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소방서 소방장 김광수-] 추석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 작업을 계획하는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번 추석 명절에는 안전하고 편안한 성묘를 위해 예초기 사용 시 주의해야 할 사항과 벌초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하는 방법을 안내하고자 합니다. □ 예초기 사용 시 주요 위험 요인 및 안전 수칙 예초기는 효율적인 벌초 도구이지만, 잘못 사용할 경우 심각한 부상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초기의 무게로 인한 신체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적절한 휴식을 취하고 체력의 한계를 고려하여 작업하십시오. 또한, 작업 중 돌이나 기타 이물질이 비산되어 부상을 입힐 위험이 있으므로, 주변을 철저히 점검하고 작업 지역이 안전한지 확인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초기의 날이 사용자나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으므로, 작업 시 반드시 안전 장비를 착용하고, 작업자 간 안전거리를 확보하세요. □ 벌초 작업 전 준비 사항 및 중요 수칙 작업 전에는 날씨를 확인하여 비나 강한 바람이 예보된 날은 벌초를 피하거나 연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절한 복장은 피부를 보호하고 부상을 방지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긴 팔, 긴 바지, 모자, 장갑, 그리고 튼튼한 신발을 착용하십시오. 또한,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할 때는 주변 사람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도구 사용법을 숙지한 후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벌초 지역에는 벌, 모기, 진드기 등 해충이 많으므로 벌레 기피제를 미리 준비하고, 벌집이 보이는 곳은 피하세요. 묘지 근처에서는 화재가 발생하기 쉬우므로, 화기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 응급 상황 대처 방법 간단한 응급처치 키트를 준비하여 상처나 벌레 물림 등의 긴급 상황에 대비하십시오. 휴대폰을 반드시 지참하고, 작업 지역 내에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연락할 수 있는 연락망을 사전에 확인하세요. □ 마무리 벌초는 우리 조상을 기리는 중요한 행사이지만, 안전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초기 사용 시 발생할 수 있는 사고는 대부분 예방이 가능하므로, 사전 준비와 주의 깊은 작업을 통해 모두가 행복하고 안전한 추석 명절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비하여 항상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지난한 일 앞에 대단한 신기루가 끌고 가고 파라다이스가 있는 줄 일았다. 산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와 이상과 환상이 결합으로 뭉쳐진 이들이 이끌고 가는 것으로 상상의 풍선을 따라 혹은 높이 쳐다보면서 살아왔다고나 할까? 물론 상상은 아름답고 상상의 힘에 이끌려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행보가 이어져 왔음도 사실이다. 빛나는 로맨스가 내 것처럼 친근했고 애절한 사랑의 로망도 다가오는 것으로 추측한 세월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름들은 항상 허무하게도 내 곁만을 스치면서 지나는 것 같을 때 다시 풍선을 띄우면서 언덕을 혹은 계단을 넘어왔다. 속는 줄 알면서도 속고 속아 사는 것이라 당연히 체념을 내뱉으면서도 또다시 두리번거림을 지속하는 바보의 행진이 다름이 아니다. 살아가노라면 폭풍과 맞서는 일이 더 많은 줄 알면서도 말이다. 생의 문제는 해결이 아니고 함께 도정을 거치면서 더불어 가는 일일 뿐이다.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누구나 꿈꿀 권리는 있고 또 그래야 험난한 난제 앞에서 살아갈 수 있고 또 다른 큰 산맥이 가로막아도 앞으로 갈 수 있고 무탈하게 하루를 넘기는 일이 굴비 엮듯 일정한 모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유추가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어디 희망가만 부르는 일이 있던가? 