 남쪽에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뭍닭섬이라 부른다. 뭍닭섬 가장자리 해상에 덱(deck)이 설치되어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섬의 산책로 중간쯤에 있는 출렁다리는 산책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한 바퀴 도는데 바다의 풍광과 싱그러운 수목의 향기를 맡으면서 가볍게 산책할 수 있었다. 동료 몇 명과 뭍닭섬을 한 바퀴 산책하고도 출발 시간이 남았다. 천리포 해변에서 한 동료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에 도착해서 닭섬에 들어가 갯벌 체험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갯벌 체험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바다 생물을 채집할 좋은 기회다. 태안의 갯벌은 주로 바닥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곳이 많다. 바닥이 단단해서 바지락, 동죽조개, 서해비단고둥, 갯고둥 등이 주로 잡힌다. 태안의 갯벌은 찾는 이들에게 체험의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밀물 때 바닷물로 덮여 있다가 썰물이 되면 육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썰물 때 바다 깊은 곳까지 가서 갯벌 속에 숨어있는 고둥이며 조개 등을 자녀들과 직접 채취할 수 있는 체험은 부모와 자녀 간의 정을 두텁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천리포 해변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지난날에 가졌던 욕망, 이기심, 불친절 등 마음의 사진들이 한 장, 두 장 떠 오른다. 이내 바다가 삼킨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충북 진천에는 돌로 만든 농다리(籠橋)가 있다. 진천에서 볼일을 마쳤는데 동료 한 사람이 진천읍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 년된 농다리에 가 보고 싶다고 한다. 어떠한 다리인지 궁금하여 나의 승용차는 농다리로 향했다. 우리는 잠깐 사이에 농다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농다리까지는 지척의 거리라서 걸음이 가벼웠다. 좁은 길옆에 있는 「농다리유래비」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농다리는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세금천(洗錦川)에 축조된 석교로써 사서(史書)인 『상산지(常山誌)』와 『조선환여승람』에 축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농다리를 놓기 전 추운 겨울 어느 날 친정아버지의 죽음으로 다리가 없는 세금천을 건너려는 아낙이 있었다. 임 장군은 아낙의 효심에 감동하여 말을 타고 돌을 날라 농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농교라는 용어는 돌들이 대바구니처럼 얽히고설켜 있다고 해서 대바구니 ‘농(籠)’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진천군 향토지 『상산지』에 보면 농다리는 진천읍에서 남쪽 방향 4km 지점에 있는 세금천과 가리천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다리다. 고려 초엽에 굴티마을에 사는 임씨(林氏) 장군이 음양을 배합하여 자줏빛 돌로 축조했다. 별자리 28수(宿)에 따라 수문 28칸으로 만들어 1개의 상판석으로 이어 하나의 활(弓)이 뻗쳐 있는 것처럼 축조했다. 이미 오래되어 4칸이 매몰되어 현재는 24칸이라고 했다. 유래비 바로 옆에는 2008년 11월에 세운 「농다리원형복원사적비」가 있다. 「사적비」에는 28칸을 모두 복원했고, 28수는 신비력을 내포하고 있는 경성(經星)의 수라고 한다. 경성은 천문학에서 별자리를 이루는 항성을 말한다. 이 항성을 대표하는 별자리인 28수는 제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임 장군은 28수의 별자리를 생각하여 농다리를 만들어 소원을 빌게 하는 기도 도량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천문학자들은 별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별을 행성이라 하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과 해와 달을 합쳐서 7정(七政) 또는 7요(七曜)라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일, 월, 화, 수, 목, 금, 토로 요일 이름이 되었다니 천문학자들의 지혜에 새삼 놀랐다. 동료와 「농다리유래비」, 「농다리원형복원사적비」를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눈앞이 확 트인 세금천에 걸쳐 있는 기다란 농다리가 펼쳐졌다. 농다리 앞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생거진천’이란 글씨를 큼직하게 배치해 두었다. 처음 보는 문구에 매료되었다. 생거진천(生居鎭川)과 함께 ‘사거용인(死居龍仁)’이 사용되고 있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유래가 몇 가지 전해지고 있었다. 진천에는 옛날부터 물이 많고 평야가 넓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풍수해가 없어 농사가 잘되는 고장이므로 생거진천이라 했다. 용인은 산수의 경치가 아주 좋고 사대부가의 유명한 산소가 많으므로 사거용인이라 불렀다고 한다.다른 이야기로는 옛날에 같은 이름과 생년월일을 가진 ‘추천석’이 진천과 용인에 살았다. 진천에 사는 추천석은 마음씨가 착한 농부인데 저승사자의 실수로 용인의 추천석이 아닌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왔기에 다시 돌려보냈다. 이미 장사를 지냈기 때문에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들이고 그 시신에 진천의 추천석 영혼을 넣어 환생시켰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죽어서는 다시 환생하여 용인에 살았다고 하여 생거진천 사거용인라 한다고 했다. 농다리 위로 걸었다. 자줏빛 색깔의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교각을 쌓아 올렸다. 교각을 쌓으면서 석회나 시멘트 없이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조상의 지혜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교각과 교각 사이에 약 1.5미터 정도의 기다랗고 무늬가 있는 상판석을 얹어서 통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었다. 