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은, 국정감사 때 야당 의원들 앞에서 바로 이점을 지적한 것이다. 왕년의 학생운동은 주사파 운동이었다.
그 주역들이 그걸 청산한다고 선언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라고 직언한 것이다.
이에 야당은 극도로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김문수 위원장은 소신껏 발언하는 면을 보면서
필자도 그 소신에 찬사를 보낸다. 그는 확실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는 진보, 보수 좌우를 넘나드는 시대적 경험을 하고 대학 시절에는 근로자로 변신하여 산전수전 겪은 그가 경사노위 위원장을 맡았다는 것은 아마도 작금의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있는 윤 정부의 현실을 보여 주었다고 본다.
김문수 경사노 위원장은 그 누구도 소신껏 말하지 못하는 것을 김문수 위원장은 본인의 사상 논리를 전개하였다. 지금 그는 엄청난 사상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건 2020년대 한국 정치사, 사상 투쟁사의 획기적인 모멘텀이 될 것이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진보 좌익을 정면 겨냥 1. 김문수 위원장은, 오늘의 좌익 운동권의 사상적 정체성을 완전히 홀라당 까발리고 있다.
그리고 민족주의자, 가난한 사람 편, 불의에 맞서는 사람 정도로 처신하면서 그럴듯하게 처신을 하고 있다.
그래야 극좌를 꺼리는 대중을 속이고 광범위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문수 위원장은 저들의 이 시커먼 속셈을 적나라하게 벗기고 있다.
운동권은 그래서 김문수 위원장의 폭로에 사생결단으로 대드는 것이다. 저 사람이 우리 장사를 망치려는구나“
김문수가 누군가?
왕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노동운동가, 혁명가였다.
그 누구보다도 운동권의 내막과 실태를 환하게 꿰뚫어 보는 도사다.
이런 김문수의 공격이 그들에겐 다른 누구의 공격보다도 뼈아플 수밖에 없다.
이른바 '중도'의 허구성에도 도전 2. 김문수의 투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이번 사상투쟁은, 범우파 내부의 ‘투항적 중간파’의 사이비성, 위선, 오류에 대해서도 뼈 때리는 격파(擊破)가 되고 있다.
범우파 안의 일부는, 극좌 운동권에 공포, 부채의식,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왕년의 권위주의 수혜층 일부, 겁나서 운동권 투사가 되지 못한 데 대해 운동권에 미안한 마음을 품어 온 자들, 회색인들, 운동권 득세에 위축이 된 자들,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완전히 좌익으로 갈 수는 없는 자들인지라, 스스로 ‘중간’ ‘중도’를 자처하며 어중간하게 걸쳐 있다. 이런 유형은 보수 정계에도 있고, 특히 미디어 쪽에 많다.
‘중도’는 물론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중도’는, 좌익에 겁먹고 아첨하는 교활한 처세술에 불과하다.
그들은 극좌를 ‘진보’라고 불러주면서 정통 우파, 아스팔트 자유 행동가들을 ‘극우’라고 모함을 한다.
그들은 운동권의 전체주의 정체성을 눈감아주면서,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 한다.
아니, 미움을 사지 않는 정도를 넘어 완전히 극좌 혁명 편을 들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실각시킨 촛불 정변 때, 그들은 최선봉에서 가짜 뉴스를 만들고 퍼뜨리고 선동했다.
김문수의 이번 사상투쟁은 극좌 운동권의 민낯을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사이비 우파, 배신 우파, 가짜 중도의 오류도 여지없이 격파하고 있다.
”극좌 운동권은 너희들처럼 다뤄선 안 되고, 나처럼 정면으로 때려 부숴야 한다“는 시범이다.
이런 김문수를 죽인다면?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 힘에 경고하는 바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 힘이, 만약 김문수 편을 들지 않고 좌익의 반란에 밀린다면?
그러면 그것은 김문수의 죽음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 힘의 죽음이 될 것이다.
김문수는 영웅적 희생타가 될 것이고,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 힘은 제2의 탄핵 행위처럼 될 것이다.
비(非) 좌파라는 미디어들도, 이번에 또 좌파 편에 서서 행여 김문수에게 등을 돌리면,
그것 또한, 제2의 '탄핵 질'처럼 될 것이다.
김문수는 외롭지 않다. 외롭게 둬서도 안 된다. 그는 전투적 자유 레지스탕스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자유인은 방관자가 되지 말고, 수많은 김문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국민의 힘이 각성해야 한다. 이 시대 자유 투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새삼 깨쳐야 한다. 한심한 그대들, 어떻게 해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인가?
뻔뻔한 운동권, MBC 조작보도 비판이 언론자유 침탈?
운동권 인식론 "기승전-혁명, 오로지 '변혁'""자유민주주의의 '자유"를 그저 이용해 먹을뿐“
운동권 2개의 무기, MBC 보도 문제에 임하는 운동권의 ’싸움의 방식‘엔, 두 개의 중요한 무기가 있다. 하나는, 자신들의 왜곡과 조작에 대해 전혀 자성, 자책, 자괴하지 않는 철면피 방식이다.
