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여 년 전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가락국의 왕도(王都) 김해를 가게 되었다. 김해 시가지 북쪽에 우뚝 솟은 분산성은 햇빛을 받으면 성벽이 유난히 빛난다. 김해를 자주 갔지만, 오늘은 기온이 쾌적하고 깨끗한 하늘에 뭉게 구름이 분산성으로 나의 발길을 유혹한다. 동쪽에 있는 ‘김해가야테마파크’ 에서 분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평탄하다. 정상까지 군데군데 시야가 탁 트인 곳도 장관이다. 길이 약 924m의 테뫼식 석축 산성인 분산성은 해발 약 327m의 분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천연의 요새이다. 가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김해를 지켜 온 파수꾼이다. 성안에는 그 당시 생활했던 남과 북의 두 개 문 터와 동과 서편의 문 등 몇 개의 건물터도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안에는 우물이 두 개가 있었고,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다.”라고 한다. 성안에서 시기를 달리하는 많은 양의 유물이 발굴됐다. 유물은 조상들의 생활을 추측할 수 있는 비밀 자원이다. 성벽 받침돌 아랫부분에서는 청동기 시대 민무늬 토기와 삼국 시대 경질토기 및 연질토기가 상당량 수습됐다는 기록이 있다. 산성 축성 이전에 사람이 거주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성안의 수습된 유물들은 대부분 고려, 조선 시대 기와 조각과 호기심을 부르는 토기 조각들이다.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한 그 시대 토기들을 보면, 조상들의 지혜로운 생활 모습이 그려진다.
성안에는 현존하는 사찰이 있다. 가까이 가니 가락고찰 해은사(海恩寺)의 알림석이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해은사는 가락국을 건국한 수로왕비 허왕후가 세웠다고 전한다. 가야로 무사히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올 수 있도록 풍랑을 막아 준 바다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이 숨어 있는 이름이라 한다. 사찰 안에는 영산전과 대왕전이 있다. 영산전은 부처님을 모셨다. 대왕전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수로왕 내외분의 영정을 모신 특별한 전각이다. 이곳 스님의 말씀에, “대왕전에 모신 영정은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대왕전 안에는 허왕후가 망산도에서 가져온 지름 15cm 정도의 영험 있는 봉돌이 있다. 봉돌에 기도하면 남자는 재물복이 있고, 여자는 득남한다고 한다. 봉돌 앞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합장된다. 산신각 입구에 남근을 상징하는 괴석은 자손을 번창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영산전 동쪽에 있는 타고봉에는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모신 적멸보궁도 있다. 신자들이 오늘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분산 정상의 봉수대 뒤편에 거대한 바위에 ‘만장대(萬丈臺)’ 라는 글씨와 도장을 새긴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대원군이 쓴 친필과 도장에서 대원군의 숨결도 느껴진다. 만장대는 분산성의 다른 이름이다. 만장대는 조선 시대 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 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됐다. 분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보이는 신어산은 해발 631.1m로 가락국 시조 수로왕과 허왕후의 신화를 간직한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보물의 산이다.
분산 서쪽에는 수로왕비릉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조금 남쪽에 있는 수로왕릉은 그 당시 가락국을 번성하게 한 것처럼 시가지를 안고 있다. 분산 남서쪽 중심부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국을 한 임호산이 우뚝하게 보인다. 임호산은 마치 그 형상이 호랑이 머리 모양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역시 남서쪽 방향에 있는 봉황대공원이 우뚝하다.
분산 남쪽에는 동서로 쭉 뻗은 남해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보인다. 남쪽 저 멀리 보이는 김해국제공항은 낙동강 하류의 삼각주에 있고 여러 비행기가 제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다. 빌딩들이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보이는 김해 시가지는 가야 시대 때 70%가 바다였다고 하니, 이곳은 바다 위에 우두커니 높이 솟아 있는 큰 섬으로 연상된다.
풍경이 아름다운 분산성을 둘러보니 적(敵)이 가파른 길로 올라와 방어하는 자를 공격하기에는 난공불락이다. 그 당시 적군과 아군의 치열한 전투 속의 함성이 귀청을 두드린다. 분산성은 수많은 조상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신령스러운 곳이다. 오늘날 김해를 있게 해준 분산성의 고마움과 조상들의 희로애락을 회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려가는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진다. 발전된 김해 시가지가 점점 눈앞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