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인간사는 세사의 모든 물상에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영혼을 붙어 넣으면서 기도의 물목(物目)으로 삼아 또 다른 상상의 영역을 탐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은 또 다른 길을 만들면서 사고의 복잡성을 부추기어 문화의 중심으로 채색하는 것이다. 또한 이름이란 부를 때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속에 무엇인가 영혼이 있음을 신념으로 공고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1이라는 이름을 굳이 1이라 고집하는 이유는 인습이라는 장벽 때문에 고칠 수 없는 이유를 내장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름이 관습의 의상을 걸치고 거기에 안주할 때, 상상의 길은 차단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시인은 이런 기준의 질서를 거부할 때, 신명을 불러올 수 있고 이 신명의 불꽃 위에 시인만의 성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시적허용은 산문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시는 관습적인 것이나 기존의 사슬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맞이할 때, 선도적인 시인의 임무가 발휘되고 여기서 시의 길은 또 다른 변화의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상(李箱)의 [오감도]에는 띄어쓰기, 맞춤법 등이 기존의 질서에서 역으로 상상을 자극할 때, 새로운 출현의 시를 높이 상찬하는 이유가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시인은 언어 혁명의 기질을 가져야 하고 의식의 변화를 과감하게 자극하는 질서의 파괴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성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개성 있는 시인의 이름이 되지 않을까? 똑같은 혹은 아류의 시는 아무런 개성도 갖지 못한 무의미의 의상을 걸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인의 의식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매의 눈을 기저야 하며, 먹이를 찾는 사자의 배고픈 방황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시와 똑같으면 이유가 변화에서 신선함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첫 시집을 상재한 노길순의 시는 그만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시인인 듯하다. 봄 향기 가득한 봄바람처럼 상쾌하며 안정감이 있는 인상으로 언어 조합의 묘미를 상기시키면서 그만의 영역을 노리는 탐색이 전제될 때, 다가오는 기운은 삽상을 자극시킨다. 이제 노길순의 정신 추구를 운위 하는 길로 만나러 들어가보자. 2. 【Dream [꿈], 제조기 1> 자신의 영역 길 찾기 예술은 본질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의 다양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백적 형태로 기교를 표현하고, 선과 색채로는 미술 작가의 사상이나 신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학은 문자를 통해서 결국에는 자기를 그리는 작업이라 보기 때문에 지속한다는 뜻이다. 물론 표현된 결과물은 저마다 개성의 차이에 따라 톡특한 양상을 갖는다. 삶이란 결국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고 이 여정을 어떤 뜻으로 받아 드리고 또 삶의 중심을 어떻게 잡는가는 시인의 표현 목적과 의도로 표상될 뿐이다. 이길순의 시에 첫 번째 목록에서 자기를 위한 탐구의 길이 보이는 것은 그가 어떻게 시의 진로를 이끌고 나갈 것인가를 암시하는 의미에 가깝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곧 전체 속에서 어떤 위치에 이를 끌고 나갈 것인가는 목적에 맞추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보이질 않는다. 내가 창가에 서 있는 나 거울에 보이는 분명 서있는데 무더운 염천이 몰고 오듯 그저 땀을 흘린다. 잠시 짧은 흔들림이 머리카락 움직이고 이리저리 내 곁에 있는 나 이제 떠나 주기를 한 번 두 번 기다림에 지쳤건만 오늘도 나를 자꾸 기다린다. <내가> 중에서 나를 알면 가장 위대한 인간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정의할 것이다. 모든 성인들은 “너”라는 대상에 질문을 던지면서 혹은 직간접으로 지적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삶의 중추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에 철학의 중심을 두었다면 노길순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자기를 “안 보인다며” 면서 스스로에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거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표정의 대면에서 시인은 스스로 찾아 나서는 노력이 집중된다. “그저 땀을 흘린다.” “나를” 강조하면서 비로소 머리카락이 “움직인다” 의 탐구에 대한 대답을 듣고 있음이다. 더불어 “기다림이 지쳤는데”에서 지속적인 삶의 탐험이 스스로의 동력을 얻어가는 단계로 들어간다. 인생은 오로지 자기가 살아가면서 해답을 얻는 길이 있을 뿐이지 타인이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때문에 신열을 감내하면서 길을 가는 나그네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를 버릴 때, 기를 얻게 되는 역설적인 방법도 있지만 노길순은 직접 자기와 대면- 거울에서 나르시스의 방황을 해쳐 가는 용기가 가상하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도 나를 기다린다는” 자기애(自己愛)의 길을 넓히는 발상이 두드러진다. 어느새 벌써 과거가 나를 비웃는다. 나는 아직 존재하는 숨 쉬는 인간 돌아보니 벌써 과거가 비웃는다. 