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문화재]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 정무공 오정방(1522∼1625), 천파공 오상(1614~1672), 충정공 오두인(1624∼1689) 등 해주 오씨의 이름난 학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이 위치하는 덕봉마을은 사액서원인 덕봉서원과 오정방 고택, 종친의 무덤이 모여 있어 해주 오씨의 역사를 보여준다. 오정방의 손자인 오핵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고택은 덕봉리 입향조 오현경에 의해 1510년에 처음 지었으며, 165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사랑채에 걸린 ‘퇴전당(退全堂)’이라는 현판은 오정방의 호를 1662년에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이 가옥은 문간채가 전면에, 그 안쪽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있으며 사랑채 뒤쪽으로 사당이 별도의 담장을 두고 자리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 가옥은 건립된 시기와 경위가 잘 기록돼 있으며, 16세기에 건립된 원래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더라도, 건물의 목재를 다듬은 상태가 좋으며, 안채의 툇마루와 부엌의 다락에 달아둔 창호에서 높은 수준의 목조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사랑채에 기둥의 모를 깎아 팔각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의 사랑채에서도 나타나는 방식으로 유사한 시대에 인근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코리안 쿠튀르: 세대를 이은 혁신(Korean Couture: Generations of Revolution)’ 전시장 입구. 1]경기도박물관 제공 한국 복식 특별전 ‘코리안 쿠튀르: 세대를 이은 혁신(Korean Couture: Generations of Revolution)’으로 지난 달 28일 개막한 이 전시는 한국 패션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조망한다. 전시는 한국의 패션을 선도한 현대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이상봉, 이진윤, 이청청 등의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디자이너들의 창의력과 역사의 만남을 선보인다. 한국 ‘쿠튀르(고도의 재단·봉제 기술을 사용해 정교하게 만들어 낸 고급 의상)’의 아름다움과 현대적인 면모를 함께 살펴보며 패션의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리로, 관람객은 전통 복식과 현대 복식을 비교하며 한국 패션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코리안 쿠튀르: 세대를 이은 혁신(Korean Couture: Generations of Revolution)’ 전시 전경.2] 경기도박물관 제공 앞서 도박물관은 지난 3월까지 선보인 기증 복식 특별전 ‘오늘 뭐 입지?(OOTD: Outfit Of That Day)’에서 심연(沈演, 1587년~1646년)과 그의 부인 전주 이씨 묘에서 출토된 복식을 선보였다. 2017년 청송 심씨 사평공파 문중이 박물관에 기증한 이들 17세기 복식 유물은 400년 전 조선 사대부의 일상은 물론 그들의 사유 세계까지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청송 심씨 사평공파 기증 유물은 수습 과정부터 도박물관의 전문 학예사가 참여한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과 윌리엄 그리스올드 클리블랜드 미술관장이 ‘경기도박물관 -클리블랜드 미술관 해외문화교류 업무협약’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3] 경기도박물관 제공 특히 도박물관과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상호 교류를 촉진하고 대중을 위한 문화 및 교육 활동을 증진하기 위한 ‘경기도박물관-클리블랜드 미술관 해외문화교류 업무협약’을 했다. 업무협약은 ▲교류 전시 및 공동 기획 전시 ▲소장품 및 전시·교육 분야의 정보 교류 ▲직원 연수 및 상호 방문을 통한 인적교류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자연과 여유를 입고 있는 한국 패션의 고전과 현대 거장들의 걸작이 한국에서조차 한자리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며 “특별전이 기능에 치우친 서구 옷의 미래에 큰 영감을 던져주는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요저널] 양산의 역사인물을 대표하는 삼장수 문중에서 보관중이던 미공개 고문헌이 대거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삼장수는 양산이씨 시조인 이전생의 세 아들로 이징석, 이징옥, 이징규 등 조선초기를 대표장수이며 양산을 대표하는 명문가이다. 이번 발견은 이달 초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 삼장수 생가터를 정리하던 중 별도에 보관중인 목궤안에서 발견한 것으로 이근수 씨가 시립박물관에 알려오면서 확인됐다. 발견된 고문헌은 양산이씨가첩, 조선중기의 상서문, 집안의 내력을 알 수 있는 호적 관련 문서 서간문, 고서 등 총 127점에 달한다. 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에 발견된 문서류는 지금까지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문건으로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집안의 내력을 확인할 수 있는 문서들로 매우 귀중한 역사자료라는 것. 