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글을 쓰는 작가라고 하면 문인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니는 것은 운위(云謂) 하는데 오랜 전통이 따라다닌다. 어느 시대에서나 글은 곧 가치 정신의 지표를 갖는 일면 정신의 고고(孤高)함을 증명하는 방법의 하나였으며 그만큼 정신의 정수(精髓)를 뇌리에서 짜내는 직업의 신성함을 의미한다. 사실, 인정을 받는 만큼 부수적인 갖춤이 있을 때, 지향의 목표가 뚜렷해야 하고 무게를 갖는 일상의 정서가 부스러기가 아니라 정제된 함축미가 필요하다. 이런 조건에 합치되는 일은 오랜 습작과 단련의 결말이 아니면 지난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통상적인 글에 누습(陋習)을 반복하는 창조성 결여를 지적하게 된다. 창조는 언제나 신선함과 선도적인 사고에 발현 점을 갖는바, 이런 조건에 합치는 곧 개성의 뛰어남을 이룩하는 일이다. 개성이 없다는 글은 또 다른 누습의 함정에 빠지는 결과에서 외면의 눈총을 받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의 고양을 목표로 설정하지 못하면 결과에서 독자는 외면 혹은 침묵으로 지나치는 일이다. 이런 현상은 안 써야 하는 글의 이유를 합당한 논리로 처리된다. 물론 상이나 숲의 푸른 색채는 온갖 초목이 어울릴 때 멀리서 바라보는 녹색의 단일성을 갖지만 가까이서는 필요와 불필요의 구분이 정확성으로 나타난다. 왜 그런가 하면 글에 개성의 원인이 아니라 근인(近姻)에서 가치의 감동이 수반된다는 점을 특기할 일이다. 미상불 분석적인 현상에서 특징을 갖는 요인이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문인은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나타낸다. 어쩌다 문인의 모임에 나가면 생면부지의 신인이 와글대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적어도 수 삼 년에 이력을 내세울 것도, 없지만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름을 가질 때, 선배들이 주눅이 드는 일은 양적인 팽창과 밀도를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문인의 숫자가 많음과 창작의 수준과는 불비례의 어긋난 기울임은 결국 탄식을 불러오는 외면이 당연한 것 같다. 때를 벗지도 않고 몇 번의 작품 발표와 한 권의 저서를 출간하면 중견의 어깨가 되는 가벼움이 만연했으니 다시 돌릴 수도 없는 한숨이 고작이고 외면이 당연지사이다. 질서의 무너짐은 잡지의 숫자와 비례하는 것 같다. 신인을 배출하는 일은 곧 잡지의 운영과 상관이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은 이 깊이 진행되는 일이라 어느 방향이 옳다고 시정을 촉구할 수도 없는 한계를 넘어 버렸다. 그렇다면 탄식이 정답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올시다, 이다. 잘못된 길을 수정하거나 바른길로 지나갈 수 있는 끝없는 조언이 필요하고 비평의 선도적인 기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비평은 이미 시들어 기력이 없는 지경임을 필자 또한 인정한다. 물론 뛰어난 논리와 합당한 판단을 구유(具有)한 사람이 전혀 없음은 아니지만, 머리는 기능을 하고 있으나 가슴이 메말라 있는 경우가 흔함을 목도(目睹)한다. 또한 공부의 지속성 연구의 지속성이 없기에 거의 10년이면 비평가의 수명이 끝나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는 비평가가 많다는 아픔은 문학의 아픔과 비례하고 있다. 자기의 본분을, 잃고 다른 쪽에 고개를 돌리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실패의 문패를 달았다는 말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문학의 질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행위인 점이다. 시를 쓰는 시인의 경우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열심히 정진하는 그룹이 있다면 또 한 그룹은 이름만을 즐기는 명찰 - 귀걸이 목걸이의 장식용 시인 - 전자의 숫자는 매우 희소하고 후자는 흘러넘치는 양상이 한국 시단의 모습이고 문제점이라 보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시 공부라는 학습이 전혀, 안된 상태에서 엉겁결에 시인이라는 호칭에 취하여 문자의 나열 즉 행과 연을 끊어 짧으니까, 시가 된다는 모독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시와 감수성은 훈련으로 어느 정도 젊은 날의 시심을 회복할 수 있지만, 뼈를 깎는 정진에의 노력이 없기에 답보의 정체가 길고 긴 시간에 파묻히는 아픔으로 남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언어의 운용에 무게를 실감하고 음악성으로 리듬을 깨닫고 그림으로 이룩되는 상상의 회화성과 의미의 초점이 모아질 때, 시는 비로소 감동에 눈을 뜨는 법이다. 