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소방서 예방안전과장 이성곤] 최근 화재 발생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겨울철에는 특히 전기화재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각 소방서에서 전기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예방 조치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2024년 소방청 화재 통계에 따르면, 총 37,614건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그 중 50%는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나타났다. 이 통계는 우리 사회에서 화재 예방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특히 부주의를 제외한 발화 요인 중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은 28%로 전기화재이며, 이는 과거에도 지속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해왔다. 이러한 전기화재는 주로 절연 열화, 트래킹, 입착 손상, 층간 단락, 미확인 단락 등으로 발생하며, 이들 원인은 대부분 아크(스파크)에 의해 촉발된다. 전기화재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이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 또한, 겨울철 난방기구 사용 증가와 함께 발생 위험이 높아지며, 전기 안전 점검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즉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전기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아크 차단기의 보급이 필수적이다. 2022년부터 아크 차단기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으며, 이는 전기화재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아크 차단기는 전기 회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아크를 감지하여 즉시 전원을 차단함으로써 화재를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전기화재 예방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각 개인이 전기 안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 화재를 줄이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작은 관심을 더하고 더 큰 안전을 바라볼 수 있듯, 전기화재 예방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경산소방서 예방안전과장 이성곤
[경산소방서장 한창완] 최근 경산지역에서 주택과 컨테이너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인명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주택화재는 일상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며, 최근 10년간 통계에 따르면 전체 화재건수의 약 18%를 차지하고 있고, 인명피해는 약 4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통계는 주택화재로 인한 인명피해의 위험성이 타 화재에 비해 월등히 높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택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시민들의 화재예방 안전수칙 준수 및 노력과 관심이 중요함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소방시설법 제10조 시행 이후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가 의무화되면서 주택화재 발생률이 1.5% 감소하고, 주택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10% 줄어든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시민들의 작은 관심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경산소방서는 새해를 맞아 주택화재 예방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소방서에서는 화재예방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화재예방 캠페인도 진행하고 있다. 이는 주택화재의 위험성을 알리고, 안전 수칙을 준수하도록 유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주택화재의 주요 원인인 부주의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시민들이 화재 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안전한 생활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주택화재 예방을 위한 우리 모두의 세심한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 소방시설을 제대로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등 시민들의 관심과 소방서의 노력이 결합된다면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관심이 큰 안전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산소방서장 한창완
[김관식(시인, 문학평론가)] 영산강은 우리나라 4대강으로 호남의 삶의 터전으로 우리 지역의 자랑스러운 자연유산이다. 백제시대 왕인박사가 영산강의 지류인 영암 구림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주었는가 하면,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전환기인 신라말 고려 초에 왕건이 영산강을 본거지로 고려를 세우는데 기초를 다졌고, 완사천에서 장화왕후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산강 강변에 선비들이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학문을 토론하고 시회를 열며 풍류를 즐겼다. 영산강변에만 정자가 923개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누정은 395개다. 그 중 나주지역은 영산강의 중류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165개가 남아있으며, 이런 명소의 정자마다 그 당시 시인들의 시가 목판에 새겨져 남아있다. 영산강변의 정자 문화는 신숙주, 기대승, 김인후, 임제,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 소쇄원의 양산보, 나위소 등 수많은 학자와 시인들을 배출해낸 산실이었다. 이런 전통 문화를 관계기관의 무지로 영산강 명소 보존 사업을 시행하면서 혹시나 단절시키고 왜곡시켜놓았는지 만약 그렇다면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영산강변에는 이제는 사라진 나루터와 수려한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명소로 8경이 있다. 제1경은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영산석조, 제2경은 몽탄노적(夢灘盧笛) 느러지와 한호 임연이 세운 식영정, 제3경은 1530년 함평이씨 석관(石串)이진충이건립했다는석관귀범(石串歸帆)의 나루터와 석관정과 건너편의 금강정, 제4경은 죽산보로 인근 강변에 사암나루가 있었고, 퇴계 선생과 ‘사단칠정론’을 논했던 조선시대 대학자 고봉 기대승을 비롯해서 면앙정 송순, 사암 박 순, 석천 임억령 등 인근 선비들의 출입이 잦았던 다시의 장춘정(藏春亭),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뜻을 같이한 나주 출신 선비들 11인이 고향으로 돌아와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지은 금사정(錦社亭), 제5경 금성상운으로 나주평야와 영산포 등대, 윤선도와 교분이 두터웠고,강호구가(江湖九歌)를 지은 나위소가 고향인 택촌에 세운 수운정(岫雲亭), 제6경으로 승촌보, 제7경 광주 풍영정, 제8경은 담양 대나무 숲이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이런 명소에 그에 걸 맞는 옛 선비들의 시비가 세워져 그분들의 숨결을 느끼게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영산강변의 명소 곳곳에 현존하는 향토시인들의 시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마 향토 시인들을 널리 알리기 위한 취지이었으리라 추측되지만 아직 생존한 시인의 시는 문학사적으로도 아직 검증이 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런데도 향토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졌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예부터 조상들은 살아있을 때 자신이나 남의 업적을 평가하거나 비석을 세우는 일을 꺼려했다. 