때마침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농다리 위를 건너는데도 서로가 질서를 지켜가며 웃는 표정으로 상대방이 살짝 건너길 기다려 주는 모습이 농다리를 더 기억하게 만든다. 농다리 교각 위에 걸친 기다란 상판석 옆으로는 좌우에 공간이 있다. 다리 위로 오가는 사람을 피해 잠시 교각 위에 앉았다. 교각 사이를 지나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니 임 장군이 고장 사람들을 위한 정신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다리를 오가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농다리가 높아서 어른도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 정도였다고 하나, 지금은 하천 바닥이 높아져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강물 줄기가 힘차게 흐른다. 진천의 기상을 연상하게 한다. 농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길 따라 낚시하는 사람의 여유로움은 농다리와 어우러져 시 한 수라도 지어야 할 듯하다. 농다리를 건너면 맞은편 높은 곳에 있는 농암정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덱(deck)이 잘 설치되어 있고 주위에 있는 화초와 나무는 오르는 길을 마음 편하게 한다. 덱 주위로는 따뜻한 봄 햇살을 머금은 벚꽃이 활짝 피어 목화꽃처럼 보인다. 농암정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세금천의 풍광은 구포 다리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는 만큼 널찍하고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동쪽에 있는 초평호도 한눈에 보인다. 초평호를 가로지르는 푸른색의 긴 하늘다리는 천상의 세계로 연결하는 듯하다. 농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길옆에는 진천군과 관련 있는 역사 인물들의 명패석이 인상 깊었다. 독립운동가 신팔균,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 조선의 문인화가 이하곤, 『여지승람』의 증보 편찬자 최석정, 가사 문학의 대가 정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장군 김유신(흥무대왕) 등이었다. 농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세월의 향기가 있는 곳이었다. 거대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았다. 순수하고 소박했다. 다리 하나에도 28수라는 천문학을 접근하여 축조한 임 장군의 주민 사랑 정신이 지금도 빛나고 있다. 농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소원 성취는 지금도 계속되기를. [진천의 농다리]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충북 진천군에는 신라가 적군을 방어한 최전방 산성인 도당산성(都堂山城)이 있다. 이 산성은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의 도당산과 행정리에 걸쳐 있다. 도당산성으로 오르기 위해 진천읍에 있는 길상사(吉祥祠)로 갔다. 길상사에는 김유신(흥무대왕)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흥무전(興武殿)이 있다. 흥무전 남쪽 담장 밖으로 나가면 바로 도당산성으로 연결된다. 현재 진천군인 만노군 태수 김서현은 김유신(흥무대왕)의 아버지이다. 만노군 서쪽은 백제군이, 동북쪽은 고구려군이 마주하고 있었다. 적군을 막아 내기 위해 김서현 태수는 길상사 뒤쪽 해발 약 190m의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7~9부 능선을 따라 테뫼식 석축 산성을 축조했다. 이 산성은 진천읍 서쪽의 낮은 구릉지에 축조하여 넓은 평야 지대를 이루는 진천 지역의 외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전설에 의하면 도당산성은 김유신이 하루아침에 축성했다고 하고, 당나라의 소정방과 함께 고구려 방어를 위해 이 성에 주둔했다고 전한다. 하루아침에 축성할 수는 없으나 아버지인 김서현 태수를 도와 빨리 축성해서 적군의 침략을 막았다는 뜻으로 전설이 된 것 같다. 김유신은 진천에서 태어나 15세에 서라벌로 이사했다. 어떤 이는 도당산성을 만노군의 치소(治所)였을 것으로 추정하나 김서현 태수의 치소는 김유신의 탄생지인 진천읍 상계리로 고증한다. 산성의 축조 시기가 나타나는 문헌은 보이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천현」조에서 도당산성은 현의 서쪽 3리(약 1.2km)에 있고 돌로 축조했다고 한다. 그 둘레는 1,836척(약 570m)이고 성안에 우물이 2개소가 있었으며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실존한 산성이다. 현지를 직접 가서 보니 산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평면 방형에 가까우나 동벽, 남벽, 서벽은 성 안쪽으로 휘어들어 왔다. 북벽은 성 밖으로 약간 둥글게 내밀었다. 또한 서남, 남동, 동북 모서리의 3곳은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곳보다 많은 석재로 높게 축성하여 곡성(曲城)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서남쪽 모서리는 특히 밖으로 많이 돌출했고, 4m 높이로 비교적 높게 쌓았다.『디지털진천문화대전』에서 산성의 둘레는 실측 결과 823.5m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산성의 동서 방향과 남북 방향의 중간 폭은 각각 약 180m라 한다. 지금은 지상의 성벽이 거의 붕괴되고 성벽 안쪽을 따라 산행로가 있어 진천 주민의 체력 향상에도 한몫한다. 성벽은 지하에 매몰된 부분도 많이 있어 발굴하면 성벽의 원형이 부분적으로 노출될 것으로 추측된다. 성벽 축조에 사용된 석재는 채석 과정에서 대충 다듬은 판석을 포개어 외벽만을 가지런히 하여 쌓아 올렸다. 남쪽 성벽의 밖에는 해자(垓子)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성벽의 기단에서 5m 정도 떨어진 곳에 성벽을 따라 폭 5m 정도의 구덩이를 파냈다. 해자 밖으로 토석재의 무더기가 있어 마치 이중의 성벽처럼 보인다. 