특히 경상 감영에 올렸던 상서문과 서간문 등은 당시 지역사회의 소사를 알 수 있는 문건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박물관에서는 문건들의 보관과 고증을 위해 박물관으로 임시 이관한 상태이며 향후 문건의 정확한 해제를 위한 연구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번 발견을 계기로 시에서 현재 추진 중인 ‘삼장수마을’관광화 사업과 ‘이징석 장군묘’문화재 지정사업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향후 삼장수마을 테마체험관 건립을 포함해 인물, 장소, 전설, 유물을 포함한 융복합형 문화관광에 대한 컨텐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발견된 고문서류는 문중과 협의해 기초조사를 마친 후 문화재 지정절차와 함께 순차적으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박물관에 보관중인 삼장수 관련 문서는 보물 1001호로 지정된 문서를 포함해 총 131건 143점이 있다.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은 “이렇게 많은 삼장수 집안의 고문서들이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보관됐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며 “이번 발견으로 양산지역의 역사 정체성 확보에 획기적 자료가 될 것이며 향후 삼장수 문중의 단독특별전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금요저널] 수원화성박물관이 소장한 ‘경국대전’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문화재청이 3일 보물 지정을 예고한 ‘경국대전’은 조선의 통치체제를 규정한 최고의 성문법전이다. 세조는 즉위년부터 노사신·최항·서거정 등에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라” 명했고 몇 차례 수정과 증보를 거쳐 1485년에 ‘경국대전’이 완성됐다. 을사년에 완성돼 ‘을사대전’이라고도 불린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본은 16세기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경국대전’으로 권4·권5·권6의 내용이 2책에 걸쳐 수록돼 있다. 금속활자로 간행된 ‘경국대전’ 중에서 권4~6에 해당하는 국내 유일본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 ‘경국대전’은 2016년 11월 보물로 지정된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조선경국전’과 더불어 조선시대 법제사와 제도사 연구의 핵심이 되는 문헌이다. 금속활자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은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경국대전’이 16세기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을사대전’이며 ‘경국대전’의 인쇄본으로 이보다 더 앞선 사례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기에 희소성이 크고 ‘경국대전’ 권4~6에 해당하는 국내 유일본으로 조선왕조 통치의 기틀을 다진 법전으로써 역사적 상징성이 있고 이미 보물로 지정된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조선경국전’의 맥을 잇고 있어 학술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헌이라고 인정했다. ‘경국대전’은 ‘조선경국전’에서 구상한 통치 이념과 정치 체제가 반영된 법전이다. 조선 후기 개혁정치를 꿈꾼 정조가 국정운영의 요체로 ‘대전통편’을 펴내는 데 중요한 기틀이 됐다. 조선의 주요 법전을 모두 소장한 수원화성박물관은 조선 법제사 연구의 기반을 구축하게 됐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지정 예고 기간 이후인 6월 초 최종 심의를 거쳐 보물 지정 확정 고시가 이뤄질 예정이다. 수원화성박물관 관계자는 “개관 이후 지금까지 매년 진행한 유물 구입으로 귀중한 유물을 다수 소장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의 확보에 힘써 역사문화도시 수원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겠다”고 말했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최근 청와대가 풍수지리상 터가 좋지 않아 역대 대통령들의 말년이 대부분 불행했던 것이라며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굳이 풍수지리가 아니더라도 본래 청와대 터가 조선시대 칠궁과 같은 사당이나 호위무사 연습 터로 쓰던 자리였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려놔야 한다는 주장도 또한 있다. 글쓴이 : 김수한 <역사칼럼니스트> 이러한 여러 가지 잡음 속에 드디어2022년5월10일 개방하는 청와대는 대통령의 집무실·접견실·회의실 및 주거실 등이 있는 본관과 비서실·경호실·춘추관·영빈관 등 부속 건물로 되어 있고 넓은 정원과 북악산(北岳山)으로 이어지는 후원(後園)및 연못이 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1948년8월 정부수립 후, 1960년8월까지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명명으로 제1공화국의 대통령 관저명‘경무대(景武臺)’로 불려오다가,그 해8월13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尹潽善)이 선출되어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개명하였다.이 명칭은 대리석으로 된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청와대 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이 있던 곳이다.조선시대에 들어와1426년(세종8)에 창건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밖으로 후원에 해당하는 이 지대를 경무대라 하였다. 북악산 산록에 위치하여 서울 장안을 전망할 수 있는 이 경무대는 어영(御營:조선시대,인조반정 뒤에 조직한 군대의 하나)의 연무장(鍊武場)이나 과거장(科擧場)으로서,또는 친경(親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울안에는 원래 융무당(隆武堂)과 경농재(慶農齋:조선 말엽 경복궁의 뒤뜰에 있던,각 도의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못됨을 알아보던 집)등이 있었으나,일제강점 후1927년 일제에 의하여 헐리고,일본인이 조선총독 관저를 건립하였다. 이곳을 제7·8·9대 조선총독이 관저로 사용하였고,광복이 되어서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Hodge, J. R.)