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갈증은 곧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가져오기에 여유롭고 넉넉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기능이 퇴화하고 늘어지는 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족한 면을 메우기 위한 행동을 예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순을 거치면서 자연과 세상은 변화를 맛보게 된다. 가을의 찬란함과 고독 사색이 없다면 가을이라 할 수 없으며 겨울의 추위가 없다면 봄의 꽃은 없을 것이고 불편하고 어려워도 첨단 즉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편리가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 이유가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같을 것이기에- 부족(不足)은 만족(滿足)의 모태가 된다. 이 명제는 진리가 함축된다. 왜냐하면 부족이 만족을 낳고 갈증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부복이나 갈증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을 위한 길을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한 줌 햇살 살짝 비추고 슬쩍 입맞춤 구름 걷히고 바람도 숨을 고르며 다소 곳 손 부여잡고 춤출 수 있으련만 주는 사랑으로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과 같이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 『주는 사랑』 중에서 구름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에서 행복이 오듯, 햇살은 최종의 기다림이고 구름은 이를 훼방하는 이미지로 다가들 때,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행복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주는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구하고 찾는 방황이 있어야만 사랑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물상 삼라만상에서도 통용된다. 그렇기에 인과적(因果的)인 현상이 증명으로 통하고 증명은 다시 되풀이되면서 삶의 원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정서에 특히 달관(達觀)된 정서를 유지하는 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자연과 같이” 자유의 생을 이룩하기 위해 열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필자) “주는 사랑”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 등이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가 기승 전 詩들을 원하고 그렇게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을을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겨울은 또한 봄을 맞이하는 계절이기에 겨울의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계절이다. 겨울은 어둠이고 방위로는 북쪽, 높새바람이 세찬 기운을 몰고 올지라도 마침내 봄기운에 꺾기는 의미를 낳는다. 봄이 심술을 부리다 떠난 겨울의 빈집에 각시방을 차리고 화사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초청했나 보다 앙상한 가지에 화려하게 단장을 시킨 파릇파릇 청순한 봄처녀들의 무희는 온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길모퉁이에도 바짝 마른 야산에도 펼쳐놓은 잔치에 무수한 인파들이 몰려들지 모르지만 간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 목 길게 빼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무희 춤사위는 지칠 줄 모르고 발길 닿는 어느 곳이든 공연 길을 나선다. 『봄축제』 중에서 봄은 나무들이 푸른 낙원을 색칠하는 계절이고, 꽃들의 축제이고 또 향기의 상승으로 고귀함을 연상하면서 들썩이는 계절이다. “무희”들의 “초청”은 바로 잔치를 준비하는 계절을 암시하고 2연에는 각시들의 싱싱한 모습이 육감적인 비유, 그리고 잔치의 “인파”와 더불어 노래가 세상을 장악하는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꽃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다시 향기로 세상의 공간이 분주하면 벌과 나비들은 인파를 이루는 인간과의 대조를 형성하면서 더욱 바빠지는 계절, 꽃과 향기로 상승하는 것은 봄이 갖는 특별한 기회이면서 자연의 질서가 형성- 꽃과 향기는 서로 보완적인 상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라는 존재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통찰이 섬세할 때,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자극하기 때문에 겨울에서 봄으로 진행하는 질서- 겨울을 이겨내고 용기 혹은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꽃과 향기의 상징에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풍경의 제시로 보여주는 흥겨움을 전달하면서 화려한 장마당처럼 분주해지면서 흥취에 젖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2. 추계의 노래 시인은 계절적 감각을 유난히 예민하고 그곳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필자) 이는 감각의 발달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에 가까운 인상에서 진실된 시의 표현미가 발동되고는 하지만 봄날보다 가을의 이미지가 다수인 것은 아마 남자 사색의 정서- 낭만을 즐기고 고독의 사색에서 오는 “ 외롭고 쓸쓸한 감수성”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계절별로 따지면 가장 많은 시들과 가을을 전하고 있기에 이는 필자의 내면 정서에서 발동되는 기운이 시의 진로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로 돌리면 되지 않을까 한다. 『가을은』 『가을 단상』 『어느 가을날에』 『추계 연가』 『늦가을』 『추억 가을』 『단풍잎』 등 가을의 시를 쟁취하면서 낭만으로 선행을 한다. 사색을 먹고 낭만을 먹으며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은 시간 갖는 풍경으로 저무는데 서리꽃 앙칼진 눈초리가 유난스럽다. 만추에 만삭의 절정 가을은 절벽 위 우두커니 고개 국이고 찬바람에 발등 찍힌 낙엽은 야윈 모습으로 슬픔을 노래해 달랑 걸린 낙엽 하나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 떨고 있네. 『단풍잎』 중에서 조락(凋落)에서의 반응은 슬픔이거나 우울 앞을 가린다. 가을의 슬픔은 감정을 예민 반응하면서 주변의 모습에 슬픔을 고하는 것 같아 분위기에 젖는 것이 가을의 정서라 하겠다. 이는 질축한 슬픔이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양상이기에 가을의 정서에 여린 마음이 더욱 많아지는 듯하다. 낙엽에서 삶의 아픔을 노래하고 1연에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 앙칼진 서리꽃의 표정 3연에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한 가을의 절정에서 느끼는 6연에 고개 숙이고 슬픔을 풍경으로 저무는 곡예 하듯 위태롭다. 결국 필자의 마음에는 가을에서 슬픔을 반영하는 낙엽의 슬픔과 대칭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을의 정서가 시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가을의 사색을 마음껏 즐기려 하는 필자는 팔자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계절 감성에 젖어 마음의 자아가 요동을 치는 것인지 유치하다고 느낀다. 3. 에필로그 한 인간의 시인이 영혼을 달래 주거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시가 밝아야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어둠이 햇빛의 상관에서 출발하고 절망이나 불행도 행복과 자유로 맞아 드리는 고통의 문이라면 필자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러한 경험의 채득을 시화(詩化)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며 여기서 개성을 발휘하게 된다. 시는 곧 시인의 개성의 문패가 되는 것이고 이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일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생활하는 필자는 이제 1년 정도 낯선 정서에서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1편의 시는 언어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더러 시는 비가 봄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쓰이고 다음 단계는 꽃과 향기, 계절을 불러와 승화시키는 순서를 갖기에 꽃은 늘 천상의 이미지 향기로 나타내는 것은 순치하는 순리이고 이치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가을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라면 가을은 시심의 동력을 제공하는 뜻에서 필자의 마음과 일체화된 가락으로 채워지는 것이기에 시인은 늘 가을의 중심, 계절의 중심을 배회하는 순수한 나그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 계속 시를 그린다면 견고(hard) 간결(simple) 정확(precise) 선명(vivid) 성을 현대 詩라 특질로 언급했다면 필자는 따스하고(warm) 온화함(soft)을 합작한 “휴머니스트” 적 행장으로 그리고 싶다고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 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詩的論이라는 것은 언어(言語)로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대체적으로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독자와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치 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云爲)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하여야 하여야 하기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적으로 받아 드리는 시인의 길을 가려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아픔,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으로 포장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금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현실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물음표이다. 이제 겨우 30여 명의 시인 논을 쓰고 있는 본인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이 되고 투영된 작품이 없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많지만 걸맞은 작품에서는 수사가 너무 많아 작품성의 가치가 없음이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 일게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공부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지부에도 젊음의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는 물음표(?)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은이들을 찾고 찾아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지부가 될 것이라 확신하며 찬란한 빛이 내려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일로, 개인의 아집을 보이는 모습이 필자가 보기에는 희망이 없음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다. 물론 연세가 많다 하여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필자 또한 나이가 익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편들끼리 모여 편들끼리 지부를 운영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곳에 정착한 지, 어언 여러 해가 되어 가지만 하나도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해 본인 스스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지만 공연히 평지풍파 아니 잘난 척하다는 모양새에 그냥 보고 듣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본인은 여러 지부에서 함께 생활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여기처럼 부자연스러운 지부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여 예술의 도시인 지부가 된다면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될 것이다. 4차, 5차원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강조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가 반목하면서 눈치만 살피고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 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잠시 현실의 안위를 생각하는 의미로 일탈을 한 것은 아닌지? 다시 평론으로 들어간다. 1. 봄바람 자리 <김영미>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꽃 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 아! 가벼워라. <꽃바람/김영미> 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꽃 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 마음의 자아 <박시연>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을 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신적,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時語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 않다는 데에 허전이다.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이유가 나타난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박시연>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 일게다. 좌고우면 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오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시라는 존재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의식과 일체화를 꿈꾸는 작업이라 본다. 다시 말하면 1+1은= 2가 아니라 3의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화학적인 결합의 일체화인 것이다. 이는 시적 장치인 비유나 역설, 은유, 직유 등의 장치를 가동하여 시인의 재능을 나타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지를 앞세우면 자아는 곧 시적 화자인 시인으로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순백이어야 하여야 때문만은 아니나 현실에 대한 의미를 내장한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시어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3. 에필로그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를 대중들에게 바치는 가수이기에 비록 서툰 곡조라도 신명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과 희망을 향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릴 줄 알아야 하고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fr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첫 시집에서 의도를 명료화하는 이미지 구성은 건강하고 튼튼한 재료를 배열하는 설계도를 완료한 것이다. 