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갈증은 곧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가져오기에 여유롭고 넉넉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기능이 퇴화하고 늘어지는 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족한 면을 메우기 위한 행동을 예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순을 거치면서 자연과 세상은 변화를 맛보게 된다. 가을의 찬란함과 고독 사색이 없다면 가을이라 할 수 없으며 겨울의 추위가 없다면 봄의 꽃은 없을 것이고 불편하고 어려워도 첨단 즉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편리가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 이유가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같을 것이기에- 부족(不足)은 만족(滿足)의 모태가 된다. 이 명제는 진리가 함축된다. 왜냐하면 부족이 만족을 낳고 갈증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부복이나 갈증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을 위한 길을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한 줌 햇살 살짝 비추고 슬쩍 입맞춤 구름 걷히고 바람도 숨을 고르며 다소 곳 손 부여잡고 춤출 수 있으련만 주는 사랑으로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과 같이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 『주는 사랑』 중에서 구름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에서 행복이 오듯, 햇살은 최종의 기다림이고 구름은 이를 훼방하는 이미지로 다가들 때,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행복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주는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구하고 찾는 방황이 있어야만 사랑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물상 삼라만상에서도 통용된다. 그렇기에 인과적(因果的)인 현상이 증명으로 통하고 증명은 다시 되풀이되면서 삶의 원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정서에 특히 달관(達觀)된 정서를 유지하는 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자연과 같이” 자유의 생을 이룩하기 위해 열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필자) “주는 사랑”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 등이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가 기승 전 詩들을 원하고 그렇게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을을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겨울은 또한 봄을 맞이하는 계절이기에 겨울의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계절이다. 겨울은 어둠이고 방위로는 북쪽, 높새바람이 세찬 기운을 몰고 올지라도 마침내 봄기운에 꺾기는 의미를 낳는다. 봄이 심술을 부리다 떠난 겨울의 빈집에 각시방을 차리고 화사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초청했나 보다 앙상한 가지에 화려하게 단장을 시킨 파릇파릇 청순한 봄처녀들의 무희는 온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길모퉁이에도 바짝 마른 야산에도 펼쳐놓은 잔치에 무수한 인파들이 몰려들지 모르지만 간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 목 길게 빼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무희 춤사위는 지칠 줄 모르고 발길 닿는 어느 곳이든 공연 길을 나선다. 『봄축제』 중에서 봄은 나무들이 푸른 낙원을 색칠하는 계절이고, 꽃들의 축제이고 또 향기의 상승으로 고귀함을 연상하면서 들썩이는 계절이다. “무희”들의 “초청”은 바로 잔치를 준비하는 계절을 암시하고 2연에는 각시들의 싱싱한 모습이 육감적인 비유, 그리고 잔치의 “인파”와 더불어 노래가 세상을 장악하는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꽃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다시 향기로 세상의 공간이 분주하면 벌과 나비들은 인파를 이루는 인간과의 대조를 형성하면서 더욱 바빠지는 계절, 꽃과 향기로 상승하는 것은 봄이 갖는 특별한 기회이면서 자연의 질서가 형성- 꽃과 향기는 서로 보완적인 상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라는 존재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통찰이 섬세할 때,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자극하기 때문에 겨울에서 봄으로 진행하는 질서- 겨울을 이겨내고 용기 혹은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꽃과 향기의 상징에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풍경의 제시로 보여주는 흥겨움을 전달하면서 화려한 장마당처럼 분주해지면서 흥취에 젖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2. 추계의 노래 시인은 계절적 감각을 유난히 예민하고 그곳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필자) 이는 감각의 발달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에 가까운 인상에서 진실된 시의 표현미가 발동되고는 하지만 봄날보다 가을의 이미지가 다수인 것은 아마 남자 사색의 정서- 낭만을 즐기고 고독의 사색에서 오는 “ 외롭고 쓸쓸한 감수성”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계절별로 따지면 가장 많은 시들과 가을을 전하고 있기에 이는 필자의 내면 정서에서 발동되는 기운이 시의 진로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로 돌리면 되지 않을까 한다. 『가을은』 『가을 단상』 『어느 가을날에』 『추계 연가』 『늦가을』 『추억 가을』 『단풍잎』 등 가을의 시를 쟁취하면서 낭만으로 선행을 한다. 사색을 먹고 낭만을 먹으며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은 시간 갖는 풍경으로 저무는데 서리꽃 앙칼진 눈초리가 유난스럽다. 만추에 만삭의 절정 가을은 절벽 위 우두커니 고개 국이고 찬바람에 발등 찍힌 낙엽은 야윈 모습으로 슬픔을 노래해 달랑 걸린 낙엽 하나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 떨고 있네. 『단풍잎』 중에서 조락(凋落)에서의 반응은 슬픔이거나 우울 앞을 가린다. 가을의 슬픔은 감정을 예민 반응하면서 주변의 모습에 슬픔을 고하는 것 같아 분위기에 젖는 것이 가을의 정서라 하겠다. 이는 질축한 슬픔이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양상이기에 가을의 정서에 여린 마음이 더욱 많아지는 듯하다. 낙엽에서 삶의 아픔을 노래하고 1연에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 앙칼진 서리꽃의 표정 3연에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한 가을의 절정에서 느끼는 6연에 고개 숙이고 슬픔을 풍경으로 저무는 곡예 하듯 위태롭다. 결국 필자의 마음에는 가을에서 슬픔을 반영하는 낙엽의 슬픔과 대칭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을의 정서가 시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가을의 사색을 마음껏 즐기려 하는 필자는 팔자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계절 감성에 젖어 마음의 자아가 요동을 치는 것인지 유치하다고 느낀다. 3. 에필로그 한 인간의 시인이 영혼을 달래 주거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시가 밝아야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어둠이 햇빛의 상관에서 출발하고 절망이나 불행도 행복과 자유로 맞아 드리는 고통의 문이라면 필자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러한 경험의 채득을 시화(詩化)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며 여기서 개성을 발휘하게 된다. 시는 곧 시인의 개성의 문패가 되는 것이고 이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일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생활하는 필자는 이제 1년 정도 낯선 정서에서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1편의 시는 언어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더러 시는 비가 봄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쓰이고 다음 단계는 꽃과 향기, 계절을 불러와 승화시키는 순서를 갖기에 꽃은 늘 천상의 이미지 향기로 나타내는 것은 순치하는 순리이고 이치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가을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라면 가을은 시심의 동력을 제공하는 뜻에서 필자의 마음과 일체화된 가락으로 채워지는 것이기에 시인은 늘 가을의 중심, 계절의 중심을 배회하는 순수한 나그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 계속 시를 그린다면 견고(hard) 간결(simple) 정확(precise) 선명(vivid) 성을 현대 詩라 특질로 언급했다면 필자는 따스하고(warm) 온화함(soft)을 합작한 “휴머니스트” 적 행장으로 그리고 싶다고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 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詩的論이라는 것은 언어(言語)로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대체적으로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독자와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치 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云爲)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하여야 하여야 하기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적으로 받아 드리는 시인의 길을 가려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아픔,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으로 포장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금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현실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물음표이다. 이제 겨우 30여 명의 시인 논을 쓰고 있는 본인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이 되고 투영된 작품이 없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많지만 걸맞은 작품에서는 수사가 너무 많아 작품성의 가치가 없음이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 일게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공부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지부에도 젊음의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는 물음표(?)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은이들을 찾고 찾아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지부가 될 것이라 확신하며 찬란한 빛이 내려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일로, 개인의 아집을 보이는 모습이 필자가 보기에는 희망이 없음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다. 물론 연세가 많다 하여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필자 또한 나이가 익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편들끼리 모여 편들끼리 지부를 운영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곳에 정착한 지, 어언 여러 해가 되어 가지만 하나도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해 본인 스스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지만 공연히 평지풍파 아니 잘난 척하다는 모양새에 그냥 보고 듣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본인은 여러 지부에서 함께 생활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여기처럼 부자연스러운 지부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여 예술의 도시인 지부가 된다면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될 것이다. 4차, 5차원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강조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가 반목하면서 눈치만 살피고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 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잠시 현실의 안위를 생각하는 의미로 일탈을 한 것은 아닌지? 다시 평론으로 들어간다. 1. 봄바람 자리 <김영미>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꽃 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 아! 가벼워라. <꽃바람/김영미> 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꽃 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 마음의 자아 <박시연>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을 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신적,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時語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 않다는 데에 허전이다.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이유가 나타난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박시연>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 일게다. 좌고우면 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오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시라는 존재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의식과 일체화를 꿈꾸는 작업이라 본다. 다시 말하면 1+1은= 2가 아니라 3의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화학적인 결합의 일체화인 것이다. 이는 시적 장치인 비유나 역설, 은유, 직유 등의 장치를 가동하여 시인의 재능을 나타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지를 앞세우면 자아는 곧 시적 화자인 시인으로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순백이어야 하여야 때문만은 아니나 현실에 대한 의미를 내장한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시어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3. 에필로그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를 대중들에게 바치는 가수이기에 비록 서툰 곡조라도 신명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과 희망을 향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릴 줄 알아야 하고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fr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첫 시집에서 의도를 명료화하는 이미지 구성은 건강하고 튼튼한 재료를 배열하는 설계도를 완료한 것이다. 다음 건축은 확연하게 다른 시의 개성 그리고 우리나라 시의 의미를 위한 발성이 두드러질 때 기대하는 가 위의 논지들에서 재촉이 된다. 