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민족독립정신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아(我)’와‘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단재 신채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고령신씨(高靈申氏)로서,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18세손이다.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에서 출생하여 1936년 2월 21일, 북풍이 몰아치는 여순 감옥에서 고난에 찬 독립투쟁가의 일생을 마쳤다.
당시 그의 나이 쉰일곱 살로 일제에 대한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10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8년째 복역하다 옥중에서 순국한 것이다. 조국광복의 꿈을 안고 중국에 망명한 지 26년, 상하이와 베이징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 등지를 오가며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흔적을 더듬고 민족혼을 깨우치던 사학자요, 언론인이며 혁명가인 신채호는 결국 해방 조국의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독립운동가로서 단재의 정신은 절대독립론, 무장투쟁론, 민족혁명론(민중직접혁명론) 등 세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단재의 절대독립론은 3·1운동 후에 대두한 자치론·내정독립론·참정권론 등 일제와의 타협주의를 분쇄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에 있어 1920년대 특징의 하나는 국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의 일부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체념하고 대일본제국 내의 조선자치구역을 추구하는 자치론자들이 대두한 것이었다. 이들은 일제와의 타협론을 제창함으로써 완전독립론과 자치론 사이에 대립·투쟁을 야기시켰다. 즉, 이러한 자치론의 대두는 독립운동 노선에 혼선을 가져오고, 일제에 대항하여 굳건히 서야 할 독립운동 노선을 비틀거리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단재의 절대독립론은 완전독립론과 자치론의 대립·투쟁에서 완전독립론·절대독립론이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비틀거리던 독립운동노선을 바로 잡아주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갈 길을 명료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을 통해서 극명하게 선언된 절대독립론은 1927년에 자치론을 철저히 분쇄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노선을 정립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단재의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강도와 같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가르쳐주어 그 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의열단뿐만 아니라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까지도 단재가 합리화하고 정당화한 무장투쟁 수단을 채용하게 된 것은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에서 천명한 독립운동 방략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변절과 투항으로 얼룩진 일제하 이 땅의 지식인들의 행적을 뒤돌아볼 때 비타협적 투쟁으로 일관해온 신채호의 정신과 생애는 우리에게 민족과 독립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