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갈증은 곧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가져오기에 여유롭고 넉넉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기능이 퇴화하고 늘어지는 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족한 면을 메우기 위한 행동을 예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순을 거치면서 자연과 세상은 변화를 맛보게 된다. 가을의 찬란함과 고독 사색이 없다면 가을이라 할 수 없으며 겨울의 추위가 없다면 봄의 꽃은 없을 것이고 불편하고 어려워도 첨단 즉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편리가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 이유가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같을 것이기에- 부족(不足)은 만족(滿足)의 모태가 된다. 이 명제는 진리가 함축된다. 왜냐하면 부족이 만족을 낳고 갈증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부복이나 갈증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을 위한 길을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한 줌 햇살 살짝 비추고 슬쩍 입맞춤 구름 걷히고 바람도 숨을 고르며 다소 곳 손 부여잡고 춤출 수 있으련만 주는 사랑으로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과 같이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 『주는 사랑』 중에서 구름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에서 행복이 오듯, 햇살은 최종의 기다림이고 구름은 이를 훼방하는 이미지로 다가들 때,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행복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주는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구하고 찾는 방황이 있어야만 사랑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물상 삼라만상에서도 통용된다. 그렇기에 인과적(因果的)인 현상이 증명으로 통하고 증명은 다시 되풀이되면서 삶의 원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정서에 특히 달관(達觀)된 정서를 유지하는 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자연과 같이” 자유의 생을 이룩하기 위해 열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필자) “주는 사랑”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 등이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가 기승 전 詩들을 원하고 그렇게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을을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겨울은 또한 봄을 맞이하는 계절이기에 겨울의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계절이다. 겨울은 어둠이고 방위로는 북쪽, 높새바람이 세찬 기운을 몰고 올지라도 마침내 봄기운에 꺾기는 의미를 낳는다. 봄이 심술을 부리다 떠난 겨울의 빈집에 각시방을 차리고 화사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초청했나 보다 앙상한 가지에 화려하게 단장을 시킨 파릇파릇 청순한 봄처녀들의 무희는 온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길모퉁이에도 바짝 마른 야산에도 펼쳐놓은 잔치에 무수한 인파들이 몰려들지 모르지만 간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 목 길게 빼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무희 춤사위는 지칠 줄 모르고 발길 닿는 어느 곳이든 공연 길을 나선다. 『봄축제』 중에서 봄은 나무들이 푸른 낙원을 색칠하는 계절이고, 꽃들의 축제이고 또 향기의 상승으로 고귀함을 연상하면서 들썩이는 계절이다. “무희”들의 “초청”은 바로 잔치를 준비하는 계절을 암시하고 2연에는 각시들의 싱싱한 모습이 육감적인 비유, 그리고 잔치의 “인파”와 더불어 노래가 세상을 장악하는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꽃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다시 향기로 세상의 공간이 분주하면 벌과 나비들은 인파를 이루는 인간과의 대조를 형성하면서 더욱 바빠지는 계절, 꽃과 향기로 상승하는 것은 봄이 갖는 특별한 기회이면서 자연의 질서가 형성- 꽃과 향기는 서로 보완적인 상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라는 존재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통찰이 섬세할 때,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자극하기 때문에 겨울에서 봄으로 진행하는 질서- 겨울을 이겨내고 용기 혹은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꽃과 향기의 상징에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풍경의 제시로 보여주는 흥겨움을 전달하면서 화려한 장마당처럼 분주해지면서 흥취에 젖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2. 추계의 노래 시인은 계절적 감각을 유난히 예민하고 그곳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필자) 이는 감각의 발달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에 가까운 인상에서 진실된 시의 표현미가 발동되고는 하지만 봄날보다 가을의 이미지가 다수인 것은 아마 남자 사색의 정서- 낭만을 즐기고 고독의 사색에서 오는 “ 외롭고 쓸쓸한 감수성”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계절별로 따지면 가장 많은 시들과 가을을 전하고 있기에 이는 필자의 내면 정서에서 발동되는 기운이 시의 진로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로 돌리면 되지 않을까 한다. 『가을은』 『가을 단상』 『어느 가을날에』 『추계 연가』 『늦가을』 『추억 가을』 『단풍잎』 등 가을의 시를 쟁취하면서 낭만으로 선행을 한다. 사색을 먹고 낭만을 먹으며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은 시간 갖는 풍경으로 저무는데 서리꽃 앙칼진 눈초리가 유난스럽다. 만추에 만삭의 절정 가을은 절벽 위 우두커니 고개 국이고 찬바람에 발등 찍힌 낙엽은 야윈 모습으로 슬픔을 노래해 달랑 걸린 낙엽 하나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 떨고 있네. 『단풍잎』 중에서 조락(凋落)에서의 반응은 슬픔이거나 우울 앞을 가린다. 가을의 슬픔은 감정을 예민 반응하면서 주변의 모습에 슬픔을 고하는 것 같아 분위기에 젖는 것이 가을의 정서라 하겠다. 이는 질축한 슬픔이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양상이기에 가을의 정서에 여린 마음이 더욱 많아지는 듯하다. 낙엽에서 삶의 아픔을 노래하고 1연에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 앙칼진 서리꽃의 표정 3연에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한 가을의 절정에서 느끼는 6연에 고개 숙이고 슬픔을 풍경으로 저무는 곡예 하듯 위태롭다. 결국 필자의 마음에는 가을에서 슬픔을 반영하는 낙엽의 슬픔과 대칭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을의 정서가 시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가을의 사색을 마음껏 즐기려 하는 필자는 팔자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계절 감성에 젖어 마음의 자아가 요동을 치는 것인지 유치하다고 느낀다. 3. 에필로그 한 인간의 시인이 영혼을 달래 주거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시가 밝아야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어둠이 햇빛의 상관에서 출발하고 절망이나 불행도 행복과 자유로 맞아 드리는 고통의 문이라면 필자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러한 경험의 채득을 시화(詩化)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며 여기서 개성을 발휘하게 된다. 시는 곧 시인의 개성의 문패가 되는 것이고 이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일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생활하는 필자는 이제 1년 정도 낯선 정서에서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1편의 시는 언어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더러 시는 비가 봄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쓰이고 다음 단계는 꽃과 향기, 계절을 불러와 승화시키는 순서를 갖기에 꽃은 늘 천상의 이미지 향기로 나타내는 것은 순치하는 순리이고 이치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가을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라면 가을은 시심의 동력을 제공하는 뜻에서 필자의 마음과 일체화된 가락으로 채워지는 것이기에 시인은 늘 가을의 중심, 계절의 중심을 배회하는 순수한 나그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 계속 시를 그린다면 견고(hard) 간결(simple) 정확(precise) 선명(vivid) 성을 현대 詩라 특질로 언급했다면 필자는 따스하고(warm) 온화함(soft)을 합작한 “휴머니스트” 적 행장으로 그리고 싶다고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 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詩的論이라는 것은 언어(言語)로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대체적으로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독자와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치 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云爲)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하여야 하여야 하기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적으로 받아 드리는 시인의 길을 가려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아픔,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으로 포장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금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현실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물음표이다. 이제 겨우 30여 명의 시인 논을 쓰고 있는 본인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이 되고 투영된 작품이 없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많지만 걸맞은 작품에서는 수사가 너무 많아 작품성의 가치가 없음이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 일게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공부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지부에도 젊음의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는 물음표(?)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은이들을 찾고 찾아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지부가 될 것이라 확신하며 찬란한 빛이 내려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일로, 개인의 아집을 보이는 모습이 필자가 보기에는 희망이 없음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다. 물론 연세가 많다 하여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필자 또한 나이가 익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편들끼리 모여 편들끼리 지부를 운영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곳에 정착한 지, 어언 여러 해가 되어 가지만 하나도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해 본인 스스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지만 공연히 평지풍파 아니 잘난 척하다는 모양새에 그냥 보고 듣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본인은 여러 지부에서 함께 생활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여기처럼 부자연스러운 지부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여 예술의 도시인 지부가 된다면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될 것이다. 4차, 5차원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강조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가 반목하면서 눈치만 살피고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 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잠시 현실의 안위를 생각하는 의미로 일탈을 한 것은 아닌지? 다시 평론으로 들어간다. 1. 봄바람 자리 <김영미>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꽃 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 아! 가벼워라. <꽃바람/김영미> 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꽃 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 마음의 자아 <박시연>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을 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신적,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時語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 않다는 데에 허전이다.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이유가 나타난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박시연>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 일게다. 좌고우면 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오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시라는 존재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의식과 일체화를 꿈꾸는 작업이라 본다. 다시 말하면 1+1은= 2가 아니라 3의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화학적인 결합의 일체화인 것이다. 이는 시적 장치인 비유나 역설, 은유, 직유 등의 장치를 가동하여 시인의 재능을 나타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지를 앞세우면 자아는 곧 시적 화자인 시인으로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순백이어야 하여야 때문만은 아니나 현실에 대한 의미를 내장한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시어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3. 에필로그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를 대중들에게 바치는 가수이기에 비록 서툰 곡조라도 신명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과 희망을 향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릴 줄 알아야 하고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fr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첫 시집에서 의도를 명료화하는 이미지 구성은 건강하고 튼튼한 재료를 배열하는 설계도를 완료한 것이다. 다음 건축은 확연하게 다른 시의 개성 그리고 우리나라 시의 의미를 위한 발성이 두드러질 때 기대하는 가 위의 논지들에서 재촉이 된다. 또한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는 비밀성이 낯설게 표현하지만 비유나 은유의 장치를 분해할 수 있다면 결국 시인의 모든 정서가 표백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인 자신을 말하는 우회적인 언어의 포착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향기를 발산하는 시인들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며 문을 닫으려 하며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에 마음의 자아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일탈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며 오늘은 나를 변명하는 일로 맺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나를 만나기] 글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은 대부분 아름다운 마음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정서를 순화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정서의 상승을 부추기는 순수한 에고의 풍경화를 만나는 일이기에 작가는 사물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심안(心眼)으로 떠오르는 세계를 위해 헌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비유로 나타나는 작가의 얼굴에는 천진하고 순수한 마음의 그림이 전개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작가가 그리는 세계내(世界內)에서 독특한 추수(追隨)적인 경험을 만나기 일은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일치하여야만 효과에서 만나는 공간 글의 가치는 즉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되는 것이다. 