또한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는 비밀성이 낯설게 표현하지만 비유나 은유의 장치를 분해할 수 있다면 결국 시인의 모든 정서가 표백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인 자신을 말하는 우회적인 언어의 포착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향기를 발산하는 시인들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며 문을 닫으려 하며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에 마음의 자아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일탈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며 오늘은 나를 변명하는 일로 맺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2]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3]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평정심의 미소 “언어의 성숙은 정신과 행동에 수반하는 것”이라고 (T.S ELLOT)는 <고전이란무엇인? 가>에서 언급했었다. 왜냐하면 정신의 원숙은 행동의 원숙으로 이어지고 모든 조건이 언어로 표현될 때 비로소 글의 무게를 감당하는 역할을 갖는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둘의 상관은 인간의 가치와 문학의 가치와 비례 되는 등식(等式)을 도출하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고 선한 사람이 선한 시를 쓰는 것만은 아니다. 사상의 고매성이 묻어나는 언어에는 깊이와 맛깔스런 표현이 감동을 자극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왜 그런가 하니 고매함은 그런 격식을 갖춘 성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학의 언어는 곧 인격의 수용(受容)이라는 점에서 문학 표현과 인간의 상관성은 궁극의 도달점인 감동에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김인서 시인을 말한다면 지적이면서 원숙한 성품을 가진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설픈 언어의 과시가 아닌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맛칼스런 감수성으로 나타날 때 느끼는 삽상(颯爽)함과 풍미가 있는 점에서 남다른 시의 역할이 기대되는 시인이라 본다. 김인서의 시에는 가을날의 청아한 소리가 메아리로 들리는 뉘앙스에는 안도감과 미소를 동시에 받아보는 반가운 편지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제 그 이유를 추적하는 길을 답파(踏破) 해보자. 2. 여정의 상상 속으로 1) 성품의 성찰 시는 지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감수성이 시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현학적 욕망의 과시에는 냉소가 발생 하지만 비록 눌변일지라도 진실을 내포할 때는 소통의 미학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김인서의 시에 담긴 정신의 요체인 듯하다. 왜냐하면 도시적인 냉철함이나 과학의 칼날이 번뜩이는 자세가 아니라 체온과 체온이 부딧치는 우리네 시골 장바닥의 다감하고 따스한 인정이 스며있는 그런 정서가 김 시인의 마음에 유려(流麗)한 흐름으로 다가든다. 지금 난 먼 곳까지 못 갔어요. 고향이 코앞이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어둠 속에 수많은 별들만 주의만 맴돌고 먼 곳만 보이는 아스라한 인걸요.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누군가 그 안에 있을 것만 같아, 한참을 망설이다. 문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나 아닌 나가 되어 금방 나간 것같이 두려워지네요. 내 기억 속엔 왜 엄마의 모습이 없나요? 그런데 자꾸 엄마가 보고파 저요. 아마도 내 몸에 흐르던 엄마의 피였나 봐요. 엄마 이 냄새가 나를 살아있게 하나 봅니다.- 중략- <엄마의 연서> 중에서 김인서의 시는 부드럽고 지향적이며 향기가 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에는 다양한 언어의 의미를 감추는 기교가 보인다.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쉬운 형태를 만드는 일은 확실히 고급하고 고명한 방법이고 지혜가 동원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마치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그런가 하면 간과의 헤픔이나 어설픔과는 거리가 멀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우리 곁에 있으므로 느낄 때 정신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다면 김시인의 <엄마의 연서>는 그런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다. 엄마의 그리움을 마음으로 안으며 끈질긴 주위만 맴돌고 먼 길만 보이는 아스라한걸요. “엄마를 만나지 못한 애틋한 기다림을 피 같다는 주장에는 수구초심과 그리움이 물씬 풍기는 엄마의 품이 그립다는 정신의 핵심에는 온갖 애절한 마음이 냄새를 맡는 엄마의 품속으로 돌아간다. 요즘은너무도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도시인- 도시 체질은 항상 망각을 앞세우는 것 같다. 결코 떠날 수 없는 심상 깊은 곳에 귀향의 에너지는 인자가 길을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아마도 김인서의 정신 인자(因子)는 고향에서 만들어졌던 추억 엄마를 그리는 애잔한 맥락을 이루는 길을 만들면서 시로 연결되는 듯하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밤이면 슬며시 다가가 입 맞추고 싶어서 그 고운 얼굴 한순간도 놓칠 수 없어서 날마다 매달려 바라만 보는데 나비 한 마리 날아와 그 꽃에 입을 맞춥니다. 약이 올라 거미줄로 사방을 엮어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나비는 영영 다시 오지 않고 그리움 견디지 못하던 꽃 끝내 시들어 버리고 그 순결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어둠에다 제 몸만 옭아맵니다. <나만의 사랑> 중에서 ‘글은 사람이다. 라는 말은 프랑스 『뷔풍』 의 말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시인이다. 라는 말도 다른 말도 아니며 외도, 된 말은 아니다. 시 속에 시인의 전 인생을 투척하고 또 사상과 미래조차 내포된 의미의 숲이 곧 시라는 뜻을 첨가하면 한 편의 시는 곧 시인의 모든 면을 파악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요즘은 애완동물과 함께하는 현대인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그 꽃에 입을 맞추지 못하게 거미줄로 사방을 엮어 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나비는 영영 돌아오지 않고” “죄책감으로 나비의 기다림을 깨우치는 일은 대상을 포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면하려는 기다림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김인서의 정신이 펼치는 지도인 것 같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공식이 대입되는 사물 관찰법이라는 뜻이다. 이를 굳이 휴머니즘이라는 말대로 대신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말이 될 것 같다. 2) 자연의 식물 정서 시인마다 개성의 진로에 따라 관심의 분야가 다르게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생적인 환경에 의식의 지배를 조종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아는 것에 대한 관대한 관심, 집중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만든 음식을 많이 먹던 시절이 성인이 되어서도 그 음식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우리 모두 증명되는 사실 아닌가? 김인서 시인은 홍천에서 자라나 조그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추억을 쌓고 성인이 되어서는 도시에서 생활하다 고향으로 귀향하여 전원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세상의 아귀다툼 속에서의 시는 별로 없으며 거의 모든 작품은 전원에서『달맞이꽃』『자귀나무』 『제비꽃』 『연꽃』 『들꽃』 등 대부분 식물로 구성된 향기로 나타내는 시로 구현되는 듯하다. 너에게서 우주는 붉은빛으로 펼쳐지고 모두가 침묵에 잠기는데 네 안에서 언어들은 꽃이 되고 나비가 되고 새가 되어 어느새 낯선 것들은 친숙히 다가왔지. 어릴 적 돌담길을 걷는 것처럼 초가집과 골목 사이 아이들 소란함과 어른의 기침 소리 계집아이 봉긋한 가슴 수줍은 듯 잔잔히 머물던 햇살까지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영상들 꽃잎 위에 끝없는 몽상으로 펼쳐졌지 한참을 신비 속에 길 잃고 헤매다가 사랑으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 네 우주에 끝없이 여행하는 실바람이 되고 만다. <자귀나무> 중에서 시는 사물의 비유에서 변형(deformaton)의 기법인 것이다. 물론 비유와 상징 혹은 역설 등 모든 기교를 다하여 사물의 본질에 이른바 몰개성의 이론을 더하면서 의미의 확장을 꾀한다. 가장 핵심어가 시인의 시적 의도와 맥을 같이 하는 이유- ’ ‘어릴 적 돌담길” “아이들 소란” “초가집” “골목들” 들이 다가오는 소란스러운 운영상의 중심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의 돌담 풍경이 있는 골목이다. 그 공간을 돌아보니 “한참을 신비 속에 길 잃고 헤매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로 현재의 공간이 화면으로 펼쳐진다. 정신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모든 동물이 갖는 특징이다. 회귀(回歸) 의식과 더불어 자아의 중심을 거기에 놓고 의식의 넓이를 확대하는 것이 곧 삶의 공식이라면 사람은 항상 원점에서 지향을 갖는 것이 정신으로 압축된다. “자귀나무”는 어디에나 핀다. 다시 말하면 공간을 배타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평균율로 나누어 위치를 정하지만, 자귀의 이미지는 도시나 시골을 불문하고 같은 계절에 꽃이 피고 향기를 발산한다. 그러나 시인은 수평적인 공간에서 자귀나무를 꺼내어 고향에 절절함에 자신의 사고와 추억을 의탁(依託), 하는 고백이 선행된다. 일종에 상상의 승화라는 뜻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잘 아는 것은 정확하게 또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잘 알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애매모호한 것을 표현하면 결국 실패의 문패를 달게 되는 위험 때문에 경험했던 것 혹은 익숙한 것이 맨 앞으로 나오는 표정이 곧 시의 주재료가 된 것. 이런 요소가 전체 맥락을 지배하는 요소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마음대로 다가와 온통 흔들어 놓고는 말도 없이 떠나가 터진 심장 끌어안고 이렇듯 애만 태운다. 혹여 다시 만날까? 꿈길로 찾았지만, 그 모습 볼 수 없어 행여 다시 찾아올까? 그 길에 무성히 피어납니다. <들꽃> 중에서 흔한 것은 때론 그리운 것이다. 아무 이름도 없는 풀꽃일지라도 언젠가는 반가운 이름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오래전에 기억으로 묻어 있는 인연일 것이다. 더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들어 있는 요소들이 기억의 층을 뚫고 나올 때 시간의 벌판에는 이미 과거라는 이름으로 문패를 바꾸어 달았을지라도 함께 있던 정서가 춤을 추게 된다. 어린 날들의 추억이 말이다. 자연미는 자족성과 자발성의 특성이 있지만 예술은 이와 달리 노력이라는 담론을 개입하여야 성립된다. 자연미를 노래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에 애정의 결과- 이는 인간의 손이 개입하지 않을 때 가장 순수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예술성은 자연과의 대립이 아니라 공존과 조화에서 미적 순수성은 더욱 고양되는 경지를 방문하기 때문에 시인은 자연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재료로 시인의 감수성이 하나로 통합되는 질서의 구축을 용해하는 작품이 김인서의 자연관이자 놀이가 되는 것 같다. 3. 작가의 상표 <작품> 시는 시인 정신의 바로미터라면 한 편의 시에 대한 분석은 항상 치밀한 뇌수(腦髓)의 조력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는 종합적인 정서의 흐름을 느끼는 일에 더욱 깊이를 느낄 수 있다면 김인서의 시는 산뜻한 명칭을 감지할 수 있는 조짐이 넉넉하다. 물론 곰삭은 깊이와는 다르겠지만 인간 정신 성숙에는 정서 균형이란, 그리고 시의 무게 균형이 맞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안도감과 언어 운용의 진정성, 진지성, 더불어 사물을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나 언어 탄력의 요리 솜씨는 더욱 많은 진전을 가질 수 있는 밑바탕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앞으로 김시인 만의 상표를 부착한 독특한 시가 생산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논지를 내려놓는다. 2024.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는 절대적 명령권을 가진 신은 아니다. 더구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힘도 느낄 수 없는 다만 언어의 나열이라는 점에서길 위를 구르는 돌이나 들판의 나무와도 같은 대상일 수도 있다. 또한 시를 모른다, 해서 일상생활에 불편을 준다거나 생활하는데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잘살 수도 있고 또 시를 의식하지 못해도 으쓱거리며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심령을 지배하는 신은 인간이 찾고 존재를 인정하는 의식에서만 신의 음성이 들려오게 된다는 것과 심산(深山)에 돌일지라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인간에겐 미적 충동을 자극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대상을 의미의 옷으로 환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분은 정서에서 오는 미적 감수성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시의 의미는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시가 아름다움에 헌신하는 점에서는 종교와 다를지라도 순수와 아름다움의 진 면목이 보일 때 신성(神聖)과 미적 일치는 승화의 경지를 탐방하게 된다. 여기서 절대미란 곧 무아의 경지를 방문하는 액스터시와 다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념무상과 무아지경의 비경은 곧 우주의 원리 속에서 맛을 느낄 수 있기에 시가 오랜 역사를 통해 정신의 정점에 오르는 사다리 역할을 예외로 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고로 시를 모르는 경우 범인(凡人)은 될 수 있지만 정신의 엘리트는 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한 편에 시의 무게는 여기서 인간의 가치문제와 등가(等價)를 이룰 수 있음에서 무한의 가치 개념으로 승화한다. 시는 다만 시로 존재하면서 정신의 높이로 자리를 옮길 때 인간의 정서는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기능으로 수행한다. 시의 몫은 여기서 인간을 위한 치장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위한 노래가 될 때, 구원의 땅을 확보하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 시인의 정신 시는 체험의 재료를 상상력으로 건축하는 예술이다. 다시 말해 경험이 없는 상상력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상상의 원조를 절대적으로 받아야 가능한 예술이 시의 특성이다. 지극정성으로 봉양했던 분의 타계와 이어 다가온 건강의 충격은 곧 시의 바탕을 이루는 요소로 작용했고- 생의 본질에 대한 명상이 깊어진다. 특히 시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이를 생경(生硬)한 상태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가공의 절차를 통해 비유, 상징, 혹은 시적 장치를 동원하여 시인의 정서를 나타낸다. 장연식의 시는 항상 진지와 열정을 상상으로 대치하기 위한 탐구 의식이 남다르다. 이는 시인의 삶에 진정성과 정열이 결합하여 시적인 특성으로 환치되는 결과물이 시로 증명되는 이유로 대신할 수 있겠다. 3.