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무게 지적 무게}

    1. 평정심의 미소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3-04-21 10:16:5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언어의 성숙은 정신과 행동에 수반하는 것이라고 (T.S ELLOT)<고전이란 무엇인?>에서 언급을 했었다. 왜냐하면 정신의 원숙은 행동의 원숙으로 이어지고 모든 조건이 언어로 표현될 때 비로소 글의 무게를 감당하는 역할을 갖는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둘의 상관은 인간의 가치와 문학의 가치와 비례되는 등식(等式)을 도출하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고 선한 사람이 선한 시를 쓰는 것만은 아니다.

     

    사상의 고매성이 묻어나는 언어에는 깊이와 맛깔스런 표현이 감동을 자극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은 어마든지 있다. 왜 그런가 하니 고매함은 그런 격식을 갖춘 성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학의 언어는 곧 인격의 수용(受容)이라는 점에서 문학 표현과 인간의 상관성은 궁극의 도달점인 감동에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윤길상을 말한다면 지적이면서 원숙한 성품을 가진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설픈 언어의 과시가 아닌 가슴 속에서 우러 나오는 맛깔 스런 감수성으로 나타날 때 느끼는 삽상(颯爽)함과 풍미가 있는 점에서 남다른 시의 역할이 기대되는 시인이라 본다.

    윤길상 시에는 가을날의 청아한 소리가 메아리로 들리는 뉘앙스에는 안도감과 미소를 동시에 받아보는 반가운 편지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제 그 이유를 추적하는 길을 답파(踏破)해보자.

     

    2. 여정의 상상 속으로

     

    1) 성품의 성찰

     

     

    시는 지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감수성이 시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현학적 욕망의 과시에는 냉소가 발생하지만 비록 눌변일지라도 진실을 내포할 때는 소통의 미학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윤길상의 시에 담겨진 정신의 요체인 듯하다.

    왜냐하면 도시적인 냉철함이나 과학의 칼날이 번뜩이는 자세가 아니라 체온과 체온이 부딧치는 우리네 시골 장바닥의 다감하고 따스한 인정이 스며있는 그런 정서가 시인의 마음에 유려(流麗)한 흐름으로 다가든다.

     

     

    지금 난 먼 곳까지 못갔어요.

    고향이 코앞이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어둠 속에 수 많은 별들만

    주의만 맴돌고 먼 곳만 보이는 아스라한 인걸요.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누군가 그 안에 있을 것만 같아 한참을 망설이다

    문열고 들어가면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나 아닌 나가 되어 금방 나간 것같이 두려워 지네요.

    내 기억 속엔 왜 엄마의 모습이 없나요?

    그런데 자꾸 엄마가 보고파 저요.

    아마도 내 몸에 흐르던 엄마의 피였나 봐요.

    엄마 이 냄새가 나를 살아있게 하나 봅니다.- 중략-

     

     

    <엄마의 연서>

     

     

    윤길상의 시는 부드럽고 지적인 듯하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에는 다양한 언어의 의미를 감추는 기교가 보인다.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쉬운 형태를 만드는 일은 확실히 고급한 방법이고 지혜가 동원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마치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그런가 하면 간과의 헤픔이나 어설픔과는 거리가 멀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우리 곁에 있음으로 느낄 때 정신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다면 윤시인의 <엄마의 연서>는 그런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다.

    엄마의 그리움을 마음으로 안으며 끈질긴 주위만 맴돌고 먼길만 보이는 아스라한 걸요.

    엄마를 만나지 못한 애뜻한 기다림을 피 같다는 주장에는 수구초심과 그리움이 물씬 풍기는 어마의 품이 그립다는 정신의 핵심에는 온갖 애절한 마음이 냄새를 맡는 엄마의 품 속으로 돌아간다.

     

     

    요즘은 너무도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도시인-

    도시 체질은 항상 망각을 앞세우는 것 같다. 결코 떠날 수 없는 심상 깊은 곳에 귀향의 에너지는 인자가 길을 찾는 여정이 시작 된다.

    아마도 윤길상의 정신 인자(因子)는 고향에서 만들어졌던 추억 엄마를 그리는 애잔한 맥락을 이루는 길을 만들면서 시로 연결되는 듯하다.

     

    아무도 보는이 없는 밤이면

    슬며시 다가가 입 맞추고 싶어서

    그 고운 얼굴 한순간도 놓칠 수 없어서

    날마다 매달려 바라만 보는데

    나비 한 마리 날아와 그 꽃에 입을 맞춥니다.

    약이 올라 거미줄로 사방을 엮어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나비는 영영 다시 오지 않고

    그리움 견디지 못하던 꽃 끝내 시들어 버리고

    그 순결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어둠에다 제 몸만 옭아 맵니다.

     

     

    <나만의 사랑>

     

    글은 사람이다는 말은 불란서 뷔풍의 말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시인이다 라는 말도 외도된 말은 아니다. 시 속에 시인의 전 인생을 투척하고 또 사상과 미래조차 내포된 의미의 숲이 곧 시라는 뜻을 첨가하면 한편의 시는 곧 시인의 모든 면을 파악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요즘 애환 동물과 함께하는 현대인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그 꽃에 입을 맞추지 못하게 거미즐로 사방을 엮어 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나비는 영영 돌아오지 않고” “죄책감으로 나비의 기다림을 깨우치는 일은 대상을 포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면하려는 기다림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윤길상의 정신이 펼치는 지도인 것 같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공식이 대입되는 사물 관찰법이라는 뜻이다. 이를 굳이 휴머니즘이라는 말대로 대신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말이 될 것 같다.

