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무전(崇武殿) 참봉으로부터 초헌관 부탁을 받았다. 숭무전은 금관가야의 후예 김유신 장군인 흥무대왕과 지소부인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전(殿)의 대제는 초헌관이 제사를 집전(執典)하게 되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다. 관례로 경주시장이 초헌관이나 유고로 제관선정위원회에서 가락대구종친회장으로 결정했다는 이야기에 가슴 설렜다.
성씨별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祠堂)은 여러 곳에 있다. 사당은 제사를 위하여 조상의 위패를 봉안한 건축물로 가묘(家廟) 또는 예묘(禮廟)라고도 한다. 왕실의 사당은 종묘(宗廟), 대묘(大廟), 태묘(太廟)라고 부른다. 고려 말 충렬왕 때 중국에서 『주자가례』가 들어오면서 왕실의 종묘와 구별하기 위해 일반인의 조상을 모신 곳은 사당으로 통용되었다. 공자님이나 부처님, 왕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은 전(殿), 일반적인 사당은 사(祠)의 글자를 붙인다.
대제이든 가정의 일반 제사이든 술은 보통 석 잔을 올린다. 석 잔 중 첫 번째 올리는 사람을 초헌관, 두 번째 올리는 사람은 아헌관, 마지막 세 번째 올리는 사람은 종헌관이라 부른다. 제사에 술을 석 잔 올리는 유래가 재미있다. 『공자가어』에 보면, 공자님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大成殿) 대제에서 공자님께 술을 좨주(祭酒)가 한 잔만 올렸다. 좨주는 고려와 조선 시대 종삼품 벼슬 이름이다. 대성전에는 여러 사람이 벼슬을 가지고 있어서 당나라 허경종(許敬宗) 등이 태종에게 청하여 공자님 사당에 좨주가 초헌, 사업(정4품)이 아헌, 박사(정7품)가 종헌하도록 한 것이 유래가 되었다. 당나라 제6대 현종 때는 삼정승(三政丞)에게도 삼헌의 예를 행하라는 조서를 내린 것이 일반 제사에도 일반화가 됐다.
나는 초헌관으로서 제물이 잘 진설되었는지 알자(謁者)의 안내로 점검 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헌관을 인도하는 알자가 나의 왼쪽으로 와서 대제 지낼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근구 청 행사(謹具 請 行事)!” 큰소리로 외친다.
다음은 위패에 절하며 뵙는 참신례 차례이다. 숭무전 대제에 참사(參祀)한 모든 사람과 함께 대왕을 존경하는 의미로 마주 보지 않고 옆으로 꿇어앉아 사배(四拜)를 했다. 절의 회수는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일배(一拜), 돌아가신 분은 이배(二拜), 자연신이나 부처님께는 삼배(三拜), 왕이나 성인(聖人)께는 사배(四拜), 황제께는 오배(五拜)하는 예절이 있다. 동아시아에서 절(拜)은 숭배가 아니라 높은 어른들께 인사 올리는 예이다. 높다고 생각하는 어른의 순서대로 절의 횟수를 많게 한 것 같다.
나는 손을 씻고 흥무대왕 신위 전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홀을 꽂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때의 방위는 자연 방위가 아니고 예절의 방위로 신위가 있는 쪽이 북쪽이 된다. 향을 세 번 피운 다음 대축 담당으로부터 폐백(幣帛)을 받아 가슴 높이까지 올리는 예를 갖추니 대축 담당이 받아서 흥무대왕 신위 앞에 올린다. 폐백은 예의로서 비단을 선물로 올렸으나, 요즈음은 한지(韓紙)를 대용품으로 사용한다.
나는 원래 위치로 갔다가 첫 잔을 올리기 위해 다시 사당 안으로 들어가 흥무대왕 신위 앞에 홀을 꽂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삼국통일과 돌아가실 때까지 충의 정신과 지도력 있는 모습의 상상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간다. 집사가 전해주는 술잔을 향불 주위로 돌리지 않고, 두 손으로 정중히 잡고 가슴 높이까지 올려 예를 갖추었다. 술잔 받으시는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다. 초헌관이 올리는 술은 예제(醴齊)라 하고 단술을 사용한다. 다음은 지소부인 신위 전에 나아가 홀을 꽂고 무릎을 꿇고 앉아 부인의 생전 모습을 상상해 본다. 지소부인은 태종무열대왕의 공주로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온화하며 인자한 모습이었을 것 같다. 지소부인 신위 전에도 첫 잔을 정성을 다해 올린 후 다시 흥무대왕 신위 전으로 와서 신위 쪽을 향해 홀을 꽂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축문을 낭독하는 사람인 대축(大祝)이 나의 왼쪽으로 와서 동쪽으로 향하여 무릎을 꿇고 앉으니 전체 참사(參祀)자도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대축이 낭독하는 축문 속에,
‘대왕의 위엄은 삼국에 미치고 공적은 백세(百世)를 지나 영웅의 뛰어난 공적이 남아 있어, 향사가 쇠퇴하지 않아 깨끗한 희생(犧牲)과 여러 가지 제물을 마련하여 향사를 올리니 흠향하시옵소서.‘ 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뿌듯했다.
축문 낭독을 마친 후 전체 참사자는 일어나고 나는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아헌관이 올리는 술은 빛깔이 흰 술인 동동주, 즉 앙제(盎齊)를 올렸다. 축문은 초헌할 때만 낭독하고 아헌 때는 술잔만 초헌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올린다. 아헌관도 헌작을 하고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종헌관이 올리는 술은 맑은 술인 청주(淸酒)를 올렸다. 술잔은 초헌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올린 후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다음 차례로 음복례(飮福禮)가 있었다. 나는 음복 자리로 가서 대축 담당이 주는 술(청주)과 육포(肉脯)로 음복했다. 음복의 예를 마친 후 삼헌관만 원래 위치에서 네 번의 절을 올렸다. 그 후 참사자 전원이 신을 전송한다는 의미로 네 번의 절을 올린 후 축문과 폐백을 불태우는 망료례(望燎禮) 의식이 있었다. 나는 망료위로 나아가서 대축이 축문과 폐백을 불태우는 모습을 지켜본 후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지방이나 축문을 태우는 일은 신을 보내드리는 일이라 한다. 알자가 나의 왼편으로 와서 대제를 모두 마쳤다는 뜻으로, “예필(禮畢)!” 큰 소리로 외친다.
우리는 원시 농경 시대부터 산업화 시대를 거쳐 지식정보화 시대를 넘어 AI(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다. 각 시대를 거치면서 서로의 가치관이 변하고 제사를 모시는 방법도 문중과 지방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조상을 섬긴다는 정신은 모두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제사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과 더 간소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제사는 조상과 후손으로 이어주는 끈인 것 같다. 시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계승 발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