땅에 붙어버린 발이 언젠가 가장 멋지게 함께할 저 끝 오늘도 나는 내일을 이끌고 무거움이 힘겨운 줄 모르고 앞으로 전진 또 전진 <살아가는 일> 중에서 인간은 세상에 현존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탄생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일 뿐 실제로는 미지의 공간에서 다시 미지의 공간으로 길을 만드는 존재일 뿐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라는 구분이 생의 이름으로 다가든다. 노길순은 자아를 확립하는 방도로 과거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톡특한 듯하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증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숨 쉬고 있다는” 면을 강조하고 다음 수순으로 진행하는 미래지향이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 중간의 현재를 인식하는 점이 이채롭다. 흔히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특징인데 이런 유약함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톡특한 개성의 의상을 입고 “땅에 붙어버린 발”이라는 현실을 의식하고 가장 멋지고 오늘과 내일을 끌고 출발하는 보폭- “무거움이 있을지라도 전진” 앞으로 독촉하는 시심이 희망의 날개를 달고 전진하는 발상이 희망의 발걸음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를 대상으로 어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감동의 목록으로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는 항상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호소하는 반복성에서는 독자도 수용미학적인 마음으로 파도를 일으키면서 질서 있는 형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작품의 내면에 수용된 의식의 갈래는 ambiguity(모호함)이라는 시적 형식 속에 내면의 질서를 살려야 한다. 이는 유기체인 생명에는 다양한 요소의 결합이 통일될 때 황홀한 감성의 바다를 독자에게 전달 수 있다면 여기서 시의 성공은 담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적 반응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된 의식이 명확해야 하고 균제(均齊)의 형식이 가지런했을 때, 비로소 미의 모범 원리로써 형식적인 통일감이 주어진다, 노길순의 시는 우회적인 기교가 아니라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진솔함이 특징일 것 같다. 홀로 잠든 내 곁에 살며시 별이 왔다. 깊은 밤 숨소리조차도 사랑스럽다. 모른 척 힘들지 말라고 침대 모서리를 잡는다. 어느새 작은 새처럼 내 안에 안긴다. 사랑해 난 괜찮아 손발이 차가운데..... 내일은 좀 더 큰 행성으로 가자 아니 난 괜찮아 너만 있음 되니까 밤새 나를 밝혀주며 지켜주다 잠이 깨면 사라질까 드려워 가만히 문을 닫고 홀로 뜰로 나간다. <내 사랑> 중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매우 보편적인 어의이다. 그러나 이 보편성 속에서 본인의 마음에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을 때, 비로소 사물을 바라보는 대상에도 전이된 사랑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치는 자발성의 이치로 인식된다. 시인 스스로의 마음에서 사랑의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바라보는 모든 물상에 사랑의 기운이 퍼지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이치와 같다는 뜻이다. 깊은 밤, 별과 속삭이는 마음에는 동화의 세계가 순수로 포장된 노길순의 시심이 또 다른 에너지의 공급처이기도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랑의 에너지원이 [깊은 사랑] [장미꽃 사랑] [어리석은 사랑] 등 가족에서도 오고 자연에서도 오며 다양한 사랑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친밀도가 시인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귀결이 된다는 점에서 일일이 일거 하지 않아도 희망의 사랑이 진원지일 것은 분명한 것 같다. 3. 에필로그 자아의 문법 구축 예술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상상의 길을 만들어 미감(美感)으로 처리하는 노래인 것이다. 그 노래들에는 진실, 사랑, 배려, 등이 담겨 있을 때, 감동의 길이 보편성으로 전달되면서 독자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 되는 것이다. 정작 시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지만 시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진솔성과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의 중심이라는 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동은 그처럼 강한 태풍도 될 수가 있고 또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결합에서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꿈을 전달하는 시인의 힘은 여기서 정점을 마련하는 능력자이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부추기는 꿈의 제조자는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런 꿈을 부추기는 기능을 하는 시인인 것 같다. 이같이 전체적으로 자기 발견의 성실성과 자기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이룩할 수 없는 이유가 내장되었기 때문에 자기애의 확신성과 신뢰 찾기는 미래의 문을 향하는 옳은 길이라 하겠다. 또한 사랑의 중심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를 아는 일은 현명하고 아름다운 시인이다. 이는 사물의 내면을 통찰하는 촉수에서 시심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뢰를 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분리하면서 다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를 보내는 시가 바로 정신 문법인 것이다. 