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곳에서 어디서 오는 것인가 창조의 길은, 두눈으로 타고오는 구불길인가 아니면 곧은 길 고속도로의 숨가 뿐 길일 것인가?
이렇게 물으면 보일 것도 같지만 결코 그런 대답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하면 누구나 자기 시의 행로를 의문으로 설정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어느 순간에 시심의 발동이 시작하고 얼마동안의 의식의 중심에서 느닷없이 사라지는가를 헤아리기 위해 고심 고심을 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고뇌의 길을 한번도 갖지 않았다면 그 시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의 시를 쓰는 일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자기를 알고 또는 정립(定立)하면서 진로를 설정하는 행로에는 어긋남이 없지만 무작정 길을 가는 나그네는 초라한 행로의 비틀거리는 산물일 뿐 아니라 때로는 환희의 풍선을 타고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하는 이중적인 표정을 관리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소설과 달리 의식으로 엮어가는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인의 이름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잘 알 것이다.
때로는 무의식이 충만한 경우도 있고 더러는 의식의 명확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이퍼의 섬세함도 구분되어야 하는 -
더러는 알 길 없는 단애(斷崖)의 벼랑에서 건져 올리는 시심도 있고 또는 평온의 느긋한 행복속에서 향기를 피어 올리는 경우가 있기에 시는 예측불허의 심연(深淵)에서 확실히 만나는 아니 정의하기 어려운 이름일 것이다
어찌하든 시는 순간보다 더욱 빠른 찰나를 가로지르는 섬광(閃光)같은 이름이라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접신을 만나지 못하면 시를 그리지 못한다는 것을 주문한다. 때로는 두려움과 침착함이 돌 같은 무게를 가져야 한다는 마음을 가질 때라야 시인은 비로소 시를 그릴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러한 조건이 내가 믿는 창조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나만의 어눌한 병일지도 모르겠다.
<2. 갈망의 변증법>
얼마전 지인에게 2권의 시집을 보내왔다.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과 읽으라 하기에 천천히 시의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얼마 뒤에 또 1권을 보내왔기에 지인이 사는 곳은 포항이라 이 친구는 많이 쓰고 너무도 부지런한 시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를 이렇게 빨리 쓸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4개월에 시집 1권을 쓴다는 그에게 정말 존경스럽고 우러러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1년에 시집 1권도 상재 하기가 어려울 텐데 1년에 4권을 상재 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접신이 내리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아지경 속에서 쓰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본다.
베개 밑 꿈자리 이라도 시린 밤은 일어나 짧은 시만 쓰자.
9월 상달도 추석 한가위로 접어 드는데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횐남도 태풍이 괴력으로 변하여 한반도 제주도를 향해 사납고 거센 비와 함께 온다는데 안성에 거주하는 나도 좌불안석이다. 초조함으로 농사를 겸하고 있는 나로서는 매년 다가오는 천재지변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이 현실에 정말 마음의 동요가 심해 글을 쓸 수가 없으나 어찌하랴 쓸 수밖에 없는 이 시간 검은 구름이 까맣게 몰려오는 창문 넘어 비 오는 모습에 착잡한 마음이다.
(미상불) 나이가 들면 불면이 찾아와 나그네의 밤이 날마다 지속될 때, 가을의 적요한 밤의 길이 때로는 외롭기도 하고 서럽기도 할 경우 -
그나마 시인은 시를 쓰거나 편지를 쓰는 표정이 오히려 불면의 푸른 밤 -
오히려 친근감으로 전환되는 풍경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그 긴 편지는 보내야 할 사연이 아니라 흘러간 사람 혹은 나같이 짧아지는 시름 깊은 지인들의 사념이 일렁이는 편린(片鱗)들 일 것이다.
그 긴 밤을 지나며 다시 하염없이 내리는 창문 넘어 태풍의 고요처럼 잎새 하나 떨리지 않는 태풍의 고요 속에서 거센 태풍을 기다리는 필자가 체념조차 아름다울 것인지 모르겠다.
