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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봉 작가] 소나무의 구부러지고 휘어진 아름다운 형상을 한지에 생동감 넘치게 그려 나무 본연의 모습을 회화적 조형성으로 재해석시킨 작품으로 고재봉 작가는 오는 2025년 10월 29일(수) ~ 11월 3일(월)까지 서울 삼청각 취한당에서 '천년의 향기 소나무展' 타이틀로 개인전을 진행한다. 우리 민족이 사랑하는 소나무는 사계절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절개의 상징이 되어 전통 한국화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포스터] 소나무를 단순히 그리는 대상이 아닌 상징적인 존재이자 경이로운 가치로 생각하여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작품 속 소나무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삶과 철학이 투영된 존재로 해석하여 소나무에 대한 애착이 느껴진다. 자유로운 형태와 먹의 농도를 통해 강렬함을 표현하며, 교차되는 길고 짧은 선들이 사실감 넘치는 솔잎의 생명력을 만들어냈다. [고재봉作1] 웅장한 구도의 소나무는 오랜 세월 바람과 비를 견뎌낸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며, 역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자신의 의연함을 지켜내는 소나무의 속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소나무가 보여주는 고독하고도 강인한 모습이 인간의 삶과 닮아있음을 표현하며 시간의 흐름과 인생 여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재봉作2] 또한 소나무 그림으로 관람객에게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사하고, 지치고 힘든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전달하는 공감의 시간을 기대하고 있다. 소나무의 섬세한 솔잎 묘사와 나무껍질의 질감이 입체감 있게 구현되어 생생한 사실감이 매력을 전달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고재봉作3] 번져오는 색채는 소나무 가지의 단단한 힘을 더하며, 풍성한 솔잎들은 소나무 특유의 청량함을 느끼게 한다. 자유롭게 뻗은 나무의 형상을 예술로 풀어내고, 한지 바탕의 흰색과 푸른 솔잎의 대비는 주제를 확대 부각시켜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고재봉作4] '천년의 향기 소나무展'을 실시하는 고재봉 작가는 "소나무의 매력을 회화적으로 구현하는 창작의 시간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순간들의 연작으로 나무의 좋은 의미들이 감상자들에게 잘 전달되어 힐링의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작가는 독특한 소나무 작품 세계를 통해 (사)한국미술협회 문인화 초대작가 및 다수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로서 매정 민경찬 선생에게 사사하여 수묵화의 동양적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미술인으로 알려져 있다.
[산울림 김창훈의 자전적 에세이 ‘김창훈의 독백’ 표지. ]/박병두 시인 제공 산울림의 베이시스트 김창훈이 오는 11월15일 오후 5시 서울 거암 아트홀에서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단독 공연을 갖는다. 김창훈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30여년간 기업인으로 활동하다 2015년 귀국해 시에 노래를 붙이는 작곡에 힘을 쏟아왔다. 지난 5년간 그가 한국의 대표 서정시에 멜로디를 붙여 만든 ‘시노래’는 1천곡에 달한다. 김창훈은 이번 공연에서 1천곡 중 25곡을 엄선해 라이브로 들려줄 예정이다.김창훈은 ‘해남 가는 길’(박병두 시인, 수원영화인협회장·인송문학촌장), ‘방문객’(정현종), ‘정말 그럴 때가’(이어령), ‘당신 아프지마’(송유미) 등 시인들의 주옥같은 작품에 음악을 결합했고 이에 이번 공연은 시 노래의 향연이 될 전망이다. 김창훈은 18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120년의 세월을 함축했다. 김명순, 나혜숙 같은 근대 여성 시인들부터 윤동주, 이육사, 백석 같은 친숙한 민족시인들을 거쳐 나태주, 정현종, 문태준, 손택수 같은 동시대의 시인까지를 소환했다. 특히 인송문학촌 토문재 촌장 박병두 시인의 사모곡 ‘해남 가는 길’은 김창훈의 헌정곡으로 눈길을 끈다. ‘마른 가지처럼 야윈 어머니/ 그 주름진 손 한 번 변변히 잡아드리지 못하고/고향 떠나던 날 하늘이 대신 진눈깨비로 울어주었네/ 첫 월급 타서 내의 사드린다는 약속 미처 지키지 못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런 상여 옷 한 벌 해드렸네/ 깃털처럼 가벼워진 어머니/ 찬 땅에 누이고 돌아오니/ 하늘이 먼저 아시고/ 흰 이불 덮어주셨네’. [산울림 김창훈의 자전적 에세이 ‘김창훈의 독백’ 표지.]/박병두 시인 제공 김창훈의 곡 해석으로 박병두 시인의 ‘해남 가는 길’은 한 편의 시적이고 감동적인 사모곡으로 탄생했다. 박병두 시인은 지난해 ‘프란츠 카프카 타계 100년’ 심포지엄과 지난 5월 ‘노벨문학상 수상과 한국문학’ 심포지엄에 이어 이번에는 김창훈과 함께 ‘문학과 영화, 음악의 만남’이란 주제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김창훈은 형인 김창완, 동생 고 김창익과 3인조 밴드 산울림을 결성해 한국 대중음악사에 족적을 남겼다. 1977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한 샌드페블주의 ‘나 어떡해’를 비롯해 산울림의 ‘회상’, ‘독백’, ‘내 마음은 황무지’, ‘산할아버지’ 등 수많은 인기곡을 작곡했다. 김완선의 ‘오늘 밤’과 ‘나홀로 뜰 앞에서’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또 시인들의 진솔한 이야기인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란 시에세이집을 최근 출간했다. 김창훈이 한국의 근현대시 1천편에 곡을 붙인 ‘시노래 1천’을 발표한 것을 기념해 신달자, 나태주, 도종환 등 23명의 시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산문이다. 산울림 김창훈의 자전적 에세이 ‘김창훈의 독백’ 표지. /박병두 시인 제공 이 밖에 감창훈의 자전적 에세이 ‘김창훈의 독백’은 음악에서 그림으로 이어지는 예술가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산울림의 막내였던 고 김창익의 갑작스런 죽음, 요양원에 모신 어머니와의 추억, 미국 생활과 한국으로의 귀환 등 인생의 굴곡진 장면들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그리고 김창훈은 김완선과 함께 특별전시를 마련했다. 김창훈·김완선 2인의 특별기획전인 ‘명성 뒤에 숨겨진 인간적 감정표 표현’은 서울 갤러리 마리에서 지난 15일 오픈했다. 오는 11월13일까지 계속된다. 17일 오후 6시에는 공식 오픈식을 갖는다.
[실학박물관이 출간한 ‘실학, 고전으로 만나다’ 시리즈 제1집 ‘열하일기(熱河日記)’. ]경기문화재단 제공 ‘열하일기’는 18세기를 대표하는 북학파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1780년(정조 4)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오며 지은 책이다. 특히 박지원의 실학사상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으로,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조선의 모습과 비교하고 조선 사대부를 비판하는 등 박지원의 사상과 당시 사회상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실학박물관이 출간한 ‘열하일기’의 평역·출간 작업엔 이승수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이 교수는 전체 열하일기 이야기 중 재미있고 박지원의 사상이 잘 드러난 편을 뽑아 쉽고 재미있는 문체로 재해석해 번역했다. 번역문, 원문과 함께 이 교수의 상상력과 문학적 지식을 녹여낸 ‘평어’의 순서로 구성해 읽는 재미를 더했다. 앞서 실학박물관은 지난 2009년 개관 이후 15년간 실학인물총서, 실학교양총서, 실학연구총서 등 실학을 알리기 위해 여러 기획도서 시리즈를 발간해왔다. 이번 실학고전총서 시리즈 ‘실학, 고전으로 만나다’는 실학 고전에 수록된 재미있는 글들을 엄선해 현대어로 번역한 시리즈로, 실학 스토리텔링을 위한 원천자료를 확보하고 ‘실학 고전’을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실학박물관은 ‘열하일기’를 도서관과 실학 유관기관에 배포하고, 실학박물관 뮤지엄숍에서 한정 판매한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가설 1)정서는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오늘의 나로서는 사실 아버지를 닮았고 또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잇는 꼬리로 추적하면 결국 사회의 공통, 혹은 민족성에서 공통점에 이른다. 이러한 정서는 현재까지 함께 살아오면서 형성된 유사상의 측면에서 파악이 된다. 이를 한마디로 민족의 특성 혹은 사회 관습의 일치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바닷가에서 생존을 영위하기 위한 사람, 산속에서 삶을 지속한 정서는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특성이 도출된다. 환경이 주는 영향은 인간의 심성이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이론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기에 - 물론 약간의 차이는 내포하지만 유사성의 접근에서는 특성 혹은 자기 개성을 짜 맞출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가령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시를 서구적인 사람들은 절대로 감동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나를 버리고 가는 사람에게 꽃으로 카펫을 깔아주는 정서가 서구인에겐 보편성을 가질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순종 미학이 참되고 착한 도덕적이었던 것을 대입한다면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는 1920년도의 합리성이지만 현대인에겐 전혀 다른 반응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서 또한 변화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변화의 길은 있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 가설2)변화는 어떻게 오는 것인지 정서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시대적 변화에 따라 변모한다. 