정신 영혼 문학 1) 희망과 그리움 희망이란 인간이 절망으로 빠져 있을 때 인도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마치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은 더욱 빛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희망은 늘 절망을 먹고 살이 찌는 이름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절망을 보았기 때문에 그 반대의 이름으로 설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은 희망에 작약하기 보다는 항상 고통과 아픔 그리고 신음을 어떻게 처리하면서 어떻게 사는가의, 여부에 따라 생활의 모습은 달라진다. 이는 시인의 개성이면서 시적인 특질로 전환된다. 장연식 시인의 경우 긍정적인 생의 모습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의 정열 등이 복합하여 시의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따가운 햇살이 배나무 사이로 눈을 뜬다. 아련한 기억들은 안으로, 안으로 물이 올라 이제 막 물이 올라 털고 일어서는 가지마다 조금씩 조금씩 아슬한 밀어를 부풀리고 있다. 머뭇머뭇 나서보는 그대 생각 아득한 그대 생각 까마득한 외길은 삽시간에 안개 자욱한 미로 길을 찾지 못한 바람이 화첩 꺼내 색깔 풀기 시작하는데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가슴 가득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입술 터트려 온 동네 소문낼 것만 같은 이 봄 <떠도는 소문> 중에서 자연 상태의 묘사와 시인의 정서가 결합한 작품이다. 즉 봄을 머금고 개화를 시작하는 초봄의 분주함이 보이는 모습과 “머뭇머뭇” 나서보는 “그대 생각에” “자욱한 미로”의 암담함이 “색깔 풀기 시작하는데”에 이르면 “온 동네 소문이 번질 것” 같은 흥에 취해서 봄햇살 찬란함으로 마무리가 된다. 이 시는 “눈을 뜬다.”의 능동성과 “밀어를 부풀리고 있다.”와 “물이 올라 털고 일어서는 가지마다 부풀린다.”의 역동성 그리고 봄날의 분주한 변화에서 “소문”의 마지막 처리 “이 봄”에서 군더더기 없는 마무리에 여운의 자극을 주는 듯하다 향기는 언제나 밖으로 나오는 것 때문에 스미듯 다가든다. 시의 맛은 이런 작용을 감추는 언어의 작용에서 빛을 발하는 예술이다. 이정문 시의 맛을 느끼는 세련미는 “온 동네 소문”날 것 같은 자발적인 여백에서 “그대”와 “봄이” 등가를 이루면서 정서의 약동을 대면하게 된다. 는 방법이 “소문”과 같은 패턴을 나타낸다. 여린 살 속내 살며시 드러내며 햇살이 마주한 저 여인 첫 순정이라 <목련> 중에서 첫 순정이라는 이미지는 고아(高雅)하고 순수함을 나타내는 언어의 뉘앙스가 간직되어 있으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정서가 뒤따른다. 이는 서정적 자아를 나타내는 기교이면서 시인 자신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표출되는 고백이라는 점에서 곧 시인 자신을 나타내는 기교가 된다. 즉 서정적 자아는 세계와 시인이 갈망하는 정서의 고향을 뜻하면서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말하는 철학에 접근된다. “여린 살 속내”를 당당하게 드러낸 마음이 아니라 햇살이 오면 비로소 첫 순정의 꽃으로 나타내려는 내면성- 감추면서 살아온 삶의 도정(道程)이 숨어 있는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당당하게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햇살이라는 조건이 있을 때 은근하게 말하고 싶은 내면성에서 시인의 생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인종(忍從)의 세월이 숨어 있는 정서의 발견이 시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는 시인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은유라는 함축 속에서 추측의 미학이기 때문에 포장된 이면을 들여다보는 수고가 있어야만 기쁨을 터득하는 예술이라는 점이다. 시에는 전달의 향기가 있다. 그 마른 하나의 결정된 의미가 아니라 다양한 갈래로 다가온다. 박연식의 시가 갖는 위의(威儀)는 적어도 향기를 발산하는 은근함에서 더욱 다정함을 느낀다. 우리 춘삼월 만나자, 했지 살얼음 맨발인 지금 놀라운 하루 알아도 몰라도 내일은 와서 무량의 햇살 꽃 하나 피우기 위해 가득 초록을 풀 것이다. 내 몸 가득 초록 물들일 것이다. 춘삼월 만나자고 했으니 무량한 햇살에 믿어보자 <무언의 약속> 중에서 시인은 예지적인 말을 포장하는 능력과 타고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더구나 화려하고 순수함을 건져 올리는 의식에서 만나는 정서는 희망과 꿈을 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때, 비로소 구원의 음성으로 환치되는 절차가 수행된다. 그러나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말하는 시인의 생활은 이와는 다른 땅에서 살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차 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이르는 길을 연결하는 것은 상상력의 도구에 의해 시인의 재질은 빛을 발하게 된다. 퍼내도 퍼내도 줄지 않는 그리움 호수 위에 나뭇잎 하나 떠있다. 홀로 떠 있다. 바람이 망연하여 관조하며 홀로 호수 위를 밟는다. <그리움> 중에서 그리움의 구체성을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시인이 꿈꾸는 공간을 향하는 일이 상상의 줄기를 이루면서 시의 행로 즉 가는 길을 재촉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만약 시인의 의식이 일정한 공간에 갇혀 사는 과학자와 같다면 시가 아니라 화석 같은 의미의 덩어리일 뿐이지만 시는 살아 있는 의미를 만든다는 점에서 생명체의 창조- 시는 생명을 창조하는 의미의 축조라는 뜻이다. 박연식의 그리움은 매우 고독한 듯하다. 그리고 “홀로”와 바람 앞에 위태한 상징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위기의식은 현실에서 느끼는 강박함 혹은 병상 일기』에서 나온 초조라는 단서가 첨부될 것 같다. 그라나 “퍼내도”의 반복에서 그 원인은 미지(未知)를 향한 호소로 들려오는 메아리- 시인만이 느끼는 서글픈 이미지의 발상이라는 점이다. 고독은 누구나 갖는 이름일지라도 시인에게 고독은 시의 출구를 제공하는 점에서 운명의 슬픔조차 시의 원료가 되는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4.여백의 무게 시라는 단어는 단순한 문자의 조립이 아니라 시 속에 강한 신념의 에너지를 가질 때, 감동을 줄 수가 있다. 이를 위해서 시인의 행동은 항상 세상에 희망의 불을 켜려는 인도자의 모습이어야 한다면 이정문의 시는 그런 날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작고 낮게 보일지라도 언젠가를 위한 싹- 작은 씨앗이 화려한 봄날을 기다리는 일을 위해 우선을 생명의 고귀한 의미를 위해 오늘은 땀을 흘려야 한다. 침체와 절망조차도 동행의 친구로 삼고 언덕을 넘을 때, 그의 시는 희망의 웃음을 바람에 날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를 그리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가진 고백이 집합되어 고도의 언어의 기술로 나타내는 너무나도 깊은 내면을 알 수 있을 것 같으며 사물을 은유와 기교로 나타내는 너무도 아름다운 시를 그리는 시인이라 앞으로도 그가 진행형의 깊이가 넘치는 시집을 기대하며 영혼의 문학을 그리려 한다는 점에서 더욱 찬사를 보내며 에필로그 하려 한다. 2024. 06.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시집]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2]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모두들 자신들의 삶을 바라보면 우선 후회와 더불어 찾아오는 의식의 발견에 직면하게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발전의 의미이고 자기 각성의 길을 확보한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돌아보는 일이라면 나이와 깊이 상관관계가 있으며 체험의 축적이 어느 정도 쌓일 때 지혜의 성을 구축할 때, 비로소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즉 젊음이 있을 때야 가속도로 달리며 길 찾기에는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의 언덕을 넘으면서 자연스레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정서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즉 주름살 깊은 모습을 보면서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검토하기에 흰머리가 보이고 잘못 살아온 인생의 후회 또한 겹치고 스크린 되어 검은 강으로 흐르는 의식의 소리가 새벽을 흔들고 있을 때 “허망의 덩어리”에 짓눌러 살았던 지난날들에 보내는 연민이 애절해지는 것이다. 찾고, 쌓고, 높이려는 이기적인 삶을 돌아보면 모두 헛것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무념무상”으로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에 눈을 뜨지만 이미 지난 바람 소리의 행방을 결코 찾을 수 없는 현재 - 고달픈 여정의 자화상엔 또 다른 강물이 흐르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갖는 심사(心事)이겠지만 돌아보는 길에서는 아픔이고 돌아오는 것은 허무라는 생각으로 오늘을 확인하는 것이다. 유난스럽기까지 하지만 여기부터 방황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논어』 양화 편에 보면 공자가 아들 백어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사람은 마치 벽을 보는 것처럼 같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시인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다. 융통성 없는 답답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를 알아야 한다는 이 말은 감정과 사리 분별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시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시를 모른다 해서 세상을 살아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일 또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이라는 의미에는 아무래도 시를 알고 세상을 너그럽게 보는 안목의 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공자는 세상을 가장 힘겹게 살아온 아버지이자 성인으로 자식을 향한 지혜로운 부탁이다. 아울러 시경(時經)에 소재한 시 305수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의 표현에서도 그가 어떻게 시를 접했고 일상의 진실한 삶과 시의 연관을 얼마나 중요 시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시는 진실이라는 방패를 갖추어야 그릴 수 있고 진정한 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 고정관념의 잣대로는 사물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험의 강에 이룰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시는 현재의 모범이 될 수 있고 미래의 안목 가치를 창조할 수 있기에 시는 생명의 영원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자연과 사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다르다. 그렇기에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방법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분석하는 일은 단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복합이라는 데서 오랜 시간을 두고 관찰하는 일이 우선이겠지만 대별한다면 동양, 서양적인 태도 또한 저 아프리카 쪽의 삶도 귀중한 요인이라 하겠다. 사실 문화적인 흐름은 서양과 동양으로 대별했던 관례에 따른 차별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에서 차이는 동양은 묵언 수양, 또는 침묵으로 전달하는 기교가 우선이라 한다면 서양은 행동 양식으로 증명하는 일로 질서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옛날로 뒤집어보면 종교적인 현상이 지배적인 요인이라는 판단의 근거에서 언어의 표출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상은 두 개의 질서 속에서 세분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결국 문학이란 서양적 표현의 기법과 동양적인 표현의 기교적인 차이는 필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삶의 재료가 소재로 작동된다는 것에서 본질은 같을 것이다. 다만 방법상에서 차이는 삶의 원리에 궁극을 찾아 나서는 데서 나오는 것이 해답이 된다는 일치점을 예외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기교란 본질에서 직접 닿기 때문인 것이다.한 가지부연할 점은 서양의 Rheroric은 웅변의 뜻에서 출발하여 예술로 생각했던 서구의 사고와 동양은 애당초 침묵으로 전달되는 이심전심의 차이에서 동양은 말과 기교에 발달 논리가부족했을지라도인간 사고의 본질을 나타내는 차이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석가모니와 예수가 똑같은 결론에 답안을 작성한다는 예를 말들을 한다. 제자들과 소요하다 연못에 핀 연꽃을 들고 석가는 그냥빙그레 웃었을때-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웃었고 다른 제자들은 무슨 의미인가를 몰랐다. 이러한 예가 “염화지중”의 미소 답안이라면 예수는 아마도 연꽃 앞에서 “제자들아 이리 모여라” 이 연꽃은 더러운 흙탕물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처럼 너희들도 열성으로 기도하고 따르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요지의 말을 가정한다면 논리와 함축의 차이- 그 본질에 교훈은 같을 것이다. 방법의 차이는 결국 본질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는 “이지지”라는 말은 시론에 가득 들어있는 말이다. 동서양의 시를 막론하고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지를 구사하고 창조하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겠다. 시는 이미지 구축하는 것이 정서의 답이요. 이미지로 시인의 정서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특징을 삼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소설은 묘사라고 한다면 시는 이미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무를 갖는 언어의 표현이라 이 점에서 시의 이미지는 다양하고 공통된 정서의 집합을 이루는 특징 구유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같음에도 유사한 생각, 또는 표현에 일치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민족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이론- 사고와 판단의 차이가 엄존하는 이질성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2.『휴머니즘의 사랑』 사랑은 결합을 위한 갈증인 것이다. 휴머니즘의 거리가 좁혀질 때 비로소 사랑의 발생은 문을 열고 갈증이 애타는 그리움으로 변모하고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거리가발생되고그 거리를 유지 혹은 단축하려는 현상을 삶의 본질이라 정의한다면 갈증은 지정된 대상에가까이하려는마음이 사랑으로 진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갈증이고 그 갈증을 어떤 태도로 바라볼 것인가의 따라 표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마음의 거리감으로 생각하는 거리와 실제의 현실감에서 바라보는 거리에는 욕망이 발동될 것이고 거리의 소멸은 존재와 대상을 현상에서 말하는 멸각(滅却)의 상태로 진전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을 위한 마음이 발동될 때 비로소 말의; 성찬(盛饌)이 준비되는 것이다. 시 또한 시인의 정신적 갈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대상에 대한 열망 혹은 표현의 일체화를 이루기 위한 거리의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리의 파생은 필연적으로 가까워지려는 심리적인 거리와 또 멀어지려는 의도적인 거리가 있을 수 있기에 대체로 시의 경우 가까워지려는 점에서 갈증에 속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갈증과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원(圓)으로의 순환과 같은 연결이 되기에 사랑의 에너지는 갈증이 있기 때문에 비움이고 또 채움을 향해 에너지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목이라는 단안에서 사랑은 인간이 실현하는 가장 고귀한 덕목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부재를 암시하기 때문에 어둠이고 비극이 되는 이치라는 것이다. 