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3-07-07 09:02:49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중학교 시절 여자 음악 선생님을 사모한 적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은 15세 때 천관녀(天官女)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진평왕 31, 609년 봄이었다. 서라벌 북천(北川) 변의 버들가지에도 물이 올라 푸르르기 시작했다. 서라벌 근처의 복숭아밭에는 도화(桃花)가 만발하고, 노란색이 선명한 깃털을 가진 꾀꼬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계절이었다.

     

    이 화창한 계절에 도화 사잇길로 말을 타고 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품 있어 보이고 귀공자 타입이었다. 매일 화랑들을 만나 무예를 닦으러 가는 중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

    한 여인은 이인로(서기 1152~1220)파한집破閑集에 천한 집인 예가(隷家)의 여자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은 아닌 것 같다. 그 후의 기록으로 기생이라는 표현도 있으나, 기생은 더군다나 아니고 신라의 여사제(女司祭)로서 처녀였다. 여사제는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주관하는 사람이다. 유럽에서도 제사를 주관하는 여자는 처녀로서 제사 후에는 왕과 하룻밤을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여사제는 자기 집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는 김유신 화랑을 사모하게 됐다. 하루는 무술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여사제가 김유신 화랑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고는 집 안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집 밖에 말을 세우고, 누구인지 궁금하여 담 너머로 바라보았다.

     

    여사제는 김유신 화랑을 보면서 미소를 띠며 상냥스럽게,

     

    누구십니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김유신 화랑은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 여사제가 계속해서 들어오라는 말에 안으로 들어가니,

     

    서라벌 장안에 김 왕손(王孫) 유신공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사제의 머리와 몸에서는 향기가 나고, 앉으라고 권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여사제 앞의 탁자 위에는 불교 경전과 당나라 시인의 시집이 놓여 있고, 벽에는 가야금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유신 화랑의 눈에는 여사제가 고상한 취미를 가졌고, 모든 번뇌를 해탈한 처녀로 맑게 보였다.

     

    그제야, 김유신 화랑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여사제의 몸종이 술상을 가지고 오는데, 몸종도 여사제와 다름없이 깨끗한 차림이었다. 몸종은 김유신 화랑 앞에 술상을 놓고는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나갔다. 여사제는 정중히 절을 하고서 술을 권하면서,

     

    세상에 영웅호걸도 많다지만 김 왕손 같으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천관(天官)이라고도 하고, 선랑(仙娘)이라고도 합니다.”

     

    김유신 화랑은 아직도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천관녀는 술을 계속 권하면서,

     

    화랑 오계에 술을 먹지 말라는 계율은 없으니 한잔하십시오.”

     

    이윽고 김유신 화랑은 한잔 마시면서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고는 천관녀에게도 술을 한잔 권했다. 몇 잔의 술이 오갔고,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에게 가야금 타기를 권했다. 가야금 소리에 마음을 풀고 다시 술을 마셨다. 많은 시간이 흘러 황혼이 되었다.

     

    김유신 화랑이 집으로 가려고 하자, 천관녀는 다시 술을 권하면서 춤이 나오고 노래도 나왔다. 김유신 화랑도 흥겨워서 같이 춤과 노래가 나왔다. 그 당시 화랑들이 부르던 노래는 도령가(徒領歌)나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사가 전해지지 않아 무척 아쉽다. 이제 김유신 화랑이 일어나려 하자, 천관녀는 취한 눈에 김유신 화랑의 소매를 잡았다. 천관녀는 선랑이라 했다. 선랑은 서낭당에서 제사를 주재하는 여사제로서 세속의 인연이 허락되지 않은 위치인데 김유신 화랑을 엄청나게 사모한 것 같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 화랑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꾸짖었다.

     

    나는 네가 장차 큰인물이 되기를 갈망했는데 천관녀의 집에 출입이나 하니 어찌 장래를 바랄 수 있겠는가?”

     

    김유신 화랑은 뜰 아래에서 머리를 숙이고,

     

    다시는 출입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후로는 천관녀의 집 근방에도 가지 않았고, 집에서 병서(兵書)를 읽고 낭도들과 화랑정신을 길렀다. 부모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천륜(天倫)을 따랐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서라벌에 화랑들이 모였다. 이들은 말달리기, 활쏘기, 검술, 가무 등을 했다. 모두가 몸이 건강하고 미남자로서 무예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한 화랑들이었다. 머지않아 백제, 고구려를 통일할 기세들이었다. 김유신 화랑은 행사를 마치고 다른 화랑들과 음주한 것이 몹시 취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말 등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말이 가는 대로 있었다.

     

    말이 갑자기 멈추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천관녀의 집 앞이었다. 천관녀는 김유신 화랑을 보자 기쁘기도 했지만, 발길을 끊은 데 대하여 원망스러워 눈물 흘리며 나아가 맞이했다. 그 순간 어머니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유신 화랑은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두 입술을 깨물고 애마(愛馬)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가 평생 자기를 사모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천관녀가 살던 곳에 절을 지어 천관사(天官寺)라 불렀다. 천관사는 김유신 화랑이 살던 재매정에서 남천(南川) 건너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리에 있다. 김유신 장군은 애마를 죽인 자리를 참마항(斬馬巷)'이라 했다. 이후 사람들은,

     

    김유신의 삼국 통일 위업은 참마항에서 시작됐다.” 라고 이야기했다. 천관사는 서기 2000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서기 202110월 천관사 복원 공사장에 갔더니 경주시청에서 팔각석탑 복원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천관사가 복원되고 있는 안내판의 중앙에는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의 그림에 말은 목이 베어 넘어져 있고 천관녀는 놀라고 있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는데 김유신 장군의 마음에도 첫사랑을 간직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의 각오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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