다음 건축은 확연하게 다른 시의 개성 그리고 우리나라 시의 의미를 위한 발성이 두드러질 때 기대하는 가 위의 논지들에서 재촉이 된다. 또한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는 비밀성이 낯설게 표현하지만 비유나 은유의 장치를 분해할 수 있다면 결국 시인의 모든 정서가 표백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인 자신을 말하는 우회적인 언어의 포착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향기를 발산하는 시인들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며 문을 닫으려 하며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에 마음의 자아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일탈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며 오늘은 나를 변명하는 일로 맺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대는 계속 진화하고 변화를 따라가는 의상의 변천은 전위적이지 않겠지만 상황 상황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있다. 이는 현실과 접목된 변화의 길이기에 과감하게 앞서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 왜냐하면 상상의 문제는 변화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요체는 상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농경사회의 상상과 산업화의 상상 AI, 반도체 상상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농경사회는 현실의 구체성을 가질 때 의미를 둔다면 앞으로는 추상적으로 접근하면서 산업사회를 지나 이제 AI, 시대 초현실 시대에서는 공상의 범주를 벗어나 배회하면서 하이에나의 모습인 것이다. 정치(精致)가 아니라 추상의 넓이가 얼마나 넓고 가능성의 범주가 막연할 때 상상의 가치는 이외에도 호감의 도수를 높이는 점일 것이다 상상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심심풀이, 한가할 때 많이 온다고 한다. 낮잠을 자거나 무심히 쳐다보는 천장의 수만 갈래의 길을 발견하고 거기서 소리치는 기찻길도 보이고 때로는 새의 길도 나타날 때 꿈의 이름은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찻길은 미지의 땅으로 달려가는 일도 나타날 것이고 새는 하늘의 깊이 공간으로 호기심의 나래는 계속 이어 어디엔가 무릉도원의 중심에 이르는 꿈이 도래할 것 같은 생각의 명명식이 복잡해진다. 이러한 상상은 상상의 초보 단계인 원시 사고(思考) 이때는 평안에 존재의 광장이 여유가 있었고 느림의 미학에서 일상이 근심의 뱃머리를 출발선에 옮겨 놓았을 때이다. 그러나 인간의 팽창은 달려오는 몫이 문제인 가난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놀람을 깨우기도 하고 멀리 달아나는 혼자만의 꿈도 이어진다. 농경사회 꿈은 땅 문제에 걱정하고 늘리는 일이 생존의 길과 이어지는 상상이 대부분일 때, 춘양과 이도령의 사랑이 지고(至高)의 가치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점차 복잡해지는 사회구조는 수직구조의 사고에 따른 상상이 벼슬이 높아지는 신분의 층계를 가치로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사람의 구분을 만들고 상층으로 오르려는 생각에 파생되는 모순의 구조는 점차 길이 복잡다단해지고 이를 평등으로 장치를 마련하지만 이에 따르는 제도의 갈래는 그물망을 촘촘하게 인간을 묶는 연습이 날마다 변화한다. 산업화를 거처 이제는 과학, 초전도체에서는 인간의 사고보다 치밀해지고 이기적인 사고의 틀이 공고화 된다. 과학이라는 산물은 꿈조차 점차 영역이 넓어지고 이전에 겪지 못했던 일들이 상상의 틈새를 넓히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과거의 상상은 비교적 경계가 확연히 어필하지만 인간 사회가 사다리를 타고 오를 때마다 제도가 주의 단계에서 경각으로 다음은 구금이나 체포의 법률을 제정하여 한계를 설정할 때, 인간의 사고는 오히려 더욱 팽창의 반발하게 될 때, 인간의 문화는 날개를 달고 미지의 방문을 재촉하는 - 재차 말한다면 사회의 제도가 얽어맬 때 상상의 자유는 더욱 넓어지는 길을 확보하려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상상은 도저히 붙잡거나 법으로 금을 긋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상의 길은 넓어지는 일이 꿈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공상 – 보통 일반적인 인간들은 공상이나 상상을 지나치게 하면 미치거나 이상한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에서는 문학에서나 어느 분야에서나 상상과 공상의 구분이 모호한 길을 갖는 이를테면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혹은 생각의 비빔밥이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4차 혁명, 5차 혁명의 기초가 된 것으로 친다면 되지 않을까? 이른바 1998년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의 저술인 <The unity of knowledge >로 알려졌지만 이미 이런 징후는 미술의 피카소가 시작했고 살바도로 달리 등 추상화가들의 솜씨는 이미 예견의 징후를 보냈다. 예술 중에도 특히 미술은 상상의 첨단을 먼저 밟고 음악이나 문학은 뒤따라가는 특징이 있다. 일종의 정리 임무를 맡는 쪽이 음악과 문학이 충실할 때, 미술은 더욱 빛을 발휘하는 임무에 충실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과 대칭인 인문학의 분화는 산업혁명 이후 열성적이었지만 21세기를 넘어 IT, 기술의 발달은 순식간에 이런 증거를 뭉개고 하나로 통합되는 일이 현재 진행형이기에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합이 급격하게 진행되어 신들의 나라 그리스에서 점차 르네상스를 지나며 두 관점은 명백하게 분할(분할)의 표정을 나타내는 것을 진리의 명제처럼, 또한 컴퓨터의 출현 동시 자연, 인문의 관점은 하나의 길로 결합하는 상상으로 일치된다는 논리이다. 그 결과물이 로봇의 인간화 앞으로 로봇의 길- 지금 진행형이라 약 35% 몫이라지만 미구에 인간은 의학과 법률의 응용과 적용뿐만 아니라 상상의 결과물인 예술을 빼고는 모도 장악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학에서도 소설, 희곡, 등은 문학 장르에서 빠져야 할 운명이 도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나 수필은 구조의 장치가 필요 없다는 논지에서 인간 것이라는 소유권이라 보면 어떨지는 글쎄올시다.이다. 작금에 우리들의 상상력은 길이 없음에서 길을 찾는 공상의 방문, 상상의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imagination의 질서 있는 길 찾기라기보다 길이 없는 곳에서 이리저리 튀는 Fancy의 표정을 앞에 놓고 그 길을 방황하면 무언가 상상의 입구를 발견하면서 인간의 문화를 새롭게 정립하는 시대의 문이 열릴 것이라 예견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이것저것도 아닌 또는 저것도 이것도 결합하는 도처춘풍(到處春風)의 눈부신 시대가 예견할 수 없는 지경의 아득한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아 귀의 낯섦을 어떻게 적응할까에 대한 새로운 보청기 생길 것 같아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 중이다. 2. 시의 논리 대부분 시를 쓰면서 구조와 논리에 방점을 생각한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가는 순서와 같이 때에 따라 역전 경우도 있지만, 이 또한 논리의 옷을 입어야 한다. 순서가 관습과 합리적 이유가 내장될 때, 안심하고 시의 종착을 지향하기 때문에 가령 어린이 행동은 어른의 경우와 달리 돌출적이지만 성장하여 관습의 질서를 익히다 보면 거기엔 일정한 루트가 존재함을 생각하고 행동거지를 나타낸다. 시도 이런 이치에 가깝다는 느끼는 이유에 현실의 문제와 표현의 거리가 너무 멀면 다시 고치고 뜯어서 개 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논리의 구조에는 의미에의 합리성이 고개를 내밀고 만족한 방점을 찍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신의 흐름은 분석 대상인지 아닌지는 확증(確證) 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정답을 찾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발표했을 때 사교(邪敎) 혹은 독신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받았다는 것도 우리는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시, 공간에 대한 견해 이론인 고전물리학의 뉴턴과 현대물리학의 아인슈타인이 공존할 수 없는 물리학적 학설은 인간의 기준에서 언제라도 뒤바꾸는 점을 여지로 남겨 두겠다. 그렇다면 시의 논리는 과학적인 더하기의 정치(精緻)함을 요구하는가 아닌가는 때에 따라 생각의 길이 다를 것이다. 시는 과학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하나 더하기 하나둘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에 사물의 결합은 감정의 결합과 유사하기에 모호성(ambiguity)의 이유를 완전히 제거하고 판단하는 것은 모순일지 모르나, 관습적인 질서를 벗어날 때는 비이성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기울어질 경우 시의 상식은 파괴된다고 보는 것이기에- 물론 이상(李箱)의 시를 비이성이라 딱지를 붙일 수는 없지만 애매하고 사리에 근접하기는 어려운 것도 정확하다고 해도 이를 난 해시라 할는지는 글쎄올시다.이다. 시라는 존재는 이성을 깨우는 것 아니라 감정의 순화와 미적 감수성을 동원하는 정서의 문제이면서 결국 이성에 접근하여 전보다 더 밝고 깨끗한 인간의 길을 만들 수 있을 때, 정서의 전부인 시의 임무는 확실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는 논리의 그물을 벗어나면 난해의 숲에서 인간을 조롱하는 표정을 짓게 된다. 상식이 통하는 시는, 그리고 상식이 아닐지라도 그 상식 범주에 순수와 깨끗함 그리고 순화의 마음을 오로지 지표로 삼아 길을 정하는 목적이 옳을 수 있을 것이기에 시의 논리 상식의 논리 상상의 논리라 개인적 소견을 밝히며 에필로그 한다. 2023.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는 소재의 투명성과 표정의 소재를 찾아 의식의 토로를 거쳐 나오는 정서의 질서 현상이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누구나 체험이 바탕을 이루면서 상상력의 조력을 받을 때 일정한 질서의 규범을 지켜가면서 시인 개개인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삶의 방식을 추구하면서 의미의 조직화에 혼신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 더러는 성공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도로(徒勞)에 그치는 시인도 있다. 그러나 명망(名望)을 얻거나 그 반대인가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다만 새로움을 찾아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려는 일상의 노력이 가상한 것이지 유명의 대열과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유명은 부풀어 오른 거품현상이지 자신의 참된 의미와는 무의미할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를 그리고 글을 쓰는 일도 그렇다. 삶과 생이라는 고해의 바다에서 오로지 자기 정화 혹은 수양의 도구일 때, 시의 가치 글의 가치는 참된 자기와의 만남 혹은 그런 표정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시를 쓰고 글을 쓰는 일은 진실, 혹은 순수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 한정된다. 자신 삶과 오뇌(懊惱)와 고통 신산한 생의 이름들이 모여 순화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시와 글은 아름다움을 손짓하는 가락으로 이름을 갖는 역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헌신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 혹은 자기를 돌아보는 닦음의 소재가 의식의 통로를 통해서 가락을 형성한다. 물론 저변에는 부모나 고향, 자연, 삼라만상의 정서가 시의 원형을 이루는 표정이기에 늘 순수함을 잃지 않는 정신 정서가 있어야겠다. 2. 함께하는 의식과 아가페 헌신 낮은 곳에 흐르는 물은 속성이 겸손에 있다. 거스름이 없고 순리에 따르는 것은 그만큼 달관의 높은 경지를 확보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인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지배보다는 헌신이고 교만보다는 겸손을 앞세울 때 아가페 사랑의 마음이 깃들게 되고 사랑의 넓이는 따스함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Van Gogh가 파리 시대에 그린 「Les Souliers」라는 작품 본적이 있다. 한 켤레의 농부 구두에서 서럽게 살아온 농부의 슬픈 삶에 고달픔과 생의 아픔이 낡았고 지친 표현의 구두에는 충분한 소명이 담겨 있는 것을 느낀다. 그뿐만 아니라 Gogh가 그린 「La Chaise De Vincent」 또한 딱딱하고 비뚤어진 의자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유추하는 일은 쉬운 일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작품과 작가의 모든 생을 압축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체험과 상상력은 작품과 밀접한 상관 하에서 출발한다. 변함없이 발을 감싸는 신발 지치고 고달프고 고통을 당해도 마음 넓게 감싸는 신발 제 몸 모두 닳고 닳아도 내색하지 않고 발을 보호하는 신발 남 보기 부끄러워도 묵묵히 나의 분신 닳고 닳은 모양새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신발 분신이고 내 짝인 너 고맙다. 신발 <분신> 중에서 시인이 시집을 상재 할 때마다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건 작품의 순서를 배열해야 독자에게 강한 모습과 첫인상을 독자에게 어필하려는 발상에서 맨 앞 페이지에 있는 작품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을 감싸고 인간을 보호하는 의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의상과 어울리는 신발이 깔끔하면 그 사람의 인상은 멋진 사람으로 인식하고 지저분하게 의상을 입으면 흐린 인상을 각인 시켜주는 일은 우리 인상에서 좌우되는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 고흐가 그린 농부의 신발에서 삶의 고단함과 서글픈 농부의 등식처럼, 시인과 구두는 비교가치로 연결되어 가치가 높다 보겠다. 신발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기에 어떤 경우에든지 주인을 위해 아픔을 참고 “/끈기 있고 /마음 넓게 나를 감싸는 신발”/이라는 임무에 헌신해야 한다. /지치고 고달프고/ 고통을 당해도/마음 넓게 감싸는 신발/남 보기 부끄러워도 묵묵히 나의 분신/무한 성실을 다할 때 우리의 앞날이 밝아지는 희망의 푸른 이름이 빛이 난다. 헌신, 봉사는 때로 고독하고 외로울 수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타행(利他行)은 자기를 희생하는 바탕 위에서만이 비로소 성립되는 Eros 적인 희생이기 때문이다. 햇빛은 늘 변함없이 환한 웃음 선물하고 우리네는 마냥 선물만 받는다. 세상 인연 맺은 날부터 지금까지도 무한 사랑에 에너지를 주었건만 우리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만 하고 빛은 우리네에게 행복하게 살라고 알려주지만 그 의미 모르고 우리네는 깨닫지 못하고 사네 <감사하는 마음> 중에서 사랑은 대상과 대상의 교감이 성립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이치처럼 헌신과 봉사에도 그런 교감은 필요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방적일 경우 짝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神에게 드리는 기도조차도 응답을 기다리는 신도의 자세처럼 봉사에도 일정한 대가는 보여야 할 것이다. 시인은 햇빛의 일방적인 사랑에 ‘우리네’ 감사함이 없이 마냥 받고 돌아서는 일에 서운함이 있을 것이다. 몰이해(沒理解)는 실망과 고단함이 따라오지만 조건없는 사랑을 바칠 때, 아가페적인 무한의 사랑은 고귀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받아서가 아니라 주었을 때, 비로소 빛나는 가치로 돌아서는 이유를 우리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3. 