작가가 토해내는 언어의 그림은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 세계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일면 그로 인해 변화되는 공간 창조의 힘이라는 것은 독자들의 마음의 심금을 울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글의 가치는 고귀하고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인간의 곁을 떠나지 않는 글의 가치는 고귀하고 힘이 넘치며 인간의 정서를 끌고 가고 있기에 감득하는 작가라면 정서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사실 감수성과 정서가 없다면 작가가 될 수 없고 감각적, 언어의 조화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작가가 되는 길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패용하고 글을 쓸 때는 사물과 결합의 조건을 제시하여야 하며 그로 인해 촉매제 역할도 주도적으로 구사하여야 이미지의 결합을 주도하는 운용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비록 평범하고 날마다 접하는 재료가 있을지라도 어떻게 요리하는가의 따라 그 결과는 호불호의 결말이 판연하기 때문이다. 소설, 칼럼, 수필, 등은 다소 연결 지어지는 문맥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시(詩)라는 존재는 궁극적으로 언어의 창조, 응축, 언어의 이미지를 그리는 그림이다. 여기에는 감각이 들어 있어야 하고 언어의 긴축에 탄력이 수용되어야 한다. 시인은 시라는 대상을 의인화의 방법으로 바라볼 때 높고, 깊이를 심각하게 발성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는 곧 자신의 얼굴이고 분신(分身)이고 떠날 수 없는 절대의 대상화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시를 향해 온갖 언어를 동원하여 경외(敬畏)와 동경의 표정을 짓더라도 시는 항상 냉엄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애달픈 시와 시인의 관계가 설정된다. 서양 철학자 비트겐쉬타인은 {파리잡는 항아리}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존재를 말했다. 우리식으로 설명한다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위쪽은 막히고 맨 아래쪽이 작게 열린 둥근 유리그릇에 된장을 넣고 물에 넣으면 아래로 들어온 물고기는 결코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이를 세계 내 존재- 인간은 테어났지만 지구라는 둥근 그릇 속에서 결코 벗어나는 방법이 죽음 이외엔 없다. 잠시 나갔다 들어온 허락도 없고 또 그런 여유도 없는 “속”에서 밖을 동경하면서 미지를 그리는 존재가 인간의 운명이 된다. 우주가 돌지만 도는 일로 살아야 하는 운명적 존재- 내려야 할 정거정에 옷깃을 여미며 작별해야 할 순명(順命)의 길이 곧 삶의 의미 라면 한계라는 경계는 슬픈 일정의 길이 된다. 『도랑 사구 안의 작은 우주』도 도랑 사구 안에서 드러나는 생의 다양한 모습들- 자기를 알면 철학의 완성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는 그림자를 이끌고 터벅일지라도 결코 나를 만나는 일은 거울 속의 나의 형편 때문에 결국은 실망으로 점철 된다. 이것이 철학의 종점이고 시작이라면 시는 이런 의미를 노래하는 탐구자로 이어지는 것이다. [3. 삶의 곡예] 사는 일은 시의 중심 의무이자 최종 종착지를 찾아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명제이고 벗어날 수 없는 숙제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고해(苦海)라 비유했듯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는 일은 고달프고, 슬프고, 참람(僭濫)한 진행이 있을뿐, 찰나(刹那)이고 행복은 잠시의 그림자와 같은 일이 사는 일이 모두일 것이다. 돈으로 해결하는 일도 아니고, 높은 감투로 정리할 일도 아닌 오로지 스스로 힘에 의해서 헤쳐나가는 길이 다가오는 일에 대처하는 삶의 진수일 것이다. [4. 치장의 이미지화] 시라는 것은 장식의 풍경이 되기도 하며 교훈과 훈육의 역할을 한다. 하여 시는 꾸미기 이미지의 기교를 살려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리고 시는 향기가 있고 상승의 기류를 타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올 때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시적인 넓이는 철학적인 암시를 상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펄럭이는 기쁨 또한 예외는 아니다. 또는 시를 치장하고 이미지화 시킨다 해도 가식적이거나 자기 마음의 정서가 없다면 독자의 감동받을 수가 없기에 항상 정열과 열성을 다해 신념을 갖고 응축과 다변화의 길을 열어야 하며 세상을 밝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인이 온 세상을 깨우치게 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기에 언어를 재료로 삼아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에서 원인을 찾아 치장해야 하며 이미지화를 그리는 것이 시인 것이다. [5. 에필로그] 시는 정서의 다양화 감각을 통해 만나는 체험이며 때론 이미지가 사상 논을 가질 뿐 아니라 철학의 가치를 남기는 인생의 해석자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시는 단순한 문자의 조립이 아니라 시어 속에 강한 신념의 에너지를 가질 때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인은 언제나 세상의 희망의 불을 태우는 인도자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작고 낮게 보일지라도 언제인가를 위한 씨앗을 놓아야 하며 여기서 다양한 생의 해석이 시적 장치를 동원하는 기교가 필요하고 치장을 어떻게 구상하느냐의 체험을 상상과 창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시인의 영역을 넓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수성은 시인의 영원한 동반자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는 사물과 대상의 이미지를 유연한 표정으로 바꾸는 정서현상이지만 때로는 딱딱하고 굳어진 것을 용해하는 정서의 촉매를 가져야 할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에너지를 보급하는 통로를 확보하여야 한다. 어찌보면 시인은 새로운 표현을 찾아야 하는 방랑의 여정을 갇추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사물 관찰법과 표현의 기교를 숙고하는 일이 선행 되어야 할 것이다. 기실 육체적으로 나이가 들면 같은 용어를 되풀이 하는 것도 굳어진 의식 탓으로 돌릴 수 있기에 글을 쓸 때마다 조심스럽다. 그렇기에 감수성과 정서의 감각적인 이미지관리를 예지적인 고뇌를 언어로 포착하여 풍경화 같은 숲은 만들어야 하는 시가 가장 아름다운 시이며 독자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3.02.2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빛과 풍경의 애너지] [추억의 굴레] [이승섭칼럼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이천 흙 속 진주 연꽃단지 성호호수에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진보라는 말은 작금에 공공연히 사용되는 말이며 아니면 좌파라고도 한다.지금은우파 <국수적>, 좌파 <급진적>로 나뉘어 서로가 정도라는 일반적인 수사로 현재 사용되고 있으며 좌우 갈등으로 인한 사회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실 공산당은 뿔 달린 괴물처럼 금기시되던 말이 현재는 리버럴주위 <자유주의> 시대 앞에 고민하는 사람쯤으로 허용의 폭이 매우 넓어졌다고 생각하지만이번언론매체를 보면서한국사회도 자생간첩이 생겼다는 뉴스에 경악할 노릇이다. 물론 우리의 정신 공간이 성숙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한 다양성의 사회를 뜻할 수도 있겠지만 자생 간첩만은 이해가 안 된다. 엄연히 남북 대치 상황과 정전협정 상황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지금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자유경제 바탕으로 이루어 나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에 경도되어 소리치는 좌파들의 목소리는 여전하기에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1960년에 나타난 소위 민중문학의 잔치가한창이 던바 21세기 들어서 이제는 노골적으로창궐하는자생간첩이라니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느 정치가는 21세기에 대한민국에 무슨 간첩이 있겠냐며 하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민중문학의 당위성으로 오도된 이 현실을 보면 민주화, 민중, 통일, 민족, 요즘엔 중도 등의 현란한 변화가 과연 오늘날 정당성이 담보할지 모르지만 이것은아니올시다.이다 애매모호한 문학은 이제는 아니다.라는 말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5년을 보았으면서도 사상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반쪽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다. 가장 극심한 시절은 김대중, 노무현을 거처 문재인 정권에 와서는 그들의 민족문학이라는금과옥조의 간판조차 명칭을 변경하고 백낙청, 황석영 등에 의하여 최고조를 달렸다. 더구나 백낙청은 2009년 3월 도하 신문에 “우리의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 통일은 수단일 뿐”이라는 표제하에 “분단으로 이득을 보는 세력 남한에도 북한에도 있어 건전중도세력 형성되어야”를 주장하는 면모를 보였다. 문화 정신이 줏대가 없는 정책에 화해, 통일인지는 모르나 기막히게 그들의 또 다른 잔치가 되었다. 우리의 문학이나 문화는 좌파 시대나 우파시대를 지나도 이들의 활동무대였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은 정신이 나간 청맹과니의 신세처럼 보인다. 현재도 북한은 우리를 적이라 하며 미사일을 쏘아대고 툭하면 핵으로 위협하는 실정에 있다. 좌파들이 어떤 숨겨진 의도가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수 백만명의 동포가 굶어 죽어가도 핵을 만들고 미사일을 발사하고 꽃다운 젊은이들이 꽃제비로 팔려가는 슬픈 북한의 실상을 보면서도 북한의 지령을 받고 간첩 활동을 하다니 참으로 이율배반이고 끼리끼리 만나 외국에서 북한과 접선을 하고 있다니하루빨리 검거하여 바른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곧추서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은 개인 돌출이라 볼 수 없으며 조직적으로 암약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물론 좌파 문학에 심취한 지식인들도 시대에 따라 우후죽순으로 자생되었지만 경도된 문학은 한계가 있다.대부분 선량한 작가들과는달리다른가치의 이념은기준<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으로 가서 작가를 해야지 왜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고 혼란을 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진보의 작가는 이문열의 소설을 폄훼하여 거론하지만 이런 말은 확실히 잘못된 아집의 발언이다. 그렇다면 비난하는 자의 시는 잘된 작품인지 묻고 싶다. 특히 문학과 예술은 볼세비키혁명에 의한 지도적 전위들이 이끄는 급진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복무해야 한다는 문학론.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 문학론으로, 한국 문학에서는 1930년대 초 카프 문학 운동의 이론가였던 임화, 안막 등이 주창 하였던 바 해방 이후 대한민국 많은 지식인들이 볼세비키혁명에 의하여 중국, 러시아로 유학하여 경도된 문학으로 사상의 정신이 바퀸 문제도 있지만 참으로 근대사 역사를 보면 너무나도 슬픈 역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세기도 안되어 세계 10위라는 금자탑을 세웠던 것은 지도자들의 혁혁한 공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와중에 독재, 민주화라는 문을 넘어 지금 같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한때는 필자도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거리로 나선 적도 있지만 막스주의, 레닌주의니 하며그때만 해도 경도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긴끼리끼리 모여 단파방송을 몰래 듣는 친구도 있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남북이 대치된 사회이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민주화란 이름으로 경도되는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시인이나 작가들이 생산하는 작품은 그 나름의 개성과 표정을 가진 살아있는 얼굴들임을 알아야하겠지만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문학을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문학은 문학적 가치로 인정을 받아야 함에도 아직도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사회적 혼란과 문학을 이용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2.자식을 먼저 보내는 참렬(慘烈)의 창작』 죽음이란 참으로 참담한 슬픔이다. 그것도 자식의 타계를 앞서 겪어야 하는 어버이의 헤아리기는 그 당사자가 아니라면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정지용의 『유리창』이나 허난설헌의 『곡자』 같은 작품은 자식을 보내는 비참한 심정이 가슴을 적신다. 황금찬의 『목련꽃』은 참열이 묻어있는 시이다라고 하겠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 집 앞에/목련 두 구루가 서 있다./키가 좀 크고 가지가 적은 나무는/백목련/키가 좀 작고/가지가 많은 나무는 자목련이다./해마다/목련 철이 되면/도제가 와서/목련꽃 시를 쓴다면서/반나절씩/꽃나무 밑에 섰다가 가곤 했다./금년에는 꽃이 다 지고 말아도/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울고 있었다./내가 아니고/꽃나무들이다./눈물도 울음소리도 없이우는/목련꽃나무/시인이 간 그나라에도/목련꽃이 피어 있겠지//내게 그 소식/전해달라/시인아. <황금찬 『목련꽃』> 시인 황도제- 자식의 죽음이 주는 통증을 감추면서 시를 쓴 것이다. 이는 절제의 미학이 되겠지만, 이를 감내하기 위해 안으로 흐르는 눈물의 추억이 고스란히 보인다. 이미 가슴에는 흘러넘치는 아픔과 슬픔이 노 시인의 마음을 의탁하는 목련꽃의 “눈물도 울음소리도 없이” 시나브로 떨어지는 꽃잎의날림 앞에서 처절한 정경이 보이는 듯하다. 그때가2010년쯤인가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용인신갈그때 당시에 같은00 아파트에살고 있었기에 더욱 생각이 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정상으로 떠나지않았지만 떠나간 시인은 소식을 보내는 방법이 없을지라도 사랑으로 지켜본 자식에 대한 연민은 “내게 그 소식/전해달라./ 시인아.”의 절규에는 허공에 씁쓸한 메아리 되어 귓전에 울리면서 가슴으로 파고드는 피 울음인 것을,어찌 위로할 수 있겠는가? 행사 때 이거나, 문사원 대학에서 강의와 축사를 하면서도 황금찬 시인은 일절 입을 굳게 다물고 내색을 하지 않았다. 황금찬 시인은 이천 문사원 대학에서강의도 듣고 스승이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님을 밝혀둔다. 인간의 호기심은 늘 미지의 공간을 위해 모험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앞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대답이라는 것은 씁쓸한 비유 앞에 홀로 서게 된다. 시는 이러한 이치를 에둘러 스스로를 말하는 독백의 길에 나설 때, 시의 깊이는 함축되는 것이다. 인간이 새가 되거나 꽃이 되거나 결국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방법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엠비규어티 <모호하다>라는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날아가는 새들이/그리운가 보다./닿지 못하는 하늘이기에/ 되돌아왔다./하늘을 날다/되돌아와서는 /지치어/나뭇가지에 앉아/두리번거리는/새들이 저마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 지치고/지친 나머지 인간은 길을 떠나 만들고 또 되돌아오는 일로 일생을 가늠하는 것이다. 설사 멀리 떠난다 해도 결국 종말에는 되돌아오는 여정에서 나그네라는 운명을 감내하는 것이 고작이다. “새도 인간으로 환치하면 무한으로 길을 떠났다. 결국 ‘날개짓 하다 지쳐서 확인하면 고작 <나뭇가지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일- 지치고 지친 새가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는 데에는 새도 동물이라 가만히 지켜보면 그 나름의 행동을 보면 나타난다. 그것이 인간아니 시인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안목이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촉을 가지고 있는샘이 아닌가? 이것은 시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행동 촉, 상상할 수 없는 창작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개인적 촉으로 사물과 동물을 바라보고 창작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시인들만의 촉을 발휘한다 할 수 있겠다. 시인은 상상의 나래를 얼마나 펼칠 수 있고 그 사물과 행동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순전히 개개인의 능력이고 창작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시인은 외롭다 할 수 있겠고 또 다른 시인은 여유와 낭만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보는 각도, 창조하는 기교에 따라 모두 다를수 있기에 시인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허무라 할 수도 있고, 도로(徒勞)라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지친 상태 앞에 무기력해지는 자화상의 발견일 것이다. 