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란 수축, 언어 운용 이미지, 상징, 리듬, 비유, 페러디, 혹은 역설 알레고리 등 시론의 부피는 너무나도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겠다.
요즘은 팽창적인 언어 운용으로 리얼리티를 강조하고 사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산문이란 언어의 사용에서 시와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격식과 방식이 무너지는 조선 후반기에 등장한 사설시조는 운문에서 산문으로 전환을 가져온 과도기적 문학이라 보기 때문이다.
즉 시조이거나 빗대어 조롱하는 정치적 수사는 그 당시 작가들의 신분이 양반에서 점차 서민들이 시(詩)의 영역을 확장하는 문학 생산 주체의 이동 즉 격식 파괴의 일환이었고, 대부분 전해 내려오는 소설이 작자 미상인 이유도 서민이 그들의 애환을 소화하는 그릇의 일종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격식을 따지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의 산문에서보다 시(詩)에 적합한 욕설이나 불합리한 사회의 현상을 수용한 현대의 민중(民衆) 시(詩)는 확실히 길을 잘못 들은 방향성의 명칭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누구나 같이 가야 한다는 이중성-
요즘으로 말한다면 펜데믹(Pandemic)으로 뭉쳐진 집단의 민중 타령 즉 80년대를 말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사실 펜데믹을 정확히 명사적으로 말한다면 세계적 유행병이라는 뜻이지만 이상한 논리를 붙혀 요즘에는 유행어가 되었다고 하지만 -
다시 말하면 시(詩)로 소화 시켜야 할 민중 시(詩)가 되었다는 말에도 일간 의견이 엇갈리는 것이 사실이며 적확(的確)할 것이다.
그러나 시(詩)는 짧다는 이유만으로 행과 연을 끊어서 온통 70~80년대 후반을 도배질 한데는 명백히 무지(無智)가 한 몫 했다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근대적 학문적 논문을 보더라도 말이다.
한편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황색 저널리즘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민중문학의 어페적 학문관이라 하겠다.
문화를 담당하는 기자들의 대부분이 문학 소양이 없는 사회적인 잣대로 문학을 바라보는 사시(斜視)의 편견으로 문학과는 다른 소리로 지르기, 게임에 혹은 저널리스트의 특성이 한 몫을 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60년대 박정희 집권 이후 민주화, 민족, 민중, 통일, 리얼리티, 반미 등의 현란한 상품품목을 제시하면서 한국 현대 문학사를 분탕질한 내용들이 정작 한국 문학사에 기여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에-
문학으로 승화된 작품성의 작품이 희소한 이유는 아무래도 사회현상의 소화불량 시절이 아니었던가.
사실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았던 설익은 민중 시를 부추긴 결정적인 인자는 문학 비평가들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주로 외국 문학을 전공한 문학 비평가들이 우리 문학을 이중적 잣대로 바라본 너무나도 잘못된 시각이 주요 원인이 아닐까?
그 최초의 인물은 백낙청 선생을 꼽을 것이다.
그가 발간한 《창작과 비평》은 80년대 결정적인 오도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며 1966. 1. 15. 발간한 겨울호에 출간된 《창작과 비평》은 박정희 독재체제와 산업화로 진입하는 길에서 지대한 영향을 당시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묵과했기에 계간지의 내용-
이호철 선생, 김승옥 선생의 창작소설과 JP, 사르트르의 『현대의 상황과 지성 정명환 역』
그리고 CW.밀즈의 『문화와 정치 백낙청 역』 유종호의 『한국문학의 전제 조건』과 3편의 서평과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등 총 9편 중 백낙청 선생의 글은 두 편을 실었고 132페이지였다.
물론 내용에서 특별한 편집상 특집도 없고 또 대단한 기획력도 들어있지 않은 이 계간지는 발간사도 편집 후기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평범 이하의 잡지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잡지는 시대의 기류에 따라 민감하게 편승하는 시대적 운이 썩 좋은 잡지사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독재라 참칭 하면서 정치에 상승기류를 형성하면서 그 인기는 대학가를 모두 점령했고 이 잡지를 읽지 않으면 지식인이 아니라는 현상이었지 않았나?
더구나 대학가를 다니는 영업사원의 권유부터가 그러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사회의 불합리를 배설하는 통로의 막힘으로도 이유였지만 그 시절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가 현재 이렇게 세계 10대 강국으로 올 수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장준하의 《사상계》나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와는 다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사실상의 창간사와 같은 백낙청의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는 영어를 전공했던 실력을 여과 없이 나타낸 삐뚤어진 글이었으니, 순수한 정신이나 이념은 프랑스 대혁명 이래 득세한 유럽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는 등의 논지는 실로 설익은 글이었지만 그의 문학적인 소양의 일단을 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그 당시에 대부분 이데올로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민중 민주라는 타령에 쓰나미가 지나가듯이 하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그리고 김지하 시인의 「오적 시(詩)」는 당시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의도된 의식 충돌의 현상이었으니 서구의 순수와 참여의 구분으로는 분간할 수 없었고 판별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에서 출발한 순수의 개념과는 달리 조선 양반계급 –
농경사회 권위주의, 생산성 혹은 생활 태도의 비판에서 당시의 기력 없는 작품이나 작가들을 대입하였으며, 이와는 다른 대척적인 경향의 문학을 현실 참여라고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글이 이해 논리의 전부를 차지한 논지는 별로 뛰어난 글은 아니었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글 속에는 간과할 수 없는 한국문학에 대한 무지가 여기저기 산견(散見)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앞서 논지로 풀어 보았으나 지금 우리의 현대 문화 현상을 서양의 잣대로 대입하는 데서 오는 잘못을 그의 표현으로 예를 들어보련다.