중장이 사용하다가1948년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정부로 이관되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동시에 경무대라는 이름을 되찾아 대통령 관저명으로 사용하였다.이승만(재임1948∼1960)대통령은6·25전쟁의 피난시절을 제외하고1960년4월까지 초대·2대·3대 대통령으로 보낸12년간을 이곳에서 보내고4·19혁명에 의한 하야와 함께 이화장(梨花莊)으로 옮겼다. 경무대라는 이름은3·15대통령 부정선거 등 독재와 비정(秕政)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1960년8월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 뒤1963∼1979년(5∼9대)박정희(朴正熙), 1979∼1980년(10대)최규하(崔圭夏), 1980∼1988년(11∼12대)전두환(全斗煥), 1988∼1993년(13대)노태우(盧泰愚), 1993∼1998년(제14대)김영삼(金泳三), 1998∼2003년(제15대)김대중(金大中), 2003∼2008년(제16대)노무현(盧武鉉), 2008∼2013년(제17대)이명박(李明博), 2013~2017년(제18대)박근혜(朴槿惠)대통령이 거쳐 갔다. 2017년(제19대)문재인(文在寅)대통령이 입주하였다. 청와대①영빈관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건물로서1978년1월에 착공하여 그 해12월에 준공이 되었다. 이 곳 영빈관은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며,외국의 대통령이나 수상이 방문했을 때 우리 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행사장으로 이용되거나100명 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2층에도1층과 똑같은 홀이 있는데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사용된다. ②본관은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장소이다. 이 건물은 정부와 국가를 대표하는 우리의 얼굴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전통 목조 구조와 궁궐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내부 구조는 현대적인 감각과 시설을 갖추도록 하였으며,우리 나라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가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八作)지붕을 올리고 한식 청기와를 이었다.약30만 장이나 되는 청기와는 일반 도자기를 굽듯이 한 개 한 개 구워 내어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고 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1층에는 대통령부인의 집무실과 접견실,연회장,식당이 있으며, 2층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접견실,회의실이 있다.그리고 건물 앞의 넓은 잔디마당은 국빈환영행사와 육·해·공군 의장대,전통복식을 입은 전통의장대의 사열 등이 행해지는 곳이다. ③수궁(守宮)터인 지금 청와대가 위치한 지역은 옛날부터 풍수지리학상 길지(吉地)로 알려져890년 전인 고려시대에 이곳에는 남경의 이궁이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이 곳은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으며,그 뒤1868년(고종5)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융무당·오운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과거시험이나 무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또한 이곳은 농사가·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기 위해 왕이 손수 가꾸던8배미의 논이 있던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후원에 있던 건물들을 다 허물고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하였고,총독관사를 새로 지어7·8·9대 총독이 사용했다. 일본인들이 여기에 관사를 지은 것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그 뒤편에는 총독관사를 지음으로써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지리학상 용맥을 끊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이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 높은 곳에서 보면 총독관사 건물은大(대)자의 모양을,총독부 청사건물은日(일)자의 모양을,서울시청 건물은本(본)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세 글자를 이으면 대일본이 된다. 그 뒤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곳은 미군정 사령부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었고,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던 구청와대 건물은1993년11월 철거되었는데, 1989년에 집무실과 관사를 분리하면서 구 청와대 본관을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 및 박물관으로 보존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하게 된 것이다. 철거 뒤 그 자리를 옛 모습대로 복구시킨 뒤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다 하여 지금은 수궁터라 부르게 된 것이다. ④비서실별관(신관)및 동별관은 비서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서,신관은1969년에,동별관은1972년에 건립되었다.