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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백년짜리 지구별 여행에 최고 반려 취미 (최미옥 지음, 쑬딴스북)] 쑬딴스북의 ‘지구 소확행 시리즈 A-Z’ 중 ‘T’편 ‘탱고(Tango)'를 취미로 한 저자의 이야기다. 저자는 탱고가 삶의 큰 위로와 힐링이 된 ‘반려 취미’이자 소울메이트라고 말한다. 언어학과 공간디자인을 전공하고 건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 최미옥은 현재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자 큐레이터로 전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양조장을 하던 외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주가무가 주는 즐겁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익숙했고, 스무살부터 시작한 배낭여행은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이해하는 자양분이 됐다. 저자는 “이런 총체적 경험들이 ‘생각을 시각화’하고 ‘콘텐츠를 공간화’ 하는 업무와 삶의 방식에 깊이 스며들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박물관 큐레이터로서 탱고를 단순한 춤을 넘어 유네스코세계무형유산으로서 인문학적 시선으로 탐구한다. 인생 후반기 탱고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저자의 경험은 소셜댄스 입문을 희망하거나 문화 탐구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유쾌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박명수 경기도의원이 개최한 ‘기회의 땅 안성, 그리고 박명수의 약속’ 출판기념회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명수 경기도의원이 지난 6일 한경대학교 산학협력관에서 ‘기회의 땅 안성, 그리고 박명수의 약속’이라는 책 출간에 발맞춰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고 7일 밝혔다. 이날 기념식에는 박 의원의 책 출간을 축하해주기 위해 이동희·황은성 전 안성시장, 안정열 안성시의회 의장, 장현수 전 경기도의원, 이치성 경기도당 국민통합위원장 등을 비롯한 시민 1천여명이 행사장을 방문해 북새통을 이뤘다. 특히 관내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 인사들과 더불어 지역사회단체장들도 행사에 대거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대중에게 첫 선을 보인 책은 박 의원이 자신의 고향인 안성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삶의 성찰이 담은 자전적 기록이자 지역공동체에 대한 헌정적 고백이 담겨 있다. 영화배우 이영하 사회로 진행된 1부 출판기념식에서는 김민수 국민의힘 최고의원과 김선교 국민의힘 경기도당 위원장, 김학용 전 국회의원, 김진경 경기도의회 의장, 백현종 경기도의회 국민의힘 당대표, 김시용 경기도의회 도시환경위원회 위원장 등이 영상축사를 보냈고, 황은성 전 안성시장과 안정렬 안성시의회 의장, 장현수 전 경기도의원, 이치성 경기도당 국민통합 위원장 등이 현장 축사를 했다. 김 최고의원은 “안성사람 박명수가 노래하는 ‘안성찬가’ 그 우렁찬 시작이 안성발전의 큰 계가가 되길 최고의원 김민수가 여러분과 함께 응원드리겠다”고 밝혔다. 황 전 시장도 “박명수 의원은 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함께 공직을 이끌어 가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시정을 이끌어 나가던 강직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기억한다”며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꿀 수 있는 박명수 의원이 안성발전을 이끌어 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박명수 의원은 “저는 오늘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안성시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위해 어떠한 것들을 해야 하는지 그동안 행정가와 정치인으로서 시민들과 만나 고민하고 생각한 내용을 미화 없이 솔직하게 담았다”라며 “그 내용들이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길이라 점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만큼 진짜 안성사람 박명수는 행복과 행운이 공존하는 20만 안성시민 모두가 즐거운 도시가 될 수 있도록 묵묵하게 노력해 나갈 것을 약속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진행된 2부 북콘서트에서는 최일구 전 MBC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짜 안성사람 박명수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출간된 책에 적힌 내용을 좀 더 구체적이고 쉽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청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금요저널] 수원화성박물관이 소장한 ‘경국대전’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문화재청이 3일 보물 지정을 예고한 ‘경국대전’은 조선의 통치체제를 규정한 최고의 성문법전이다. 세조는 즉위년부터 노사신·최항·서거정 등에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라” 명했고 몇 차례 수정과 증보를 거쳐 1485년에 ‘경국대전’이 완성됐다. 을사년에 완성돼 ‘을사대전’이라고도 불린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본은 16세기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경국대전’으로 권4·권5·권6의 내용이 2책에 걸쳐 수록돼 있다. 금속활자로 간행된 ‘경국대전’ 중에서 권4~6에 해당하는 국내 유일본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 ‘경국대전’은 2016년 11월 보물로 지정된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조선경국전’과 더불어 조선시대 법제사와 제도사 연구의 핵심이 되는 문헌이다. 금속활자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은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경국대전’이 16세기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을사대전’이며 ‘경국대전’의 인쇄본으로 이보다 더 앞선 사례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기에 희소성이 크고 ‘경국대전’ 권4~6에 해당하는 국내 유일본으로 조선왕조 통치의 기틀을 다진 법전으로써 역사적 상징성이 있고 이미 보물로 지정된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조선경국전’의 맥을 잇고 있어 학술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헌이라고 인정했다. ‘경국대전’은 ‘조선경국전’에서 구상한 통치 이념과 정치 체제가 반영된 법전이다. 조선 후기 개혁정치를 꿈꾼 정조가 국정운영의 요체로 ‘대전통편’을 펴내는 데 중요한 기틀이 됐다. 조선의 주요 법전을 모두 소장한 수원화성박물관은 조선 법제사 연구의 기반을 구축하게 됐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지정 예고 기간 이후인 6월 초 최종 심의를 거쳐 보물 지정 확정 고시가 이뤄질 예정이다. 수원화성박물관 관계자는 “개관 이후 지금까지 매년 진행한 유물 구입으로 귀중한 유물을 다수 소장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의 확보에 힘써 역사문화도시 수원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겠다”고 말했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최근 청와대가 풍수지리상 터가 좋지 않아 역대 대통령들의 말년이 대부분 불행했던 것이라며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굳이 풍수지리가 아니더라도 본래 청와대 터가 조선시대 칠궁과 같은 사당이나 호위무사 연습 터로 쓰던 자리였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려놔야 한다는 주장도 또한 있다. 