앞으로 절차탁마로 정진하여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시를 그릴 수 있음을 기대하면서 내 책임에서 벗어나련다. 2025. 05. {금요저널 주필/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배낭여행 하는 필자] 시를 쓴다는 것은 엑스터시(ecttasy)의 경지 즉 신의 경지를 방문으로 입구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행로는 여기서 표정 관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의 심연은 곧 시를 대변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자아의 평정심을 찾는 길이 도는 것이다. 또한 시는 자아의 평화가 온다면 사랑의 시연을 찾게 되는 것은 시를 그리는 사람은 모두 알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단순히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속에 비로소 언어의 평화 심연을 운위하고 시의 위의(威儀)를 갖추고 사랑의 심연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시의 심연은 곧 시인 정신의 깊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를 발휘한다. 하기에 독자는 시인의 비밀을 찾기 위해 일정한 도식을 동원하려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가질 때 독자와 시인의 관계는 소통의 행복, 즉 감동을 만나는 일이다. 생활의 주변 상황이 주조를 이루면서 전개되는 홍미선의 감수성과 줄기를 가까운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의 깊이와 삶에서 느끼는 일 등이 시의 행로를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꽃에 대한 자아의 심연은 자연의 향기로 전환하려는 의미가 연결된다. 이제 홍미선의 자아의, 평화, 사랑의 심연 찾기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2. <시에 허무 자아의 허기 사랑 의미 찾기> 1) 허기와 허무의 자아 허무는 인간의 삶에 필연으로 따라오는 인자(因子)이면서 삶의 요소를 결정하는 몫을 다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도달될 수 없는 간격만큼 허무를 갖게 된다. 홍미선의 시에는 허기와 허무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시집의 서문부터 이런 냄새가 물씬 풍긴다. 품 안에 자식 연민에 빠지니 때론 용서가 자아 층층 감겨온다. 그리움은 하얀 달에 스며들고 다시 가득 담아야 할 기다림이 머뭇거린다. <부모의 마음>-중에서 엄마의 곁을 떠난 자식에게 보내는 호소가 용서와 갈등에서 심각하게 교차하고 허기를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달픔이 길들여진다. 품 안에 자식이 떠난 고백은 그리움을 만들고 채워야 할 기다림이 옮겨온다. 기다림에는 고독이 물씬거리고 머뭇거리는 행동의 주저에서 용기가 아닌 후회의 기다림만이 앞장서는 이유를 자식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정의 진실이고 아픔이지만 자식은 쉽게 이해와 정리를 못하는 것이다. 그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될 때 깨달음이 있을 뿐이기에 자식과 모정의 관계는 이해나 설명을 넘는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2. 갈등의 자식 사랑의 결정체는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이면서 영원한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도(道)와 함께, 자식과 부모와는 점차 간격이 벌어지는 일- 성장의 나이에 따라 부모와의 사이엔 강(江)을 만들게 되면서 점차 밀려나는 일이 부모의 몫이 된다. 이러한 일들은 유사 이래 진행된 자식과 부모의 관계 보모는 자식을 항상 어린 시절에 묶어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에서 뒤처진 이유로 실망과 때론 절망을 맛보게 된다. 특히 성장의 절정인 결혼, 무렵에는 의견 대립이 극에 이르면서 더러는 벽과 마주치며 외면이거나 – 부모는 시련의 시절을 감당하게 된다. 이런 갈등은 대화의 소통 문제에서 기인 하지만 쉽게 정리되지 못하는 아픔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자꾸 맴도는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숫자에 노작 거림의 해답은 가물거리고 이것이 인생이고 저것이 무엇인가? 쏟아짐에 젖어보고 강렬하게 띄어본다. <모정> 중에서 이유와 원인 그리고 해답은 몰라도 된다. 어떻든 갈등의 요인이 자리하고 풀이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모정의 슬픔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자식과 부모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를 명확하게 처리가 가능한 것인가? 기실 해답은 없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자식과 부모의 문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논리로 풀이할 수 없는 오로지 정(精)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간은 정(精)을 용해하는 일면 다시 접합하는 능력을 발휘는 어떤 힘을 가진 관계가 자식과 부모의 관계일 것이다. 고운 손끝에서 자라 훌쩍 자유가 되어 떠났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에 있구나 <자식 사랑>-중에서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을 대수롭게, 생각되지만, 부모는 이를 애달프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안아서 키워 보지만 자식은 부모를 정으로 느끼는 것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만으로 사는 이유가 된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속 사랑으로 키우는 일 때문에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유인으로 떠나는 간격은 항상 애달픔을 유발하는 이유를 제공하기에 모정은 떠나는 자식에게 섭섭한 마음이 무늬를 그리게 된다. 