⑤상춘재(常春齋)는1983년4월 준공된 전통적인 한식 가옥으로 외빈접견 등에 사용되고 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청와대 경내에는 전통 한옥식 건물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와도 우리 나라 가옥 양식을 소개할 길이 없었던 차에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하여 전통 한식가옥인 상춘재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연혁을 보면 현 상춘재 자리에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 관사로 건축된 일식 목조건물인 상춘실(약20평)이 있었으나1977년12월에 철거하고,이듬해3월 천연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약22평)로 개축하여 상춘재(常春齋)라 명명하였다. 그 뒤 전통한식집을 형태 변경 없이 목재로 보수하는 공사를1982년11월20일 착공하여 온돌방1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연건평116평의 건물을1983년4월5일 완공하였다. ⑥녹지원(綠地園)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이다.이 곳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채소밭이 있었고 일제 총독관저가 들어서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이 조성되었는데1968년에 약1,000여 평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했다.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장애인의 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1995년5월28일에는 인근 주민 약3,000여 명을 초청하여KBS열린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310년에 이르며 높이는16m이다.연혁을 보면 옛 경복궁의 후원으로 채소밭·가축사육장·온실 등의 부지였으며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는데 국내외 귀빈 및 외교사절단을 위한 야외 행사장, 5월5일 어린이날 행사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⑦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대통령 관저는,대통령의 공적인 업무공간과 사적인 업무공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느껴1990년10월25일 완공되었는데 형태는 전통한식(본채는八作지붕의 겹처마에 청기와를 얹은‘ㄱ’자형 지붕 형태)이며 구성은 본채·별채·대문채·사랑채·회랑으로 되어 있다. ⑧춘추관(春秋館)은1990년에 완공되었으며,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맞배지붕에 토기와를 올려 전통적인 우아한 멋을 살린 건물이다. 현재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와 출입기자들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 나라 언론사 기자78명이 상주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로서1층은 기자들이 사용하는 기자실과 담화발표 등을 하는 소회견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에는 대통령 기자회견과 각종 문화행사 등을 하는 다목적실이 있다.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춘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가 오늘날의 자유언론의 정신을 잘 상징한다는 뜻에서 채택되었다. 고려시대 시정(그 당시의 정사)의 기록을 맡아오던 관청으로 고려 개국 초에는 사관이라 하다가1308년(충렬왕34)이를 문한서에 병합하여 예문춘추관으로 고쳤다가1325년(충숙왕12)에 예문관과 갈라져 춘추관으로 독립했다.춘추관은 다시1356년(공민왕5)사관으로 개칭하였다가1362년 다시 춘추관으로 되고1389년에는 예문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으로 환원되었다. 조선 개국 당시에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예문춘추관이라 하다가1401년(태종1)예문관과 분리하여 춘추관으로 독립되었고, 1894년(고종31)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청와대가 서울 시내에서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특별시의 중심인 종로구에 있다지만,바로 뒤에 북악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정면은 경복궁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서 중심이라면 중심인데 중심이 아닌 느낌.그래서 서울의 배꼽이라고 할 수 있는 용산구로 청와대 이전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으며,특히 용산기지 이전으로 청와대의 용산 이전론이 탄력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서울 시내에서 청와대가 옮겨갈 만큼 넉넉한 부지가 용산 이외에는 없을 뿐만 아니라 용산 지하에 있는 벙커 등을 지하시설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고려되었다.또한,원주민에 대한 보상이 불필요하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혔다.그러나 다양한 이유의 반대론도 거세게 일어나고 있지만,결국 윤석열 정부는 청와대를2022년에 용산으로 이전하는 것을 확정하였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금요저널] 종로구가 4월 22일 오후 2시 숭인근린공원 내 동망봉에서 ‘제14회 단종비 정순왕후 추모제’를 개최한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고 종로와 정순왕후의 인연에 주목하며 지역의 소중한 역사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한 자리이다. 지난 2008년을 시작으로 코로나19 확산세를 고려해 2020년을 제외하고 매해 꾸준히 추진해 왔으며 올해에는 거리두기 전면 해제에 따라 더욱 많은 주민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들로 기획했다. 이번 추모제의 주제는 동정으로 정했다. 단종을 그리워하며 오랜 세월을 홀로 살다 간 왕후를 동정하는 마을 여인들의 마음이 500여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 정순왕후를 기리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는 뜻을 담았다. 