산성의 입구에 해당되는 동벽은 남북의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중앙부는 1927년에 김유신의 위패를 봉안한 길상사를 지으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길상사 내의 흥무전 삼문 밖의 축대는 길상사 건축 때 쌓은 것이나 위치상으로는 산성의 동벽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지(門址)와 수구문지(水口門址)는 현재 길상사로 인하여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길상사의 삼문(三門)이 세워진 곳에 문지가 있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물이 2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찾을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길상사 바로 남쪽에 돌로 잘 조성한 우물이 있다. 오늘도 물이 흘러나오고 있어서 그 당시 물 걱정은 없었을 것 같다. 이곳이 옛 우물터의 하나로 추정된다. 도당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붕괴했으나, 성안에는 평탄한 대지가 곳곳에 있다. 평평한 대지에서 기와 조각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건물지로 추정한다. 출토 유물은 토기와 기와 조각이 대부분인데,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진천 역사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라 생각한다. 김서현 태수와 그의 아들 김유신 장군의 호국정신이 있었기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 도당산성은 지금도 그들의 정신을 말해 주고 있다. 흥무전 앞쪽에 있는 커다란 겹벚나무 한 그루가 흰색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기상을 보는 듯하다. [도담산성과 길상사]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영화 「파묘」의 관객 수가 천만 명을 돌파하고 있다. 보고 싶은 충동에 이끌렸다. 파묘는 묘를 옮기거나 고쳐 묻게 할 때 이루어진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어느 가정에서 묘를 잘못 써서 이장(移葬)하여 더 좋아졌거나, 더 나빠진 경우로 생각했다. 잠시 줄거리를 보자. 무당인 ‘화림’과 ‘봉길’은 울음을 멈추지 않은 거부(巨富) 박지용의 장손(長孫)인 아기를 봐 달라는 의뢰를 받고 미국 LA의 병원에 도착했다. 아기가 머리에 센서를 붙이고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이 파묘의 실마리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승과 저승을 드나드는 사람을 우리는 무당이라 부른다. 화림과 봉길을 부른 박지용은, “형이 정신 병원에서 죽고, 자신은 눈을 감으면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목을 조르는 병이 시작된다.” 라고 하면서 기이한 병이 대물림되고 있다고 한다. 화림은 병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림자가 보였는데 박지용의 조부 그림자라 말한다. 박지용은 깜짝 놀란다. 지용의 놀람 속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는 듯하다. 화림은 조부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했다. 박지용은 풍수사 상덕과 장의사 영근에게 비용을 5억이나 주고 이장이 아닌 파묘해서 관째로 화장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필이면 왜 관째냐? 조금 전 박지용이 놀란 표정과 연계가 되는 듯하다. 상덕과 영근은 묘터를 확인하기 위해 강원도 북쪽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보국사가 나오고 뿌연 안개 속에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린다. 불길한 예감이 전해진다. 산 정상 부근에 묘가 있고 볼품없이 방치된 모양이 섬찟하다. 묘 옆에는 큰 고목이 한 그루 있고, 그 주위로 여우 떼가 울면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굴을 파는 습성을 가진 여우가 있는 곳에는 무덤 자리를 택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심상치 않다. 묘 앞에 있는 비석에는 이름이 없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숫자만 보인다. 상덕은 묘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파묘를 못 하겠다고 하나, 화림이가 끼어들어 대살굿과 파묘를 동시에 진행하자고 제안한 후 파묘를 결정한다. 화림의 대살굿 광경은 보는 내내 저러다가 실제로 빙의되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다. 한참 파묘 진행 중 일꾼들이 찾아낸 관을 상덕 일행은 화장터로 바로 운반한다. 일꾼들은 파묘 자리에 뭔가 돈 될만한 것을 찾는다. 그때 땅속에서 머리가 시꺼먼 털로 덮인 붉은 뱀 한 마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공포감이 있으나 점점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일꾼 한 사람이 뱀의 허리를 자르니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여자의 얼굴이 드러난다. 뱀은 일본의 요괴 중 하나인 사람을 잡아먹는 ‘누레온나’다. 괴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일꾼들이 불안한 표정을 짓는데 갑자기 돌풍과 함께 폭우가 쏟아진다. 상덕 일행은 비 오는 날은 화장을 안 한다면서 인근 고성 군립병원 영안실에 관을 보관한다. 영안실에 있는 관을 누군가 몰래 여는 것을 봉길이가 목격하는데 뭔가 화림이를 관통해 지나갔다고 한다. 무당의 눈에는 혼령을 볼 수 있다니 신기하다. 화림은 코에서 코피가 뚝뚝 떨어진다. 조부의 혼령이 박지용의 식구들을 죽인다는 이야기에 화림은 혼령을 휘파람으로 다시 영안실로 부른다. 영안실에 있는 봉길이에게 들어간 혼령은, “100년을 무덤 속에서 그렇게 소리쳤는데 아무도 꺼내주지 않아서 증오만 남아 가족 핏줄들 전부 찾아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서울 호텔에서 묶고 있는 박지용에게 간 상덕은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목이 완전히 180도로 뒤틀리며 바닥에 꼬꾸라진 후 병원에서 사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상덕은 급해서 파묘한 관을 바로 화장한다. 