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경국립대학교, 평택시와 정원문화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 체결

  [평택정원협약] □ 한경국립대학교(총장 이원희)는 6월 11일 평택시(시장 정장선)와 경기정원문화박람회의 성공적인 개최 및 정원문화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였다. □ 이번 협약은 올해 10월 평택시에서 개최 예정인 경기정원문화박람회와 관련하여 대학의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정원디자인 참여기회 제공 등 정원분야에 대한 업무교류를 위한 것으로 평택시와 한경국립대학교, 중부대학교, 계원예술대학교가 참여하였다. □ 협약의 주요 내용은 △ 정원 분야의 발전을 위한 교육, 인재 양성, 연구개발, 조성 및 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지속적 협력 △ 교육적 가치 증진을 위한 학생 현장실습, 자원봉사, 작품설명 활동 장려 △ 대학참여정원 기획, 설계 및 시공 △ 정원 조성에 필요한 기본 기반시설 지원 등이다. □ 이원희 한경국립대학교 총장은 “이번 경기정원문화박람회의 대학참여정원 조성을 시작으로, 정원문화 발전을 위해 교육 및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선의 협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정장선 평택시장은 “평택시에서 개최되는 경기정원문화박람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참여대학의 적극적 협조를 구하며, 평택시도 대학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아가페의 변증법과 자기 표정】

  [자택에서 필자] 인간에겐 저마다의 표정이 있고 변증법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대화술, 문단법” 등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사유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인간은 삶의 모습을 나타내며 개성과 삶의 압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시 또한 그런 도정(道程)을 문자로 표현하는 자기화의 방법에서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는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인생을 압축하면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단면으로써 생의 전부를 보여주는 압축성- 단면으로 생의 전부를 보여주는 방법은 시의 재능을 요구하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풀이나 꽃에서 허무 또는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고, 길가의 돌멩이에서 굳은 신념과 의지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철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하는 특징 때문에 시적 장치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시의 위의(威儀)는 비유나 상징 또는 역설 등의 적절성에서 삶의 모습을 독자가 느낄 수 있을 때 감동의 허니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시적 감동은 목적이자 결과이기에  1. 생의 체험에서 독자에게 추체험의 길을 제시하고  2. 시적인 압축성에서 산문과는 다른 의미의 다양성-Ambigeyty에서 시의 특성이 나올 수 있다면, 시는 과학이 아니고 다만 시적인 여백을 가질 때 비로소 시만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 시는 시라야 한다. 그렇다면 시는 정작 무엇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 시일뿐- 시는 정답을 갖지 않은 표정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논리 이전의 논리가 정치(情致)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과학 이전의 과학- 현상이지만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을 아우르는 삼라만상의 우주의 모두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누리는 영예는 이러한 시를 쓸 때 비로소 지고(至高)한 자리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김수자의 시는 다양하고 감각적인 표현 에스프리를 접하는 일인 듯하다. 시는 사물을 바라보는 감수성을 어떻게 포장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서 시인의 개성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하늘 높이 매단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긴 줄도 없는데..... 훤하게 비춘다.      너무 높아 끌 수가 없어  밤낮 자유로이 놓아두니 새 떼들이 늘 놀다 간다.                              <연시 나무> 중        시는 응축(凝縮)에서 탄력이 생기고 그 탄력은 생동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상력의 지평은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시의 맛을 높은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지각의 자동화 현상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이기 때문에 시의 위의 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나무}에서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비유의 시어가 나오는 것은 사물을 변용하여 상상의 지평을 넓히는 시적 장치에 의해 감각적인 신선미를 자극한다면 김수자의 “연시 나무”는 매우 신선한 듯하다. 60자 조금 넘게 불과한 어의 구조에서 붉은 연시 감의 전기가 통해서 불이 켜지는 “훤하게 비춘다”의 생각과 훤한 불빛 아래 “새 떼들이 놀다 간다.”