이런 난제 앞에 시인은 오직 입학만 있고 졸업이 없는 끝 모를 정진이 요구되는 이유는 나변(那邊)이 아니다. 자기를 아는 행위는 반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의 인격이 들어있고, 한 권의 시집에는 전 생애가 담기는 것이다. 이런 무게를 실감할 때, 시어 한 글자나 마침표 하나에도 신명을 실어야 한다. 시는 모든 것이, 의미로 통하는 문을 가져야 비로소 시다운 시가 되는 것과 같다.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의 물음은 시인이 들어야 할 몫이다. 독자를 깨우치는 시인이 될 때, 시인은 때로 선생님일 수도 있고 도덕적인 위엄을 갖출 수도 있다. 왜 그런가 하면 다양한 인격을 소화하는 성품은 곧 끝없는 수련에서 시의 길은 환한 불을 밝힐 수 있다. 어쩌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불러 모으는 초점으로의 사고가 단련될 때, 시의 신은 얼굴을 보여주고 금시 달아난다. 왜냐하면, 시는 순간의 예술이며 이를 찰나에 포착하지 않으면 꼬리만 보이고 머리와 몸통이 없는 허무의 그림자와 같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단은 수렁에서 나올 수 있는가 아닌가는 오직 시인 자신들이 선택하는 고행을 갈 것인가에 갈림길이 분기한다. 시인 자신들이 사명과 책임감을 느낄 때, 밝은 길이 열리는 것은 자명한 조언일 것이다. 시인은 모든 문학인의 맨 앞자리에 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깨어난 정신을 소유자라는 말이 합당한 이유이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에 admission 했다고 가정 해보자, 한국 의학의 경우는 한방이나 양방이나 맥을 짚고 난 후에 그 사람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는 문진과 맥진 방법이 지금까지의 진단이었다면 이는 종합에서 얻은 인간의 시체를 우주로 파악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서양 의학의 경우엔 아픈 부의와 판단에 따라 집중적으로 메스와 항생제가 치료의 주요 수단이다. 우리도 의학이 발전하여 세계적 수준이 되었지만 이는 분석과 해체에서 얻은 전적으로 얻은 서양의 치료 방법이라면 동양은 종합과 분석의 결합에서 제3의 의학적 처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대체 의학이라 말한다. 어느 것이든 전적으로 옳은 일방성은 없다. 문학에서도 이런 이론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서양적인 이론의 추구뿐만 아니라 동양적인 전통의 결합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론에 필요성이라 하겠다. 현재 한국문학은 갈림길에 있다는 생각이다. 2000년 초부터 우리 문학의 판도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액티브(activist)한 다양성이 부재한 듯하다. 민중문학이 잠들고부터 정체의 긴 시간이 무료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뚜렷한 없는 이슈가 없는 현실에서 예언의 말은 들리지 않고 침묵처럼 조용한 현상이 과연 좋은 것인가는, 차치(且置)하고라도 발전을 위한 모티브가 없으며 고민 없음을 대변하는 현실인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물론 우리 문학의 주소를 언급하는 데에는 남한과 북한의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북한은 문학이 아니라 아첨 혹은 정권 잡이의 문학 – 이도 문학이라면 문학인지 모르겠지만 엄밀한 잣대로 말한다면 거론할 말은 제한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표현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정해진 명령의 하달을 실천하는, 이른바 노동당의 기준에 적합한 경우, 충실한 문학인으로 대접받는 일종의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우상 같은 표현만 있는 문학은 이미 문학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광고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이란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하느냐의 함량에서 훌륭한 문학의 업적이 달성된다고 믿는다면 남한의 경우 상업성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구가 되는 현상은 올바른 징조이고 미래를 낙관하는 결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한국문학의 문제는 심도에서 사상의 승화가 부족하다는 말을 되뇐다. 감각적인 표현에서는 진전을 이루었지만 정작 그 작품 속에 진지한 사상의 깊이에 고갈 현상이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는 간단히 언급하기에는 어렵지만 우리 자신의 표현에 전통이 아직도 깊은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는 자기를 해체하거나 분석하기보다는 <우리>라는 문화에 녹아 있는 생각의 문제이기에 참혹한 전쟁을 겪었어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전쟁 문학이 없고 – 이런 전통은 고래로 올라가면 더욱 자명하다. 