글쓴이 : 김수한 <역사칼럼니스트> 이러한 여러 가지 잡음 속에 드디어2022년5월10일 개방하는 청와대는 대통령의 집무실·접견실·회의실 및 주거실 등이 있는 본관과 비서실·경호실·춘추관·영빈관 등 부속 건물로 되어 있고 넓은 정원과 북악산(北岳山)으로 이어지는 후원(後園)및 연못이 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1948년8월 정부수립 후, 1960년8월까지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명명으로 제1공화국의 대통령 관저명‘경무대(景武臺)’로 불려오다가,그 해8월13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尹潽善)이 선출되어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개명하였다.이 명칭은 대리석으로 된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청와대 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이 있던 곳이다.조선시대에 들어와1426년(세종8)에 창건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밖으로 후원에 해당하는 이 지대를 경무대라 하였다. 북악산 산록에 위치하여 서울 장안을 전망할 수 있는 이 경무대는 어영(御營:조선시대,인조반정 뒤에 조직한 군대의 하나)의 연무장(鍊武場)이나 과거장(科擧場)으로서,또는 친경(親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울안에는 원래 융무당(隆武堂)과 경농재(慶農齋:조선 말엽 경복궁의 뒤뜰에 있던,각 도의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못됨을 알아보던 집)등이 있었으나,일제강점 후1927년 일제에 의하여 헐리고,일본인이 조선총독 관저를 건립하였다. 이곳을 제7·8·9대 조선총독이 관저로 사용하였고,광복이 되어서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Hodge, J. R.)중장이 사용하다가1948년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정부로 이관되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동시에 경무대라는 이름을 되찾아 대통령 관저명으로 사용하였다.이승만(재임1948∼1960)대통령은6·25전쟁의 피난시절을 제외하고1960년4월까지 초대·2대·3대 대통령으로 보낸12년간을 이곳에서 보내고4·19혁명에 의한 하야와 함께 이화장(梨花莊)으로 옮겼다. 경무대라는 이름은3·15대통령 부정선거 등 독재와 비정(秕政)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1960년8월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 뒤1963∼1979년(5∼9대)박정희(朴正熙), 1979∼1980년(10대)최규하(崔圭夏), 1980∼1988년(11∼12대)전두환(全斗煥), 1988∼1993년(13대)노태우(盧泰愚), 1993∼1998년(제14대)김영삼(金泳三), 1998∼2003년(제15대)김대중(金大中), 2003∼2008년(제16대)노무현(盧武鉉), 2008∼2013년(제17대)이명박(李明博), 2013~2017년(제18대)박근혜(朴槿惠)대통령이 거쳐 갔다. 2017년(제19대)문재인(文在寅)대통령이 입주하였다. 청와대①영빈관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건물로서1978년1월에 착공하여 그 해12월에 준공이 되었다. 이 곳 영빈관은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며,외국의 대통령이나 수상이 방문했을 때 우리 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행사장으로 이용되거나100명 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2층에도1층과 똑같은 홀이 있는데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사용된다. ②본관은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장소이다. 이 건물은 정부와 국가를 대표하는 우리의 얼굴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전통 목조 구조와 궁궐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내부 구조는 현대적인 감각과 시설을 갖추도록 하였으며,우리 나라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가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八作)지붕을 올리고 한식 청기와를 이었다.약30만 장이나 되는 청기와는 일반 도자기를 굽듯이 한 개 한 개 구워 내어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고 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1층에는 대통령부인의 집무실과 접견실,연회장,식당이 있으며, 2층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접견실,회의실이 있다.그리고 건물 앞의 넓은 잔디마당은 국빈환영행사와 육·해·공군 의장대,전통복식을 입은 전통의장대의 사열 등이 행해지는 곳이다. ③수궁(守宮)터인 지금 청와대가 위치한 지역은 옛날부터 풍수지리학상 길지(吉地)로 알려져890년 전인 고려시대에 이곳에는 남경의 이궁이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이 곳은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으며,그 뒤1868년(고종5)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융무당·오운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과거시험이나 무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또한 이곳은 농사가·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기 위해 왕이 손수 가꾸던8배미의 논이 있던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후원에 있던 건물들을 다 허물고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하였고,총독관사를 새로 지어7·8·9대 총독이 사용했다. 일본인들이 여기에 관사를 지은 것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그 뒤편에는 총독관사를 지음으로써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지리학상 용맥을 끊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이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 높은 곳에서 보면 총독관사 건물은大(대)자의 모양을,총독부 청사건물은日(일)자의 모양을,서울시청 건물은本(본)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세 글자를 이으면 대일본이 된다. 그 뒤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곳은 미군정 사령부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었고,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던 구청와대 건물은1993년11월 철거되었는데, 1989년에 집무실과 관사를 분리하면서 구 청와대 본관을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 및 박물관으로 보존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하게 된 것이다. 철거 뒤 그 자리를 옛 모습대로 복구시킨 뒤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다 하여 지금은 수궁터라 부르게 된 것이다. ④비서실별관(신관)및 동별관은 비서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서,신관은1969년에,동별관은1972년에 건립되었다.