오히려 절망과 아픔에 더 자주 희망의 끈을 놓는 일이 많을 때면 접어야 하는 아픔이 연기를 피울 것이다. 돌아보고 돌아 보아라. 지난날들의 표정이 어떤 모습으로 흉상(胸像)이 품목 인가를- 아무래도 후자에 모습이 인생의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슬픔의 벌판을 힘겹게 걸어 오는 대다 수 사람들은 대부분은 화려하고 넉넉함보다는 찢기는 아픔과 고통과 신음으로 비빔밥이 된 눈물과 통곡의 계곡이 깊을 것이다. 이 또한 돌아보면 너무 아름다움이 그윽한, 이른바 융기의 케넌 (canyon)이 전개되는 것이 돌아보는 일의 몫이다. 미국 서부 그랜드 케넌과 나이아가라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듯 험난한 인생 여정도 돌아보면 감동을 주는 이름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문제는 앞으로 무슨 성과를 달성하는가의 마지막 구축의 문제일 것이다. 예술의 기능은 이런 아픔을 위로하고 앞으로 길을 인도하는 노래일 때 임무가 달성된다고 믿는다. 자기 고백의 엮음을 어떻게 감동적으로 전시할 것인가는 디스플레이를 해보라는 뜻이다. 인생은 가변적으로 쇼윈도(show window)에 진열된 상품이라면 말이다. 기억도 없고 내가 배운 일제 강점기 시절, 6/25, 남침 전쟁의 흉측한 여파에 밀렸던 이후에 삶의 파랑들, - 거기서 살아 남아야 하는 고달픔의 여정,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며 삶의 고독이 과연 {사치한가?} 조부, 조모, 밑에 집안의 고독, 그리고 언감생심이었던 무질서한 생활에서 괴팍한 성격으로 인한 시절이 후회가 앞을 가리는 지금 미안함의 목록 등등 화려하다. 사실 이러한 시절에 운명의 빛이 글이었고 이를 통해 보람과 긍지를 건져 올린 소득은 나를 생의 마지막까지 지켜 줄 수호의 이름일 것 같다. 비록 은유라는 의상을 걸치고 있을 지라도 속 깊이에는 결국 나의 모습이 투영된 기록일뿐이라는 결론이다. 뒤틀린 인간성을 바로잡고 절망, 상처 난 마음에서 일어나 상상의 나래로 나가야 하는 염원의 노래가 있었기 때문에 늦은 세월에 좌고우면(左顧右眄)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 시와 비평 칼럼이었다. 시는 나를 정화하는 이름이었고 비평은 文事原大學, 에서 보조의 역확을 한 것이 시의 길을 재촉하는 역할이었으며 현실을 꼬집는 칼럼을 쓰는 것이 내 길을 재촉한 그림자이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라- 그러나 오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방점을 두고 싶다. 그 어느 것이나 모든 것은 지나가고 걱정은 뒤를 따르느라 허겁지겁 쌓이는 하루는 그렇게 갔다, 지나는 것은 가볍고 오는 것은 무거운 날마다 맞이하는 가락은 신명을 잃었고 근심이 무늬를 놓고 다시 떠나가는 의무와 다가오는 표정을 그리는 마음엔 이미 황혼조차 낯설던 밤이 자리를 편다 해도 돌아보는 것은, 모두 묵언의 풍경화일 뿐, {걱정을 내려} 중 모든 것은 지나가고 돌아보는 눈에는 아름다움으로 수채화를 그리는 일이 연결될 뿐,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아름다움으로 노래하는 예술이 필요한 소이(所以)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돌아보면 내 삶의 계곡도 관광객이 아무도 없는 그림 - 그러나 사람 팔자는 뒤웅박이라 누가 알겠는가. 먼 훗날 어느 한가한 탐험가가 대박처럼 광맥을 발견할 것인지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긴 지병으로 인하여 각 포털, 카카오톡, 페이스북, 밴드 등에 소식도 없이 나온 것에 대해 모든 지인, 친구, 선후배께 이 지면을 통해 송구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전한다. 다행히 어머니의 건강이 긴 여정이지만 지금의 이 순간으로 멈추어 있기를 바라는 사실에 자아의 한구석 빈자리가 미어진 것은 사실이나 현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하여 체면이기보다는 글을 쓰는 일상이 다름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로다 인생은 경영이라 늘 강조하지만 어떻게 유효하게 미래를 설계하고 적당히 즐기면서 살아가는 길이 경영의 요체라 한다면 운전 또한 낙관의 관조라는 의식 속에서 넘어질 줄 알아야 일어날 줄도 알 수 있다는 진리 앞에 에고를 버리는 것도 아름다울 것이라 믿으며 동료와 친구들 모두 이런 나의 겸손을 이해 해주기를 바라며 에필로그 하련다. 2024.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칼럼집] [필자 시평집]
