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누구나 그만의 삶의 세계가 들어 있어 조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그려낸다.
시인이 생각하고 살고 있는 세계의 정경은 곧 시의 표정을 관리하는 공간으로서의 작용을 하기 에 시는 곧 시인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단면을 조감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시라는 존재는 낯설게 그리고 언어 기교를 통해서 위장한다 해도 시가 고백적인 범주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시는 곧 시인 자신의 모습을 은연중에 투영 시키게 된다.
관념적 고답의 세계를 살아가는 시인이나 일상의 사물에서 영감을 포착하는 시인, 등
이미지의 성향은 저마다 다른 특성을 자극하면서 시의 표정을 관리하며 그리는 것일게다.
왜냐하면 사물이 시인에게 영향을 주면 시인은 상상의 그물을 펼쳐서 조합 또는 다른 공간으로 자기만의 시세계를 재촉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인의 생활과 상상력이 결부하면 새로운 창조의 동력은 생활환경과 밀접하게 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 생활공간은 기하학적인 도시의 과학메카니즘일 수도 있고 또 전원의 훈풍이나
흙의 생명에 대한 관심과 소화가 시심을 자극하는 역할로도 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물확적인 현상의 최종 목적지는 상상의 근거가 시인의 생활 혹은 삶의 주변 환경과
손을 잡아야만 시심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시는 고답적인 혹은 관념의
배회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메시지라 한다. 물론 그 메시지는 시적인 언어의 미학을 도출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이나
알레고리(풍유) 혹은 상징의 숲을 만들어 삽상하고 때로는 눈보라와 폭풍의 맹위를 언어로 담아야 하는 변형의 미학이 곧 메시지의 간접성을 뜻한다. 그러나 독자가 닥아 오는 경로는 친절한 설명이 아니라 우회의 손짓을 통해 스며 와야 한다면 그 만족의 심사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증명된다.
여기 이곳의
내 안의 질서의 원점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 곳에 오면』 중
아마도 자동차와 아파트의 관리 혹은 리모컨으로 조작하는 머신의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더라도 소록도의 자연에 시정신의 원점 의식을 투영하는
사고에는 만족과 행복의 출발이 시작된다.
사람을 만나서가 아니라 자연을 깨닫고 자연의 은혜와 충만을 터득했기 때문에 새롭게 느끼는
정서의 감흥인 것이다.
『언제 꽃피니』
묻다보니 그새 개울 건너에
동면을 이겨낸 물고기가
인기척에 낯을 붉히니
매화가 웃는다.
소록도 하루는 어 여 가라
내 익어가는 순간보다 더 빨리
가고 있다.
『세월』 중
흥미는 열망을 달성하는 속도에 먹혀 버리는 것이다.
좋아하는 시간은 그새 지나고 시간의 무료를 달래는 것,
때문에 시간의 존재가 부재한 곳은 행복이라는 것이 하는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나무에 꽃이 언제 피는가를 묻고 물어 언어가 그립지만 인간과의 언어가 아니라
자연과의 매화가 웃는 상상이나, 꽃에게 말을 거는 나보다도 더욱 빨리 가는 시간을 보며
존재자의 진정한 언어 교감이다.
자기를 잊는 순수한 공간에서 충만감을 느끼는 행복한 발상인 것 같다.
소록도에서 정신의 원점을 찾는 시인의 시는 생명으로서의 활력을 찾으며 가득한 열정을 분발
시키는 촉진제가 되는 것 일게다.
소록도에서의 외로움을 시적 정신으로 승화 시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싶다.
편지를 써봅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이들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서서히 하나씩 ego를 세워
내게로 오네요.
『그대에게 편지를 써봅니다』 중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이제 새로운 깨달음이 발동되는 것이다.
이는 그대라는 대상과 나와의 관계에서 지금에서야/묻고 물으면서/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와 같은 깨달음이 일어난다. 이는 지금에서야 편지를 쓰는’ 시간성과 거리의 인식에서 그대라는 대상은 더욱 애착으로 변하는 감수성이 소록도에서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한 대상의 발견은 곧 자기의 확충이면서 계기가 소록도라는 공간의 만족에서 나오는 고배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위안과 안도감을 주는 지명으로 시인의 정신 깊은 곳을 장악한 발성임을
증명한다. 이 편지는 어느 한 특정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환치
하면 그 다음 메시지는 그리움을 불러오게 하는 정서가 앞장선다.
그 어느 때쯤
보다 더 어린 날까지
이렇게 그렇게
긴 세월을 두고
생각나는 사람을 오늘은 정말 보고 싶다.
『오늘 사람이 보고 싶다』 중
시간의 여유와 관조는 그리움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어디든지 내가 만족을 한다든지 안주하게 되면 또 다른 상상의 문을 열고 그 곳으로 사연을
보내고 싶은 충동이나, 생각나는 사람을 오늘은 보고 싶다. 의 여유가 보인다.
의식의 창문을 열고 추억을 불러들이려는 시인의 마음에는 오랜 시간의 벽을 넘어 친근하고
사랑 깊은 여유의 마음으로 세상의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그대가 보고 싶다. 라는 미지의 공간으로 의식 여행을 떠나게 된다.
산 속에 내리는 비
개울에 내리는 비
한 송이 장미위에 내리는 비
내 가슴 추억의 한 가운데 내리는 비
그 것은 모두가 시인 것을
『소록도에 내리는 비』 중
봄이던 가을이던 겨울이던 온통 비로 통일된 의식이다.
소록도가 비가 되고 비가 소록도가 되는 통일은 이 통합된 의식의 모습이 보이지도
보일 것도 없는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거기에서 나라는 존재는 결국 하나의 원융 속에
물성이 없어진 자유 정신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자유 정신은 시가 선의 경지를 방문하는 길을 만나는 것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는 그렇게 내린다.
시인의 마음에도 충만의 이름으로 비가 되고 소록도가 극점을 방문한 시인은 물과 비와 소록도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시는 고독한 것 같지만 친근미가 넘치고 감동을 자극 시킨다.
참으로 스테딕한 정적인 여유가 보인다.
[에필로그]
삶의 성숙은 또 하나의 물음을 준비하는 걸음이 바빠지는 것 일게다.
절망은 희망으로 손을 내밀고 시심을 다독이는 시인의 마음에는 햇살은 빛나고 외로움은 웃음으로 나누는 것 같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시작을 다시 알리는 준비를 안으로 다질 때가 되었음을 헤아려 본다.
자연에서 성숙 되어가는 시향이 자양을 받고 여정을 재촉하는 시심이 안온한 표정이다.
쓸쓸하고 외로운 소록도에서 자양의 정경과 손을 잡고 또 다른 여정을 가는 느낌을 받는다.
더욱 매진하여 독자들이 감동의 숲에 들어가 함께 호흡하면 좋겠다는 소요의 미학의 시집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4. 01.
대중뭉화평론가/칼럼리스/이승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