⑤상춘재(常春齋)는1983년4월 준공된 전통적인 한식 가옥으로 외빈접견 등에 사용되고 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청와대 경내에는 전통 한옥식 건물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와도 우리 나라 가옥 양식을 소개할 길이 없었던 차에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하여 전통 한식가옥인 상춘재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연혁을 보면 현 상춘재 자리에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 관사로 건축된 일식 목조건물인 상춘실(약20평)이 있었으나1977년12월에 철거하고,이듬해3월 천연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약22평)로 개축하여 상춘재(常春齋)라 명명하였다. 그 뒤 전통한식집을 형태 변경 없이 목재로 보수하는 공사를1982년11월20일 착공하여 온돌방1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연건평116평의 건물을1983년4월5일 완공하였다. ⑥녹지원(綠地園)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이다.이 곳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채소밭이 있었고 일제 총독관저가 들어서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이 조성되었는데1968년에 약1,000여 평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했다.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장애인의 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1995년5월28일에는 인근 주민 약3,000여 명을 초청하여KBS열린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310년에 이르며 높이는16m이다.연혁을 보면 옛 경복궁의 후원으로 채소밭·가축사육장·온실 등의 부지였으며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는데 국내외 귀빈 및 외교사절단을 위한 야외 행사장, 5월5일 어린이날 행사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⑦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대통령 관저는,대통령의 공적인 업무공간과 사적인 업무공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느껴1990년10월25일 완공되었는데 형태는 전통한식(본채는八作지붕의 겹처마에 청기와를 얹은‘ㄱ’자형 지붕 형태)이며 구성은 본채·별채·대문채·사랑채·회랑으로 되어 있다. ⑧춘추관(春秋館)은1990년에 완공되었으며,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맞배지붕에 토기와를 올려 전통적인 우아한 멋을 살린 건물이다. 현재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와 출입기자들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 나라 언론사 기자78명이 상주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로서1층은 기자들이 사용하는 기자실과 담화발표 등을 하는 소회견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에는 대통령 기자회견과 각종 문화행사 등을 하는 다목적실이 있다.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춘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가 오늘날의 자유언론의 정신을 잘 상징한다는 뜻에서 채택되었다. 고려시대 시정(그 당시의 정사)의 기록을 맡아오던 관청으로 고려 개국 초에는 사관이라 하다가1308년(충렬왕34)이를 문한서에 병합하여 예문춘추관으로 고쳤다가1325년(충숙왕12)에 예문관과 갈라져 춘추관으로 독립했다.춘추관은 다시1356년(공민왕5)사관으로 개칭하였다가1362년 다시 춘추관으로 되고1389년에는 예문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으로 환원되었다. 조선 개국 당시에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예문춘추관이라 하다가1401년(태종1)예문관과 분리하여 춘추관으로 독립되었고, 1894년(고종31)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청와대가 서울 시내에서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특별시의 중심인 종로구에 있다지만,바로 뒤에 북악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정면은 경복궁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서 중심이라면 중심인데 중심이 아닌 느낌.그래서 서울의 배꼽이라고 할 수 있는 용산구로 청와대 이전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으며,특히 용산기지 이전으로 청와대의 용산 이전론이 탄력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서울 시내에서 청와대가 옮겨갈 만큼 넉넉한 부지가 용산 이외에는 없을 뿐만 아니라 용산 지하에 있는 벙커 등을 지하시설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고려되었다.또한,원주민에 대한 보상이 불필요하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혔다.그러나 다양한 이유의 반대론도 거세게 일어나고 있지만,결국 윤석열 정부는 청와대를2022년에 용산으로 이전하는 것을 확정하였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금요저널] 종로구가 4월 22일 오후 2시 숭인근린공원 내 동망봉에서 ‘제14회 단종비 정순왕후 추모제’를 개최한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고 종로와 정순왕후의 인연에 주목하며 지역의 소중한 역사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한 자리이다. 지난 2008년을 시작으로 코로나19 확산세를 고려해 2020년을 제외하고 매해 꾸준히 추진해 왔으며 올해에는 거리두기 전면 해제에 따라 더욱 많은 주민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들로 기획했다. 이번 추모제의 주제는 동정으로 정했다. 단종을 그리워하며 오랜 세월을 홀로 살다 간 왕후를 동정하는 마을 여인들의 마음이 500여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 정순왕후를 기리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는 뜻을 담았다. 여산 송씨 종친회와 구청 관계자, 인근 지역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2시부터 식전공연 인사 말씀 추모공연 추모제례 기념 촬영 순으로 이어진다. ‘식전공연’을 위해서는 퓨전국악팀 하나연과 비보이들이 함께 정순왕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전통국악기와 춤으로 풀어내고 ‘추모공연’은 창작무용·타악 퍼포먼스 그룹 아작이 맡아 왕후의 혼을 위로하는 춤사위를 선보인다. ‘제례’ 봉행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이끌 예정이다. 한편 1454년 어린 나이에 왕비에 책봉된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왕위를 세조에게 일임하고 상왕이 되면서 왕대비가 되지만, 단종이 영월로 유배됨에 따라 궁에서 쫓겨나 관비로 전락한다. 단종 승하 후에는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그의 명복을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종로구는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청룡사, 정업원 터, 단종의 안위를 빌기 위해 매일 올랐다는 동망봉,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마지막 인사를 나눈 영도교 등 관련 유적지를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숭인동’ 골목길 탐방 코스를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정순왕후의 한 많았던 삶과 조선왕조의 역사에 대해 배우는 숭인동 코스를 포함해 종로 구석구석에 얽힌 해설을 듣고 관광하는 ‘해설사 프로그램’은 구청 누리집에서 사전 예약 후 이용하면 된다. 구 관계자는 “매해 4월마다 정순왕후 추모제를 통해 후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지역의 소중한 문화자산을 알리는 시간을 가져왔다”고 설명하면서 “지난했던 정순왕후의 삶을 기리는 올해 추모제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금요저널]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오는 22일 11시 ‘성암 김재계 선생 80주기 추념식’을 거행한다고 밝혔다. 