관이 불에 무너져 내리자, 그 안에 있던 유해는 불타고 일제로부터 받은 훈장과 보석들은 그대로 보인다. 유해가 없어지자, 미국 병실에 있는 장손인 아기와 식구들도 건강을 되찾는다. 화장을 함으로써 조부의 혼령이 편안한 곳으로 간 것 같다. 상덕은 파묘했던 곳을 홀로 다시 찾아가서 파묘 바닥을 더 파고 훑는데 나무관 일부가 드러나 화들짝 놀란다. 정체불명의 관이 수직으로 하나 더 묻혀 있었다. 첩장이었다. 상덕 일행이 끄집어 낸 수직관을 보국사 창고로 옮기고, 상덕은 박지용의 고모에게 아버지는 친일파였고 묘터는 일본인 기순애 스님이 잡아 준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박지용 조부는 친일파로서 거액의 돈을 모은 것 같다. 화림이 보국사 창고에 갔을 때 수직관 속에 있던 오니(요괴)가 봉길을 해치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간 오니는 몸이 불에 휩싸여 하나의 거대한 도깨비불로 변하더니 하늘로 솟구쳐 빙빙 돌다가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봉길이가 치료한 병원에 간 상덕의 눈에 벽에 걸린 사진 액자가 들어온다. 액자 아래쪽에 ‘한반도의 척추’라는 제목에 눈길이 꽂힌다. 박지용이 죽기 전에 했던 말이 스친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무언가 깨달은 상덕은 보국사로 가서 창고 안에 도굴꾼들이 남긴 풍수 표식이 그려진 책을 펼친다. 일제강점기 때 백두대간의 특정 지점에 빨간 점들을 표시한 한반도 고지도, 팔괘와 오행의 그림을 발견한다. 파묘한 자리가 범의 허리임을 알고 그곳에 쇠말뚝이 박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즉 수직관 속에 들어 있던 오니가 쇠말뚝이었다. 그래서 관을 수직으로 묻었다는 연상이 된다. 장재현 감독의 아이디어에 박수를 보낸다. 쇠말뚝은 일제감점기 때 일본인들이 한국의 명당에 박아 두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일본 스님인 기순애가 친일파인 박지용의 조부 묘터를 험한 곳으로 추천해 주었는지 의문이 갔으나, 도굴꾼으로부터 쇠말뚝을 보호하고 한반도의 정기를 끊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4명의 주연은 겨울이 지나고 각자 평소의 삶으로 돌아간다. 김고은(이화림)과 이도현(윤봉길)은 실제 무당처럼 연기하는 모습에 찬사를 보낸다. 김고은은 무당을 찾아가서 배웠다니 열정이 대단하다. 최민식(김상덕)은 풍수사로서 그 이미지가 적격이었고, 푹 익은 연기자였다. 장의사 유해진(고영근)도 연기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주연들을 실제 항일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사용한 것에 그 의미를 더 부여하고 싶었다. 2024년 2월 22일 개봉한 「파묘」는 장재현 감독으로 미스터리한 공포영화였지만 나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일본 주술사가 한반도의 척추로 불리는 태백산맥의 한 곳에 일종의 오니(쇠말뚝)를 심어 둔 것이 원흉이었고, 친일 행위에 가담한 일제강점기를 조준하고 있었다. 일본 주술사가 박아 놓은 오니를, 독립운동가들은 그 원흉을 제거하고자 노력했다. 「파묘」는 나의 애국심에 더욱 불을 지폈다. [파묘 관객 천만 돌파 기념 스페셜 포스터]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돌아가신 조상은 후예(後裔)를 사랑한다. 후예가 조상을 기리고 훌륭한 점을 거울삼아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꿈속에서 만난 조상이 후예를 위해 가르침을 준다는 이야기는 가끔 듣는다. 조상이 후예를 위해 애쓴 경우를 보자. 꿈은 나의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 상황의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의미가 담길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지만, 꿈속에 담긴 의미를 탐색해 보고 메시지를 삶에 적용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 번은 꿈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나타나 나에게 선물을 주셨다. 꿈이 깬 후 어머니로부터 어떠한 선물을 받았는지는 기억이 없었다. 그 물건이 확실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좋았다.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 1] 꿈에 부모님을 만나면 행운이 따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서 평소에 관심이 없는 로또복권 열 장을 샀다. 로또복권은 한 장에 수억 원 이상이 걸려 있어서 희망을 품고 일주일을 즐겁게 생활했다. 당첨 발표가 있었다. 한 장도 당첨되지 않았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부모님의 환한 모습과 돌아가셔도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 모습에 일주일 내내 복권의 당첨 기대감과 함께 컨디션 좋게 생활했다. 부모님은 내가 컨디션이 안 좋은 모습을 보시고 기력을 주신 것일까? 생활에 활력을 찾을 수 있었다. [▲경주 흥무대왕 2] 한편, 조상이 후예의 죄 없는 죽임을 당한 경우를 참다못해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나와, 자기보다 더 윗분 조상에게 하소연한 경우가 있었다. 신라 제36대 혜공왕 시절, 779년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 장군 무덤에서 일어났다. 회오리바람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다.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또한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의 군사가 뒤를 따라 신라 제13대 미추 이사금 능으로 들어갔다. 미추 이사금은 신라에서 김씨 왕으로는 처음이다. 김유신 장군은 가야계 김씨이나 신라계 김씨와는 동성(同姓)이다. 그래서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에게 가서 하소연한 듯하다. 잠시 후에 능 속에서 우는 소리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크게 들렸다.