예를 든다면 1592에서 7년 동안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의 변화 – 임란 이전의 문학은 양반의 문학이었고 이후로 내려오면서 서민문학으로서의 변화를 갖게 된다. 언어도 된소리나 거센소리로의 변화, 가령 갈(力)이 칼로 변하는 것들은 전쟁의 참화를 지난 후에 나타난 의식의 현상 등이다. 양반만 문학을 하느냐 서민인 나도 할 수 있다는 자각에서 산문으로의 진행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격식의 파괴는 사회변화의 매듭에 따라 나타나는 추수(追隨)적인 현상인 것이다. 작가도 평탄한 일생을 살아온 것보다는 굴곡의 삶을 살아 이것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실감이 필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위대한 명작은 대체로 체험의 원숙한 인생 후반기에 나타나고 시(詩)의 경우는 상상의 산물로 인해 인생 전반기에 왕성한 욕구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2.의식의 집중화–이별과 자연 그리고 물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또 자연으로 돌아간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작품은 자연을 소재로 역할뿐만 아니라 중요한 배경으로 작동 혹은 대상화가 된다. 강이 있고 강은 바다로 가고 다시 증발하여 하늘로 순환한다. 너무나 풀밭의 초록 등 흡수력을 갖는 자연의 이름은 작품의 주요 배경을 이루고 용해된다. 이별은 만남의 반대이면서 이 또한 순환의 사이클로 인생사를 이루는 요소일 것이니, 인연 법의 고리를 형성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문학은 휴머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의 축도(縮圖)를 그리면서 비판과 긍정의 모양을 실감으로 재현하려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가는 과정은 인간과 인간의 마주침이 문제를 만들고 다시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고 비판하는 과정도 모두 건전한 사회의 구축을 위한 일과 더불어 문학의 영원한 명제인 휴머니즘 구축에 모든 의식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학의 영원한 사명일 것이다. 1)이별의 평행 이별이라는 말은 만남의 반대편 개념일지라도 생로병사 혹은 우주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즉 계절의 순환에 해당할 개념인 것이다. 만남은 떠남이 이어지고 다시 만남으로 돌아오는 길이 일정한 궤도로 작동할 때, 인간은 거기에 감정을 개입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며 삶의 열정을 매진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줄기에 얽매여있기 때문에 그 줄기를 벗어나는 일이 매우 힘겨운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뜻이 이별이다. 부재(不在)로의 거리(距離)를 가질 때, 이별은 문학작품 속에서 비극적인 개념으로 줄거리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문학의 표현은 만남에 대한 사랑과 떠남에 길을 아쉽게 표현하는 관념이 주요 대상이 될 뿐이다. 그 이외는 무대를 장식하는 소품의 개념일 것이다. 여기서 이별이나 만남은 줄거리의 본질에 질서를 형성하는 인자(因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학작품에 이별은 고구려 2 대왕인 유리왕의 <왕조가>는 서정시의 바탕을 찾을 수 있는 이별의 노래이다. 여자의 질투가 가져온 이별이 남자 <왕>의 가슴을 물기로 적시는 줄거리가 한국의 이별 문학의 모태가 되었다면 신라 시대는 향기와 정서에 의한 누이의 죽음을 슬퍼한 <제망 대가> 등은 일찍이 이별로 서정시의 근간을 이루었다 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날러는 엇디 살라 고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잡 와 두어리마 선 면 아니 올셰라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셜온님 보내 노니 나 가시 도셔 오쇼 셔 나 위 증즐가 대평성 (大平盛代) <가시리>중에서 우리가 알다시피 고려 475년은 초기 100년을 제외하고 375년이 전쟁과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 환과고독(鰥寡孤獨)의 시대였으니 고려의 시인 정지상 또한 대동강에서 이별을 노래한 <송인도> 이별의 문학이었으니 백성 양반, 평민 모두가 참상의 아픔을 감내한 슬픔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짙은데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님 보내며 서글픈 노래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이 언제 마르랴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 더하는 것을 정지상(宋人) 대동강을 건너 진남포로 떠나는 임과의 이별에서 대동강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애절 성은 친구 김부식이 시기할 만큼 명작이 틀림이 없겠다. 슬픔의 마음이 묻어 있어도, 질 축 하지 않고 애타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깨끗한 마음의 진정성이 담겨있어 “청록파에서 이별에 건강성이 슬픔의 고개를 넘어가는 시인의 정신이 빛나는 것 같다. 양반인 시인이 얼마나 깊고 아픔의 시대가 절절했으면 명작의 이별이 탄생할 수 있을까는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다시 말하면 멀리서 오는 파도는 점차 다가오면서 모두에게 파급력을 갖는 이치와 같이 아래로 천민 백성에서부터 높이로 양반에 이르기까지 이별이 거의 전 영역에 아픔의 물살을 덮어 씌었다는 뜻일 것이다. 반면에 당시 양반의 술타령은 <한림별곡>에서 부패한 냄새가 얼마나 자심(滋甚)한가를 알 수 있는 모순의 시대였다. 아마도 우리말로 쓴 <가시리>는 이런 시대의 고통을 가장 잘 쓴 시랐는데 일치할 것이다. <서경별곡> 또한 이별의 주체가 여성이면서 좀 더 강한 의사가 담겨있음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다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이별은 아픔이고 슬픔의 언덕을 넘는 한탄과 장탄식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반복 후렴을 제외하고 67자의 <가시리>는 단순히 이별을 아픔으로 노래한 내용이 아니라 빨리 가는 것처럼 “빨리 돌아오라는”는 뜻으로 구속력을 갖고 있음에 현대의 김소월의 <진달래꽃>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서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지르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진달래꽃 1920년대의 사회는 여자는 남자의 종속처럼 대접을 받던 시대였다. 이른바 절대의 복종은 고려의 여인상과는 오히려 더욱 순종적인 유교적 문화의 사상 속에 여자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모순의 속내가 <가시리>와 <진달래꽃>과의 거리가 역전되는 전도 현상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의 기류에 삶에 가치도 발전적인 진행이 아니라 역류될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왜 그런가 하면 1920년 대의 여인은 거의 숨을 죽이고 남자의 처분에 따르는 ”역겨워 가실 때에는” 진달래꽃으로 카펫을 깔아주는 속내 – 사실 속으로는 안 가면 좋은 것이지만 적극적인 요구는 깊이 감추어 두는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완전 수동적인 자세가 1920년대 김소월의 이별 방식으로 시대를 반영되었던 것이다. 고려 <가시리>는 오히려 현대적인 적극성의 여성상이라면 <진달래꽃>은 에이츠의 <꿈>과 유사하다는 이양하의 지적은 솔직히 말해서 ‘나의 생각’ 가득한 꿈 위를/ 그대여 가만히 밟고 내라 ‘ 지내라라는 점 - “꽃을 밟고의” 김소월과 ’ 꿈을 밟고 ‘ 지나가라는 에이츠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로드 바이런의 <maide of Athens>와는 이별에서 같은 주제이지만 이스탄불로 시인은 떠나갈지라도 나의 마음을 간직해 달라는 부탁하는 것은 아픔이기보다는 작별에 일반적인 형식이 재치(才致)로 담겨있는 듯하다. 이러한 이별의 노래 중에서 아마도 <가시리>는 짧은 형식 속에 강, 약의 되풀이에서 가장 뛰어난 백미(白眉)를 창조한 이별 문학으로서 출중하다는 데에는 누구나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이별에서도 자식과의 이별은 아마도 가장 심대한 통증이 나타날 것이기에 허난설헌 <곡자>에 이르면 처절의 농도는 극치에 이르는 이별이 아니겠는가.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디 슬픈 광릉 땅) 雙墳相對起(쌍분상 대기)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은 일고) 鬼火明松楸 (소나무 숲에는 도깨비불 반짝이고) 紙錢招汝魂(지전초여 혼) (지전을 태워서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네들 무덤에 맑은술을 올린다)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그래, 안다 너의 남매의 혼이) 夜夜相追遊(야야 상추유) (밤마다 서로 따르며 함께 놀고 있음을)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비록 지금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安可冀長成(안 가기 장성) (어찌 제대로 자랄지 알겠느냐)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하염없이 슬픔의 노래 부르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 나오는 슬픈 울음 삼키고 있네) 허난설헌 <곡자> 함종임 <채련>에서 경기도 초월리에 있는 남편 김성립과 후처 홍 씨의 묘가 나란히 있고 난설헌은 맨 아래 안장되었고, 그 오른쪽에 두 남매의 무덤이 있어 죽은 뒤로 비로소 함께 지정을 나누는 모정의 애달픔 - 먼저 떠나보낸 자식의 죽음은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에 시(詩)의 슬픈 가락으로 이어지며 애석하게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응어리진 한(恨)이 버릴 수 없는 이별의 최고의 정점을 꾸미는 시(詩)의 형태가 허초희의 운명적인 비극의 극치를 대변한다. 