이른바 신라 통일 - 나는 통일이라는 말에 시비를 걸고 싶다. 당나라를 끌어드린 신라통일의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의 정립에 따른 각축을 다룬 진정한 역사적인 통찰의 안목이 없었고 근대로 와서는 온갖 전쟁의 참화 – 7여 년의 임진왜란도 그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항복 문서를 바친 병자호란 또는 6.25의 비극은 너무 통렬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는 둔감하고 남의 시비에는 민감한 정서를 <우리>라는 두루뭉술로 포장하는 관용이 있기 때문에 어느새 나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징후가 사상의 심화에 미흡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서구의 사상사는 결국 자기의 문제로 시작해서 객관을 바라보는 접근법, 귀납적 논리학이 주류를 이룬다면 우리는 연역적 논리에 가깝지만 – 보편에서 특수로 가는 결말이기보다는 보편에서 시작하여 다시 보편에 머무는 논리에 익숙한 것이 추상적인 현상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귀납적 논리도 아니고 연역적인 논리도 아닌 중간에 머무는 일 때문에 특성이 없는 결말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 문학이 심도는 돌뿌리에 체이는 안타까움을 맞는다. 북한의 세습 정권을 보면 금새 그 뜻을 알게 된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면서 3대 세습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의 간판이 될 수 있는가 말이다. 오로지 독재자 김정은이 향하문 이외는 모두 차단하는 인간 지옥이 유지되는 것은, 결국 <우리> 신앙 문화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서 그 원인은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한 명분 아래 온갖 수사를 통하여 동원하여 합리 둔갑 될 때 용해되는 <우리> 정서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최면이 깊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를 벗어나면 악이 되고 나는 우리에 소속된 혹은 없어야 당연해지는 일이 어떻게 문학이 추구하는 휴머니티의 소산이 되겠는가? 한때 남한에서 극심했던 저항의 문화도 그렇다. 결국 끼리끼리의 문화였지 발전적인 <우리>로 이르지 못한 것은 편 가르기의 우리에서 너는 적이고 나는 선이란 이분법만 작동되었을 뿐 진정한 용해의 공동에 터가 없는바 일방성 때문에, 공통의 선이 없어지고 독선적인 메아리를 던지다가 소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에서 출발해서 우리로 가는 공동의 광장이 서구적인 사상의 모델이라면 우리 문화는 우리에서 출발하여 결국 우리로 돌아가는 공허만이 남게 되었으니, 우리의 문학 작품에는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현상만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한때 유명했던 대하소설도 대부분 가족사의 나열이나 이데올로기의 분열상만 파노라마적으로 보여 주었을 뿐이지 정작 작가의 고뇌 어린 해답은 없었다고 느낀다. 소설은 갈등을 다루면서 시간의 정리라면 결국 그 스토리의 깊이엔 작가의 사상이 뼈대를 이루지 못하면 사랑방의 이야기 수준이고 고작이라는 뜻이다. 톨스토이 작품에는 그런 대답이 가득하다는 예를 들면 결론은 자명해진다. 그는 러시아 귀족으로서 자기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땅을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땅 만으로는 살 수 없다>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은 결국 언행이 일치된 사상적 표현의 결집이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농민 혁명의 도화선이 된 톨스토이 – 그가 추운 1월 우랄 철도의 시골 역장실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때 그의 마부도 따라 죽은 감동은 그의 깊은 인간미에 대한 참된 삶의 실현이었다. 그의 유언은 마지막 말이 “진리를 나는 열애한다.” 왜 저 사람들은, .이란 마지막 말에도 그의 사상은 녹아있다. 나를 찾는 여행은 문학인의 영원한 사명이다. 