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머니의 속옷]

    [수필 기고]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3-02-08 07:51:35


     

    [청송 김성대 시인.수필가 (2)]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머리에 가득 담은 채소와 고구마를 이고 뒤뚱 뒤뚱거리며 쉼 없이 산등성이 돌아 내려오시고 있었다. 힘겹게 느껴지던 어머니의 모습과 늘 다니시던 꼬불꼬불 꼬부랑 산길이 지금도 두 눈에 선연鮮然히 떠오른다. 그 힘든 일을 하시면서 한평생을 아프면 아프다고 말씀 한마디 안 하시는 고집스러운 어른이셨다. 그 많은 고구마와 채소 다발을 머리와 등에 메고 나주, 영산포 5일 시장에 가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돕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님과 함께 시장터에다 장날 온종일 파실 짐을 내려다 드리고 학교에 갔다. 여름날이면 땡볕에 땀을 훔치시면서 마른 수건이 물을 짜듯이 젖은 것을 보며 또 작은 부채를 연신 부치시면서 하나라도 더 팔고 싶으신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랐던 5남 2녀 중 셋째아들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자마자 돌아와 아이스캐키(얼음과자) 담은 통을 메고 나주시내를 돌면서 "아이스캐키 얼음과자"를 목이 터지라 외치면서 돌아다녀녔다. 녹아서 다 팔지 못하면 가지고 와서 어머님께 드렸다. "아! 오늘 많이 못 팔았구나" 하시면서 머리를 쓰다담으셨던 어머니 또한, 새벽 4시에 일어나 나주역으로 가서 내가 배달해야 할 구역의 신문뭉치를 한 아름 어깨에 들고서 나주시내 신문 배달을 마치고 학교에 갔다. 조금이나마 학비를 보태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못먹고 못배우고 가난에 찌들리며 살았던 마지막 보릿고개 세대이다.

    초등학교 졸업 날이 다가오자 걱정이 많았다.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에 간다고 좋아하지만 나는 그럴 처지가 못 되어 숙연(肅然)해지고 있었다. 이제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친구들 틈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도 중학교 시험을 한번 보자며, 보았는데 덜걱 합격했다. 사실 나주읍내에는 나주중학교가 유일했다. 그러기에 학생 수가 너무 많아 더 치열했다. 무조건 다 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합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합격자를 학교 담벼락에 하얀 종이에 이름을 써서 붙였다. 합격자 발표한 날 나는 혼자서 수많은 학부모와 학생들 틈에 끼어서 내 이름을 발견하였지만, 마냥 좋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납부금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기에 그렇게 그렇게 어린 마음에 꼭 다니고 싶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와 꼭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런 나를 아시는지 어머님은 빵 장사를 하시는 분에게 내 납부금을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다 학교에 가서 등록을 마쳤다.

    그래서 두 분의 형님, 두 분의 누님과 함께 더 열심히 노력해서 빚을 다 갚아드렸다. 이런 어린 시절을 눈물겹도록 마음에 담고 지냈던 그런 나를 위해 어려웠던 이야기를 가슴에만 묻어 두고 내색을 하지 않던 어머니의 사랑을 이 어찌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요? 따뜻한 봄날이면 아름답고 고운 향기 날리며 피어나는 들꽃 같은 강한 내 어머니. 나는 우연히 널어놓은 빨래 틈에서 행여 누가 볼까 봐 남몰래 뒷간 빨랫줄에 널어놓은 어머니의 기워진 속옷은 이쪽저쪽 모두 푸른 바다에 띄어 놓은 조각배 같았다. 몰래 숨겨놓은 눈물 같은 모정母情을 본 것 같아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너무 아팠다. 삯바느질에 농사일하시며, 한 푼이라도 더 벌어 공부시키고자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철이 들고서야 깨달았던 아들이다. 밤새 미싱 소리에 깊은 잠을 자다가 깨어 눈을 뜨고 보면 어두운 밤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돌돌 재봉틀을 돌리시며, 5일 만에 열리는 시골 장날에 찾아서 입고 갈 동네 사람들의 옷을 밤새도록 만들었다. 잠시 눈을 떠 보면 바늘이 부러지고 실이 끊어져 바늘귀를 끼어야 하는데 눈이 침침하여 몇 번이나 더듬거리며 계시던 어머니 나는 얼른 일어나 바늘을 바꾸어 드리고 실을 끼어 드리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던 어머니의 그 따스한 손길이 그립습니다.