시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의 소재가 자식과 상관을 갖는 이유의 대부분이 모정의 따스함에 이유를 돌릴 뿐이다. 자식에게 향하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머니의 정은 상처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런 증거는 결국 상처 의식으로 드러날 때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자식들은 모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 그리고 끝없는 모정이 슬픔에 젖는다면 이는 아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이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 모정을 깨닫는다 해도 그때는 이미 강물의 흐름이 멀리 가 있기 때문이다. 3) 삶의 방향 살아 있다는 것은 허기와 허무가 존재하고 고민이 있다는 뜻이고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헤아리게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고민도 없다. 결국 생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문제로 귀결될 때 경험의 층이 쌓이게 되고 성숙의 이름을 얻게 되는 길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높고 낮은 자리 아파 우는 허기의 자리네요 먼저 가는 길 떨치지 못한 원망 이래저래 한잔 술 끝내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다 그런 건가요. <생(生)> 중에서 생의 문제는 시인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때, 허기와 평화와 원망이 교차되는 것이다. 홍미선 시인의 경우도 높거나 낮거나 자리를 막론하고 “아파서 우는 “허기의 자리”라는 평범의 고백에 젖어든다. 이런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술은 위무(慰撫)의 방편으로 작용을 하며 술에 의지해서 우열을 우기는 상태로 진행되는 듯하다. 상상력의 발동이 “한잔”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시는 때로 간접 체험- 상상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가공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은 창조주 때문이다. 물론 생에는 의지가 공고해야 함은 사실이지만 의지를 약화하는 일을 자초하면서 고통의 밀물에 휩쓸리는 경우엔 운명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들쑥날쑥 거리는 바퀴 힘겹게 밟아대는 틀에 낀 씨름일진대 돌고 있는 모질게 살아온 땟물 올망졸망 절규가 건네는 정 이렇게 굴러온 시간을 태우면 까맣게 그을린 마음 가난을 태우고 노을 자락 매어둔 삐걱거리는 페달 <삶의 바퀴> 중에서 시인은 바퀴를 힘겹게 고통의 진행을 체험하는 느낌을 적은 것 같다. “힘겹게 밟아대는”의 유추로 볼 때 “모질게 살아온 땟물”의 이미지가 삶의 아픔을 상기하는 연상 작용을 하면서 “절규”로 이어질 때 고통의 심연을 지나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시간의 흔적을 “까맣게 그을린 마음”과 “가난”의 상관이 힘겹게 살아온 상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가난의 아픔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이기에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야만 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짐이면서 그런 의미를 교환하는 인상이 짙다. 결국 가난으로 인해 “절규” “그을린 마음”이 아픔을 동반하는 연속적인 의미 -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의 비유에 삶의 이름이 실리어 가는 인상을 준다. 살아가는 길엔 순풍이 있는가 하면 파도의 거센 물결을 넘어야 하는 일이 번다히 진행된다. 이런 반복은 곧 세월이라는 층을 이루면서 내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월의 주인공이자 때로는 나그네의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4) 사랑의 심연 사랑은 막연한 추상성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절실한 명칭으로 따라오는 이름일 수도 있다. 어떻든 사랑은 포근하고 따스함을 전달하는 이미지의 명칭 - 꽃이거나 바람이거나 홍 시인은 추상적인 뉘앙스가 강한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한 명확한 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떠난 짝에 대한 절실함도 아닌 또 꽃에 대한 암시 - 사랑의 의미가 추상적이듯 홍 시인은 사랑의 암시도 다소 추상적 전달이 아닌가 한다. 사랑은 빛 사랑은 꿈 사랑은 욕망 사랑은 파도 사랑은 눈물 사랑은 비밀 <사랑> -중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가 6가지인지는 모르나 사랑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답안은 있을 수 없지만 그만큼 폭넓은 이름으로 인식이 된다. “빛”으로 “꿈” “욕망” “파도” “눈물” “비밀” 긍정적 보다는 아픔이 수반되는 의미가 앞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는 홍 시인의 사랑에 담긴 상처는 겉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안으로 숨기는 은밀한 표현이 더욱 짙음을 느낀다. 아주 독특함으로 은유와 압축을 시키지 않으며 자신의 추상적 암시를 주는 듯하여 애매모호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 등을 집약하여 좀 더 확실성이 수반되는 시였으면 하는 바람이며 긍정 마인드로 바꾸어 시향을 그린다면 지금보다 더 빛나는 시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에필로그= 시인은 정(精)이라는 언어를 사물에 투사하여 독자 앞으로 보내는 메신저의 기능을 완수하는 시인이 아닐까? 