     

     

    2) 자연의 식물 정서

     

     

    시인마다 개성의 진로에 따라 관심의 분야가 다르게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생적인 환경에 의식의 지배를 조종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아는 것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어린시절 어머니께서 만든 음식을 많이 먹던 시절이 성인이 되어서도 그 음식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우리 모두 증명되는 사실 아닌가?

     

     

    윤길상은 평택에서 자라나 조그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추억을 쌓고 성인이 되어서는 도시에서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귀향하여 전원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세상의 아귀다툼 속에서의 시는 별로 없으며 거의 모든 작품은 전원에서 달맞이 꽃』 『자귀나무』 『제비꽃』 『연꽃』 『들꽃등 대부분 식물로 구성된 향기로 나타내는 시로 구현되는 듯하다.

     

     

    너에게서 우주는 붉은 빛으로 펼쳐지고 모든 것은 침묵에 잠기는데

    네 안에서 언어들은 꽃이 되고 나비가 되고 새가 되어 어느새

    낮선 것들은 친숙하게 다가왔지.

    어릴 적 돌담길을 걷는 것처럼 초가집과 골목사이

    아이들 소란함과 어른의 기침 소리 계집에 봉긋한 가슴 수줍은 듯

    잔잔히 머물던 햇살까지 쉴새 없이 다가오는 영상들

    꽃잎 위에 끝없는 몽상으로 펼쳐졌지

    한참을 신비 속에 길 잃고 헤매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

    네 우주에 끝없이 여행하는 실 바람이 되고만다.

     

    <자귀나무>

     

     

    시는 사물의 비유에서 변형(deformaton)의 기법인 것이다. 물론 비유와 상징 혹은 역설 등 모든 기교를 다하여 사물의 본질에 이른바 몰개성의 이론을 더하면서 의미의 확장을 꾀한다. 가장 핵심어가 시인의 시적 의도와 맥을 같이 하는 이유-

    어릴 적 돌담 길” “아이들 소란” “초가집” “골목들들이 다가오는 소란스런 영상의 중심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의 돌담 풍경이 있는 골목이다. 그 공간을 돌아보니 한참을 신비 속에 길 잃고 헤매다/사랑으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로 현재의 공간이 화면으로 펼쳐진다.

     

     

    정신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모든 동물이 갖는 특징이다. 회귀(回歸)의식과 더불어 자아의 중심을 거기에 놓고 의식의 넓이를 확대하는 것이 곧 삶의 공식이라면 사람은 항상 원점에서 지향을 갖는 것이 정신으로 압축된다. “자귀나무는 어디에나 핀다. 다시 말하면 공간을 배타적으로 받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평균률로 나누어 위치를 정하지만 자귀의 이미지는 도시나 시골을 불문하고 같은 계절에 꽃이 피고 향기를 발산한다. 그러나 시인은 수평적인 공간에서 자귀나무를 꺼내어 고향에 절절함에 자신의 사고와 추억을 의탁하는 고백이 선행된다.

    일종의 상상의 승화라는 뜻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잘 아는 것은 정확하게 또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잘 알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에메모호한 것을 표현하면 결국 실패의 문패를 달게 되는 위험 때문에 경험했던 것 혹은 익숙한 것이 맨 앞으로 나오는 표정이 곧 시의 주재료가 된 것. 이런 요소가 전체 맥락을 지배하는 요소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마음대로 다가와 온통 흔들어 놓고는 말도 없이 떠나가

    터진 심장 끌어안고 이렇듯 애만 태운다.

    혹여 다시 만날까? 꿈길로 찾아갔지만 그 모습 볼 수 없어

    행여 다시 찾아 올까? 그 길에 무성히 피어납니다.

     

     

    <들꽃> -

     

     

     

    흔한 것은 때론 그리운 것이다. 아무 이름도 없는 풀꽃일지라도 언젠가는 반가운 이름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오래전에 기억으로 묻어 있는 인연일 것이다. 더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들어 있는 요소들이 기억의 층을 뚫고 나올 때 시간의 벌판에는 이미 과거라는 이름으로 문패를 바꾸어 달았을지라도 함께 있던 정서가 춤을 추게 된다. 어린 날등의 추억이 말이다.

    자연미는 자족성과 자발성의 특성이 있지만 예술은 이와 달리 노력이라는 담론을 개입하여야 성립된다.

    자연미를 노래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에 애정의 결과-

    이는 인간의 손이 개입하지 않을 때 가장 순수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예술성은 자연과의 대립이 아니라 공존과 조화에서 미적 순수성은 더욱 고양되는 경지를 방문하기 때문에 시인은 자연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재료로 시인의 감수성이 하나로 통합되는 질서의 구축을 용해하는 작품이 윤길상의 자연관이자 놀이가 되는 것 같다.

     

     

    3. 작가의 상표<작품>

     

     

    시는 시인 정신의 바로미터라면 한 편의 시에 대한 분석은 항상 치밀한 뇌수(腦髓)의 조력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는 종합적인 정서의 흐름을 느끼는 일에 더욱 깊이를 느낄 수 있다면 윤길상의 시는 산뜻한 명칭을 감지할 수 있는 조짐이 넉넉하다.

    물론 곰삭은 깊이와는 다르지만 정서 균형의 안도감과 언어 운용의 진지성, 더불어 사물을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나 언어 탄력의 요리 솜씨는 더욱 많은 진전을 가질 수 있는 바탕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앞으로 윤시인만의 상표를 부착한 독특한 시가 생산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논지를 내려 놓는다.

       

     

    2023. 04. 21.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그대들은 시의 맛을 아는가?]

     

    [대중문화평론가의 베스트셀러 책 1]

     

    [주산 벚꽃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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