    그래서 겨우 동네 사람들의 새 옷은 다 해주어도 어머니 자신은 곱디고운 옥색玉色 치마와 저고리 한 벌 입어 보지 못했다.
    농사일과 남의 옷 짓기에 바빠 새 옷 한번 못 걸치면서도 자식들을 위해 웃음을 잃지 않은 산소(酸素) 같으신 어머니다. 흐르는 땀방울을 훔치면서도 "절대로 너희들만은 고생시키지 않겠다." 며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의 기둥이 되어 달라고 눈물로써 기도를 드리며, 믿음으로 각오(覺悟)를 단단히 다지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아! 이제는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고 넓으신 어머님의 은혜를 어떻게 다 헤아리며 어떻게 그 은혜를 갚아야 할까요?

    당신의 기운 옷을 입으시고, 자식들은 고운 옷을 입히며 따뜻한 밥 먹이던 천사 같은 마음을 짙은 향기 나는 아름다움을 그 어떤 꽃에 비길 것인가! 가마솥에 밥을 해놓고 고개를 넘어 십리 길 학교에 간 자식들 오는가 마중 나와 기다리시는 어머니
    식구들이 밥상을 놓고 빙 둘러앉으면 제일 먼저 쌀 톨이 들어 있는 한 주걱 얹어진 아버지 밥그릇이 담고 그다음에는 당연히 어머니 밥그릇이 올라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다 늘 자식들의 밥그릇이었다. 식구들 먹을 양식조차 모자라는 어려운 생활 형편인데도 밥을 꾹꾹 담아 주시며 많이 먹고 빨리 커 세상에 빛과 소금 같이 되라 하셨다. 절망할 때 힘들고 지칠 때 포기하려는 때도 늘 기도하시며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셨던 어머니! 정작 온종일 일하시느라 허기(虛飢)지고 배고팠을 당신의 그릇에는 다 퍼주고 밥이 절반이나 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도 순 꽁보리밥이었다. 주춤주춤 먹지 못하면 "누룽지 먹으면 돼 걱정 말아라" 하시며, 빨리 크거라 머리를 쓰다듬은 손은 소나무 껍질처럼 거칠었던 내 어머니!

    가난 속에서 자식들 키우시느라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의 힘없이 구부러진 허리를 보고 있으면 쓸쓸함과 외로움이 더해갔습니다. 요즘에 사람이 사는 정이 무엇인지 또다시 생각해봅니다, 우리나라 4대 의무 중 하나인 국방의 의무인 병역을 마쳤다. 병영 생활에서 155마일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에서 3년여 동안 동료들과 끈끈한 정으로 부대끼며, 위문품과 위문 편지를 받아 읽으며 한때는 즐거웠던 위로가 되었던 순간도 있다. 밤낮으로 모기와 사투를 벌이면서 풀벌레 사슴의 애타는 울음소리에 고향의 부모님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들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때도 있었지만 무사히 자유의 다리를 건너갔던 그날을 회상하면서 근무지로 들어갔을 때는 무사히 내 발로 자유다리를 건너서 제대를 할까 했는데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무사히 제대했다. 다행히도 최전방은 부식도 잘 나와 군대에서 계급 따라 차등해 주던 월급도 쓸 필요가 없어서 모으고 모아서 제대할 때 주어서 어머님께 갖다 드렸다.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국영기업 한국종합화학 (현 LG화학 나주공장)에 합격하여 근무하면서 지극정성으로 부모님께 효도했다. 그래서 총각 시절에는 동네에서 효자 소리를 들으며 지냈으나 결혼 후에는 그렇지 못하겠더라고요. 아내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면서 책이나 나만 아는 곳에 또 주머니 깊숙이 넣어두었던 용돈을 모아 아내 몰래 드리려다 들켜서 혼이 났다. 왜 돈을 드리려거든 자신에게 주어 드리게 하라고 충고를 몇 번이나 들었던 날들이 기억과 추억들이 바람같이 푸른 하늘에 떠가는 뭉게구름을 보며 달래었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같았던 초가집에 갔더니 너희만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던 어머니의 속옷이 널려 있어야 할 뒷간 새끼 빨랫줄에는 거미줄만 가득히 이슬이 맺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젠 시골집도 낡고 오래되어 거미줄만이 자리를 지키면서 지난날의 애환(哀歡)을 일깨워 줄 뿐이다.