유추하면서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노래할 때 그 가락은 흥겨울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다면 홍 시인의 가락은 후자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삶이 이별에서 그리움을 낳았고 사랑에 대한 추억은 손짓처럼 먼 거리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삶에 허기와 그리움의 교차는 모두 생활의 깊이에서 나오는 가락이면서 시심(詩心)의 나래가 화려를 갈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 자식에 대한 정감이 깊고 사랑 때문에 때로는 단절된 것 같은 고독을 대면하면서 자아의 심연을 대면하면서 용기와 신념을 안으로 키우는 가락의 주인공 - 홍 시인의 깊은 내면을 보고 또 다른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요인이 되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긍정의 마인드 사고를 갖고 시심을 발휘한다면 더욱 빛나는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의 저서] [필자의 저서] [필자의 저서]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1> 시는 과학이라는 논지도 있고 시는 과학이 아니라 먼 거리에 잇는 애매성(曖昧性)원리가 작동한다는 논지도 있다. 시평을 하는 선배는 행과 연을 나열하는 의식의 표현이 아니라 의식을 정치(情致)하게 또는 정확한 논리적 구축을 가졌을 때, 비로소 시의 품위를 나타낼 수 있고, 시가 필요로 하는 여백의 함축미라 하는 선배도 있다. 즉 응축에서 많은 이미지를 내포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라는 것은 언어의 사용에 정확한 운용(運用)이 필요하며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확고하면서도 유연미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시는 감동의 절차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는 결코 액자 속의 사진과 같은 정물화적인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의 특성이 수용되어야 한다는 논지이다. 정치도 살아있는 생물이라 하듯이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를 주도하고 그 변화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줄 아는 방법이 그 나름대로 내재 되었기에 생명을 신비와 운용의 바람을 넣을 수 있으며 개성을 살리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일정한 표정을 나타내고 또 표정을 관리하는 주체적인 개성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도정(道程)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시를 한가지로 정할 수 없음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나타낼 수 없는 이치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인간에 의해 표현하는 인간이 표현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철학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이치가 있고 인간을 탐구하고 나타내는 시의 자유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시에는 인간의 삶이 있고 애환이 시적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며 시를 아름답게 포장을 해야 하며 종이 등으로 포장하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기에 어떻게 고착화 시키느냐의 따라 이치가 차이나기 때문이다. 이는 시적인 기교이면서 감동을 생산하는 이유가 있기에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시에는 계절이 표현되고 대칭적 사랑이라는 논지가 필수이며 가족, 모성, 등 다양한 사물을 분해하고 정서를 만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2> 의식의 흔적 찾기 Personality는 다른 사람에게 독특한 특징으로 보이는 한 개체의 모든 인간적, 감정적, 의지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특성의 통합된 체계를 말한다고 심리학에서는 지적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런 특징적인 흐름이 일정한 지주(支柱)를 이루면서 삶을 형성하고 지속 되는 바 이를 개인적, 사적인 특색으로 지칭하게 된다는 점이다. Allport는 환경에 대한 독자적인 적응을 규정하는 심리 즉 한 개체의 내부에 속하는 생리체계의 역동적 체계라는 말로 정리를 했다. 여기에는 자아와 초자아를 구분 짓게 만드는 모태인 id와 ego와 suqer ego등 복잡한 의식 체계는 결국 한 개체의 정신적인 흐름으로 결정된다. 모든 의식은 personality를 이루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모든 시는 자아와 초자아 이드 등의 사이사이를 왕래하면서 삶의 감수성과 의식을 나타내는 생명의 소리에 특징이 특징이 포함되어 발언한다. 1) 사랑의 의식 많은 시에서 사랑은 가장 많은 소재로 작용했다면 사랑은 결국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공통의 관심사이거나 풀어낼 수 없는 문제와 해답 사이에 가로놓인 대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김숙자의 시에서는 사랑이라는 암시- 비단 남녀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성이 아닌 타인과의 정감 또는 남편 아니면 자식과 주고 받는 정감의 모든 일들이 사랑이라는 명칭에 포괄되는 인상이 너무도 짙다. 어여쁜 꽃잎 사이로 사르락 젖어드는 이슬같은 사랑 하나 영롱한 이슬 꿈같은 사랑을 노래하네 벙그러지는 꽃잎 사이로 아스라한 꽃잎 만들며 가장 고운 미소로 아름다운 미소 보낸다 청아한 하늘에 두둥실 구름도 너무도 예쁜 사랑에 더욱 눈부시게 비추고 끝없는 메아리 되어 들리는 사랑 노래 하나 영롱한 이슬에 힘입어 빛을 내는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먼 길을 여행하며 피어나는 제일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구려 <사랑의 의식> 사랑에 비밀은 누구나 갖고있는 열쇠가 아닐까? 