그것은 살아있을 때 인물의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자칫 비난의 대상될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버젓이 영산강의 명소 곳곳에는 국민의 형세로 현존하거나 최근에 살았던 향토시인들의 시들을 시비에 새겨 놓은 것은 전통의 단절을 초래하지나 않았나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영산강 명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영산강의 명소에 걸 맞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보았다. 영산강변의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시회를 열며 풍류를 즐기던 누정문학을 산실되었던 명소에 그 옛날 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그분들의 시를 시비로 감상하도록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한 생각이다. 영산강 명소뿐만 아니라 호남은 물론 우리나라 곳곳에도 문학사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현재 생존하고 있는 문인의 시를 돌에 새겨놓은 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신의 시를 시비에 새겨 대대로 알리고 싶은 욕심 때문에 빚어진 일이거나 당시 시비를 세운 관계기관의 독단적인 문화행정으로 빚어진 일이건 우리고장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겠다는 목적은 같을 것이다. 영산강 명소는 영산강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의 시가 시비로 건립되어야 한다. 혹시라도 도민의 혈세로 이런 무모한 시비를 돌에 새겨진 명소가 있다면 우리 고장 영산강 명소를 찾은 이들이 석연치 않는 느낌을 갖거나, 기분을 언짢아져서는 안 될 것이다. 즐겁게 명소의 경치를 감상하고 우리 고장의 선비들의 얼을 본받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영산강변은 예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많이 배출한 곳이다. 명소를 찾는 분들이 옛 선비들의 풍류문화를 함께 공유하고 그분들의 숨길을 느껴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기 아니겠는가? 영산강 명소에 시비가 세워진 곳의 시비를 다음과 같이 고체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드린다. 제1경에 있는 시비는 무안 출생의 초의선사의 시나 식영정의 한호 임연의 시로, 제3경에 석관귀범(石串歸帆)의 뒷면에는 임제 선생의 시로, 죽산보에 있는 시비는 나위소의 강호구가, 장춘정을 세운 유춘정의 시나 금사정 11인의 선비의 시로, 승촌보에 있는 현존인물의 시는 신숙주 선생의 시비를 교체했으면 좋겠다. 강의 지류 도랑에 미꾸라지. 피라미. 빠가사리나 블루길, 베스 같은 외래어종이 현재 살고 있다고 해서 영산강의 생태계를 대표어중이라고 내세워서야 쓰겠는가? 영산강의 대표어종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영산강의 전설까지 낳은 잉어가 아니겠는가?, 하루 빨리 영산강 누정문화의 산실이 되어온 정자를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옛 선비들의 풍류문화를 시공을 초월하여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그분들의 시를 시비로 교체되길 바랄 뿐이다. ===김관식 프로필=== 전남 나주 공산 출생 광주교육대학, 조선대 대학원, 한국교원대 대학원, 한국방송대 대학원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수료 197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상, 『자유문학』신인상 시 당선(1998년) 낸 책으로 동시집 『토끼 발자국』(1983) 외18권. 시집 『가루의 힘』(2014) 외19권, 문학평론집 『한국현대시의 성찰과 전망』 외9권, 문학창작이론서 『현대시 창작방법과 실제』 . 『서정시 이렇게 쓰면 쉽게 쓸 수 있다』 외 다수. 백교문학상 대상, 김우종문학상 문학평론 부문 본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문예창작 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학협회 자문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서초문인협회 이사, 양천문인협회 자문위원, 한국산림문학회 회원, 한국좋은동시 재능기부사업회 책임자 나주문인협회 초대회장 역임, 계간 『한국시』, 『지필문학』 신인심사위원 역임, 계간 『시와 늪』 주필 및 신인심사위원장 역임 사단법인 『한국문학협회』 자문위원, 계간 『창작산맥』 운영이사. 계간 『서정문학』 운영위원, 계간 『한글문학』 자문위원, 계간 『문예창작』 편집위원, 계간 『백제문학』, 『남도문학』, 『가온문학』, 『나눔문학』, 『신문예』 신인심사위원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전쟁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의 요인은 영토 확장, 자원 획득, 이념 차이 등이 있을 수 있다. 어떠한 요인이 평화적으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때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정인 것 같다. 신라와 백제는 영토 확장 싸움이 계속되었다. 서기 648년 이후 김유신 장군의 리더십을 보자. 김유신 장군이 55세(649년)가 되었다. 음력 8월에 백제 은상(殷相) 장군이 신라의 석토성 등 7개 성을 공격했다. 김유신 장군은 죽지(竹旨), 진춘(陳春), 천존(天存) 장군 등과 함께 방어했지만 물리치지 못했다. 충청남도 천안 지역에 있는 도살성(道薩城) 아래 김유신 장군 군사들은 진을 쳤다. 김유신 장군은, “오늘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 와서 정탐할 것이니,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체하고 함부로 누구냐고 묻지 말라!” 하고는 사람을 시켜 진영 사이를 돌며 말하게 하기를 “견고히 지키면서 움직이지 마라! 내일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서 결전하리라!” 라고 했다. [김유신 장군의 환산벌 전투 모습] 백제 첩자는 이를 듣고 은상 장군에게 보고하니, 은상 장군은 원군이 있는 줄 알고 두려워했다. 이때 김유신 장군 등은 진격해 적들을 모두 무찔렀다. 김유신 장군이 서라벌로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과 병졸 1천 명이 항복해 오니 모두 풀어 주고 각자 마음대로 가도록 했다. 이후 5년 동안은 백제나 고구려와의 전쟁은 없었다. 김유신 장군이 60세(654년)이다. 신라 군대의 통수부라는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음력 3월 신라 진덕여왕이 붕어했다. 후사가 없으니, 김유신은 화백회의 의장인 알천(閼川)과 의논하여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유신 장군이 61세(655년)가 되었는데 음력 정월에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군사를 연합해 신라의 북쪽 33개 성을 빼앗았다. 태종무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니, 음력 3월에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 군사들을 물리쳤다. 음력 9월에 김유신 장군은 영동에 있는 백제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해 승리했다. 김유신 장군은 대각간(大角干)이 되었다. 신라의 16관등 중 각간은 최고 관등인데 김유신 장군에게 관등을 더 높여줄 단계가 없어서 각간 앞 글자에 ‘대’를 붙였다. 백제는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와 안일에 빠져 나라의 일을 보살피지 않았다. 백성들은 노하고 재앙과 괴변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이틈을 탄 김유신 장군은 백제 정벌 계획을 서두르게 되었다. 음력 10월에 김유신 장군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智炤)와 혼인했다. 또 5년이 흘렀다. 김유신 장군은 66세(660년) 음력 1월에 신라의 최고 벼슬인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된다. 음력 3월에 중국 당나라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당나라에서 숙위하고 있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을 부 대총관으로 삼아서 수군과 육군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다. 