현실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구현되는 주인공과 등가를 이룰 때, 비로소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획득하는 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최대 소설인 <모비딕>의 작가 멜빌은 살아있을 때 온갖 모멸과 굶어 죽다시피 했고 죽었을 때는 신문에 부고 한 줄도 안 나올 만큼 무시와 고독을 감내했었고, 생전에 1,775수의 시를 쓴 미국의 여류 시인 에밀리 딕킨슨은 살아 7편쯤 발표한 시인이었지만 70년 후에 평론가의 연구에, 의해 빛나는 미국의 시인이 된 일이나 우리의 한용운은 1962년 <님의 침묵>을 발표한 것은 3.1 운동의 실패, 감옥살이 3년을 겪은 후에 모조리 변절한 사람들의 슬픔과 좌절감을 백담사 오세암에서 쓴 고독한 사랑에의 뜻을 담은 88편은 연작 시라는 점, - 1965년 – 40년 후에 박노순 인권 항의<한용운의 연구>에 의해 유명 애국 시인으로 등극했고, 생전에는 동요 몇 편을 발표한 윤동주도 해방 이후 유고 시집으로 살아난 시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인간애라는 휴머니즘의 사상에 깊은 감동을 시적으로 표현한 우리의 자랑스런 시인 – 이육사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문학의 표현은 언제나 자기를 고백하고 또 주장하면서, 자기만큼 표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결국에는 나를 어떻게 혹은 얼마나 객관적인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표현의 심도에 감동의 파문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아울러 자기에 몰입하거나 깊이 빠지게 되면 도그마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경계의 몫이라는 조언이 뒤따를 것이다. 명작의 조건은 하나같이 자기를 버리고 제3의 공간을 창조하는 길을 얼마나 진정성으로 표현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인간애의 따스함도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강조가 옳은 대답이 될 것이다. 대부분 문학은 정신이라 한다. 그렇다. 문학의 본질은 결국 사상의 실현이고 이를 어떻게 구조화하는가에 소설이 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결합하여 의미로 만드는 비유가 시가 된다면 자기라는 본질에 대한 “찾음”은 결국 문학적 표현의 깊이와 유관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넋두리로 자기를 감추는 것은, 문학적인 깊이와는 멀리 있는 표현일 것이다. 즉 자기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정신 가치 사상이라 말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필자 시평집]
한국토지주택공사(LH)직원 투기 의혹이 연일 터지면서 공직자(공무원+공직유관단체 임직원)의 이해충돌(利害衝突Conflict of Interest)을 방어하기 위한 이해충돌방지법 제정 압박이 커지고 있습니다.이해충돌은 업무를 담당하는'개인의 이익'과 공정한 업무를 통한'조직의 이익'이 충돌하는 것입니다.즉,공익을 추구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공직자가 직무를 수행할 때 자신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관련되어 공정한 직무수행이 저해될 우려가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김덕만박사/홍천출신, 전 국민권익위원회 대변인·한국교통대교수 □입법안의 골자 정부 입법안으로 국회에 여러번 제출된 이해충돌방지법의 핵심은 직무상 취득한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사적 이익을 추구할 경우 최대7년 이하 징역이나7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습니다.사전에 비밀정보를 이용해 부동산 투기로 부당 이득을 취했을 때는 이를 전액 몰수하거나 추징할 수 있는 내용도 담겨 있고요.적용대상은 청탁금지법처럼 국회와 중앙행정기관,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일하는 공직자가 모두 포함될 예정입니다. 이해충돌방지법은10여 년 전에 현행 청탁금지법에 포함시킬 예정이었으나 정치인들이 각종 지역 고충민원 처리에 지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유 등으로 국회에서 쏙 빼는 바람에 여태껏 법제정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공정한 공무 집행을 방해하는 이해충돌 유혹이 공직사회에 만연돼 있는 게 현실입니다.공직자가 자신·가족·친족 등과 이해관계가 있는 직무를 수행하면 이해충돌이 되겠지요.직무 관련자로부터 부정하게 돈을 빌리거나 부동산 거래를 통해 사익을 얻는 것도 해당됩니다.직무과정에서 알게 된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식과 부동산 거래로 이익을 얻는 것도 이해충돌에 걸립니다. □최근 이해충돌 위반 사례 LH임직원들의 부동산투기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부동산 거래에서 흔히 나타납니다.