그러나 길을 떠나는 연습이지만 제자리로 돌아와 자기 앞에 설 때, 비로소 삶의 깊이는 성숙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새들은 하늘로 비상하는 꿈을 가질 때, 새의 운명은 아름다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모습 또한 저마다의 자리를 소유하고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함축과 응축의소산이라여기며에필로그한다. 2023. 02.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거제 장승포항] [보령시 달빛 등대]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詩)가 주는 효과는 어떤 것인가를 묻는다면 시(詩)를 쓰는 목적에 근접하는 말이 될 것이다. 토마스 만은 예술가의 임무는 생기<to animate>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 예술은 선(善)에 가깝고 친절성에 뿌리박고 있으며 화합을 위해 단지 위안(慰安)일 뿐이라는 말이 기억난다. 왜 그런가 하면 거창한 목표에 헌신하는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기력한 허무주의자의 독백도 아니다. 생기와 즐거움을 이어주는 단순하고 더러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여기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삶의 이야기에 무목적이 아니라 상상으로 떠나는 이상의 꿈이 첨가될 때 조미료의 맛깔스러움은 배가 될 것이다. 시인은 무료의 심심풀이 풍선 띄우기가 아니라 꿈을 담아 대상에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3~4가지의 조건이 있을 수 있다. 『2. 시의 구축 또는 왜』 관(觀)이란 말에는 “‘보다 자세히 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 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무슨 일을 할 경우, 우선 정립되어야 할 대상에 대한 목적의식이 선명할 때 결과는 더욱 명확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다. 시(詩)를 쓰는 것도 목적에 대한 정립이 있을 때의 경우와 없을 때의 경우는 확연하게 대비가 된다. 전자의 경우엔 언어의 조합일 뿐 이리저리 무엇을표현하려는 목적에 대한 햇갈림이 나타나고 후자의 경우엔 비록 짧은 응축의 정결함에 언어의 의미의 숲은 이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작정 길을 걷는 나그네와 목표를 정하고 길을 간다는 비유이며 무엇을 의미로 구축하는가의대한 자문자답이 있어야 하며 그다음 대상을 정하고 관찰, 투시하고 문자로 의식을 표현하고 서술하는 것이다. 사실 나이가 들면 과거 지향형이 되며 앞에 있을 것에 대한 기대보다는 과거형 추수의 길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지나치면 나태의 그물에 걸린다는 문제는 살아가는 문제의 개성의 문제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아, ~ 고향에 돌아와 혼자 여기 서 있네}. <신중신 귀향 시초에서> 어린 시절에 뛰어놀던 기억은 나이 70이 훨씬 넘어 기억은 여전히 기억 흔적에 매몰된 시심이 아쉬움으로 넘쳐난다. 넓고 길었던 골목이 “기껏 스무 걸음 남짓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어 “파릇파릇한 고개를 넘어 쳐들었네”의 모아들고 지금은 “목이 쉰 노래”를 허공에 빛바랜 꿈의 파편으로 회상의 길목을 지키는 오늘의 모습이 처연한 듯하다. 깊음이 깊어지면 허무가 되고, 어느 것도 구분하기 어려운 추상의 숲을 소요하는 귀향의 품- 노년의 신중신 시인의 모습이 차라리 친근함으로 다가든다. 시는 원래 진솔함의 문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접신(接神)을 만나는 신명(神明)』 하늘과 땅의 신령이라는 의미가 바로 신명이다. 시인은 접신(接神)을 만나야된다고 묻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하면 신명이 잡힌 사람이 접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더 풀이한다면 시인은 산문(散文)작가와는 달리 신들린 집중력을 가질 때. 시의 모습은 신기루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무당이 신이 절정에 올랐을 때 날카로운 작두날 위에 맨발로 서서 주술을 외우듯이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전기가 통해도 전류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그것이 알고 싶다>는 실험이 있었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일이야말로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관습에 젖은 일반적인 사람은 불가능할 것이라면 간단하게 정리가 될 것이다. 타이타닉호는 “보이는 얼음”에 충돌하여 비극을 맞았다. 얼음덩어리는 70%가 물속에 있다고 한다. 이를 간과했기 때문에 충돌 참사가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시인의 의식은 바로 무의식의 깊이를 발굴하는 사람의 이름이다. 물론 산문을 쓰는 사람은 현상의 리어리티- 보이는 것을 얼마나 실감 나게 묘사하는 방법을 기술하는 작가와 시인은 이런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후 어떻게 무엇을 에 목적의식을 두면서 살아간다. 전자는 방법의 문제요. 후자는 대상에 대한 구분법이 될 것이다. 시 쓰는 일에도 이런 구분의 명확성이 곧 어지러운 상태를 벗어나는 첩경일 것이다. 더러는 비비고 핥기도 하면서 꼬리도 만들어 흔들여 보는 것이다 세상 한번 편하게 살아보는 것이다 <최영욱/달콤한 상상>에서 어려운 것과 쉬운 것에 차이는 자기 자신에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중심 잡기의 생은 기준점이 필요하고 여기서 개성은 더욱 필요의 항목일 것이다. 비유로 논하자면 개처럼 핥고, 고개 숙이고, 유순하게 사는 것도 도처춘풍(到處春風)의 인생을 일어 개 같은 놈이라 칭하면 욕이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가 없을 때 받는 통칭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살면서 명예를 얻으면 그 가치는 짧은 것이며, 정신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면 명성이 길게 따라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들의 지조는 당시에는 고관대작의 삶이었으나 그 자손들은 숨기고 감추면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명백해지는 것 아닌가. 우리는 그래서 정신의 중심 잡기가 필요한 목록이다. “달콤”의 망상은 쓰디쓴 아픔이 된다는 것을 모른 다면 역설의 기교가 시인의 의도다 『4. 토운<tone>의 일체화』 시의 가장 중요한 목록은 대상과 시인의 의도가 하나로 통합하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표현하려는 사물, 대상을 어떤 의도로 충실하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의 여지는 시적인 기교를 넘어 재능으로 귀환하기 때문에 언어의 기교지만 이는 정신의 중심을 뜻하고 목적의 하나가 되기라는 점에서 일체화는 동일성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언어, 리듬, 이미지, 상징, 세제, 비유의 모든 것을 일러 토운<tone>에 충실할 때 시의 신맛 단맛의 색깔이 살아난다. 가령 아래에 시적 구절을 보기로 하자. 내 신발은 젖었지만 그림자는 젖지 않았다 그림자가 내게 자유를 명령했다 몸살이 시작 된다. 아직 이른 봄꽃 나무처럼 <그림자가 명령했다>에서 주인공인 나는 또 하나의 나인 그림자를 끌고 다니면서 산다. 이 녀석을 떼어내기 위해서 온갖 음모를 꾸미고 벼랑에서 밀어도, 어둠에 갇혀도 다시 일어나는 숙명의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이 그림자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존재의 형상으로 깨닫고 바라볼 때는 새로운 자각의 길이 존재 문제로 부각 된다. 여기서 무심히 사는 사람과 시인의 통찰이 주는 삶의 무게는 완전히 길을 달리한다. 시인에게 필요한 사물이면 관찰기는 곧 시에 신선함을 부추기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5. 미상불의 신념』 시와 신념은 불가분의 개성으로 “무엇”에 해당 될 것이다. 시를 싣는 모든 책에서 공통적인 현상은 음풍농월(吟風弄月)의 그저 그 풍경의 연출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지만 자기 선전광고를 작성하는 것에 불과한 뜻이라 보는 것이다. 이는 시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감상적인 덫, 이미지 사용의 장식, 관념이나 의도의 지나침, 모순이나 충돌이 내포된, 지나치게 종교적인 강조는 안 좋은 시의 표본이라는 지적은 학자들이 강조하는 요점이다. 미상불 시의 신념은 자기 정신 중심을 세우는 일이라 시의 표정에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를 관찰하는 요인이 된다. 눈물 씨앗 뿌려도 아직도 통일의 꽃 굳은 땅속에서 몸부림치며 싹을 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에서 한때 지금도 그렇지만 민중타령의 놀이에서 문단의 중심을 장악하고 80년대를 풍미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통일의 문제는 유행처럼 아우성이었지만 막을 내리기 시작하고 목적의식이 공고하지 못하고 유행의 결론이 되었다. “아직도”에서 분단의 아픔은 진행형이고 언제 꽃으로 피어날 것인가는 지금도 요원하다. 체제의 선전 도구일 때 광고 문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통일이라는 맹목적 타령에 문학은 상업성에 매체에 휘둘리는 지경에 까지 오고 있다. 이제 문학 가치에 방점을 찍을 때, 참된 가치의 문학이 꽃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의 제목처럼 “아직도”는 유행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본질로 눈을 돌려야 할 책무인 것이다. 무작정 통일을 기대하는 것 보다는 내실을 튼튼히 하고 서서히 탑을 쌓아 대국적인 차원에서 정부와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통일을 위한 염원은 진정한 우리 민족의 꿈이라는 갈증이 인상적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다른 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라는 필자의 견해이면서 이만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2. 03.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초록으로 물든 눈밭 캐나다 옐로우 나이프] [찰나의 순간 아이슬란드 다이아몬드 비치] [이승섭칼럼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모두들 자신들의 삶을 바라보면 우선 후회와 더불어 찾아오는 의식의 발견에 직면하게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발전의 의미이고 자기 각성의 길을 확보한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돌아보는 일이라면 나이와 깊이 상관관계가 있으며 체험의 축적이 어느 정도 쌓일 때 지혜의 성을 구축할 때, 비로소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즉 젊음이 있을 때야 가속도로 달리며 길 찾기에는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의 언덕을 넘으면서 자연스레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정서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즉 주름살 깊은 모습을 보면서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검토하기에 흰머리가 보이고 잘못 살아온 인생의 후회 또한 겹치고 스크린 되어 검은 강으로 흐르는 의식의 소리가 새벽을 흔들고 있을 때 “허망의 덩어리”에 짓눌러 살았던 지난날들에 보내는 연민이 애절해지는 것이다. 찾고, 쌓고, 높이려는 이기적인 삶을 돌아보면 모두 헛것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무념무상”으로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에 눈을 뜨지만 이미 지난 바람 소리의 행방을 결코 찾을 수 없는 현재 - 고달픈 여정의 자화상엔 또 다른 강물이 흐르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갖는 심사(心事)이겠지만 돌아보는 길에서는 아픔이고 돌아오는 것은 허무라는 생각으로 오늘을 확인하는 것이다. 유난스럽기까지 하지만 여기부터 방황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논어』 양화 편에 보면 공자가 아들 백어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사람은 마치 벽을 보는 것처럼 같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시인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다. 융통성 없는 답답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를 알아야 한다는 이 말은 감정과 사리 분별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시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시를 모른다 해서 세상을 살아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일 또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이라는 의미에는 아무래도 시를 알고 세상을 너그럽게 보는 안목의 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공자는 세상을 가장 힘겹게 살아온 아버지이자 성인으로 자식을 향한 지혜로운 부탁이다. 아울러 시경(時經)에 소재한 시 305수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의 표현에서도 그가 어떻게 시를 접했고 일상의 진실한 삶과 시의 연관을 얼마나 중요 시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시는 진실이라는 방패를 갖추어야 그릴 수 있고 진정한 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 고정관념의 잣대로는 사물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험의 강에 이룰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시는 현재의 모범이 될 수 있고 미래의 안목 가치를 창조할 수 있기에 시는 생명의 영원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자연과 사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다르다. 그렇기에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방법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분석하는 일은 단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복합이라는 데서 오랜 시간을 두고 관찰하는 일이 우선이겠지만 대별한다면 동양, 서양적인 태도 또한 저 아프리카 쪽의 삶도 귀중한 요인이라 하겠다. 사실 문화적인 흐름은 서양과 동양으로 대별했던 관례에 따른 차별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에서 차이는 동양은 묵언 수양, 또는 침묵으로 전달하는 기교가 우선이라 한다면 서양은 행동 양식으로 증명하는 일로 질서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옛날로 뒤집어보면 종교적인 현상이 지배적인 요인이라는 판단의 근거에서 언어의 표출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상은 두 개의 질서 속에서 세분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결국 문학이란 서양적 표현의 기법과 동양적인 표현의 기교적인 차이는 필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삶의 재료가 소재로 작동된다는 것에서 본질은 같을 것이다. 다만 방법상에서 차이는 삶의 원리에 궁극을 찾아 나서는 데서 나오는 것이 해답이 된다는 일치점을 예외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기교란 본질에서 직접 닿기 때문인 것이다. 한가지 부연할 점은 서양의 Rheroric은 웅변의 뜻에서 출발하여 예술로 생각했던 서구의 사고와 동양은 애당초 침묵으로 전달되는 이심전심의 차이에서 동양은 말과 기교에 발달 논리가 부족했을 지라도 인간 사고의 본질을 나타내는 차이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석가모니와 예수가 똑같은 결론에 답안을 작성한다는 예를 말들을 한다. 제자들과 소요하다 연못에 핀 연꽃을 들고 석가는 그냥 빙그레웃었을 때-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웃었고 다른 제자들은 무슨 의미인가를 몰랐다. 이러한 예가 “염화지중”의 미소 답안이라면 예수는 아마도 연꽃 앞에서 “제자들아 이리 모여라” 이 연꽃은 더러운 흙탕물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꼬을 피운 것처럼 너희들도 열성으로 기도하고 따르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요지의 말을 가정한다면 논리와 함축의 차이- 그 본질에 교훈은 같을 것이다. 방법의 차이는 결국 본질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는 “이지지”라는 말은 시론에 가득 들어있는 말이다. 동서양의 시를 막론하고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지를 구사하고 창조하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겠다. 시는 이미지 구축하는 것이 정서의 답이요. 이미지로 시인의 정서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특징을 삼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소설은 묘사라고 한다면 시는 이미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무를 갖는 언어의 표현이라 이 점에서 시의 이미지는 다양하고 공통된 정서의 집합을 이루는 특징 구유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같음에도 유사한 생각, 또는 표현에 일치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민족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이론- 사고와 판단의 차이가 엄존하는 이질성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2.