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지키며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을 잠시도 가볍게 하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 770년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는데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군신들이 저의 공훈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힘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한단 말이오. 공은 전과 같이 노력해 주시오.” 김유신 장군이 세 번을 청했으나 미추 이사금은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들어주지 않은 청이지만 회오리바람은 하는 수없이 이내 돌아갔다. ▲경주 흥무대왕릉 혜공왕이 회오리바람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바로 상대등 김경신(金敬信)을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 보냈다. 김경신은 사죄하고, 혜공왕이 김유신 장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취선사는 경주에 있었던 절로 지금은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이 절은 김유신 장군이 평양을 토벌한 후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신라시대 30결은 오늘날 약 14만 평이다. 거대한 땅을 가진 취선사가 보존되지 않았다니 후예들이 조상을 기리는 정신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세력에 의해 소멸하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은 전장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적군을 물리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또 적군이 신라를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은 다시 전장으로 갈 것을 명했다. 집 앞을 지나 저 멀리서 하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여 마시면서, “우리 집 물은 여전히 옛날 맛 그대로구나!” “대장군께서 이러하신데 우리가 어찌 골육과 이별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모든 병사의 사기가 충천하여 곧장 적진으로 나아가 적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이토록 나라를 위해 한평생 몸 바쳐 왔는데, 후예가 죄없이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조용히 있었다면 김유신 장군이 아니었을 것 같다. 죄없이 죽임을 당한 후예는 혜공왕 6년, 770년 8월에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역하다가 처형당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김융으로 추측한다. 김융의 반란 동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김유신 장군의 적손(嫡孫) 윤중(允中)이 성덕왕 때 일반귀족들로부터 따돌림당했던 것으로 보아 김융의 반역도 그러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미추 이사금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 장군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다. 신라 사람들은 미추 이사금의 덕을 기리며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추 이사금 능의 서열을 오릉(五陵)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불렀다고『삼국유사』「미추왕과 죽엽군」조에 전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은 국가와 후예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도 김유신 장군(흥무대왕)을 기리는 사당은 전국에 10개소가 넘는다. 인간으로서 미덕과 가치를 쉽게 외면하려는 요즈음 조상의 산소 돌보기도 게을리하는 경우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나를 있게 한 근원이 조상이다. 조상을 기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돌아가신 조상이지만 후예를 사랑하는 마음은 꿈속이든 설화로 전해지든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조상의 혼령님은 어디에선가 환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이천시 안전총괄과 최인식 자연재난팀장] 아침 출근길 불어오는 바람에 이젠 제법 따스한 봄 향기가 묻어난다. 이 순간 재난업무 담당자는 만감이 교차한다. 지난 10월부터 겨울철 재해대책(‘23.11.15 ~ ‘24.3.15)을 준비하면서 아무 피해 없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원했다. 분주하게 준비했던 여러 일들이 떠오르며 이제는 다가오는 여름철을 준비하면서 지나간 겨울철 재해대책을 고찰해 본다. 겨울철 실질적인 사전 대비는 10월부터이다. 구조적 대책과 비구조적 대책을 병행하여 철저하게 준비한다. 먼저 구조적 대책은 제설장비 구입과 제설제 구매, 도로 열선 설치, 자동 염수분사장치 설치, 한파쉼터 정비 등 겨울철 제설작업에 대한 실질적인 준비이다. 또한 비구조적 대책은 재난 예·경보시설 정비와 내집 앞 눈치우기 운동 등 안전 문화 운동과 대설·한파 대비 훈련 및 종합대책이다. 즉, 이러한 계획 수립은 다가오는 겨울철 재해로부터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2023년에는 겨울철 재해대책 기간 중 총 여섯 번의 특보가 발효되어 이천시 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가동하였다. 공무원과 민간 등 제설 전문인력으로 조직된 도로관리과 도로관리팀에서도 21회의 비상근무를 가동하여 즉시 제설작업을 실시하였다. 공공과 민간 등 총 443대 제설 장비를 투입하여 소금과 친환경제설제 5,700여 톤(Ton)을 사용했다. 이처럼 이천시 재난안전상황실과 도로관리과에서는 매일 기상 상황을 주시하고 도로 제설뿐만 아니라 도로 결빙에도 선제적으로 대응을 했다. “제설에 대해서는 이천시가 최고다”라는 평을 시민들에게 많이 들었다. 