관할 재개발구역 내 건물을 사들여 이해충돌 논란을 빚은 성장현 서울 용산구청장에 대해 국민권익위가 공무원행동강령 위반이라고 판단했습니다.국민권익위는 올해3월15일 전원회의를 열어 성장현 구청장이'서울특별시 용산구 공무원 행동강령' 5조인'사적 이해관계의 신고 등'의 조항을 위반했다고 지적했습니다.성장현 구청장은2015년1월 한남뉴타운4구역 재개발조합 설립을 인가한 뒤 같은 해7월에는 이 구역 내 다가구주택 건물을 약20억 원을 들여 자신과 두 아들 명의로 매입했습니다. 또한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을 지낸 박덕흠 국회의원과 그 가족들이 대주주로 있는 건설사들이 국토부 산하기관들로부터 공사 수주와 신기술 사용료 명목으로1천 억 여 원을 지급받은 것도 이해충돌 논란에 휩싸였습니다.박덕흠 의원과 가족 기업들이 피감기관인 국토부·서울시 산하기관에서400억 여 원 규모의 공사를 수주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과 부패방지법·공직자윤리법 위반 등 혐의로 경찰에 고발된 바 있습니다. □외국의 이해충돌 방지규정 한편 미국에서는‘뇌물 및 이해충돌 방지법’에 따라 공직자가 자신의 재정적 이해 관계와 관련된 사안에 참여하면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또‘친척 채용 제한법’에 따라 자신의 소속기관에 친인척을 임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부패방지법 청탁금지법 공직자윤리법 등 일부 법률에서‘사적 이해추구금지’등의 조항의 있지만 공직자 이해충돌을 방지하거나 사후 형사처벌할 법적 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특히‘공직자윤리법’에서 이해충돌방지 규정이 있지만 원칙적·선언적 규정에 그치고 위반 시 형사처벌 조항이 없어 하나마나한 절름발이 법이란 지적입니다.공직자 이해충돌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법을 하루빨리 제정하기를 기대합니다.
by 정준택 연합취재본부9기고문/나주경찰서 경위 황민애] 최근 남녀노소 모바일 스마트폰 사용이 보편화됨에 따라 메신저·메세지를 이용한 일명 메신저피싱이라 일컫는 범죄가 기승을 부리가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메신저 피싱은 예전에 문자가 활발하던 시절, 스미싱과 비슷한 형태로 모바일 앱 내에서 메신저를 주고 받을때 이루어지는 사기행위를 뜻하며 간편송금이 활발해진 때를 노려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가장유명하고보편화된메신저앱은‘카카오톡’이다.카카오톡내에서프로필사진은엄마이고,“엄마나폰고장났어”라는메시지로시작하여핸드폰액정이깨져서,수리를받아야하는데비용이필요하다등의말로접근하여피해자들이돈을송금하고있는일이빈번하게발생하고있다. 그럼 범죄자들은 어떻게 피해자와의 인간관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일까. 이들은 안드로이드 운영 시스템을 사용하는 휴대전화들의 주소록이 연동되는 구글 주소록, 네이버 주속록 또눈 아이폰 운영 시스템의 아이클라우드에서 개인정보를 얻는다.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주소록을 작성할 때 기억하기 쉽도록 본인과의 관계를 적어 놓기 때문에 관계의 유추가 쉬워진다. 그러므로 메신져 피싱 범죄를 예방하는 첫걸음은 주소록이 보관되어 있는 구글, 네이버, 아이튠즈 등과 자주 접속하는 인터넷 사이트 혹은 애플리케이션의 아이디, 패스워드가 중복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특히, “엄마 나 수업중이니 빨리 송금해주면 안돼?”라는 메시지가 오더라도 현혹되지 말고 전화통화나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카카오톡의 경우 메신져 피싱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해외 접속 사용자를 구별할수 있도록 사진 밑에 지구본 표시를 하고 있으며 새로 추가된 사용자와의 대화를 하기 위해서 별도의 사용자를 추가해야하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지만 사기범의 감언이설로 예방방법을 확인할수 없을 가능성이 있어 본인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게 가장 정확하고 안전한 예방법이다. 친한 지인, 오늘 아침까지 같이 있던 가족이라도 메신저를 이용해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본인에게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고, 만약 이미 계좌로 돈을 송금했을 경우 지체없이 112에 신고한뒤 해당 은행에 지급정지를 신청하거나 각 은행의 ‘전자금융사기’ 예방시스템 ‘경찰청 사이버캅 앱’을 다운받아 적극 활용하는 방법도 메신저 피싱 사기 피해를 예방하는 효과적인 수단일 것이다. 