의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 구조를 파악할 수가 있다.         {2. 시 의식의 파노라마}         1) 비움과 채움의 허무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기다리고, 비움에서 미래는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알고 난 후에 허무라는 의복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는 예수의 허무나 공자의 천상(川上)의 탄식 등은 본질에 눈을 돌리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색증시공의 지혜- 바누아 –진리의 이름 앞에서는 비움과 채움이나 없음이나 있음 등 현대 물리학의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이다. 물론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감득하게 함으로써 감동과 순수 그 자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챙기지 마라 원래 내 것이었던 것 하나도 없다. 가져가게 두어라. 집어갈 것 있으면 잘 산 것이고  줄 수 있을 때가 행복한 법인 것을      버릴 것 있으면 버려라 덜 버린 것 찾아 새 떼들 날아들면 그것도 행복인 것을  버린 것 그리워하지 말고  빈 마음이라 채워라                               <빈 들녘> 중        비워 있음이나 채워있음은 다만 그대로의 현상일 뿐이다. 교실은 비워 있기 때문에 채움이 있고 수레는 비웠음의 바퀴 때문에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빈 들녘”이 허무라면 채움이 지난 뒤에 나오는 의미일 것이지만, 큰 개념에서는 결국 의미와 무의미가 교차하는 우주의 본질일 뿐이다.  이 교차의 왕래에서 인간은 다만 오고 가는 길을 바라보는 혹은 추체험으로 지나가는 존재- 이런 명상적인 현상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없음”에서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고 이기(利己)의 처연(凄然)함이라면 시인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은 행복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체득하고 있다. 이는 삶의 달관자의 의해 발성할 수 있는 음성이다. 결국 버린 것은 채우는 일이고 채우는 것을 줄 수 있을 때의 행복-   시혜(施惠)의 즐거움을 얻는 길을 주장-  비움의 가벼움이 아니라 오히려 채움이 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남은 볏짚으로 부끄러운 데 대충 가리고 그냥 아무 감정 없는 척  살 생각이다. -중략-                               <겨울 논> 중       발가벗음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가리고 위장함으로써 단순성이 복잡으로 변했고 과학이라는 이름에서 처절한 자기 위장에 슬픔을 쌓게 되었다면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의 가벼움은 자기와 만나는 진솔함이고 이런 진실에 다가가면 감동이 일렁이게 된다. 순수란 시의 본질이고 시가 순수의 이름일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른들이 색깔이 좋다. 혹은 무늬가 좋다느니의 찬탄으로 위장할 때 “임금님이 벌거벗었네”의 우화는 그대로 아이의 마음이 바로 어린애의 눈과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시인이 되는 것=       김수자의 마음에는 순수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에서 “아무 감정 없는 척”-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없는 척”이 다소 걸리는 표현이지만.        2) 사는 법 길 찾기         살아있는 자는 길을 가는 방법이 선택되기 때문에 어떻게 목적지에 이를 것인가의 대한 자기만의 방법이 적용되면서 삶의 도정을 이어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명료하게 혹은 애매하게 등등 선택의 여지는 개성과 환경이 복합되어 한 사람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시는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지만 그 방법은 시적 장치에 의해 위장하는 절차로 나타나기에 그 껍질을 벗기면 시인의 모습이 나타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파리는 가시를 만들고 가슴 적셔 줄 물이 없어 차라리 몸이 타들어 가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강한 척 내심 그리운 것 많아 아닌 척 자존감 그 힘으로 산다. 선인장처럼 산다.  바보처럼 말이야.                              <가시 선인장> 중        가시 선인장에 접근의 용이성이 아닌 이유는 “가시”를 내보이는 것과 “물”이 없지만 갈증의 내색을 보이지 않고 강한 척하는 몸짓의 슬픔과 그리운 갈망이 많지만 그런 모습이 혹여 “자존감”을 상실한 모습으로 투영될까 조바심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가시 선인장처럼 산다”는 평가를 “바보처럼 말이야.” 