이 말의 힘은 도로 제설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강설 후에 발생 될 수 있는 안전사고를 대비해 후속 제설과 인도 제설을 즉시 실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에 따른 대책으로 이천시 지역자율방재단과 읍·면·동별 지역자율방재단(210명)을 새롭게 구성하여 지역별 제설을 실시하여 시장님과 시민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호응을 얻었으며 경기도 행정1부지사 방문 시에도 이천시 지역자율방재단 활동에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특히 재난관리기금으로 소형제설장비(엔진브로워) 44대를 구입 배부하였으며 이천시 지역자율방재단과 자원봉사 및 공무원 등이 동참하여 제설 취약 구간과 인도 등에 제설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결과 고갯길이나 주택단지 언덕길, 학교앞 인도 등에 미끄럼 사고와 안전사고 예방에도 큰 효과를 봤다. 또한 도로열선을 활용한 스마트 제설관리시스템을 구축하여 시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반면 여전히 개선할 부분도 많다. 무엇보다도 재난안전상황실에서 모니터링할 수 있는 구간도 제한적이다. 상습결빙구간이나 제설취약구간에 재난감시용 CCTV를 추가적으로 설치해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언덕 구간이나 고갯길에도 도로열선을 추가 설치하여 상시 관리가 필요한 실정이다. 재난관리의 핵심은 초기 대응이다. 신속한 판단과 긴급 대응이 대규모 피해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린 상황실에는 전담 인력이 없다. 상시 상황관리와 전담 인력 운영이 효율적인 재난관리의 기본이 되므로 우선적으로 개선해야할 부분이다. 이제 다가오는 여름철 준비도 철저히 해야 한다. 겨울철만큼이나 여름철도 중요하다. 여름철 재해 대책을 위한 사전대비에는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인명피해우려지역 발굴과 관리 방재시설정비, 재난대비 교육과 훈련 등 촘촘한 대비가 필요하다. 재난부서 근무 경험이 벌써 10년을 훌쩍 넘었다. 2013년 신둔·백사지역 수해부터 2020년 수해 그리고 최근 코로나 상황까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재난업무를 수행해 왔다. 방재안전직으로 전직해서 직원부터 팀장으로 일하면서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재난들을 대응하게 되었다. 이제는 천직으로 생각하며 일하고 있다. 재난부서에 맞이하는 사계절 하루하루가 모두 의미 있는 날이 되고 역사가 되고 있다. 공무원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막중한 업무와 민원, 그리고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재난 재해 업무에 힘들고 지치기도 한다. 하지만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는 새 지침과 매뉴얼들을 함께 고민하고 개발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한층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재난관리가 타 지자체의 본이 될 수 있는 선진 이천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누군가 해야만 한다면 내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보다 내가 먼저 하겠다는 마음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겨울철 재난대책을 종료하면서 불철주야 고생해주신 동료분들과 제설 관계자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담당자 안전총괄과 자연재난팀장 최인식(644-2975)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숭무전(崇武殿) 참봉으로부터 초헌관 부탁을 받았다. 숭무전은 금관가야의 후예 김유신 장군인 흥무대왕과 지소부인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전(殿)의 대제는 초헌관이 제사를 집전(執典)하게 되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다. 관례로 경주시장이 초헌관이나 유고로 제관선정위원회에서 가락대구종친회장으로 결정했다는 이야기에 가슴 설렜다. 성씨별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祠堂)은 여러 곳에 있다. 사당은 제사를 위하여 조상의 위패를 봉안한 건축물로 가묘(家廟) 또는 예묘(禮廟)라고도 한다. 왕실의 사당은 종묘(宗廟), 대묘(大廟), 태묘(太廟)라고 부른다. 고려 말 충렬왕 때 중국에서 『주자가례』가 들어오면서 왕실의 종묘와 구별하기 위해 일반인의 조상을 모신 곳은 사당으로 통용되었다. 공자님이나 부처님, 왕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은 전(殿), 일반적인 사당은 사(祠)의 글자를 붙인다. 대제이든 가정의 일반 제사이든 술은 보통 석 잔을 올린다. 석 잔 중 첫 번째 올리는 사람을 초헌관, 두 번째 올리는 사람은 아헌관, 마지막 세 번째 올리는 사람은 종헌관이라 부른다. 제사에 술을 석 잔 올리는 유래가 재미있다. 『공자가어』에 보면, 공자님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大成殿) 대제에서 공자님께 술을 좨주(祭酒)가 한 잔만 올렸다. 좨주는 고려와 조선 시대 종삼품 벼슬 이름이다. 대성전에는 여러 사람이 벼슬을 가지고 있어서 당나라 허경종(許敬宗) 등이 태종에게 청하여 공자님 사당에 좨주가 초헌, 사업(정4품)이 아헌, 박사(정7품)가 종헌하도록 한 것이 유래가 되었다. 당나라 제6대 현종 때는 삼정승(三政丞)에게도 삼헌의 예를 행하라는 조서를 내린 것이 일반 제사에도 일반화가 됐다. 나는 초헌관으로서 제물이 잘 진설되었는지 알자(謁者)의 안내로 점검 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헌관을 인도하는 알자가 나의 왼쪽으로 와서 대제 지낼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근구 청 행사(謹具 請 行事)!” 큰소리로 외친다. 다음은 위패에 절하며 뵙는 참신례 차례이다. 숭무전 대제에 참사(參祀)한 모든 사람과 함께 대왕을 존경하는 의미로 마주 보지 않고 옆으로 꿇어앉아 사배(四拜)를 했다. 절의 회수는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일배(一拜), 돌아가신 분은 이배(二拜), 자연신이나 부처님께는 삼배(三拜), 왕이나 성인(聖人)께는 사배(四拜), 황제께는 오배(五拜)하는 예절이 있다. 동아시아에서 절(拜)은 숭배가 아니라 높은 어른들께 인사 올리는 예이다. 높다고 생각하는 어른의 순서대로 절의 횟수를 많게 한 것 같다. 