또 하나 무기는, 반대쪽 반론을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무지로 내리깎는 방식이다.
1. 저들은 왜 저렇게 뻔뻔한가?
저들의 그런 ’싸움의 방식‘은 이쪽에서 볼 땐 ’X 뀐 자가 성내는‘ 격이다.
낯 두꺼운 작태다.
그런데도 운동권은, 그걸 수구반동을 때려 부수는 정당하고도 유효한 무기라고 자처한다.
저들의 이런 ’싸움의 방식‘은 어디서 우려 나오는 것일까?
이걸 알아야만, 자유인들은 비로소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된다.
운동권 사고엔 오로지 혁명뿐
답은 간단하다. 운동권의 인식론(epistemology) 자체가 혁명적 인식론인 탓이다.
”혁명적 인식론이란, 철학적 사유(思惟)의 소임은 세상을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변혁‘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인식론에 따르면, 현실을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실증적으로,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 대신, 현실을 혁명가의 혁명적 목적에 맞춰, 혁명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재구성하고 재편집해야 한다.
현실을 혁명적인 틀(frame)에 억지로라도 갖다 맞춰야만 한다.
혁명적 목적, 혁명적 요청이란 무엇인가?
한국으로 치면, 극좌 운동권의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NLPDR)이다.
운동권은 이 목적과 요청을 성경 구절처럼 신성불가침으로 본다.
사람의 인식, 언론, 정치, 문화, 노동운동도 모두 이 성스러운 목적과 요청에 두들겨 맞춰야 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조작도, 거짓말도, 억지도, 궤변도, 폭력도, 속임수도, 과장 선동도 불사(不辭)해야 한다.
저들의 낯두꺼움은, 이런 혁명적 인식 방법론에 뿌리박은 것이다.
2. 저들은 반대쪽 비판을 언론자유에 대한 불감증이라 하는데?
좌익 운동권은, 본래 자유주의가 구가하는 언론 출판 결사 집회 양심 표현의 자유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독재라 매도한다.
그 대신 저들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로 치닫는다.
'자유'를 활용해 '자유'를 깨부수려는 수작
이럼에도 저들은 부르주아 체제에 저항하는 도상(途上)에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유를 십분 써먹는다. 예컨대 저들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를 수 있어야만 진정한 자유다“라고 사기 친다. 거짓을 말해놓고도 그걸 비판하면, 표현의 자유를 몰각한 것이라고 생떼를 쓰는 것도, 다, 자유를 활용해 자유를 깨부수려는 수작이다.
이렇게 해서 일단 권력을 잡았다 하면, 그들은 그날부터 본연의 반(反) 자유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입법·행정 사법·문화·언론 등 모든 부문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당파성으로 치닫는다. 위헌적인 악법도 서슴없이 만들고, 정치적인 판결(判決)도 거침없이 때린다. 나아가 기본적 인권과 자유 체제 자체를 갈아엎는다.
"뇌 송송 구멍 탁"이 표현의 자유?
한심한 건, 운동권의 이런 교활한 전략·전술을 우파 안 일부도 간과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산 쇠고길 먹으면, 뇌 송송 구멍 탁" 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이기에,
그걸 나무라는 건 표현의 자유를 모르는 소치다, 어쩌고. 얄팍한 세 치 혓바닥 놀림일 뿐이다.
자유 진영은 요컨대, 시대적 싸움의 의의(意義)를 큰 틀 속에서 파악하는 안목을 키웠으면 한다. 말단(末端)에 드러나 보이는 쟁점에만 코를 박고 몰두하는 나머지,
싸움의 전체상을 보지 못하는 근시(近視)를 주의했으면 한다. 오늘의 조작 보도 싸움에서도 이점은 예외가 아니다.
이점을 윤정부는 새기고 지도자는 항상 결단의 문제 앞에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결국은 정(正)이다.
결국에 이 문제는 민초들의 공유와 더불어 원칙으로 가야 된다는 점이다. 김문수 위원장도 더욱 민초들과 소통하면서 꼿꼿한 선비 정신으로 지금 이 현실에 처해 있는 경사노위를 바로잡아 이 시대의 애국자로서 남기를 바랄뿐이다.
오늘도 북한을 찬양하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해 불가의 말이 떠도는 아우성에 시끄러워 말할 자유가 있는 것은 민주주의 좋은 일이나 듣기에 너무 식상하고 기가 차서 외면뿐이다.
올바른 판단이 없는 멍한 사람들의 바보 놀음에 가치판단이 흐려지는 듯하여 오골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귀가 퇴화하고 입만 커지는 시회는 불행한 사회라는 것을 그들도 깨우치기를 기대한다. 몰 염치한 정서는 결국에는 몰상식의 인간이다. 너무도 답이 없는 이 시대에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의 꼿꼿한 사상을 보면서 오랜만에 한바탕 웃어본다. 참 잘했다.
2022. 10. 17.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