인간과의 사랑 혹은 우주 자연의 모든 대상을 바라보는 휴머니터의 가슴을 갖는 일로 강조된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사랑의 마음은 모든 것을 변화로 이끌 수 있기에 마술사가 될 수도 있고, 또 외롭고 쓸쓸함을 아름다움으로 가꾸는 정원사의 역할로 치환(置換)될 수 있다는 이미지 발상법이라 하겠다. 3.『자연풍경과 이미지의 꿈,맥락』 자연이 주는 풍경 이미지는 가장 편리하고 찾기 쉬운 대상이다. 왜 그런가 하면 보고 듣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자연에서 나오며 자연에서의 일부이며 사건이며 삶의 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자연에 들어있는 시가 곧 우리의 문제와 직결되며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단편적인 단일 소재로도 수 편의 시를 창작하는 자연 도구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료(質料)가 삶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 이미지로 구성되는 만큼 인간 모두의 자연풍경 이미지를 어떻게 그리느냐의 시의 근간이 이루어지기에- 꿈도 상상의 이름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로 이해될 때 삶의 길을 넓히고 생의 이유를 긍정으로 생각하는 빌미이기에 꿈이 있는 사람은 건강하고 정서 이유가 명확하게 조절된다면 많은 시인도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말 꿈이 명료하고 정확하다면 이는 현실과 구분되지 못하는 잘못일 것이다. 꿈은 선계이며 이 설계는 신념을 가질 때, 꿈은 비로소 현실로 이끌려 나오는 속성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꿈은 모호하고 암담한 색채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꿈을 갖는 것은 신념의 공고화를 요구하고 또 찾아 나서기 위해 고된 일상의 언덕을 넘고 또 넘고 하는 것이다. 쉽고 편안하고 안정된 곳에서는 꿈은 나래를 접고 보이지 않는다. 안개, 호수라는 희미한 곳에서 다가오는 신념의 이름은 꽃의 향기를 대동하고 무지개색을 연출하는 장관이 될 수 있기에 자연의 꽃과 꿈이 보석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살아간다는 삶의 이름은 누구나 무거운 것이기에 이런 이유로 짧고 빠른 길을 염원하고 있지만 인생의 길은 그런 소망을 들어주지 않는다. 정직하고 솔직함에는 먼 길일지라도 삶의 자세가 아름다워진다면 시인의 정서는 그런 자리에 서있기를 고집한다.어린 시절의이미지가 오늘을 지탱하는 깃발이기에 산속의 물소리, 그리고 벌, 달, 바람 등 자연의 모습은 천연의 시가 되는 재료가 되기에 삶이라는 말에는 방법의 문제가 담겨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따라다니는철학이자 숙명의 과제물인 것이다. 계절과 새, 그리고 싱그러운 자연의 풋풋함이 시인의 정신을 맑고 꿈과 만나게 되면 환한 길로 인도하는 것 같은 모습, 다음 시로 위안으로 삼는다면 사는 일이 희망으로 발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꿈을 가지면 삶과 인생이 썩지 않고 싱싱해지는 소금의 빛이 되기에 꿈은 늘 그런 방향으로 지시하고 일러 주어야 멋지고 깊이가 넘치는 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속에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은 겉으로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의 이미지가 내면으로 꾸밈이 없어야만 살아나는 이미지로 결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동초의 시련을 감내하는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묻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하여 진정한 삶은 성실하고 바른 삶 가치가 더욱 고귀한 이유로 돌릴 수 있다. 인생 평가는 이름의 무게나 걸쳐진 의상이 아니라 내면 가치로 환산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4.『고독 그리고 허무주의』 고독과 허무가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것은 나이의 깊음을 감지한 시심이 그런 방향으로 지향하는 정서가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허무란 인간이 맞이하는 궁극의 지점에서 느끼는 공통성에 있다. 왜 그런가 하니 인간의 지혜는 시작과 끝을 느끼는 예지력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젊은 날의 열정과 노년의 지혜에는 삶의 흔적이 축적되었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습득했기 때문에 노년에 이르면나이브하고처연(悽然)함에 젖어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살아갈 시간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이 교차하기에 삶의 모습이 부드러워지고 느슨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고 돌아와 그 소득의 명세서를 보면 정작 어떤 것도 없다는 공(空)이라는 바닥을 실감할 때 돌아보는 길이 회색빛으로 변하고 여기에 허무가 짙은 음영을 그리면서 출몰하게 된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꽃이 핀들 꽃이 진들 무아지경으로 모든 것 가고 있는데 무슨 생각이 필요하겠나? 파라다이스가 있을 것인지 황홀경이 있을는지 허무로 모든 것 떠나가는데 이제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부자인들 가난뱅이인들 보이지 않는 작별인 것을 무슨 꿈이 필요하겠나? 이제 놓친 것 잃은 것 얻는 것 무의미로 지난 세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것을 <흔적의 세월> 지나가 버리고 떠나 버리고 작별인 것은 세월이 만든 사연이라 이러한 사연은 곧 허무와 고독을 불러오는 이름인 것이다. 이런 시인의 정서는 자연스레 마음이 공허하고 약해지는 자아를 키우게 되고 모든 것들이 떠나간 그리움과 작별의 아쉬움 그리고 부재에 따른 절망이 자리하는 시간 허무는 그렇게 스미듯 찾아오고 출몰하는 원인은 삶의 고달픔이나 아픔이 아니라 자연스레 찾아온 이유 나이는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와 가슴을 적시는 현상 때문에 작별이나 이별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는 이유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란 자괴(自壞)의 마음을 가져왔고, 다시 돌아보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것이 상정(常情)인 것을 어찌하리오. 5.『Humanism』이란<사랑의 가치>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시인의 임무이지만 이를 어떻게 표현미로 이미지 승화 시킬 것인가는 시인의 재능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사랑을 말하는 혹은 사랑으로 포장하는 점에서 휴머니즘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시가 모성을 바탕으로 진전할 때, 화려하거나 요란한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섬세하고 따스함을 포장하기에 이는 어머니의 마음– 또는 사랑이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모두에 헌신으로 통하고 희생을 앞세우면서 세상을 포용하는 점에서의 아름다움이라면, 아마도 모든 이들의 내면에는 모성애에 대한 회구가 들어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어머니의 태반을 통해서 생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심상을 가장 속 깊게 간직하는 정감이 있다.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귀의처의 공간이 어머니의 이미지라는 뜻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궁극적인 삶의 회귀를 뜻하는 일이며 휴머니즘은 시의 모태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피에로 엄니 날마다 반복이 변죽 되어 힌종이에 빼곡히 그려보아도 당신의 얼굴 꽃 같은 미소 오간 데없으니 주름살 백옥에 희생의 시간들이 그릴 수 없어 애끊는 마음만 통증으로 변해 버리고 되돌릴 수 없는 한탄 속에 오늘도 피를 토하는 마음 어찌하오리까? <피에로 엄니> 이승섭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인은 애절함이 절절 흐른다. 특별한 상징의 기법이 들어 있지 않지만 보편성에서 오는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매우 구구절절하다. 분신이 날마다 변죽만 울리는 엉뚱한 말만 하시는 어머님을 지켜보는 이는 사실 다시 일어나시기 어렵다는 무 희망 속에 애절함이 절절 흐른다. 긴병에 장사 없다고 했듯이 벌써 10년을 훌쩍 넘긴 어머니의 긴병을 간호하는 필자는 자식이 어머니의 모습에서 애끊는 마음과 피를 토하는 한탄 속에 원천적 모태 의식을 발동되어 결국에는 자신을 돌아보는 생각 때문에 너무나안타까울것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정감은 연민의 늪에서허우적거리는자화상을 보는 것일 것이다. 10년 넘게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는 그 마음 아마도 절벽의 늪이 아닐까? 하면서도실낱같은희망에 부모와 같은 인자가 휴머니즘의 일단일 것이다. 6.에필로그 시라는 것은 이미지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라 한다. 건축술의 일정한 방법은 필요할 것이기에 공간의 미학이나 효율성의 문제는 건축에 가장 중심을 이루는 핵심이라 한다면 시에서는 이미지가 그렇다. 이미지는 곧 시의 생명을 활력으로 전환하는 일이 언어의 평면성을 입체적으로 전환하는 가교적인 역할 또한 외면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의 산, 강, 고향, 부모형제, 여행, 삶의 문제, 사랑, 그리움, 자연풍경, 바다, 등의 범주에 시의 표현이 한정되어 있다. 이는 모든 시인들의 상상력의 범주가 대체로 일치함을 추적할 수 있는 소재들- 모든 시인들의 시에 가장 많은 흥미를 유발하는 절실성과 상관이 있는 이미지의 목록들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접촉하는 대상이 곧 시의 소재로 전환하기 때문에 주요한 대상화가 될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시인마다 관심의 집중화에 따른 선택의 폭은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많은 빈도의 시적 이미지는 거의 비슷하다는 특징이 우리 시의 표정이라는점이다.라고정리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4.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시집 1] [필자 시평집 2]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3]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4]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적(詩的)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言語)를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대안적으로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독자와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로 상반된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치 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云爲)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하여야 하여야 하기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 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들을 꼭 숙명적으로 받아서 시인의 길을 가려 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아픔,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으로 포장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 다사하게 발간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현실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물음표이다. 이제 겨우 30여 명의 시인 논을 쓰고 있는 본인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 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이 되고 투영된 작품이 없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부지기수이지만 걸맞은 작품에서는 수사가 너무 많아 작품성의 가치가 없음이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 담고 있는 지부에도 젊음의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막기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는 물음표(?)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은이들을 찾고 찾아 미래를 위해 모든 걸 내려놓는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지부가 될 것이라 확신하며 찬란한 빛이 내려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일로, 개인의 아집을 보이는 모습이 필자가 보기에는 희망이 없음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다. 물론 연세가 많다 하여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필자 또한 나이가 익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편들끼리 모여 편들끼리 지부를 운영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곳에 정착한 지, 어언 여러 해가 되어 가지만 하나도 변화되는 것을 보지 못해 본인 스스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지만 공연히 평지풍파 아니 잘난 척 하다는 모양새에 그냥 보고 들으면서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본인은 여러 지부에서 함께 생활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여기처럼 부자연스러운 지부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제 모두를 포용하여 예술의 도시인 지부가 된다면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云謂)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되어야 하겠다. 4, 5차원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강조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가 반목하면서 눈치만 살피고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 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잠시 현실의 안위를 생각하는 의미로 일탈을 한 것은 아닌지? 다시 평론으로 들어간다. 1. 봄바람 자리 <김영미>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꽃 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 아! 가벼워라. <꽃바람/김영미> 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꽃 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 自我의 발견<박시연>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을 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신적,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時語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 않다는 데에 허전이다.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이유가 나타난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박시연>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일게다. 좌고우면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5 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시라는 존재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의식과 일체화를 꿈꾸는 작업이라 본다. 다시 말하면 1+1은= 2가 아니라 3의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화학적인 결합의 일체화인 것이다. 