태종무열왕은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서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응원하게 했다. 신구도와 우이도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아 고증이 더 필요하다. 소정방 군사는 지금의 중국 산둥성 항구도시인 내주(萊州)에서 출발해 왔다. 소정방이 이끄는 병선의 길이가 천리라니 짐작이 잘 안 간다. 음력 5월 26일에 태종무열왕은 유신, 진주, 천존 장군 등을 거느리고 음력 6월 18일 경기도 광주인 남천정에 도착했다. 음력 6월 21일에 태자 김법민(후에 문무왕)을 덕물도에 보내 소정방을 맞이하게 했다. 소정방은 김법민에게 음력 7월 10일 백제 사비성 남쪽에 도착해 백제의 성을 무찌르자고 약속했다. 김법민은 태종무열왕에게 보고하니, 무열왕은 김유신을 대장군, 김품일, 김흠순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병력 5만으로 출발하게 했다. 무열왕은 경북 상주시 모동에 있는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렀다. 음력 7월 9일 김유신 장군 등이 현재 논산 지역에 있는 황산벌로 진군해 갔다. 백제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가 먼저 도착해 세 곳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 장군도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불리하고 군사들은 힘이 다했다. 김흠순 장군은 아들 반굴을 불러서, “신하 된 이에게는 충성보다 귀중한 것이 없고, 자식의 도리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이 위기를 당해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가 함께 온전히 갖추어지리라.” “삼가 분부 말씀 받들겠습니다.” 하고는 곧장 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장렬하게 사망했다. 김품일 장군도 16세인 아들 관창을 불러 놓고 여러 장수에게 “뜻과 기백이 제법 용맹하니 오늘 싸움에서 3군의 모범이 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관창도 즉시 적진으로 들어가 싸웠으나 사로잡혀 계백 장군에게 끌려갔다. 계백 장군은 어려서 살려 보냈다. 관창은 다시 적진을 행해 돌진해 갔으나 계백이 관창을 붙잡아 참하여 말 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3군에서는 이 모습을 보고 격정이 솟구쳐 죽음을 각오하고 진격했다. 계백은 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백제 군사가 패했다. 김유신 장군 군사는 황산벌 전투가 너무나 치열한 나머지 음력 7월 10일 소정방 군사와 만나기로 한 백제 사비성 남쪽에 늦게 도착했다. 소정방은 김유신 장군이 늦게 왔다 하여 신라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 하자, 김유신 장군은 소정방 장군이 황산벌의 전투를 보지 않은 터에 무고하게 치욕을 당할 수 없다 하고,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벌인 뒤에 백제를 쳐부수리라 했다. 도끼를 들고 군문 앞에 서니, 소정방이 김문영의 죄를 풀어 주었다. 신라와 당나라 군사는 사비성을 함락시켰고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갔다. 리더는 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진 사람이다. 지도자는 리더십(leadership)이 있어야 한다. 리더십은 능력이나 통솔력으로 본다.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목표 달성을 위해 개인이나 집단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김유신 장군의 리더십을 본받고 싶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우리는 일출과 일몰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동양인들은 일출을 좋아하고, 서양인들은 일몰을 좋아한다고 한다. 음양(陰陽) 이론에서도 일출은 양이고, 일몰은 음으로 해석한다. 동양은 양이고 서양은 음인가. 젊은 시절에는 동료들과 함께 새해 일출 보러 가기를 즐겼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구룡포 호미곶이었다. 전날 도착한 호미곶 주변 식당에는 일출 구경 온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그곳의 대게와 물회 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이튿날 새해 첫날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 함성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만히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이는 양팔을 벌려 높이 들어, “와! 대단하다.” “와! 희망이 보인다.” [달성군 사문진 일몰] 나 역시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얼굴을 들어 태양을 보니, 눈앞에 신비로운 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새해 일출에서 태양의 큰 기운을 받았는지 그즈음의 나는 가정생활도, 직장 생활도 순조로웠다. 새해 아침에 희망차게 솟구쳐 떠 오른 태양의 정기가 나의 생을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새해가 되면 나는 습관처럼 일출을 찾았다. 나이가 드니 젊은 시절에 무심히 지나쳤던 일몰을 주목하게 되었다. 일몰을 본 경험 중에는 하와이 오아후섬 서쪽 야자수 가득한 와이키키 해변이 제일 기억에 남아 있다. 하와이대학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였다. 하루 연수가 끝나면 주로 와이키키 해변이나 쇼핑몰로 달려갔다.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와이키키 해변으로 갔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와이키키 해변은 반짝이는 모래사장에다 바닷물은 에메랄드 빛깔이었다. 해안에는 온통 화려한 고층 호텔이 서로가 자태를 뽐내고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일몰 시간이 되니, 해변 모래사장에는 연인끼리 또는 부부인 듯 보이는 남녀 쌍쌍이 어깨동무하여 앉아 있거나 서서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바닷가 바위 위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펭귄처럼 보였다. ‘서양 사람들은 참으로 일몰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니 하늘은 황금빛에서 회색으로 변했다. 바닷물도 에메랄드색에서 검푸른색이 되다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이 어둠은 다시 일출로 이어질까. 우리네 인생도 화려한 일출에서 서서히 어두워지는 일몰이 되었다가 다시 일출로 변하여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아 볼 수 있을 텐데……. 귀국하여 아내와 함께 달성군 사문진을 찾았을 때도 내 마음속에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본 일몰의 감동이 남아 있었다. 사문진은 낙동강변에서 떨어지는 해를 통째로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일몰의 시간이 되자 강물에 비친 노을은 용광로와 같이 불타는 느낌이고, 하늘의 노을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자연이 주는 선물 가운데 이런 아름다움도 있단 말인가. 일몰을 보면서 아내는 엉뚱하게도, “여보! 40세 때 찍은 가족사진에는 당신이 뽀송뽀송한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네.” 자기는 어떤가. 나를 애태우게 하던 고운 얼굴은 오간 데 없고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지 않는가. 나는 지난날 동료들과 술 마시고 늦게 귀가하고, 내 생활에 빠져서 아내에게 무심했던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마음도 모르는 아내는, “노을 좀 봐. 진짜 멋지다!” 강변에서 바라본 일몰의 광경은 장관이었다. 서쪽 하늘과 강이 서서히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내 마음도 오렌지의 향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설레다가 서서히 붉은 노을의 여운만이 남아 안타까웠다. 자연의 섭리인 일출과 일몰은 개인의 성향과 시기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어차피 자연의 순리(順理)에 따라야 하고, 신이 계획한 섭리(攝理)를 지킬 수밖에 없다. 일출과 일몰의 조화도 자연이 빚어낸 산물이 아닌가. 나는 슬그머니 아내의 손을 잡았다. 뿌리치지는 않으나 얼굴을 보니 불그레 물들어 있다. 