천붕지통(天崩之痛)을 넘어선 슬픔의 가락에 뼈가 슬어지는 느낌이다. 사전적으로 이별은 “서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을 사전적 의미라 하지만 드라이한 측면이 감동을 일탈(逸脫)한다. 사랑이라는 말도 남녀가 좋아함에 이르면 느낌이 매우 삭막함을 느끼듯이 그렇듯 문학적인 수용으로의 이별은 ”아픔과 눈물“ 그리고 회색의 절망이 깊은 상심을 유발하는 지경에 사전을 간과(看過)한 점에서 깊이가 없는 것이다. 얼마나 깊고 처절한 인상을 창조하는가의 문학 - 시(詩)의 가치를 가져올 수 있다면 이는 체험의 농도가 결정 요소로 작동하리라 본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이별의 용어일지라도 비극적인 인식과 재치의 인식에서 차별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식의 슬픔을 슬퍼한 어머니로서의 허난설헌의 이별은 남녀 사랑에 대한 이별과는 또 다른 절망의 길이 넓어지는 느낌이고 바이런, 에이츠, 김소월의 이별에는 처절성의 농도가 얕은 이별의 형식일 것 같다. 2)대 자연 모든 인간은 자연에서 자라고 자연에서 산다고나 할까 다시 말하면 자연을 응감(應感)하면서 대상으로 바라보는 소재와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갈망과 자신도 대상화로서의 소재가 되기 때문에 이 무한대의 대 자연의 넓이에서 문학은 언제나 배경의 역할 - 인간이란 주체로 활동하고 자연은 인간이 어떤 상황에 처 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다. 미국의 삼림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매사추세츠의 콩코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은 시인이자 철학자인 그가 1854년 2년 2개월에 걸친 월든의 숲 속에서 홀로 오두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기록한월든〗은 대 자연과 인생의 참된 삼의 천착에 바친 실험의 저서가 아니겠는가. 이 책은 많은 사람들과 자연의 위대한 에너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철학적인 명상이자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물론 동양에 노자와 장자의 철학 또한 대 자연의 대상화를 비유로 살아나게 한 철학서이지만 난해의 숲이 울창한 것이 일반인에게는 난도가 높은 단점이지만 소설에 처음 도입은 항상 전체 줄거리의 예보적인 역할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음산한 영국의 날씨와 줄거리의 전개가 안개 자욱한 날씨로 시작하는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WutheringHeights>는 도입부의 자연 묘사는 남자 주인공 히이드클리프와 주인공 나와의 운명적인 전개를 예고하는<폭풍의 언덕>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소설의 도입부터 전개를 해보겠다. <웨더링 하이츠>란 히이드클리프 씨의 집 이름이다.<웨더링>이란 그 지방에서 쓰는 함축성이 많은 독특한 형용사로서, 폭풍이 불 때는 위치 관계상 그 집이 정면으로 그 바람을 받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 집 사람들은 줄곧 그 꼭대기에서 일 년 내내 그 맑고 상쾌한 바람을 쐬고 올 것이다. 집 옆으로 서너 구루 자라지 못한 전나무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나,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 모두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가를 알 수 있으리라 - 다행히 이 집을 지은 건축가도 그것을 생각해 집을 정말 튼튼히 지었던 것 같다. 좁은 창틀은 벽에 깊숙이 박혀있고, 집 모서리는 크고 울퉁불퉁한 돌로 튼튼하게 지어 있었으니 말이다. <웨더링 하이츠>는 요오크사 지방의 황야를 무대로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가 주변의 환경 묘사와, 일치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사실 핵심구절은 '집 옆으로 서너 구루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전나무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나,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 모두 한쪽으로 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산등성을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 것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에 앞으로 전개될 인간관계의 설정이 음산하고 거센 북풍에 주인공들의 개성과 맞닥트리는 암시를 엿볼 수 있는 황량한 대자연의 설정이 아니겠는가. 반면에 김동인의 단편<배따라기>은 다소 미숙한 형태로 도입부터 흔들리면서, 화창한 봄날의 묘사로 서두가 시작된다.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할 위험성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그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리고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 인 듯이 낮추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김동인 <배따라기> 서두 우선 서두가 너무나 장활하게 나열된 듯하다. 가령 <마지막잎새>의 오헨리 같으면 간편하게 『It’s fine spring day』의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묘사가 장황하게 6행을 추가한 것은 그 미숙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불구이거나 죽음의 그늘이 있는 3.1 운동이 실패로 끝난 1920년대의 우울한 사회 풍토에서는 화창한 봄 날씨의 전개가 어색하지 않은가. 신석정 시인은 대 자연과 밀접한 시적 접근이 그의 수필에서는 더욱 강조점을 마련하고 있다. 40평 남짓한 앞뜰에 그저 되는대로 질서 없이 심어놓은 나무가 시누 대, 식나무, 수수꽃다리, 태산목, 꽝꽝나무, 북 가시나무, 칭영수, 백목련, 독일가문비, 이팝나무, 치자나무, 뽀뽀나무, 동백나무, 호랑가시나무, 낙우송, 산수유, 국로, 감나무, 모란, 청매, 벽도, 은행나무, 후박, 철쭉, 박태기나무, 개나리, 서향, 파리똥 나무, 죽도화 등 30 여종이 있고 이밖에 장미 10 여종이고 보니 그 면적에 비하면 초만원인 셈이다. 이 나무들 사이에 수선화, 백합, 국화, 파초, 등 숙근초(宿根草)가 자리를 잡고, 콘크리트 항아리에는 백련이 있어 모두 제철을 기다리고 있다. 신석정 수필 <정원이야기>에서 신석정의 시는 우아하고 정서적인 노란색《촛불》과 《슬픈 목가》에 주류로 등장하고 있고,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이런 현상이 사라진다. 나무를 주체로 보면 신석정의 정원은 초만원의 욕심이 자연의 구성을 이루고 있다. 가짓수로 보면 나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을 것인가를 염려해야 할 지경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초목을 사랑하는 신석정의 시심(詩心)을 유발하는 대상으로 노장사상의 침투와 연결 고리를 가질 것으로 유추가 된다. a)산 경관,초목 경관 유명한 시인들은 자연을 소재로 선택하는 시적 표현이 압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연과 경관을 떠나서는 시심의 근거가 작아질 뿐만 아니라 주제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평생 산천초목을 바라보아도 앞산은 앞산으로 있고 뒷산은 뒷모습으로 우뚝 서 있지만 인간은 다른 감각을 동원하는 것은 마음의 탓이기 때문이다. 2.30대에 보는 산이 다르고 4.50대에 보는 산이 또 다를 것이기에 60의 마루턱을 넘어 올라보지 않고서는 누가 감히 산천초목의 산의 진미를 안다고 할 것인가, 는 신석정 시집 《산의 서곡》에 머리말로 쓴 조지훈의 글이다. 산을 현상으로 바라본 시선과 나이 들어 산을 바라보는 산의 모습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산은 정복으로 올라보고 싶은 충동이라면, 나이 60 넘어 산은 정복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의 체온과 같이 친근 미를 갖는 것이 사실일 것이기에 - 조지훈은 이런 산의 묘미를 서문에 새겨 놓았음은 매우 조숙하고 가치판단이었을게다. 그는 50 이전에 운명(殞命)했기 때문이다. 산 <파이랗다> 2. 넌지시 뻗어 나간 저어 산맥(山脈)을 보아라 <햇볕이 강물처럼 흐른다> 3. 아슬아슬 저어 봉우리를 보아라 <휘휘 칭칭 구름이 감았다. 4. 말없이 얼싸 않은 산협(山峽)과 산협을 보아라 < 퍽은 다정도 하이...> 5.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껴안은 산 <따스한 체온이 돈다.> 6. 볼과 볼을 문지르고 있는 산 <연거푸 주고받는 뜨거운 kiss> 7. 이윽고 정상(頂上) <정상에 나는 서있다. <신석정 <푸른Symphony>에서> 17까지 이어지는 산의 노래 중 7까지만 옮겼다. 신석정을 정원 시인 혹은 목가 시인이라 칭하는 것도 시(詩)의 대상이 거의 모두가 자연을 소재로 했고 4.19. 이후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은 시들은 비교적 각광을 받지 못한 것도 지나치게 경도(傾倒)한 자연현상의 탐닉(耽溺)때문일 것 같다. 전북 부안의 바닷가에 살았어도 산의 시맥(詩脈)을 두고 자연의 소리를 취합한 신석정의 정서는 자연을 떠나서는 그의 정신이 혼미(昏迷) 해지는 느낌과 감정을 갖게 된다. 그만큼 애착으로 자연에 동화되어 그의 시는 형해(形骸)를 담아 표현미를 구축했을 것 같다. b)강 혹은 바다 물이란 인간 에너지 정신의 중심인 것이다. 강이 바다로 이어지고 바다는 파도와 파고를 가져오면서 이방(異邦)에의 갈망을 전달하면서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바다가 서구적 향내 대한 동경(憧憬)으로 이어지고, 어둠으로 상징되는 나라 형편을 깨우침으로 방법 논을 삼았던 예지적인 견해와 선지적 사고가 돋보인다. 새로운 문물이 바다를 통해 이입되는 계몽의 길목이었음을 잘 알았던 판단이었을 것이다. 정지용은 내륙 충북 옥천을 그리움으로 채색한 <고향(故鄕)>의 시인이다. 그의 <향수>에는 실개천이 흐르는 어린 시절의 향수가 짙은 음영으로 배어 있지만 <바다 1~5>와 <갈릴레아 바다>와 <호수 1~2> <호면> 등 그의 시에 비해 물의 소재가 많은 편인 것 같다. 고래가 이제 횡단(橫斷)한 뒤 해협(海峽)이 천막처럼 퍼덕이오. -히나 물결 피여 오르는 아래로 바둑돌 자꼬자꼬 나려 가고.