아가페 사랑 시인이란 사물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찾아 나서고 그것을 어떻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또는 생을 다해 어떻게 작품을 완성하는가의 신명을 다 바치는 사람들이기에-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고 자연을 끌어와서 인간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대신하는 사람일 때, 시는 고귀한 가치와 정신으로 표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시는 가장 많은 시적 정서가 사랑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말을 바꾸면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과 대상을 하나로 묶어 평화로운 땅을 만들 때, 시는 공고한 성주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변신」, 「사랑의 그물망」, 「사랑의 전서」, 「꽃의 사랑」 등을 보면 더욱 그렇다. 시는 체험의 요소와 상상력 그리고 의미와 신념이 1편의 시를 만나는 일기기 때문에 종국은 생각의 방향과 의지가 시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면 사랑의 감수성이 많은 이유는 시인의 정서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하기에- 시인은 시인의 내적 고백이고, 이 고백은 진실의 함량이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언제부터인지 내게 그대라는 은행이 하나 생겼어요. 장기로 복리 우대로 사랑 계좌를 만들었어요. 당신이 내게 사랑이라는 원금을 보낼 때마다 모두 그대를 위해 입금했어요. 고스란히 찾아서 그대가 가지세요. 사랑의 통장을 <사랑 통장> 중에서 너무나 신선하고 상상 비유의 사랑법인 듯하다. 많은 시평을 해보았지만 사랑을 은행에 저장하여 복리로 부풀려서 주겠다는 비유는 가히 약성의 비유인 듯하여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시인 듯하다. 시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상징의 도구를 통해 언어의 신선함을 위해서는 심지어 언어를 버리면서 언어를 획득하려는 역설의 기교를 높게 평가를 하고 싶다. 은행의 이름은 그대이고 시인은 사랑의 계좌에 수시로 입, 출금이 들락거리면서가 아니라 복리를 위해 장기간 계좌를 준다는 점에서 사랑의 가치가 한층 고조되어 너무나 멋진 시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사랑은 계산이 아니고 오로지 저금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뒷날 받을 자산가치는 행복이 넘치는 화려한 것이다. 이는 곧 행복이라는 궁극의 지점에 도달됨을 뜻하는 것이다. 4. 에필로그 하면서 사랑은 헌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헌신은 더 큰 사랑의 길을 여는 아가페 사랑이라면 시는 순수한 투명이 남다르게 시의 표정을 밝게 한다. 이는 그의 삶의 질료(質料)가 되기도 하며 평생을 지속하는 삶의 에너지로 작동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소재와 사랑이라는 아름다움에서 관조의 경지에 오른 듯한 때라야 하늘이 보이고 천지가 보이는 것이다. 소재와 사랑은 그렇게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며 행복을 주는 것이라 이를 지키기 위해서 끝없는 자기 수양과 정화의 노력은 배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라- 시인은 이러한 이치를 수행하는 행동의 모범이 날마다 자기 수양을 이어가는 것일 것이다. 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정답은 없다. 자기의 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절제와 균형을 갖추는 삶의 모습이 투명해야 한다는 조건 앞에 시인은 당당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질서의 부당함과 불합리에는 몸살을 앓고, 공정, 정의와 옳은 것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의 정신을 이룩하고 삶의 지표로 삼는 것은 책무라 보며 진정한 시인이라 할 것이라 강하게 주장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시평집] [이승섭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갈증은 곧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가져오기에 여유롭고 넉넉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기능이 퇴화하고 늘어지는 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족한 면을 메우기 위한 행동을 예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순을 거치면서 자연과 세상은 변화를 맛보게 된다. 가을의 찬란함과 고독 사색이 없다면 가을이라 할 수 없으며 겨울의 추의가 없다면 봄의 꽃은 없을 것이고 불편하고 어려워도 첨단 즉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편리가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 이유가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같을 것이기에- 부족(不足)은 만족(滿足)의 모태가 된다. 이 명제는 진리가 함축된다. 왜냐하면 부족이 만족을 낳고 갈증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부복이나 갈증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을 위한 길을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한 줌 햇살 살짝 비추고 슬쩍 입맞춤 구름 걷히고 바람도 숨을 고르며 다소 곳 손 부여잡고 춤출 수 있으련만 주는 사랑으로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과 같이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 『주는 사랑』 중에서 구름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에서 행복이 오듯, 햇살은 최종의 기다림이고 구름은 이를 훼방하는 이미지로 다가들 때,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행복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주는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구하고 찾는 방황이 있어야만 사랑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물상 삼라만상에서도 통용된다. 그렇기에 인과적(因果的)인 현상이 증명으로 통하고 증명은 다시 되풀이 되면서 삶의 원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정서에 특히 달관(達觀)된 정서를 유지하는 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자연과 같이” 자유의 생을 이룩하기 위해 열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필자) “주는 사랑”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 등이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가 기승 전 詩들을 원하고 그렇게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을을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겨울은 또한 봄을 맞이하는 계절이기에 겨울의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계절이다. 겨울은 어둠이고 방위로는 북쪽, 높새바람이 세찬 기운을 몰고 올지라도 마침내 봄기운에 꺾기는 의미를 낳는다. 봄이 심술을 부리다 떠난 겨울의 빈집에 각시방을 차리고 화사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초청했나 보다 앙상한 가지에 화려하게 단장을 시킨 파릇파릇 청순한 봄 처녀들의 무희는 온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길모퉁이에도 바짝 마른 야산에도 펼쳐놓은 잔치에 무수한 인파들이 몰려들지 모르지만 간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 목 길게 빼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무희 춤사위는 지칠 줄 모르고 발길 닿는 어느 곳이든 공연 길을 나선다. 『봄축제』 중에서 봄은 나무들이 푸른 낙원을 색칠하는 계절이고, 꽃들의 축제이고 또 향기의 상승으로 고귀함을 연상하면서 들썩이는 계절이다. “무희”들의 “초청”은 바로 잔치를 준비하는 계절을 암시하고 2연에는 각시들의 싱싱한 모습이 육감적인 비유, 그리고 잔치의 “인파”와 더불어 노래가 세상을 장악하는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꽃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다시 향기로 세상의 공간이 분주하면 벌과 나비들은 인파를 이루는 인간과의 대조를 형성하면서 더욱 바빠지는 계절, 꽃과 향기로 상승하는 것은 봄이 갖는 특별한 기회이면서 자연의 질서가 형성- 꽃과 향기는 서로 보완적인 상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라는 존재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통찰이 섬세할 때,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자극하기 때문에 겨울에서 봄으로 진행하는 질서- 겨울을 이겨내고 용기 혹은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꽃과 향기의 상징에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풍경의 제시로 보여주는 흥겨움을 전달하면서 화려한 장마당처럼 분주해지면서 흥취에 젖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2. 추계의 노래 시인은 계절적 감각을 유난히 예민하고 그곳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필자) 이는 감각의 발달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에 가까운 인상에서 진실된 시의 표현미가 발동되고는 하지만 봄날보다 가을의 이미지가 다수인 것은 아마 남자 사색의 정서- 낭만을 즐기고 고독의 사색에서 오는 “ 외롭고 쓸쓸한 감수성”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계절별로 따지면 가장 많은 시들과 가을을 전하고 있기에 이는 필자의 내면 정서에서 발동되는 기운이 시의 진로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로 돌리면 되지 않을까 한다. 『가을은』 『가을 단상』 『어느 가을날에』 『추계 연가』 『늦가을』 『추억 가을』 『단풍잎』 등 가을의 시를 쟁취하면서 낭만으로 선행을 한다. 사색을 먹고 낭만을 먹으며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은 시간 갖는 풍경으로 저무는데 서리꽃 앙칼진 눈초리가 유난스럽다. 만추에 만삭의 절정 가을은 절벽 위 우두커니 고개 국이고 찬바람에 발등 찍힌 낙엽은 야윈 모습으로 슬픔을 노래해 달랑 걸린 낙엽 하나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 떨고 있네. 『단풍잎』 중에서 조락(凋落)에서의 반응은 슬픔이거나 우울 앞을 가린다. 가을의 슬픔은 감정을 예민 반응하면서 주변의 모습에 슬픔을 고하는 것 같아 분위기에 젖는 것이 가을의 정서라 하겠다. 이는 질축한 슬픔이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양상이기에 가을의 정서에 여린 마음이 더욱 많아지는 듯하다. 낙엽에서 삶의 아픔을 노래하고 1연에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 앙칼진 서리꽃의 표정 3연에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한 가을의 절정에서 느끼는 6연에 고개 숙이고 슬픔을 풍경으로 저무는 곡예 하듯 위태롭다. 결국 필자의 마음에는 가을에서 슬픔을 반영하는 낙엽의 슬픔과 대칭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을의 정서가 시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가을의 사색을 마음껏 즐기려 하는 필자는 팔자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계절 감성에 젖어 마음의 자아가 요동을 치는 것인지 유치하다고 느낀다. 3. 에필로그 한 인간의 시인이 영혼을 달래 주거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시가 밝아야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어둠이 햇빛의 상관에서 출발하고 절망이나 불행도 행복과 자유로 맞아 드리는 고통의 문이라면 필자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러한 경험의 채득을 시화(詩化)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며 여기서 개성을 발휘하게 된다. 시는 곧 시인의 개성의 문패가 되는 것이고 이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일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생활하는 필자는 이제 1년 정도 낯선 정서에서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1편의 시는 언어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더러 시는 비가 봄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쓰이고 다음 단계는 꽃과 향기, 계절을 불러와 승화시키는 순서를 갖기에 꽃은 늘 천상의 이미지 향기로 나타내는 것은 순치하는 순리이고 이치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가을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라면 가을은 시심의 동력을 제공하는 뜻에서 필자의 마음과 일체화된 가락으로 채워지는 것이기에 시인은 늘 가을의 중심, 계절의 중심을 배회하는 순수한 나그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 계속 시를 그린다면 견고(hard) 간결(simple) 정확(precise) 선명(vivid)성을 현대 詩라 특질로 언급했다면 필자는 따스하고(warm) 온화함(soft)을 합작한 “휴머니스트” 적 행장으로 그리고 싶다고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1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최신작}.] [이승섭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베스트셀러가 되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문학을 하는 한 개인의 사상은 정신의 깊이가 얼마나 들어있고 삶의 모습이 투영되는지는 뒤에서 후배들이 따라가는 삶의 귀감이 될 때, 비로소 정신 가치와 보편성 基準 (자) 의해 평가를 받는 것이며 엄혹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과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경우와는 사회적 환경과 시련의 늪을 헤쳐 온 시대적 배경이 현실의 배경과는 사상의 깊이가 완전히 다를 것이다. 표현미와 배경 상황 설정이 승화되는 표현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른바 민족의 자존(自尊)이 짓밟혔고 국권이 없는 일제 강점기는 한국사의 잔혹한 상징이었고, 이어 동족상잔의 전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의 대명사였으니 가난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런 배경하에서도 이상의 추구는 있었고, 생의 이름에는 변함없는 꿈을 표현하는 문학의 땅은 저마다 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시대의 악착한 조건의 반응하는 양상은 각기 다르게 표현되는 개성 표출이 있기 마련이지만 일제 강점기 굴절하는 문학도 있었고 때로는 저항의 칼날을 세운 문학도 있었음은 모두가 알 터- 오로지 한국문학의 땅은 이런저런 풍토에서 현실의 표정은 과거와 연결되는 통로(通路) 하(下)에서만 근거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라는 의미는 시대 상황에 반응하면서 이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변용의 모습으로 표현 방법에 일조한다면 미증유의 비극이 와중을 헤쳐 온 근현대사는 참혹한 시련에 따른 속 깊은 애증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사실만으로도 비극의 멍에였을 뿐 아니라 심한 굴곡의 파도 속에서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아온 홍효민 작가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가 혁혁한 공로를 세웠건 평범하게 혹은 갑남을녀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경외와 존경의 대상으로 삼으며 사실 앞에 숙연해야만 하는 후배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발언한다는 명제는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예술가들 스스로가 뒷모습이 쓸쓸해지는 결말에 직면하는 증거는 우리는 예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시대의 갈등과 공유하는 자세 홍효민 선생은 1927년 7월 『개척』에 『문예 시평』을 발표한 시기는 카프의 득세와 이에 따른 시대적인 현상이 소용돌이로 압축된다. 