『휴머니즘의 사랑』 사랑은 결합을 위한 갈증인 것이다. 휴머니즘의 거리가 좁혀질 때 비로소 사랑의 발생은 문을 열고 갈증이 애타는 그리움으로 변모하고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거리가 발생 되고 그 거리를 유지 혹은 단축하려는 현상을 삶의 본질이라 정의한다면 갈증은 지정된 대상에 가까이 하려는 마음이 사랑으로 진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갈증이고 그 갈증을 어떤 태도로 바라볼 것인가의 따라 표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마음의 거리감으로 생각하는 거리와 실제의 현실감에서 바라보는 거리에는 욕망이 발동될 것이고 거리의 소멸은 존재와 대상을 현상에서 말하는 멸각(滅却)의 상태로 진전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을 위한 마음이 발동될 때 비로소 말의; 성찬(盛饌)이 준비되는 것이다. 시 또한 시인의 정신적 갈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대상에 대한 열망 혹은 표현의 일체화를 이루기 위한 거리의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리의 파생은 필연적으로 가까워지려는 심리적인 거리와 또 멀어지려는 의도적인 거리가 있을 수 있기에 대체로 시의 경우 가까워지려는 점에서 갈증에 속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갈증과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원(圓)으로의 순환과 같은 연결이 되기에 사랑의 에너지는 갈증이 있기 때문에 비움이고 또 채움을 향해 에너지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목이라는 단안에서 사랑은 인간이 실현하는 가장 고귀한 덕목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부재를 암시하기 때문에 어둠이고 비극이 되는 이치라는 것이다. 인간과의 사랑 혹은 우주 자연의 모든 대상을 바라보는 휴머니터의 가슴을 갖는 일로 강조된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사랑의 마음은 모든 것을 변화로 이끌 수 있기에 마술사가 될 수도 있고, 또 외롭고 쓸쓸함을 아름다움으로 가꾸는 정원사의 역할로 치환(置換)될 수 있다는 이미지 발상법이라 하겠다. 3. 『자연풍경과 이미지의 꿈, 맥락』 자연이 주는 풍경 이미지는 가장 편리하고 찾기 쉬운 대상이다. 왜 그런가 하면 보고 듣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자연에서 나오며 자연에서의 일부이며 사건이며 삶의 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자연에 들어있는 시가 곧 우리의 문제와 직결되며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단편적인 단일 소재로도 수 편의 시를 창작하는 자연 도구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료(質料)가 삶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 이미지로 구성되는 만큼 인간 모두의 자연풍경 이미지를 어떻게 그리느냐의 시의 근간이 이루어지기에- 꿈도 상상의 이름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로 이해될 때 삶의 길을 넓히고 생의 이유를 긍정으로 생각하는 빌미이기에 꿈이 있는 사람은 건강하고 정서 이유가 명확하게 조절된다면 많은 시인도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말 꿈이 명료하고 정확하다면 이는 현실과 구분되지 못하는 잘못일 것이다. 꿈은 선계이며 이 설계는 신념을 가질 때, 꿈은 비로소 현실로 이끌려 나오는 속성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꿈은 모호하고 암담한 색채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꿈을 갖는 것은 신념의 공고화를 요구하고 또 찾아 나서기 위해 고된 일상의 언덕을 넘고 또 넘고 하는 것이다. 쉽고 편안하고 안정된 곳에서는 꿈은 나래를 접고 보이지 않는다. 안개, 호수라는 희미한 곳에서 다가오는 신념의 이름은 꽃의 향기를 대동하고 무지개색을 연출하는 장관이 될 수 있기에 자연의 꽃과 꿈이 보석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살아간다는 삶의 이름은 누구나 무거운 것이기에 이런 이유로 짧고 빠른 길을 염원하고 있지만 인생의 길은 그런 소망을 들어주지 않는다. 정직하고 솔직함에는 먼 길일지라도 삶의 자세가 아름다워진다면 시인의 정서는 그런 자리에 서있기를 고집한다. 어린시절의 이미지가 오늘을 지탱하는 깃발이기에 산속의 물소리, 그리고 벌, 달, 바람 등 자연의 모습은 천연의 시가 되는 재료가 되기에 삶이라는 말에는 방법의 문제가 담겨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 따라 다니는 철학이자 숙명의 과제물인 것이다. 계절과 새, 그리고 싱그러운 자연의 풋풋함이 시인의 정신을 맑고 꿈과 만나게 되면 환한 길로 인도하는 것 같은 모습, 다음 시로 위안으로 삼는다면 사는 일이 희망으로 발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꿈을 가지면 삶과 인생이 썩지 않고 싱싱해지는 소금의 빛이 되기에 꿈은 늘 그런 방향으로 지시하고 일러 주어야 멋지고 깊이가 넘치는 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속에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은 겉으로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의 이미지가 내면으로 꾸밈이 없어야만 살아나는 이미지로 결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동초의 시련을 감내하는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묻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하여 진정한 삶은 성실하고 바른 삶 가치가 더욱 고귀한 이유로 돌릴 수 있다. 인생 평가는 이름의 무게나 걸쳐진 의상이 아니라 내면 가치로 환산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4. 『고독 그리고 허무주의』 고독과 허무가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것은 나이의 깊음을 감지한 시심이 그런 방향으로 지향하는 정서가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허무란 인간이 맞이하는 궁극의 지점에서 느끼는 공통성에 있다. 왜 그런가 하니 인간의 지혜는 시작과 끝을 느끼는 예지력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젊은 날의 열정과 노년의 지혜에는 삶의 흔적이 축적되었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습득했기 때문에 노년에 이르면 나이브 하고 처연(悽然)함에 젖어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살아갈 시간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이 교차하기에 삶의 모습이 부드러워지고 느슨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고 돌아와 그 소득의 명세서를 보면 정작 어떤 것도 없다는 공(空)이라는 바닥을 실감할 때 돌아보는 길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여기에 허무가 짙은 음영을 그리면서 출몰하게 된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꽃이 핀들 꽃이 진들 무아지경으로 모든 것 가고 있는데 무슨 생각이 필요하겠나? 파라다이스가 있을 것인지 황홀경이 있을는지 허무로 모든 것 떠나가는데 이제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부자인들 가난뱅이인들 보이지 않는 작별인 것을 무슨 꿈이 필요하겠나? 이제 놓친 것 잃은 것 얻는 것 무의미로 지난 세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것을 <흔적의 세월> 지나가 버리고 떠나 버리고 작별인 것은 세월이 만든 사연이라 이러한 사연은 곧 허무와 고독을 불러오는 이름인 것이다. 이런 시인의 정서는 자연스레 마음이 공허하고 약해지는 자아를 키우게 되고 모든 것들이 떠나간 그리움과 작별의 아쉬움 그리고 부재에 따른 절망이 자리하는 시간 허무는 그렇게 스미듯 찾아오고 출몰하는 원인은 삶의 고달픔이나 아픔이 아니라 자연스레 찾아온 이유 나이는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와 가슴을 적시는 현상 때문에 작별이나 이별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는 이유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란 자괴(自壞)의 마음을 가져왔고, 다시 돌아보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것이 상정(常情)인 것을 어찌하리오. 5. 『Humanism』이란 <사랑의 가치>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시인의 임무이지만 이를 어떻게 표현미로 이미지 승화 시킬 것인가는 시인의 재능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사랑을 말하는 혹은 사랑으로 포장하는 점에서 휴머니즘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시가 모성을 바탕으로 진전할 때, 화려하거나 요란한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섬세하고 따스함을 포장하기에 이는 어머니의 마음– 또는 사랑이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모두에 헌신으로 통하고 희생을 앞세우면서 세상을 포용하는 점에서의 아름다움이라면, 아마도 모든 이들의 내면에는 모성애에 대한 회구가 들어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어머니의 태반을 통해서 생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심상을 가장 속 깊게 간직하는 정감이 있다.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귀의처의 공간이 어머니의 이미지라는 뜻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궁극적인 삶의 회귀를 뜻하는 일이며 휴머니즘은 시의 모태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피에로 엄니 날마다 반복이 변죽 되어 횐 종이에 빼곡히 그려보아도 당신의 얼굴 꽃 같은 미소 오간 데 없으이 주름살 백옥에 희생의 시간들이 그릴 수 없어 애끊는 마음만 통증으로 변해 버리고 되돌릴 수 없는 한탄 속에 오늘도 피를 토하는 마음 어찌하오리까? <피에로 엄니> 이승섭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인은 애절함이 절절 흐른다. 특별한 상징의 기법이 들어 있지 않지만 보편성에서 오는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매우 구구절절하다. 분신이 날마다 변죽만 울리는 엉뚱한 말만 하시는 어머님을 지켜보는 이는 사실 다시 일어나시기 어렵다는 무 희망 속에 애절함이 절절 흐른다. 긴병에 장사 없다고 했듯이 벌써 10년을 훌쩍 넘긴 어머니의 긴병을 간호하는 필자는 자식이 어머니의 모습에서 애끊는 마음과 피를 토하는 한탄 속에 원천적 모태 의식을 발동되어 결국에는 자신을 돌아보는 생각 때문에 너무나 안타가울 것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정감은 연민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는 자화상을 보는 것일 것이다. 10년 넘게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는 그 마음 아마도 절벽의 늪이 아닐까? 하면서도 실날 같은 희망에 부모와 같은 인자가 휴머니즘의 일단일 것이다. 6. 에필로그 시라는 것은 이미지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라 한다. 건축술의 일정한 방법은 필요할 것이기에 공간의 미학이나 효율성의 문제는 건축에 가장 중심을 이루는 핵심이라 한다면 시에서는 이미지가 그렇다. 이미지는 곧 시의 생명을 활력으로 전환하는 일이 언어의 평면성을 입체적으로 전환하는 가교적인 역할 또한 외면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의 산, 강, 고향, 부모형제, 여행, 삶의 문제, 사랑, 그리움, 자연풍경, 바다, 등의 범주에 시의 표현이 한정되어 있다. 이는 모든 시인들의 상상력의 범주가 대체로 일치함을 추적할 수 있는 소재들- 모든 시인들의 시에 가장 많은 흥미를 유발하는 절실성과 상관이 있는 이미지의 목록들이다.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접촉하는 대상이 곧 시의 소재로 전환하기 때문에 주요한 대상화가 될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시인마다 관심의 집중화에 따른 선택의 폭은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많은 빈도의 시적 이미지는 거의 비슷하다는 특징이 우리 시의 표정이라는 점이다. 라고 정리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2. 12. 14.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전원의 자택] [소백산 비로봉 정상 부근 고사목(소백산북부사무소 사진제공)]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어느곳에서 어디서 오는 것인가 창조의 길은, 두눈으로 타고오는 구불길인가 아니면 곧은 길 고속도로의 숨가 뿐 길일 것인가? 이렇게 물으면 보일 것도 같지만 결코 그런 대답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하면 누구나 자기 시의 행로를 의문으로 설정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어느 순간에 시심의 발동이 시작하고 얼마동안의 의식의 중심에서 느닷없이 사라지는가를 헤아리기 위해 고심 고심을 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고뇌의 길을 한번도 갖지 않았다면 그 시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의 시를 쓰는 일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자기를 알고 또는 정립(定立)하면서 진로를 설정하는 행로에는 어긋남이 없지만 무작정 길을 가는 나그네는 초라한 행로의 비틀거리는 산물일 뿐 아니라 때로는 환희의 풍선을 타고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하는 이중적인 표정을 관리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소설과 달리 의식으로 엮어가는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인의 이름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잘 알 것이다. 때로는 무의식이 충만한 경우도 있고 더러는 의식의 명확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이퍼의 섬세함도 구분되어야 하는 - 더러는 알 길 없는 단애(斷崖)의 벼랑에서 건져 올리는 시심도 있고 또는 평온의 느긋한 행복속에서 향기를 피어 올리는 경우가 있기에 시는 예측불허의 심연(深淵)에서 확실히 만나는 아니 정의하기 어려운 이름일 것이다 어찌하든 시는 순간보다 더욱 빠른 찰나를 가로지르는 섬광(閃光)같은 이름이라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접신을 만나지 못하면 시를 그리지 못한다는 것을 주문한다. 때로는 두려움과 침착함이 돌 같은 무게를 가져야 한다는 마음을 가질 때라야 시인은 비로소 시를 그릴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러한 조건이 내가 믿는 창조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나만의 어눌한 병일지도 모르겠다. <2. 갈망의 변증법> 얼마전 지인에게 2권의 시집을 보내왔다.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과 읽으라 하기에 천천히 시의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얼마 뒤에 또 1권을 보내왔기에 지인이 사는 곳은 포항이라 이 친구는 많이 쓰고 너무도 부지런한 시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를 이렇게 빨리 쓸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4개월에 시집 1권을 쓴다는 그에게 정말 존경스럽고 우러러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1년에 시집 1권도 상재 하기가 어려울 텐데 1년에 4권을 상재 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접신이 내리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아지경 속에서 쓰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본다. 베개 밑 꿈자리 이라도 시린 밤은 일어나 짧은 시만 쓰자. 9월 상달도 추석 한가위로 접어 드는데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횐남도 태풍이 괴력으로 변하여 한반도 제주도를 향해 사납고 거센 비와 함께 온다는데 안성에 거주하는 나도 좌불안석이다. 초조함으로 농사를 겸하고 있는 나로서는 매년 다가오는 천재지변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이 현실에 정말 마음의 동요가 심해 글을 쓸 수가 없으나 어찌하랴 쓸 수밖에 없는 이 시간 검은 구름이 까맣게 몰려오는 창문 넘어 비 오는 모습에 착잡한 마음이다. (미상불) 나이가 들면 불면이 찾아와 나그네의 밤이 날마다 지속될 때, 가을의 적요한 밤의 길이 때로는 외롭기도 하고 서럽기도 할 경우 - 그나마 시인은 시를 쓰거나 편지를 쓰는 표정이 오히려 불면의 푸른 밤 - 오히려 친근감으로 전환되는 풍경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그 긴 편지는 보내야 할 사연이 아니라 흘러간 사람 혹은 나같이 짧아지는 시름 깊은 지인들의 사념이 일렁이는 편린(片鱗)들 일 것이다. 그 긴 밤을 지나며 다시 하염없이 내리는 창문 넘어 태풍의 고요처럼 잎새 하나 떨리지 않는 태풍의 고요 속에서 거센 태풍을 기다리는 필자가 체념조차 아름다울 것인지 모르겠다. <3. 시의 위안> 시가주는 효과는 무엇인가는 시를 쓰는 목적에 근접하는 말이 될 것이다. 토마스만은 예술가의 임무는 생기(to animate)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 예술은 선(善))에 가깝다. 생기와 발랄 혹은 즐거움을 이어주는 때론 단순하기도 하고 더러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일이 시인의 역활일 것이다.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삶의 이야기에 무목적이 아니라 상상으로 떠나는 이상의 꿈이 첨가될 때 조미료의 맛깔스러움은 배가 될 것이기에 언제나 시인은 무료의 심심풀이의 풍선 띄우기가 아니라 꿈을 담아 대상에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수반된다. 관(觀)이란 말에는 “보다” 자세히 보다. 