나는 손을 씻고 흥무대왕 신위 전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홀을 꽂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때의 방위는 자연 방위가 아니고 예절의 방위로 신위가 있는 쪽이 북쪽이 된다. 향을 세 번 피운 다음 대축 담당으로부터 폐백(幣帛)을 받아 가슴 높이까지 올리는 예를 갖추니 대축 담당이 받아서 흥무대왕 신위 앞에 올린다. 폐백은 예의로서 비단을 선물로 올렸으나, 요즈음은 한지(韓紙)를 대용품으로 사용한다. 나는 원래 위치로 갔다가 첫 잔을 올리기 위해 다시 사당 안으로 들어가 흥무대왕 신위 앞에 홀을 꽂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삼국통일과 돌아가실 때까지 충의 정신과 지도력 있는 모습의 상상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간다. 집사가 전해주는 술잔을 향불 주위로 돌리지 않고, 두 손으로 정중히 잡고 가슴 높이까지 올려 예를 갖추었다. 술잔 받으시는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다. 초헌관이 올리는 술은 예제(醴齊)라 하고 단술을 사용한다. 다음은 지소부인 신위 전에 나아가 홀을 꽂고 무릎을 꿇고 앉아 부인의 생전 모습을 상상해 본다. 지소부인은 태종무열대왕의 공주로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온화하며 인자한 모습이었을 것 같다. 지소부인 신위 전에도 첫 잔을 정성을 다해 올린 후 다시 흥무대왕 신위 전으로 와서 신위 쪽을 향해 홀을 꽂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축문을 낭독하는 사람인 대축(大祝)이 나의 왼쪽으로 와서 동쪽으로 향하여 무릎을 꿇고 앉으니 전체 참사(參祀)자도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대축이 낭독하는 축문 속에, ‘대왕의 위엄은 삼국에 미치고 공적은 백세(百世)를 지나 영웅의 뛰어난 공적이 남아 있어, 향사가 쇠퇴하지 않아 깨끗한 희생(犧牲)과 여러 가지 제물을 마련하여 향사를 올리니 흠향하시옵소서.‘ 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뿌듯했다. 축문 낭독을 마친 후 전체 참사자는 일어나고 나는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아헌관이 올리는 술은 빛깔이 흰 술인 동동주, 즉 앙제(盎齊)를 올렸다. 축문은 초헌할 때만 낭독하고 아헌 때는 술잔만 초헌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올린다. 아헌관도 헌작을 하고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종헌관이 올리는 술은 맑은 술인 청주(淸酒)를 올렸다. 술잔은 초헌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올린 후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다음 차례로 음복례(飮福禮)가 있었다. 나는 음복 자리로 가서 대축 담당이 주는 술(청주)과 육포(肉脯)로 음복했다. 음복의 예를 마친 후 삼헌관만 원래 위치에서 네 번의 절을 올렸다. 그 후 참사자 전원이 신을 전송한다는 의미로 네 번의 절을 올린 후 축문과 폐백을 불태우는 망료례(望燎禮) 의식이 있었다. 나는 망료위로 나아가서 대축이 축문과 폐백을 불태우는 모습을 지켜본 후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지방이나 축문을 태우는 일은 신을 보내드리는 일이라 한다. 알자가 나의 왼편으로 와서 대제를 모두 마쳤다는 뜻으로, “예필(禮畢)!” 큰 소리로 외친다. 우리는 원시 농경 시대부터 산업화 시대를 거쳐 지식정보화 시대를 넘어 AI(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다. 각 시대를 거치면서 서로의 가치관이 변하고 제사를 모시는 방법도 문중과 지방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조상을 섬긴다는 정신은 모두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제사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과 더 간소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제사는 조상과 후손으로 이어주는 끈인 것 같다. 시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계승 발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숭무대제 초헌관]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인간은 기초적인 인지 자료라 하면 알고리즘이라 할 것이고 메커니즘은 작동하는 원리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에 기초와 유기반응은 어떤 경우에든 반응과 인지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엄존하는 지구에서 살아야 하기에 적응을 위한 함수 즉 자기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병이 생겨 병원에 Admission(입원)해서 수술 같은 것을 받게 되면 Dr가 하는 일은 반응을 알아본다. 일차적 수순이 바로 반응이며 다음 순으로 넘어간다. ] 지구란 늘 자전하기를 반복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생존해야 하는 관계라 둥근 지구 안에 교차하면서 이런 적용의 원리로써 작동될 때, 복잡한 인지기능에 따라 반응과 대응을 하며 일의 시작을 하는 것이다. 인간 심리학, 또는 전문 심리학 연구는 하지 않았지만 정신과 병원에서 근무를 약35년을 근무하다 보니 <어깨너머 3년이란 말이 있듯이 정신질환자(精 神 疾 患 者)란망상, 환각,사고(思考)나 기분의 장애 등으로 인하여 독립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중대한 제약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어느 정도의 반응이 통계라고 하면 인간사의 일은 이러한 중대한 사례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지와 작동이 안 되고 침묵한다면 인간이라 볼 수 없기에 상대가 알 수가 없는 것이나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반복적으로 행동 반응이 나온다면 마침내 부딪침이 되는 것이다. 즉 잘못을 인지하고일이 있을 때 즉각 반응하는 일은 다음 수순을 생략하는 일면이 있다고 보기에 상황에 따라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산속으로 들어와 귀 산을 하여 가끔 시골에서만 발생하는 일들과 자주 마주치곤 한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다른 논에 물을 막고 자기의 논에 물을 받으면 심각하게 서로 다툼이 생기고는 한다. 