와 등가를 이루는 대입은 스스로 불러들인 광장의 고독 같은 인상이다. “강한 척”의 행위는 자기변호의 논리를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따라나서는 서글픔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이란 그 미지수}   사랑이라는 말에는 이성 간의 관계를 넘어 헌신의 아가페적인 넓이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종교는 사랑을 말하고 시는 순수의 진리를 말하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M.A moid는 말했다. 인간은 죽는다는 필연의 법칙을 지혜로 터득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 더 넓은 사랑의 이상을 설정하고 고지를 향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은 인간이 지고함에 이르고자 하는 사랑의 목표일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종교적인 사랑이나 사랑은 단순하다. 진리는 복잡을 단순으로 처리하는 데서 나오는 이름이라면 사랑도 그 자체의 단순함에 벗어나서는 안되기에-  꾸밈은 이미 순수를 일탈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돌이키기 어려울 때 사랑이 다시 든 후에 그 때서 알면 안 되리라 세상일 힘들어 깊은 통증을 느끼기 전에 사랑이 모자라 슬픈 운명되기 전에 힘껏 힘껏 사랑해야 하리라      가슴 밑바닥에 남모르게 숨긴 가는 인연의 끈 그마저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사랑해야 하리라 사랑 그 질긴 운명을 위하여                               <질긴 사랑> 중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비우면 비울수록 충만으로 가득해지는 이치에서 진실한 사랑은 문패를 달게 되는 것이다.  이기와 질투 혹은 자기 것을 고집하는 허위 앞에서 사랑은 이미 이름을 버리고 달아나기 때문에 인연의 소중함- 헌신의 의미를 내면으로 알게 된다. 더구나 인연이라는 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헌신이 주는 행복을 아는 일이 보다 고귀한 행위의 뜻일 것이다.             사랑은 이심전심-  동양에서는 원래 말이 아니고 마음의 전달이라면 서양은 사랑을 날마다 혹은 순간마다 확인하고 증명하는 점에서 신체 접촉이나 사랑한다는 말로 끓임 없이 증명하는 방법이고, 동양은 증명이 아니고 다만 눈으로 마음으로 – 이심전심이나 심상상인의 방법에 서 정적(靜的)이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알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가 되고 맘속의 말도 다 들을 수 있는 것      가진 것 다 주다 못해 마음속까지 주고도 아깝지 않고 받을 계산도 하지도 않고 줄 것이 더 없는 것만 아쉬운 것 그런 것이 사랑이지                           <사랑> 중        스탕달의 {연에론]에 생리적인 연애가 서구적인 방법이라면 동양은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거리에서 사랑이 잉태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서양은 접촉에서 시작하고 동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근미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의 차이요. 생활의 축척된 방법에서 오는 것이지 어느 것이 우선한다는 발상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랜 관습과 시간이 경과한 뒤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가페적인 헌신에서 참된 사랑이 탄생되는 것이다. “가진 것 다 주고 주다 못해” 더 줄 것이 없어 애타는 마음은 순수요. 깨끗함이고 질박함이다. 사랑은 지위나 명예 혹은 자랑이 아닌 다만 주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자발성의 이름이기에 참된 사랑은 마음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투명한 에너지의 이름이다. 김수자의 시는 사랑의 이름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을 투척하고 있음은 일상에서 그런 체험의 가치를 아는 데서 나온 모습으로 보인다.          [3. 에필로그 <나가면서>]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변용을 거칠 때, 화려한 변신을 맞게 된다. “나를 나은 여자”가 어머니라는 정의나,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인 결합물인 액체를 물이라고 설명하는 사전적 의미에는 삭막한 느낌이 오지만 그러나 시적인 어머니나 물에서는 기쁨과 자애를 느끼는 것이 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는 삶의 윤활유요 생의 의미를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이 시의 효능이다.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도래하기 때문에 감동이 물길을 내는 이치처럼 시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임무- 시인은 이런 임무에 헌신하는 사람인 것이다.  독자는 이 같은 감동의 물길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 더 큰 세계와 조우(遭遇)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인의 시에는 자기 표정과 허무의 의미가 자리하고 그 길을 따라가면서 순수와 투명한 손짓에 감동을 맡기면 예술혼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움에서 채움의 원리를 터득했고 이는 상징과 이미지의 손짓에 삽상하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해지는 느낌이다. 삶의 문제를 천착(穿鑿)하는 시인의 노력은 항상 긴장과 신념의 불을 켜고 내일로 다리를 놓으려는 발상으로 땀을 흘린다. 이 같은 순리에 우선하면서 기다림의 눈빛이 선명하다.           사랑를 숙고하는 김수자의 시는 헌신과 아가페적인 넓이에 자유정신이 숨 쉬고 있어 따스하다. 아울러 인연의 소중함을 신념으로 앞세우고 자연의 이치를 시에 수용하며 섭리를 따르는 시인의 모습에 찬사를 보낸다. 이 모두를 하나로 결합하면 시는 변증법의 기법으로 안내의 길을 내는 인도자의 모습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느끼면서 나가려 한다.            2025. 06.   금요저널 주필/칼럼니스트/이승섭   [필자의 시집]   [필자의 칼럼집]                                                     [필자의 시평집]    