석양 때문이겠지만 괜스레 울컥하여 야윈 어깨를 가만히 안아본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신라는 외세에 의해 서기 642년까지 많은 성을 빼앗겼다. 서기 643년 가을 9월에 외세를 막기 위해 사신을 중국 당나라에 보내 군사 파견을 요청했으나 도움이 없었다. 김유신 장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길렀다. 오늘은 8월 초순이다. 기온도 높지 않고 답사하기에 알맞은 날씨이다. 현재 경산시 압량읍과 진량읍에 있는 그 당시 연병장에 가 보았다. 현재 경산시에는 서기 102년(신라 파사 이사금 23년), 신라에 멸망한 압독(押督) 또는 압량(押梁) 소국이 있었다. 신라에 소속된 압량에는 김유신 장군이 48세(서기 642년) 때, 겨울에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왔다. 압량에는 그 당시 외세를 막아내고 나아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전초 기지이자 군사를 모아 심신을 연마하고 무술을 훈련하던 군사 훈련장이 보존되어 있다.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모아 훈련한 연병장은 3개소가 있다. 2개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압량리와 내리에 있고, 1개소는 경산시 진량읍 선화리에 있다. 각기 비슷한 형태를 이룬 소규모의 연병장들로 남아 있다. 이들을 경산병영유적(慶山兵營遺蹟)이라 한다. 이 유적은 서기 1971년 국가 사적 218호인 압량유적으로 지정되었다가 서기 2011년 경산병영유적으로 변경되었다. 제1 연병장은 압량읍 압량리 179번지에 있다. 압량읍 시가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고 자동차로 10분이면 닿는다. 연병장을 멀리서 보니 야트막한 야산처럼 보인다. 가까이 들어서니 높은 언덕 위에 잔디로 조성한 연병장이 커다란 운동장처럼 보인다. [제1 연병장 군사 훈련 모형도, 출처: 경산시립박물관 제2전시실 촬영: 서기 2019.8.2.(금)1] 이 연병장은 넓이가 13,924㎡(약 4,200평)이고, 높이가 7m이며, 지름이 90m이고 둘레가 약 300m이다. 동남쪽에는 높이가 약 10m 되는 토루(土壘)가 있는데 지름은 약 11m이다. 이 토루에서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직접 지휘했다는 생각에 직접 토루에 올라가 보았다. 아래로 보이는 느낌은 내가 장군이 된 것처럼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 보았다. 듣고 있는 군사들이 한 동작 같이 움직여 준다. 제2 연병장은 압량리에 있는 제1 연병장으로부터 약 1.5km 떨어진 압량읍 내리 389번지에 있다. 거의 바로 옆에 있는 느낌이 든다. 가는 길도 자동찻길이라서 쉽게 도착된다. 연병장 입구에는 안내판이 있어서 감사하다. 제1 연병장과 비슷하다. 역시 잔디로 조성했다. 관리가 잘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 연병장의 면적은 15,987㎡(약 4,840평)로 제1 연병장 보다는 약간 더 넓다. 연병장의 정상 부분은 자연적인 형태이며 토축으로 지름 80m, 둘레 270m의 광장을 마련했다. 광장의 동남쪽에 높이가 약 9m이고 지름이 13m가량의 토루를 쌓았으나 동남 부분이 크게 파괴되어 토루의 모습을 잃고 있다. 이 연병장은 둘레가 제1 연병장과 비슷하다. 토루의 파손으로 토루에 올라갈 수가 없어서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았다. 땀이 흐른다. 땀을 식히기 위해 연병장 가장자리에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서 그 당시 군사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똘똘 뭉친 모습이 떠오른다. 제3 연병장은 내리 제2 연병장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진량읍 선화리 948번지에 있다. 자동차로 약 10분 정도 달렸다. 연병장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하다. 연병장에는 온통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면적은 11,263㎡(약 3,410평)로 세 군데 중 제일 작다. 연병장 말단부에서 높이 10m 정도의 토축으로 지름 80m가량 원형 광장을 구축했다. 토루는 연병장 중앙 북쪽에 치우쳐 있고 높이 2m, 윗면 지름 13m 정도이다. 연병장에 소나무가 많이 있으나 후에 심은 것이다. 제3 연병장을 한 바퀴 돌면서 보병과 기마병은 주로 어느 연병장에서 각각 훈련했는지 궁금했다. 경산병영유적이 있는 곳을 다른 표현으로 두룩산이라 부른다. 두룩산이라는 말은 두리산으로 두리두리한 산, 즉 둥근 산의 지형에서 온 말로 고어(古語)로 두리산(豆里山=圓山)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세 군데 연병장은 서로 1.2km~3.2km 떨어져 삼각형의 배치 모양을 하고 있다. 모두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자연 구릉 위에 흙을 쌓아 올려서 마치 성(城)처럼 보이지만 성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으며, 윗면이 평탄한 광장으로 되어있다. 광장은 군사들이 무술을 익히고 심신을 연마하던 장소였다. 경산시 압량면 부적리에는 마위지라는 연못이 있다. 마위지는 신라 김유신 장군이 압량주 군주로 있을 때 훈련한 기마들에 물을 먹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축조한 저수지이다. 이곳 일대의 아낙들은 저녁때가 되면 온종일 훈련에 지친 말을 이 못으로 몰고 나와 귀를 씻는다. 아낙들은 말에게, “전쟁터에 들어서면 적군의 화살과 창칼을 민첩하게 피해 달라.” 는 주문과 함께 남편과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이후 이곳을 마이지(馬耳池)라 칭하기도 했고, 마을 지명 또한, ‘지아비가 적진으로 출정한다.’ 라는 뜻을 담은 지아비 부(夫)에 나아갈 적(適)을 써서 부적리라 전한다. 경산시는 서기 2014년 신화랑 풍류 체험 벨트 조성사업으로 마위지를 경산 마위지 근린공원으로 조성했다. [마이지 동쪽에 세운 무명 용사상 촬영: 서기 2020.10.1.(목)2] 유비무환이다. 모든 일에는 준비를 잘하면 성과를 낼 수 있다. 세 군데 연병장의 군사들 훈련 소리가 귀를 때린다. 그 소리가 나라를 지켰다. 내가 태어난 진량읍에 김유신 장군의 연병장이 있었다니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중학교 시절 여자 음악 선생님을 사모한 적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은 15세 때 천관녀(天官女)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진평왕 31년, 609년 봄이었다. 서라벌 북천(北川) 변의 버들가지에도 물이 올라 푸르르기 시작했다. 서라벌 근처의 복숭아밭에는 도화(桃花)가 만발하고, 노란색이 선명한 깃털을 가진 꾀꼬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계절이었다. 이 화창한 계절에 도화 사잇길로 말을 타고 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품 있어 보이고 귀공자 타입이었다. 매일 화랑들을 만나 무예를 닦으러 가는 중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 한 여인은 이인로(서기 1152년~1220년)의 『파한집破閑集』에 천한 집인 예가(隷家)의 여자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은 아닌 것 같다. 그 후의 기록으로 기생이라는 표현도 있으나, 기생은 더군다나 아니고 신라의 여사제(女司祭)로서 처녀였다. 여사제는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주관하는 사람이다. 유럽에서도 제사를 주관하는 여자는 처녀로서 제사 후에는 왕과 하룻밤을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여사제는 자기 집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는 김유신 화랑을 사모하게 됐다. 하루는 무술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여사제가 김유신 화랑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고는 집 안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집 밖에 말을 세우고, 누구인지 궁금하여 담 너머로 바라보았다. 여사제는 김유신 화랑을 보면서 미소를 띠며 상냥스럽게, “누구십니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김유신 화랑은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 여사제가 계속해서 들어오라는 말에 안으로 들어가니, “서라벌 장안에 김 왕손(王孫) 유신공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사제의 머리와 몸에서는 향기가 나고, 앉으라고 권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여사제 앞의 탁자 위에는 불교 경전과 당나라 시인의 시집이 놓여 있고, 벽에는 가야금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유신 화랑의 눈에는 여사제가 고상한 취미를 가졌고, 모든 번뇌를 해탈한 처녀로 맑게 보였다. 