우리의 민속 예술과 실학사상에 대해 새 세대의 대다수 문학인이 아는 바도 없고 알려고도 않는 것은 섭섭하기 이를 데 없는 일로서 새 문학의 창조에 적지 않은 차질을 일으키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산 전통의 유무를 가리는 데는 이러한 섭섭한 사실이야말로 결정적이다. 『허생전(許生傳)』과 판소리가 정철(鄭澈) 김만중(金萬重)을 숭상하는 이에 대한 응수는 될지언정 지금 펜을 들고 글을 써야 할 한국의 시인과 작가들의 길잡이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문학의 발달을 위해 우리는 세계역사 전체에서 감명 깊은 선례를 찾고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의 고전은 물론 우리 과거의 구석구석에서도 이월해 올 수 있는 것은 다 해와야겠지만 무엇보다 앞서야 할 인식은 우리가 소설이나 기타 산문으로 가야 할 길을 부모의 피와 살을 받았 듯 이어받은 문학 전통이란 태무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동양적인 전통은 그 명맥이 끊어졌고 대를 이어 뜻있게 되살릴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으며 고대 그리스나 근대 서구의 고전 문학을 모체로 삼기에도 우리의 언어와 풍습과 제반 사정이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1960년대의 한국에서 문학의 기능은 건전한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다. 라고 담담히 말해 넘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선 백낙청 선생의 글은 서구의 잣대로 물론 영문학 전공이기에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편향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동서의 고전을 읽고 또 대응하는 일은 옳은 일이지만 우리 문학에는 〞전통이 태무(殆無)하다는 말은 너무나 잘못된 문학적 모순인 것이다. 러시아의 문학은 풍토와 전통에서 나왔고 미국의 문학은 미국적인 언어와 사고 그리고 풍토에서 탄생 되었듯이 우리의 문학은 우리의 전통과 환경에서 나왔다는 환경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것이다.
가령 일본의 5,7,5의 하이꾸는 일본의 전통과 환경에서 나왔고 대하(大河)와 과장(誇張)의 중국문학은 중국의 대륙 세계의 중심의식에서 나왔다면 3장 6구 45자의 시조는 우리의 풍토에서 나왔다는 점일 것이다.
전통이 태무 -〞거의 없음은 잘못된 이해의 산물이 아닐까?
이런 잣대는 우리 민족이 살아온 반만년의 역사의 맥을 잘못 이해하였기에, 이 같은 사시(斜是)의 순진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용의 발톱이 다섯이 아니라 넷인 이유 또한 우리 삶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궁궐은 100칸이고 99칸이 최대로 허용된 양반의 집이라면 3칸 초옥이 서민의 집, 이론은 있지만 신라의 향가(鄕歌)가 도시 노래가 아닌 시골 노래인 이유와 정곡(正曲)이 아닌 별곡(別曲)인 이유, 수원백리라는 말 이해, 백성은 백색(白色)의 옷을 입어야 하는 애환을 알 리가 없기 때문에 전통이 거의 없다는 오해가 한국의 문학을 이해하는 잣대로 잘못 적용된 것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외국 문학은 이해하지만 한국문학의 줄기와 바탕을 모르는 일로 시작된 불행이었으니, TS. Eliot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은 읽었을 터이지만 오늘의 나는 과거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정몽주의 『단심가』를 보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를 예로 하고 또 필자의 선조이신 문경공 이직 선생의 『오로시』“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 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
필자의 선조이신 정당 문학 대제학 문열공 매운당 이조년선생의 『다정가』“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은 삼경인데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들어 하노라” 이 얼마나 대단한 시조인가.
해석, 주석을 설명 없어도 모두 알리라
자정하면서 상대를 꼬집는 무한 의식의 끈기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삶이 언어로 표현된 도식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남의 잣대로 자기 집을 바라보면 슬픔이 남는 이외에 자학과 비극의식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필자가 어느 대상을 놓고 조리하는 것은 모순이라 여기며 그런 축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잘못된 일은 잘못된 것이라 말하는 자가 진정 작가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산 속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자가 문화 권력 있다 한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문화적 이념 전쟁을 지금에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마는 미려한 산속에서 사는 무명의 작가라 하지만 말할 것을 말해야 한다고 하는 스승님의 말씀에 마음을 굳게 믿는다.
매쉬 아놀드는 “종교를 대신하는 것은 시(詩)라고 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결국 문학의 임무이자 사명이라는 뜻이 아닐까?
종교는 인간 사랑의 헌신에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이나 사고는 화려한 문학의 정원을 이룩하는 길이 된다면 인간의 사랑과 구원의 매시지를 향해 문을 열어 놓아야 할 보편적인 소명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것도 아닌 오로지 문학의 본령을 찾아가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익어갈수록 전달의 입구를 장식하는 화려함이고 꿈으로 이동하는 단계로서 미감(美感)이 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인간은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점에서 이 같은 현상을 적시한다면 더욱 깊이가 넘치는 글이 나오지 않을까 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5. 1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