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만제’는 조선후기 수원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에 축조한 저수지로 1799년(정조23)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일련의 사업으로 내탕금 3만 낭을 들여 축조하였다. 이에 앞서 정조는 1795년(정조19)에 장안문 북쪽에 만석거(萬石渠))를, 1797년(정조21)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만년제(萬年堤)를 축조했었다.
대규모 수리시설과 둔전 개간이 크게 성공하자 "농가의 이로움은 수리(水利)만한 것이 없다"고 인식한 정조는 만석거와 만년제의 3배 규모에 달하는 축만제를 조성했다. 축만제의 규모는 문헌상 제방의 길이가 1천246척, 높이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돼있다.
제방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듯 아직도 고목들이 서 있다. 아울러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해 이곳에서 생기는 수입은 수원화성의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했다는 것을 보면 제방 아래 몽리구역(물이 들어와 관개의 혜택을 받은 곳)의 농지는 국둔전(國屯田)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수원화성 서쪽에 있어 서호로 불리기도 한다. 축만제의 가치는 2016년 ICID(국제관개배수위원회)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2016년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