이런 자기 아집과 이기주의가 시골에서는 심심찮게 보고 산다. 물론 한발 양보하면 되지만 1년 농사를 풍년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사태라 여기면서도 시기가 지나면 수확이 적게 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경우가 자주 일어나 앞집 옆집 뒷집 모두 서로 대화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회적 동물이라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겪어본 터라 이해는 하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골구로 물꼬를 대면 되는 일을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 기류를 보면서 내가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도시나 시골이나 모두가 같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일이 심각하게 발생되었을 때 아무런 반응이 없이 지나가는 경우와 반응하는 경우는 다음에도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필자 옆 밭이 하나 있는데 10월 지금쯤 우사에서 쇠똥을 잔뜩 받아놓고 몇 날 지나니 그야말로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여 문을 열 수 없는 지경임에도 극심한 공해를 말하는 사람들이 없다. 시골의 풍경이라 하지만 사람이란 인내의 한계가 있는 법 이것을 놓고 확연히 다른 차원의 행동이기 때문에 필자가 살며시 그분을 만나 사정을 하고 나니 그제야 밭을 덮어 놓는다. 그러니까 행위의 반복을 그냥 넘기게 되면 모든 사람이 피해가 갈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아마 도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소송이 걸리지 않았을까? 서로가 합리적으로 풀 수 있는 것을 알고리즘과 메커니즘의 반응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나오는 경우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무튼 존재는 존재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이 반응할 기회가 제공되며 반복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합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지를 주무로서 미리 피해를 막을 수 있고 예방의 조치가 수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존재를 너무 드러낸다면 상대방이 반감을 가질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또한 존재를 너무 감추다 보면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둘의 사이에서 오고 가는 고민을 소화시키는 일로 일상이 지난다. 물론 살아간다는 일에 있어 당연히 피할 길 없는 수순이라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행동이라는 점에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실이라 - 사는 것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이 정확한 답안이라는 제시는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신들의 말조차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말로 포장되기 때문에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그로 인하여 자기에 위치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말의 근거로 인하여 장구한 설전이 나타난다. 예로 어느 경전이 수학적인 답안으로 이루어진다면 존립의 근거가 모호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여지가 많은 개입의 자리가 있는 것이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신은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는 모순이기 때문에 끝없는 분쟁과 싸움의 빌미를 제공한 신의 실수라고 해야겠다. 침묵이 금이라면 결국은 인간의 모순에 대한 변명이고 이 변명은 결국 다기(多岐)한 갈래로 말의 포장을 일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신은 지속적 실수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신은 인간의 곁을 떠나면 이미 존재가 없다는 것도 인간의 야비하고 교활한 행동양식이다. 신을 만든 인간의 지혜가 신의 발목에 잡혀 함정에 빠지는 영악한 도 물론이지만 - 결국 나는 인간관계에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 체념의 문을 열어 놓고 살아야겠다. 오는 사람은 반기며 가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는 일로 정리되고 내 모습 그대로 하루하루희망을 섞어 역사를 쓰면서 지내야 하는 것이 정답이라 한다면 방법이 없지 않는가? 사실 젊은 날의 몰랐던 일들이 나이가 익어갈수록 알게 되는 상대의 차이가 왜 그렇게 크게 보이는지를 생각하면 사는 일에 해답이 없는 모호한 숲이 고독하게 보이는지는 아직도 물음표이다. (?) 있어야 할 것은 점차 없어지는 것으로 변하는 것도 필연으로 느끼고 사는 것이 불편한 일이있을지라도 또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이치가 당연한 논리라 한다면 편린(片鱗)을 쫓아가는 것이 보상이라면 보상이라고 해야겠다. 허긴 지금에 와서 전체를 조감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일부만 떼어서 검토하는 일은 필자의 허물로 가리면서 더욱 삼삼한 환경의 대응을 기대하면서 논지를 접는다. 이 같은 언덕을 얼마나 넘을지는 모르겠으나 행복이나 희망의 추구가 보편적인 가치로 꿈꾸는 데서 알고리즘, 메커니즘의 반응을 휴머니즘의 주조로 삶의 가파름을 넘어가려는 마음이 여리다 해도 계절의 순환에서 내 모습이 향기로 승화하려는 발상이려니 하며 꿈과 연결되는 필자의 글이 묘미가 있고 탄력적이지 않을까 한다. 작은 마을에서 작가 입네 하며 죽은 듯이 사는 것이 소망 일진대 마을을 위해서라도 알고리즘과 메커니즘의 반응일지라도 말이다. 2024. 03.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