비록 그 열쇠를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죽음으로 끝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도 있을 것이며 춘향과 이도령의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되는 사랑도 있을 것이다. 어느 사랑이든 사랑의 이름 앞에 설렘과 아픔 혹은 행복하고 기쁜 추억들이 간직되었기에 사랑은 보편성으로 이해되는 지근거리에의 이름일 것이다. 김시인은 사랑의 개념을 “꿈”과 “추억” 그리고 미소로 “보내는 행위”를 나타낸다. 여기서 찾아오고, 가져오는 이기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 또는 받음에서 느끼는 행복의 중심을 찾아가는 모습이라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사랑의 이름이 들리는 것을 하늘의 소리에 비유함으로써 “사랑 노래하나”는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길, 행복에 접근하는 모습이 되면서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는 헌신의 개념을 만나게 된다.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 아니라 보내는 혹은 바치는 헌신이 될 때, 비로소 참된 사랑의 이름에 다가갈 수 있기에 고귀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 같다. 머릿속 각인된 목소리 당신이 준 사랑을 호흡하며 둘이 만든 사랑은 행복인가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밀어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주는 다정함 포근함입니다. 둘만의 정원을 만들어준 임 눈을 뜨면 곁에서 은은한 향을 전해주는 그윽함에 사랑을 먹습니다. 나목도 아름답게 보이고 외로운 가로등도 정겨운 것은 행복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의 사랑>중에서 정말 사랑은 둘이 만들기 때문에 빛=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짝사랑도 있겠지만- 아울러 행복이라는 느낌을 생산할 수 있고, 다정함을 느끼는 에너지의 파동은 더 큰 사랑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둘만의 정원에서”에서 느끼면서 감상하는 향기에 취하는 절차가 수행되는 것이다. 이런 향기에 젖을 수 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밝아지고 영롱하다. 심지어 나목도 그렇고 외로움으로 다가오는 가로등조차 정으로 채워지는 의식은 바로 사랑이라는 정서에 감염되었기에 아름다움으로 눈이 떠지고 환상의 세계와 접촉하며 승화되는 것이다. 행복은 이런 무의식이 가져오는 세계- 사랑의 위대한 옷을 입은 자가 느끼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김시인의 사랑은 하나가 아닌 둘이 결합하는 우주의 원리를 인간에 결합하는 계산법인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야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온 우리들 우리 이제는 얼마나 산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아픔도 많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웃음으로 날려버릴 친구들의 가슴이 있지 않는가! <친구>중 인간이 살다보면 고독은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이럴 때 친구는 발을 맟출 수 있는 대상이면서 생의 의미를 공유하고 나누는 이름으로써, 친구는 가장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름이기에 우정은 더욱 귀중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사랑도 친구로 시작하고 삶도 친구로 정감을 나눌 때부터 세상은 따스하고 다정한 공간으로 화할 수 있기에 우정에 갈증을 갖는 이유가 된다. 추억을 만들고 세상의 종막이 올 때까지 발길을 함께 하려는 김 시인의 마음은 따스하기 때문에 더욱 따스한 그리움을 우정으로 포장하려는 의도에 머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3> 에필로그 하면서 시인의 시적 무드는 안온하고 따스하다. 봄의 향기 짙은 꽃을 피우려는 발심에서 노력의 얼굴이 크로스 업 되고, 순수한 마음에서 꿈과 희망을 간직하려는 일면과 사랑의 마음이 시(詩) 전반을 장악하는 원천이 되는 듯하다. 상징의 숲에 들어 있는 요소들로 보이며 이동의 메신저이면서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생명의 원천 의식을 뜻한다. 아울러 가족은 시인의 오늘의 표정을 확인하는 징표가 되면서 내일로 가는 에너지를 저장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동반자” “어머니” “바다” “봄비” 등 이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이미지들은 곧 시인의 시에 간직된 밝은 표정에 들어 있는 미소와 같다. 아마도 남다른 시인의 특색을 보면서 더욱 기대가 되는 것 같이 생각을 하며 나가려한다. 2022. 08. 18.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이승섭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제 4시집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by 조숙현[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시인의 꿈은 1편의 시를 위해 정성과 혼심을 다해 경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은 소망은 항상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하고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영예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의 주인이기를 바란다면 몇 개의 조건을 합치시켜야 한다. 