억불산 김재계 선생 묘역에서 열리는 추념식에는 김재계 선생 유족을 비롯한 100여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행사는 약력보고 헌화 및 분향, 추념사 순으로 진행된다. 성암 김재계 선생은 우리민족 암흑기인 일제 치하의 시대에 종교인으로서 독립운동가와 민족교육자로 활동했다. 1906년 장흥군에 천도교당이 개설되자 천도교인이 되어 활동하면서 천도교 장흥교구의 발전에 정성을 기울였으며 1919년 장흥의 3·1만세 운동을 주도하며 3년간 옥고를 치뤘다. 이후에도 줄곧 천도교 선교와 아울러 사회교화 운동에 신명을 바쳤으며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기도 운동과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1938년 멸왜기도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해 1942년 6월 옥고로 인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김재계 선생 환원 이후, 1987년 지금의 억불산 묘역으로 묘소 이장을 하면서 매년 4월 22일 김재계 선생 추념식을 개최해 선생의 애국정신을 계승해 위상을 높이고 있다. 장흥군 관계자는 “80주기를 맞아 김재계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금요저널] 광복회광명시지회는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을 맞아 4월 20일 오후 6시 광명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초빙해 강연회를 개최한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쇼와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해 일본군 수뇌부를 응징하는 쾌거를 이뤘으며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그해 12월 19일 가나자와 미고우시 일본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어 2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광복 후인 1946년 조국에 봉환되어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윤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강연을 맡은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많은 역사서를 저술하며 중국의 동북공정과 임나일본부설의 부당성을 역사적 고증자료로 반박하는 등 우리역사 바로알기를 추진해 나가고 있다. 이날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와 상하이 의거 관련해서 강연을 진행한 후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김충한 광복회광명시지회장은 “이번 강연회에 많은 시민이 참석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함께 고찰하고 역사인식과 나라사랑 정신 함양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 전했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금요저널] 가락국 제10대 구형왕과 계화왕후를 추모하는 제례인 덕양전 춘향대제가 지난 16일 산청군 금서면 덕양전에서 봉행됐다. 이날 제례는 이상률 경남경찰청장이 초헌관, 전보삼 전 문체부 문학진흥정책위원원장, 김길수 경남문화원연합회장이 종헌관으로 봉행 헌작했다. 또 지역 기관단체장과 전국 가락 문중·유림 등이 참석했다. 가야시대 대표 유적지 중 한곳인 덕양전은 지난 1983년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로 지정됐다. 덕양전은 인덕문과 함께 직사각형의 돌담을 두르고 그 안에 홍살문, 영전각, 안향각, 추모재, 동재, 서재, 해산루 등 건물이 들어서 있다. 경남도 우수 선현제례 행사로 선정된 덕양전 춘·추향대제는 매년 음력 3월 16일과 음력 9월 16일에 봉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덕양전에서는 매월 음력 초하루, 보름에 삭망향례를 올림으로써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우리들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장부가[丈夫歌]〉 丈夫處世兮 其志大矣장부가 셰상에 쳐ᄒᆞᆷ이여 그 ᄯᅳᆺ이 크도다 (장부가 세상에 있음이여,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ᄯᆡ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ᄯᆡᄅᆞᆯ 지으리로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텬하ᄅᆞᆯ 웅시ᄒᆞᆷ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천하를 웅시함이여,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東風漸寒兮 壯士義烈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ᄯᅳ겁도다 (동풍이 점점 참이여,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분ᄀᆡ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鼠竊○○兮 豈肯比命쥐 도젹○○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쥐 도적○○이여,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豈度至此兮 事勢固然엇지 이에 이ᄅᆞᆯ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사세가 본디 그러하도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동포 동포여 속히 ᄃᆡ업을 이룰지어다 (동포,동포여,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만셰 만셰여 ᄃᆡ한 독립이로다 (만세,만세여,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同胞만셰 만셰여 ᄃᆡ한 동포로다 (만세,만세여,대한 동포로다.) -안중근이 의거를 거행하기 전 동지 우덕순에게 지어준〈장부가〉- 안중근(安重根)의사는1879년9월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순흥이고,아명은 응칠(應七)이며,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반(鄕班)지주였다.즉,고려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대지주였다.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海西)일대에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안중근 의사는 바로 이 안태훈 진사와 그 부인 조(趙)마리아 사이에 태어난3남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며 사격·승마·궁술 등 문무(文武)를 고루 익혔다. 1894년 결혼, 2남1녀를 두고1895년 천주교에 입교한 후,아버지와 함께 빌렘(Wilhelm,洪錫九)신부를 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전교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뮈텔(Mutel,閔德孝)주교에게 민족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을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고1907년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운 뒤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에서 의군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이를 위해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였으며, 1908년3월에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인심통합과 단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인심결합론」이라는 글을 『해조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이를 통해 의군(義軍)을 모집하여,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과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재정적 지원으로1908년4월 연추(煙秋)얀치혜에서 동의회(同義會)라는 항일 의군을 조직하였다. 