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 종달새 한나절 노려보오 흠켜잡어 고 빨간 살 빼스랴고 정지용 <바다 1>에서 고래로 배로 환치(換置)하면 - 배가 지나는 길에 파도는 은방울 날리듯, 종달새의 노래를 떨어트리고 가는 모양이 마치 바둑돌의 하얀 포말, 연신 올랐다 내려가는 반복에서 볼 때 외로운 표상으로 그리움을 안고 배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그네의 표정 -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완상(玩賞)으로 가까움을 대상화하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인 것 같다.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정지용 <호수,2> 순수가 절정을 이루면 천진의 극치에 오르는 것이다. <호수>는 정지용의 마음을 대변하는 아주 간결하고 순수함을 나타내는 시화(詩化)이다. 한국시는 비로소 정지용에 와서 거추장스러운 의상을 벗어던지고 깨끗하고 아름다움의 신비경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호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의 정서와 이미지가 결합하여 천의무봉 시심으로 자리 잡았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의 신체 조직은 약 80% 정도가 물로 구성된 5대양 6대주로 되어 있고 물로 구성된 지구의 모습을 함께하는 인간의 신체 조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물은 곧 생명이고 삶의 모든 진행을 영위하는 원소이기에 동물이나 식물은 곧 물에서 존재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비가 내리면 강물이 되고 강에서 다시 바다로 흐르는 것이 또다시 증발하면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인영법의 절차가 물에서 암시되는 것이다. 물은 될 수 있는 대로 힌돌이 퍼져있는 곳을 가려서 걸어 다닙니다. 조이 밭 속에서 그 소리를 엿듣는 팔이 부러진 허수아비는 여기서는 오직 한 사람의 시인이외다. 김기림<물> 다소 관념적인 시이지만 추구점은 물에서 “가려서” 다닙니다. 에 이르면 시인이 추구하는 물과 가는 것의 지향점이 떠오른다.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답은 흐름을 유지하면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노자 적 철학을 꿈꾼다. <<보물섬>>과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쓴 로봇 루이스 스티븐슨은 <rain>이란 평이한 시(詩)를 썼다. The rain is raining all around lt falls on field and tree lt rains on umbrellas bere And on the ships at sea <R.L.Stevenson <Rain> 들이나 나무 위에 그리고 온 바다에 혹은 우산에도 눈은 변함없이 고루 내린다. 차별이나 구분이 없는 점에서 수주 변영로의 <봄비>와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변영로는 봄비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암시가 되어 있는 반면 스티븐슨은 온 세상을 적시는 비의 모양에 초점이 모아진다. 어떻든 비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에너지의 근원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바다와 친화적인 인간의 삶은 항상 그리움의 공간이 설정되기도 한다. 일주일 동안쯤 파도와 놀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가자는 청에 처음엔 그러마 하더니 몇 걸음 지나니 마음이 변하여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는 말에 섭섭하여 놓아주니 깔깔거리면서 손을 흔드는 작별은 너무 아쉬운 것 같아 한참을 바라보노라니 다시 만날 날을 통보해 달라는 부탁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안도감이지만 내 생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을 몰라 입을 다물고 뒷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졸 시><바다의묘망(渺茫) 친밀도라는 것은 시인과 대상에 어떤 교감을 나눌 것인가의 달려있다. 대상을 적개심으로 바라볼 때 무서운 파도의 위압에 지릴 수 있지만 바다와 놀이로 삶을 이어갈 때면 바다는 놀이터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필자가 쓴 졸 시는 죤 메이스필드의 <바다의 열병>에 “나는 아무래도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 의 첫 구절부터 친밀도인 것 같아 흐뭇하다 두려움이 없고 친구와 외로움을 달래는 대상화일 때 <바다의 묘망>처럼 하나로 결합을 꿈꾸는 평안하고 시원함을 가져온다. 떼오필 고띠에의 <바닷가에서>도 시각적인 기교의 바다의 정감이 담긴 것들의 대한 동경과 정서가 서려 있는 듯하다. 모두 바다에서 정서의 고양(高揚)을 추구하고 있음이 공통적이다. 어떻든 비에서 물 그리고 강으로 변화를 이루면서 다시 바다에서 커다란 꿈의 이름이 순환의 곡조로 되풀이될 때, 시인의 선택은 항상 자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논(中論)> 3.사회적 의식 또는 휴머니즘 인간이란 생각으로 삶의 터전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작은 단위인 나로 출발해서 가정 그리고 마음 또는 사회로의 확대 현상이 일정한 집단을 형성한다. 하여 사회적인 존재로 군집(群集)- 일종의 사회학적 출발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사는 일을 고해(苦海)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평안하고 아늑한 세상이기보다는 고통과 신음이 넘치는 아비규환의 공간이 인간사라는 뜻인 것이다. 여기서 어떤 추구의 길을 선택하는가의 따라 마음 - 아무튼, 마음으로 길이 결정되면서 자기의 삶에 무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픔의 피륙을 짤 것인가 아니면 화려한 색상의 비단을 만들 것인가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가 만든다는 자기 책임설이 곧 삶인 것이다. a)부정과 칼날 사물을 바라보는 사물에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는 것이 답일 것이다. 전자를 낙관의 태도라 한다면, 후자는 긍정보다는 저항의 칼끝으로 심장을 찌르려는 복수가 때로 시적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른바 권력에 항거하는 형태를 저항이라 말하고 순응하는 모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모순의 시대에 목소리에 칼날을 감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도가 지나칠 때는 자기를 찌르는 비수(匕首)로 둔갑하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70년대부터 모순의 극치에 항거의 목소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시인은 김수영시인이라 말들을 한다. 죽기 전에 쓴 (1968. 05.29) <풀>은 마포구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그해 06. 16. 사망. 48세 때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수영은 평가 이상의 평가를 누리고 있지 않나 한다. 이는 한국 시(詩) 문단의 판단에 병폐가 아닌가 하지만 엄밀한 분석과 평가에 의해 명성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로 명망의 성가를 높이는 것이 대부분이라 생각되지만 - 사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는 구절은 췌사(贅辭)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앞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틀림없이 그 구절은 삭제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뿌리가 누워서는 논리상 안되기 때문이고 이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한번 전문을 인용해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지난 60년대 말은 흐린 날씨의 사회라 하겠다. 모순과 불합리가 권력자에 의해 또는 가진 자에 의해 침탈(侵奪)당하는 슬픔의 시대라고 해야겠다. 이때 바람은 훼방의 이미지라면 풀은 저항의 탁월한 이미지 구축의 시어였다. 그러나 맨 마지막 구절은 삭제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상의 방해가` 안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김철수의 <잡초>와 비교가 되는 - 영문학 전공에 미국의 국민시인 월터 휘트먼의 시집 <<풀잎 속에서>>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두 사람의 일치된 이미지는 오히려 김철수에서 잡초는 불에도 또는 마차의 바퀴가 지나가도 끄떡없는 저항의 이미지가 단단하다. 물론 시적인 완성도에서는 김철수의 <잡초>가 뒤처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미의 전개에서는 건강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b)긍정과 휴머니즘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을 했다. 모든 전제(前提)는 실존의 형태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하면 존재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이면서 벗어날 수 없는 “고기 잡는 항아리”의 처지가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詩) 또한 결국에는 휴머니즘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설득하고 말하는 길을 제시할 때, 감동은 더 커다란 사랑의 뜻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문학의 영원한 숙명은 결국 휴머니즘의 실천에 방법론의 전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시인은 순수와 깨끗함, 영혼이 맑아 추구하는 사랑과 용서하는 사도(司徒) 일뿐, 고함치고 거드름 피우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감싸는 보자기를 펼칠 때 추위를 가려주고, 목마름에 물이 되는 것이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니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하는 불타는 향수(鄕愁) 네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젠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려니 네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자 김동명 <파초> 조국을 벗어나 이국의 외로운 고독이 밀물 지는 처지를 파초로 의인화되었다. 