첫째는 공감의 영역이 넓을수록 호감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공감이란 보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둘째는 시의 완성도 즉 시적 조건에 합치하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정적 언어의 선전이 아니라 평범하면서도 누구에게나 공통의 이해를 넓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의미의 내포- 결국 의미가 마지막에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의미 없는 시는 공허함만 부추길 수 있음도 명심할 일이다. 전 세계 많은 인구가 자리하듯 시 또한 많은 표정들로 세상을 부유(浮游)하는 것이기에 개성을 갖춘 표정을 만나기란 매우 희소(稀少)하기에 개성은 시인 자신만의 표정이 아니라 시인이 만든 유일한 자기 분신일 수 있기 때문에 누구의 작품이라는 명패를 패용함과 동시에 무한의 책임을 갖는 것이다. 시는 시인의 운명과 동일한 여건으로 살아가는 이름일 수 있음을 의미함이다. 유기연 시인의 시에는 여러 가지의 표정이 묻어난다. 식물 정서, 사랑정서, 환경 정서 등이 가장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삶의 애환과 정신의 지향 사랑에 대한 애착 등이 표출하는 것으로 유추가 된다. 시는 낯설게 표현하는 점에서 의도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지만 시의 표현은 종국에는 정신적인 흔적을 예외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관념적인 표현이 다소 있겠지만 시인의 의식을 점령하는 세 가지의 축이 시집을 채우는 말들의 향연이다. 이러한 정서는 아무래도 전원의 정서가 지배적인 현상을 유지하면서 다감한 성격, 혹은 그런 성품에서 나오는 사랑 또는 정서적인 흐름이 도시의 복잡한 정서를 외면하고 살고 싶은 사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제 그 흔적들을 만나 보기로 하자. 『2. 정서의 표정들』 1> 식물 정서 시인은 누구나 개성의 따라 일정한 취향을 갖는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정서가 어디로 관심과 집중을 하는 가의 여부에 따라 문자로 표현하는 길은 그런 쪽으로 언어를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심리적인 현상이 지배하는 길에 따라 예술의 형성은 탄생의 길을 마련한다. 대체로 식물 정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성은 다이나믹한 것보다는 정적(靜的)이고 사색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다. 바다를 좋아하기보다는 강을 좋아하고 높은 산보다는 작은 산의 정취에 마음이 더 쏠리는 일은 유 시인의 시 제작의 정신 문으로 정신의 문으로 들어 가보자 텃밭 끝자락에 실하게 여문 호박 하나 살며시 집에 옮겨 놓으니 텃밭이 따라왔다. 혹여 허기를 채워주었던 비우며 살았던 세월이 미소 지으며 굶주림 세월 견디었던 부모님 가뭄과 폭염을 견딘 커다란 호박 온 집안에 가득하다. <과거의 상념> 사실 호박 하나가 일상에서 줄줄이 풀려지는 이야기는 과거의 길을 넓게도 채색 되는 듯하다. 가난한 시절 허기를 채워주던 “호박 하나가” 서글픈 지난날들의 파노라마로 일어나는 길에 부모님의 가난을 슬픔의 물살로 살아나는 애환의 갈증- 가난과 갈증의 아픔으로 누선(淚腺)을 자극하면서 현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회상하는 시가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호박이 지난 추억을 상기시키면서 부모님의 가난과 아늑하고 포근한 농촌의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드는 듯하다 이런 풍경과 추억은 시인의 마음에 매달렸던 동화된 마음과 사랑의 감성이 식물 정서와 지배적인 양(量)으로 시적인 허기를 채우는가를 증명하는 예로서 감흥이 솟아 나는 듯하다 하냥 걷는 길에 만상의 태고의 신비에 산길도 꽃으로 돋아 이리도 고왔는가? 뉘, 있기에 그리운 길을 같이 걷고 싶다 –중략- <산속 길에서> 시의 구조란 길-꽃-그리움으로 이어지는 짧은 단형의 시이다. 산속 길을 걷는 목적의 좌표가 시인은 태고의 신비를 만나 산길도 꽃으로 펼쳐진 길을 유영하며 산길을 걷는다. 아무튼 꽃은 지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미지칭으로의 꽃이기 때문에 그 꽃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을 표하면서 “고왔는가”의 새삼 발견에서 역시 꽃은 그리움이라는 먼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표백되는 듯하다 시인은 고달픈 인생의 비유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랑을 말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마지막 잎새 하나 욕심없이 내어준 노을 진 들녘에 찬비마저 내리고 아픈 잔등 쓰다듬다 한기 견디며 삶의 골짜기에 철새처럼 머문다 까마득히 저 산등성이로 차마 닿을 수 없는 달빛시린 헛된 꿈도 가고 내 삶의 이랑에 고인 욕망도 쓸고 간다. 세월이- <삶의 뜰> 다소 관념적인 시이지만 겨울 독목(禿木) 한기 젖은 모습을 바라보며 비극적인 무의식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독목이 있으므로서 봄을 예비하는 안온함이 자리하는 느낌이다. 이런 순환의 법칙은 곧 우주의 운행 원리와 상통을 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궤도와 다름이 없을 때, 비유가 생동감으로 일어난다 마지막 잎새하나 바람이 스치면 엄혹(嚴酷)한 시련의 줄기가 칭칭 얽히는 일상을 넘어 “삶의 뜰”은 봄을 기다리는 희망의 자리가 보인다. 식물 정서는 특히 여심을 나타내는 향기와 유연함을 이미지로 작용하여 시인의 시에 특성으로 자리하는 듯하다. 어머니 손때 묻은 항아리 그 안에 수련 있어, 고단한 삶을 이고 청초한 빛 쓸어낸 그 안 수려한 어머니의 자태가 있다. 물그림자 뜬 자리 물 배추 펴놓고 가을 햇살이 와서 사랑으로 아픈데 창문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어머니 분냄새 처럼 함초롬 향기 듣는다 <수련>(차분하고 고운 상태) 어머니와 수련의 향기가 동가(同價)를 이루면서 작고 아담한 또는 사랑의 향기로 돋아 오르는 연상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바람과 어머니의 내음과 가을 햇살 그리고 향기가 함초롬이 돋아나는 이미지의 결합엔 시심이 누리는 연상작용이 복합적인 것 같다. 이는 조용한 어머니를 그리기 위해서는 수련의 향기와 자태에서 사랑의 이름은 더욱 애달픈 상을 남긴다. 