한경국립대학교 학생·취업처(대학일자리플러스센터) 희망기업 취업로드맵 완성 캠프 개최

  [취업로드맵] □ 한경국립대학교(총장 이원희) 대학일자리플러스센터는 6월 5일(목) 3~4학년 재학생을 대상으로 ‘희망기업 로드맵 캠프’를 개최하였다. □ 총 2부로 나누어 진행된 이번 캠프는 학생들이 진로 방향성 및 희망 기업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 설정, 맞춤형 취업 전략 등을 수립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 지역 내 유망 산업과 주요 직무에 대한 특강으로 진행된 1부에서는 기업 규모별 채용 트렌드와 선호하는 인재상 등 실질적인 정보 중심의 강의를 제공하였고, 2부에서는 학생들이 팀을 이루어 희망 기업을 분석하고 퍼실리테이션 기법을 활용해 자신만의 취업 로드맵을 설계하는 시간을 가졌다. □ 특히, 팀별 공유 및 ‘칭찬샤워’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피드백과 동기부여가 이루어졌으며 취업 준비 계획을 시각화함으로써 목표의식을 강화하였다. □ 캠프에 참여한 학생들은“기업분석을 통해 취업을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어 도움이 되었고, 조별 멘토들의 자세한 설명으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 문상영 학생‧취업처(대학일자리플러스센터)장은 “한경국립대는 지속적인 취업역량 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하여 학생들의 진로선택 및 취업활동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사물과 변형(變形)의 상상(想像)】

  [필자의 망중한] 詩라는 존재(存在)는 화학적(化學的)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다르게 설명하면 1과 2를 더하면 3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번호가 바뀔 때 변하는 감동(感動)을 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는 방법 - 즉 상상과 창작(創作)이라는 작용(作用)이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 詩를 쓰는 일은 이런 이치(理致)이고 시의 상상력은 사물을 물활적으로 살아나게 하는 역할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意味)로 탄생(誕生)하는 일정한 절차(節次)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能力)은 시인 개인의 전적인 역할이면서 시인의 능력에 귀속(歸屬)되는 이유가 될 것 같다.   또한 시는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의 따라 개개인 눈이 작용하는 것이다. 보는 시인 마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얼마나 창조적(創造的)이고 상상적(想像的)인 물상(物像)을 보느냐에 따라 창조의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想像力)의 한계를 한층 높일 때, 詩는 나타내는 이름일 것이기에-   이연숙의 시는 다소 애매모호 하지만 일정한 詩的 구축(構築)의 탄력을 가지고 명료한 이미지 구축과 변형(變形)의 길을 점검(點檢)하기로 하자.      무엇이 무엇을 가져온다는 형태는 가장 기초적(基礎的)인 (意識)의 전달경로이다. 구름이 바람을 가져올 수도 있고 바람이 그리움을 실어 오는가 하면 바람, 구름, 물 등이 사랑을 실어 오는 형태로 詩心을 옮기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네가 내 곁에 없어도』나 『비로 오시나이까』 등이 시인의 정서를 승화(昇華)시키거나 혹은 이미지 공간(空間)으로 끌고 가는 일정한 메신저 역할이 있어 목적지(目的地)에 이르는 형태를 취하는 구성에서 그를 엿보게 된다.         너를 보내고 설레는 마음 눈 감아도  모습 그대로인데 세찬 바람이 불어도  나 마지막 잎새로 남고 싶다. 나 네가 없어도 그날을 기다리련다                            <네가 내 곁에 없어도> 중         역설적(逆說的)인 방법(方法)을 동원하여 “네가 내 곁에 없어도”라는 뜻은 너의 크기를 강조하려는 발상(發想)으로 출발하여 그리움의 간절함을 토하고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싶다. 詩는 역설(逆說)의 특성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가는 시인의 재능이며 시의 제작(製作)에 (透映)되는 의식의 집중화를 위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상징을 위한 문맥(文脈) 상호관계 속에서 모호함을 가지면서도 전달하는 의미의 기교가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너와 나의 결합(結合)은 허상(虛像)의 네가 없어도 “눈을 감아도” “혹은 없어도” 반복에 따라오는 그리움은 하나로 길을 만들고 詩의 구조에 응집(凝集)되는 것이다.        먼 시야에 스치는 소리가 반가운 마음으로 가슴 열었더니 보고 싶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뿌연 빗물이 되어 오시나이까      그저 가슴까지 차오르는 그리움 애타게 불렀는데 멀지 않은 길 이제야 찾으시나요. 질퍽 이는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어도 이 밤  기억에 고이 간직하겠나이다.                       