여산 송씨 종친회와 구청 관계자, 인근 지역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2시부터 식전공연 인사 말씀 추모공연 추모제례 기념 촬영 순으로 이어진다. ‘식전공연’을 위해서는 퓨전국악팀 하나연과 비보이들이 함께 정순왕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전통국악기와 춤으로 풀어내고 ‘추모공연’은 창작무용·타악 퍼포먼스 그룹 아작이 맡아 왕후의 혼을 위로하는 춤사위를 선보인다. ‘제례’ 봉행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이끌 예정이다. 한편 1454년 어린 나이에 왕비에 책봉된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왕위를 세조에게 일임하고 상왕이 되면서 왕대비가 되지만, 단종이 영월로 유배됨에 따라 궁에서 쫓겨나 관비로 전락한다. 단종 승하 후에는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그의 명복을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종로구는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청룡사, 정업원 터, 단종의 안위를 빌기 위해 매일 올랐다는 동망봉,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마지막 인사를 나눈 영도교 등 관련 유적지를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숭인동’ 골목길 탐방 코스를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정순왕후의 한 많았던 삶과 조선왕조의 역사에 대해 배우는 숭인동 코스를 포함해 종로 구석구석에 얽힌 해설을 듣고 관광하는 ‘해설사 프로그램’은 구청 누리집에서 사전 예약 후 이용하면 된다. 구 관계자는 “매해 4월마다 정순왕후 추모제를 통해 후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지역의 소중한 문화자산을 알리는 시간을 가져왔다”고 설명하면서 “지난했던 정순왕후의 삶을 기리는 올해 추모제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금요저널]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오는 22일 11시 ‘성암 김재계 선생 80주기 추념식’을 거행한다고 밝혔다. 억불산 김재계 선생 묘역에서 열리는 추념식에는 김재계 선생 유족을 비롯한 100여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행사는 약력보고 헌화 및 분향, 추념사 순으로 진행된다. 성암 김재계 선생은 우리민족 암흑기인 일제 치하의 시대에 종교인으로서 독립운동가와 민족교육자로 활동했다. 1906년 장흥군에 천도교당이 개설되자 천도교인이 되어 활동하면서 천도교 장흥교구의 발전에 정성을 기울였으며 1919년 장흥의 3·1만세 운동을 주도하며 3년간 옥고를 치뤘다. 이후에도 줄곧 천도교 선교와 아울러 사회교화 운동에 신명을 바쳤으며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기도 운동과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1938년 멸왜기도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해 1942년 6월 옥고로 인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김재계 선생 환원 이후, 1987년 지금의 억불산 묘역으로 묘소 이장을 하면서 매년 4월 22일 김재계 선생 추념식을 개최해 선생의 애국정신을 계승해 위상을 높이고 있다. 장흥군 관계자는 “80주기를 맞아 김재계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금요저널] 광복회광명시지회는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을 맞아 4월 20일 오후 6시 광명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초빙해 강연회를 개최한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쇼와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해 일본군 수뇌부를 응징하는 쾌거를 이뤘으며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그해 12월 19일 가나자와 미고우시 일본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어 2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광복 후인 1946년 조국에 봉환되어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윤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강연을 맡은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많은 역사서를 저술하며 중국의 동북공정과 임나일본부설의 부당성을 역사적 고증자료로 반박하는 등 우리역사 바로알기를 추진해 나가고 있다. 이날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와 상하이 의거 관련해서 강연을 진행한 후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김충한 광복회광명시지회장은 “이번 강연회에 많은 시민이 참석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함께 고찰하고 역사인식과 나라사랑 정신 함양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 전했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금요저널] 가락국 제10대 구형왕과 계화왕후를 추모하는 제례인 덕양전 춘향대제가 지난 16일 산청군 금서면 덕양전에서 봉행됐다. 이날 제례는 이상률 경남경찰청장이 초헌관, 전보삼 전 문체부 문학진흥정책위원원장, 김길수 경남문화원연합회장이 종헌관으로 봉행 헌작했다. 또 지역 기관단체장과 전국 가락 문중·유림 등이 참석했다. 가야시대 대표 유적지 중 한곳인 덕양전은 지난 1983년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로 지정됐다. 덕양전은 인덕문과 함께 직사각형의 돌담을 두르고 그 안에 홍살문, 영전각, 안향각, 추모재, 동재, 서재, 해산루 등 건물이 들어서 있다. 