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족문명진흥원․마한문화원 마한백제 천년사 학술대회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3-07-02 17:04:47

    한민족문명진흥원마한문화원(원장 이현채)은 지난 629일 광주 5.18 기록관에서 마한백제 천년사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마한과 백제가 1천년 동안 이명동체(異名同體)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백제는 마한이 스스로 건국하고 통치했던 나라였다는 점에 대해 주제발표와 토론 및 집담회를 벌였다.

     

    동 학술대회는 전라도천년사와 관련해 수많은 논란이 제기되는 가운데 과연 마한과 백제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행사 주최자인 이현채 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양직공도백제국사의 첫 머리에 백제는 래이마한에 속한 나라였다.[百濟舊來夷馬韓之屬]’고 기록하고 있다면서, 백제는 건국된 이후부터 멸망시까지 마한과 이름만 다른 같은 나라였다.”고 주장했다.

    [마한 백제1천사 연구 학술대회.1]

    주제 발표자인 박동 박사(마한문화원 학술위원장)는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의 묘지에 백제 역사가 1천년으로 기록되어 있다면서, 이는 기원전 296년 연나라 진개의 공격을 계기로 건국된 마한의 역사를 서기 660년 멸망한 백제 역사와 합한 것(956)이라고 주장했다. 1919년 낙양 북망산에서 출토된 부여융묘지명(682년 기록)에는 양곡에서 처음 나라를 열어 영웅을 칭하며 할거하여 군림한지 1천년이 되었다.[啓祚暘谷稱雄割據一方跨躡千載]”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백제 멸망 후 마한의 남은 무리들이 이리와 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고 요동 바닷가(遼海)에서 올빼미처럼 폭력을 행사했으며, 환산 지역에서 개미떼처럼 세력을 규합하였다...이에 공을 웅진도독으로 삼고 백제군공에 봉하였으며, 이어서 웅진도총관 겸 마한도안무대사(馬韓道按撫大使)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한 백제1천사 연구 학술대회.2]

    박동 박사는 중원의 모든 사서에 백제의 시조는 구태(仇台)로 기록되어 있다며,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도 김부식이 구태가 백제시조 중 한 사람이며, 자신은 누가 시조인지 모르겠다.”고 기록했다는 점을 들어 대륙을 망라한 백제 시조는 구태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서기 200년 북경 남쪽 대방고지 또는 마한고지에서 구태백제가 건국되었다면서 이는 마한과 실제로 한 몸을 이루던 나라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강단사학에서는 백제 시조와 관련해 온조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 왜 중원 사서에 구태가 시조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백제 사신이 수시로 드나들던 중원의 모든 사서에 시조가 구태라고 기록된 것은 백제 사신들이 자신들의 출자를 그렇게 밝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열도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마한의 명칭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구다라(큰나라) 백제가 바로 마한백제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전방후원분 등 묘제, 새발 문양의 생활토기, 나주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의 물고기 문양 금동신발과 흡사한 후지노키 고분 출토 물고기 문양 금동신발, 나주 영동리 고분 출토 인골의 DNA 분석 결과 등은 모두 열도가 영산강 나주 반남에 치소를 두고 있었던 월지국 마한백제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병도씨가 일본서기신공왕후 49년조에 입각해 한성 십제의 근초고왕이 가야 7국을 정벌하고 전남의 마한 침미다례를 도륙했다고 해석한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위라면서 가라 7국 정벌전쟁은 나주 반남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한 월지국 진왕이 벌인 포상팔국전쟁을 신공왕후기에다 옮겨다 적은 것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따르면 포상팔국전쟁은 209년과 212년에 벌어졌으며 나주의 보라국(保羅國), 즉 발라국(發羅國)이 주도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신공이 마한 진왕의 장수였던 목라근자에게 명령한다고 기록한 것은 고대 사회 군대의 지휘계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엉뚱한 기록으로 일본서기백제기등을 참조해 짜집기된 사서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더 중요한 것은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대당평백제국비명에 백제 멸망시 나·당연합군 장수들인 소정방과 조계숙의 직책이 각각 우이·마한정벌총사령관과 우이도부총관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구당서삼국사기신라본기에 신라 김춘추의 직책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이족은 산동 등주 일대의 토착세력으로 래이족과 함께 고조선을 건국한 구이의 대표세력이다. 이들은 영산강 유역과 산동성, 하북성 등지에 둥지를 틀었던 월지족과 동일한 부여족으로 마한의 핵심 씨족이었다. 그동안 사학계에서는 한강 유역에 위치한 강력한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켰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박동 박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 고대 문명은 수시로 범람하여 엄청난 뻘이 형성된 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강은 영산강에 비해 고대 문명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하였으며, 왕성의 기초인 주춧돌 하나 발굴되지 못해 유네스코에 등재되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했다면서, 실제의 백제는 공주와 부여 일대에서 영산강 마한 월지국의 지원을 받으며 중원의 대륙백제를 운영해왔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구당서흑치준묘지명에 의자왕의 백제는 뻘의 나라(澤國)로 북경 남쪽의 요택에서도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부여융묘지명에는 백제가 건국된 곳이 양곡(暘谷)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상서요전에서 “{요임금이} 희중에게 명해 우이(嵎夷), 즉 양곡에 살게 했다는 기록, 그리고 사고전서에서 고조선은 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 등과 일맥상통한다. 즉 마한백제는 고조선을 승계한 나라로 영산강 유역에 근거를 두었고, 한반도의 공주와 산동성의 거발성[현 치박(淄博))] 등 두 곳에 왕성을 두고 있었던 연방국가였다. 실제로 북사백제전에는 백제의 선대가 대대로 마한의 족속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태가 시조로서 왕성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공주)으로 부른다[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영산강 우이 마한 세력의 지원을 받아 나라를 운영하였으며, 실제로 중국의 다수 학자들도 백제를 우이족의 나라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민족문명진흥원마한문화원은 연내에 마한 월지국(月支國)의 성립과 발전’, ‘고조선과 마한의 역사를 품은 영산강 고대 문명을 주제로 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해 마한백제의 정치적 위상을 올바로 정립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화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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