갈증이 있고 또 남방을 떠난 몸은 추위에 가릴 수 없는 노출에서 휴머니즘의 뜻이 시인의 마음으로 감싼다. 샘물로 갈증을 시켜주고 추위를 가리기 위해 방안에 기거함을 허락한 시심은 곧 사랑의 마음이다. 더구나 종처럼 시중을 위해 “우리”로 펼치는 마음에는 사랑이 넘치는 시심(詩心)에 꿈이 더불어 피는 듯하다. 고함치고 욕지거리하면서 살벌한 아우성이 아니라 뜻깊은 호의로 감쌀 때, 세상은 의지할만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서로의 체온 나누기에 바른 사회가 될 수 있음을 <파초>는 역설하고 있다. 나는 얼마나 깨끗한가 나는 얼마나 순결한가 대답이 머뭇 거린다 죄 없음도 죄가 되는 사는 일이 그렇기 때문 욕망이 문을 닫을 수는 없지만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말라는 부탁 더불어 고개만을 숙이고 살아 예 이르렀어도 희색 빛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내 그림자의 길이에 안도감이 다시 부끄럽다. 졸 시 <순결과깨끗>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잘해도 때로 비난의 화살이 빛발 치는 경우도 있고 너무 정직해도 아픔을 폭포로 맞을 때도 있다. 너무 깨끗하고 순수하며 백지이기 때문에 비난의 과녁은 피할 수 없는 경우도 너무 많다. 그러나 순결함이 미덕이고 깨끗함이 옳은 일이라면 감수의 파도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옳은 일이며 바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어렵다는 뜻은 이러한 경우에도 적용될 것이지만 신념을 개성으로 내세울 때 구름은 항상 비켜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결하고 깨끗함이 인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기에 곧 휴머니즘의 정도에 이르는 말이 아닐까? 시와 모든 문학의 본질은 휴머니즘의 밝은 표정을 찾아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 문학의 숙명인 이유가 아닐까? <결론> 4.에필로그(epilogue)–인간 사랑의 그림 그리기 문학에서 만남이란 기쁨이며 이별은 아픔의 표적일 때, 거기에는 인간사의 복잡 다기(複雜多岐)한 전개가 감동의 줄거리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별은 만남으로 순환하는 길에 이어질 때, 우주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라야 이별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인간은 그리하여 섭리에 따라 이어질 때 비로소 감동이 정당한 길로 다가들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생의 터전이며 이를 통해서 생로병사(生老病死) 회전이 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연 속에서 생의 가치를 구축하고 발견하는 일은 곧 자기를 찾는 일이며 이를 운명이라는 굴레에서 모두가 받아들이는 밭갈이에서 생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개성으로 용해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푸른 생명을 키우고 강은 물로 바다로 이르는 우주의 법칙에 따르는 표현미는 곧 문학의 질서이며 올바른 한국문학의 평행이론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이 이 질서를 벗어나 순응치 않는다면 비극일 수밖에 없으며 질서에 순응한다면 그것을 희극이라 할 수 있겠다. 문학은 언제나 사랑을 말하고 질서에 순응을 가르친다. 비단 도덕적인 가치 우선의 공리주의자 플라톤이나 공자에 이르러도 문학은 인간 우선에 이름을 강조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예술은 사진을 모사(copy)하는 것이 아니라 “ 있음 직한(probability) 현실”을 그린다는 점에서 예술론의 출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설득력 있게 주장되는 것이다. 평행이론이란 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운명이 같은 패턴으로 전개되는 이론으로 웨이브헴 링컨과 존 F. 케네디의 평행이론이 대표적이라 하지만 삼라만상 평행우주라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어제의 태양이나 오늘의 태양은 변함없이 우리 앞에 와서 서 있으나 이는 우주의 질서의 개념일 뿐이지만,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신기한 개념을 추가하려는 점이다. 모든 작가라 하는 자들이 선택하는 소재는 삼라만상 우주와 고향, 사랑, 부모, 등을 빼고 나면 과연 글이란 어떻게 진행이 될지는 글쎄올시다 이런 절대 필요성의 반복성에서 평행이론은 근거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평행이론의 원천인 근간을 이루는 삼라만상의 우주 틀 안에서 섭리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현실에서 평행을 이루는 근대사회 우리 문학을 본다면 우리 문학의 근본이 민주라는 허울에 둘러싸여 이념에 노예가 되어 서로 갈라지는 문학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아쉽고 두렵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통일이 되면-? 언제까지 남북이 서로 으르렁 거리며 하나 되는 문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다는 것에 이제는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이방인이 되어 아름다운 강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오히려 신관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모든 예술의 목적은 인간의 사랑인 휴머니즘의 실천에서 한치도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 독자의 감동은 배가 될 것이며 작가라는 타이틀도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도 문학이란 숙명을 안고 변화의 현상을 그려나갈 수 있다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바로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 이루지는 계기라 보면서 논고(論告)를 마치려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1]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필자 저서 시집 베스츠셀러2] [문학의 혼을 말하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3] [시의 숲에 빠지다.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4]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지역에는 100만명 가량의 로힝야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로힝야 난민들은 미얀마의 소수민족 중 하나. 버마족이 정치와 군사 등 주류를 장악한 가운데 로힝야족은 1982년 시민권이 박탈되고 사회 안에서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잃어버렸다. 급기야 2017년 8월에는 1만명 이상의 로힝야인들이 학살 당한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 살아남은 이들이 국경을 넘어 이동한 곳이 이곳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 캠프다. 캠프 안의 임시 거주지인 셸터는 가족이 몸을 눕히고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도 좁고 어둡다. 이 곳에서 52%가량을 차지하는 여성들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로힝야의 규율 탓에 더욱 고립되고 억눌린 삶을 산다.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파시클 刊)는 이 난민 캠프의 여성들을 위한 마련된 작은 공동체 ‘샨티카나’를 구성하는 여성들과 활동가, 연대하는 창작가의 이야기다. 한국의 인도적지원활동가, 다원예술창작자, 국제분쟁전문기자, 독립연구자 등이 ‘산티카나’에서 생존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샨티카나’는 억눌린 삶을 사는 난민 여성들에게 울타리 역할이 되고자 만들어진 곳이다. 캠프 안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스스로 살아갈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다른 캠프 안의 여성을 돌볼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사회를 만들도록 돕는다. 이웃 여성들과 유대관계를 쌓으며 정신적 성장과 회복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제약 너머로 걸어 나가는 여성들에게 샨티카나는 마음껏 소리내고 웃으며 함께 춤출 수 있는, 또 다른 집이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한경국립대학교(총장 이원희)는 안성시(시장 김보라), 안성경찰서(서장 오지용)와 함께 지역사회 주민의 교통안전과 장애인 보행자의 안전한 통학을 위해「한경국립대학교 횡단 보도 설치 공사」를 마무리하고, 9월 3일 개통식을 개최하였다. [횡단보도개통식] □ 한경국립대학교는 평택에 소재한 장애인교육 특화대학인 한국복지대학교와 2023년 3월 1일 통합 출범했다. 