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없는 세상과 배려하는 것이 공정, 정의,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지금 현 시대는 이질성 경쟁과 이익이란 자기
유익에 빠져버린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며 감사하는 맑은 영혼을 가져야 비로소 공정과 정의의 순수한 초석을 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평등한 생각 상대를 향하여 배려하는 자세와 초보적인 양심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의 유익에 부정이나 반칙은 없는가 돌아보는 자세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마음 즉 어린아이의 눈망울 같은 순수한 마음이
식지 않고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이 순수함은 세월 따라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고 물들고 사악한 마음이 들 때마다 마다 초심을 지키려는
간절한 자기 체면이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을 저지르고도 이유를 달고 거짓이었음이 밝혀져도 또 거짓을 일삼는 이들이 득실대는 세상에 발을딛고 산다는 것이 허무한 세상인 것이기에 -
특혜와 반칙으로 부귀를 누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자신을 위하는 참사람답지 못한 이들이 과반을 훨씬 넘어 버린 사회가 되었다.
힘 있는 이들은 반칙을 뭉개고 오히려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볼 때 슬픔이 앞을 가린다.
욕심이 들어찬 이들이 공평한 세상을 말 할 수 있을까? 내 것에 욕심을 지키는 이가 배려를 알겠는가.
배려란 어리석고 모자란 놈들이 하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다. 공정해야 비로소 평등이란 이야기로 담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에 -
이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나만이 아닌 타인도 자신의 삶에 넣는 습관이 필요하겠다는 필자의 생각이기에 나와 당신 경쟁과 쟁취가 아닌 배려와
나눔의 자세가 있어야 비로소 공정한 사회 진정한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오늘 나의 행복과 건강도 중요 하겠지만 또 한편에 당신의 행복을 위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 우리 함께가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자장하고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이치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날마다 쏟아지는 칼럼의 표정을 보면서 모두 그렇고 그런 글에 매달리기 보다는 원래 글과 칼럼이란 뼈가 있어야 하기에 이는 정신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신념과 사상이 있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이다.
화사한 외모의 꾸밈이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온갖 부사와 형용사를 동원하여 그럴듯하게 꾸민 글이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를 방기(放棄)하고 혹은 누구의 얼굴인지도 모르는 글이 된다면 이는 허접스러운 쓰레기의 양산이라는 문패를 달고 허세를 부리는 일일 것이다.
콜링우드는 예술은 본질적으로 “인간 최초의 기본적인 정신 활동”을 말했을 때 정신이란 배려하고 주는 것이라고 했듯이 의식의 중심이면서 본질에서 이념을 나타내는 지향점을 갖기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최초의 기본 공정, 정의, 상식이 기본 활동이라 했을 때 거기에는 일정한 패턴의 지속성이 결여된 것을 느끼기 때문에 칼럼 또한 예술이라 보기에 예술가라는 작가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이유가 될 것이다.
물론 예술가라는 혹은 작가라는 의식의 지향은 페흐너가 말한 것처럼 위로부터의 미학이나 아래로부터의 미학, 형이상학적인 정신 활동과 다른 공간의 현실 경험이나 실증의 요소를 적절히 배합할 수 있을 때 의식의 정신 활동이 공정, 정의, 상식, 일정한 구조로 패턴이 형성될 것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또한 칼럼도 정신의 줄기가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에 따라 본인의 자화상이 나타나는 가치가 되기 때문이다.
김장 항아리와 도자기의 예를 들자면 우리가 주장하는 공정, 정의,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모두가 공정, 정의, 상식을 예기하지만 전자는 필요한 물건을 담는 상식일 것이고 후자는 생명 즉 우리네가 살아가는 생명이 넘치는 형태로서의 가치를 의미하지 않을까 하면서
예를 든 가치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나 공정, 정의,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듯이 배려, 사랑, 양심이 살아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서로간, 계층간, 이념간, 이질성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면서 Epilogue 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