총장 최재형,부총장 이범윤,회장 이위종,평의원 안중근 등이었다.이 동의회는 실질적으로는 발기인이자 우영장(右營將)이었던 안중근 의사가 이끌었다.의군부대의 규모는3백 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연해주 연추를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1909년2월 연해주 연추 하리 마을에서 동지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조직하여 왼쪽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자르고“大韓獨立”이라는 혈서를 써서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09년9월 안중근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일본의 초대 총리와 한국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안중근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국권회복을 위해서도,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인물들은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최재형,유진률,이강,우덕순 등이 그들이다.그중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안중근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이들의 지원 아래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제거할 목적으로10월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도중에 안중근 의사 일행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포그라니치나야(수분하)에서 유동하를 가담시키고 하얼빈에 도착한 뒤,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의 소개로 조도선을 거사에 합류시켰다. 10월23일 김성백의 집에서 안중근 의사는 의거 결의를 담은“장부가”를 지었고,우덕순도“거의가”를 지어 화답하였다. 안중근 의사는10월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드디어 오전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약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30분 경 코코프체프의 인도로 플랫폼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라우닝 권총(FN M1900) 4발을 발사해 이토에게3발의 총탄을 명중시켜 이토를 쓰러뜨렸다.이어서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궁내대신 비서관 모리,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등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어로"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의거 성공 이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거쳐 뤼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그리고 여기에서1910년2월7일부터14일에 이르기까지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그러나 일제는 국제 재판을 표방하면서도 일본인 관선변호사만을 허용하는 등 불법 재판을 강행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검사 신문에 이어 재판정에서도 당당하게 의거의 이유와 정당성을 주장하며“이토 히로부미 죄악15개조”를 밝혔다.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의 통치 정책을 오해하여 저지른 개인적인 살인행위로 몰아가려 하였다.이에 맞서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위해 의거를 일으켰다는 대의를 밝히며 자신을 만국공법에 입각한 전쟁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이에 일본인 관선변호사조차 안중근에 대한 사형선고는 부당하다며 적극 변호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재판부는“안중근에게 극형을 내리라”는 일본 외무성의 사전 지령에 따라2월14일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하였다.당시 안중근 의사는“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재판 중 자신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다가 체포된 포로일 뿐이며 자신의 행위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대의를 위한 정당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 평화의 길은, "첫째 일본이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둘째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버리는 것이며,셋째 그런 다음 서로'독립한'청국,한국,일본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을 방어하며,서로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서로 화합하여 개화와 진보로 나가서 구주 및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한국의 독립과 일제의 침략 야욕 포기가 동양평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동양에 평화가 깃들며 서구와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1910년3월26일 순국 당일 뤼순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어머니가 보내준 흰색 명주 한복을 입은 안중근 의사는 남기고 싶은 유언이 있느냐는 형무소장의 물음에“아무 것도 남길 말은 없으나,다만 내가 한 이토 사살을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한일 양국이 협력하여 동양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당부를 하였다.이어‘동양평화 만세’삼창을 하려 하니 특별히 허락해달라는 요청이 거부되자 약2분간 기도를 올리고 의연하게 교수대로 올라갔다.이처럼 안중근 의사는 눈 앞에 죽음이 닥쳐와도 초연함을 잃지 않고 오직 한국의 독립과 동포의 안녕을 걱정했던 애국지사이자 동양평화를 염원했던 위대한 평화사상가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일제는 정근,공근 두 동생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유해를 인도하지 않았다.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비밀리에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혔고 아직까지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 고국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국내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효창공원에 마련되어 있으며 정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 그 자체는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교육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무장독립운동 등을 펼쳤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대한의 독립뿐만 아니라,온 인류가 평화 속에서 공존공영해 나갈 수 있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제시해 주었다.하얼빈 의거일인1909년10월26일은 공교롭게도70년뒤인1979년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총으로 쏜 사건인10.26사건과 날짜가 같다.