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하얼빈 의거

    - 애국지사이자 동양평화를 염원했던 위대한 평화사상가 -

    by 김수한(서울취재본부장)
    2022-10-09 22:49:44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장부가 [丈夫歌]〉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ᄒᆞᆷ이여 그 ᄯᅳᆺ이 크도다

    (장부가 세상에 있음이여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ᄯᆡ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ᄯᆡᄅᆞᆯ 지으리로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텬하ᄅᆞᆯ 웅시ᄒᆞᆷ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천하를 웅시함이여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東風漸寒兮 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ᄯᅳ겁도다

    (동풍이 점점 참이여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분ᄀᆡ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鼠竊○○兮 豈肯比命 쥐 도젹 ○○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쥐 도적 ○○이여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ᄅᆞᆯ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사세가 본디 그러하도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ᄃᆡ업을 이룰지어다

     

    (동포동포여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독립이로다

    (만세만세여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동포로다

    (만세만세여대한 동포로다.) 

    안중근이 의거를 거행하기 전 동지 우덕순에게 지어준 장부가〉 -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즉, 고려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대지주였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海西) 일대에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안중근 의사는 바로 이 안태훈 진사와 그 부인 조(趙)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며 사격 · 승마 · 궁술 등 문무(文武)를 고루 익혔다. 1894년 결혼, 2남 1녀를 두고 1895년 천주교에 입교한 후, 아버지와 함께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를 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전교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민족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을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고 1907년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운 뒤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에서 의군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였으며, 1908년 3월에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인심통합과 단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인심결합론」이라는 글을 『해조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의군(義軍)을 모집하여,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과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4월 연추(煙秋) 얀치혜에서 동의회(同義會)라는 항일 의군을 조직하였다.

    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장 이위종, 평의원 안중근 등이었다. 이 동의회는 실질적으로는 발기인이자 우영장(右營將)이었던 안중근 의사가 이끌었다. 의군부대의 규모는 3백 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연해주 연추를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1909년 2월 연해주 연추 하리 마을에서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조직하여 왼쪽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자르고 “大韓獨立”이라는 혈서를 써서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09년 9월 안중근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일본의 초대 총리와 한국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인물들은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 최재형, 유진률, 이강, 우덕순 등이 그들이다. 그중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안중근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제거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도중에 안중근 의사 일행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포그라니치나야(수분하)에서 유동하를 가담시키고 하얼빈에 도착한 뒤,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의 소개로 조도선을 거사에 합류시켰다. 10월 23일 김성백의 집에서 안중근 의사는 의거 결의를 담은 “장부가”를 지었고, 우덕순도 “거의가”를 지어 화답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30분 경 코코프체프의 인도로 플랫폼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라우닝 권총(FN M1900) 4발을 발사해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켜 이토를 쓰러뜨렸다. 이어서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등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의거 성공 이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거쳐 뤼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는 국제 재판을 표방하면서도 일본인 관선변호사만을 허용하는 등 불법 재판을 강행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검사 신문에 이어 재판정에서도 당당하게 의거의 이유와 정당성을 주장하며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개조”를 밝혔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의 통치 정책을 오해하여 저지른 개인적인 살인행위로 몰아가려 하였다. 이에 맞서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위해 의거를 일으켰다는 대의를 밝히며 자신을 만국공법에 입각한 전쟁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일본인 관선변호사조차 안중근에 대한 사형선고는 부당하다며 적극 변호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극형을 내리라”는 일본 외무성의 사전 지령에 따라 2월 14일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재판 중 자신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다가 체포된 포로일 뿐이며 자신의 행위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대의를 위한 정당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 평화의 길은, "첫째 일본이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둘째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 그런 다음 서로 '독립한' 청국, 한국, 일본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을 방어하며, 서로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서로 화합하여 개화와 진보로 나가서 구주 및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한국의 독립과 일제의 침략 야욕 포기가 동양평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동양에 평화가 깃들며 서구와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1910년 3월 26일 순국 당일 뤼순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보내준 흰색 명주 한복을 입은 안중근 의사는 남기고 싶은 유언이 있느냐는 형무소장의 물음에 “아무 것도 남길 말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사살을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이 협력하여 동양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당부를 하였다. 이어 ‘동양평화 만세’삼창을 하려 하니 특별히 허락해달라는 요청이 거부되자 약 2분간 기도를 올리고 의연하게 교수대로 올라갔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는 눈 앞에 죽음이 닥쳐와도 초연함을 잃지 않고 오직 한국의 독립과 동포의 안녕을 걱정했던 애국지사이자 동양평화를 염원했던 위대한 평화사상가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일제는 정근, 공근 두 동생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유해를 인도하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비밀리에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혔고 아직까지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 고국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효창공원에 마련되어 있으며 정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 그 자체는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교육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무장독립운동 등을 펼쳤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대한의 독립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평화 속에서 공존공영해 나갈 수 있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제시해 주었다. 하얼빈 의거일인 1909년 10월 26일은 공교롭게도 70년뒤인 1979년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총으로 쏜 사건인 10.26사건과 날짜가 같다. 둘다 총으로 벌인 암살이고 같은 탄약(32 ACP)이 쓰였으며, 한국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하얼빈 의거는 동양평화론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 나아가 일본을 위한 의거였다. 오늘날 일본, 중국에서도 안중근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외롭게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며 동양평화를 추구했던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진정한 평화주의자였으며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통해 독립운동가만으로서가 아닌 교육자 및 계몽운동가로 동양평화를 주장한 사상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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