이에 따라, 주 캠퍼스인 안성캠퍼스에도 장애인 학생들이 많아짐에 따라 장애인 보행자의 교통안전 확보를 위해 안성시와 안성경찰서와 협의를 통해 횡단보도 설치 공사에 들어갔다. □ 이번 공사는 장애학생 보행안전 및 지역주민들의 편의성과 교통안전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교통안전 확보를 위해 교통영향검토를 바탕으로 교통안전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또한 하계 방학 동안 안성과 평택캠퍼스 모두 무장애환경도 대폭 개선하는 등 장애학생들의 안전한 보행을 위해 노력했다. □ 이원희 한경국립대학교 총장은 “이번 개선 작업을 통해 장애학생이 보다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게 되어 기쁘며, 지역 사회의 교통 안전 증진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 김보라 안성시장은 “안성에 거주하는 장애인 등 소외계층들이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복지환경 조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 한경국립대학교(총장 이원희)는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공모한 『몽골 스마트농업단지 육성 및 온실채소 보급사업 PMC 용역』에 최종 선정됐다. 사업은 몽골 내 연중 안정적인 시설채소 재배 추진 체계 확립을 위한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사업으로 한경국립대학교는 스마트팜 및 농업 관련 해외ODA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간기업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안성캠야간(소용량)] 기간은 2024년부터 2028년까지 총 5년으로 ‣스마트 농업단지 조성 및 기자재 지원 ‣스마트 농업기술교육 ‣영농기술 및 연구역량 강화를 통해 농업 생산성 향상 및 농가소득 증대를 목표로 한다. 대상지는 울란바타르시 북서쪽에 위치한 성긴하루항구 지역으로 농축산업 특화단지로 조성 예정인 Agro-City에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 최적 작물 생산과 몽골의 겨울철에도 채소 생산이 가능한 다양한 재배시스템 도입을 위해 채소연구개발센터를 구축할 계획을 갖고 있다. □ 이원희 한경국립대학교 총장은 “몽골의 기후에 대응할 수 있는 채소생산시스템 구축과 스마트 농업의 확산을 위해 한경국립대학교의 지속적인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 사업을 총괄 담당하는 한경국립대학교 윤덕훈 교수는 “해당사업을 통해 한국의 스마트농업 기술을 전수해 농가들의 생산성 향상 및 소득증대에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 한경국립대학교는 “필리핀 적정기술을 활용한 지속가능한 스마트농업구축('20-'23,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사업을 통해 K-스마트팜을 전수하며 우수한 성과를 낸 바 있으며, 24년 4월부터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국립대학교 과일채소과학과의 리모델링을 통한 스마트원예 분야 역량 강화('24-'31, 한국연구재단)”를 수행하고 있는 등 우리나라의 스마트 농업 기술을 전파하는 특성화된 교육 및 연구 기관으로 성장해 왔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 한경국립대학교(총장 이원희)는 전공자율선택제 입학생의 성공적인 대학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2024년 2학기부터 ‘새내기성공지원센터’를 개소했다. ◦ 전공자율선택제(무전공)란 학생이 입학할 때 전공을 정하지 않고 대학 생활 과정에서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학사제도로, 최근 교육부에서도 정부재정지원금을 통해 적극 지원하는 등 교육계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제도다. [한경국립대, 전공자율선택제 입학생을 위한 '새내기성공지원센터' 개소] □ 새내기성공지원센터는 총장 직속 기관으로 설치되었으며, 전임교원급 학사지도교수와 교육학 석·박사급 학사지도 상담가 등 전문 인력이 전공자율선택제 입학생을 전담 지원하게 된다. ◦ 입학생에게는 초기 상담을 통해 대학 적응 지원 원스톱서비스와 학사지도 상담, 멘토링, 전공탐색 로드맵 등 학생 맞춤형 전공결정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게 된다. □ 이원희 총장은 “전공자율선택제 학생들이 폭넓은 경험과 자유로운 전공선택의 대학환경을 통해 스스로 원하는 진로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돕고, 융합화된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새내기성공지원센터가 조력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기억의 분식집, 김명석 / 지식과감성 / 304쪽] 지난 2019년 출간된 장편소설 ‘반달’의 김명석 작가가 5년 만에 신간 소설 ‘기억의 분식집’으로 돌아왔다. ‘기억의 분식집’은 상처받은 과거를 안고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안과 희망과 행복을 선사해 주는 ‘힐링 소설’이다. 주방장의 비법 육수로 만든 칼국수를 시그너처 메뉴로 삼는 ‘기억의 분식집’과 그 앞에서 쓰러져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깨어나 기억의 분식집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 ‘유성’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과 그 해결점을 추리해 나가는 내용이다. 책은 ‘기억 상실’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주인공이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어느 날 갑자기 기억을 잃은 주인공은 ‘기억의 분식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저마다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여러 인물들과 얽히게 된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인 ‘기억의 분식집’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공간이 된다. 주인공은 비록 기억을 잃었지만, 분식집을 찾는 다양한 사람들과 얽히고 설키며 그들이 당면한 문제에 도움을 주는데, 주인공을 비롯해 각기 다른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치유해 가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작가는 따뜻한 시선으로 상처받은 인물들을 조명함으로써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다. 단순한 기억의 회복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새로운 자아를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데, 이 과정은 읽는 이에게 ‘상실’이 있기에 ‘회복’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를 통해 현대인들이 겪는 상실과 회복의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며, 독자들에게 자아를 찾는 여정의 중요성을 일깨워 줄 것이다. 또한 유성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겪는 이야기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공감과 연대임을 알려 준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소설, 한국을 말하다┃장강명 외 20명 지음. 은행나무 펴냄. 248쪽. 1만6천800원] 중견부터 신진까지, 널리 알려진 소설가들이 쓴 21편의 4천자 내외 '초단편' 소설집이다. 한국 문학에서 가장 활발하고 꾸준하게 글을 쓰고 있는 작가들이 '현재의 한국 사회'를 주제로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거지방, 고물가, 오픈런, 번아웃, 중독, 새벽 배송 등 열쇳말을 통해 현재 한국 사회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 그 방향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지에 대한 첨예하고 날선 질문들을 던진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학원 강사 면접을 보러 갔다가 어처구니 없는 질문 세례만 받고 온 취업준비생 성규(이기호 '너희는 자라서'), 재벌 목숨 한 번 구한 썰로 일약 스타 강연자가 된 셀럽(김동식 '돈'), AI 시대에 맞춰 작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장 생성사 자격면허 시험'(곽재식 '제42회 문장 생성사 자격면허 시험'), 타투 도안을 자유롭게 시술하고 지울 수 있는 기계를 사용했다가 극심한 부작용을 겪지만, 그보다 더한 편견에 맞서게 된 피해자들(정보라 '낙인') 등의 이야기가 한국 사회의 아이러니를 그린다. 노동, 일상, 관계 등을 열쇳말로 한 소설을 읽다 보면, '이거 내 얘기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생생하게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대부분이다. 혹은 아직 접해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해보게 한다. 문화일보가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기사가 아닌 '이야기'를 통해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자는 취지로 연재한 시리즈를 책으로 엮어냈다. 기획의 말에서는 "어떤 사실은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때 더 명징해진다"며 "애초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게 소설이 하는 일 중 하나고, 소설가들은 늘 인간의 마음을 유영하고 있기에"라고 했다. 참여 작가는 장강명, 곽재식, 구병모, 이서수, 이기호, 김화진, 조경란, 김영민, 김멜라, 정보라, 구효서, 손원평, 이경란, 천선란, 백가흠, 정이현, 정진영, 김혜진, 강화길, 김동식, 최진영이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1. 말하는 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사람이란말로써생활과 축적된 문화의 옥탑을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겠다.하나시인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사물을 불러와 의식의 형상화를 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미지를 조탁(彫琢)하면서 새로운 사물 에로의 끈질긴 갈구에서 이미지의 구성은 탄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일상의 범인과는 달리 언어의 영혼을 투영하면서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하며, 말하는 법이 달라야 하고, 생각하는 길이 달라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된다 해도 시는 항상 신기루의 몸짓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된 생각, 인고의 나날을 끝없이 견디는 아픔, 혹은 생의 환희에 작약(雀躍)하는 기쁨 등은 모두 시혼(詩魂)을 이루는 요소들이면서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모여한 편의시를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의 기도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에 필적한 만큼 깊이와 넓이에서 접신을 만나야 그릴 수 있는 시라 하겠다. 