이는 시적 장치인 비유나 역설, 은유, 직유 등의 장치를 가동하여 시인의 재능을 나타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지를 앞세우면 자아는 곧 시적 화자인 시인으로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순백이어야 하여야 때문만은 아니나 현실에 대한 의미를 내장한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시어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3. 나가면서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를 대중들에게 바치는 가수이기에 비록 서툰 곡조라도 신명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과 희망을 향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올릴 줄 알아야 하고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힘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첫 시집에서 의도를 명료화하는 이미지 구성은 건강하고 튼튼한 재료를 배열하는 설계도를 완료한 것이다. 다음 건축은 확연하게 다른 시의 개성 그리고 우리나라 시의 의미를 위한 발성이 두드러질 때 기대하는 가위의 논지들에서 재촉이 된다. 또한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는 비밀성이 낯설게 표현이 되지만 비유, 은유의 장치를 분해할 수 있다면 결국 시인의 모든 정서가 표백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인 자신을 말하는 우회적인 언어의 포착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향기를 발산하는 시인들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며 문을 닫으려 하며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에 마음의 자아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일탈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며 오늘은 나를 변명하는 일로 맺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5. 금요저널 주필/평론가/이승섭 시인 [필자 칼럼집] [필자 시집] [필자 시평집1] [필자 시평집 2]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인은 마음의 거울로 출발하기 때문에 시인의 마음으로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할 때, 삼라만상의 아름다움과 혹은 아픔, 슬픔, 그리움, 사랑 등의 목록들이 독자들에게 심금을 울려주고 자극을 주는 것이기에 가슴을 적시는 파문의 물살이 되기도 하며 더러는 가을하늘과 같이 투명하고 환한 풍경이 되어 다가올 때 시적 감수성은 자극의 깊이를 넘어 화려하고 미감(美感)으로 독자의 오감을 움직이는 것이다. 단순히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 시인 본인 당사자가 시의 중심이 되는 화학적 변화를 나타내는 시인으로 변모하게 된다. 사물과 사물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신선한 색다른 변모로 변할 때, 시의 맛깔나고 환상적인 여행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인마다 개성의 표정은 저마다 다르다. 부드럽고 개성의 시적 묘미가 있는가 하면 다소 딱딱하고도 견고한 표정 등 다양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어느 쪽이든 시의 개성과 발성은 희망과 꿈 그리고 아가페적인 사랑의 체온이 담아질 때, 비로소 시의 상승의 가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2.문법의 시작 시인마다 시를 대면하는 방법은 다르다. 직핍(直逼)의 방법으로 이미지를 구사하는 작가가 있다 한다면, 비유의 패각(貝殼)으로 완전히 다르게 시적 의미를 발굴하는 시인도 있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이든 자신의 개성에 따라 작시(作詩)의 방법은 달라지며 이에 대응하여 시의 성격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시가 감각이라면 이는 시인의 표현에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필수요소이다. 3.순수 신선한 맛 시는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의미의 확충을 꾀하고 응축시켜서 감동을 유발, 논리적 정치성- 구조의 통일성을 갖추어야 하기에 감동의 요인은 사실에 근접하여야 하며 과학적인 근거를 의미에 내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징의 효과, 혹은 비유의 적절성, 적재적소에 배치가 될 때, 비로소 잘 지어진 한 채의 성이 완성되는 것이기에 상징은 감춤도 아니요 드러냄의 성질도 아니요 반 투명성(translucency)에서 결국에는 애매성(ambiguity)의 의상을 갖추는 조직이라 이 특성에는 시는 마침내 질서의 예술이 된다. 다시 말해 봄을 말하기 위해서 결코 봄의 재료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봄의 이미지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봄은 꽃, 자연, 비, 등으로 출발하게 된다. 4.희망의 마음 절망은 희망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면, 희망을 절망의 토대 위에서 길을 만들게 되듯이 희망의 순서를 대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희망은 인내하며 인내하고 또 사랑을 위한 방법을 내포할 때, 비로소 시의 가치는 고귀한 이름을 득(得 )할 수 있다. 시를 읽고 본다는 개념은 희망을 읽는 일이며 사랑을 읽는 일이라면, 더불어 따라오는 꿈과 희망, 소망의 그림자는 행복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시의 소용(所用)이 있기에 활력과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시는 의식의 높은 자리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이라면 알아야 할 것이다. 눈앞이 아찔한 순간에도 잠시 정신 차리자고 속삭인다. 여전히 하늘 떠 있는 강물 위를 볼 때 늘 희망은 그 자리에 있다. -중략- <희망> 중에서 <졸 시> 희망을 그림으로 그린다는 일상은 아픔과 시련, 고난이 있을 때 가능한 역설적인 생각이나 즐거움이나 행복 속에서는 희망의 이름이 부재할 수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 역설의 장르는 늘 대기 상태에서 밖으로 나오기를 엿보지만, 인간이란 희망의 가까움을 신념으로 키우지 않으면서 탄식만 길어지는 경우가 절망에 압도당하거나 포기하거나 할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자고”의 다짐이 있기에 희망의 싹은 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희망의 기회를 다짐하는 경우보다 탄식이 길어지면 하늘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경우가 더 많고 묘연해지는 일이지만 신념은 이런 처지(포기 등)도 앞을 주시하는 일면 “늘 희망은 앞으로도 그 자리에 있다.라는. 말에 바로 인자라고 하는 것이다. 5.희망 꺼내기 솔바람이 한 줌 새벽 까칠한 삼베옷이 맞는 여름 상큼한 솔바람 영혼이 콧바람 불며 마중하네. -중략- <여름> 중에서 <졸 시> 솔바람은 상큼한 기운을 가져오는 사물 이미지이다. 이 바람이 아침을 휘돌아 나가면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삽상(颯爽)은 가히 최상의 기분을 장악하게 된다. 마치 ”깔깔한 삼베옷“의 서늘한 감촉과 ‘솔바람’의 만남은 시원한 정서에서 가장 합당하지 않을까 하는 이미지로 부각된다 이는 한여름 더위와 상반되는 신선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다가드는 것이다. ‘까칠한 삼베옷’은 ‘영혼’을 말해 주듯 하며 ‘콧바람 불며’ 신선한 솔바람이 불어와 영혼을 깨우고 마중한다는 기분은 매우 인상적으로 의식을 자극한다. 햇살 좋은 날 찬란한 만추에다 축 처진 마음 꺼내 갈 하늘에 쏘이며 고개 숙인 겸손의 계절이 날 부른다. -중략- <가을날> 중에서 <졸 시> 6.에필로그–꿈의 자연 시는 마음을 그리는 풍경화라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무슨 그림을 그리는 가는 시인 개개인의 상상이 빚어내는 소재라 한다면 이를 어떠한 기교로 표현할 것인가는 시인 자신의 재능에 귀속되는 것이다. 문학적인 상상은 현실의 상상과는 다른 차원의 깊이가 있기에 자신의 삶을 축약시킨 것들일 수도 있으며 나름대로 깊이가 있고 오랜 습작의 소산으로 돌릴 수 있는 이유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소재와 기능이 우수하고 개개인의 체험이 상상과 결합한다면, 그가 빚는 시는 탁월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 그렇다는 것이다. 언제나 시인 개인의 상상은 많은 재치와 사물의 수용에 감각적인 특징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봄에 느끼는 생동성에서는 의욕이 분출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고 여름에는 편안한 표정으로 사물 대면하기가 이채로워야 한다 물과 바다를 재료로 떠나는 여행이 조급하지 않아야 하며 한가로움을 주는 인상이라면, 가을의 깊이는 심사(心思)한 사색의 길이 열리고 색깔의 자유가 편안해야 한다. 그리고 겨울은 백색으로 포장된 이미지와 성주- 즉 꿈을 꾸는 성안의 모습을 평화와 아늑함을 주면서도 따스함이 따라오는 그런 투명의 시를 그려야 된다는 논점이다. 그러나 꼭 이렇게 그리라는 주체는 없는 것이다. 개인의 차이에 따라 꿈과 자연의 조화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의 따라 달라지기에 언제나 꿈과 자연을 벗 삼아 상상이라는 언어를 탐구하고 자기만의 표정을 문자로 그리는 그림일 것이기에 이것만이 정답이라는 논조는 없다. 자신의 거울을 만들어 투영하고 사회적 풍경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창조주일 것이다. 결국에는 꿈과 자유, 풍경화를 자기만의 개성의 이름으로 나타날 때만이 비로소 자기만의 성(成)을 구축할 수 있고, 여기에 완전한 성주의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꿈과 자연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려는 노력의 모습들이라면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논지를 말하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이승섭 시평집(베스트셀러집)]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는 사람의 삶을 그리는 예술이다. 물론 언어라는 포장을 통해 미적 감수성을 발동하는 점에서 기교도 필요하며 진실함도 무엇보다 시에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시는 언어의 응축을 통해 시인 자신을 그림으로 그려낼 때 기교가 앞서는 사람도 있고 또는 있는 그대로 목눌(木訥) 할지라도 친근함을 낳게 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논어(論語)의 자로(子路) 편엔 ‘강의(剛毅) 목눌(木訥) 근인(近仁)’ 즉 굳세고 소박하고 말을 뜨게 하는 일은 어눌함도 가깝다‘는 말을 했다. 청산유수의 유창한 말이나 억지로 굳센 척하는 사람은 믿음을 보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소박(素朴)하고 다감한 사람에게는 믿음을 보낼 수 있다는 뜻이 강조된다. 시는 사람을 그리고 말하는데 진실이 가장 큰 무기라는 설법이 유효하다면 이태연의 인간미는 그렇게 시로 녹아 들어있으며 진실성에 가깝다 할 수 있겠다. 시를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이고 유교가 왕성할 때 배운 시인의 연배는 그럴 것이다. 심지어 벼슬길의 시험 과목조차 시였다면 시는 곧 지혜를 담고 있는 도구라는 뜻이고 이를 통해 인간의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시의 특성이 곧 인격이나 품성의 뜻이라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시경(詩經)에 소재한 305수는 한마디로 사무사(思無邪)라는 정의에 이르면 시는 인격 수양 도구라는 척도(尺度)에서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이라는 뜻이 앞선다. 풍자와 해학 그리고 심성을 파악하는 도구로 시를 생각한 동양문화는 그만큼 시의 가치를 우선하는 풍조를 뜻한다면 서양은 음악적 기교의 그릇쯤으로 생각 한데서 차이가 있다. 더불어 인간을 강조하는 뜻이 아니고 시는 항상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형상화에서 그 가치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응축(凝縮)의 표정과 수축』 시가 산문과 외형상 다른 것은 응축(凝縮)이라는 시각적인 특성에 있다. 다시 말해서 산문은 팽창적이지만 시는 응축 적이고 수축 적인 특성을 갖는 언어 표현이다. 응축을 위해서 시론의 논리는 여러 장치를 마련한다. 리듬의 필요성과 율격 혹은 이미지의 창출을 위시해서 비유라거나 상징, 인유, 패러디 혹은 어조의 문제, 퍼소나, 아이러니, 역설 등등 많은 이론의 등장은 결국 시적, 언어는 줄임으로의 원리와 같다는 설명이 따라온다. 미상불 시는 언어의 형태가 산문과 달라야 한다면 결국에는 짧은 호흡으로 소화하는 장치가 필수적인 문제로 등장한다. 물론 이런 절차를 수행하는 시 쓰기는 사실 산문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행과 연을 끊어 시라는 표정을 만드는 일은 무지의 일환일 뿐-정작 시를 쓰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얀 구름 위 떠다니는 그대 모습 그려봅니다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잔상에 눈을 감아보나 흔적 없는 잔흔만 남기어 잔상으로 떠도는 그대 모습 잡으려 짓무른 눈 비벼보나 모두가 허상이라 애써 풀죽은 모습 감추고 살며시 눈물 훔치니 나 여기 있어 하며 잔상으로 보입니다 그대가 <그대가> 중에서 4연 12행에 담겨진 내용은 그대라는 미지의 대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린 시이다. 찾으려 하나 찾을 수 없는 얼굴을 구름으로 형상화하기도 하고 결국 모두가 허상으로 남는 허무를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마지막 연에서는 찾을 수 없던 ‘그대가’ ‘나 여기 있어’라는 역접의 형태로 나타날 때, 마음에서는 항상 자제하고 있는 그대를 설명하고 있다. 결국에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으로 그대가 내 마음속에 들어 있다는 형태의 설명이지만 어떻게 언어를 배열하는가의 문제에 따라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갖는 것이 시의 특성이다. 심지어 맞춤법이나 마침표의 있고 없음에 따라 시의 맛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태연의 모든 시는 비교적 단문으로 형성되었다. 무엇은 무엇으로 끝나는 형태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전달의 묘미를 줄 수 있는 요소가 되는 것도 독자를 지루하게 끌고 가는 것을 자제하고 있음을 칭찬하고 싶다. 또 다른 특성은 시의 탄력이 응축에서 나오는 장치라면 이런 일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때 신선감을 줄 수 있어야 함도 따라오는 조언일 것 같다. 3. 계절의식 봄은 만물이 생성하는 점에서 시작이라면 방위상으로는 동쪽이고 해 뜨는 공간이 된다. 얼었던 땅은 풀리고 어둠에 숨어있던 싹은 이름을 알리기 위해 분주한 때가 된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계절이 따로 있다. 어떤 사람은 눈 내린 겨울을 사랑하고 또는 낙엽이 지는 쓸쓸함의 가을 혹은 태양의 계절 여름 등등 저마다 다른 이유로 좋아하는 계절이 개성에 따라 기호로 선택된다. 이승섭의 계절은 봄이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시의 구성으로 보면 그 나름의 사연이 들어있는 것 같다. <봄비와 같이>,<연무 속 봄>,<가버리고 말았습니다>,<춘삼월 판타지>,<춘길 따라> 등 상당한 빈도의 봄 시가 시인의 정신과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봄은 비로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겨울을 단절하는 것은 비가 내림으로 인해 모든 생명을 깨우는 역할이 비로부터 시작된다. 아울러 굳은 땅을 녹이는 절차가 구체적으로 시작하는 일은 비의 소식으로부터가 된다. 요란했던 시간 지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어둡고 괴로웠던 모진 시간 기억 저 너머 버려지고 아지랑이 꽃 되어 바람 든 이내 마음 활짝 핀 봄이 되고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리운 오월이라 예쁜 구름 흐르고 내 가슴에 햇살이 살며시 아지랑이 되어 만개한 푸른 잎 꽃이 되어 활짝 웃더니 속삭이며 손짓하네 <만개> 오월은 정신없이 꽃들이 아우성치는 계절이다. 봄이 무르녹았고 그 봄의 중심에 오월은 화려한 이름의 정원을 꾸미는 시간에 시인의 마음은 부풀어 오르는 구름이 된다. 이를 일러 ‘그리운 오월’로 명명하고 꽃들이 속삭이는 의인의 눈짓을 친숙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봄은 시인의 정서를 용약(勇躍)하게 하고 마음의 에너지를 충만으로 이끄는 계절의 봄은 특별한 의미로 진전된다. 만개한 꽃들은 바람에 의지해서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특성을 설명하게 된다. 