이런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긴 인용과 설명이 필요하겠다. 왜 그런가 하면 카프와 일제의 지식인들이 모조리 共産主義 사상에 감염된 이유와 근거를 알아야 제대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교육의 잘못과 사실을 사실로 깨우치지 못한-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었다는 근거가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치하라는 어둠의 공간은 우리 민족에게 심대한 정신적 갈등을 유발했고 이 갈등은 정신 가치가 무너지고 피폐화되는 와중에 새로운 모색이 탐색 되었던 시기였으리라 이 땅의 모든 기존 질서를 파괴했고 이 파괴 위에서 일본식 제도와 문화를 이식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끊임없는 저항 속에서 민족의 자존감을 지키고 나라를 찾기 위한 민족 세력과, 일제 강점기라는 그늘에서 신질서를 형성한 두 그룹으로 갈라지는 양상의 분기점이 마련된다. 다시 말한다면 전자는 갖지 않는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가 되었고, 후자는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는 양상으로 사상의 옷을 입게 되면서 전자는 공산주의 라는 곳으로 정신 지향을 마련했고, 후자는 가진 자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권력과 더욱 밀착하는 양상을 가진 것이 일제 공간까지의 특성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결국 공산 이데올로기에 젖지 않을 수밖에 없는 시각을 갖게 되었으니 한국 토착 공산주의 운동은 이런 일치(日治)라는 특수상황과 맞물려 있을 때 이미 사상적인 그물코가 아니라 민족주의적 신념으로 굳어졌다. 더구나 1917년 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 Bolsheviks) 혁명의 여파는 수탈과 침탈 속에 우리 민족에겐 더없는 불빛이었고 희망이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상의 여파는 결국 일제 강점기의 치아에 우리나라 지식인이면 곧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으로 등식이 연결되는 객관성을 득할 수 있었고, 이러한 의식은 곧 민족 자립과 독립이라는 정신 근간의 충추가 되었다. 이 같은 지식인들의 신념은 이내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가중(加重)시켰고, 급기야 KAPF 탄압이라는 미증유의 신음 문학을 배태하는 계기로 이어졌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였다. 한국 현대문학의 비극은 일단 일제 강점기라는 현상을 외면하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17년 공산주의 등장- 모두를 수탈한 우리 민족에겐 복음의 메시지였지만 이런 상상조차 제국주의는 이 땅에 수입되는 것을 막았지만 지식인들에게는 역설적이지만 일본 유학생이나 만주 땅을 유랑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에 의해 수입되는 당시의 공산주의는 신선한 희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국유화에서 똑같이 노동을 제공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분배 사상은 일본 제국주의 수탈과는 배치되는 이념이었기에 당시로는 신선한 사상으로 보였기에 지식인들이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그 때문에 1945-1950. 까지 서울에 문인 숫자 165명 중 111명이 북으로 올라간 것은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지 못한 운명적인 불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본질로 들어가게 되면 둘로 나누어 보아냐 한다고 생각한다. 1. 한국토착공산주의는 올드 컴뮤니즘(Ord Commumism)과 2.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룹과 1948년 김일성이 집권함으로써 오늘의 참혹한 공산주의 이를 뉴 컴뮤니즘(New Communism)으로 분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해파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승만의 집권은 상해에서 독립운동파와는 갈등의 요인을 잠복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집권 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의 집권 10년은 토착 공산주의의 독립운동을 구분해서 설명했어야 했지만 김일성의 뉴 컴뮤니즘과 구분하는 여지를 두지 않고 모조리 “때려 잡자 공산당”이라는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 박정희조차 집권의 명분이 취약했던 18년 내내 같은 식- 이어 전두환 7년 동안 그런 함정- 엄연히 김일성의 공산주의와 독립운동의 방편이었던 올드 컴뮤니즘과 구분 없이 함께 파묻어야 하는 사상의 갈등과 혼란이 오늘날 현실도 마찬가지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상과 이념을 깨지 못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늘 흑백논리에 빠져나올 수 없기에 조속히 이데올로기에 빠져나와야 한다. 참으로 언어도단적인 궤변에 놀아나는 그들이 어쩌면 불안하고 안쓰러워 보인다. 앞의 설명 또한 회색의 칼라가 명료함을 제거한다. 이러한 선입견은 홍효민 선생이 극도에 치우친 카프(KAPF)에 싫증을 느꼈고 동반자적인 태도를 선택한 이유가 어쩌면 당연한 이유이다. 줏대 없이 이념으로 변질된 포로가 되어버린 문인과 다른 면모를 말하고 싶은 이유에서이다. 3. 중도 이념 그리고 의지 중간이라는 말에는 회색의 칼라가 명료함이 없어진다. 이런 견지는 누적된 개념이 쌓아지면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극단의 문제가 낳은 아픔일 것이다. 그러나 홍유민의 문학을 중도라는 말로 정리하기도 하지만 이른바 행동과 실존이라는 30년도의 사상 흐름을 간과하고 행동주의를 선도한 공로는 아마도 홍휴민의 문학 정신을 휴머니즘에 근거를 두고 주장하는 정신, 그리고 문학은 문학적 가치로 말해야 한다는 극명한 주장으로 정리되어야 할 명분, 해방기 중도론적 비평은 곧 자유 정신에 바탕을 둔 의지와 비평론으로 대체되어야 할 용어가 아니겠는가? 왜 그런가 하면 문학의 행동은 문학성이라는 영원한 명제 앞에 당당해야 하는 비평의 표정은 자유 정신의 구현에 궁극을 두어야 할 당위성이지 이것을 가지고 호불호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라는 뜻 - 홍휴민 선생 자기 의지가 투철했고 이를 실천의 덕목으로 삼았던 자유 정신 중심을 가진 작가이자 평자이면서 중심 잡기를 실천한 비평가라는 의미이다. 비평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가치의 중심을 잡는 일이 본래의 뜻이기 때문이다. 4. 농경사회 문학과 역사소설 시대마다 거기에 따르는 중심의 명제가 있다. 인류는 원시사회를 지나 농경사회 그리고 산업화 시대, 정보화 혹은 IT, AI, 전자시대 등 저마다 시대적인 목표가 다른 것은 삶의 양상과 그때 그 시절에 따라 각기 특색이 지배하는 시기로 공간이 정리되는 점이다. 농경사회의 농민문학을 지금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곧 낡은 레코드판이 된다. 그러나 홍효민 선생이 살았던 시대는 농업이 기반이었고 여기서 농민의 삶과 표현은 자연스레 갈등 균형이 잡히지 않는 시대의 문제로 압축되는 것이다. 애 그런가 하면 시대마다 앞선 사람과 뒤떨어진 사람- 당시의 농경사회는 생산 주체가 농민이었지만 이를 이끄는 계획 즉 세력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던 것이기에 - 1930년대의 인구는 약 80여%를 상회하는 숫자가 농민이었다는 점은 무엇을 시사하는지 점차 도시의 집중화 그리고 지나친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 문학의 편중은 결국 참된 농민의 문학을 외면하는 결말에 대한 홍효민 선생의 주장은 『조선농민문학의 근본문제』속에 요약되어 있다. “농민문학은 적어도 농민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기조로 농민문학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에는 다소 멈칫거리는 판단이 있음은 사실이다. 소설은 인간을 해석하고 이 도중에 과거를 돌아보고 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일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조건이 따라온다면 역사소설은 엄격하게 과거 추수라는 점에서 흥미의 범주안에 갇히게 되기 때문에 이를 모를 리 없는 홍효민 선생은 왜 역사소설에 매달렸을까. 역사소설은 소재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고 또 흥미 위주의 편향성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선입견에서 쉽게 탈피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연 그 자신이 주장한 『역사소설의 성격과 기준』에 정밀한 ‘묘사를’ 갖추었는가는 의문이지만 객관의 거리에서 바라보면 비평의 행위와 직접 창작하는 실제와는 다른 것이다. 가령 비평가가 쓴 시나 소설이 이론과는 달리 수작(秀作)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첨가하면 쉽게 설명이 될 것이다. 5.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시대적 상황은 작가 행위에 특징과 함수 관계를갖고 있다. 일제 강점기는 참혹한 수탈과 통제 사회의 공간에서 창작 행위를 정상적으로 펼칠 수 없는 한계적 모순 앞에 방황과 극복이라는 명제 속에 있었다. 홍효민 선생의 일생은 그런 와중에서 가지 문학의 중심을 잡았고 또 설명하는 일면, 창작이라는 들판을 서성이었다. 그러나 문학은 문학성이 있어야 하는 신념의 태도는 올바른 평가로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비평 행위와 창작의 행위에는 즉 거리가 존재한다. 비평은 정치한 판단이고 창작은 상상의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역사소설 쪽에 경도한 문제는 그가 이론에는 밝았을지라도 창작의 깊이에서는 조금 더라는 말로 정리해야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어필한다. 그러나 혼란과 참담한 시대의 중심을 신념으로 헤쳐 온 그의 문학 정신은 우리 모두가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는 명분은 충분하지 않을까. 하면서 논지에서 나가려 한다. 2023. 1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베스트셀러가 되다.] [이승섭시평집 베스트 46위 (2023. 05.30.)]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사물을 대면하고 그 사물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분기되는 것은 사실이다. 전자에는 맹목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모습이고 공허한 메아리만 들릴 뿐이라면, 후자인 사람은 지식 혹은 지혜로서 분간하는 일로, 사물의 질서를 확립하는 명료함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세상 언저리를 배회하다 보면 전자에 속하는 사람은 더 많은 아우성과 목청 큰 발성으로 진리를 압도하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나 이른바 악화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 s law)이 적용되고 후자는 은신 또는 겸손의 키 낮춤에서 존재조차 희미한 경우가 많다. 정치판이나 문학의 판이나 질서를 세우는 사람은 희소하고 오히려 악화(惡貨)가 세상을 점령하는 기세로 압도하는 경우는 우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종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문학은 마지막에 시간을 정리하는 일이기에 조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쓰고 또 쓰면서 자기만의 城을 구축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주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번 예를 들어 보겠다. 1920년대 김소월이나 한용운은 문단의 아웃 사이더였지만 긴 세월이 지난 결말은 이들이 문학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사실 오랜 시간의 언덕을 넘었을 때 비로소 찾아온 이름 자 명성이라는 타이틀을 패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건은 필연 현상이다. 무엇을 썼고 또 무슨 의미의 작품을 생산했고 그 가치는 보편성의 기준을 확립하였는가의 여부가 결정하는 일이지 단순하게 시간의 언덕을 넘었다 해서 결정되는 가치는 아닐 것이다. 요약으로 말한다면 의미의 질서 확립과 보편성의 기준 잣대는 문학 가치의 본질이라 보는 것이다. 이 둘의 기준으로 볼 때, 그 당시의 시절과 근본, 보편 타당성, 가치를 넘어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엄청나게 수원지(水源池)를 갖고 있는 노시인 진헌성 시인, 그는 필자 아버지의 같은 동년배로서 의학도로 출발하여 문학의 깊이에도 빠질 수 없는 시인으로 필자가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칭송하는 분이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도 과학적 기저를 두고 물리, 생물, 천문, 수락, 종교, 철학, 사상 등에서도 왕성하고 현란함이 요란하다. 그의 시집 잘 살고 갑니다-진헌성 지음, 진헌성 광주 진 내과 원장, 2년 만에 시 전집 제16권 펴내, 104, 5편, 수록 “아흔둘 인생 돌이켜 보면 어리석음의 반복” 등이 있다. 90세가 훨씬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과학철학의 명상, 과 종교 비판자이며 자유정신 가치를 구현하는 진정한 본질에 투철한 시인이 아닌가 한다. 광주출생이면서 시는 세상사 모든 그릇을 담는 것이라고- 심지어 주홍사의 천자문은 4연 250 귀의 고시라는 말을 대입한다면 양나라의 주홍사가 어떻게 우주의 일을 알았으며 육안으로 관찰했다 해서 오늘날의 지식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시인의 예지와 인간사의 윤리, 도덕, 등을 시로 구사하면서 광대한 우주 현상으로 좁히고 상상력의 정치성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진언성 시인은 위와 같다고 확신한다. 천년의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있겠고 현실 또한 냉엄한 비판을 쏟아붓는 철학자요, 비평가요, 과학자라고 믿으며- 그렇기에 우수한 상상력의 나래에서 나오는 가락을 눈여겨 살펴보기로 한다. 시는 우주의 운행과 질서의 현황과 꼬여있는 현실에 메스를 가하는 냉혹함과 치열함을 갖춘 노시인 - 아울러 휴머니티를 가슴에 내장한 불빛이 환히 보이는 이 땅의 시인이라 칭하고 싶다. 참고로 본 고는 연작시 627편 중 앞부분만 일부분 한정하여 시적 특색을 객관적으로 점검하기로 하겠다. 너무 방대한 연작시라 압축을 시켜 유사한 정신 가치의 궤적을 그릴 것이기 때문이다. 2.정신의 건축순환은 무엇인지 시의 정신 순환은 무엇인지에 대해 의도를 나타낸다. 이 명제를 쓰는 이유이면서 시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길을 내는 상징의 숲을 건설하려는 것처럼 시의 건축에 임무를 갖는 이치에 이른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의 조합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시인 자신의 체험을 담고 이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임무에 충실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신 - 맹목의 정신이 아니라 질서를 균제미(均齊美)로 담아야 하고 의미의 숲을 이룩할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정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조감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언어의 표현을 통한 흔적 찾기는 심리학적인 원조를 받을 때는 가능한 해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없는 것, 공 즉 생이라는 순환의 논법은 우주의 질서 삼라만상의 원리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단독이거나 혹은 전체와 부분은 늘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우주의 진행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드라마에서 때로는 관객이고 주인공이라는 것처럼 사고, 즉 상관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 우주의 주인공처럼 사고와 생각하는 것도 모순에 휩싸일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관찰자의 입장에 자세히 관찰하는 데서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라면 과학, 심리학은 결국 인간을 성숙의 단계로 올려주는 계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만치의 거리 이만치의 거리는 상대적 개념일 때 이만치의 자각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내 흰 지팡이 둘이서 가늣한 산비탈길서 큰 내쉼 짚고 서산마루 보란 듯이 먼저 간 고 새나무들 곧장 못 날고 옹기종기 않았고 ...