    나는 어떻게든지 돈 적게 들어 대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하여 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4학년 1학기를 마치니 광주대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는 점수가 되어 또 많은 편입학에 나 같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공부를 더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시험을 보았지만 불안했다. 발표하는 날 또 중학교 때와 같이 대학교 내 붉은 벽돌 담장에 합격자를 붙여놓는다. 함께 갔던 친구는 떨어졌지만 나는 편입학 시험에 또 합격하여 다행히도 회사 통근버스 타고 다니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3, 4학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면서 무사히 졸업했다. 더 공부 욕심이 생겨 전남대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가려고 부인에게 말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왜냐하면 우리 자녀 4남매를 어떻게 가르치려고 혼자만 공부한다고 하느냐며 설득하여 그래 우리 자녀들을 잘 가르쳐야지 하면서 포기해 버렸다. 지금 생각하니 몰래 공부 열심히 하여 장학금 받고 다녀볼 걸 그랬다며 뒤늦게 자책을 했다. 그래서 돈이 들어가지 않은 평생교육원 문창과에 입하여 수료를 했다. 그래도 2년동안 전남대학교에 다녔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의 사랑은 주렁주렁 내 가슴에 매달려 있다. 그 가슴 짠한 어머니의 사랑을 보물단지처럼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가끔 추운 겨울날이면 곶감 빼주듯이 꺼내주면서 할머니의 위대한 존재를 전해 주리라며 어머니 사랑합니다.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더운 여름날에 어머님은 소천하셔서 하늘나라에 가셨다. 그래서 우리 5남 2녀의 자녀는 적당히 살지 않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서 모두 자수성가(自手成家)하였습니다. 어머님의 부의금에서 평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다니셨던 나주제일교회에 7남매가 뜻을 모아 "이단례 권사 장학회"를 2천만 원으로 만들었지만, 원금이 4천만 원이 넘었다고 한다.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작은 성금이라도 어려운 학생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도록 지급하고 있다. 저는 어머니의 은혜를 갚기 위해 내 나이 고희가 넘었지만 죽을 때까지 국민연금 110만 원에서 매월 20만씩 '어머니 장학회'에 자동이체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봬요 어머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LG화학 나주공장 총무팀 총무파트에서 30여 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평소에 했던 대로 문학활동과 언론인으로 남아 있는 향기가 나는 인생의 여정(旅程)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2009. 6. 10. 95세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약력(靑松 金成大 詩人)
    *전라남도 나주시 금남길 47-22 출생
    *나주초등학교 54회 졸업
    * 나주중학교 21회 졸업
    *나주한독고등기술학교 5회 졸업
    *1970년도 대입(고졸) 검정고시 합격
    *광주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창과 2년 수료
    *2006. 1. 21. 호남투데이 신춘문예 수상
    *2006. 2월호 월간 한울문학 등단 및 호남지회장 역임

    *현대문예, 동산문학 수필 등단
    *(사)대한민국문화예술교류진흥회 문학대상 수상

    *서울평화문화 대상 수상
    *한국지역방송 연합회 언론인 대상 수상
    *윤동주탄생 100주년 기념 공모전 특별문학상 수상
    *타고르문학상 공모전 詩 부문 대상 수상
    *광역매일 문학상 공모전 詩 부문 대상 수상(2023.1.10)
    *대통령 표창, 내무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표창 외 다수
    *6월6일 현충일 나주시 추념식 자작 헌시 낭송
    *5.18민주화운동 부활제 자작 헌시 10회 낭송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광주문인협회, 전남문인협회 이사, 국제펜광주위원회 사무국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나주지부장(나주문인협회장) 역임
    *대한민국 문학메카 탄생 명인/설립 추진위원
    *가곡 10곡 작사 "오 나주여, 광주장원산악회歌" 외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추모시집 수록
    *찬송 찬양곡 24곡 작사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 외
    *트로트곡 "정류장" 작사
    *시집 7권 : 사랑이 머물다 간 자리, 진달래꽃, 오 나주여, 디카시집, 삶의 정류장
    그리운 사람. 꽃잎은 떨어져도
    *(사)문학시선 명예회장, 좋은문학, 송아리문학회 고문
    *(사)행복을 찾는 봉사회, 광주시민발전연합획 고문
    *행복봉사회 중앙회 자문위원
    *4.19문화원 자문위원
    *2012. 9월 23. LG화학 나주공장 총무팀에서 정년 퇴직
    *서울일보 호남취재본부 광주본부장
    *가락 나주시 종친회(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 회장
    *사)한국청년회의소(JCI) 나주청년회의소 특우회장 3년 역임(2005~2007)
    *전남경찰청 보안협력위원/나주경찰서 보안협력위원장 7년, 고문 8년 15년 역임
    (보우회 "보석같은 친구" 회장)
    ♥명절날이면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김성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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