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파 류희(1773~1837)는 가난한 농부이자, 참선비였다. 출세할 수 있는 생원시에도 합격하고, 대과 응시 자격도 얻었지만 이를 뒤로 하고 오로지 학문 연마와 수양에만 몰두했다. 그가 남긴 책만 100여권에 달한다. 올해는 류희가 오늘날 국어학 연구의 보배로 꼽히는 ‘언문지’(諺文志)를 저술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랜 시간 서파 류희와 그의 어머니 이사주당의 삶과 학문을 기리는 다양한 선양 사업을 해온 지역 언론인 김종경·박숙현 부부가 최근 ‘서파 류희의 삶과 학문 이야기’(별꽃 刊)’를 펴냈다.
류희는 조선 후기 재야를 대표하는 실학의 거두였다.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드물었던 시대에 독창적인 방법으로 한글을 연구하고 훈민정음의 자모를 분류·해설한 조선 후기 최고의 정음학 연구서 ‘언문지’를 펴낸 한글학자이기도 하다.
학계에선 서파의 한글 연구를 “이전의 한자음 위주의 연구를 극복해 처음으로 우리말 위주로 연구를 시도했다”며 조선시대 국어학 연구서 중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했다.
류희는 우리말 어휘 연구에서 가장 귀중한 서적으로 인정받는 ‘물명고’를 지은 박물학자이자 어휘학자이도 하다. ‘물명고’엔 여러 사물을 한글과 한문으로 풀이해 한글풀이 표제어가 모두 1천660여개에 달해 국어 어휘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꼽힌다.
책은 “서파 류희는 이 같은 어마어마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잘 알려지지 못했다”며 “그가 마주한 시대적 불운, 가문의 비운 속에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그가 태어난 용인 모현읍 일대에 은둔해 살면서 평생 학문에만 매진하면서 살았던 탓”이라고 말한다.
그러다 2005년 행방이 묘연했던 ‘문통’이 후손들에 의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되면서 류희는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반열의 대실학자로 단숨에 뛰어오르며 학계를 들썩이게 했다. 그가 남긴 ‘문통’은 경학, 문학, 음운학, 어휘학, 춘추학, 수학, 천문학, 역학, 의학, 음악, 농어충수, 측량학 등 전통시대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백과사전에 해당한다. 류희는 또 자연과 인간의 다양한 교감을 보여주는 1천500여 수의 시를 지었고, 15권의 시집을 엮은 시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방대한 양의 책을 저술한 데엔 류희의 엄청난 독서량과 탐구열, 문장벽이 자리한다.
책은 평생 용인 모현 마산리 초야에 살면서 학문에 몰두한 류희의 삶과 학문을 들여다본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들면서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 그 근본을 꿰뚫었던 류희의 학문적 성과를 오롯이 담아냈다. 저자는 알려지지 않은 류희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가 어떻게 이런 품성과 학문적 열정을 가지게 됐는지 알려준다.
타고나길 영재였던 류희를 키워낸 부모의 교육법이 소개된 점도 흥미롭다.
류희는 돌이 되기 전에 글자를 뗐고, 2세 때는 사자성구를, 4세 때는 문장을 짓고 편지를 썼으며 5세에는 성리대전을 통독했다. 또 수학과 의학에 뛰어났던 아버지 류한규의 가르침으로 천문, 역학, 공학 등 이과계열에 대한 깊고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정세에 치여, 또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껴 벼슬길을 포기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만세에 전하고, 유교의 가르침을 평생 실현하고자 노력한 류희의 삶은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현대인들에게 울림이 될 듯하다.
저자 김종경과 박숙현은 “조선 후기는 흔히 망국의 역사라고 폄훼되기도 하는데 이 시기 용인에서 태어나 살면서 우리에게 엄청난 문화유산을 남긴 서파 류희 같은 자랑스러운 선조가 살다 간 빛나는 시대이기도 하다”며 “이 글이 조선의 기록문화와 선비정신을 꽃피운 서파 류희를 기리고 이해하는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기대해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