(중략)... 내 모둠 숨 좀 맞들면 저만큼 명당치고 그만큼은 살겠거늘 오늘은 바랑 멘 체 이만 치 서 보랃자와. -『1.산 바라기』에서 시인은 가장 먼저 간 새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물기에 젖어있고 명상적인 문을 열어야 하는 명제를 숙고하는 인상을 남긴다. “나”와 “지팡이”는 동격으로 나이의 깊이를 헤아리는 “이만치”로의 현재라면 “산마루”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저만치”의 거리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생성한다. 여기서 이만큼의 거리는 속세의 가파르고 숨찬 이미지가 저만치의 먼 거리와는 명상에서 서로 닿아야 하는 언젠가의 숙업(宿業)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여기서는 돌의 무게가 삶의 고달픔을 연상시킨다면 피안(彼岸)의 저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가야 할 곳으로의 막연한 노년의 숨찬 호흡이 “모둠 숨”으로 “보라자” 와 머무는 뜻이 삶의 망연함에 해답을 찾지 못한 듯, 마치 두보의 시 『박계행』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사는 일은 항상 해답이 없는 미망의 벌판을 헤매는 일이기에- 바위 굴러 둘로 나눠지고 다시 굴러 넷으로 쪼개지고 쪼개지고 빠개지다 잔모래 돼 모래 엉켜 뭉개 바스러져 고루 가루 떡 됨이 논밭이며 이 조화의 으뜸이 곡식이요 이 곡식의 우듬지가 사람이다. 『고체와 액체』중에서 다시 ‘있고’의 ‘없고’의 사상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우주 삼라만상은 인간과 자연의 고체와 액체의 도정(道程)을 되풀이되면서 현상만 남게 되는 것이다. 형체가 있고 다시 그 형체는 사라지고 순환하면서 본질적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그 도정에 존재의 어느 현상이 찰나 ‘있음’을 형성되고 반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바위가 모래, 그리고 모래가 흙, 다시 흙에서 논밭 그리고 곡식- 곡식의 끝은 인간이 없어서는 안 될 식량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우주관은 인간 중심을 엿보게 된다. 멸(滅) 생(生)이 하나의 줄기에서 나오고 다시 그 반대의 과정을 되풀이할 때 연기론의 근거는 불가 철학에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없음’을 중단한다면/있음은 더욱 중 해처럼 인간은 순환의 도정에서 조화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행동에 대입한다면 우리는 유추의 해석이 끝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3.시적 사상의 표정 과학은 1+1=대답에 묶여있다. 그러나 시는 1+1=0, 1, 2, 3 등, 하나의 의미에 국한한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예를 들자면 ambiguity로 특징을 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과학은 정확한 인식의 바탕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와 과학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우둔한 일이다. 일찍이 l. A. Richards가 설파한 것처럼 시와 과학은 밀접한 상관을 유지한다. 상상력을 증명한다면 시가 되기 때문이다. 노시인의 시는 과학 정신을 이해하는 길에 있다. 이는 과학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가능하다. 관념의 포로에서가 아니라 인식의 확실성을 터득하고 시와 접목의 수순을 밟아 나가는 정신도(情神圖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시가 느슨하거나 설왕설래의 무질서가 아니라 감동을 주는 이유는 내포된 시적 의미의 치밀성에 있기에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에 논리적인 구축력을 가질 때 비로소 시적 완성도는 높을 뿐만 아니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질서에서는 짜증이 나온다면 엄정한 질서의 배열에서는 찬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 공룡이라는 단어는 1841년 해부학자 리처드 오언이 존 필립스는 고생대에 식물이 물에 오르고 다음엔 어류, 양서류, 파충류 순서였다고 창조설에 반하는 사람은 화형으로 입을 틀어막었던 가톨릭 교회였느니 자연 과학은 지금껏도하나님 나라의 장애물! 『생물 연대 차이』중에서 종교와 과학은 때로 상반된 표정으로 대척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는 항상 절대의 공식에 있어야 하고 과학은 새로운 발견을 위해 땀을 흘리는 점에서 종교의 원리에 반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진자의 등시성이나 관성법칙 발견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던 이유로 협박당한 –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i)의 변명은 죽음을 모면하기 위한 지동설의 포기였다면, 스콜라철학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판자인 지오다노 브르노(Bruno)는 그의 신념을 사수하기 위해 분형으로 16세기의 언덕은 넘었지만 결국 옳은 것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의 편견은 지금도 사랑의 전파보다 더욱 엄정한 틀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형해(形骸)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느님’ 나라의 장애물이 ‘자연 과학’이라는 시인의 판단은 종교가 구원의 메시지를 휘날리지 못하는 이유- 아집과 편견 독선의 그물에서 허우적거리는 현상에 비판의 기세가 보인다. 이는 1513년 교황 레오 10세의 면벌부 판매에 95 Theses의 항의문으로 번진 개혁의 불길이 1517년 사건이었다면 결국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찾아간 신대륙 이주의 필그림이 시사하는 종교의 함정에 대한 변화가 오늘날이라고 대입할 수 없는 명제는 아닐 것이다. 이른바 종교의 창조설과 과학의 대립은 결국 19세기의 유물론에서 물질세계와 종교 세계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혼동하는 기계론의 함정에 빠지는 잘못을 범한 것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T. H. Hulme의 예술 논에서 말한 무기적 세계(수학과, 물리학)와 유기적 세계(생물학, 심리학, 역사학)와 가치의 세계(윤리, 종교)의 세 영역 중 외부가 물리학의 영역이라면, 내부가 종교와 윤리학의 영역, 그리고 중간을 생명의 영역인바, 세 부분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이면서 서로 연락이 없는 비 연연 속의 원리(Rrinciple of Discontinuity)에 의해 지배된다는 철학 사상을 설파했다면, 종교는 언제나 모든 세계를 지배하려는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길 등이 현대에 와서는 더욱 고립된 섬이 되는 현상이 종교의 미래와 연결되는 것이다. 아무튼 노시인의 사색은 무한의 변경을 헤매는 나그네요, 탐구의 불빛에 영일이 없는 서치라이트를 켜고 파수꾼의 임무를 자인하는 것에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노시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들어서는 손에겐 제 볼을 마구 문질러대다가도 뒤돌아서 가는 손의 뒷다리를 소리 없이 무는 개의 전략에는 안 내둘릴 수 없지 잉. 『천안함』중에서 국제 정세의 이해나 긴박감도 없고 오로지 반대만 하는 일이 직업인 듯한 신부나 스님에는 이젠 식상해 차라리 북에 가서 살라고 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청개구리를 넘어 없어도 될 국민이 아닌 인간들이라 보기 때문이다. 천성산의 도룡용은 여전히 왕성히 산란하는데 왜 그때 그 스님은 잘못이라는 고백이 없는 것인가? 으레 반대- 정치라고 잘만하면 되는 그런 설득도 있어야겠지만, 아집과 편협해서 이해와 타협으로 돌아올 수 없는 일인가를 묻는 것이다. 점점 이상한 나라 그저 상대를 반대해야만 하는 그런 몰염치 인간들- 지식인들이라는 교수치고 어리석지 않은 경우는 흔히 본다. 아집에 잡혀있는 판단이 고집과 아집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자기 명령에 끌려가는 일로 사리 판단이 마비되었기에 사실조차도 의심으로 궤변을 늘어놓고 편히 살아가는 자는 결국 나라를 팔아먹는 일과 진배없다. 지금 우리는 그런 현실을 수없이 지나치고 있다는 자성이 앞서야 하지 않겠는가? 미친개- 소 대가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는 이런 현실 - 북한 전략이란 자명하지 않겠는가? 햇빛에 망령을 우려로 바라본 시인은 이젠 달빛을 염려하는 근심 속에서는 얼마나 심각한 우리의 잘못된 자화상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여전히 햇빛 꼬리를 잡고 안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현실에 정말 우울하면서 서글퍼진다. 더 이상 얘기한들 무슨 소용인가? 정부가 바뀌어졌으니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할 운명적 존재라 보기에 조속히 정부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은 있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한다. 꼭 - 4.나가면서 삼삼한 시는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목표라면 깜깜한 시는 아직도 부족을 의미하는 뜻으로 다가올 때, 시에 정진하는 노시인의 모습은 경건하다고 해야겠다. 시는 항상 시인과 갈증을 유발하는 거리만큼에서 손짓할 때, 시인의 상상력은 왕성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엄청난 분량으로 놀라게 하였지만 시로 살고 시로 살아온 일상이 보이는 것은 부기(附記)된 창작의 양은 실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노시인의 시 전체를 조감하는 것이 당연 사지만 몇 날을 조감한들 할 수 있으랴- 겉만 들여다보아만 하는 것이 어쩌면 필자의 허물로 가리면서 더욱 시의 대면을 기대하면서 논지를 접으려 한다. 2023.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베스트28위] [2023.03.이승섭시평집 베스트셀러] 깊[사상 가치 형성과 표현의 깊이]이]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란 의식의 토로를 거쳐 나오는 정서의 질서 현장이다. 왜냐하면 시인 본인의 체험이 바탕을 이루면서 상상의 조역을 받을 때, 일정한 질서의 규범을 갖추면서 시인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삶의 방안을 구가하려고 의미와 가치로 혼신을 발휘하려 하는 것이다. 간혹 성공한 사람도 있고 도로(徒勞)에 그치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며망을 얻거나 그 반대인 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새로움을 찾아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려는 일상의 노력이 가상한 것이지 유명의 대열과는 별로 의미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유명하다는 말은 부풀어 오른 거품현상이지 자신의 참된 의미와는 무의미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생이라는 고해의 바다에서 오로지 자기의 정화(淨化) 혹은 순수한 수양의 도구일 때, 시의 가치는 참된 자기와의 만남 혹은 그런 표정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시를 쓰는 일은 진실 혹은 순수와 대화를 나누는 일에 헌정되는 것이다. 자기 삶의 고뇌와 고통 신산(辛酸)한 생의 이름들이 모여 순화(醇化)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시는 아름다움을 손짓하는 가락으로 탄생될 수 있는 역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헌신과 사랑 삶에 대한 성찰 혹은 자기를 돌아보는 닦음의 소재가 의식의 통로를 통해서 가락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나 고향의 정서 또한 시의 원형을 이루는 표정에도 따스한 햇살이 다가드는 것이다. 2. 주는 모습 낮은 자세로 흐르는 물은 속성이 겸손하다 거스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달관의 높은 경지를 점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인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지배보다는 헌신이고 주는 것이라 교만 보다는 겸손을 앞세울 때, 사랑의 마음이 깃들게 되고 사랑의 넓이는 따스함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Van Gogh가 파리 시대에 그린 『Lee Souliers』라는 작품을 보았다. 한 켤레의 농부 화에서 서럽게 살고 힘들게 산 농부의 슬픈 삶에 고달픔과 생의 아픔이 낡았고 지친 표현의 구두에는 충분히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Gogh가 그린 『La Chaise De Vincent』 또한 딱딱하고 비뚤어진 의자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유추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이런 일의 작품은 작가의 모든 체험과 상상력은 작품과 밀접한 상관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늘 발을 껴안으며 감싸는 신발은 가다가 쓰러져도 자기 몸 다 닳고 헤어져도 심술이나 고통 하나 없이 언제나 나를 지킨다. <신발> -졸시- 시인이 시집을 출간할 때나 상재할 때 의도적으로 작품의 순서를 배열하는 일은 독자의 첫인상을 휘어잡으려는 발상에서 맨 앞자리에 작품은 눈여겨 본다. 왜 그런가 하니 인간이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의상은 누구나 다르다. 자기와 어울린다는 의상은 본인이 다양하게 꾸미고 멋을 부린다. 누구나 이런 일은 같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발이란 더욱 그렇다. 신발이 깨끗하고 깔끔하다면 그 사람의 첫인상이 멋지게 보이고 각인이 된다. 앞에서 고흐가 그린 농부 화에서 삶의 고단함과 서글픈 농부의 등식처럼, 시인과 신발은 비교가치로 연결된다. 봉사와 헌신을 기본 목표로 살아가는 일이 삶의 방편이다. 그러나 봉사와 헌신은 때로 고독하다. 왜 그런가 하니 이타행(利他行)은 자기를 희생하는 바탕 위에서만 비로소 성립되는 Eros 적인 희생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테어나 인연 맺은 날부터 지금까지 무안 사랑 에너지를 주었건만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온 세상 지구를 주고 빛과 삼라만상을 주었건만 그 의미도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우리 <우매한 인간들> -졸시- 사랑은 대상과 대상의 교감이 성립될 때, 비로소 빛을 발휘하는 이치처럼 헌신과 봉사에도 그런 교감은 필요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방적 사랑은 짝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에게 드리는 기도조차도 응답을 기다리는 신도의 자세처럼 봉사에도 일정한 대가는 보여야 하는 것이다. 시인의 햇빛이 일방적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함이 없이 마냥 받고 돌아서는 일에 서운함이 있을 것이다. 몰이해는 실망과 고단함이 따라올 것이지만 사랑을 줄 때, 아가페적인 무한의 사랑이 고귀할 수 있다면, 일방적으로 받아서가 아니라 주었을 때 비로소 빛나는 가치로 돌아서는 이유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사랑은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며 사랑을 숙고하면서 또 찾아 나서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신명을 바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고 자연을 끌고 와서 인간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대신하는 사람일 때, 시는 고귀한 가치로 표정을 갖게 된다. 