〈비로 오시나이까〉중에서       이연숙의 詩는 물(水)과 그리움의 특성을 잘 이해하면서 시인의 정서를 잘 이끌고 가면서 어떤 미지(未知)의 공간을 방문하여 변화(變化)를 맞게 되는 상황 상황에 적응(適應)을 잘하는 것 같다. 그저 가슴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을 부르는 애절한 형상(形像)을 빗물로 인해 비로소 만남을 이루는 절차가 수행된다. 그리고는 “기억에 고이 간직하겠나이다” 의 절규가 승화되어 경이로움마저 든다. 또한 후회가 없는 만남 즉 간직이라는 단어가 주는 메시지에서 나와 함께 일치한다는 뜻이기에 선택 또한 “이 밤”이 막다른 골목이지만 “고이 간직한다.”는 마음의 정서가 시인의 아름다움만이 남는 것이 아닐까도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의 고운 마음이라 할 것이다.        웃음마저 잃어버리고 숨 쉴 수 없이 늑골 뼈속 아픔일 때    네가 그리우면  빗물로 찾아가  느릿한 거북이 되어 알몸으로 눕고 싶다.      비 내리는 바다의 바람으로 눈물 삼키듯 온몸 섞어 하얗게 부서지는 泡沫(포말)이 되고 싶다.                        〈바다 네가 그리우면〉중에서           이연숙은 바다나 혹은 파도와 상관관계가 있는 듯하다 아니면 그러한 곳에서 살고 있거나 - 왜냐하면 주로 등장하는 바다, 혹은 파도, 강, 등의 이미지가 많은 것은 환경적인 요건(要件)에 의해 詩의 이미지를 유추할 수 있다.  『보고 싶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고향 바다는』 등은 물의 이미지가 주는 이동성을 통해 그리움의 추구 등 상당한 詩語에 이러한 정서를 동원하는 것은 시인의 삶의 직접적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기가 하나도 없는 푸석한 마음에서 바다를 부르는 것은 파도에 의해 목마른 정서를 옮기고 싶은 감수성(感受性)의 절실성이 정신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인자(因子)라는 점이다.      이러한 열망(熱望)의 정서는 “알몸”이라는 상황까지 설정해 가면서까지 “섞어 섞어”가 반복적으로 나와, 바다가 한 몸이라는 것을 호소하는 듯하다 물론 하나의 결합하는 ‘한 몸’은 파도가 되어 “부서지는” 포말이 되고 싶다는 완벽한 통합체의 실현을 꿈꾸는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눈물로 하나가 되는” 것과 “바다” 혹은 파도가 하나이기를 지향하는 것은 결국은 물의 속성을 통일체를 이루려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詩語가 다를지언정 목적을 향하는 의도 <lrention>에서는 동일한 구조로 결합하는 은유의 원리가 아닐까 한다.       자아에서 흐르는  뜨거운 입김 품어내며  네 전신을 지날 때  구겨진 가슴 움츠린 것에 적당히 젖은 채 펼쳐진 날개 위로 눈물은 다시 하얀 입김 피워 올리고 감추어진 지난 이야기 다시 기쁨이 되고 사랑이 되어라.                             <자아>중에서        자아(自我) 즉 마음이라는 상징이 인간의 심장을 휘 돌아서 눈물로 변하고 다시 그 눈물은 수증기로 기화하여 하늘에 이르면 사랑의 기쁨을 가져오는 순환의 이어짐은 계속되는 것이기에 이런 현상은 사랑의 영원성을 뜻하는 원 <圓>으로서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보고 싶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고향 바다는』 등은 사랑의 순환은 언제나 노래로 다가오는 길을 만들고 있으면서 듣려 오는 소리의 감각(感覺)에서 다시 천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사랑의 고귀함은 시인의 정서를 따스하고 포근함으로 감싸는 온기의 삶의 길을 채색(彩色)하는 인상이 풍긴다. 이는 고귀함으로 세상을 포장하고 詩語로서 그리려는 자아(自我)가 형성되어 있기에 향기와 같은 사랑의 그런 아름다움이 아닐까 한다.         2. <에필로그>   詩는 마음의 그림을 그릴 때 아름다운 정서가 채색(彩色)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채색의 아름다움을 그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화려한 유채색(有彩色)의 공간을 그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인 개개인들만의 개성이고 창조의 기법(技法), 상상의 기법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이연숙의 詩는 화려하기보다는 검소하고 열정적(熱情的)이기보다는 따스한 것 같다.  이런 현상은 그만의 개성이며 삶의 모습을 詩로 투영하는 결과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詩는 마음이 그리는 자아가 창조하는 고백(告白)을 문자로 포착(捕捉) 하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詩는 물기가 젖어 있다. 다시 말하면 물에 의해서 정서를 이동하는 특성이 있으며 시적 대상에 물기가 젖으면 화학적(化學的) 반응(反應)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변화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물은 곧 아름다운 꽃으로도 변할 수 있고 무지개로 변화를 시키기 때문에 물로서 전달하는 기교야말로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는 과학적인 개념(槪念)이 우선하고 영원성을 믿는 의도를 느끼게 하기에 - 특히 바다, 강, 모두 물로서 이루어져야 하기에 아름다움을 그리려 하는 아니 전달하는 독특한 시인- 이연숙의 시는 아마도 그렇게 물처럼 맑고 영원하다. 그리고 신선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길이 보이는 것 같아 흐뭇한 기분으로 나가련다.        2025.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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