둘다 총으로 벌인 암살이고 같은 탄약(32 ACP)이 쓰였으며,한국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하얼빈 의거는 동양평화론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나아가 일본을 위한 의거였다.오늘날 일본,중국에서도 안중근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외롭게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며 동양평화를 추구했던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진정한 평화주의자였으며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통해 독립운동가만으로서가 아닌 교육자 및계몽운동가로동양평화를 주장한 사상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by 김수한(서울취재본부장){김수한 : 역사컬럼니스트}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의 민족독립정신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아(我)’와‘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단재 신채호-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고령신씨(高靈申氏)로서,신숙주(申叔舟,1417-1475)의18세손이다. 1880년12월8일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에서 출생하여1936년2월21일,북풍이 몰아치는 여순 감옥에서 고난에 찬 독립투쟁가의 일생을 마쳤다. 당시 그의 나이 쉰일곱 살로 일제에 대한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10년의 실형을 선고받고8년째 복역하다 옥중에서 순국한 것이다.조국광복의 꿈을 안고 중국에 망명한 지26년,상하이와 베이징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 등지를 오가며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흔적을 더듬고 민족혼을 깨우치던 사학자요,언론인이며 혁명가인 신채호는 결국 해방 조국의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독립운동가로서 단재의 정신은 절대독립론,무장투쟁론,민족혁명론(민중직접혁명론)등 세가지 형태로 표현된다.단재의 절대독립론은3·1운동 후에 대두한 자치론·내정독립론·참정권론 등 일제와의 타협주의를 분쇄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에 있어1920년대 특징의 하나는 국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의 일부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체념하고 대일본제국 내의 조선자치구역을 추구하는 자치론자들이 대두한 것이었다.이들은 일제와의 타협론을 제창함으로써 완전독립론과 자치론 사이에 대립·투쟁을 야기시켰다.즉,이러한 자치론의 대두는 독립운동 노선에 혼선을 가져오고,일제에 대항하여 굳건히 서야 할 독립운동 노선을 비틀거리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단재의 절대독립론은 완전독립론과 자치론의 대립·투쟁에서 완전독립론·절대독립론이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비틀거리던 독립운동노선을 바로 잡아주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갈 길을 명료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을 통해서 극명하게 선언된 절대독립론은1927년에 자치론을 철저히 분쇄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노선을 정립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단재의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강도와 같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가르쳐주어 그 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의열단뿐만 아니라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까지도 단재가 합리화하고 정당화한 무장투쟁 수단을 채용하게 된 것은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에서 천명한 독립운동 방략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변절과 투항으로 얼룩진 일제하 이 땅의 지식인들의 행적을 뒤돌아볼 때 비타협적 투쟁으로 일관해온 신채호의 정신과 생애는 우리에게 민족과 독립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한다.
by 김수한(서울취재본부장)‘송송’ 썰리는 청양고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성인 남자가 두 팔로 겨우 감싸 안을 정도인 지름 150㎝의 거대한 가마솥에서 ‘모락모락’ 나는 수증기가 구수한 순댓국 냄새와 함께 가게 안으로 퍼지자 군침이 절로 돌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방영선 수원 A순대국 대표(48)는 육수가 푹 고아졌는지, 가마솥 뚜껑을 열어봤다. 직원 김선실씨, 방선자씨는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방 대표는 이처럼 정성을 들여 만든 순댓국을 정자3동 행정복지센터를 통해 매달 홀몸 노인 등 관내 저소득층 가구 20여명에게 전달하고 있다. [지역 홀몸노인, 저소득 가구에 순댓국을 무료로 전달해 온 방영선 대표(가운데)와 직원들 이 환한 표정으로 순댓국을 들어보이고 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 등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가진 나눔을 행동에 옮긴 것이다. 특히 감성적인 성격의 방 대표는 어려운 이웃들의 이야기를 다룬 TV프로그램을 즐겨볼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며 이 같은 다짐을 되새겼다. 이를 실천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대학 진학 대신 취업 전선에 뛰어든 방 대표는 주방보조 등 밑바닥부터 일하다가 지난 2019년 A순대국을 인수했다. 직원에서 사장으로 호칭만 변경됐을 뿐 병원 갈 시간도 없는 등 바쁜 건 매한가지였다. 다만, 순대국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결정 권한은 생겼다. 비록 자신과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일로 음식을 직접 배달하지 못해 소외계층의 반응을 몰라도 정자3동 행정복지센터 직원들로부터 ‘할머니가 아주 맛있게 드셨어요’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없던 기운도 생겼다. 순댓국을 더 맛있게 끓이고 싶다는 생각에 오늘도 오전 9시에 가게에 나와 육수가 진해졌는지 살폈다. 이 때문에 달력에 ‘순댓국 봉사’라는 글귀를 적을 때 설렌다. 가족과 같은 단골손님들이 “좋은 일한다”며 치켜세우면 쑥스럽기도 하면서도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나눔 실천의 의지를 되뇌였다. 방 대표는 “사정상 직접 배달하지 못함에도 동사무소 직원들이 대신 순댓국을 갖다주고 있어 정말 감사하다. 그들이 없다면 이러한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옛날에는 연말연시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구세군 냄비가 가득했는데, 점점 사회가 각박해지는 거 같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어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저도 언젠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살 수 있다”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순댓국을 만들어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1. 