보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의 의미가 들어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경우, 우선 정립되어야 할 것이 대상에 대한 목적의식이 선명할 때 결과는 더욱 명확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도 목적에 대한 정립이 있을 때의 경우와 없을 때의 경우가 확연하다. 전자의 경우엔 언어의 조합이며 후자의 경우는 짧은 응축의 경결함의 언어에 의미의 숲을 이룩할 수 있다. <4. 상상의 여정> 시는 지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감수성이 시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현학적 욕망의 과시에는 냉소가 발생하지만 비록 눌변일지라도 진실을 내포할때는 소통의 미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시적인 냉철함이나 과학의 칼날이 번뜩이는 자세가 아니라 체온과 체온이 부딪치는 우리네 시골 장바닥의 따스하고 다감한 인정이 스며있는 그런 정서가 시인의 마음에 유려(流麗)한 흐름이다.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도시인 - 도시 체질은 간혹 망각을 앞세운다. 그러나 개울이 흐르고 얕은산 아래 동네에서 친구들과 작은 동산을 넘어 추억을 달리던 기억들은 잊지 못하는 냄새 - 이 후각은 언제나 버리지 않는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고픈 귀향의 에너지는 심장 깊은 곳에서 숨을 쉬는 인자이기 때문에 길을 떠나는 여정이 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언어의 귀향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길 만들기가 시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은 사람이다” 는 말은 블란서 뷔풍의 말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시인이다 라는 말도 외도된 말은 아니다. 시 속에 시인의 전 인생을 투척하고 또 사상과 미래조차 내포된 의미의 숲이 곧 시라는 뜻을 첨가하면 한편의 시는 곧 시인의 모든 면을 파악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에 - <5. 정신의 구축>에필로그 예술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그 바탕위에서 상상의 길을 만들어 미감(美感)으로 처리하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진실이 담겨 있을 때, 감동의 길이 보편성으로 전달되면서 독자의 힘과 신념의 부여가 갖는 내면의 진솔성과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의 중심이라느 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동이란 그처럼 강한 태풍도 될 수 있고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결합에서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꿈을 전달하는 시인의 힘은 여기서 정점을 마련하는 능력자가 된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부추기는 꿈의 제조자는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시는 그런 꿈이 들어 있어야 하며 가능성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전제에서 볼 때 자기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이유가 내장 되었기에 자기애의 확신과 신뢰 찾기는 미래의 문을 향하는 옳은 목소리다. 둘째는 사랑의 중심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를 아는 일은 매우 현명한 도리이다. 왜 그런가 하면 오늘의 표정을 어떻게 나타내는 가는 자기 신념의 줄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우주 만물에서 들리는 소리에 민감한 청력을 보유하여야 한다. 이는 사물의 내면을 통찰(洞察)하는 촉수에서 시심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뢰를 줄 수 있다. 네 번째는 자기의 모습에 확고한 믿음이 전재 되어야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서번째는 문화의 힘과 조국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발성을 우회적으로 말하는데서 나라 사랑의 본질이 시 – 문화의 진수라는 강조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런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분리하면서 다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를 보내는 시가 되어야 한다. 창작이란 쉽고도 어렵다 하지만 서두에서 말했지만 접신(接神)을 만나야 깊고도 독자들에게 공감이 가는 시를 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자 하면서 필자의 책임을 내려 놓아야 겠다. 2022. 11. 20.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황금들녁 사본 -공정, 정의 사진 1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문학 현상 대한민국의 문학은 농경사회인 18세기~19세기 산업화 혁명의 여파는 급진적 급속하게 인간 문학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어 산업화와 함께 자동차, 전기 등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3차 산업, 4차 산업의 토대와 전기가 마련되었고 1943년 컴퓨터 등장과 1976년 스티브 잡스의 위즈니악이 차고에서 PC의 발명은 인간의 문화를 획기적인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컴퓨터의 출연으로 터치의 문학도 급속도로 전환 되었다는 점이고 여기서 우리가 관과 할 수 없는 현상은 Pen문화에서 Power⤍Man의 중심문화가 컴퓨터의 자판- 터치로 넘어오는 시기에 여성의 중심으로 전환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전환점을 맞는다. 사회 전반의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졌으며 모든 분야에서 석권하는 이유는 Power의 남성이 아닌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역할이 터치의 역할로 컴퓨터의 자판에 유리한 여성의 장점에서 더욱 눈부신 장점으로 발전할 수 있다 볼 수 있겠다. 문학의 발전 속도는 100년이라는 단위에서 30년을 지나 컴퓨터의 등장으로 단 3년이면 과거의 100년 변화와 맛 먹는 진전을 이루어 있고 점점 짧아지는 추세를 감당하고 어려운 복잡한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이른바 4차 산업 혁명의 여파를 운위하는 중심에는 AI와 인간의 문화 - 기계와 인간의 문화 현상이 나란히 동행하면서 진행 되어지고 있다. 심지어 종교 조차도 금기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지구를 움직이는 서방국가들과 주도적으로 기술이 앞서 나가는 미국, 영국 등은 AI라는 종교까지 등장했다고 몇 년 전 들은 바 있다. 오늘의 인간은 점차 신(新)원시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미국의 IT매체인 외이어드(Wired)sms 구글 출신의 엔지니어 앤서니 래반도브스키 (41.Anthony Levandowski)가 “미래의 길”(way of the futer)이라는 이름의 AI 교회를 설립했다. 교회의 목적은 “인공지능에 기반에서 신격의 실현을 개발하고 촉진함으로써 사회발전에 기여 하고자 한다고 한다.” 이 교회는 구글에 재직하고 있던 2015년 09월에 설립, 종교단체에 부여되는 면세 혜택을 당국에 요청하면서 2017년 실체가 밝혀졌다. 인공지능이 설교하는 것은 아마도 정치(情致)하고 합리적인 설교에 빈틈이 없을 것이라는데 이른다고 하니 모골이 송연하고 아찔하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니, 기미스 히사비스가 개발한 알파고와 바둑대결 이후에 여러 분야에서 경천동지할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05년 저술한 <특이점 singulalty>에서 2029년에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춘 컴퓨터가 등장하고 2045년에는 기계가 인류를 넘어서는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이런 추세를 추적하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직업군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인간 대신에 컴퓨터가 수술을 하고 변호사, 판사, 회계사, 금융사무원, 의사의 직업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사물 인터넷전문가, 인공지능전문가, 빅데이터 전문가, 가상현실전문가, 3디 프린팅 전문가, 드론전문가, 생명공학자, 로봇공학자 전문가, 등이 유망직업군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가히 어떤 가상 현실이 올지는 누구도 장담 못할 것이다. 이런 변화의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여지는 기계가 할 수 없는 상상력의 분야는 앞으로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라 누구나 말을 하고 있다. 2. 상상력의 미래 예술은 앞으로 주목을 받을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 소설, 평론, 희곡 등 장르에서는 구조(plot)의 분야- 소설이나 시나리오는 이미 로봇이 쓸 수 있는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2016년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니온게이자이 신문사가 주최하는 sf 소설 공모전에서 1심을 통과했다는 보도는 들었지만 2차에서 낙선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어느 작품이 인공지능 작품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심사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나 수필 등은 살아남을 여지는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시-4600년 전에 티그라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수메르 문화의 유적지에 우르크 왕조 5대 왕인 길가메쉬의 신화를 점성토 636 장에 수메르어로 쓴 서사시인 영웅<길가메쉬>를 필두로 시의 길이 시작 되었다. 이보다 2 천년 뒤 기원전 600~700년 전에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이후 시의 발전은 인간 지혜의 발현(發現)으로 이어왔고, 이제 그런 현상이 4차 산업의 혁명적인 여지는 문학에도 엄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예술에서 가장 보수적인 분야가 문학이라면 보다 속히 그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치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사고는 단순하고 단편적이고 장편을 외면한다. 여기서 시 또한 장시이기보다는 짧은 서정시의 아포리즘적(짧은글)인 현상이 기호를 자극할 것이다. 과거의 명작은 점차 읽히지 않는 추세는 오래된 현상이 되어 버렸고 서정시는 이런 견지에서 문학의 중심을 떠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지 않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서정시의 계보는 매우 장황하다 못해 우후죽순이다. 본격적인 단초는 BC 7세기 알카이오스와 그리스의 노래를 담은 도리아 지방의 여성 시인 사포오와 로마에서는 BC 1세기 카룰로스와 호라티우스가 서정시를 그렸고,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엔 폐트라르카, 섹익스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죤 밀턴 등의 서정시로 14행 소네트의 두드러진 발전에 이어 18세기 말과 19세기에는 낭만파 시인들인 로버트 번즈,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워즈위즈, 키츠, 셀리, 위고, 괴테 등으로 계보가 이어졌고 19세기 말과 20세기는 대부분 서정시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발전의 계기를 이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의 서정시는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로 시작된다. 왕비 송씨가 죽자 화회와 치희를 후실로 맞았으나 질투로 치희가 궁궐을 나간 외로움을 사이좋은 꾀꼬리에 비유한 서정시의 원조가 이별의 노래로 담아지는 내용이다. 5세기 신라의 향가 25수와 고려 가요인 <가시리>와 조선의 3음 중심의 양반 노래인 시조(13~14) 등은 우리나라 서정시의 맥을 이어온 전통의 가락이 아니었나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는 양반들의 시가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 들어 1908년 잡지<소년>에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마리로 주제를 삼지만 이보다 10년 전 1898년 협성화보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고목가>라 할 수 있겠다. 슬프다, 저 나무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서있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백 년 큰 남기 오늘 위태(롭도다) 원수의 땃 짝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조지(쪼지) 마라 조고 또 조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依支)(할꼬)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 박혀 반근(盤根)되면 새 가지 새잎이 다시 영화(榮華) 봄 되면 강근(强近)이 자란 뒤 풍우 불외(不畏)하리라 쏘아라, 저 포수 땃 짝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남글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危亡)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외세<일제시대>를 딱따구리로 보면서 쓰러지려는 고목을 대한민국의 처지로 상징하는 노래는 절절한 애국심이 오히려 어쩌다 시인이 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생각과는 정신적인 집중이 층위가 완전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봄, 부산에서 <전쟁 중의 봄> 연작 시조를 그렸다 강산을 바라보매 진치는 연기 자욱하고 되 기빨 양 돛대 봄 하늘을 가리웠는데 집 없이 떠도는 이들 생쌀만 씹고 다닌다. 거리엔 벽만 우뚝 선 마슬엔 새 밭 메고 전쟁이야 멀건 말건 봄바람 불어 들어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빼어난 한시(漢詩)시인이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50년대 말 창경원에서 전국 시조 대회를 열고 직접 시제(詩題)를 내기도 했으니 대단한 시조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0년대에 오면 김소월과 한용운은 당시 시단의 주류가 아니고 사실은 아웃사이더였다. 설익은 외국 상징주의 흉내로 명맥을 이어온 한국 서정시는 1930년대 후반 “시 문학파와 인생파” 등에 이르러 본격적인 모양으로 출발을 했으며 이러한 명맥이 1960년대의 소용돌이와 70년대 민중문학 소용돌이에서 서정시인들은 위축과 민중문학에 의해 뒤 켠으로 물러난 시대의 강을 넘어왔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민중문학의 맹장들의 거처인 <창비>의 <문지> 등의 중심세력들이 문단의 목청이 너무 큰 사람들이 장악한 한국 서정시의 맥락은 침체와 의기소침, 위태로운 강을 비틀거리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라 보는 것이다. 민중문학의 이론가라고 하는 백낙천이나 고은 등 문단의 거목 행세로 노벨 문학상이라는 허풍을 부풀린 거품의 본질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작품성은 민중 타령으로 작품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휴머니즘의 사상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우성과 민중 이외에는 찾을 것이 없다는 점이 비극 표현의 몰락의 길을 걸었지 않았나 필자는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2017년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Harvey Weinstein을 최초 고발한 애슐리 쥬드의 mee too의 파도에 좌초된 현상이 그 얼마나 허약하고 빈약한지 부풀리기 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은 문학성이라는 것이 생명을 키우는 것이 절대 요소이기 때문에 허세와 풍선은 언젠가 터지는 것이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3. 문학이라는 땅 인간은 자연이 일부인 것이다. 물론 인간 갖고 있는 모태는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의 자연과 하나가 되느냐의 따라서 달라진다. 자연이 주는 일부는 인간이 소유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과 공감을 한다. 그러나 서양의 자연과 동양의 자연은 다르다. 서양은 정복으로의 자연관이며 동양은 조화(調和)로의 자연일 때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르다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본다면 서양의 사상과 동양 사상의 합일점은 4차산업혁명의 여파 속에서 어떤 것이 더 생명력을 상상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현실에 있어 동서양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세계는 이미 하나의 지구촌 생활 속으로 모든 것이 통합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섭의 학문, 통섭의 여파로 문학 또한 그런 경우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의 창조에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딥마인드의 로봇과의 시합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여 상상력이라는 것은 깨우침의 훈련으로 그 높이를 더욱 제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뇌의 인간화를 강조하게 된다. 물론 사고에서 상상을 새로운 시발점이 가지를 만날 수 있고 숲을 만나 상상에서 또 다른 상상의 경지를 가질 때 인간의 문화에 중심 역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상의 원천은 시(Poem, Poetry)를 강조하는 이유가 나변(那邊)은 아닌 것이다. 