시인의 시는 이렇게 식물에서 느끼는 자태- 아름다움과 향으로 오르는 천상으로의 이미지는 고귀함을 자극하는 기교가 되지 않을까? + 2> 부모 가랑잎에 하얀 서리 내리면 깊은 골짜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 시름을 보듬어 소쩍새처럼 소쩍새처럼 못내 서러워 운다 –중략- <아버지>에서 잘은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가난의 굴레를 짊어지고 형극(荊棘)의 나날에서 끌려가는 형상- 가족을 책임진 신음을 생각하는 딸의 모습이 너무도 가련하다. 이는 “소쩍새처럼”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가 고난의 아픔이 연상 된다. 더구나 “서러워 운다.”의 내포는 풀어낼 수 없는 고통과 참혹성을 나타내는 비유일 것 같다 누구나 과거는 무겁고 회상하는 삶의 그늘이 무게와는 달리 친근하고 애착이 가는 그런 경향이 다분하다. 왜 그런가 하면 나의 소중한 추억이기에 비록 가난이나 아픔조차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발동된다는 점에서 시름이나 서러움일지라도 동화되기를 염원하는 뜻이 된다. 아울러 부재한 부모에 대한 회상은 더욱 무게가 가중되는 것도 사실이다. 유기연 시인은 이런 정서를 시화(詩化)하는 점에서 다감한 성정으로 생각된다. 나를 찾으면 이미 나는 내가 아니고 더 큰 나로 변한다고 한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는 나를 위해 운행한다는 생각으로 바꾸면 나를 찾는 일은 곧 우주의 원리를 찾는 일과 같을 것 같다. 나를 아는 일이야말로 철학의 시작이고 종점이기에 시련을 감내하면서도 나의 의미는 삶의 가치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부끄러움에 전신을 감추었다. 되비친 것이 사랑이면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 ...중략... 나는 무엇으로 거울 앞에 풍경을 피울 것인가 마지막 아름다운 고백이 되비치기를 기도하며 거울을 닦는다. <거울> 중- 나르시스의 이름은 자기에게 대한 탐닉(耽溺)을 의미한다 거울은 자기를 반사하는 모습이지만 정작 그것이 자기라는 확신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대편에 영상으로 나타난 자기의 분신일 뿐이다. 그 분신 속에는 보이는 마음이 없기에 오로지 형태만으로는 완전한 자기의 의미는 아닐 것이기에- 그러나 자기와 반대편에 서 있는 거울 속에 자기를 부정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형태조차 부정하는 곳에 의미는 찾을 단서를 확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나 되비친 거울 속에 자기를 애착하는 관심의 농도가 강할수록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비칠 것을 염원하는 생각이 일상을 벗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3> 사랑의 진원 사랑의 종점은 배우자를 만나면 자연스레 도착한다. 그러나 그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방황과 설렘이 교차하는 수많은 길을 가야 하기에 그렇게 간다, 하더라도 사랑의 안온함을 누리기엔 지불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고개를 넘으면 다시 고개가 나타나는 사랑의 행로는 오로지 현재라는 지점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누리는 마음의 평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 시인은 오로지 사랑을 위한 의미가 시에 모든 것을 투척하는 표정이라는 점, 아마도 남편을 향한 노래로 한정 되어 있는 듯하다.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두눈이 먼다해도 사랑의 빛으로 길을 밝혀주는 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허전한 날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중 이 세상에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한사람이 있습니다. <한사람> 중 저녁 노을에 기대어 있노라면 살포시 다가오는 얼굴 하나 차마 보고 싶다 말할 수 없어 수줍은 마음 하늘 가득 붉게 물들고 다정한 마음이 먼저 마중을 나간다. <그리움> 중 유 시인의 사랑은 빛나는 사랑을 원하는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수사의 사랑을 하는 것 같다. 조용한 공간에서 만나는 정서를 보여주며 순수하고 담백한 뜻을 가질 때 사랑은 고귀한 가치의 개념으로 정리 된다면 유 시인은 안온한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조용한 시인- 그런 시심을 안으로 감추고 부끄럽게 표출하는 시인이 아닌가 한다. 3. 에필로그 유 시인의 시는 담담하고 서늘한 가을 바람을 맞이하는 인상이 짙다. 이는 시인의 감수성에서 나오는 시심이 조용하고 아늑함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는 식물 정서에서 오는 정감이 부드럽고 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점에서 푸르른 식물 같다. 부모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따뜻한 정이 안으로 남기는 점에서 포근하게 다가온다. 이는 여심에서 보이는 감성이 유동하면서 객관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효과- 이러한 즐거움은 언어의 효과적인 비유와 장치를 만나는 반가움이다. 시는 사랑의 노래로 집약되는 듯- 하지만 물론 사랑의 요체는 한 삶을 향하는 절절함이 산뜻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시의 행로는 오직 사랑을 향한 정성과 시로서 표현하는 인상이 전부이지만 언어의 조화에서 삶의 높이로의 지향점, 부모님의 애절한 마음과 사랑을 위한 현실의 가치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순수의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놓고 나가련다. 2022. 08. 03.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 {이승섭 칼럼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이승섭 시집}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by 강해심 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