[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유신은 화랑 출신이다. 화랑의 15세 풍월주였던 김유신(흥무대왕)은 굴이 있는 곳에서 수련했다는 기록이 명문(銘文) 또는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화랑도는 소년들로 이루어졌고 곱상한 남자들이었다. 『삼국사기』 「진흥왕 37년」 조를 보면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불렀다. 그를 따르는 낭도의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겼으며 산과 강을 찾아 멀리까지 다녔다.’ 라고 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신라 전역에 있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돌아다니며 수련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홍주암 전경] 화랑조직의 유래는 진흥왕 37년인 576년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미 화랑 사다함이 562년에 대가야를 멸할 때 활동한 기록이 『삼국사기』 「사다함」 조에 전하고 있다. 아마도 576년 이전에 청소년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역사적으로 진흥왕 시대는 신라의 영토가 함경남도, 경기도, 경상남도 등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신라는 통치해야 할 백성들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서 새로운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화랑들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화랑도의 최고 지도자는 『삼국유사』에 국선(國仙)이라 불렀으나 『화랑세기』에서는 풍월주라 불렀다. 화랑도 조직은 화랑 아래에 평민부터 하급 귀족으로 구성된 낭도(郎徒)가 있었다. 낭도의 숫자는 수십 명 이상부터 수천 명까지 있었다. 화랑과 낭도로 이루어진 단체를 향도(香徒)라 부르기도 했다. 김유신은 15세에 외조모인 만호부인의 부름을 받고 진천에서 왕경으로 와서 용화향도를 이끌었다. [원효굴 내부] 화랑은 낭도들과 함께 신라 영토의 사랑 정신을 기르고 굴에서 심신을 수련했다. 화랑들이 수련한 굴은 모두 천연 석굴로서 크기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 굴은 모두가 자연의 조건이 명당의 위치이고 수련하기에는 적합한 공간이다. 화랑들이 굴에서 수련한 증거는 점말동굴과 단석산 중악석굴에 있다. 이들 굴 벽면에 있는 명문(銘文)에 의해 신라시대 화랑들이 수련했거나 다녀간 곳으로 확인되었다. 김유신과 관련한 수련굴로 전해지는 곳은 경주 단석산의 중악석굴, 팔공산의 중악석굴, 충북 옥녀봉의 장수굴, 충북 용두산의 점말동굴, 경북 팔공산의 원효굴, 경북 장육산의 육장굴 등이다. 중악석굴이 두 군데이나 단석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중악이었고, 팔공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중악이라 불렀다. 김유신이 수련하면서 난승으로부터 비법을 받은 곳은 단석산 중악석굴이다. 팔공산에는 원효굴이 두 군데이다. 한 곳은 비로봉 바로 밑에 자그마한 석굴이 있고, 동남쪽 기슭에는 조금 큰 굴이 있다. 2월 중순인데 산책하기에 좋은 기온이라서 조금 큰 굴에 가 보았다. 원효굴은 깎아지른 절벽 바위 사이에 자연으로 생성된 굴이다. 일찍이 김유신 장군과 원효대사가 수련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이 굴에 부처님을 모셨다고 불굴(佛窟)이라 불렀다. 현재는 불굴 바로 아래에 사찰을 짓고 불굴사라 한다.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인 690년에 창건했다. 이 절은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8에 있다. 청통와촌 톨게이트를 나와 서쪽 대구, 갓바위 방향으로 약 7km를 달리면 불굴사 입구에 도착한다. 불굴사 입구 전까지 2km는 길이 완만한 경사이다. 불굴사 경내가 조용하다. 원효굴은 불굴사 마당에 들어서서 종무소 옆을 지나 무척 높고 길다란 돌계단 길로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돌계단을 보수하는 중이라 적멸보궁 뒤로 철제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원효굴이 있는 바위에 두 개의 큰 기둥을 세우고 암자를 짓고 홍주암(紅珠庵)이라 부른다. 