하나갈구하는 마음 혹은 절대의 진정성을 향한 순수의 마음은 동일한 궤적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 조립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이미지의 성을 만들고 당당한 성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임무는 정열과 신념의 나무를 내면에서 키울 줄 아는 선하고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었을 때 비로소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출발에 앞서 설레는 의욕이 앞서고, 이미지 축조의 땀이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 가는 길에 망설임과 헤매는 것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오히려 내일을 열어가는 기대치로 인식될 때, 작은 흠결은 희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더욱 정진하고 섬세한 정서가 남다름을 직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의 이미지 사냥에 남다름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꽃은 저만큼 지는데 이유 모른 채 애태우더니 잎 지는데 잎은 지는데 이유 모른 채 가슴 아파라 작년은 그렇게 가더니 올해 또한 잎처럼 져버려 내후년 또 내후년 꽃피고 지면 알 수 있으려나 하나생을 다 살아야만 알 수 있으려나 꽃 필적 사랑이 들더니 잎 질 때 사랑 떠나가 꽃피던 그해 너무 아련하여 잎 지던 그해 너무 야속해 <꽃잎은 지는데>중 꽃이 피면 사랑의 감정이 일렁이고, 잎이 지면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간명하게시화되었으며,감수성과 그리움과 아쉬움의 애증이 매우 여린 것 같고 섬세하다. 사물에 시심을 의탁하는 것은 시인의 내면 정서가 작용하면서 매우 감각적인 효과음을 내는 현악기와 같이 민감성을 들어내는 듯하다. 꽃이 지면 ‘가슴 아파라’의 예민성은 시심을 불러오는 영감(靈感)의 촉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자산은 시인으로서의 먼 길을 예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는 인간의 정서를 포착하여 일체화를 이루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숲 속을달려가는 한 자락의 바람이나 향기에 실려 가는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또한 얻을 수 있다면 시와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자동문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은 모든 어려움과 애로 사항을 커버하고 구체적인 정서의 흐름을 만나는 지름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그리움 만나기 인간에게 그리움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는 방편이면서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려는 발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대상이 인간이거나 아니면 어떤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될 때, 거기에는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이를 정신의 갈증 현상으로 지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리의 짧음과 긴 파장에 의해 긴밀도의 농도는 얼마나 간절한가의 여부 즉 열정으로 전환한다. 열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안으로 작용하는 두 가지 중에 대체로 후자일 경우 미지(未知)에 대한 거리를 좁히려는 발상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움이 짙어질수록 그리움의 농도는 행동으로 나타날 여지를 갖지만 항상 정적인 태도로 작용한 인상으로 남는 듯하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 그리우면 스쳐 지나간 여운조차 숨기려 해도 감추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 <짝사랑> 중 오직 사랑이라는 제목에서 정서를 안으로 감추고 사랑의 깊이를 간직하려는 발심인 듯하다. 물론 짝사랑이라는 일방적 의미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겉으로 동일하지 않고 진심을 표출하려 하지만 그런 행위까지에는 상당한 거리와 여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에서 발각의 경우놀랄 일은아닐지라도 곱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상대에게 굳이 알리지 않으려는 생각인 듯하다. 아울러 ‘거울에도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라는 서술에서 작심의 농도는 매우 강하나 그러나 감추는 일은 항상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움의 마음은 향기와 같이 무언가 표정으로 드러나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유종필은내면의 향기를 겉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감추면서 애가 타는 심성이다. 이러한 내성적인 정서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성품에서 보이는 특성이 아닐까 한다.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조차 아름답기만 하네 우리 언젠가는 소소한 것으로 만나 다음 어느 날에 둘이라도 하나처럼 이름 짓고 싶네 곁 바람, 겸 잎 같이 짝지어 가슴속몸짓으로 하나이고 싶네 끝없는 그리움이 추억 보듬는 날 첫눈의 눈발도맨가슴에날아드는 기억뿐일지라도- <그리움은 끝이 없어>중 아름다움은 마음에서발동하는정서의 일종이지만 기억을 윤나게 하는 인자(因子)를 가지고 있어 항상 내면에 숨어 있고, 언젠가는 나타날 순간을 포착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심성이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의 얇은 층을 뚫고 나타나는 순간 마치 봄날의 개화처럼 아름다움의 연상을 펼칠 수 있는 놀람 앞에 서 있는 듯하다. 그리움은 연속작용이면서 이 연속성은 항상 아름다움을 채색하는 좋은 기억과 손을 잡으려 하는 모습이다. ‘소소한 것으로 만나’와 같이 작은 것- 여기서 발생하는 인연의 소중함이 점차 커지는 의식을 확장하기 때문에 작은 그리움들이 추억으로 쌓이면서, 아름다움의 옷을 입게 된다. 결국 유종필의 그리움은 ‘겹 바람’ 혹은‘겹잎’처럼 둘이 ‘하나이고 싶네’의 소망을 달성하려는 정서로 앞축된다.왜냐하면 ‘추억’이라는 시어가 ‘기억뿐일지라도’의 상상으로 배회하는 그리움- 멀리 있는 미지(未知)를 향하는 호소가 아닐까 한다. 3.동화(同化)와 변화 이미지 아이덴티티는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는 일체화를 뜻한다. 시를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 즉 사물과 시심을 결합하는 데서 미감(美感)을 획득하는 일니다. 때문에 아이덴티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언어 장치를 필요로 하고 여기서 시인의 재능은 확실한 담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본질로 향하기 위함에서 시어의 모순이 발생하지만 이는 시적 허용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다. 그리움이나 사랑에서는 대상과 하나의 결합이 동화의 이름이 되고 시에서도 그런 집념이 초점을 맞추게 되면 시는 완성의 문패 즉 성주가 되는 것이다. 녹음의 임자 여름 지고 따라나선 푸름이 변색하여 요염해지거든 가을이 오니 유혹에 넋을 잃고 찬 서리 날리는 어느날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 하염없이 높이만, 높이만 오르나 너닮은마음이라 나 또한 치솟기만 하네. <하늘>중 하늘과 시인이 하나로 결합을 이루면 푸름이라는 물이 든다. 이런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짙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열망이 결합하는 것은 시인의 마음속에 간직된 순수와 투명한 정서가열린마음을 필요로 한다. 여름의 푸름과 녹음, 그리고 하늘의 이미지가오버랩되면두 개의 사물은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변모가 된다. 이런 시의 변화는 화학적인 결합이고 변모이기 때문에 신선함과 언어의 탄력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시의 성공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높이만’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에서 치솟는 마음의 상태는 정화된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고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4.자아(ego)찾기 나를 찾는 것은 철학의 시작이며 철학의종점 이러고들한다. 즉 나를 아는 일은 곧 시의 입구이며 철학도 결국에는 시의 가슴에 안기는 절차가 아닐까? 시란 그런 넓이와 깊이가 있기 때문에 철학도 시의 표정을 수용하는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결국 종국에는 사는 것, 그것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은 철학이지만 시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시인은 방랑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 관리를 포착하여 의미의 성을 구축하려는 노력과 열정이 있기에- 내 속에 내가 없다 내가 없는 속에서 존재하는 나는 이미 몰가치의 상념만 존재하고, 은행나무 곁을 지나는데 잎은 지고 가로수 본연의 충실함으로 길가를 노랗게 물들여놓았는데 .... 