문학의 출발은 인간의 일을 기록하는 일이지만 본질은 인간의 사랑인 휴머니즘의 영원한 명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세익스피어나 톨스토이 작품을 읽어도 그렇고 위대한 사상가의 작품 속에는 한결같이 사랑의 이름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방법을 말하는 이야기들이다. 허접한 정치에 매달려 이데올로기의 간판도 아니며 타령조의 애소(哀訴)도 아니며 오로지 인간의 본질에 이르는 문제인 사랑의 길을 찾고 말하는 일이 문학의 숙명이자 길이라는 점에서 시는 그런 상상의 원천에 도달하려는 창조라는 점에서 종교를 대신하는 것은 바로 시(詩)다 라는 매쉬 아놀드의 말을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4. 시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 것인지- 아미 로우엘은 “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 ‘모른다’는 단순한 대답이었다. 이는 인간의 창조적인 근원을 묻는 일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시가 서로 모순되는 사상들의 융합인지를 묻는 영국 시인 그레이브스와 미국의 여류시인 새러 티스데일이 말한 흥분과 긴장의 결과요 해소라는 주장과 백일몽에 가까운 심리적인 상태의 몰입으로 말한 프레스콧의 말 등 한가지로 통일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잠재된 신비의 상태를 필자가 보는 견지에서는 접신(接神) 즉 무아지경의 신비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공자가 말한 시경을 두고 시 300수를 한마디로 사무사(思毋邪)라는 말에는 무아경의 깊이가 없고 현상적 사실을 정리한 뜻에 불과 하다고 말들 하지만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의 길을 재촉하는 일이고 독자 또한 시인이 쓴 시를 통해 상상의 또 다른 창조의 추체험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시의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의 상상을 만드는 길일 것이라는데 진리가 되지 않을까? 미래의 문화 현상 또한 밑바탕 위에서 새로움을 구축하는 일이 문화의 근간을 이르는 인간의 절차탁마(切磋琢磨)만이 상상력이라는 결론에서 본다면 앞으로도 시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는 말로 정리될 것 같다고 확신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2. 11. 15.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 시인 [문광호수] [태백 눈풍경] [부여 부소산성(영일루)]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1. 문학 현상 대한민국의 문학은 농경사회인 18세기~19세기 산업화 혁명의 여파는 급진적 급속하게 인간 문학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어 산업화와 함께 자동차, 전기 등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3차 산업, 4차 산업의 토대와 전기가 마련되었고 1943년 컴퓨터 등장과 1976년 스티브 잡스의 위즈니악이 차고에서 PC의 발명은 인간의 문화를 획기적인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컴퓨터의 출연으로 터치의 문학도 급속도로 전환 되었다는 점이고 여기서 우리가 관과 할 수 없는 현상은 Pen문화에서 Power⤍Man의 중심문화가 컴퓨터의 자판- 터치로 넘어오는 시기에 여성의 중심으로 전환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전환점을 맞는다. 사회 전반의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졌으며 모든 분야에서 석권하는 이유는 Power의 남성이 아닌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역할이 터치의 역할로 컴퓨터의 자판에 유리한 여성의 장점에서 더욱 눈부신 장점으로 발전할 수 있다 볼 수 있겠다. 문학의 발전 속도는 100년이라는 단위에서 30년을 지나 컴퓨터의 등장으로 단 3년이면 과거의 100년 변화와 맛 먹는 진전을 이루어 있고 점점 짧아지는 추세를 감당하고 어려운 복잡한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이른바 4차 산업 혁명의 여파를 운위하는 중심에는 AI와 인간의 문화 - 기계와 인간의 문화 현상이 나란히 동행하면서 진행 되어지고 있다. 심지어 종교 조차도 금기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지구를 움직이는 서방국가들과 주도적으로 기술이 앞서 나가는 미국, 영국 등은 AI라는 종교까지 등장했다고 몇 년 전 들은 바 있다. 오늘의 인간은 점차 신(新)원시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미국의 IT매체인 외이어드(Wired)sms 구글 출신의 엔지니어 앤서니 래반도브스키 (41.Anthony Levandowski)가 “미래의 길”(way of the futer)이라는 이름의 AI 교회를 설립했다. 교회의 목적은 “인공지능에 기반에서 신격의 실현을 개발하고 촉진함으로써 사회발전에 기여 하고자 한다고 한다.” 이 교회는 구글에 재직하고 있던 2015년 09월에 설립, 종교단체에 부여되는 면세 혜택을 당국에 요청하면서 2017년 실체가 밝혀졌다. 인공지능이 설교하는 것은 아마도 정치(情致)하고 합리적인 설교에 빈틈이 없을 것이라는데 이른다고 하니 모골이 송연하고 아찔하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니, 기미스 히사비스가 개발한 알파고와 바둑대결 이후에 여러 분야에서 경천동지할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2005년 저술한 <특이점 singulalty>에서 2029년에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춘 컴퓨터가 등장하고 2045년에는 기계가 인류를 넘어서는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이런 추세를 추적하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직업군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인간 대신에 컴퓨터가 수술을 하고 변호사, 판사, 회계사, 금융사무원, 의사의 직업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사물 인터넷전문가, 인공지능전문가, 빅데이터 전문가, 가상현실전문가, 3디 프린팅 전문가, 드론전문가, 생명공학자, 로봇공학자 전문가, 등이 유망직업군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가히 어떤 가상 현실이 올지는 누구도 장담 못할 것이다. 이런 변화의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여지는 기계가 할 수 없는 상상력의 분야는 앞으로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라 누구나 말을 하고 있다. 2. 상상력의 미래 예술은 앞으로 주목을 받을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 소설, 평론, 희곡 등 장르에서는 구조(plot)의 분야- 소설이나 시나리오는 이미 로봇이 쓸 수 있는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2016년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니온게이자이 신문사가 주최하는 sf 소설 공모전에서 1심을 통과했다는 보도는 들었지만 2차에서 낙선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어느 작품이 인공지능 작품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심사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나 수필 등은 살아남을 여지는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시-4600년 전에 티그라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수메르 문화의 유적지에 우르크 왕조 5대 왕인 길가메쉬의 신화를 점성토 636 장에 수메르어로 쓴 서사시인 영웅<길가메쉬>를 필두로 시의 길이 시작 되었다. 이보다 2 천년 뒤 기원전 600~700년 전에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이후 시의 발전은 인간 지혜의 발현(發現)으로 이어왔고, 이제 그런 현상이 4차 산업의 혁명적인 여지는 문학에도 엄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예술에서 가장 보수적인 분야가 문학이라면 보다 속히 그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치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사고는 단순하고 단편적이고 장편을 외면한다. 여기서 시 또한 장시이기보다는 짧은 서정시의 아포리즘적(짧은글)인 현상이 기호를 자극할 것이다. 과거의 명작은 점차 읽히지 않는 추세는 오래된 현상이 되어 버렸고 서정시는 이런 견지에서 문학의 중심을 떠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지 않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서정시의 계보는 매우 장황하다 못해 우후죽순이다. 본격적인 단초는 BC 7세기 알카이오스와 그리스의 노래를 담은 도리아 지방의 여성 시인 사포오와 로마에서는 BC 1세기 카룰로스와 호라티우스가 서정시를 그렸고,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엔 폐트라르카, 섹익스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죤 밀턴 등의 서정시로 14행 소네트의 두드러진 발전에 이어 18세기 말과 19세기에는 낭만파 시인들인 로버트 번즈,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워즈위즈, 키츠, 셀리, 위고, 괴테 등으로 계보가 이어졌고 19세기 말과 20세기는 대부분 서정시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발전의 계기를 이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의 서정시는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로 시작된다. 왕비 송씨가 죽자 화회와 치희를 후실로 맞았으나 질투로 치희가 궁궐을 나간 외로움을 사이좋은 꾀꼬리에 비유한 서정시의 원조가 이별의 노래로 담아지는 내용이다. 5세기 신라의 향가 25수와 고려 가요인 <가시리>와 조선의 3음 중심의 양반 노래인 시조(13~14) 등은 우리나라 서정시의 맥을 이어온 전통의 가락이 아니었나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는 양반들의 시가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 들어 1908년 잡지<소년>에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마리로 주제를 삼지만 이보다 10년 전 1898년 협성화보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고목가>라 할 수 있겠다. 슬프다, 저 나무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서있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백 년 큰 남기 오늘 위태(롭도다) 원수의 땃 짝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조지(쪼지) 마라 조고 또 조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依支)(할꼬)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 박혀 반근(盤根)되면 새 가지 새잎이 다시 영화(榮華) 봄 되면 강근(强近)이 자란 뒤 풍우 불외(不畏)하리라 쏘아라, 저 포수 땃 짝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남글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危亡)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외세<일제시대>를 딱따구리로 보면서 쓰러지려는 고목을 대한민국의 처지로 상징하는 노래는 절절한 애국심이 오히려 어쩌다 시인이 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생각과는 정신적인 집중이 층위가 완전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봄, 부산에서 <전쟁 중의 봄> 연작 시조를 그렸다 강산을 바라보매 진치는 연기 자욱하고 되 기빨 양 돛대 봄 하늘을 가리웠는데 집 없이 떠도는 이들 생쌀만 씹고 다닌다. 거리엔 벽만 우뚝 선 마슬엔 새 밭 메고 전쟁이야 멀건 말건 봄바람 불어 들어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빼어난 한시(漢詩)시인이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50년대 말 창경원에서 전국 시조 대회를 열고 직접 시제(詩題)를 내기도 했으니 대단한 시조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0년대에 오면 김소월과 한용운은 당시 시단의 주류가 아니고 사실은 아웃사이더였다. 설익은 외국 상징주의 흉내로 명맥을 이어온 한국 서정시는 1930년대 후반 “시 문학파와 인생파” 등에 이르러 본격적인 모양으로 출발을 했으며 이러한 명맥이 1960년대의 소용돌이와 70년대 민중문학 소용돌이에서 서정시인들은 위축과 민중문학에 의해 뒤 켠으로 물러난 시대의 강을 넘어왔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민중문학의 맹장들의 거처인 <창비>의 <문지> 등의 중심세력들이 문단의 목청이 너무 큰 사람들이 장악한 한국 서정시의 맥락은 침체와 의기소침, 위태로운 강을 비틀거리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라 보는 것이다. 민중문학의 이론가라고 하는 백낙천이나 고은 등 문단의 거목 행세로 노벨 문학상이라는 허풍을 부풀린 거품의 본질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작품성은 민중 타령으로 작품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휴머니즘의 사상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우성과 민중 이외에는 찾을 것이 없다는 점이 비극 표현의 몰락의 길을 걸었지 않았나 필자는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2017년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Harvey Weinstein을 최초 고발한 애슐리 쥬드의 mee too의 파도에 좌초된 현상이 그 얼마나 허약하고 빈약한지 부풀리기 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은 문학성이라는 것이 생명을 키우는 것이 절대 요소이기 때문에 허세와 풍선은 언젠가 터지는 것이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3. 문학이라는 땅 인간은 자연이 일부인 것이다. 물론 인간 갖고 있는 모태는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의 자연과 하나가 되느냐의 따라서 달라진다. 자연이 주는 일부는 인간이 소유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과 공감을 한다. 그러나 서양의 자연과 동양의 자연은 다르다. 서양은 정복으로의 자연관이며 동양은 조화(調和)로의 자연일 때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르다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본다면 서양의 사상과 동양 사상의 합일점은 4차산업혁명의 여파 속에서 어떤 것이 더 생명력을 상상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현실에 있어 동서양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세계는 이미 하나의 지구촌 생활 속으로 모든 것이 통합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섭의 학문, 통섭의 여파로 문학 또한 그런 경우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의 창조에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딥마인드의 로봇과의 시합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여 상상력이라는 것은 깨우침의 훈련으로 그 높이를 더욱 제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뇌의 인간화를 강조하게 된다. 물론 사고에서 상상을 새로운 시발점이 가지를 만날 수 있고 숲을 만나 상상에서 또 다른 상상의 경지를 가질 때 인간의 문화에 중심 역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상의 원천은 시(Poem, Poetry)를 강조하는 이유가 나변(那邊)은 아닌 것이다. 문학의 출발은 인간의 일을 기록하는 일이지만 본질은 인간의 사랑인 휴머니즘의 영원한 명제를 벗어날 수는 없다. 세익스피어나 톨스토이 작품을 읽어도 그렇고 위대한 사상가의 작품 속에는 한결같이 사랑의 이름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방법을 말하는 이야기들이다. 허접한 정치에 매달려 이데올로기의 간판도 아니며 타령조의 애소(哀訴)도 아니며 오로지 인간의 본질에 이르는 문제인 사랑의 길을 찾고 말하는 일이 문학의 숙명이자 길이라는 점에서 시는 그런 상상의 원천에 도달하려는 창조라는 점에서 종교를 대신하는 것은 바로 시(詩)다 라는 매쉬 아놀드의 말을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4. 시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 것인지- 아미 로우엘은 “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 ‘모른다’는 단순한 대답이었다. 이는 인간의 창조적인 근원을 묻는 일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시가 서로 모순되는 사상들의 융합인지를 묻는 영국 시인 그레이브스와 미국의 여류시인 새러 티스데일이 말한 흥분과 긴장의 결과요 해소라는 주장과 백일몽에 가까운 심리적인 상태의 몰입으로 말한 프레스콧의 말 등 한가지로 통일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잠재된 신비의 상태를 필자가 보는 견지에서는 접신(接神) 즉 무아지경의 신비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공자가 말한 시경을 두고 시 300수를 한마디로 사무사(思毋邪)라는 말에는 무아경의 깊이가 없고 현상적 사실을 정리한 뜻에 불과 하다고 말들 하지만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의 길을 재촉하는 일이고 독자 또한 시인이 쓴 시를 통해 상상의 또 다른 창조의 추체험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시의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의 상상을 만드는 길일 것이라는데 진리가 되지 않을까? 미래의 문화 현상 또한 밑바탕 위에서 새로움을 구축하는 일이 문화의 근간을 이르는 인간의 절차탁마(切磋琢磨)만이 상상력이라는 결론에서 본다면 앞으로도 시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는 말로 정리될 것 같다고 확신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2. 10. 02. 금요저널 주필/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이승섭 시인 {이승섭 시평집}[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 4 시집[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2) [평택호에서 필자]