경남도 우수 선현제례 행사로 선정된 덕양전 춘·추향대제는 매년 음력 3월 16일과 음력 9월 16일에 봉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덕양전에서는 매월 음력 초하루, 보름에 삭망향례를 올림으로써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by 김주환 연합본부장“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우리들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장부가[丈夫歌]〉 丈夫處世兮 其志大矣장부가 셰상에 쳐ᄒᆞᆷ이여 그 ᄯᅳᆺ이 크도다 (장부가 세상에 있음이여,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ᄯᆡ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ᄯᆡᄅᆞᆯ 지으리로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텬하ᄅᆞᆯ 웅시ᄒᆞᆷ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천하를 웅시함이여,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東風漸寒兮 壯士義烈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ᄯᅳ겁도다 (동풍이 점점 참이여,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분ᄀᆡ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鼠竊○○兮 豈肯比命쥐 도젹○○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쥐 도적○○이여,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豈度至此兮 事勢固然엇지 이에 이ᄅᆞᆯ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사세가 본디 그러하도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동포 동포여 속히 ᄃᆡ업을 이룰지어다 (동포,동포여,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만셰 만셰여 ᄃᆡ한 독립이로다 (만세,만세여,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同胞만셰 만셰여 ᄃᆡ한 동포로다 (만세,만세여,대한 동포로다.) -안중근이 의거를 거행하기 전 동지 우덕순에게 지어준〈장부가〉- 안중근(安重根)의사는1879년9월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순흥이고,아명은 응칠(應七)이며,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반(鄕班)지주였다.즉,고려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대지주였다.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海西)일대에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안중근 의사는 바로 이 안태훈 진사와 그 부인 조(趙)마리아 사이에 태어난3남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며 사격·승마·궁술 등 문무(文武)를 고루 익혔다. 1894년 결혼, 2남1녀를 두고1895년 천주교에 입교한 후,아버지와 함께 빌렘(Wilhelm,洪錫九)신부를 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전교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뮈텔(Mutel,閔德孝)주교에게 민족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을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고1907년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운 뒤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에서 의군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이를 위해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였으며, 1908년3월에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인심통합과 단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인심결합론」이라는 글을 『해조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이를 통해 의군(義軍)을 모집하여,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과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재정적 지원으로1908년4월 연추(煙秋)얀치혜에서 동의회(同義會)라는 항일 의군을 조직하였다. 총장 최재형,부총장 이범윤,회장 이위종,평의원 안중근 등이었다.이 동의회는 실질적으로는 발기인이자 우영장(右營將)이었던 안중근 의사가 이끌었다.의군부대의 규모는3백 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연해주 연추를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1909년2월 연해주 연추 하리 마을에서 동지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조직하여 왼쪽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자르고“大韓獨立”이라는 혈서를 써서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09년9월 안중근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일본의 초대 총리와 한국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안중근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국권회복을 위해서도,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인물들은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최재형,유진률,이강,우덕순 등이 그들이다.