대부분 시인은 시적 사고와 정서가 사랑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말을 바꾸면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과 대상을 하나로 묶어 평화로운 땅을 만들 때 시의 가치는 공고한 성주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에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는 체험의 요소와 상상력 그리고 창조력, 그리고 의미와 신념이 교직(交織) 되면서 한 편의 시를 만나는 일이기에 결국 생각의 방향과 의지가 시화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면 사랑의 감수성이 많은 이유는 시인 정서의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내적 고백이고, 이 고백은 진실의 함량이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갈 시간 그리 많지 않게 남아 무조건 행복하게 살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며 살라 행복하고 사랑하라 영원히- <사랑> -졸시- ‘살라’ ‘하라’의 형태로 명령하게 되면 독자가 위압 당하는 논조이다. 그리고 독선적인 함정이 될 수도 있지만 합리적이고 타당하다면 오히려 감동의 작동 원리 즉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할 것이다. 시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진리와 정직 등을 외면해선 아니 된다.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는 누구나 해당될 수 있는 삼인칭 복수의 지시적인 시어에서 사랑을 이룩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등식이 전개된다. ‘하라’와 ‘살라’의 명령어가 거북하게 느끼지 않는 이유는 사랑이 곧 역설의 기교가 되기 때문이다. 4. 고향, 자연, 부모 인간의 근본은 뿌리를 아는 일일 것이다. 이 출발은 부모로부터 시작하고 다시 고향의 이미지로 전개될 때 내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물론 친구도 있고 추억의 이름이 더해질 때 삶은 풍윤(豐潤) 해질 수 있게 된다. 작고하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 당연지사일 것이다. 아버지 뵙고 싶습니다. 세상이 이리 변해도 소자 마음은 아직도 곁에 있습니다. 세상살이 버거워도 아버지 곁에 있다 생각하며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부모> -졸시- 부모는 자식의 반면교사가 될 때 교육이라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고 강인함을 요구하는 아버지는 때로 외로운 모습이 될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재할 때,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작고하신 아버지가 옆에 계심을 믿으면서 현실을 이겨나가는 것이 아버지요. 동시에 자식인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5. 정신 가치의 탑 사랑은 헌신에서 나오며 헌신은 더 큰 길을 안내하는 길이 만들어진다면 시는 순수와 의식 가치가 남다른 것이다. 이는 우리 삶의 질료(質料)가 되며 평생을 지속하는 삶의 에너지로 작동되는 것이다. 생을 지속하는 데는 정답은 없지만 자기 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절제와 균형을 갖추는 삶에의 모습이 투명해야 한다는 조건 앞에서 시인은 당당한 것이다. 사회 불합리에는 몸살을 앓고 옳은 것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자세가 환하게 비추어지며 시의 정신 가치가 원천이면서 삶의 지표로 작용하는 건강한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0. 10. 3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의 모습을 찾는다면 묘연(渺然)한 행로가 전부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의 근원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인가를 추적하는 일은 암담하고 절망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탄생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과 같을 것이라면 같은 비유가 아닐까? 시의 본질에 들어가는 일 또한 지난한 일이며 가설에서 출발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환청이나 환각을 갖는 일일 것이며 또는 환한 꽃길을 타고 오는 반가운 손님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의 행로는 언제나 미지(未知)의 순간에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을 것이기에 - 사실적으로 의식 속에 담기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시라는 존재는 미지의 거리에서 다시 미지로 떠도는 그 속성을 포착하는 일이 될지 모르겠다. 이는 시는 우주 즉 삼라만상을 떠도는 행성의 운명과 닮은 것이고 인간의 감성을 울리고 떠나는 바람과 같은 모습을 연상하는 이름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와 시인의 관계는 언제나 대척점에 거리를 유지하면서 시인의 마음을 늘 초조하게 만드는 일이 역설적으로 보면 시를 창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겠다. 시인마다 개성이 틀리고 성격, 삶의 과정, 과거 현재 등이 모두 다르기에 언어를 운용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문패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정지(停止)해서 살아가는 사람과 떠도는 유랑에서 의미를 건지는 사람 등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항상 새로운 영지를 탐색하는 인자와 지배적인 정서와 언어의 조합에서 남들보다는 해체적인 정서로 의미를 만드는 방법을 선택해야만 하는 시인이 미래의 지배적인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바다와 바다는 길이 길로 이어지는 오로지 흔적만 남고 이동한다. 시인의 의식 또한 바다에서 이동하는 정서 목표가 있건 없건 시심을 바다에서 창작을 불러오는 시인이나 아니면 자연에서 불러오는 시인 등 하늘과 하늘을 채우면서 삶의 인자(因子)를 구성하는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2.풍광의 소리} 시각 즉 보이는 것은 실재의 풍광과 이면(裏面)의 풍경이 있다. 시는 내면의 풍광을 보여줄 때, 시인의 사상과 깊이 있는 철학을 만나게 된다. 시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내면을 감동으로 전달할 때, 긴 생명을 소유하는 시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예) 1개 나무의 외관을 바라보는 일은 초보적인 시선이라면 나무로 승화되는 생명력, 혹은 생명력의 의미와 상관관계의 여러 생각들 혹은 나무 아래에서 쉼을 얻고 간 사람들의 표정, 나무 아래에 꿈꾸었던 사랑의 이미지와 나무를 매개로 저쪽의 세계를 유추하는 것은 나무의 내면을 통찰했을 때 나오는 사상이다. 이를 mind’s eye-시의 깊이는 이 심안(心眼)을 나타냈을 때 심사(深思)한 의미로 나타난다면 시인의 시선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바라보는 길을 확보하는 기교이고 기법이라 하겠다. 시는 풍경과 풍광을 보면서 이를 승화시키고 비틀고 그때의 감정을 은유로 감싸는 것이다. 실재 풍경과 내면의 풍경이 여러 방법으로 드러날 때 의식의 창(窓)을 여러 각도로 바라보는 정서의 여유가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사실 시는 실재의 풍광 혹은 내면의 풍광이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드러날 때 상상력의 풍요를 거론하게 되는 것이다. 풍광을 많이 그리는 시인이라면 의식의 창과 상상의 여유가 있다고 한다. 시는 응축의 예술이고 산문은 리얼리티를 나타내는 방법에서 사고의 유연성은 시의 적합성이고 과학적인 정치(情致)함을 산문의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사뿐사뿐 눈 내이 내려 마음 젖던 날 순백으로 꾸며진 또 하나의 들 가슴으로 무너져 눈물 주는 강 ... 중략... <눈 내리는 강> 졸 시 강을 깨끗함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시인은 대상과 일체화를 이루는 반영의 거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맑은 마음에는 맑은 강물이 보이고 흐린 마음에는 흐린 강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시는 포장지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용물에 아름다움을 담는 정서라면 감동을 줄 것이다. 풍광의 소리가 들리는 것은 바로 시인이기 때문이다.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시를 그릴 수 있다면 그 정신 가치는 부여하는 의미에 풍족한 만족을 줄 것이다. 시에는 언어의 절제와 탄력이 비상하는 듯 간결하고 축약적이어야 한다. 비유의 적절성과 사물을 대면하는 시선이 일체화를 이루면서 다양함을 소화하는 변용(變容)하는 재미를 더할 때 더욱 인상적인 시의 숲을 조성하는 것일 것이다. 자유정신의 가치는 원형을 내포한 정서의 진원지이자 시의 출발과 귀향(歸鄕)을 함께하는 동시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저(基底) 위에서 풍요의 정서가 회귀의 정서로 나타나면서 다시 그려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풍광을 연출하면서 내면과 외면의 조화가 어울린다면 시의 표정을 관리하게 되며 휴머니즘을 주조로 삶의 가파름을 넘어가는 마음이 여러 개로 나타나며 계절의 순환에서 시의 모습이 향기로 승화하려는 발상이 꿈과 연결되는 시적 묘미가 단단한 탄력적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제나 행장을 꾸려 산천을 두루 살피면서 배우고 익히고 섭렵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희생정신으로 더욱 정신 가치를 위해 많은 책과 더불어 언어의 소화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실 앞에 반응하는 민감한 의식의 촉수를 가지고 생활화는 길이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하여 인간의 사랑 그리고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스펙트럼 - 휴머니즘의 정서를 갖고 아름다운 풍광의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10. 2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칼럼니스트/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1. 문학이란 굳이 에콜로지의 이론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생로병사의 거치는 일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생존의 정글법칙은 살아남는 이유를 내장하면서 진화하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땅은 이런 존재 법칙에 가장 보수적인 성격과 표정을 갖고 삶을 유영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곁에 머물러 왔다. 기쁨과 행복에서는 환희의 모습을 보이고 분노와 슬픔에서는 앙상한 가시를 앞세워 사나운 기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자체는 모순과 어리석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현장이다. 이 현장을 바라보는 지적 뇌수(腦髓)에는 두 가지의 태도가 발생할 것이다. 첫째는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과 이를 비판의 시각으로 자기화하는 사람으로 구분한다면 첫째는 대상에 동회는 거리의 소멸(消滅)이 있고 후자에는 대상과 일정의 거리(距離)를 유지하는 점에서 비판의 지적 기능이 작동된다. 시인에 의해 의도된 풍시조(쪼)의 형태는 오래전부터 풍자 시에 調(쪼)를 더하여 대체로 3 행 70자 내외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듯하며 추종자들의 의해 몇 권의 저서를 발간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촌철살인의 기법을 사용하는 점에서는 산문적인 형태의 기법에서 일탈하고, 형식에서도 일정한 형태의 3행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과거보다는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풍시조는 몇 개의 실험을 거친 과정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1991년 『시집 기타』를 발견하면서 풍시조라는 이름이 등장하지만 여기서 “무슨 실험이냐 의도에서 써졌다고 할 수 있고 없고”의 말로 본다면 확실한 신념에 의해서 시도된 변화는 아닌 듯하다. 박진환시인의 25 시집에 이르면 아예 시집의 제목이 『諷詩調』(2007년 3월)로 탄생된다. 서문에서 “살아있는 문학적 육성이 있다면 바로 풍자 시를 들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는 주장에 이어 “꼬집고 비꼬고 깎아 내리고” 비아냥하고 비판 · 고발 · 폭로를 목적으로 하는 시는 “악의 교정” 또는 “개선의 의도의 비 정상과는 달리 휴머니즘이 자리하고 있다는”주장을 하고 있다. 이 말은 풍시조의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물론 모든 문학의 본질은 휴머니즘으로 귀환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주장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러나 풍시조의 형태가 짧은 3행이라는 점과 내용에서는 풍자 시와 다름이 없다는 이유에서 풍자의 자리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3행에서 꼬집고, 비꼬고, 깎아내리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룰을 가지고 있다는 특이한 점이다. 풍자의 특성은 때로 사설적인 요소를 가미할 수도 있지만, 아예 한계점을 설정하고 의미룰 구겨서 넣는 일은 글의 한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창시자 박진환은 말처럼 새로운 것도 아니고 다만 “명명과 시형일 뿐”라는 점에서 과연 3행의 룰을 유지하는 이유와 새로운 명명이 시적 변형에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의 이르기 때문이다. 2. 문학에서 새로운 시도는 늘 있어왔다. 3장 6구 45자의 전통적인 시조 형태를 시도한 적은 있지만 외면의 운명울 맞아 사라졌고 최근에 3-4-5-6조의 민조시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당혹감을 남긴 경우도 있지만, 그 운명을 예단하기에는 아직 판단을 유보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왜 그런가 하면 새로운 실험에는 이론적인 타당성과 시적 내용의 합리적인 수용이 독자에게 어떤 반응으로 나타날 것인가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풍시조라는 형태도 “아직”이라는 부사 앞에서 서성이는 길에는 틀림이 없다. 새로운 형태의 출현은 그럴만한 이유- 사설시조의 등장은 임란이 지난 후에 서민들의 문학적 표현 욕구에 부흥하기 위해 전통적인 형태를 파괴하면서 나타난 것- 이는 전통적인 형태의 변화를 의미했다면 산문적 풍자의 모양새가 시조와 유사한 3행으로 압축하여 표현해야 할 당위성이 시대적인 변화와 일치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엄정한 룰로 돌아가는 일이 오늘날의 독자들의 취향과 일치하는가 에는? 마크이다. 현대인의 삶은 엄정한 틀에 갇히기보다는 오히려 벗어나려는 쪽을 선택하고, 격식을 벗어던지는 자유정신을 더욱 선호하기 때문이다. 문학도 사람의 취향과 시대적인 변화와는 항상 맞물려 돌아가는 관계는 일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에 민조시라는 것도 형식적인 틀을 강조한 이유에는 설명이 없고 박진환의 풍수 3행이라는 룰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보는 것이다. 아울러 압축에는 늘 현란한 시적 장치가 등장한다. 시의 운용의 제약은 잘못하면 촌철살인의 비유가 아닌 말장난(pum)의 유희에 이를 수도 있으며 인간의 어리석음과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폭로하는 풍자는 궁극적으로 당위적 현실 그리고 진정을 이루는 목적에 이르기를 목표로 할 때, 겉으로 드러난 폭로나 비판에 목적이 있음이 아니고 진정과 순리로 돌아가는 길을 만들기 위한 점에서는 아이러니다. 현실에 대한 온도를 말하는 비판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모순과 대립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척도에서는 지적인 점- 현실에 냉엄한 판단과 분석력을 갖추고 문학적인 소양을 갖추었을 때 풍자의 기능은 진정한 자유정신의 발양을 최대한 허용하는 점에서 때로 산문적인 시의 모양으로 발전한다면 형식의 제약은 내용의 위축을 초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이다. 