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를 만나기]
글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은 대부분 아름다운 마음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정서를 순화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정서의 상승을 부추기는 순수한 에고의 풍경화를 만나는 일이기에 작가는 사물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심안(心眼)으로 떠오르는 세계를 위해 헌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비유로 나타나는 작가의 얼굴에는 천진하고 순수한 마음의 그림이 전개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작가가 그리는 세계내(世界內)에서 독특한 추수(追隨)적인 경험을 만나기 일은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일치하여야만 효과에서 만나는 공간 글의 가치는 즉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되는 것이다.
작가가 토해내는 언어의 그림은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 세계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일면 그로 인해 변화되는 공간 창조의 힘이라는 것은 독자들의 마음의 심금을 울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글의 가치는 고귀하고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인간의 곁을 떠나지 않는 글의 가치는 고귀하고 힘이 넘치며 인간의 정서를 끌고 가고 있기에 감득하는 작가라면 정서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사실 감수성과 정서가 없다면 작가가 될 수 없고 감각적, 언어의 조화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작가가 되는 길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패용하고 글을 쓸 때는 사물과 결합의 조건을 제시하여야 하며 그로 인해 촉매제 역할도 주도적으로 구사하여야 이미지의 결합을 주도하는 운용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비록 평범하고 날마다 접하는 재료가 있을지라도 어떻게 요리하는가의 따라 그 결과는 호불호의 결말이 판연하기 때문이다.
소설, 칼럼, 수필, 등은 다소 연결 지어지는 문맥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시(詩)라는 존재는 궁극적으로 언어의 창조, 응축, 언어의 이미지를 그리는 그림이다.
여기에는 감각이 들어 있어야 하고 언어의 긴축에 탄력이 수용되어야 한다.
시인은 시라는 대상을 의인화의 방법으로 바라볼 때 높고, 깊이를 심각하게 발성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는 곧 자신의 얼굴이고 분신(分身)이고 떠날 수 없는 절대의 대상화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시를 향해 온갖 언어를 동원하여 경외(敬畏)와 동경의 표정을 짓더라도 시는 항상 냉엄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애달픈 시와 시인의 관계가 설정된다.
서양 철학자 비트겐쉬타인은 {파리잡는 항아리}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존재를 말했다. 우리식으로 설명한다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위쪽은 막히고 맨 아래쪽이 작게 열린 둥근 유리그릇에 된장을 넣고 물에 넣으면 아래로 들어온 물고기는 결코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이를 세계 내 존재- 인간은 테어났지만 지구라는 둥근 그릇 속에서 결코 벗어나는 방법이 죽음 이외엔 없다.
잠시 나갔다 들어온 허락도 없고 또 그런 여유도 없는 “속”에서 밖을 동경하면서 미지를 그리는 존재가 인간의 운명이 된다.
우주가 돌지만 도는 일로 살아야 하는 운명적 존재-
내려야 할 정거정에 옷깃을 여미며 작별해야 할 순명(順命)의 길이 곧 삶의 의미 라면 한계라는 경계는 슬픈 일정의 길이 된다. 『도랑 사구 안의 작은 우주』도 도랑 사구 안에서 드러나는 생의 다양한 모습들-
자기를 알면 철학의 완성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는 그림자를 이끌고 터벅일지라도 결코 나를 만나는 일은 거울 속의 나의 형편 때문에 결국은 실망으로 점철 된다. 이것이 철학의 종점이고 시작이라면 시는 이런 의미를 노래하는 탐구자로 이어지는 것이다.
[3. 삶의 곡예]
사는 일은 시의 중심 의무이자 최종 종착지를 찾아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명제이고 벗어날 수 없는 숙제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고해(苦海)라 비유했듯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는 일은 고달프고, 슬프고, 참람(僭濫)한 진행이 있을뿐, 찰나(刹那)이고 행복은 잠시의 그림자와 같은 일이 사는 일이 모두일 것이다.
돈으로 해결하는 일도 아니고, 높은 감투로 정리할 일도 아닌 오로지 스스로 힘에 의해서 헤쳐나가는 길이 다가오는 일에 대처하는 삶의 진수일 것이다.
[4. 치장의 이미지화]
시라는 것은 장식의 풍경이 되기도 하며 교훈과 훈육의 역할을 한다.
하여 시는 꾸미기 이미지의 기교를 살려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리고 시는 향기가 있고 상승의 기류를 타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올 때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시적인 넓이는 철학적인 암시를 상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펄럭이는 기쁨 또한 예외는 아니다. 또는 시를 치장하고 이미지화 시킨다 해도 가식적이거나 자기 마음의 정서가 없다면 독자의 감동받을 수가 없기에 항상 정열과 열성을 다해 신념을 갖고 응축과 다변화의 길을 열어야 하며 세상을 밝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인이 온 세상을 깨우치게 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기에 언어를 재료로 삼아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에서 원인을 찾아 치장해야 하며 이미지화를 그리는 것이 시인 것이다.
[5. 에필로그]
시는 정서의 다양화 감각을 통해 만나는 체험이며 때론 이미지가 사상 논을 가질 뿐 아니라 철학의 가치를 남기는 인생의 해석자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시는 단순한 문자의 조립이 아니라 시어 속에 강한 신념의 에너지를 가질 때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인은 언제나 세상의 희망의 불을 태우는 인도자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작고 낮게 보일지라도 언제인가를 위한 씨앗을 놓아야 하며 여기서 다양한 생의 해석이 시적 장치를 동원하는 기교가 필요하고 치장을 어떻게 구상하느냐의 체험을 상상과 창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시인의 영역을 넓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수성은 시인의 영원한 동반자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는 사물과 대상의 이미지를 유연한 표정으로 바꾸는 정서현상이지만 때로는 딱딱하고 굳어진 것을 용해하는 정서의 촉매를 가져야 할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에너지를 보급하는 통로를 확보하여야 한다.
어찌보면 시인은 새로운 표현을 찾아야 하는 방랑의 여정을 갇추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사물 관찰법과 표현의 기교를 숙고하는 일이 선행 되어야 할 것이다.
기실 육체적으로 나이가 들면 같은 용어를 되풀이 하는 것도 굳어진 의식 탓으로 돌릴 수 있기에 글을 쓸 때마다 조심스럽다.
그렇기에 감수성과 정서의 감각적인 이미지관리를 예지적인 고뇌를 언어로 포착하여 풍경화 같은 숲은 만들어야 하는 시가 가장 아름다운 시이며 독자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3.02.2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