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정치만 아니라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적대적인 대립의 구도가 진실이 아닌 변명과 부정으로 인한 폐해가 사회적 소비 피해가 극치를 치닫고 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을 한다. 지금도 이 말은 많이들 회자(膾炙)하는 말이지만 우리 사회는 이상한 진리가 변명이 전부라는 명제가 따른다.사실 법이란 사회 전체가 지켜야 할 우리의 덕목이다.
지키지 못하는 법은 이미 죽은 법인 것이다.
요즘 정당한 권력이 부여되지 않더라도 이를 지키는 사람과 안 지키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를 묻고 있다. 지키면서 정당한 의사표시를 해야 함에도 탈법과 불법을 일상화하면서 이를 자기변명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 정치의 달인들이 보는 것이 맞을지?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변명과 거짓 진실의 앞에서 무엇이 맨 앞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지키지 않는 것은 역설하게도 사회적 비용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실수와 변명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에 우리는 다시한번 상식과 공정을 관직나리들이 지켜가면서 사회적 풍토를 만들 때가 되었다.
실수란 자기반성으로 고치면 되지만 변명은 백해무익한 짓이다.
실수가 실수를 낳는다면 자정을 위하여 꽃도 보고 자연을 알고 살아가는 가치가 참된 행복의 근원이라는 해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을 찾아야 할까?
인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귀향하는 본능이 있기에 늘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과 자연 속으로 떠나고픈 마음의 정서가 생기는 이유는 동물만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정서도 같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인간은 늘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이고 生일 것이다.
필자도 어언 뒤돌아보니 허전이 쌓이는 퇴적물 아래 신음하는 일이 요즘의 일상인 듯하다. 실수하며 잘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너무도 많은 잘못과 실수를 하면서 살아 간다.
상식적인 도덕과 공정을 지키려 하는 노력보다 무너지는 일이 더 많은 삶이 인간의 일상이며 이를 어떻게 처리하고 잘못과 실수를 처리하는 가는 본인의 양식의 문제 상식의 문제일 것이다. 속칭 잘나 보이는 인간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듯하게 화려하여 존경이 가지만 막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시커먼 웅덩이가 보이는 것도 일상에서 접하는 일이다. 요즘의 정치를 보면서 더욱 실감을 하게 된다.
정치는 원래 거짓말을 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치가들의 입은 비뚤어진 위치에 있는 특별한 집단처럼 엇나간 말이 전부인 듯하다.
또한 변명 안에서 갇혀 이유도 없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모습은 참으로 추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며 해답이 없는 미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일반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일에 잘못하고 실수하는 일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곧은 길로만 가는 행보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중심을 잡고 걸어가야 하는 신체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2발로 걸어야 하는 보행의 문제는 자칫하면 옆으로 비켜지는 일이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옆으로 다니는 게도 결국에는 목적지를 찾아 한치의 틀림없는 행보를 보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목적은 달성되는 것 같다.
하긴 어린애들은 어른이 정한 규칙에서 벗어날 때 지적을 받아 고치며 성숙의 길로 들어서는 이치로 보면 잘못은 그야말로 잘못이 아니라고 고칠 줄 아는 일이 오히려 현명한 사람이 아닐지-
요즘 정치꾼들의 말은 모두가 변명하는 정치인 듯하다.
침묵만이 말이 되고 언어는 변명의 달인들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모조리 자기 합리요 자기주장이 와전되었다고 하는 등 혹은 전달이 잘못되었다고 모두가 남 탓으로 돌리는 이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때, 이미 변명의 구실이 미원이 첨가되고 다시 전달되면서 더해진 비대함으로 완전히 눈사람의 형상이 되는 일이니 어찌하랴.
이런 정치가들의 말은 변명의 극치를 배회하는 일로 진실이 어딘가에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 암호일 것은 아닌지.