문학 현상 대한민국의 문학은 농경사회인 18세기~19세기 산업화 혁명의 여파는 급진적 급속하게 인간 문학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어 산업화와 함께 자동차, 전기 등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3차 산업, 4차 산업의 토대와 전기가 마련되었고 1943년 컴퓨터 등장과 1976년 스티브 잡스의 위즈니악이 차고에서 PC의 발명은 인간의 문화를 획기적인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컴퓨터의 출연으로 터치의 문학도 급속도로 전환 되었다는 점이고 여기서 우리가 관과 할 수 없는 현상은 Pen문화에서 Power⤍Man의 중심문화가 컴퓨터의 자판- 터치로 넘어오는 시기에 여성의 중심으로 전환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전환점을 맞는다. 사회 전반의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졌으며 모든 분야에서 석권하는 이유는 Power의 남성이 아닌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역할이 터치의 역할로 컴퓨터의 자판에 유리한 여성의 장점에서 더욱 눈부신 장점으로 발전할 수 있다 볼 수 있겠다. 문학의 발전 속도는 100년이라는 단위에서 30년을 지나 컴퓨터의 등장으로 단 3년이면 과거의 100년 변화와 맛 먹는 진전을 이루어 있고 점점 짧아지는 추세를 감당하고 어려운 복잡한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이른바 4차 산업 혁명의 여파를 운위하는 중심에는 AI와 인간의 문화 - 기계와 인간의 문화 현상이 나란히 동행하면서 진행 되어지고 있다. 심지어 종교 조차도 금기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지구를 움직이는 서방국가들과 주도적으로 기술이 앞서 나가는 미국, 영국 등은 AI라는 종교까지 등장했다고 몇 년 전 들은 바 있다. 오늘의 인간은 점차 신(新)원시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미국의 IT매체인 외이어드(Wired)sms 구글 출신의 엔지니어 앤서니 래반도브스키 (41.Anthony Levandowski)가 “미래의 길”(way of the futer)이라는 이름의 AI 교회를 설립했다. 교회의 목적은 “인공지능에 기반에서 신격의 실현을 개발하고 촉진함으로써 사회발전에 기여 하고자 한다고 한다.” 이 교회는 구글에 재직하고 있던 2015년 09월에 설립, 종교단체에 부여되는 면세 혜택을 당국에 요청하면서 2017년 실체가 밝혀졌다. 인공지능이 설교하는 것은 아마도 정치(情致)하고 합리적인 설교에 빈틈이 없을 것이라는데 이른다고 하니 모골이 송연하고 아찔하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니, 기미스 히사비스가 개발한 알파고와 바둑대결 이후에 여러 분야에서 경천동지할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05년 저술한 <특이점 singulalty>에서 2029년에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춘 컴퓨터가 등장하고 2045년에는 기계가 인류를 넘어서는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이런 추세를 추적하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직업군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인간 대신에 컴퓨터가 수술을 하고 변호사, 판사, 회계사, 금융사무원, 의사의 직업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사물 인터넷전문가, 인공지능전문가, 빅데이터 전문가, 가상현실전문가, 3디 프린팅 전문가, 드론전문가, 생명공학자, 로봇공학자 전문가, 등이 유망직업군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가히 어떤 가상 현실이 올지는 누구도 장담 못할 것이다. 이런 변화의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여지는 기계가 할 수 없는 상상력의 분야는 앞으로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라 누구나 말을 하고 있다. 2. 상상력의 미래 예술은 앞으로 주목을 받을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 소설, 평론, 희곡 등 장르에서는 구조(plot)의 분야- 소설이나 시나리오는 이미 로봇이 쓸 수 있는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2016년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니온게이자이 신문사가 주최하는 sf 소설 공모전에서 1심을 통과했다는 보도는 들었지만 2차에서 낙선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어느 작품이 인공지능 작품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심사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나 수필 등은 살아남을 여지는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시-4600년 전에 티그라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수메르 문화의 유적지에 우르크 왕조 5대 왕인 길가메쉬의 신화를 점성토 636 장에 수메르어로 쓴 서사시인 영웅<길가메쉬>를 필두로 시의 길이 시작 되었다. 이보다 2 천년 뒤 기원전 600~700년 전에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이후 시의 발전은 인간 지혜의 발현(發現)으로 이어왔고, 이제 그런 현상이 4차 산업의 혁명적인 여지는 문학에도 엄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예술에서 가장 보수적인 분야가 문학이라면 보다 속히 그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치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사고는 단순하고 단편적이고 장편을 외면한다. 여기서 시 또한 장시이기보다는 짧은 서정시의 아포리즘적(짧은글)인 현상이 기호를 자극할 것이다. 과거의 명작은 점차 읽히지 않는 추세는 오래된 현상이 되어 버렸고 서정시는 이런 견지에서 문학의 중심을 떠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지 않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서정시의 계보는 매우 장황하다 못해 우후죽순이다. 본격적인 단초는 BC 7세기 알카이오스와 그리스의 노래를 담은 도리아 지방의 여성 시인 사포오와 로마에서는 BC 1세기 카룰로스와 호라티우스가 서정시를 그렸고,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엔 폐트라르카, 섹익스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죤 밀턴 등의 서정시로 14행 소네트의 두드러진 발전에 이어 18세기 말과 19세기에는 낭만파 시인들인 로버트 번즈,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워즈위즈, 키츠, 셀리, 위고, 괴테 등으로 계보가 이어졌고 19세기 말과 20세기는 대부분 서정시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발전의 계기를 이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의 서정시는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로 시작된다. 왕비 송씨가 죽자 화회와 치희를 후실로 맞았으나 질투로 치희가 궁궐을 나간 외로움을 사이좋은 꾀꼬리에 비유한 서정시의 원조가 이별의 노래로 담아지는 내용이다. 5세기 신라의 향가 25수와 고려 가요인 <가시리>와 조선의 3음 중심의 양반 노래인 시조(13~14) 등은 우리나라 서정시의 맥을 이어온 전통의 가락이 아니었나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는 양반들의 시가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 들어 1908년 잡지<소년>에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마리로 주제를 삼지만 이보다 10년 전 1898년 협성화보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고목가>라 할 수 있겠다. 