메신저피싱 범죄의 피해자는 우리 모두가 될수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과 노력으로 안전한 사이버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 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어릴 때 마을 입구에 보면 양쪽 막대기를 세워 고시에 합격하면 여기저기 현수막이 붙고 집안에서는 경사가 났다 하면서 떡을 하고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아 오는 사람 가는 사람들을 불러 실컷 먹이고 축하의 진행이 1개월간은 잔치가 이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입학이나 무슨 시험 발표날이면 어디, 어느 대학에, 합격했다는 현수막을 보면 은근히 부럽기도 하고 은근히 샘도 났으며 웃고 떠들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작은 시골 마을에 들어서면 어디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현수막을 보면 웃다 못해 말을 삼킨 적이 있다. 이것이 아직도 우리네 정서라 할 것이다. 이는 전통이 되어온 과거로부터의 정서가 이어지는 것을 한순간에 끊어질 수 없는 전통정서의 일단이다. 특히 시골 마을은 이런 모습은 봄이 되면 으레 도로변의 현수막이 웃음을 주고는 한다. 관료들은 이번에도 말들을 한다. 정의롭지 못한 나라를 정의롭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바로잡겠다고 온 정성을 다하며 진통을 걷고 있다. 학벌보다는 능력 위주의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는 요지로 강조를 하는 것이다. 공약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지난 정부도 사람이 먼저라는 근사한 공약을 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온갖 잘못된 공약이 나오다 보니 글쎄올시다, 이다 이번 정부도 공정,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아직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왜 그런가 하니 이제 3개월이 지났으니 허니문 기간이 6개월이라고 하는데 좀 더 두고 보아야 되지 않겠는가? 늘 하는 말이지만 어느 정부이든지 그 공약을 얼마나 지키느냐가 문제이지 누구나 공약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관료들이 얼마나 투명하고 진지하게 살신성인을 하느냐에 판가름 날 것이라 보는 것이다. 관료가 부패하면 어느 나라든지 망하는 법이며 백성들만 고생이다. 어렵게 고시에 합격하여 나라에 녹을 먹는 당상관이 되려면 청렴하고 정서의 정신이 맑아야 하며 애국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자면 오래전부터 회자(膾炙)된 비유가 생각난다. 세계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 프랑스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슨 시험을 통과했는가의 중점을 두었다. 모든 것이 국가고시의 통과에서 능력을 바라보는 일면 타당성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미국 사회의 기준인 능력으로 판단한다. 이는 죤 듀이의 프래그마티즘의 사상적인 바탕에서 나온 미국인들의 실용적인 사고가 응집되어 판단으로 삼는 합리성의 기준일 것이다. 세 번째 일본의 경우 학벌이 어떤가로 능력을 판단한다. 세 가지를 모두 한마디로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경우 지리적인 현상과 미국의 현상 그리고 일본의 위치를 숙고하면 그 나름으로 합리적인 근거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한 국가가 살아온 환경 요소가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지이다. 사방이 적이고 사방이 이웃인 환경이 유럽 연합인 것이다. 수시로 침범의 역사를 겪은 전쟁의 역사가 유럽이고 서로를 방어하기 위해 방법은 남의 일을 받는 일은 기피의 사회였고 실력의 중심이 삶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뜻에서 국가는 곧 자기이고 자기를 의지하는 유일한 수단은 실력이라야 했다. 이런 근거가 국가고시의 필요성이고 그 가치를 절대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이 합리성으로 국가의 중추 기능을 맡았다. 이른 바 높은 곳에 세운 성(城)의 건물이 많은 것도 전쟁의 방어와 수성의 흔적은 다양하다. 미국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이다. 너와 너 그리고 모두가 동등하고 동일한 가치의 주체로 국가를 건설했고, 물론 독립전쟁의 원인은 단순한 남북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이념을 실현하는 민주주의 바탕을 이루는 차별에의 전쟁이었고 북군의 이념은 곧 미국의 가치를 실현하는 자유 정신의 합리성을 뜻한다. 더구나 지정학적으로 미국은 적대관계의 이웃이 없는 나라이다. 지금도 케나다 인들은 아침이면 차를 몰고 미국 땅으로 출근하는 일이 당연시 되는 관계를 보면 이웃에 의심이나 적대관계로 나라가 위험을 느끼지 않는 나라 - 개인의 가치가 가장 우선하는 이유가 이런 바탕에서 나온 것을 유추하면 능력 위주의 가치를 신봉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일본은 연대의식이 강한 섬나라이다. 