그제야, 김유신 화랑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여사제의 몸종이 술상을 가지고 오는데, 몸종도 여사제와 다름없이 깨끗한 차림이었다. 몸종은 김유신 화랑 앞에 술상을 놓고는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나갔다. 여사제는 정중히 절을 하고서 술을 권하면서, “세상에 영웅호걸도 많다지만 김 왕손 같으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천관(天官)이라고도 하고, 선랑(仙娘)이라고도 합니다.” 김유신 화랑은 아직도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천관녀는 술을 계속 권하면서, “화랑 오계에 술을 먹지 말라는 계율은 없으니 한잔하십시오.” 이윽고 김유신 화랑은 한잔 마시면서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고는 천관녀에게도 술을 한잔 권했다. 몇 잔의 술이 오갔고,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에게 가야금 타기를 권했다. 가야금 소리에 마음을 풀고 다시 술을 마셨다. 많은 시간이 흘러 황혼이 되었다. 김유신 화랑이 집으로 가려고 하자, 천관녀는 다시 술을 권하면서 춤이 나오고 노래도 나왔다. 김유신 화랑도 흥겨워서 같이 춤과 노래가 나왔다. 그 당시 화랑들이 부르던 노래는 도령가(徒領歌)나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사가 전해지지 않아 무척 아쉽다. 이제 김유신 화랑이 일어나려 하자, 천관녀는 취한 눈에 김유신 화랑의 소매를 잡았다. 천관녀는 선랑이라 했다. 선랑은 서낭당에서 제사를 주재하는 여사제로서 세속의 인연이 허락되지 않은 위치인데 김유신 화랑을 엄청나게 사모한 것 같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 화랑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꾸짖었다. “나는 네가 장차 큰인물이 되기를 갈망했는데 천관녀의 집에 출입이나 하니 어찌 장래를 바랄 수 있겠는가?” 김유신 화랑은 뜰 아래에서 머리를 숙이고, “다시는 출입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후로는 천관녀의 집 근방에도 가지 않았고, 집에서 병서(兵書)를 읽고 낭도들과 화랑정신을 길렀다. 부모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천륜(天倫)을 따랐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서라벌에 화랑들이 모였다. 이들은 말달리기, 활쏘기, 검술, 가무 등을 했다. 모두가 몸이 건강하고 미남자로서 무예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한 화랑들이었다. 머지않아 백제, 고구려를 통일할 기세들이었다. 김유신 화랑은 행사를 마치고 다른 화랑들과 음주한 것이 몹시 취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말 등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말이 가는 대로 있었다. 말이 갑자기 멈추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천관녀의 집 앞이었다. 천관녀는 김유신 화랑을 보자 기쁘기도 했지만, 발길을 끊은 데 대하여 원망스러워 눈물 흘리며 나아가 맞이했다. 그 순간 어머니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유신 화랑은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두 입술을 깨물고 애마(愛馬)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가 평생 자기를 사모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천관녀가 살던 곳에 절을 지어 천관사(天官寺)라 불렀다. 천관사는 김유신 화랑이 살던 재매정에서 남천(南川) 건너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리에 있다. 김유신 장군은 애마를 죽인 자리를 ‘참마항(斬馬巷)'이라 했다. 이후 사람들은, “김유신의 삼국 통일 위업은 참마항에서 시작됐다.” 라고 이야기했다. 천관사는 서기 2000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서기 2021년 10월 천관사 복원 공사장에 갔더니 경주시청에서 팔각석탑 복원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천관사가 복원되고 있는 안내판의 중앙에는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의 그림에 말은 목이 베어 넘어져 있고 천관녀는 놀라고 있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는데 김유신 장군의 마음에도 첫사랑을 간직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의 각오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 같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중학교 시절 여자 음악 선생님을 사모한 적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은 15세 때 천관녀(天官女)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진평왕 31년, 609년 봄이었다. 서라벌 북천(北川) 변의 버들가지에도 물이 올라 푸르르기 시작했다. 서라벌 근처의 복숭아밭에는 도화(桃花)가 만발하고, 노란색이 선명한 깃털을 가진 꾀꼬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계절이었다.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 촬영: 2021.10.22.(금) 경주 통일전에서,작품: 서기 1977년 오승우 작가] 이 화창한 계절에 도화 사잇길로 말을 타고 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품 있어 보이고 귀공자 타입이었다. 매일 화랑들을 만나 무예를 닦으러 가는 중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있었다. 한 여인은 이인로(서기 1152년~1220년)의 『파한집破閑集』에 천한 집인 예가(隷家)의 여자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은 아닌 것 같다. 그 후의 기록으로 기생이라는 표현도 있으나, 기생은 더군다나 아니고 신라의 여사제(女司祭)로서 처녀였다. 여사제는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주관하는 사람이다. 유럽에서도 제사를 주관하는 여자는 처녀로서 제사 후에는 왕과 하룻밤을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여사제는 자기 집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는 김유신 화랑을 사모하게 됐다. 하루는 무술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여사제가 김유신 화랑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고는 집 안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집 밖에 말을 세우고, 누구인지 궁금하여 담 너머로 바라보았다. 여사제는 김유신 화랑을 보면서 미소를 띠며 상냥스럽게, “누구십니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김유신 화랑은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 여사제가 계속해서 들어오라는 말에 안으로 들어가니, “서라벌 장안에 김 왕손(王孫) 유신공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사제의 머리와 몸에서는 향기가 나고, 앉으라고 권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여사제 앞의 탁자 위에는 불교 경전과 당나라 시인의 시집이 놓여 있고, 벽에는 가야금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유신 화랑의 눈에는 여사제가 고상한 취미를 가졌고, 모든 번뇌를 해탈한 처녀로 맑게 보였다. 그제야, 김유신 화랑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여사제의 몸종이 술상을 가지고 오는데, 몸종도 여사제와 다름없이 깨끗한 차림이었다. 몸종은 김유신 화랑 앞에 술상을 놓고는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나갔다. 여사제는 정중히 절을 하고서 술을 권하면서, “세상에 영웅호걸도 많다지만 김 왕손 같으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천관(天官)이라고도 하고, 선랑(仙娘)이라고도 합니다.” 김유신 화랑은 아직도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천관녀는 술을 계속 권하면서, “화랑 오계에 술을 먹지 말라는 계율은 없으니 한잔하십시오.” 