비판의 당위성은 정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면서 표현하는 지적인 작용이 우선할 때 독자의 호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칫 신문기사와 유사할 수 있다면 이는 시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루한 비판과 설교조는 때로 식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엄정한 틀 속에서 압축된 내용은 무한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압축의 효과 장치를 기대해야 할 것도 따라오는 문제일 것이다. 3. 풍시조란 이 실험은 독특한 풍시조인가? 성공하는 실험일까? 이 대답 앞에 당당하려면 더 많은 연구와 실험의 결과가 긍정적이어야 할 것이다. 마치 초기 기독교에서 바울, 불교에서 용수나 아난의 뛰어난 제자의 의해 세계적인 종교가 된 이치는 문학에서도 타당한 비유가 될 것이다. 신문 기사를 문학으로 말할 수 없듯이 신문 기사가 문학의 소재는 될 수 있지만, 문학적, 의장(意匠)이나 시적 장치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문학적인 가치로 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다면 문학적 수용으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힘겨운 언덕을 넘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적 깊이를 갖지 못하고 대부분 피상적인 사건 나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지적 작업인 풍자를 위해서는 깊이만큼 지적(知的)이어야 하고 반응 또한 지적인 거름을 통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 사회적 불평으로 흐르지 않고 옳고 바른 곳을 지향하는- 흥미를 유발하면서 지적 조건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아울러 풍자 시의 자유적인 정신보다는 3행이라는 제약 속에서는 비판의 한계를 가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아직』이라는 단서를 말하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풍자 시가 잘못되었는 것이 아니라 3행의 룰 안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다른 눈으로 보지 말기를 기대하며 지적인 풍자 시를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가 더욱 중요한 가치가 넘치는 풍자 시가 되지 않을까 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3. 10. 금요저널 주필/칼럼니스트/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필자의 저서 ] [가을의 휴머니즘]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시의 표정이란} 시는 바로 시인 자신들이 모든 이야기를 함축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가장 진솔하고 일생을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의 특성은 곧 시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면서 과거와 미래 현재의 표정을 관찰하는 방법이 돈다는 점에서 진실의 기록인 것이다. 물론 시적 특징은 함축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과거, 현재 미래까지 응축이 내포되는 것이다. 즉 서정은 오로지 현재라는 시점에서 조망(眺望)의 기교를 만나야 하기에 독자는 언제나 내면으로 통하는 길을 지키는 긴장(緊張)이 요구되는 것이다. 시를 그리면서 긴장은 독자나 시인이나 필요한 덕목이다. 시인에게는 언어의 탄력이 필요한 이유이고 독자는 감동에 따르는 정서의 환기 현상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의 배열이나 생략 등 시적인 기교와 장치의 여부에 부응하는 종합적인 성분이 좌우되는 일종의 인상에 해당되는 것이다. 시는 언어로 재료로 하여 감정을 부추기는 일이 곧 시의 필요성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시인은 늘 언어의 무게를 따지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시는 다양하고 소재의 특성을 들어야 한다. 자연 현상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소재로 등장하고 삶의 방법이 그 나름대로의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생의 깊이를 방문하면서 나오는 원숙성이라 할 것이다. 이는 고뇌의 젊은 날이 지나면 느끼는 사물과 대화가 친숙성을 더하는가 하면- 이는 주로 회고의 정념(情念)으로 나타났다면 미래를 지향하는 소재도 희소한 것도 사실이다. 가을과 겨울 감각이 이를 뜻한다면 초목의 시적 대면이 많은 이유이다. 사실 도시 중심의 정서가 아닌 전원의 추억이 영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정서가 많은 것은 이는 여린 생을 살아온 여적이 보이고 자식을 키우고 난 이후의 썰물에서 느끼는 허망이 뜻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2.{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1) 사랑과 그리움 사랑은 그 자신의 쾌락을 구하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 헌신이 자리할 때 그 마음에 찾아드는 신기루이면서 오아시스가 되기 때문이다. 순간에 자리잡는 특징은 대상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고 이를 영원의 장막으로 가릴 때, 사랑은 따스한 이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단계는 우선 그리움이라는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넘으면 푸른 이름을 가진 사랑의 정원에 들어간다면 거긴 행복한 나라의 이름을 얻는 자유가 다가오는 듯 하다. <여린 마음>으로 시작 된다. 여리기 때문에 무언가를 의지하려는 발상이 시작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의탁의 갈증이며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의미에 다다른다. 여름로 내딛는 자줏빛 노을이 맑은 푸르름을 지천으로 토할 때 그리움에 짓눌러 붉어진 눈 하늘거리는 바람이 헤집고 마음 지나니 정녕 그대의 전갈인지 슬픔 가득 여린 마음 의탁 되어 푸름에 실려 온다. <여린 마음> 시간은 여름을 재촉하고 또한 황혼 무렵에 푸르름 지천으로 토할 때 그리움에 짖눌러 붉어진 눈 - 그리움에 채색된 처절한 의탁이 화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대의 전갈”처럼 착각되는 시심을 자극하면서 그리움을 불러오는 느낌이다. “슬픔 가득”이라는 비극적 무드로 진행 되면서 “여린 마음”을 점령하면서 출렁이는 정서가 그대에게 향하는 전가리 된다. 무엇을 그리는 정황으로 보아 슬픈 이름으로 연상이 된다. 자- 그러면 시인은 그리움의 비극의 확실한 중심에서 시를 만났고 이는 실재가 아닐 수도 있고 실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시는 상상의 산물이고 상상력으로 포장된 시심이 곧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정서가 지향(志向)하는 방향은 내성적이고 부드러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사고의 일종일 것 같다. 이는 성격과 상상이 결합하여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며 거기서 푸름의 위안과 평안을 쟁취하려는 의도가 앞서며 의탁하는 내면을 보게 된다. 유진영의 시는 실재 모습과는 달리 또 다른 상상의 그리움을 잘 표현 한다고 할 수 있다. 푸름의 계절에 왜! 외롭고 그리운지 싱그럽고 푸르른 계절 온몸으로 포용해 새들의 울음소리 바람에 실려 흩어지는 사랑의 영혼들과 멍 때리는 작전에 넋 잃은 몸부림을 모두 끌어안고 그대 5월 여왕 되고 싶어라 <5월 사랑> “그대”라는 미지(未知)의 대상과 5월은 늘 연결 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연결과 본질 - 5월은 새싹의 푸르름이 녹음을 전하고 있다. 5월 사랑을 그리워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대체한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리고 이끌려 시인의 정서가 6월의 여왕으로 멍~때리는 작전에서 그리움의 넋을 위로한다. 사랑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꿈꾸는 최종 종착지일 것이다. 사랑은 모든 이들의 추구하는 종점이고 인간 삶의 궁극이기 때문에 사랑의 실현은 곧 5월 사랑의 가치로 환산한다. 이상향이면서 자유의 중심인 곳을 멍 때리며 관조하는 매취 되는 언어에서 상상의 공간을 유영하면서 여왕의 사랑이라는 상상이 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하늘 별』 『연가』 등은 시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듯하다 하늘 별은 그대 사랑 묶여 있어 자유가 그립다. 사랑이 있고 없고 그대는 아름다운 빛깔로 나타나 마음 흔들어 놓고 산란한 봄바람에 울렁증 생겨 내 삶의 자아를 하늘 별에게 묻고 물어 사랑의 이름으로 하늘별로 뜬다. <중략> <하늘 별>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마치 하늘 별에게 조심스럽게 묻는 소중한 다룸에서 연결된다. 사랑이라는 하늘 별이 고귀한 천상의 별은 이미지 이면서 상승의 가치앞에 신비감을 더해준다. 별에서, 사랑의 이미지는 무게를 갖는 을렁증이 생겨 자아를 묻는 것은 효과를 극대화 해준다. 유진영 시인의 시는 그리움과 사랑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굳이 현실적 연관을 갖기 보다는 미지의 공간을 향하는 의식적인 상상으로 유추된다. 물론 명료함의 시의 본질은 아니나 모호성(Ambiguity)이 시적인 본질이지만 의미(意味)의 일탈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미지에게 묻고 답하는 것은 어느 상상의 풍부한 사상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시는 과학적인 의미의 구축을 가져올 때 비로소 언어의 다양성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움과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 속에 서로 다른 표정과 같다. 상상만 해도 수줍은 미소 온몸을 감싸고 내 성안에 온몸으로 부딪쳐와 상상으로 열린 하루가 부푼다. 난 그만 당신의 포로가 되어 행복의 닻 그리움으로 실어 내리고 애뜻함으로 밀려와 바람으로 싱그럽게 그대가 달려온다. <상상의 그리움> 어느 대상 앞에 자신이 작아지는 것은 사랑의 진수에 이르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랑에서는 자기(自己)가 없으며 오로지 대상만이 크게 다가오므로 진실함이 넘치는 사랑에서는 자기 자신이 대상에 포함하여 내포 되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험과 경륜은 진실한 공간에서 행복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대를 향하는 이름만이라도 “당신의 포로” “수줍은 미소”에서 행복이 충만해지며 내 의식의 성안에 가득 차오르는 기쁨과 설레임의 하루가 행복하다. 이는 포로 에서의 구속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망아(忘我)의 경지가 아닐까? 2) 관계 설정의 정(情) 부모라는 것은 마음의 고향이고 안식처이기에 꿈을 저장하는 암시를 나타내면서 돌아가 의지하고 싶고 모태의 대상이다. 그러나 부재한 부모일 경우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서와 정회(情懷)가 더한층 부풀게 된다. 이는 누구나 갖는 보편성의 마음이면서 이를 나타내는 것은 인간의 상정(常情)일지라도 애뜻함이 더하게 된다. 유시인의 경우 『“어머니”』 『“생의 삶”』 등은 과거 지향성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애뜻한 마음이 늘 가슴에 남아 있기에 어머니를 연상하는 마음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껏 살았습니다. 꽃이 피면 꽃인 줄 알았고 저며오는 마음만이 깊숙한 어느 곳에 맺혀만 있었습니다. 아련한 그 얼굴 보일 듯 말 듯 그저 솟구치는 그리움만입니다. 그리움 매달아 점점 커가는 빈자리를 채우고 또 채우고만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머니>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의 마음을 아직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어머니 마음-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진수이기에 더욱 절절한 세월의 아픔인 것이다. 채우고 또 채우려 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언어에 구구절절 미어지는 애저한 마음이 언어 속에서 춤을 춘다. 『“보일 듯 말 듯”』 『“그저 솟구치는 마음” 』 등 감정이 이입되며 감정의 절정(絶頂)이 행방을 알 수 없는 묘연함 속에 그저 상상으로만 그리는 어머니의 그림자를 지금도 알 수 없다는 뜻에서 사랑으로 가는 영원한 길이라는 상징에 이른다. 3) 삶의 길 사람은 살아 있기에 현실에 대응하고 여기서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기 위한 상상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이는 오늘이라는 뒷받침이 없다면 인간이 역사는 공허한 이름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은 곧 내일을 맞이할 가능의 시간을 확보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비록 하루살이의 인생일지라도 거기엔 진지와 탐색 그리고 성실한 책임, 소임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생애가 흘러가듯 아까운 시간을 쪼개서 살다 하강 곡선을 그리네. 인간은 만물의 동물이듯 죽음의 그늘 벗지 못하고 세상만사 삶의 터전 준비 중 죽음의 길로 가는 우리 삶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도대체 오리무중이다. <삶의 생> 우주의 장구한 시간에서는 수유(須臾)의 찰나이지만 마지막 가는 날까지 인간이 가는 과정을 아직도 우리는 미로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가는 죽음을 붙잡을 수 없기에 언제나 가족의 임무 가정의 임무 자신의 임무를 떠안고 살아 가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유시인의 『“오리무중”』이라 하며 죽음의 그림자도 모르면서 살아간다. 사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사실을 형이상학적으로 인간도 이 지구상에 테어나면 결코 나갈 수 없는 운명적인 존재라는 뜻에서 시가 상승되는 듯하다. 바람 자락에 가버린다 해도 밉지 않다. 세찬 바람에 홀씨 되어 사랑의 분신을 준다. 그리움 매달아 커 가는 빈자리로 날려 보내는 홀씨 모두 내어 주고 허탈한 미소로 사각이며 흔들릴 뿐이다. 긴 들녘 저 빈 들녁 그믐달 서러운 듯 윙윙거리며 서러움 달랜다. <억새 풀> 중 마음이 공허할 때 고독은 다가온다고 한다. 이는 자기 발견에서 느끼는 일이기 때문에 자각의 농도에 따라 공허의 함정이 나타난다. 고독은 그렇게 다가오며 바쁘거나 힘겨운 젊은 날 세월에 언덕을 넘느라 고달픈 시절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에 모두 짝을 찾아 저마다 떠나고 나면 비로소 자아의 발견- 여기서 고독이 깃드는 것이다. 『“허탈한 미소”』 『“서러움이 윙윙 거린다”』 등 이는 시인 자신이 그믐달로 형상화하여 서러움을 인생에 대입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비록 늙어진다는 것은 고독의 맛도 강해진다는 뜻 일게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가 된다는 애달픔이 짙어지고 이러한 경향들이 인생의 허무와 손을 잡게 된다. 빈 들녘의 그믐달을 연상하면 이러한 징후는 마음 깊게 공허함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4) 자신의 길 시는 대답을 말하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 길에 대한 노래를 부를 때, 독자는 감동의 추수(追隨)를 거둔다. 이는 개인차에 따라 서로 다른 이미지로 이해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의 해답은 시를 살아나게 하는 요인이 된다. 한편의 시에서 해답을 얻을 수도 있고, 문제를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유진영의 시에는 해답을 얻는일 보다는 문제의 깊이를 발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는 황혼의 풍경화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생의 모습이 액자로 담겨 있기도 하고, 추억을 찾아가는 아슬한 이름들이 나타나는 삶의 애정에서는 깊은 정감이 드러나고, 부모의 사랑이 따스함으로 회고될 때, 인간의 세계가 새삼 포근해진다. 이는 오랜 연륜의 생에서 비롯되는 맛깔이라는 점에서 마치 옛정에 그리움이 넘치는 고향을 방문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남기는 차분하고 자기를 관조하는 어조(tone)의 시인인 듯 하다. 