<3. 시의 위안>
시가주는 효과는 무엇인가는 시를 쓰는 목적에 근접하는 말이 될 것이다. 토마스만은 예술가의 임무는 생기(to animate)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 예술은 선(善))에 가깝다.
생기와 발랄 혹은 즐거움을 이어주는 때론 단순하기도 하고 더러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일이 시인의 역활일 것이다.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삶의 이야기에 무목적이 아니라 상상으로 떠나는 이상의 꿈이 첨가될 때 조미료의 맛깔스러움은 배가 될 것이기에 언제나 시인은 무료의 심심풀이의 풍선 띄우기가 아니라 꿈을 담아 대상에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수반된다.
관(觀)이란 말에는 “보다” 자세히 보다. 보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의 의미가 들어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경우, 우선 정립되어야 할 것이 대상에 대한 목적의식이 선명할 때 결과는 더욱 명확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도 목적에 대한 정립이 있을 때의 경우와 없을 때의 경우가 확연하다. 전자의 경우엔 언어의 조합이며 후자의 경우는 짧은 응축의 경결함의 언어에 의미의 숲을 이룩할 수 있다.
<4. 상상의 여정>
시는 지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감수성이 시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현학적 욕망의 과시에는 냉소가 발생하지만 비록 눌변일지라도 진실을 내포할때는 소통의 미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시적인 냉철함이나 과학의 칼날이 번뜩이는 자세가 아니라 체온과 체온이 부딪치는 우리네 시골 장바닥의 따스하고 다감한 인정이 스며있는 그런 정서가 시인의 마음에 유려(流麗)한 흐름이다.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도시인 -
도시 체질은 간혹 망각을 앞세운다. 그러나 개울이 흐르고 얕은산 아래 동네에서 친구들과 작은 동산을 넘어 추억을 달리던 기억들은 잊지 못하는 냄새 -
이 후각은 언제나 버리지 않는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고픈 귀향의 에너지는 심장 깊은 곳에서 숨을 쉬는 인자이기 때문에 길을 떠나는 여정이 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언어의 귀향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길 만들기가 시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은 사람이다” 는 말은 블란서 뷔풍의 말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시인이다 라는 말도 외도된 말은 아니다. 시 속에 시인의 전 인생을 투척하고 또 사상과 미래조차 내포된 의미의 숲이 곧 시라는 뜻을 첨가하면 한편의 시는 곧 시인의 모든 면을 파악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에 -
<5. 정신의 구축>에필로그
예술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그 바탕위에서 상상의 길을 만들어 미감(美感)으로 처리하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진실이 담겨 있을 때, 감동의 길이 보편성으로 전달되면서 독자의 힘과 신념의 부여가 갖는 내면의 진솔성과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의 중심이라느 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동이란 그처럼 강한 태풍도 될 수 있고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결합에서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꿈을 전달하는 시인의 힘은 여기서 정점을 마련하는 능력자가 된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부추기는 꿈의 제조자는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시는 그런 꿈이 들어 있어야 하며 가능성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전제에서 볼 때 자기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이유가 내장 되었기에 자기애의 확신과 신뢰 찾기는 미래의 문을 향하는 옳은 목소리다.
둘째는 사랑의 중심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를 아는 일은 매우 현명한 도리이다. 왜 그런가 하면 오늘의 표정을 어떻게 나타내는 가는 자기 신념의 줄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우주 만물에서 들리는 소리에 민감한 청력을 보유하여야 한다. 이는 사물의 내면을 통찰(洞察)하는 촉수에서 시심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뢰를 줄 수 있다.
네 번째는 자기의 모습에 확고한 믿음이 전재 되어야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서번째는 문화의 힘과 조국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발성을 우회적으로 말하는데서 나라 사랑의 본질이 시 – 문화의 진수라는 강조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런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분리하면서 다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를 보내는 시가 되어야 한다.
창작이란 쉽고도 어렵다 하지만 서두에서 말했지만 접신(接神)을 만나야 깊고도 독자들에게 공감이 가는 시를 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자 하면서 필자의 책임을 내려 놓아야 겠다.
2022. 11. 20.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