이윽고 김유신 화랑은 한잔 마시면서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고는 천관녀에게도 술을 한잔 권했다. 몇 잔의 술이 오갔고,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에게 가야금 타기를 권했다. 가야금 소리에 마음을 풀고 다시 술을 마셨다. 많은 시간이 흘러 황혼이 되었다. 김유신 화랑이 집으로 가려고 하자, 천관녀는 다시 술을 권하면서 춤이 나오고 노래도 나왔다. 김유신 화랑도 흥겨워서 같이 춤과 노래가 나왔다. 그 당시 화랑들이 부르던 노래는 도령가(徒領歌)나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사가 전해지지 않아 무척 아쉽다. 이제 김유신 화랑이 일어나려 하자, 천관녀는 취한 눈에 김유신 화랑의 소매를 잡았다. 천관녀는 선랑이라 했다. 선랑은 서낭당에서 제사를 주재하는 여사제로서 세속의 인연이 허락되지 않은 위치인데 김유신 화랑을 엄청나게 사모한 것 같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 화랑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꾸짖었다. “나는 네가 장차 큰인물이 되기를 갈망했는데 천관녀의 집에 출입이나 하니 어찌 장래를 바랄 수 있겠는가?” 김유신 화랑은 뜰 아래에서 머리를 숙이고, “다시는 출입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후로는 천관녀의 집 근방에도 가지 않았고, 집에서 병서(兵書)를 읽고 낭도들과 화랑정신을 길렀다. 부모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천륜(天倫)을 따랐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서라벌에 화랑들이 모였다. 이들은 말달리기, 활쏘기, 검술, 가무 등을 했다. 모두가 몸이 건강하고 미남자로서 무예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한 화랑들이었다. 머지않아 백제, 고구려를 통일할 기세들이었다. 김유신 화랑은 행사를 마치고 다른 화랑들과 음주한 것이 몹시 취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말 등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말이 가는 대로 있었다. 말이 갑자기 멈추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천관녀의 집 앞이었다. 천관녀는 김유신 화랑을 보자 기쁘기도 했지만, 발길을 끊은 데 대하여 원망스러워 눈물 흘리며 나아가 맞이했다. 그 순간 어머니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유신 화랑은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두 입술을 깨물고 애마(愛馬)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가 평생 자기를 사모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천관녀가 살던 곳에 절을 지어 천관사(天官寺)라 불렀다. 천관사는 김유신 화랑이 살던 재매정에서 남천(南川) 건너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리에 있다. 김유신 장군은 애마를 죽인 자리를 ‘참마항(斬馬巷)'이라 했다. 이후 사람들은, “김유신의 삼국 통일 위업은 참마항에서 시작됐다.” 라고 이야기했다. 천관사는 서기 2000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서기 2021년 10월 천관사 복원 공사장에 갔더니 경주시청에서 팔각석탑 복원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천관사가 복원되고 있는 안내판의 중앙에는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의 그림에 말은 목이 베어 넘어져 있고 천관녀는 놀라고 있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는데 김유신 장군의 마음에도 첫사랑을 간직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의 각오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 같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안도걸(전 기획재정부 차관) 프로필 사진] 안도걸경제연구소(전.기획재정부 차관)는 한라백두평화통일연대 남유정 대표와 만나 ‘광주 탈북 새터민들의 자립 지원과 경제적 시너지 효과’에 대한 정책 간담회를 가졌다. 안 이사장은 광주에 정착한 4~500명의 탈북 새터민들의 생활상을 경청하고 새터민들의 온전한 정착과 경제적 시너지 창출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도걸 경제연구소] 또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일관적인 통일 정책을 위해서는 지역 사회에서부터 작은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광주 탈북 새터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고민하는 것은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통일 정책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탈북 새터민의 성공신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남북의 시너지가 발생하는 지점을 포착할 수 있으며, 이 작업을 통해 남북 경제 시너지 창출의 로드맵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한편, 안 이사장은 광주 내 탈북 새터민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뿐만 아니라 광주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수자를 포용할 수 있는 정책 구상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임나일본부설의 망령이 살아났다. 현재 일본 역사 교과서 한반도 지도에는 가야와 임나를 동격으로 표기한 것과 아예 가야를 빼 버리고 신라, 고구려, 백제, 임나로 표기하여 가르치고 있다. 일본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하지 않았다. 임나일본부설은 야마토 왜(大和倭)가 서기 249년에 신라를 깨뜨리고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만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서기 249년에 7국을 평정한 것으로 나오나, 일부 사학자들은 연도 계산의 잘못이라 하면서 120년을 더하여 서기 369년이라 한다. [가야 지역을 임나로 표기한 일본 중학사회 새로운 역사 교과서] 일부 사학자들은 평정한 7국을 가야의 여러 나라로 추정하고, 야마토 왜가 서기 562년까지 가야를 지배했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 또 그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10국인 가라, 안라, 사이기, 다라, 졸마, 고차, 자타, 산반하, 걸손, 임례와 임나 4현인 사타, 모루, 상다리, 하다리가 모두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가야가 아니라 대마도와 규슈 등 야마토 왜에 있었던 임나국들이다. 임나일본부설은 가야를 임나로 만들기 위해 메이지(明治, 1867~1912) 시대 때 일본군 참모부가 먼저 발상했다. 서기 1882년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임나고고(任那稿考)』와 『임나명고(任那名稿)』라는 책을 발행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서기 1883년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사코 가케노부’중위는 광개토태왕릉비 탁본을 가지고 왔다. 비의 하단과 3면 상단에 있는‘왜’에 관한 내용은 훼손하고‘임나가라’만 뚜렷이 보이도록 조작해서 왔다. 가야를 임나가라로 읽도록 했다. 서기 2023.5.9. 모 교수는 한 언론을 통하여 광개토태왕 비문에 석회를 바르고 글을 새로 새겼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서기 1893년‘칸 마사토모’는『임나고』를 집필하여 가야 지역을 임나로 주장하게 된다. 서기 1896년, 일본 도쿄제국대 출신들이 주축이 된 『사학잡지』에‘나카 미치요’는‘가라고(加羅考)’를 실어 임나가 가라라고 본격적으로 주장한다. 그는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는 것이 침략이 아니라 과거사의 복원이라는 엉뚱한 논리를 폈다. 일제강점기 때는 노골적으로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가르쳤다. 서기 1920년부터 일본은‘조선교육연구회’에서 편찬한 『심상소학 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에 가야를 임나가라로 지도하게 했다. 우리의 역사 찬탈이다. 광복 후에도‘스에마쓰 야스카즈’는 서기 1949년『임나흥망사』를 집필하면서 가야를 임나라고 뼈대를 세운다. 일본은 가야 지배를 전제하고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지명을 경상도와 전라도에 비정하고 고증 작업을 한다. 