다시금 필자도 추억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고 느끼며 나가려 한다. 2023. 09.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시평집] [이승섭칼럼집] [서정으로 가는 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대한민국의 문학은 농경사회인 18세기~19세기 산업화 혁명의 여파는 급진적 급속하게 인간 문학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어 산업화와 함께 자동차, 전기 등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3차 산업, 4차 산업의 토대와 전기가 마련되었고 1943년 컴퓨터 등장과 1976년 스티브 잡스의 위즈니악이 차고에서 PC의 발명은 인간의 문화를 획기적인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컴퓨터의 출연으로 터치의 문학도 급속도로 전환되었다는 점이고 여기서 우리가 관과 할 수 없는 현상은 Pen문화에서 Power⤍Man의 중심문화가 컴퓨터의 자판- 터치로 넘어오는 시기에 여성의 중심으로 전환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전환점을 맞는다. 사회 전반의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졌으며 모든 분야에서 석권하는 이유는 Power의 남성이 아닌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역할이 터치의 역할로 컴퓨터의 자판에 유리한 여성의 장점에서 더욱 눈부신 장점으로 발전할 수 있다 볼 수 있겠다. 문학의 발전 속도는 100년이라는 단위에서 30년을 지나 컴퓨터의 등장으로 단 3년이면 과거의 100년 변화와 맛 먹는 진전을 이루어 있고 점점 짧아지는 추세를 감당하고 어려운 복잡한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이른바 4차 산업 혁명의 여파를 운위 하는 중심에는 AI와 인간의 문화 - 기계와 인간의 문화 현상이 나란히 동행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종교조차도 금기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지구를 움직이는 서방국가들과 주도적으로 기술이 앞서 나가는 미국, 영국 등은 AI라는 종교까지 등장했다고 몇 년 전 들은 바 있다. 오늘의 인간은 점차 신(新) 원시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미국의 IT매체인 외이어드(Wired) sms 구글 출신의 엔지니어 앤서니 레반도브스키 (41.Anthony Levandowski)가 “미래의 길”(way of the futer)이라는 이름의 AI 교회를 설립했다. 교회의 목적은 “인공지능에 기반에서 신격의 실현을 개발하고 촉진함으로써 사회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한다.” 이 교회는 구글에 재직하고 있던 2015년 09월에 설립, 종교단체에 부여되는 면세 혜택을 당국에 요청하면서 2017년 실체가 밝혀졌다. 인공지능이 설교하는 것은 아마도 정치(情致)하고 합리적인 설교에 빈틈이 없을 것이라는데 이른다고 하니 모골이 송연하고 아찔하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니, 기미스 하사비스가 개발한 알파고와 바둑대결 이후에 여러 분야에서 경천동지 할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05년 저술한 <특이점 singulalty>에서 2029년에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춘 컴퓨터가 등장하고 2045년에는 기계가 인류를 넘어서는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이런 추세를 추적하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직업군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인간 대신에 컴퓨터가 수술을 하고 변호사, 판사, 회계사, 금융사무원, 의사의 직업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사물 인터넷전문가, 인공지능전문가, 빅데이터 전문가, 가상현실전문가, 3디 프린팅 전문가, 드론전문가, 생명공학자, 로봇공학자 전문가, 등이 유망직업군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가히 어떤 가상현실이 올진 누구도 장담 못할 것이다. 이런 변화의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여지는 기계가 할 수 없는 상상력의 분야는 앞으로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라 누구나 말을 하고 있다. 2.상상력의 미래 예술은 앞으로 주목을 받을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 소설, 평론, 희곡 등 장르에서는 구조(plot)의 분야- 소설이나 시나리오는 이미 로봇이 쓸 수 있는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2016년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니온게이자이 신문사가 주최하는 sf 소설 공모전에서 1심을 통과했다는 보도는 들었지만 2차에서 낙선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어느 작품이 인공지능 작품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심사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나 수필 등은 살아남을 여지는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시-4600년 전에 티그라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수메르 문화의 유적지에 우르크 왕조 5대 왕인 길가메시의 신화를 점성토 636 장에 수메르어로 쓴 서사시인 영웅 <길가메시>를 필두로 시의 길이 시작 되었다. 이보다 2 천년 뒤 기원전 600~700년 전에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이후 시의 발전은 인간 지혜의 발현(發現)으로 이어왔고, 이제 그런 현상이 4차 산업의 혁명적인 여지는 문학에도 엄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예술에서 가장 보수적인 분야가 문학이라면 보다 속히 그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치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사고는 단순하고 단편적이고 장편을 외면한다. 여기서 시 또한 장시이기보다는 짧은 서정시의 아포리즘적(짧은 글)인 현상이 기호를 자극할 것이다. 과거의 명작은 점차 읽히지 않는 추세는 오래된 현상이 되어 버렸고 서정시는 이런 견지에서 문학의 중심을 떠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지 않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서정시의 계보는 매우 장황하다 못해 우후죽순이다. 본격적인 단초는 BC 7세기 알카이오스와 그리스의 노래를 담은 도리아 지방의 여성 시인 사포오와 로마에서는 BC 1세기 카룰로스와 호라티우스가 서정시를 그렸고,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엔 폐트라르카, 섹익스 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죤 밀턴 등의 서정시로 14행 소네트의 두드러진 발전에 이어 18세기말과 19세기에는 낭만파 시인들인 로버트 번즈,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워즈위즈, 키츠, 셀리, 위고, 괴테 등으로 계보가 이어졌고 19세기말과 20세기는 대부분 서정시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발전의 계기를 이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의 서정시는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로 시작된다. 왕비 송 씨가 죽자 화회와 치희를 후실로 맞았으나 질투로 치희가 궁궐을 나간 외로움을 사이좋은 꾀꼬리에 비유한 서정시의 원조가 이별의 노래로 담아지는 내용이다. 5세기 신라의 향가 25수와 고려 가요인 <가시리>와 조선의 3음 중심의 양반 노래인 시조(13~14) 등은 우리나라 서정시의 맥을 이어온 전통의 가락이 아니었나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는 양반들의 시가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 들어 1908년 잡지 <소년>에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마리로 주제를 삼지만 이보다 10년 전 1898년 협성화보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고목가>라 할 수 있겠다. 슬프다, 저 나무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서있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백 년 큰 남기 오늘 위태(롭도다) 원수의 땃짝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조지(쪼지) 마라 조고 또 조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依支)(할꼬)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 박혀 반근(盤根)되면 새 가지 새잎이 다시 영화(榮華) 봄 되면 강근(强近)이 자란 뒤 풍우 불외(不畏)하리라 쏘아라, 저 포수 땃 짝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남을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危亡)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외세 <일제강점기>를 딱따구리로 보면서 쓰러지려는 고목을 대한민국의 처지로 상징하는 노래는 절절한 애국심이 오히려 어쩌다 시인이 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생각과는 정신적인 집중이 층위가 완전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봄, 부산에서 <전쟁 중의 봄> 연작 시조를 그렸다 강산을 바라보매 진 치는 연기 자욱하고 돼 이빨 양 돛대 봄 하늘을 가렸는데 집 없이 떠도는 이들 생쌀만 씹고 다닌다. 거리엔 벽만 우뚝 선 마슬엔 새 밭매고 전쟁이야 멀건 말건 봄바람 불어 들어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빼어난 한시(漢詩) 시인이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50년대 말 창경원에서 전국 시조 대회를 열고 직접 시제(詩題)를 내기도 했으니 대단한 시조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0년대에 오면 김소월과 한용운은 당시 시단의 주류가 아니고 사실은 아웃사이더였다. 설익은 외국 상징주의 흉내로 명맥을 이어온 한국 서정시는 1930년대 후반 “시 문학파와 인생파” 등에 이르러 본격적인 모양으로 출발을 했으며 이러한 명맥이 1960년대의 소용돌이와 70년대 민중문학 소용돌이에서 서정시인들은 위축과 민중문학에 의해 뒤 켠으로 물러난 시대의 강을 넘어왔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민중문학의 맹장들의 거처인 <창비>의 <문지> 등의 중심세력들이 문단의 목청이 너무 큰 사람들이 장악한 한국 서정시의 맥락은 침체와 의기소침, 위태로운 강을 비틀거리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라 보는 것이다. 민중문학의 이론가라고 하는 백낙천이나 고은 등 문단의 거목 행세로 노벨 문학상이라는 허풍을 부풀린 거품의 본질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작품성은 민중 타령으로 작품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휴머니즘의 사상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우성과 민중 이외에는 찾을 것이 없다는 점이 비극 표현의 몰락의 길을 걸었지 않았나 필자는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2017년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Harvey Weinstein을 최초 고발한 애슐리 쥬드의 mee too의 파도에 좌초된 현상이 그 얼마나 허약하고 빈약한지 부풀리기 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은 문학성이라는 것이 생명을 키우는 것이 절대 요소이기 때문에 허세와 풍선은 언젠가 터지는 것이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3.문학이라는 땅 인간은 자연이 일부인 것이다. 물론 인간 갖고 있는 모태는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의 자연과 하나가 되느냐의 따라서 달라진다. 자연이 주는 일부는 인간이 소유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과 공감을 한다. 그러나 서양의 자연과 동양의 자연은 다르다. 서양은 정복으로의 자연관이며 동양은 조화(調和)로의 자연일 때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르다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본다면 서양의 사상과 동양 사상의 합일점은 4차 산업혁명의 여파 속에서 어떤 것이 더 생명력을 상상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현실에 있어 동서양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세계는 이미 하나의 지구촌 생활 속으로 모든 것이 통합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섭의 학문, 통섭의 여파로 문학 또한 그런 경우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의 창조에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딥마인드의 로봇과의 시합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여 상상력이라는 것은 깨우침의 훈련으로 그 높이를 더욱 제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뇌의 인간화를 강조하게 된다. 물론 사고에서 상상을 새로운 시발점이 가지를 만날 수 있고 숲을 만나 상상에서 또 다른 상상의 경지를 가질 때 인간의 문화에 중심 역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상의 원천은 시(Poem, Poetry)를 강조하는 이유가 나변(那邊)은 아닌 것이다. 문학의 출발은 인간의 일을 기록하는 일이지만 본질은 인간의 사랑인 휴머니즘의 영원한 명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 작품을 읽어도 그렇고 위대한 사상가의 작품 속에는 한결같이 사랑의 이름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방법을 말하는 이야기들이다. 허접한 정치에 매달려 이데올로기의 간판도 아니며 타령조의 애소(哀訴)도 아니며 오로지 인간의 본질에 이르는 문제인 사랑의 길을 찾고 말하는 일이 문학의 숙명이자 길이라는 점에서 시는 그런 상상의 원천에 도달하려는 창조라는 점에서 종교를 대신하는 것은 바로 시(詩)다라는 매쉬 아널드의 말을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4.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아미 로웰은 “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 ‘모른다’는 단순한 대답이었다. 이는 인간의 창조적인 근원을 묻는 일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시가 서로 모순되는 사상들의 융합인지를 묻는 영국 시인 그레이브스와 미국의 여류시인 새러 티스데일이 말한 흥분과 긴장의 결과요 해소라는 주장과 백일몽에 가까운 심리적인 상태의 몰입으로 말한 프레스콧의 말 등 한 가지로 통일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잠재된 신비의 상태를 필자가 보는 견지에서는 접신(接神) 즉 무아지경의 신비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공자가 말한 시경을 두고 시 300수를 한마디로 사무사(思毋邪)라는 말에는 무아경의 깊이가 없고 현상적 사실을 정리한 뜻에 불과하다고 말들 하지만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의 길을 재촉하는 일이고 독자 또한 시인이 쓴 시를 통해 상상의 또 다른 창조의 추체험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시의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의 상상을 만드는 길일 것이라는데 진리가 되지 않을까? 미래의 문화 현상 또한 밑바탕 위에서 새로움을 구축하는 일이 문화의 근간을 이르는 인간의 절차탁마(切磋琢磨)만이 상상력이라는 결론에서 본다면 앞으로도 시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는 말로 정리될 것 같다고 확신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3.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고독의 바다 유영]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