한마디로 죄를 짓고도 도망갈 곳이 없는 성(城)에 갇힌 정서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지도자의 절대적인 신봉을 가하는 정서가 있으며 - 예를 들면 가미가제식 희생 – 국가라는 괴물을 위해 개인의 목숨을 던지는 일은 연대식의 강조가 백미를 이루는 사건이다. 물론 동양의 전통적인 문화는 족벌 혹은 가계(家系)중심의 사고가 개인의 사고를 앞서는 혈연의 강조인 <우리>의 문화가 득세한 현상을 특징으로 한다. 국가고시인 과거(科擧)의 합격은 집안의 빛나는 업적이었고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집안 속에서 개인의 영달이 보장되고 이런 일은 고려 시대 쌍기의 과거제 제안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관료들은 부귀영화를 누렸고 또한 역적으로 몰려 가세가 기우는 장면들도 많이 보아왔다. 그렇기에 부패하면 욕심과 이기, 질투의 정서가 살아나 백성들만 고난을 겪는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관료라함은 지도자 혹은 지배자의 개념으로 확대되어 오고 있으며 아직도 그런 정서가 우리 사회에 인식되어 있고, 이런 학벌 위주의 현상은 동양 사회의 지배구조를 만드는 유일한 기구이다. 얼음에 박 밀 듯이 살았던 선비라는 사람들은 과거에 불합격자의 고집이었고 이런 현상은 올곧은 정신을 유지하는 외골수 정신 곧 과거시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심리적인 기제(基劑)의 결과일 것 같다. 관료에 대한 미련이 또 다른 정신의 탑을 쌓았다는 뜻으로 보면 학벌의 중시는 비난만으로 정리할 뜻은 아니라지만 말이다. 물론 일본의 정신은 섬나라의 정신이고 우리의 정서는 지리적인 환경이 강대국과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에서 일본과는 다른 것도 사실이지만 커다란 본질에서 동양 문화는 범신론의 기층(基層)문화 위에 불교 정신이 바탕에 깔렸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서구문화의 특성과는 정서가 다르게 진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현대의 특징을 말하라면 동서양 서로가 변화의 제3의 문화 제4의 문화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인터넷의 영향을 주는 변화의 특성인 것이다. 능력, 학벌, 고시 중 어느 것이 합리다, 아니다, 는 불필요한 말일 것이며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면 서로 혼합하여 발전의 토양이 되는 것이 좋은 일일 것이다. 문제는 관료들의 타성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관료라는 관직에 있다면 언제나 바르고 모범이 되어야 하지만 경계가 느슨해지면 늘 권력과 탐욕에 결탁하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부와 권력에 도취 되어 지도자라라는 관직에 있으면서 모두 손에 넣어야 한다는 욕심과 아집에 일부 일탈하는 관료들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백성이 밑을 수 있게 솔선수범하며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앞서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상한 논리와 왜곡으로 양심의 마비가 되었는지 수단을 합리화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사실 정신을 따지는 값의 흥정은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직도 세상은 인간을 귀천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를 관료들이 어떻게 넘어서는 가는 가의 문제이며 스스로 관료들이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길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의식의 높임을 위한 행동 양식도 따라야 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육신이 가면 정신도 간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현실 상황에서는 정신의 가치가 육신의 가치를 드높인다는 판단에서 둘을 적절히 보완하는 관료들의 작동이 스스로에 길 찾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대를 하면서 이만 줄일까 한다. 2022. 09. 07.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안성시 금광 호수] 기획 특집 시 향기가 흐르는 안성 {이승섭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
by 조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