즉, 우리나라 가야 지역 지명인 아라를 안라로, 고령을 가라로, 합천을 다라로, 거창군을 자타로, 창원을 고차국으로, 남원을 기문으로, 김해를 남가라로, 장수를 반파로, 강진을 침미다례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야국과 임나국은 동일시될 수 없고 별개의 국가이다. 가야국은 서기 42년부터 서기 562년까지 존속했고, 임나국은 『일본서기』에 기록되기를 기원전 33년부터 서기 646년까지 존속했다. 건국과 멸망 연도가 다르다. 일본이 서기 369년부터 200년 동안 가야를 지배했다면 『삼국사기』의 ‘신라 본기’나 ‘백제 본기’에 그 기록이 한 건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가야 지역을 임나로 표기한일본 중학사회 새로운 역사 교과서 발행: 2022.1.30. 주식회사 자유사 가야를 임나라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의 정한론(征韓論)이다. 일본은 언젠가는 조선을 정복하여 일본 땅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야욕을 품었다. 그 명분으로 가야를 임나라고 우긴다.『환단고기』에서 임나는 대마도와 일본 규슈 지역 등에 있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 지명은 일본에 있었던 지명이므로 우리나라 가야사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을 남원으로, ‘침미다례’를 강진 및 해남으로 『전라도 천년사』에 그대로 집필되었다. 가야나 전라도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부 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가 바로 잡힐 수 있도록 각성해 주기 바란다. 우리는 우리의 바른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무가 있다. 먼 훗날 가야와 전라도의 역사가 걱정된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이용중 식민사관청산가야사전국연대 상임대표.] 전라도민은 ‘전라도가 왜놈의 땅이냐고 분노를 쏟아내고 있고’, 편찬위는 ‘일본서기를 인용하면 식민사관’이냐고 강변하고 있다. 이 상반된 논리가 왜 나타났는지 추적해보자.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세종대왕이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장하였다고 알고, 아이들은 배우고 있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 대표적인 사안 중 하나이다. 첫째, 세종실록에는 1426년 4월 과거시험에 「공험진 이남은 나라의 강역이니 마땅히 군민을 두어 강역을 지켜야 한다. 이에 관해 논술하라.」라는 출제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광주.전남.북 시민사회단체로 짜여진 '전라도오천년사바로잡기 500만전라도민연대(공동집행위원장 박형준 양경님 김영광)'가 지난5월 2일 전북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제 식민사관에 더해 중국 동북공정까지 추정한"'전라도천년사' 34권 전권 폐기와 사업비 24억원 투명공개, 전액환수"를 주장하고 있다. 1][ ⓒ전라도 오천년사연대 제공] 이 문제를 출제한 이유는 조선 개국부터 요동 땅을 놓고 치열한 외교전을 30여 년 벌였는데, 명나라 성조가 조선에 주장이 옳다며 요동 땅을 조선 영토로 확정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이순신 장군이 38~42세까지 근무했던 녹둔도는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약 100리(하류 지점으로 보면)에 있는 녹둔강 주변에 있다. 이 두 가지는 조선왕조실록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고, 명나라와 러시아 각종 역사서로 쉽게 교차검증이 가능한 사안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 국경으로 처음 주장한 자는 대표적인 황국사관 어용학자인 ‘쓰다 쇼키치’이다.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가 그자의 거짓 조작한 것을 싣고 있다는 것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다. 황국사관은 메이지 유신 세력이 ‘일왕 중심 정치체제, 탈 아세아론’으로 정리하며 극우로 치달을 때 역사를 조작하며 탄생한 역사관이다. 황국사관의 핵심 사안 중 하나가 ‘가야=임나’ 조작이다. [식민지 왜곡사관이 반영돼 폐기 논란이 뜨거운 '전라도천년사' 표지그림. 2] 이에 가장 큰 걸림돌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기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이 창작한 소설」로 딱지 붙이고 그 빈틈을 일본서기를 비학문적으로 해석하여 메운 것이다. 임나는 백제 담로인 ‘야마토왜’가 일본열도에서 가야계 소국을 정벌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지명이다. 그러기에 일본서기에도 ‘기문, 다라, 침미다례, 반파’가 ‘남원, 합천, 강진(해남), 장수’라고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도 무리해서 ‘가야=임나’로 역사 조작하고 조선을 침탈했다. 대한민국 역사학자는 ‘가야=임나’를 반드시 증명하겠다며 ‘양직공도, 광개토태왕릉비. 강수열전.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등을 억지로 짜 맞추며 국민을 현혹하고 있다. 이들의 국적은 대한민국이지만 신념 체계는 일본 극우 사관을 가진 참으로 황당한 자들이다. 그들이 신념 체계가 집대성된 책자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한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조선사 35권’이다. ‘조선사 35권’의 관점으로 서술한 주요 서적은 아래와 같다. 첫째,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의 동학 이전 내용 대부분은 ‘조선사 35권’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둘째, 2020년 문화재청 이름으로 발간한 가야고분군 연구총서 1~7권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직접 편찬하였다고 할 만큼 황국사관에 충실하다. 셋째, 전라도 천년사의 동학 이전 기록은 임나 관련을 제외해도 황국사관이 넘쳐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제국주의가 우리 역사를 조작했다고 대부분 믿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그 구체적 내용은 알지 못하고 그저 광개토대왕비문만 머릿속에 어른거린다. ['역사바로세우기 불교연대'가 6월 5일 전남도의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 식민사관으로 얼룩진 '전라도 천년사'의문제점을 지적하고광주전남전북 광역의회에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을 촉구하고 있다. 3][ⓒ전라도오천년사바로잡기500만도민연대 제공] 그 이유가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조선사 35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 꼭꼭 숨겨놓고는 그 책 내용으로 조선~단군조선까지 모든 국경을 조작하여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에 싣고 있다. 특히 ‘통일신라’의 명칭과 강역은 중국 동북공정의 교본 역할을 하는데 대한민국 국민만 모른다. 후기신라 초기 강역은 요동과 연해주 전체와 요서 일부를 포함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통일신라’는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명칭이고, 강역을 평양 이남으로 대폭 축소하였다. ‘통일신라’ 명칭은 외국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 민족 정체성을 설명하는 단어가 된다. 중국은 이 단어로 대한민국의 강역은 평양 이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 조작 대국 사이에 끼어 분단되어있는 대한민국은 역사관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어떤 위기로 치달을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온 국민이 가스라이팅 당한 참담한 현실에서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라며 극히 소수의 학자가 백마를 탄 초인의 역할을 해왔다. 