by 류남신 취재본부장[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를 만나러 가는 길엔 햇살이 유쾌하게 비추어도 좋고 비가 내려도 좋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변화의 정서를 담는 그릇이기에 비가 오면 젖어 찾아오는 그리움이 있고, 햇살은 찬란한 미소가 가슴에 점령되어 희망의 노래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즐거움이거나 아니면 슬픔이거나 시는 늘 인간의 마음을 휘어잡는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기에 사랑을 믿고 또 찾아가는 길이 봄비가 된다. 그렇다고 모든 시가 사랑의 호감으로 포장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시적으로 완성된 이미지를 만날 때, 비로소 눈이 뜨여지고 속삭임이 들리고 희망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지고(至高)한 가치로 의미의 의상을 펄럭이는 향기에 묻히게 된다. 더구나 완성도 높은 시의 숲에 들어가면 황홀한 마음에서 하늘로 오르는 열락(悅樂)의 나래는 삶의 의미를 고상하게 그리고 높은 지향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꿈이 깃드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시는 꿈을 만드는 일이고 시인은 이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투척하여 언어의 조합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에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심지어 콤마 하나에도 열정의 땀이 들어 있을 때, 비로소 시는 눈을 뜨고 독자의 곁으로 다가서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김여선의 시는 사랑과 그리움이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그 본질의 중심에서 다른 정서의 숲을 이동하는 특성이 있다. 하나의 중심에서 다른 정서의 숲으로 가본다. 『2. 의도적이면 길이 보인다.』 ⑴ 사랑 혹은 그리움 인간의 삶이란 단순히 살아가는 것만을 한계로 설정할 수는 없다. 삶이라는 중핵(中核)에서 그 주변을 위호(衛護)하는 여러 요인들이 모아 져서 의식을 형성하고 이 의식에서 자기의 의도가 가미된 행동 양식이 도출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행동 양식은 곧 개성이 될 수도 있고 생활을 이룩하는 특징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개성이란 일종의 이름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중심의 의지가 특징일 때, 커다란 이미지가 누구는 “어떻다”라는 결과로 결정된다. 시인 김여선의 시에 그리움이나 사랑은 곧 그의 삶을 구성하는 인자(因子)중에서도 가장 중심을 이룩하는 이미지로 작동되는 시들이 선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명확하게 정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즉 그리움이 먼저인가 아니면 사랑이 앞선 의미인가에 대한 정리- 물론 그리움이란 아련한 느낌이 점차 굳어질 때, 사랑은 그 뒤를 따라오는 순서가 당연한 질서의 개념이라는 편이 옳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리움의 요소는 대상에 대한 막연한- 진실로 막연한 시작으로 사랑을 불러오는 계단을 점진적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랑과 그리움을 완전하게 분리하는 일은 턱도 없는 것이다. 때로 둘의 이미지는 뒤섞어서 앞서거니 뒤 서거니 하며 교차 감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움은 첫째로 물로 젖어서 찾아온다. 비가 내리는 날에 풀잎은 잎을 벌려 온몸을 씻어내지만 그대는 낯선 그리움 하나 가슴에 몰고 온다. <그대> 시인마다 시적 대상을 의식으로 옮기는 방법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동의 매개체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바람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 혹은 현재 등을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의식의 이동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보오들레오의 조응(照應)(Corres pondences), 발레리의 운율(melodies)나 랭보의 견자(Voyant)혹은 말라르메의 무한(lnfinite)등은 상징 시인의 의식 전달의 수단으로 작동되었다. 이렇듯 시인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막론하고 자기의 정신을 시로 옮기는 수단의 일환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물, 혹은 비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햇살이 밝은 날보다도 오히려 “비가 내리는 날”에 시적 감수성이 그대하는 미지의 대상에 젖어서 다가오는 의식 혹은 기다리는 개념이 교차하면서 시의 행로를 진행 시킨다. 비가 “오면” 풀립- 이는 시인의 상징을- 씻어내는 정화의 개념을 수반하면서 “그대는/낯선 그리움 하나 가슴에 몰고 온다”는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 같다. “오면”의 조건은 그대가 올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날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으로 기다리고 바라보는 마음의 애타는 면이 그리움의 가치와 등가(等價)를 형성하는 이미지가 성립되는 것이다. 시는 대상의 집중화에서 일체화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숨는다. 안개 속에 숨어도 그대는 보이고 은행나무 잎새에 숨어도 나직히 그대의 숨소리가 들린다. 새가 날지 않아도 호수는 그리움을 토해내고 달빛은 사각대는 바람 소리를 삼킨다. 숨는다 아무리 숨어도 그대가 보인다. <그대의 그리움> 중 사랑의 대상이 세상 어디에 숨어도 보이는 눈을 가진 시인의 의식- 그야말로 시를 위한 파파라치라는 명찰이 선명해 보인다. 어디에 숨어도 “그대” 미지의 대상- 사실 시로 바꾸거나 그리움의 연인으로 바꾸거나 시는 애매성(ambiguity)의 의상을 걸치는 것과 같은 뜻을 첨가하면 그대의 의미를 굳이 명료하게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안개” “은행나무 잎새” 등 세상 어디에 숨어도 찿아내는 형형한 눈을 가진 시인의 마음은 통찰의 시선을 레이저로 발산하는 것 같은 시인의 모습이 매우 진지하고 애달프다. 시인은 사물과 의식이 하나로 일체화를 이루는 작업을 위해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시인은 숲을 소요하면서 혹은 차를 마시면서 또는 음악을 들으며 등 시인의 의식이 하나로 합치하기 위한 일종의 방법 찾기라면 김여선의 의식은 집중화가 남다른 특징으로 그리움의 거처를 어디든 찾을 수 있는 자신감 때문에 그리움이 사랑으로 길을 만드는 방법론이 뚜렷하다. 그대 오고 있는가 비 뿌리는 강을 건너 안갯 속에서 그대, 발을 적시는가 오늘도 낮은 창가에서 그대를 기다렸지 <그대 오고 있는지> 역시 비와 시인의 사고에는 그리움의 길이 보인다. 이는 의식을 연결하는 일이 곧 시의 완성도와 밀접하다면 심리적인 집중의 초점이 명확해진다. 이처럼 그의 시는 물이 가장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하는 기능이 있다.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방법론은 하나의 방법이 아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면서 큰 길과 작은 길이 분기하듯이 목적을 위해 가는 방법이 한 가지 방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메신저의 본질은 “그대”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의 감정이 간절함에 모아들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백련/에서도 그리움은 절절하다. 지금 우리는 저 서글픈 영혼의 아픈 숨소리를 고이 간직한 채 찬 겨울 씨앗을 잉태하는 아픔을 되세기며 거센 비바람과 폭풍보다도 더 세차게 일고 있다. 먼 발치의 인내로 가녀린 시녀의 옷깃과도 같이 다시 사랑이라는 불씨 하나로 새롭게 테어나고 있다. <사랑의 불> 사랑은 달콤한 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선 신산(辛酸)하고 굴곡의 계곡을 지나거나, 천인단애(千仞斷崖)의 벼랑을 지나야 하고, 비바람 폭풍의 악착한 도정을 지나서 당도하는 어쩌면 슬픔의 정점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형극(荊棘)의 가시발길을 지나 사랑의 땅에 이르려고 열망하는가? 그 대답은 아주 간명하다. 고통의 심연을 지나 얻는 행복감 때문일 것이다. <3 육친의 정감>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은 다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궁극에서는 다른 것이다. 외면적인 행동반경이 아버지라면 어머니는 내면으로 따스함을 창출하는 뜻에서 다름이면서 같다는 말이 성립된다. 왜 그런가 하면 큰 울타리의 아버지와 그 울타리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주어지는 분담의 사실을 깨달으면 사랑의 공간이 따스해진다. 시인의 그런 균형 감각이 깨달음으로 표시 되는 듯하다. 늦은 귀가에 아버지는 서둘러 군불을 지피고 아궁이에 거품 문 생가지의 아우성, 매운 연기에 먼저 눈물을 쏟고 굳은 살 가득한 손으로 어린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신다. 아버지 기침 소리 가끔 들리던 밤, 어느새 잠든 나를 안고 군불을 때던 아버지 <아버지 사랑> 어제는 비가 내렸죠 어머니가 심어 놓은신 꽃에게 눈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소중한 자식 어머니의 예쁜 꽃입니다. 난 알아요 우리를 보듬는 거칠어진 손마디가 우리에게 주는 값진 사랑리라는 것을 <어머니 사랑> 아버지 역할은 비교적 어머니보다 행동반경이 크고 어머니는 내면적으로 사랑으로 대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아버지의 큰사랑 어머니의 작고 속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는 것을 시로 표현하고 시로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지가 곧 사랑의 방법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모든 존재는 그 자식을 위해 온갖 시련을 감내 하면서 사투를 벌인다. 짐승이나 인간이나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아픔이나 비극도 몸소 감내하는 이유는 단지 종족 보존의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자식을 사랑함으로써 자기를 위한 존재의 합리화가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누구나 그렇듯 맹목일 수도 있고 그런일로 불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은 식솔을 위함이고 이는 긍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면 그 이유를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은근하면서도 깊은 내면의 따스함이 어머니의 사랑에 닿고 있을 때 한 가정의 화목과 평온 행복은 지켜질 수 있을 것이기에 기둥으로서의 아버지 사랑은 너무도 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 날아오르는 꿈을 위해>에필로그- 시인은 그리움과 사랑을 모티브로 그의 시 정신을 현란하게 요리 하는 듯하다. 모든 시의 바탕은 이런 정신의 기저(基底)위에서 출발하고 또 귀환하는 것이다. 그리움이 사랑으로 가기도 하며 또 사랑이 그리움으로 내장된 의상을 걸치는 순환의 이미지가 포장될 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라 본다. 또한 시인의 시적 기법은 물의 의미를 통하여 이쪽과 저쪽으로 이동하는 매개체의 구실을 하기 때문에 비나 물이나 바람의 이미지는 그런 충실한 전달의 임무-일종의 배달과 같은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역시 삶의 깊은 원동력의 근거가 되고 이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에너지 공급의 은혜를 잊지 않고 노래로 이어가는 것이다. 그만큼 정이 깊은 시적 감수성이 예리한 듯하다. 삶의 동력은 다이나믹하지만 심사(深思)한 내면에서는 애조의 마음이 때로는 여린 듯하다. 그의 시에 자유 정신은 중심축을 이루면서 시의 깃발을 휘날릴 때, 안식과 평화의 도달을 염원하는 정서적인 사랑의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라 느끼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02. 09. 16.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이승섭 주필 시집] [이승섭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by 조숙현 공동대표,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1>소요의 여행 사는일은 모두가 여행하는 길일 것이다.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일상의 여행이 있는가 하면 미지의 공간으로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있을 것이다. 전자에는 목적지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만 후자에는 확실한 장소가 없이 떠나는 어둠의 여행일지 모른다. 인간은 어짜피 살아가는 일이 여행인 것은 분명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의 삶의 길을 떠나는 여행은 태어나서 마지막 공간에 이를 때까지 생의 길은 굴곡과 시련을 지나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끝 모를 방황이 여정(旅程)으로 설정된다. 이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길이 아닐까? 시는 언제나 삶의 길에 대한 표현이 된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경우도 있고, 악착(齷齪)한 삶의 괴로움을 버티는 인내의 노래도 있지만, 더러는 기쁨과 행복에 대한 환희의 가락도 있다. 어느것을 선택하든 자기의 삶에 대한 한계를 갖고 표현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시인마다 삶의 태도에는 일정한 규격화가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시화(詩化)의 길을 걷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표현의 맛을 구가하게 된다. 이를 시를 읽는 이유는 이런 맛깔스런 개성의 감상이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세계의 지향(志向)에 감동을 보내게 된다. 사실 도시에 사는 사람의 정서와 전원에서 사는 사람의 정서가 시로 나타내는 표현은 확실히 다른 듯하다. 왜 그런가 하니 환경의 영향이 시로 흡수되는 과정이 표현의 묘미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자연은 인간의 본질이고 이 자연을 어떻게 육화하여 표현하는가는 흡수되는 환경의 결과에 따른 시적 표정- 도시는 메마른 상상의 기저가 중심이 된다면, 전원에서는 생산된 시는 물기 있는 상상의 흡수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시는 어떤 시일까? 의문이다. 2> 은유의 길 건너기 시는 비유일 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특성은 응축(凝縮)이라는 줄임의 미학일 때, 그 전개의 방식은 산문과는 확연히 달리 가지치기의 군말을 버리고 오로지 줄기만을 위한 표현의 미학은 곧 비유의 방도로 이미지 뼈를 어떻게 산뜻하게 건져 올리는가의 방법에 시인 재능이 귀속되는 것이다. 늘이고 펴는 일은 산문의 서술(敍述)기법이라면 시는 이런 방법과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함축(含蓄)의 여백을 갖는 일이 우선 시 된다. 동양화의 여백의 미학은 서양화의 논리의 구축과는 다르다. 왜 그런가 하면 서양화는 칠하고 다시 닷칠하고의 기교에 여백을 갖지 않는 채움의 정치(精緻)조력을 받아서 풍경을 그리는 화가의 정신 표현이라면, 시는 이와는 달리 여백과 함축을 방도(方途)로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해주는 고급한 여유를 갖는 비유가 성립된다. 때문에 시는 여타 산문의 어떤 것보다 어렵고 지난(至難)한 기교를 갖는 첫째 방도가 비유의 도구를 앞장 세우는 일이다. 물론 시적 전개의 장치에는 리듬과 이미지, 비유 그리고 상징이나 인유 그리고 패러디 등 다양한 구조적인 내포(內包)가 있을 때 풍윤한 표현의 길이 넓어지는 것에서 고급화의 방도- 시인은 결국 자기 정신의 고급화를 지향하는 예술논의 중심에 자기 정신의 의도(意圖)를 세우는 일이 언어 기교로 나타는 바, 이는 언어운용의 응축이라는 절차가 가장 먼저 등장하게 된다. 언어 감각은 생동감 있고 온화한 내면의 기품이 담담한 것을 풀어내는 기교가 신선함을 주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 본다. 겨울과 봄 사이 봄 눈 녹듯 메마른 둥지 헤치고 이곳 저곳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간지러움 긁으면 긁을수록 더욱 가려운,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이여 <겨울과 봄 사이> 중 사실 겨울이란 삭막하고 모든 물상이 잠들어 조용한 이미지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의 겨울에서 점차 여명의 봄날로 다가들수록 “이곳 저곳”이 스멀 거리면서 살아나는 신비가 “간지러움”으로 생동감을 부추긴다. 이런 표현의 묘미는 결국 리얼한 표현의 여운을 대동하면서 시가 갖는 여백의 미학이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위 글의 비유의 신선함은 마무리에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비 시적인 언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절함을 기준자로 한다면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은 그야말로 시의 화룡정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어가 된다. 