바람이 시인의 의도를 전달하기도 하고 또 미지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봄 내음 향기 취해 봄의 사랑 가슴에 안고 그대 곁으로 향해 봅니다 봄이 오는 멜로디 따라 당신의 마음 알 것 같이 싱그러운 그대에게 가봅니다 <살며시 그대에게>중 4연중 2연을 옮겼다. 그 모티브는 향기로 그대에 이른다는 뜻이 압축되었다. 물론 바람에 의해 향기로 변모하고 이내 그대 앞에 이르면 그대의 반응은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연상하는 이미지가 천상의 높이로 솟아오르는 뜻을 전달하고 싶은 시심(詩心)에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진다. 시는 곧 대상과 시인과 일체화를 꿈꾸는 일이기에 향기에 젖는 일은 곧 일체화의 조화 속에 들어있다는 암시를 만나는 일이다 가을이나 겨울로 접어들면 의식은 작아지고 안으로 어둠을 불러들이는 절차가 바람으로 시작한다. 차디찬 바람에 아리고 시린 마음 네게 쫓아 가본다 떨어진 꽃잎 한 장 우는 가슴에 갈피 끼워 두었노라 훗날 내 모두 다 잊는다면 조심스레 펼쳐보리 <훗날 말하리라>중 겨울은 그리움을 저장하고 또 우편으로 보내려는 마음이 조바심의 때가 된다. 바람은 서성이면서 아우성이고 세상은 숨죽이고 잠이든 양 고요한데 오로지 바람의 햇살이 아픔을 더해주는 기승에 두려움이 거칠어진다. 때문에 떨어진 꽃 잎 한 장을 갈피에 끼워 저장하는 그리움의 아름다움이 상상의 나래를 타게 된다. 4.전달의 이미지- 물과 바람 물은 스미는 것이 특징이다. 술 또한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점에서는 물과 같을 것이다. 다만 물은 흙으로 스며든다면, 술은 인간의 몸으로 스며 들어가는 점에서는 모두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태연의 시에는 이런 전달의 메시지가 시인의 의식을 이동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바람도 물과 같이 공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역할에서 동일시 되며 제한이나 막힘이 없는 자유자재의 특성이 여타 이미지와는 다르다. 삭풍에 땅에 내린 혹한(酷寒) 숨죽이며 동면하는 사이 숱한 사연들 주마등을 넘습니다 깊은 연무로 변한 시림(사람)을 곡주에 고운 빛 품속인 듯 그대에게 녹아들어 갑니다 <흔드는 흔적>에서 술이 물처럼 스며드는 속성- 이는 그대라는 대상에게로 지향하는 점에서 애절성을 간직하게 된다. 더구나 겨울의 얼음장 같은 시절의 혹한 속에서 ‘숱한 사연’을 보내는 일은 불가능의 벽이 가로막힐 때 술은 위안이자 그대라는 체온과 마주하는 상상의 공간이 될 것이다. 결국 ‘곡주의 고운 빛 품속인 듯/그대에게 녹아들어 갑니다’의 도달점이 그대라는 대상과 일체화의 꿈을 이루게 된다. 바로 술의 힘에 의지해서 말이다. 5.세월 그리고 마음 인간은 누구나 세월 속에서 살고 또 세월의 공간을 벗어나는 방법이 없다. 마치 존재는 일정한 공간 속에서 운명을 이끌어야 하는 숙업(宿業)의 길을 가고 있음에서 한계의 삶이 곧 인간사일 것이다. 세월은 곧 삶에 약속의 이름이고 이 약속에 충실할 때 희망의 끈이 펄럭이는 삶으로의 환치(換置)가 달성을 향해 문을 연다. 내 마음 씻어 엉켜지고 흐트러진 마음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살며시 숨겨놓고 싶습니다 고뇌와 번뇌와 가득한 그 무엇을 봉오리가 꽃이 되듯이 깨끗이 씻기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씻어 버려 그냥 잔잔한 맑은 물처럼 사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습니다 <내 마음 씻어 버려>에서 ‘씻어버려’와 ‘씻어 버려’는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씻다.의 의미이고 후자는 씻어서 버린다의 뜻이라면 후자에서 시인은 왜 버려야 하는가를 모를 일이다. 물론 씻어 깨끗한 마음을 갖고 살고 싶다는 소원의 뜻이 강조되면서 세월 속에 담겨 혼탁한 마음을 정화하려는 의도가 승(勝)하다는 인상이 앞선다. ‘깨끗이’살고 싶다는 소원은 인간 누구나 갖는 보편적인 심사일 것이라면 마음의 순화를 염원하는 일은 삶의 본질이고 근원이 될 것이기에 추구점이 확실한 목표로 작용된다. 시인은 이런 정화와 순화를 위해 자정의 노력을 갖고 삶의 언덕을 넘는 일이 일상적일 때 세월의 벽을 넘는 승리의 깃발이 예약되는 것 같다. 마음이 깨끗하면 곧 아름다움을 만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에필로그 -성숙을 위한 가락 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언어로 표현하는 실행의 예술이다. 때문에 시인이 쓰는 언어는 창조라는 말로 대신하듯 진정한 아름다움에 조건 없이 헌신해야만 한다. 이태연의 시는 물과 바람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이동을 도와주는 메신저의 역할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의미의 공간으로 전달을 수행하는 길잡이가 되는 인상을 준다. 모든 시인은 표현 대상에 그리움을 보내면서 애타는 마음이 시의 구성요인을 이룩하지만 누구나 성공의 메시지 작성은 아닐 것이다. 여기엔 진실한 체험의 요인들이 복합적 혹은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이미지를 완성할 때 시인은 후면에서 조종 혹은 지휘의 총책임자의 역할을 다할 수가 있다. 이태연의 시는 이런 면에서 세월을 끌어와 성숙을 위한 가락을 창조하는 임무가 다양한 표정으로 삶의 기억을 심고 있는 시인이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와 시를 변화로 인식하는 노력은 앞으로 이태연의 시적 무게라는 조언을 남기면서 책임을 벗어나려 한다. 2024. 05. 대중문화 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갈증은 곧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가져오기에 여유롭고 넉넉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기능이 퇴화하고 늘어지는 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족한 면을 메우기 위한 행동을 예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순을 거치면서 자연과 세상은 변화를 맛보게 된다. 가을의 찬란함과 고독 사색이 없다면 가을이라 할 수 없으며 겨울의 추위가 없다면 봄의 꽃은 없을 것이고 불편하고 어려워도 첨단 즉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편리가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 이유가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같을 것이기에- 부족(不足)은 만족(滿足)의 모태가 된다. 이 명제는 진리가 함축된다. 왜냐하면 부족이 만족을 낳고 갈증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부복이나 갈증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을 위한 길을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한 줌 햇살 살짝 비추고 슬쩍 입맞춤 구름 걷히고 바람도 숨을 고르며 다소 곳 손 부여잡고 춤출 수 있으련만 주는 사랑으로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과 같이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 『주는 사랑』 중에서 구름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에서 행복이 오듯, 햇살은 최종의 기다림이고 구름은 이를 훼방하는 이미지로 다가들 때,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행복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주는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구하고 찾는 방황이 있어야만 사랑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물상 삼라만상에서도 통용된다. 그렇기에 인과적(因果的)인 현상이 증명으로 통하고 증명은 다시 되풀이되면서 삶의 원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정서에 특히 달관(達觀)된 정서를 유지하는 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자연과 같이” 자유의 생을 이룩하기 위해 열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필자) “주는 사랑”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 등이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가 기승 전 詩들을 원하고 그렇게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을을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겨울은 또한 봄을 맞이하는 계절이기에 겨울의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계절이다. 겨울은 어둠이고 방위로는 북쪽, 높새바람이 세찬 기운을 몰고 올지라도 마침내 봄기운에 꺾기는 의미를 낳는다. 봄이 심술을 부리다 떠난 겨울의 빈집에 각시방을 차리고 화사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초청했나 보다 앙상한 가지에 화려하게 단장을 시킨 파릇파릇 청순한 봄처녀들의 무희는 온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길모퉁이에도 바짝 마른 야산에도 펼쳐놓은 잔치에 무수한 인파들이 몰려들지 모르지만 간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 목 길게 빼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무희 춤사위는 지칠 줄 모르고 발길 닿는 어느 곳이든 공연 길을 나선다. 『봄축제』 중에서 봄은 나무들이 푸른 낙원을 색칠하는 계절이고, 꽃들의 축제이고 또 향기의 상승으로 고귀함을 연상하면서 들썩이는 계절이다. “무희”들의 “초청”은 바로 잔치를 준비하는 계절을 암시하고 2연에는 각시들의 싱싱한 모습이 육감적인 비유, 그리고 잔치의 “인파”와 더불어 노래가 세상을 장악하는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꽃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다시 향기로 세상의 공간이 분주하면 벌과 나비들은 인파를 이루는 인간과의 대조를 형성하면서 더욱 바빠지는 계절, 꽃과 향기로 상승하는 것은 봄이 갖는 특별한 기회이면서 자연의 질서가 형성- 꽃과 향기는 서로 보완적인 상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라는 존재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통찰이 섬세할 때,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자극하기 때문에 겨울에서 봄으로 진행하는 질서- 겨울을 이겨내고 용기 혹은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꽃과 향기의 상징에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풍경의 제시로 보여주는 흥겨움을 전달하면서 화려한 장마당처럼 분주해지면서 흥취에 젖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2.추계의 노래 시인은 계절적 감각을 유난히 예민하고 그곳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필자) 이는 감각의 발달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에 가까운 인상에서 진실된 시의 표현미가 발동되고는 하지만 봄날보다 가을의 이미지가 다수인 것은 아마 남자 사색의 정서- 낭만을 즐기고 고독의 사색에서 오는 “ 외롭고 쓸쓸한 감수성”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계절별로 따지면 가장 많은 시들과 가을을 전하고 있기에 이는 필자의 내면 정서에서 발동되는 기운이 시의 진로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로 돌리면 되지 않을까 한다. 『가을은』 『가을 단상』 『어느 가을날에』 『추계 연가』 『늦가을』 『추억 가을』 『단풍잎』 등 가을의 시를 쟁취하면서 낭만으로 선행을 한다. 사색을 먹고 낭만을 먹으며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은 시간 갖는 풍경으로 저무는데 서리꽃 앙칼진 눈초리가 유난스럽다. 만추에 만삭의 절정 가을은 절벽 위 우두커니 고개 국이고 찬바람에 발등 찍힌 낙엽은 야윈 모습으로 슬픔을 노래해 달랑 걸린 낙엽 하나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 떨고 있네. 『단풍잎』중에서 조락(凋落)에서의 반응은 슬픔이거나 우울 앞을 가린다. 가을의 슬픔은 감정을 예민 반응하면서 주변의 모습에 슬픔을 고하는 것 같아 분위기에 젖는 것이 가을의 정서라 하겠다. 이는 질축한 슬픔이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양상이기에 가을의 정서에 여린 마음이 더욱 많아지는 듯하다. 낙엽에서 삶의 아픔을 노래하고 1연에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 앙칼진 서리꽃의 표정 3연에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한 가을의 절정에서 느끼는 6연에 고개 숙이고 슬픔을 풍경으로 저무는 곡예 하듯 위태롭다. 결국 필자의 마음에는 가을에서 슬픔을 반영하는 낙엽의 슬픔과 대칭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을의 정서가 시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가을의 사색을 마음껏 즐기려 하는 필자는 팔자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계절 감성에 젖어 마음의 자아가 요동을 치는 것인지 유치하다고 느낀다. 3.에필로그 한 인간의 시인이 영혼을 달래 주거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시가 밝아야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어둠이 햇빛의 상관에서 출발하고 절망이나 불행도 행복과 자유로 맞아 드리는 고통의 문이라면 필자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러한 경험의 채득을 시화(詩化)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며 여기서 개성을 발휘하게 된다. 시는 곧 시인의 개성의 문패가 되는 것이고 이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일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생활하는 필자는 이제 1년 정도 낯선 정서에서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1편의 시는 언어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더러 시는 비가 봄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쓰이고 다음 단계는 꽃과 향기, 계절을 불러와 승화시키는 순서를 갖기에 꽃은 늘 천상의 이미지 향기로 나타내는 것은 순치하는 순리이고 이치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가을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라면 가을은 시심의 동력을 제공하는 뜻에서 필자의 마음과 일체화된 가락으로 채워지는 것이기에 시인은 늘 가을의 중심, 계절의 중심을 배회하는 순수한 나그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 계속 시를 그린다면 견고(hard) 간결(simple) 정확(precise) 선명(vivid) 성을 현대 詩라 특질로 언급했다면 필자는 따스하고(warm) 온화함(soft)을 합작한 “휴머니스트” 적 행장으로 그리고 싶다고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4.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는 개성이고 마음의 축도라는 점에서 시 1편은 자신으로 돌아가는 표정일 것이다. 누구나 시인이라면 마음의 에고가 깊어야 하며 열린 마음의 상태로 시에게 구애하지만 언제나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초점에 에고의 깊고 신명이 날 때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기에 끈기와 ego 의식의 길을 갈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마음과 에고의 정신이 깊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가 인간의 표정을 그리는 얼굴이라 한다면 삶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의 표정이 스크린으로 담아지는 것이다. 여기엔 삶의 진솔성이 있어야 하며 시인의 삶이 곧 시와 동등(同等)한 높이를 유지하면서 미적 감동을 생산하는 근거는 시인의 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T.S. Eliot이 『고전론』에서 고전의 조건을 첫째 정신의 원숙, 둘째 행동의 원숙, 셋째 언어의 원숙을 주장했을 때 행동의 원숙과 정신의 원숙이 남다른 경우, 작품의 영원한 생명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삶에 대한 평가는 매우 시사적인 암시를 주는 것이다. 거짓으로는 결코 멋진 시 좋은 시를 창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시인은 언제나 자기에게 충실할 때 비로소 시의 가치를 건져 올리는 길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한 듯하다. 