자기 합리성을 위장하면서 자기 과시의 말을 찾는 일이 모두이니 참으로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사회적으로 보면 이것도 발전의 한 단계라 보겠지만 아침마다 만나는 정치가들의 화면은 그가 가장 진실하고 진리와 정직을 한 몸에 짊어졌기 때문에 무겁다는 변명 혹은 억울에서 힘겹다는 말이 그럴싸하게 위장되게 보이는 것은 필자만일까?
그러나 공익적인 측면에 볼 때 거짓말이 대부분이지만 역사의 水位(수위)는 늘 균형을 유지하는 적정 수위가 이루어지는 일을 보면서 거, 참 요상 하다는 느낌이다. 시간 속에서 정리되는 것에 다행스러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독선은 가장 민주주의 국가에선 너무나 큰 해악이다. 특히 언론의 일방적 독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회 전체의 막강한 영향력이 이익과 손해가 사회적 손해가 너무나 크기에 더욱 신중해야 하지만 어떻게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해서 한사람쯤 악마로 만드는 일은 언어 조합에 따라 판도가 달라지는 것인지 도무지 필자도 오리무중이다.
사실 천사로 만들기는 너무도 어렵지만 악마로 만드는 일은 참으로 쉽다. 1번의 기사로 악마가 되는 일은 인내가 없는 요즘 현실에 인간 심리로는 쉽게 쏠리는 현상이 아니겠는가?
현대인의 특성은 쉽게 이리 몰리고 저리 휩쓸리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 판단의 신뢰성이 없고 남이 어떤 말을 주장하면 쉽게 동화되는 일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망각하거나 신념이 없어서이다.
물론 넘쳐나는 정보 과다의 시대에 인간의 이성을 마비 시키고 흔들리는 신념의 역활론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디지털과 AI, 5차원 시대에 순식간에 전파되는 속도는 빛의 속도에 버금가는 빠르기가 제동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순간적으로 또 다른 뉴스가 점령하여 누적되는 양상이 더 할 수 없이 무게를 가중(加重)시키며 험난함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의 순간적으로 변모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위장과 변명으로 인한 유언비어가 진실 같은 위장의 탈을 쓰고 거짓이 무엇인지 진짜가 무엇인지를 구분(球分)도 하지 못하는 마비 현상이라면 미래를 어떻게 예언할 수 있을는지?
분명 미래는 확실히 있지만 그 판도를 말하는 일은 불가한 현상이 도래한다.
그렇다면 말의 운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언어의 비중은 점차 낮아질 것이지만 소용이 없어지는 것과는 다르게 가벼워질 것이라는 예측에는 다 수의 학자들이 말한다.
이 예측이 빗나가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아마도 언어의 무게는 점차 메시지의 전달에 가벼운 역할이 고작일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진실의 도구 진정성의 도구가 아니라 다만 오고 가는 소통으로의 역할이 언어에 진실의 면모로 변할 때 사회는 더욱 불신과 불행의 가중치는 더 높아질 것 같다.
여기서 언어의 무게를 부여하고 언어의 진실을 위하는 사회 풍토가 있어야 할 것인데 점차 언어의 소용은 줄이고 다시 줄여서 부호화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점이 기계의 남용에서 오는 결말이라는 점이다. 자기중심적인 언어 사용이 아니라 남이 그렇게 말한다는 투로 자기의 의사를 감추거나 위장하는 셈법이 만연할 때 사회의 축은 무너지게 된다는 점이다.
언어의 소용은 개인과 개인의 소통을 넘어 사회를 이룩하는 바탕으로 소임이 중요하다는 것이 점차 역할이 축소되는 현상이 불행의 종자로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언제나 유효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유별난 언론과 방송에 등장하는 말 장사꾼들의 분석이나 변명을 듣고 있노라면 실소가 먼저 앞장서는 일이 진행형이라 입을 닫고 귀를 닫고 시선만으로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같아 다소 우울할 뿐이다.
필자의 귀가 퇴화하고 입만 커지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요 진실이 숨어버린 암흑의 판도가 된다는 예상에 다시(Depressive disorder)디프래스다.
2024.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