슬프다, 저 나무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서있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백 년 큰 남기 오늘 위태(롭도다) 원수의 땃 짝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조지(쪼지) 마라 조고 또 조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依支)(할꼬)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 박혀 반근(盤根)되면 새 가지 새잎이 다시 영화(榮華) 봄 되면 강근(强近)이 자란 뒤 풍우 불외(不畏)하리라 쏘아라, 저 포수 땃 짝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남글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危亡)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외세<일제시대>를 딱따구리로 보면서 쓰러지려는 고목을 대한민국의 처지로 상징하는 노래는 절절한 애국심이 오히려 어쩌다 시인이 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생각과는 정신적인 집중이 층위가 완전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봄, 부산에서 <전쟁 중의 봄> 연작 시조를 그렸다 강산을 바라보매 진치는 연기 자욱하고 되 기빨 양 돛대 봄 하늘을 가리웠는데 집 없이 떠도는 이들 생쌀만 씹고 다닌다. 거리엔 벽만 우뚝 선 마슬엔 새 밭 메고 전쟁이야 멀건 말건 봄바람 불어 들어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빼어난 한시(漢詩)시인이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50년대 말 창경원에서 전국 시조 대회를 열고 직접 시제(詩題)를 내기도 했으니 대단한 시조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0년대에 오면 김소월과 한용운은 당시 시단의 주류가 아니고 사실은 아웃사이더였다. 설익은 외국 상징주의 흉내로 명맥을 이어온 한국 서정시는 1930년대 후반 “시 문학파와 인생파” 등에 이르러 본격적인 모양으로 출발을 했으며 이러한 명맥이 1960년대의 소용돌이와 70년대 민중문학 소용돌이에서 서정시인들은 위축과 민중문학에 의해 뒤 켠으로 물러난 시대의 강을 넘어왔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민중문학의 맹장들의 거처인 <창비>의 <문지> 등의 중심세력들이 문단의 목청이 너무 큰 사람들이 장악한 한국 서정시의 맥락은 침체와 의기소침, 위태로운 강을 비틀거리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라 보는 것이다. 민중문학의 이론가라고 하는 백낙천이나 고은 등 문단의 거목 행세로 노벨 문학상이라는 허풍을 부풀린 거품의 본질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작품성은 민중 타령으로 작품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휴머니즘의 사상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우성과 민중 이외에는 찾을 것이 없다는 점이 비극 표현의 몰락의 길을 걸었지 않았나 필자는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2017년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Harvey Weinstein을 최초 고발한 애슐리 쥬드의 mee too의 파도에 좌초된 현상이 그 얼마나 허약하고 빈약한지 부풀리기 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은 문학성이라는 것이 생명을 키우는 것이 절대 요소이기 때문에 허세와 풍선은 언젠가 터지는 것이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3. 문학이라는 땅 인간은 자연이 일부인 것이다. 물론 인간 갖고 있는 모태는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의 자연과 하나가 되느냐의 따라서 달라진다. 자연이 주는 일부는 인간이 소유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과 공감을 한다. 그러나 서양의 자연과 동양의 자연은 다르다. 서양은 정복으로의 자연관이며 동양은 조화(調和)로의 자연일 때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르다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본다면 서양의 사상과 동양 사상의 합일점은 4차산업혁명의 여파 속에서 어떤 것이 더 생명력을 상상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현실에 있어 동서양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세계는 이미 하나의 지구촌 생활 속으로 모든 것이 통합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섭의 학문, 통섭의 여파로 문학 또한 그런 경우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의 창조에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딥마인드의 로봇과의 시합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여 상상력이라는 것은 깨우침의 훈련으로 그 높이를 더욱 제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뇌의 인간화를 강조하게 된다. 물론 사고에서 상상을 새로운 시발점이 가지를 만날 수 있고 숲을 만나 상상에서 또 다른 상상의 경지를 가질 때 인간의 문화에 중심 역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상의 원천은 시(Poem, Poetry)를 강조하는 이유가 나변(那邊)은 아닌 것이다. 문학의 출발은 인간의 일을 기록하는 일이지만 본질은 인간의 사랑인 휴머니즘의 영원한 명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세익스피어나 톨스토이 작품을 읽어도 그렇고 위대한 사상가의 작품 속에는 한결같이 사랑의 이름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방법을 말하는 이야기들이다. 허접한 정치에 매달려 이데올로기의 간판도 아니며 타령조의 애소(哀訴)도 아니며 오로지 인간의 본질에 이르는 문제인 사랑의 길을 찾고 말하는 일이 문학의 숙명이자 길이라는 점에서 시는 그런 상상의 원천에 도달하려는 창조라는 점에서 종교를 대신하는 것은 바로 시(詩)다 라는 매쉬 아놀드의 말을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4. 시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 것인지- 아미 로우엘은 “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 ‘모른다’는 단순한 대답이었다. 이는 인간의 창조적인 근원을 묻는 일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시가 서로 모순되는 사상들의 융합인지를 묻는 영국 시인 그레이브스와 미국의 여류시인 새러 티스데일이 말한 흥분과 긴장의 결과요 해소라는 주장과 백일몽에 가까운 심리적인 상태의 몰입으로 말한 프레스콧의 말 등 한가지로 통일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잠재된 신비의 상태를 필자가 보는 견지에서는 접신(接神) 즉 무아지경의 신비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공자가 말한 시경을 두고 시 300수를 한마디로 사무사(思毋邪)라는 말에는 무아경의 깊이가 없고 현상적 사실을 정리한 뜻에 불과 하다고 말들 하지만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의 길을 재촉하는 일이고 독자 또한 시인이 쓴 시를 통해 상상의 또 다른 창조의 추체험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시의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의 상상을 만드는 길일 것이라는데 진리가 되지 않을까? 미래의 문화 현상 또한 밑바탕 위에서 새로움을 구축하는 일이 문화의 근간을 이르는 인간의 절차탁마(切磋琢磨)만이 상상력이라는 결론에서 본다면 앞으로도 시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는 말로 정리될 것 같다고 확신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2. 10. 02.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이승섭 시인 {이승섭 시평집}[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 4 시집[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2) [평택호에서 필자]
by 류남신 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