꽃이 지고, 잎이 지면 이별했던 여인처럼 어서 오라고 푸른 손짓으로 포옹하며 오는 봄의 전령 달콤함으로 오는 봄의 전령사 = 중략= <봄의 전령사> 중에서 봄이라는 전령사는 푸르른 마음이 담긴 시인의 의도가 보이는 것 같다. 김성숙의 시에 들어가면 모든 심성과 정신이 순수하고 투명한 햇살을 연상시키면서 끌려가는 듯하다. 봄의 전령사는 아무 불평불만이 없으며 타인에게도 간섭 없이 저마다의 소임에 충실한 오월의 푸른 정경이 밝아지고 친근함이 넘치는 정경이 아름답다. “서로 사랑하고 포옹하는 봄의 전령사” 밝은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사물이 “달콤함으로 다가오는 봄의 전령사”가 풍성하고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충분한 풍경화처럼 느낀다. 2.의식의 정경들 1)풍경과 봄비 풍광이 보여주는 자연은 봄이 왔다는 의식을 전해주며 비로 환치시키는 기법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긴 호흡의 특징은 약간은 산문적이면서도 산문이 아닌 묘한 맛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시적 풍경은 안온하고 따스하면서도 친근함이 가득하고 편안하다는 인상이다. 시가 편안하면 독자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어머니의 음성 같은 느낌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가슴에서 진정성으로 나오는 시의 깊이가 있고 정겹다면 이는 시의 가치에 충분한 소임을 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김성숙의핵심으로 전달되는 시를 확인하기로 하자 봄비가 오면 푸른 잎 돋고 푸르른 꽃잎 돋아 꽃들은 만발이고 오롯이 길 위에 날리는 꽃잎들은 봄비 맞으며 돋던 푸른 잎은 아니며 꽃대가 목이 말라 숲은 붉게 타고 숲은 붉게 타서 철새 날아가는데 기러기 날아간 하늘에는 숲이 우거져도 붉게 목말라하던 숲은 아닌 듯 <봄비 오는 날> 중에서 시에 역설(Paradox)이 기법을 동원하면 강조의 의미를 부가한다. 내가 가진 의도와 반대로 말하면 전혀 다른 의미인 부정에 대한 긍정의 강조로 살아난다. “돋고” “만발하는” 꽃에서 “꽃잎들은” 앞의 문장 조건에 마지막 “푸른 잎은” 아니다.라는 말에 힘을 주게 된다. 비가 오면 푸른색으로 변모하는 기쁨을 느끼는 꽃들이 붉게 타 떨어지는 이별의 아쉬움- 식물이 성장하는 비의 고마움과는 달리, 꽃잎으로 떨어지는 아쉬움을 말하는 시인의 생각은 꽃이 지는 슬픔에 대한 아쉬움을 갖는 마음에 서러움과 아픔이 깃든다. 그러나 만남의 환희가 있는가 하면 이별에서는 슬픔과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꽃과 꽃잎이 양립할 수 없다는 진리 앞에 인간은 슬픈 전별(餞別)을 보낼 뿐,- 김성숙의 아름다움의 추구는 그렇게 여리면서도 순수함이 투명성을 남기는 듯하다. 비 오는 아침 창문 열어 바람맞으니 붓다가 머물고 간 꿈길처럼 보이네 ...(중략)... 바람에 흩어지지 않고 가슴을 적시는 저 비와 같다. 하리오. <비 오는 날 아침> 중에서 붓다는 만물을 포용하는 것처럼 마치 비가 세상을 적시는 자우(滋雨 )라는 의미와 등가를 이룩하는 데서 일치하는 것이다. 갈증에 세상을 적시는 비는 곧 붓다의 말이고 전령의 임무를 수행하는 의미를 공유할 때 사랑으로 포괄된 자비(慈悲)의 말처럼 은혜로워지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비가 붓다의 말처럼 목마름을 해소하는 이미지로 다가올 때,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생의 윤기를 더하면서 세상의 밝음을 더욱 고귀하게 연상하는 향기가 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가 다가오는 이미지가 사랑으로 세상을 감싸는 역할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결말이 그렇다. “비 오는 날 아침”과 붓다가 머물고 간 꿈길처럼 “보이네”에서 “아침”과 “보이네”의 상황 전개는 시인의 마음에 그려진 소망이자 부처에 대한 존경의 우회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새벽 숲에는 사랑이 오는 길이 있다. 숲 사이 재잘거리는 산새들의 전령받기도 전에 가까운 듯 먼 듯 다가서서 키스하는 푸른 숨결이 설레고 진달래꽃은 색동옷을 깔아주며 기다린 듯 각양각색의 미소가 가득 그대가 오고 그대에게 내가 다가서고 봄꽃이 떨구고 간 기억들이 생각난다. 숲 속의 봄꽃 나무 옆에 홀씨 뿌린 또 나무 하나 꽃이 지고, 잎이 피면 이별했던 연인이 어서 오라고 푸르름으로 손짓하며 오는 5월이다. 사랑스러운 키스로 다가온다. <오월의 노래> 중에서 신선하고 푸르른 마음이 담긴 시인의 의도가 보이는 시다. 붉은색에 가까이 가면 더 붉어지고 검은색에 가까이 가면 더 검어진다는 말은 동화(同化)를 뜻할 것이다. 김성숙의 시에 들어가 보면 심성이 순수하고 투명해지는 햇살 같은 시라 끌려가는 길을 걷게 된다. 사실 5월의 나무들은 불평이 없고 타인의 일을 간섭함이 없는 저마다의 소임에 충실한 5월의 푸른 정경이라 하겠다. 서로 사랑하고 포옹하며 밝은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물이 밝아지고 친근하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시인이 김성숙이다. “사랑스러운 키스”로 다가온다는 풍성하고 아름다움을 전달하기에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보인다. 그의 시 『한 송이 꽃』 『다시 눈』 『기도 마음』 『가을의 시』 등은 시인의 마음을 대상에 일치시키려는 간절함과 애원하는 듯한 작품들이 대부분인 듯하다. 참으로 자연과 인간의 마음을 한 축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들을 보면서 못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3.나가면서 시는 마음의 거울을 불을 켜는 데에서 시작이라고들 한다. 왜냐하면 시는 곧 시인의 전 생애를 걸고 영혼의 등불이 되기 때문이다. 거짓과 위선 요설(饒舌)로는 결코 감동을 줄 수 없으며 그리고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꾸민다 해도 결국은 자기 함정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표현이 곧 시이기 때문이다. 김성숙의 시에는 기도의 나직한 소리가 힘을 주면서 갈증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비의 적심은 아름다운 정경을 그리는 풍경화로 다가선다. 이는 꿈으로 빛으로 전달하는 소임에 피곤을 모르는 시인의 정서에는 소박한 그리움이 붓다의 음성에 도달하기를 염원하는 기원으로 꽉 채워져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기도란 너와 나를 합하는 합장(合掌) 일 것이다. 대상과 내가 하나로 이룩되는 소원은 소박하지만 순수와 진실을 담았을 때, 자기 위안이면서 결국에는 대상을 구원하는 메시지가 작동되는 기능의 에너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이룩되는 양 호도(糊塗)하는 것은 위선이라면 자기 아집에 해당 행위이므로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의 땀을 흘릴 때 비로소 희망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기도는 자기 정화의 파문이 세상으로 떠도는 시원한 바람처럼 희망을 주는 이유가 되려는 집념이다. 종교는 희망과 꿈 그리고 사랑을 전달하는 존립의 의무와 근거가 된다면 불교는 강요함이 없고 힘으로 해결하는 복수의 칼날이 아닌 오로지 자기만의 정화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문이 넓게 열린 종교라 본다. 비우면서 채우는 삶의 자세야말로 허정(虛靜)의 태도에 깃드는 선함의 표정이라면 김성숙의 시에는 그런 음성들이 나긋하고 향기 넘치게 다가오는 힘이 있다고 보면서 마치려 한다. 2024. 04.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이승섭 시평집(베스트셀러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사물을 대면하고 그 사물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분기되는 것은 사실이다. 전자에는 맹목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모습이고 공허한 메아리만 들릴 뿐이라면, 후자인 사람은 지식 혹은 지혜로서 분간하는 일로, 사물의 질서를 확립하는 명료함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세상 언저리를 배회하다 보면 전자에 속하는 사람은 더 많은 아우성과 목청 큰 발성으로 진리를 압도하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나 이른바 악화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 s law)이 적용되고 후자는 은신 또는 겸손의 키 낮춤에서 존재조차 희미한 경우가 많다. 정치판이나 문학의 판이나 질서를 세우는 사람은 희소하고 오히려 악화(惡貨)가 세상을 점령하는 기세로 압도하는 경우는 우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종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문학은 마지막에 시간을 정리하는 일이기에 조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쓰고 또 쓰면서 자기만의 城을 구축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주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번 예를 들어 보겠다. 1920년대 김소월이나 한용운은 문단의 아웃 사이더였지만 긴 세월이 지난 결말은 이들이 문학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사실 오랜 시간의 언덕을 넘었을 때 비로소 찾아온 이름 자 명성이라는 타이틀을 패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건은 필연 현상이다. 무엇을 썼고 또 무슨 의미의 작품을 생산했고 그 가치는 보편성의 기준을 확립하였는가의 여부가 결정하는 일이지 단순하게 시간의 언덕을 넘었다 해서 결정되는 가치는 아닐 것이다. 요약으로 말한다면 의미의 질서 확립과 보편성의 기준 잣대는 문학 가치의 본질이라 보는 것이다. 이 둘의 기준으로 볼 때, 그 당시의 시절과 근본, 보편 타당성, 가치를 넘어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엄청나게 수원지(水源池)를 갖고 있는 노시인 진헌성 시인, 그는 필자 아버지의 같은 동년배로서 의학도로 출발하여 문학의 깊이에도 빠질 수 없는 시인으로 필자가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칭송하는 분이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도 과학적 기저를 두고 물리, 생물, 천문, 수락, 종교, 철학, 사상 등에서도 왕성하고 현란함이 요란하다. 그의 시집 잘 살고 갑니다-진헌성 지음, 진헌성 광주 진 내과 원장, 2년 만에 시 전집 제16권 펴내, 104, 5편, 수록 “아흔둘 인생 돌이켜 보면 어리석음의 반복” 등이 있다. 90세가 훨씬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과학철학의 명상, 과 종교 비판자이며 자유정신 가치를 구현하는 진정한 본질에 투철한 시인이 아닌가 한다. 광주출생이면서 시는 세상사 모든 그릇을 담는 것이라고- 심지어 주홍사의 천자문은 4연 250 귀의 고시라는 말을 대입한다면 양나라의 주홍사가 어떻게 우주의 일을 알았으며 육안으로 관찰했다 해서 오늘날의 지식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시인의 예지와 인간사의 윤리, 도덕, 등을 시로 구사하면서 광대한 우주 현상으로 좁히고 상상력의 정치성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진언성 시인은 위와 같다고 확신한다. 천년의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있겠고 현실 또한 냉엄한 비판을 쏟아붓는 철학자요, 비평가요, 과학자라고 믿으며- 그렇기에 우수한 상상력의 나래에서 나오는 가락을 눈여겨 살펴보기로 한다. 시는 우주의 운행과 질서의 현황과 꼬여있는 현실에 메스를 가하는 냉혹함과 치열함을 갖춘 노시인 - 아울러 휴머니티를 가슴에 내장한 불빛이 환히 보이는 이 땅의 시인이라 칭하고 싶다. 참고로 본 고는 연작시 627편 중 앞부분만 일부분 한정하여 시적 특색을 객관적으로 점검하기로 하겠다. 너무 방대한 연작시라 압축을 시켜 유사한 정신 가치의 궤적을 그릴 것이기 때문이다. 2.정신의 건축순환은 무엇인지 시의 정신 순환은 무엇인지에 대해 의도를 나타낸다. 이 명제를 쓰는 이유이면서 시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길을 내는 상징의 숲을 건설하려는 것처럼 시의 건축에 임무를 갖는 이치에 이른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의 조합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시인 자신의 체험을 담고 이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임무에 충실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신 - 맹목의 정신이 아니라 질서를 균제미(均齊美)로 담아야 하고 의미의 숲을 이룩할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정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조감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언어의 표현을 통한 흔적 찾기는 심리학적인 원조를 받을 때는 가능한 해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없는 것, 공 즉 생이라는 순환의 논법은 우주의 질서 삼라만상의 원리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단독이거나 혹은 전체와 부분은 늘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우주의 진행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드라마에서 때로는 관객이고 주인공이라는 것처럼 사고, 즉 상관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 우주의 주인공처럼 사고와 생각하는 것도 모순에 휩싸일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관찰자의 입장에 자세히 관찰하는 데서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라면 과학, 심리학은 결국 인간을 성숙의 단계로 올려주는 계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만치의 거리 이만치의 거리는 상대적 개념일 때 이만치의 자각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내 흰 지팡이 둘이서 가늣한 산비탈길서 큰 내쉼 짚고 서산마루 보란 듯이 먼저 간 고 새나무들 곧장 못 날고 옹기종기 않았고 ...(중략)... 내 모둠 숨 좀 맞들면 저만큼 명당치고 그만큼은 살겠거늘 오늘은 바랑 멘 체 이만 치 서 보랃자와. -『1.산 바라기』에서 시인은 가장 먼저 간 새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물기에 젖어있고 명상적인 문을 열어야 하는 명제를 숙고하는 인상을 남긴다. “나”와 “지팡이”는 동격으로 나이의 깊이를 헤아리는 “이만치”로의 현재라면 “산마루”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저만치”의 거리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생성한다. 여기서 이만큼의 거리는 속세의 가파르고 숨찬 이미지가 저만치의 먼 거리와는 명상에서 서로 닿아야 하는 언젠가의 숙업(宿業)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여기서는 돌의 무게가 삶의 고달픔을 연상시킨다면 피안(彼岸)의 저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가야 할 곳으로의 막연한 노년의 숨찬 호흡이 “모둠 숨”으로 “보라자” 와 머무는 뜻이 삶의 망연함에 해답을 찾지 못한 듯, 마치 두보의 시 『박계행』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사는 일은 항상 해답이 없는 미망의 벌판을 헤매는 일이기에- 바위 굴러 둘로 나눠지고 다시 굴러 넷으로 쪼개지고 쪼개지고 빠개지다 잔모래 돼 모래 엉켜 뭉개 바스러져 고루 가루 떡 됨이 논밭이며 이 조화의 으뜸이 곡식이요 이 곡식의 우듬지가 사람이다. 『고체와 액체』중에서 다시 ‘있고’의 ‘없고’의 사상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우주 삼라만상은 인간과 자연의 고체와 액체의 도정(道程)을 되풀이되면서 현상만 남게 되는 것이다. 형체가 있고 다시 그 형체는 사라지고 순환하면서 본질적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그 도정에 존재의 어느 현상이 찰나 ‘있음’을 형성되고 반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바위가 모래, 그리고 모래가 흙, 다시 흙에서 논밭 그리고 곡식- 곡식의 끝은 인간이 없어서는 안 될 식량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우주관은 인간 중심을 엿보게 된다. 멸(滅) 생(生)이 하나의 줄기에서 나오고 다시 그 반대의 과정을 되풀이할 때 연기론의 근거는 불가 철학에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없음’을 중단한다면/있음은 더욱 중 해처럼 인간은 순환의 도정에서 조화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행동에 대입한다면 우리는 유추의 해석이 끝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3.시적 사상의 표정 과학은 1+1=대답에 묶여있다. 