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다가오는 것인지 아니면 찾아가는 것인가?
이 물음에는 쉽게 답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이라는 사람의 특성과 표현된 시의 특성은 연결 고리가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운명을 예언하는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쪽 방면에서는 독특한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처럼 시인은 남다른 예지와 감수성이 시적인 열정과 복합될 때 범부(凡夫)와는 다른 감정의 촉수와 예지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시인이 아닌가 한다.
즉 사물을 대하면 일반인이 느끼지 못하는 감흥을 불러올 수 있는 예민한 감성이 있을 때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노래를 만든다.
여기서 시가 시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과정이 다가오는 것과 찾아가는 접점(接點)을 가질 때 비로소 한 편의 시는 탄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에 대한 열정 혹은 열망을 유난히 가질 수 있을 때, 시인의 업적은 시의 숫자와 비례하게 된다.
물론 시의 성격은 시인의 개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개성의 시는 곧 독자에 의해 선택이 되는 것이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으로써 세상의 파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산문과는 다르다.
우주를 감득(感得)하거나 세상을 예언하는 기능조차 포함되어 있을 때 시의 에너지는 폭발력을 가질 수 있으며 또 재미를 넘는 감동의 물살이 일렁이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평화로우면 장식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위기에서 예언의 역할을 한 선대 시인들의 예에서 보듯이 시인은 시대를 살고 시대 앞에 몸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용운 선생이 그렇고 이육사가 그렇고 윤동주 선생이 그렇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 중 시인은 있어도 소설가가 없는 이유는 그런 설명을 보충하는 예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는 정신의 순수한 응축이라 할 것이다.
그럼 이길선 시인의 정신적, 정서적 여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2. 의식의 표정과 언어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숙명이며 삼라만상 우주의 진리이다. 왜냐하면 선택을 할 수도 없는 것이며 조종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질서에서 받아드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곧 삶의 일이 전개되며 변화하고 또는 추락하는 일들이 반복 되면서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은 종국에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 하거나 아니면 타의에 의해 실려 변화를 감수하는 슬픔 기쁨 등을 안고 길을 가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든 생의 문제는 고달프고 또 서러운 일이 인생을 살면서 늘 교차를 만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3. 의식의 전개도
시인에게 오늘은 거칠고 황량한 삶의 현장을 경험하는 공간이다.
신산한 고통이 따라붙고 아픔에 신음하는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이나 없는 일을 구분하는 일들이 줄지어 다가오는 데서 삶의 여유가 차임을 당하는 공간 자기를 곧추세우면서 삶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매우 지난(至難)한 일이기 때문에 시인은 같은 아수라의 공간을 미감(美感)으로 바꾸는 기교를 통해서 상상력의 여행을 떠나려 하는 것이다.
모든 역경과 고난은 결국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창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의 개성을 획득하는 자유 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거친 숨 몰아쉬며 하늘을 향한 긴 코에서
내뿜는 독기 심호흡과 함께 벗어던진 몸체는
시뻘건 노기가 들끓고 있다.
<난로> 중
시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의식과 하나로 일체화를 꿈꾸는 작업이기에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화학적 결합의 일체화이다.
이는 시적 장치인 비유나 역설, 아이러니, 직유, 은유, 등의 장치를 가동하여 시인의 재능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사실 이런 논지를 앞세우면 ‘난로’는 곧 시적 화자인 시인으로 환치하는 것이다.
난로의 노기(怒氣)는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기 때문에 ‘거친 숨’ ‘독기’ ‘시뻘건 노기’는 곧 현실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고 그런 의미를 내장한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시가 된다.
지금 정지된 아라비아 숫자
전설의 손짓이 안개처럼 흐르는
동그란 거울을 닦고 있다.
그 싱싱한 빛을 위해 닦고 있다.
<갈대> 중
정지된 개념 위에 거울을 닦는 열성으로 자아를 들여다보기 위해 나르시스의 모습이 보인다. 이 슬픔은 곧 자기애에 대한 성찰이면서 고민이 된다.
이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있기에 자기 찾기의 방황이 될 수 있다.
이길선 시인은 이러한 물음표에 이은 대답은 오리무중이고 헤매는 갈증은 더욱 차오르는 느낌이지만 안개가 가린 방황 앞에서도 ‘그 싱싱한 빛을 닦기 위해 닦고 있다’ 는 신념이 표백될 때, 현실은 바로 닦음에서 빛을 추구하는 행동에 희망을 심는 듯하다.
어린 시절 벌어진 알밤 터지는 소리와 할머니 동화는
몇 소절이나 부풀어 올라 소소히 꿈으로 여물었는데
고향 땅 멀리서 생각의 노를 저으면 슬픔인 듯 기쁨인 듯
뻐꾸기 울음소리가 마음을 휘젓고 있다.
<고향 그리움> 중
4. 추억 속으로
한스 마이어호프는 시간적 조망(眺望)은 영원한 현재(erernal now)로 축소되었다고 말했다. 더구나 서정시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정의가 응축(凝縮)이라는 특성에서 설명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는 시에서 항상 자리를 잡아 때로는 모호성(ambiguity) 속에 처리된다.
과거는 추억의 장면을 유기적인 맥락에서 오늘과 연결이 되지만 여기로 돌아가려 할 때는 애잔함을 부추기는 정신 줄기의 성격을 갖고 있기에 다소 소극적인 성품의 시인은 고향이나 육친에서의 정감을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묵었던 세월의 때가 밀리고
그 안에서 굴렁쇠 굴러가는
소리가 가벼이 소달구지 실려온다
<창가> 중
3편의 시에 담은 정서는 어린 날의 추억이 파노라마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길선 시인은 어른이 된 오늘에 관심의 집중이 어린 날로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이지만
이는 체험의 단편 혹은 분리화란 말로 설명이 가능하겠다.
체험을 다양성의 결핍이거나 사고의 집중에서 오는 현상이기 때문에 어린 날의 기억에 선명화의 길을 넓히는 것이다.
이는 순진하거나 순수를 지속하고 싶은 갈망일 것 같다.
이는 시인의 마음에 샘물 같은 작용을 하고 있다. 퍼내도 퍼내도 감로수의 기억으로 풀려오는 추억은 생에 이름에 윤이 나는 활력소의 역할을 하게 되는 이유가 내장된 것은 아닐까 한다.
5. 에필로그
정갈하고 깨끗한 시를 만나면 누구나 행복해질 것이다.
더구나 순수와 순진무구한 표정의 사람을 보면 행복에 감염되는 감동의 아름다움이 된다.
장미 향을 맡으면 장미의 얼굴이 되고, 푸른 하늘을 담으면 푸른 그리움이 얼굴이 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시인들의 심리이기에 시를 읽고 좋아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시인의 시는 투명하고 소박하고 정신의 줄기인 것이다.
때 묻음이 없는 공간에서 그의 시심은 가슴을 적시는 산골 물소리 같은 청량감에 젖을 때 우리 시 문학이 더욱 공존하고 넓이와 깊이에 도달하는 풍경화를 만나는 것이 시인의 시적 특색인 모양이다. 1 편의 시에 숙연하고 정갈할 수 있는 것은 시에 함축된 의미의 탄력에서 가능하다면 시의 가치는 더 없는 지고의 이름이 될 것이다.
이길선의 시가 추억의 기억을 깨울 수 있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긍정 정신 줄기가 토해놓는 이미지에서 언어 탄력을 생성하는 이유이자 원인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마무리를 하련다
2023. 04. 11.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