중략.....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내 속에 내가 출타하고 기약 없는 세월은 흘러갈 일이고 그렇게 또 흘러가겠지 그때쯤이면 나에게 돌아와 무엇이라 말할 것인지 궁금하구나 자아여..... <내 안에 없는 자아>중 만약 내가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로 갔을까? 찾아 나서도 어디로 가야 할 방향이 없을 때, 망연함과 절망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은 항상 희망의 이름을 부르는 길을 만들기 때문에 나를 찾는 여정은 계속할 수밖에 없다. 자아가 없는 내 인생은 이미 인생이 아니라 허울을뒤집어쓴마네킹과 같다면 여기서 개성의 기대는 불가능한 것이다. 시는 참된 인생이 무엇이고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이고,감동받는호소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지난한 난관이 있더라도 내가 무엇이고 내가 어디로 가는 방향의 가늠은 삶의 가치에 직결되기 때문에 알아야 할 영원한 숙제로 남는 것이다. 자아 즉 내 안에서 나를 찾는다는 일은 절망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서 나를 찾는 일 또한 공허의 이름일지라도 나를 향하는 그림자 찾기는 필연으로 엮어진다. 왜냐하면 내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없는 운명이기에- 이 슬픈 여정은 생의 이름으로 진행형일 때, 삶의 이유는 분명해진다. 유종필은 자기(ego) 찾기의 숙제를 달성하기 위해 물음을 던지는 일- 그렇게 시는 이어져 가는 듯하다. 시는 그런 여정을 포착하는 이름일 뿐이기에 길을 묻는 여정은 곧 시로 가는 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다는 것 달콤한꿈 속에놓인 불안한 몽환처럼 알 수 없음이라 <인생의여정?> 중 인생의 맛 삶의 맛을 분류한다면 아마도희로애락의오욕에 칠정(七情)에 따라 인생에 대한 희비는 생성할 것이다. 그러나 쓴맛과 단맛의 구분은 가장 평범한 구분이라면 결국 생에 대한 각자의 구분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맛이 타인에게는 쓴맛으로 다가올 수 있는 구미(口味)의 문제는 개인차로 한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안한 몽환처럼/알 수 없음’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것 같다. 개개인은 하나의 완전한 우주라 보기 때문에 비교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귀한 삶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고 어디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개개인 자신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찾는 것도 아니면 버리는 것조차 개인의 문제로 터널을 건널 때, 욕망이라는 자기 확장의 방법만이 있는 것이다. 원래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겠는가? 마음 한 구석 식지 못할 열정 남아 자꾸 먼 산 엿보네 머리 깃털 날리면 길을 가다가도 하늘을 보며 ‘날자꾸나, 날아보자꾸나, 하며 하늘만 우러러보지요. 하늘만 우러러봅니다. 오늘도 <메말라 가는 자아>중 누구나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날 수 없는 제약의 그믈에서헤어 나오지못하고 다만날갯짓이고작인 슬픔의 일상은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의 현실 앞에서 고뇌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현상을 돌파하고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은 의지와 신념 그리고 지혜라는 도구를 통해 남보다 다른 개성의 성주가 될 수 있다. 이는 나이라는 켜가 아니라 열정의 에너지를 얼마나 충전하고먼 길을갈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유종필은 이런 현상을 일찍 터득하고 인생에 삶에 서 있는 듯하다. 그도 이상이 슬픈 고백처럼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고 창공의 주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피력한다. 그러나 하늘은 누구나 오르고 싶은 공간이지만 쉽게 도달의 열쇠를 가질 수는 없다. 하여 ‘하늘만 우러러본다’라는 체념의 언덕에 주저앉아 높이만을 동경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성찰의 조숙한 인상이 대답을 마련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5.나를 대면하기 시인은 세속을 버려야 하고 묵언의 진리를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경지를 방문해야 할 듯하다. 다시 말하면 말의 운용지가 아니라 글을 재료로 인생이나 우주를 담아야 하는 창조자의 임무가 주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명시인』 『시의 배고픔』 등은 스스로의 위치와 처지를 알고 시에 대한 소회를 대변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비 오는날의 신호등은 홀로 서서 봐주는 이도 없는데 연신 몸짓 간절하여 아무도 없는 밤 장대비가 오는 그런 날에는 내 모습 같아 처량하여 애달프기만 하네 <무명시인>중 무명의 설음은 어느 분야에서나 인간은 같다. 춥고 외롭고 그리고 무관심의 냉정함이 서럽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것은 무명의 대부분의 삶이다. 평범한 시인이 쓰는 간절함의 애달픈 시어가 필자 또한 겪었기에 느끼는 바가 너무 크다. 싹이 나올 무렵의 신산한 고통을 혼자 견디고 나서 그런 연후에 비로소 자존의 문패를 달 수 있는 것이다. 처절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없다면, 웃자란 식물의 운명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가의 여부는 결국 성장의 동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춥고 때로는 참담한 경지를 벗어날 때 건강한 존재로 일어설 수 있다는 진리와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6.에필로그 새는 창공을 날고 싶어 한다. 그러나 비상을 하기 위해서는 땅에서 걷는 법을 알아야 하고 땅의 이치를 알고 하늘의 이치를 대입하면 두 공간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 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이치가 둘의 이치를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우주의 이치가 아닌가?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의 가락을 인간에게 바쳐야 할 이유-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을 위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해야 하며 오늘에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계의 이미지 구축을완료했다면 이다음은 건축의 마무리를 확실히 하는 발성이 기대되는 소이(所以)가 위의 논지를 재촉이 된다는 것을 말하며 더는 숙제가 될 것 같아 설계도의마무리해줄것을 기대하며 나가려 한다. 2024.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공정 정의 사색의 길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1] [이승섭 시평집 2] [이승섭 시평집 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한경국립대학교(총장 이원희) 유니버설디자인센터(센터장 곽성준)는 지난 25일부터 29일까지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제22차 세계인간공학 연합 국제학술대회(IEA 2024) 특별세션 유니버설디자인 국제 전시회 및 세미나(주제: Design For All)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전 세계 70여개국에서 1,500여명이 참여하며 높은 관심을 받았다. [유니버설디자인전시] □ 지난 26일에 제주국제컨벤션센터 갤러리에서 개최된 유니버설디자인 국제 전시회 개회식에는 이원희 총장, 윤명환 IEA 2024 조직위원장, 한국상품문화디자인학회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29일까지 이뤄진 이번 전시회에서 유니버설디자인센터는 국내외 유니버설디자인 작품 110여점을 전시하여 한경국립대학교 유니버설디자인센터와 유니버설디자인에 대한 IEA 2024 참여자의 적극적인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지난 26일 오전에 개최된 유니버설디자인 국제 세미나에서는 △ 곽성준 교수(한경국립대)의 Evaluation and Utilization of Signage Information Transmission and Universal Design Elements △ 선병일 교수(남서울대) Case Study on Intuitive Posters △ 장창식 교수(대구대)의 Universal Design and Application Case △ Rikke Hansen의 Universal Design: The Use of Pictograms and Iconography in Denmark △ 김곡미 원장(충남정보문화산업진흥원)의 2024 Universal Platform의 발제가 진행되었다. □ 이원희 총장은 “우리대학은 지난 7일 국회 위성곤 의원실 주최로 한국행정학회와 공동으로 유니버설디자인 기본법 제정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유니버설디자인 입법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이에 많은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밝히며 “아울러 IEA 2024 관계자, 한국상품문화학회 참석자, 유니버설디자인 국제 전시회 작품출품자 및 세미나 발표자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 곽성준 센터장은 “유니버설디자인과 인간공학은 사용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점에서 공통 분모가 있어 작년부터 대한인간공학회와 교류하여 유니버설디자인의 학문적 연계성을 넓히고 있다”며 “향후 유니버설디자인 기본법이 제정되고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유니버설디자인의 발전이 지속되어 대한인간공학회와 함께 미래의 인간 생활에 학문적, 실용적인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