그러나 시는 1+1=0, 1, 2, 3 등, 하나의 의미에 국한한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예를 들자면 ambiguity로 특징을 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과학은 정확한 인식의 바탕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와 과학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우둔한 일이다. 일찍이 l. A. Richards가 설파한 것처럼 시와 과학은 밀접한 상관을 유지한다. 상상력을 증명한다면 시가 되기 때문이다. 노시인의 시는 과학 정신을 이해하는 길에 있다. 이는 과학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가능하다. 관념의 포로에서가 아니라 인식의 확실성을 터득하고 시와 접목의 수순을 밟아 나가는 정신도(情神圖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시가 느슨하거나 설왕설래의 무질서가 아니라 감동을 주는 이유는 내포된 시적 의미의 치밀성에 있기에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에 논리적인 구축력을 가질 때 비로소 시적 완성도는 높을 뿐만 아니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질서에서는 짜증이 나온다면 엄정한 질서의 배열에서는 찬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 공룡이라는 단어는 1841년 해부학자 리처드 오언이 존 필립스는 고생대에 식물이 물에 오르고 다음엔 어류, 양서류, 파충류 순서였다고 창조설에 반하는 사람은 화형으로 입을 틀어막었던 가톨릭 교회였느니 자연 과학은 지금껏도 하나님 나라의 장애물! 『생물 연대 차이』중에서 종교와 과학은 때로 상반된 표정으로 대척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는 항상 절대의 공식에 있어야 하고 과학은 새로운 발견을 위해 땀을 흘리는 점에서 종교의 원리에 반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진자의 등시성이나 관성법칙 발견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던 이유로 협박당한 –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i)의 변명은 죽음을 모면하기 위한 지동설의 포기였다면, 스콜라철학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판자인 지오다노 브르노(Bruno)는 그의 신념을 사수하기 위해 분형으로 16세기의 언덕은 넘었지만 결국 옳은 것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의 편견은 지금도 사랑의 전파보다 더욱 엄정한 틀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형해(形骸)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느님’ 나라의 장애물이 ‘자연 과학’이라는 시인의 판단은 종교가 구원의 메시지를 휘날리지 못하는 이유- 아집과 편견 독선의 그물에서 허우적거리는 현상에 비판의 기세가 보인다. 이는 1513년 교황 레오 10세의 면벌부 판매에 95 Theses의 항의문으로 번진 개혁의 불길이 1517년 사건이었다면 결국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찾아간 신대륙 이주의 필그림이 시사하는 종교의 함정에 대한 변화가 오늘날이라고 대입할 수 없는 명제는 아닐 것이다. 이른바 종교의 창조설과 과학의 대립은 결국 19세기의 유물론에서 물질세계와 종교 세계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혼동하는 기계론의 함정에 빠지는 잘못을 범한 것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T. H. Hulme의 예술 논에서 말한 무기적 세계(수학과, 물리학)와 유기적 세계(생물학, 심리학, 역사학)와 가치의 세계(윤리, 종교)의 세 영역 중 외부가 물리학의 영역이라면, 내부가 종교와 윤리학의 영역, 그리고 중간을 생명의 영역인바, 세 부분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이면서 서로 연락이 없는 비 연연 속의 원리(Rrinciple of Discontinuity)에 의해 지배된다는 철학 사상을 설파했다면, 종교는 언제나 모든 세계를 지배하려는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길 등이 현대에 와서는 더욱 고립된 섬이 되는 현상이 종교의 미래와 연결되는 것이다. 아무튼 노시인의 사색은 무한의 변경을 헤매는 나그네요, 탐구의 불빛에 영일이 없는 서치라이트를 켜고 파수꾼의 임무를 자인하는 것에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노시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들어서는 손에겐 제 볼을 마구 문질러대다가도 뒤돌아서 가는 손의 뒷다리를 소리 없이 무는 개의 전략에는 안 내둘릴 수 없지 잉. 『천안함』중에서 국제 정세의 이해나 긴박감도 없고 오로지 반대만 하는 일이 직업인 듯한 신부나 스님에는 이젠 식상해 차라리 북에 가서 살라고 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청개구리를 넘어 없어도 될 국민이 아닌 인간들이라 보기 때문이다. 천성산의 도룡용은 여전히 왕성히 산란하는데 왜 그때 그 스님은 잘못이라는 고백이 없는 것인가? 으레 반대- 정치라고 잘만하면 되는 그런 설득도 있어야겠지만, 아집과 편협해서 이해와 타협으로 돌아올 수 없는 일인가를 묻는 것이다. 점점 이상한 나라 그저 상대를 반대해야만 하는 그런 몰염치 인간들- 지식인들이라는 교수치고 어리석지 않은 경우는 흔히 본다. 아집에 잡혀있는 판단이 고집과 아집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자기 명령에 끌려가는 일로 사리 판단이 마비되었기에 사실조차도 의심으로 궤변을 늘어놓고 편히 살아가는 자는 결국 나라를 팔아먹는 일과 진배없다. 지금 우리는 그런 현실을 수없이 지나치고 있다는 자성이 앞서야 하지 않겠는가? 미친개- 소 대가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는 이런 현실 - 북한 전략이란 자명하지 않겠는가? 햇빛에 망령을 우려로 바라본 시인은 이젠 달빛을 염려하는 근심 속에서는 얼마나 심각한 우리의 잘못된 자화상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여전히 햇빛 꼬리를 잡고 안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현실에 정말 우울하면서 서글퍼진다. 더 이상 얘기한들 무슨 소용인가? 정부가 바뀌어졌으니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할 운명적 존재라 보기에 조속히 정부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은 있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한다. 꼭 - 4.나가면서 삼삼한 시는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목표라면 깜깜한 시는 아직도 부족을 의미하는 뜻으로 다가올 때, 시에 정진하는 노시인의 모습은 경건하다고 해야겠다. 시는 항상 시인과 갈증을 유발하는 거리만큼에서 손짓할 때, 시인의 상상력은 왕성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엄청난 분량으로 놀라게 하였지만 시로 살고 시로 살아온 일상이 보이는 것은 부기(附記)된 창작의 양은 실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노시인의 시 전체를 조감하는 것이 당연 사지만 몇 날을 조감한들 할 수 있으랴- 겉만 들여다보아만 하는 것이 어쩌면 필자의 허물로 가리면서 더욱 시의 대면을 기대하면서 논지를 접으려 한다. 2024. 03.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베스트셀러집)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갈증은 곧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가져오기에 여유롭고 넉넉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기능이 퇴화하고 늘어지는 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족한 면을 메우기 위한 행동을 예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순을 거치면서 자연과 세상은 변화를 맛보게 된다. 가을의 찬란함과 고독 사색이 없다면 가을이라 할 수 없으며 겨울의 추위가 없다면 봄의 꽃은 없을 것이고 불편하고 어려워도 첨단 즉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편리가 인간을 안락하게 하는 이유가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같을 것이기에- 부족(不足)은 만족(滿足)의 모태가 된다. 이 명제는 진리가 함축된다. 왜냐하면 부족이 만족을 낳고 갈증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부복이나 갈증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만족을 위한 길을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한 줌 햇살 살짝 비추고 슬쩍 입맞춤 구름 걷히고 바람도 숨을 고르며 다소 곳 손 부여잡고 춤출 수 있으련만 주는 사랑으로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과 같이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 『주는 사랑』 중에서 구름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에서 행복이 오듯, 햇살은 최종의 기다림이고 구름은 이를 훼방하는 이미지로 다가들 때, 어둠에서 빛이 나오는 행복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주는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구하고 찾는 방황이 있어야만 사랑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는 모든 물상 삼라만상에서도 통용된다. 그렇기에 인과적(因果的)인 현상이 증명으로 통하고 증명은 다시 되풀이되면서 삶의 원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정서에 특히 달관(達觀)된 정서를 유지하는 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자연과 같이” 자유의 생을 이룩하기 위해 열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필자) “주는 사랑” “빛을 찾아” “손 내미는 자연” 등이 어둠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가 기승 전 詩들을 원하고 그렇게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을을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겨울은 또한 봄을 맞이하는 계절이기에 겨울의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계절이다. 겨울은 어둠이고 방위로는 북쪽, 높새바람이 세찬 기운을 몰고 올지라도 마침내 봄기운에 꺾기는 의미를 낳는다. 봄이 심술을 부리다 떠난 겨울의 빈집에 각시방을 차리고 화사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초청했나 보다 앙상한 가지에 화려하게 단장을 시킨 파릇파릇 청순한 봄처녀들의 무희는 온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길모퉁이에도 바짝 마른 야산에도 펼쳐놓은 잔치에 무수한 인파들이 몰려들지 모르지만 간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 목 길게 빼고 날씬한 몸매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무희 춤사위는 지칠 줄 모르고 발길 닿는 어느 곳이든 공연 길을 나선다. 『봄축제』 중에서 봄은 나무들이 푸른 낙원을 색칠하는 계절이고, 꽃들의 축제이고 또 향기의 상승으로 고귀함을 연상하면서 들썩이는 계절이다. “무희”들의 “초청”은 바로 잔치를 준비하는 계절을 암시하고 2연에는 각시들의 싱싱한 모습이 육감적인 비유, 그리고 잔치의 “인파”와 더불어 노래가 세상을 장악하는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꽃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다시 향기로 세상의 공간이 분주하면 벌과 나비들은 인파를 이루는 인간과의 대조를 형성하면서 더욱 바빠지는 계절, 꽃과 향기로 상승하는 것은 봄이 갖는 특별한 기회이면서 자연의 질서가 형성- 꽃과 향기는 서로 보완적인 상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라는 존재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통찰이 섬세할 때, 오히려 독자들의 심금을 자극하기 때문에 겨울에서 봄으로 진행하는 질서- 겨울을 이겨내고 용기 혹은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꽃과 향기의 상징에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시인은 이런 풍경의 제시로 보여주는 흥겨움을 전달하면서 화려한 장마당처럼 분주해지면서 흥취에 젖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 2.추계의 노래 시인은 계절적 감각을 유난히 예민하고 그곳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필자) 이는 감각의 발달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에 가까운 인상에서 진실된 시의 표현미가 발동되고는 하지만 봄날보다 가을의 이미지가 다수인 것은 아마 남자 사색의 정서- 낭만을 즐기고 고독의 사색에서 오는 “ 외롭고 쓸쓸한 감수성”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아닐까? 계절별로 따지면 가장 많은 시들과 가을을 전하고 있기에 이는 필자의 내면 정서에서 발동되는 기운이 시의 진로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로 돌리면 되지 않을까 한다. 『가을은』 『가을 단상』 『어느 가을날에』 『추계 연가』 『늦가을』 『추억 가을』 『단풍잎』 등 가을의 시를 쟁취하면서 낭만으로 선행을 한다. 사색을 먹고 낭만을 먹으며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은 시간 갖는 풍경으로 저무는데 서리꽃 앙칼진 눈초리가 유난스럽다. 만추에 만삭의 절정 가을은 절벽 위 우두커니 고개 국이고 찬바람에 발등 찍힌 낙엽은 야윈 모습으로 슬픔을 노래해 달랑 걸린 낙엽 하나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 떨고 있네. 『단풍잎』중에서 조락(凋落)에서의 반응은 슬픔이거나 우울 앞을 가린다. 가을의 슬픔은 감정을 예민 반응하면서 주변의 모습에 슬픔을 고하는 것 같아 분위기에 젖는 것이 가을의 정서라 하겠다. 이는 질축한 슬픔이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양상이기에 가을의 정서에 여린 마음이 더욱 많아지는 듯하다. 낙엽에서 삶의 아픔을 노래하고 1연에 핏빛으로 토해낸 가을 앙칼진 서리꽃의 표정 3연에 줄타기 곡예로 으스스한 가을의 절정에서 느끼는 6연에 고개 숙이고 슬픔을 풍경으로 저무는 곡예 하듯 위태롭다. 결국 필자의 마음에는 가을에서 슬픔을 반영하는 낙엽의 슬픔과 대칭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을의 정서가 시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가을의 사색을 마음껏 즐기려 하는 필자는 팔자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계절 감성에 젖어 마음의 자아가 요동을 치는 것인지 유치하다고 느낀다. 3.에필로그 한 인간의 시인이 영혼을 달래 주거나 밝은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시가 밝아야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어둠이 햇빛의 상관에서 출발하고 절망이나 불행도 행복과 자유로 맞아 드리는 고통의 문이라면 필자는 일상의 생활에서 이러한 경험의 채득을 시화(詩化)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며 여기서 개성을 발휘하게 된다. 시는 곧 시인의 개성의 문패가 되는 것이고 이를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일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생활하는 필자는 이제 1년 정도 낯선 정서에서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1편의 시는 언어의 결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더러 시는 비가 봄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쓰이고 다음 단계는 꽃과 향기, 계절을 불러와 승화시키는 순서를 갖기에 꽃은 늘 천상의 이미지 향기로 나타내는 것은 순치하는 순리이고 이치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가을은 따스함을 추구하는 이미지라면 가을은 시심의 동력을 제공하는 뜻에서 필자의 마음과 일체화된 가락으로 채워지는 것이기에 시인은 늘 가을의 중심, 계절의 중심을 배회하는 순수한 나그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 계속 시를 그린다면 견고(hard) 간결(simple) 정확(precise) 선명(vivid) 성을 현대 詩라 특질로 언급했다면 필자는 따스하고(warm) 온화함(soft)을 합작한 “휴머니스트” 적 행장으로 그리고 싶다고 느끼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4. 03.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