이제는 전라도민이 이어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전라도천년사’는 단순한 지역사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체성을 바로 세우라는 시대적 명령을 담고 있다. ‘분단·전쟁·독재·황국사관 가스라이팅’이라는 그 짙은 어둠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경제·문화·정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였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위기에 강한 우리 민족 DNA의 발현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 본래 역사인 독립군의 역사관을 복원하자‘는 해방 당시 그 당연한 요구가 반민특위 해체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조상님께 죄스럽고 아이들에게 한없이 부끄러운 황국사관 청산을 또다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지구촌의 자랑인 ‘5·18 평화정신 구현’과 ‘100년 동안의 가스라이팅’이 부딪치는 형국이다. 결국 ‘5·18 평화정신’은 빛이 되어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우리는 어떠한 목적이 있을 때 심신을 수련하면서 성과를 바랄 때가 있다. 김유신 장군은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나 말을 타고 활쏘기 연습을 하면서 무예를 닦았다. 신라의 변방에 있으면서 나라를 지켜야 하겠다는 염원이다. 김유신 장군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심신을 수련한 곳에 가 보았다.진천의 김유신 장군이 탄생한 곳에는 치마대(馳馬臺)로 불리는 곳이 있다. 치마대는 장수나 병사들이 말을 타고 활쏘기, 칼 쓰기, 창 쓰기 등으로 수련하는 곳이다. 치마대는 지역 곳곳에 있다. 김유신 장군도 유년 시절 진천 탄생지 근방에서 활쏘기로 수련하였기에 그 장소를 치마대로 부르고 있다. 탄생지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500m 지점에 있는 투구바위에서도 무술을 연마했다고 전한다. 진천 탄생지에서 열심히 무술을 단련한 김유신 장군은 15세 이전 어느 시점에 서라벌로 와서 생활하게 되었다. 김유신 장군의 외조모인 만호태후는 신라 진흥왕의 여동생이고, 딸인 만명(萬明)과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과의 혼인을 반대했다. 아마도 출신 성분이 달라서 근친혼으로 혈통을 유지하는 데는 곤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호태후는 진천에서 생활하는 외손자를 한없이 보고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하늘의 해와 같은 모습으로 제왕(帝王)의 얼굴 모습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성장 소식을 들은 만호태후는 외손자로 인정하고 서라벌로 불러들였다. 김유신 장군을 보자 기뻐하면서,“이 아이는 정말 내 손자다.”라고 했다. 만호태후가 이렇게 하므로 마침내 가야계는 김유신 장군을 받들게 되었다고 『화랑세기』 「유신공」 조에 전한다. 서라벌로 들어온 김유신 장군은 서기 609년(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郞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다. 용화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후세에 인간 세계에 내려와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3회에 걸쳐 설법을 한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향도는 향(香)을 매개로 하여 군과 현 또는 촌락 단위로 조직된 불교 신앙 조직이자 지역공동체를 말한다. 김유신 장군이 거느린 낭도의 집단 명칭이 용화향도였다는 것은 화랑도가 가지는 미륵 신앙과의 관련을 암시한다고 본다.당시의 화랑 집단은 국선화랑인 풍월주 1명에 그 아래 부제(副弟) 1명이 있고, 부제 밑에 여러 명의 화랑과 700∼800명 정도의 낭도가 나라를 지키게 됐다. 김유신 장군은 서기 612년(18세)에 풍월주가 되었다.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화랑들이 수련했던 단석산에도 가 보았다. 단석산은 통일신라 전에는 중악(中岳)으로 불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는 팔공산이 중악이다. 단석산에는 상인암이 있고, 상인암을 탱바위 또는 승상암(僧像巖)이라 한다. 서기 1969년『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에 의하여 상인암은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의 염원을 신명(神明)에게 기도하던 중악의 석굴임이 밝혀졌다. 상인암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면, 상인암의 본래 이름은 신선사(神仙寺)였다.단석산 7부 능선 쯤에 있는 상인암 바로 북쪽에는 6~7세기경에 잠주(岑珠) 스님이 창건한 새로운 신선사(神仙寺)가 있다. 서기 2019년 3월 1일 신선사 요사채에서 만난 용담 주지 스님은,“단석산은 신라 시대 화랑들의 수련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그들은 석굴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석굴사원을 만들어 기도했다. 이 석굴사원이 상인암이다.”라고 했다.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유신 장군은 서기 611년(17세)에 고구려, 백제, 말갈이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봤다. 의분이 북받쳐 적(賊)들을 평정할 뜻을 가지고 홀로 단석산 석굴에 들어갔다. 나라의 환란을 없앨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늘에 고하면서 기도했다. 나흘 후 홀연히 한 노인이 거친 베옷을 입고 나타나 자신을 난승(難勝)이라 하며,“이곳은 독충과 맹수가 들끓어 두려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무슨 연유로 왔느냐?”라고 물었다. 난승은 신령(神靈) 또는 도사(道士)라는 생각이 든다. 김유신 장군도 노인이 범상치 않은 사람인 줄 알고, 다시 절하고 신라 사람이라 말하면서,“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으니 방술을 일러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김유신 장군 단석산 수련도] 김유신 장군이 예닐곱 번 요청하니 노인은 이윽고 비법을 주면서,“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고 의롭지 못한데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라고 했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 떠나 2리쯤 멀어졌다. 김유신 장군이 쫓아가 둘러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오색 빛만 찬연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편에 전한다.김유신 장군은 단석산 석굴에서 검(劍)을 앞에 두고 향을 피워 기도 후 신검(神劍)을 얻었다. 시험 삼아 그 칼로 큰 돌을 자르니, 그 잘린 돌이 쌓여 산과 같았다. 그때의 돌이 아직 남아 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편에 전하고 있다. 단석산은 월생산(月生山)이었는데 큰 돌을 잘랐다고 단석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잘린 큰 돌 밑에 절을 짓고 단석사(斷石寺)라 불렀다. 단석사는 현재 큰 돌인 송곳바위(천주암) 밑에 절터의 형체만 보인다. 큰 돌은 단석산 정상에 갈라진 바위가 아니다.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등산로를 따라 약 1km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50m 들어가면 큰 돌인 송곳바위가 잘리고 남은 부분이 아직도 우뚝하게 서 있다.서기 612년(18세)에 이웃 적국들이 한층 더 신라를 핍박해 왔다. 김유신 장군은 장렬한 마음이 더욱 격동하여 홀로 신검을 차고 현재 울주군 두서면과 두동면에 있는 백운산인 열박산(咽薄山) 깊숙이 들어갔다. 가지고 간 신검에 더 큰 영험을 받기 위해 단석산 석굴에서와 같이 기도했다. 3일째 신검이 마치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기 617년(23세)부터 628년(34세) 사이 7년간 가야국 양왕인 증조부 능도 보살폈다. 능을 보살피면서 능 아래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사대비(射臺碑)가 김유신 장군을 생각하게 한다.수련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명상이든 운동이든 마음을 집중하고 안정시키면 신체의 면역력이 강화되어 건강과수명에 도움이 된다. 수련은 정도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곳에 마음을 집중시키면 기(氣)가 모여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 힘은 초능력으로 발전될 수 있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은 강한 수련으로 신비한 능력을 가졌을 것 같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