그중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안중근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이들의 지원 아래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제거할 목적으로10월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도중에 안중근 의사 일행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포그라니치나야(수분하)에서 유동하를 가담시키고 하얼빈에 도착한 뒤,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의 소개로 조도선을 거사에 합류시켰다. 10월23일 김성백의 집에서 안중근 의사는 의거 결의를 담은“장부가”를 지었고,우덕순도“거의가”를 지어 화답하였다. 안중근 의사는10월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드디어 오전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약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30분 경 코코프체프의 인도로 플랫폼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라우닝 권총(FN M1900) 4발을 발사해 이토에게3발의 총탄을 명중시켜 이토를 쓰러뜨렸다.이어서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궁내대신 비서관 모리,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등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어로"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의거 성공 이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거쳐 뤼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그리고 여기에서1910년2월7일부터14일에 이르기까지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그러나 일제는 국제 재판을 표방하면서도 일본인 관선변호사만을 허용하는 등 불법 재판을 강행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검사 신문에 이어 재판정에서도 당당하게 의거의 이유와 정당성을 주장하며“이토 히로부미 죄악15개조”를 밝혔다.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의 통치 정책을 오해하여 저지른 개인적인 살인행위로 몰아가려 하였다.이에 맞서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위해 의거를 일으켰다는 대의를 밝히며 자신을 만국공법에 입각한 전쟁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이에 일본인 관선변호사조차 안중근에 대한 사형선고는 부당하다며 적극 변호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재판부는“안중근에게 극형을 내리라”는 일본 외무성의 사전 지령에 따라2월14일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하였다.당시 안중근 의사는“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재판 중 자신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다가 체포된 포로일 뿐이며 자신의 행위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대의를 위한 정당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 평화의 길은, "첫째 일본이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둘째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버리는 것이며,셋째 그런 다음 서로'독립한'청국,한국,일본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을 방어하며,서로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서로 화합하여 개화와 진보로 나가서 구주 및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한국의 독립과 일제의 침략 야욕 포기가 동양평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동양에 평화가 깃들며 서구와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1910년3월26일 순국 당일 뤼순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어머니가 보내준 흰색 명주 한복을 입은 안중근 의사는 남기고 싶은 유언이 있느냐는 형무소장의 물음에“아무 것도 남길 말은 없으나,다만 내가 한 이토 사살을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한일 양국이 협력하여 동양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당부를 하였다.이어‘동양평화 만세’삼창을 하려 하니 특별히 허락해달라는 요청이 거부되자 약2분간 기도를 올리고 의연하게 교수대로 올라갔다.이처럼 안중근 의사는 눈 앞에 죽음이 닥쳐와도 초연함을 잃지 않고 오직 한국의 독립과 동포의 안녕을 걱정했던 애국지사이자 동양평화를 염원했던 위대한 평화사상가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후 일제는 정근,공근 두 동생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유해를 인도하지 않았다.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비밀리에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혔고 아직까지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 고국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국내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효창공원에 마련되어 있으며 정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 그 자체는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교육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무장독립운동 등을 펼쳤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대한의 독립뿐만 아니라,온 인류가 평화 속에서 공존공영해 나갈 수 있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제시해 주었다.