독목(禿木)의 앙상한 나무들과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에서 스멀스멀 솟아 나오는 부스럼딱지같은 여기 저기의 “선연한 눈빛”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모양- 시인의 가슴을-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생명의 보임은 찬탄을 불러 온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 본다. 앞산이 서운산이 각혈하는 어느 소리꾼의 득음인 양 긴 여운을 담아 오늘 아침 초대장을 보내 왔다 그리고 산을 안고 오는 각혈을 품으란다. 웅장한 소리꾼의 각혈을 그리란다. <가을 풍경> 가을의 깊이로 접어드는 풍광의 리얼함이 눈에 보이는 듯 “각혈”하는 소리꾼“의 비유가 강력하고 적절하며 상상의 여정을 초청하는 역활을 다하는 모습에서 아주 심오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각혈은 소리꾼의 길고 멀고 닦은 세월의 흔적이며 수행의 결과물이 완성된다. 득음(得音)으로 이어지는 길이면서 소리꾼의 존재가 빛나는 이름으로 환치되는 상상이 마무리되는 뜻 일게다. 완성의 표정을 시인에게 그리라고 하는 초청장에서 과정의 깊이를 상상하면서 각혈을 시인이 직접 표현하라는 것은 독자에게 펼쳐지는 것이기에 시의 맛깔이 나는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함축의 묘미를 여백의 무궁한 깊이를 제공하여 재능을 보는 것 같아 심히 즐겁다. <2>의미의 전개와 플라톤의 변증법 모든 사물에는 의미가 있어 존재하는 실물과 접하는 길이 만들어진다. 소설의 이야기 전개는 구조를 통해 그리지만 시는 이미지로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으로 전해진다. 의미는 곧 소설의 구조와 상통하지만 시의 의미는 결코 앞장서서 깃발을 흔드는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감추고 숙이면서 드러내는 은근미의 속살을 보여주는 이름이어야 한다. 우회하지만 결코 멀리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쉽게 또는 가까운 곳에서 비유의 의상(衣裳)을 걸치고 화려하게 혹은 고담(枯淡)한 정서의 깊이가 살아있는 것 같은 신선미가 전재되어야 한다. 시어의 선택에 어려움은 이런 조건들이 결코 정석이 없는 시인만의 뇌수(腦髓)에서 발원하는 맑음이어야 한다. 이는 미적 경험과 상상력이 결합하여 표현되는 과정에서 시인의 숨은 기교가 발휘되는 특성을 뜻한다. 결국 의미는 감동의 일차적인 관문이고 이 관문을 지나면서 삽상(颯爽)한 기운을 대동하는 데서 의미의 신선감은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온몸으로 밤을 노래하는 너 홀연히 들어 날 아득한 세상 별 자리로 이끌며 새벽을 낳는가 왜 그리 호젓한 음악을 틀어 놓는가 무엇이 안타까워 무엇이 외로워 이슬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너 함께 노래를 부르자꾸나 <한 밤의 귀뚜라미 노래>중 ‘온몸으로’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이 과정을 지나면 비로소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교훈이 자기화가 되기 때문에 신기한 ‘새벽을 낳는가’라는 탄성이 나올 수 있는 여백이 담겨진다. 이는 시적인 안정감 즉 시인의 정서 균형이 평형을 유지하는 건강성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예술의 미학에서 이른바 개념에 알맞게 이룩된 형태는 현실성으로서의 이상(理想)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된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정한 사물에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시에는 비유로 시인의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될 때, 자신 속에 또 다른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는 역할이 수행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결국 이런 자기 표현의 그림이 비유와 상상의 결합으로 형태화되는 과정이 수립되는 결말이 감동으로 정리 된다는 뜻이다 <3> 갈증과 물의 변증법 시는 자연의 이치와 등가(等價)를 이룰 때, 합리성을 갖는바, 세상의 진리와 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라는 의미는 상식과 같고 이 상식은 인간이 정한 오랜 도덕적 기준이다. 물론 이 기준은 불변성이 아니라 가변성의 진리이다. 언제나 변할 수 있고 또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갑고 있는 기준이라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 자체가 절대의 논리에 갇힌 존재가 아니고 때에 따라 변하는 일이 당연지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갈증에는 물이 필요하고 목마름을 채우면 이내 또다른 공간의 욕망이 발동될 때, 새로운 경지가 나타나고 이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또 다른 영역의 변화가 진행형이 된다. 그렇다면 갈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 살아있기 때문에 요구가 일어나고 갈증은 물의 부족을 요구하는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존재 자체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생체는 순환의 기운이 있고 이런 요구에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 갈증의 농도가 도(度)를 높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어둠이 태풍처럼 몰려와 거대한 몸 짓으로 위협하지만 지극히 작은 촟불 하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빛의 그림자일 뿐 헛것에 넋 나가 탕진한 젊음이다. 어떻게 살아갈 할 것인가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화두처럼 붙잡고 습한 음지 굼뱅이처럼 붙잡고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 숨죽여 견뎌온 어둠의 시간들 닿지 못할 먼- 별 꿈꾸며 뜬눈으로 밤새는 목마른 동물이다. <어둠의 빛> 중 어둠은 빛을 낳는 모태로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인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지극히 작은 촞불 하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어둠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은 어둠이 포장되었기 때문에 빛을 향하는 행동이 다음 단계의 진전을 예약하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뚫고 벗어나려는 의지의 물살을 일으킬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둠의 상징인 동굴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와 별을 꿈꾸는 ‘목마른 동물’ 로 갈증의 늪을 벗어나는 길이 보인다. 고난의 상징인 얼음장의 아래로는 소리로 환생하는 흐름에서 절망을 탈출하는 시인의 마음이 밝아지는 듯하다. 이는 곧 춘봄을 암사하는 것 같다. <4>산뜻한 자연의 시 에필로그 시라는 것은 시인의 정서가 감수성의 표정이라 하겠다. 어떤 정서가 주류를 이루는가는 그의 삶이 뒷받침될 때, 시의 표정으로 말하게 된다. 시는 순수의 정서가 온화하고 질박(質朴)하다. 이는 시인의 마음이 시어로 포착되는 심성의 이유도 있지만 청량한 자연의 요소가 바탕을 이루면서 더불어 시인의 마음을 이끌고 있는 풍광이 한몫 거드는 요소도 부인할 수 없겠다. 생동하는 은유의 숲속을 거니는 신선미와 어둠에서 빛을 추구하는 생명 약동이 의미를 생산하고, 물의 요소가 많은 것도 자연의 도움으로 일어서는 시심의 흥취(興趣)라는 생각인 듯하다 특히 풍경을 만들면서 여기에 소리의 개입이라는 시를 찾고 사는 독특한 득의(得意)로움 같아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에필로그 한다. 2022. 08. 23.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안성 금광 호수 어느카폐에서 선배와 담소] [이승섭 시평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1> 시는 과학이라는 논지도 있고 시는 과학이 아니라 먼 거리에 잇는 애매성(曖昧性)원리가 작동한다는 논지도 있다. 시평을 하는 선배는 행과 연을 나열하는 의식의 표현이 아니라 의식을 정치(情致)하게 또는 정확한 논리적 구축을 가졌을 때, 비로소 시의 품위를 나타낼 수 있고, 시가 필요로 하는 여백의 함축미라 하는 선배도 있다. 즉 응축에서 많은 이미지를 내포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라는 것은 언어의 사용에 정확한 운용(運用)이 필요하며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확고하면서도 유연미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시는 감동의 절차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는 결코 액자 속의 사진과 같은 정물화적인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의 특성이 수용되어야 한다는 논지이다. 정치도 살아있는 생물이라 하듯이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를 주도하고 그 변화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줄 아는 방법이 그 나름대로 내재 되었기에 생명을 신비와 운용의 바람을 넣을 수 있으며 개성을 살리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일정한 표정을 나타내고 또 표정을 관리하는 주체적인 개성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도정(道程)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시를 한가지로 정할 수 없음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나타낼 수 없는 이치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인간에 의해 표현하는 인간이 표현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철학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이치가 있고 인간을 탐구하고 나타내는 시의 자유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시에는 인간의 삶이 있고 애환이 시적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며 시를 아름답게 포장을 해야 하며 종이 등으로 포장하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기에 어떻게 고착화 시키느냐의 따라 이치가 차이나기 때문이다. 이는 시적인 기교이면서 감동을 생산하는 이유가 있기에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시에는 계절이 표현되고 대칭적 사랑이라는 논지가 필수이며 가족, 모성, 등 다양한 사물을 분해하고 정서를 만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2> 의식의 흔적 찾기 Personality는 다른 사람에게 독특한 특징으로 보이는 한 개체의 모든 인간적, 감정적, 의지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특성의 통합된 체계를 말한다고 심리학에서는 지적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런 특징적인 흐름이 일정한 지주(支柱)를 이루면서 삶을 형성하고 지속 되는 바 이를 개인적, 사적인 특색으로 지칭하게 된다는 점이다. Allport는 환경에 대한 독자적인 적응을 규정하는 심리 즉 한 개체의 내부에 속하는 생리체계의 역동적 체계라는 말로 정리를 했다. 여기에는 자아와 초자아를 구분 짓게 만드는 모태인 id와 ego와 suqer ego등 복잡한 의식 체계는 결국 한 개체의 정신적인 흐름으로 결정된다. 모든 의식은 personality를 이루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모든 시는 자아와 초자아 이드 등의 사이사이를 왕래하면서 삶의 감수성과 의식을 나타내는 생명의 소리에 특징이 특징이 포함되어 발언한다. 1) 사랑의 의식 많은 시에서 사랑은 가장 많은 소재로 작용했다면 사랑은 결국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공통의 관심사이거나 풀어낼 수 없는 문제와 해답 사이에 가로놓인 대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김숙자의 시에서는 사랑이라는 암시- 비단 남녀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성이 아닌 타인과의 정감 또는 남편 아니면 자식과 주고 받는 정감의 모든 일들이 사랑이라는 명칭에 포괄되는 인상이 너무도 짙다. 어여쁜 꽃잎 사이로 사르락 젖어드는 이슬같은 사랑 하나 영롱한 이슬 꿈같은 사랑을 노래하네 벙그러지는 꽃잎 사이로 아스라한 꽃잎 만들며 가장 고운 미소로 아름다운 미소 보낸다 청아한 하늘에 두둥실 구름도 너무도 예쁜 사랑에 더욱 눈부시게 비추고 끝없는 메아리 되어 들리는 사랑 노래 하나 영롱한 이슬에 힘입어 빛을 내는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먼 길을 여행하며 피어나는 제일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구려 <사랑의 의식> 사랑에 비밀은 누구나 갖고있는 열쇠가 아닐까? 비록 그 열쇠를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죽음으로 끝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도 있을 것이며 춘향과 이도령의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되는 사랑도 있을 것이다. 어느 사랑이든 사랑의 이름 앞에 설렘과 아픔 혹은 행복하고 기쁜 추억들이 간직되었기에 사랑은 보편성으로 이해되는 지근거리에의 이름일 것이다. 김시인은 사랑의 개념을 “꿈”과 “추억” 그리고 미소로 “보내는 행위”를 나타낸다. 여기서 찾아오고, 가져오는 이기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 또는 받음에서 느끼는 행복의 중심을 찾아가는 모습이라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사랑의 이름이 들리는 것을 하늘의 소리에 비유함으로써 “사랑 노래하나”는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길, 행복에 접근하는 모습이 되면서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는 헌신의 개념을 만나게 된다.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 아니라 보내는 혹은 바치는 헌신이 될 때, 비로소 참된 사랑의 이름에 다가갈 수 있기에 고귀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 같다. 머릿속 각인된 목소리 당신이 준 사랑을 호흡하며 둘이 만든 사랑은 행복인가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밀어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주는 다정함 포근함입니다. 둘만의 정원을 만들어준 임 눈을 뜨면 곁에서 은은한 향을 전해주는 그윽함에 사랑을 먹습니다. 나목도 아름답게 보이고 외로운 가로등도 정겨운 것은 행복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의 사랑>중에서 정말 사랑은 둘이 만들기 때문에 빛=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짝사랑도 있겠지만- 아울러 행복이라는 느낌을 생산할 수 있고, 다정함을 느끼는 에너지의 파동은 더 큰 사랑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둘만의 정원에서”에서 느끼면서 감상하는 향기에 취하는 절차가 수행되는 것이다. 이런 향기에 젖을 수 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밝아지고 영롱하다. 심지어 나목도 그렇고 외로움으로 다가오는 가로등조차 정으로 채워지는 의식은 바로 사랑이라는 정서에 감염되었기에 아름다움으로 눈이 떠지고 환상의 세계와 접촉하며 승화되는 것이다. 행복은 이런 무의식이 가져오는 세계- 사랑의 위대한 옷을 입은 자가 느끼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김시인의 사랑은 하나가 아닌 둘이 결합하는 우주의 원리를 인간에 결합하는 계산법인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야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온 우리들 우리 이제는 얼마나 산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아픔도 많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웃음으로 날려버릴 친구들의 가슴이 있지 않는가! <친구>중 인간이 살다보면 고독은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이럴 때 친구는 발을 맟출 수 있는 대상이면서 생의 의미를 공유하고 나누는 이름으로써, 친구는 가장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름이기에 우정은 더욱 귀중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사랑도 친구로 시작하고 삶도 친구로 정감을 나눌 때부터 세상은 따스하고 다정한 공간으로 화할 수 있기에 우정에 갈증을 갖는 이유가 된다. 추억을 만들고 세상의 종막이 올 때까지 발길을 함께 하려는 김 시인의 마음은 따스하기 때문에 더욱 따스한 그리움을 우정으로 포장하려는 의도에 머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3> 에필로그 하면서 시인의 시적 무드는 안온하고 따스하다. 봄의 향기 짙은 꽃을 피우려는 발심에서 노력의 얼굴이 크로스 업 되고, 순수한 마음에서 꿈과 희망을 간직하려는 일면과 사랑의 마음이 시(詩) 전반을 장악하는 원천이 되는 듯하다. 상징의 숲에 들어 있는 요소들로 보이며 이동의 메신저이면서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생명의 원천 의식을 뜻한다. 아울러 가족은 시인의 오늘의 표정을 확인하는 징표가 되면서 내일로 가는 에너지를 저장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동반자” “어머니” “바다” “봄비” 등 이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이미지들은 곧 시인의 시에 간직된 밝은 표정에 들어 있는 미소와 같다. 아마도 남다른 시인의 특색을 보면서 더욱 기대가 되는 것 같이 생각을 하며 나가려한다. 2022. 08. 18.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이승섭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 4시집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by 조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