하얼빈 의거일인1909년10월26일은 공교롭게도70년뒤인1979년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총으로 쏜 사건인10.26사건과 날짜가 같다.둘다 총으로 벌인 암살이고 같은 탄약(32 ACP)이 쓰였으며,한국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하얼빈 의거는 동양평화론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나아가 일본을 위한 의거였다.오늘날 일본,중국에서도 안중근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외롭게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며 동양평화를 추구했던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진정한 평화주의자였으며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통해 독립운동가만으로서가 아닌 교육자 및계몽운동가로동양평화를 주장한 사상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by 김수한(서울취재본부장){김수한 : 역사컬럼니스트}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의 민족독립정신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아(我)’와‘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단재 신채호-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고령신씨(高靈申氏)로서,신숙주(申叔舟,1417-1475)의18세손이다. 1880년12월8일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에서 출생하여1936년2월21일,북풍이 몰아치는 여순 감옥에서 고난에 찬 독립투쟁가의 일생을 마쳤다. 당시 그의 나이 쉰일곱 살로 일제에 대한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10년의 실형을 선고받고8년째 복역하다 옥중에서 순국한 것이다.조국광복의 꿈을 안고 중국에 망명한 지26년,상하이와 베이징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 등지를 오가며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흔적을 더듬고 민족혼을 깨우치던 사학자요,언론인이며 혁명가인 신채호는 결국 해방 조국의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독립운동가로서 단재의 정신은 절대독립론,무장투쟁론,민족혁명론(민중직접혁명론)등 세가지 형태로 표현된다.단재의 절대독립론은3·1운동 후에 대두한 자치론·내정독립론·참정권론 등 일제와의 타협주의를 분쇄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에 있어1920년대 특징의 하나는 국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의 일부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체념하고 대일본제국 내의 조선자치구역을 추구하는 자치론자들이 대두한 것이었다.이들은 일제와의 타협론을 제창함으로써 완전독립론과 자치론 사이에 대립·투쟁을 야기시켰다.즉,이러한 자치론의 대두는 독립운동 노선에 혼선을 가져오고,일제에 대항하여 굳건히 서야 할 독립운동 노선을 비틀거리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단재의 절대독립론은 완전독립론과 자치론의 대립·투쟁에서 완전독립론·절대독립론이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비틀거리던 독립운동노선을 바로 잡아주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갈 길을 명료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을 통해서 극명하게 선언된 절대독립론은1927년에 자치론을 철저히 분쇄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노선을 정립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단재의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강도와 같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가르쳐주어 그 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의열단뿐만 아니라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까지도 단재가 합리화하고 정당화한 무장투쟁 수단을 채용하게 된 것은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에서 천명한 독립운동 방략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변절과 투항으로 얼룩진 일제하 이 땅의 지식인들의 행적을 뒤돌아볼 때 비타협적 투쟁으로 일관해온 신채호의 정신과 생애는 우리에게 민족과 독립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한다.
by 김수한(서울취재본부장)그동안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가야국에 대하여 사단법인 가야연구원(원장 김성문)에서 연구하여 9월 16일 오후 2시30분 대구교육대학교 인문사회관 107호실에서 사)가야연구원 주최, 가락대구광역시종친회 후원으로 김병욱 동국대학교 대학원 교수의 사회로 열린다. [허황옥 공주 가락국으로 올 때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 김해 허왕후릉 경내 파사각에 있음.] 제1부 식전행사로 박수미, 김종술 가요, 트럼펫 연주, 조명희외 3명 사물놀이, 개회선언 김일배 부원장, 자문위원 위촉장 수여, 김성문 원장 인사, 축사 김종국 초대 경산시립박물관 관장, 제2부 학술발표 김명옥 건국대 교수 사회로 "가야는 임나가 아니다" 김성문 가야연구원장, "가야사 왜 논란인가?" 이덕일 순천향대학교 교수, 질의 응답, "가야사의 진실" 이매림 사)대한 사랑 사무총장, 질의 응답 후 폐회선언으로 마친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