홍주암의 가람은 온통 붉은색의 옷을 입혔다. 1976년 원효굴 내부를 수리하던 중 신라시대로 추정하는 청동 불상 1점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홍주는 붉은 구슬로 태양을 뜻한다. 불굴사가 있는 지대는 음기가 센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암자를 짓고 양기의 상징인 홍주라 한 것 같다. 홍주암은 거대한 암석 덩어리와 한몸을 이루고 있다. 암석 절벽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말없이 천년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원효굴로 오르는 돌계단 좌우에 쌓은 돌탑들은 다녀간 사람들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돌계단 끝 왼쪽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홍주암이라 음각으로 했다. 좀 더 들어가면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원효굴(元曉窟)이라는 한자 현판이 나타난다. 원효굴을 감싸고 있는 홍주암에는 여러 가지 시설이 있다. 복잡한 부대 시설이 김유신의 흔적을 지워 버린 듯하여 아쉽다. 나는 어린 화랑 김유신의 모습을 애써 상상해 본다. 조망이 좋은 이곳에서 심신 수련하면서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김유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상이 늠름해 보인다. 굴 앞으로 보이는 조망은 정신을 한곳에 모을 수 있을 정도로 집중된다. 저 멀리 보이는 산과 들이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굴은 협소하나 조망은 한없이 넓다. 원효굴에 누군가 켜 놓은 촛불은 자신을 태우면서 굴 안을 밝혀주고 있다. 촛불은 켠 사람의 소망을 부처님께 전하고 있는 듯이 조용히 타 오르고 있다. 잠시 후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어디선가 물소리가 난다. 바위틈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암벽에 아동제일약수(我東第一藥水)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 물을 먹으면 소화 불량과 신장염에 좋다고 안내되어 있다. 김유신의 장군수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니 한 모금 마신 물이 에너지를 충전한 것 같다. 현재의 원효굴은 옛 정취를 찾기는 어렵다. 심신 수련은 몸과 정신을 하나로 생각하면서 수련하면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한다. 수련이 실패되는 경우는 몸과 정신을 분리하기 때문이라 한다. 김유신은 몸과 정신을 하나로 모았기에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사성어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란 말이 있다. 몸과 정신을 한곳에 모으면 못 이루는 일이 없으리.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박기형 경산소방서장] 민족 대명절 설이 지나고 부쩍 따뜻해진 날씨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난다. 자연스럽게 난방기구의 사용이 줄었지만, 여전히 주택화재의 위험은 많은 곳에서 도사리고 있다. 특히 콘센트 사용 부주의나 향초, 음식물 조리 시 부주의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한 사고가 많은 만큼 항상 주택화재 예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겨울철은 사계절 중 특히 화재 발생 건수가 많고 그에 따른 인명피해 비율도 높은데, 이번 겨울(23년 11월 ~ 24년 2월)은 전년 대비 화재 건수는 약 7% 정도 하락하였지만 반대로 인명피해는 24% 증가세를 보였다. 이는 주거 시설 화재 비율의 증가로 인한 현상으로 특히 추운 날씨에 따른 난방기구의 사용 및 부주의 등의 원인이 37%로 가장 많았고, 고령자나 거동 불편자의 피해가 가장 컸다. 부주의로 인한 화재가 많은 만큼 다음과 같은 겨울철 주택화재 예방 안전 수칙을 알아놓으면 화재 발생률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첫째로, 가정 내 가스 및 전기 시설을 정기적으로 점검하여 누설과 과부하를 방지해야 한다. 통계에 따르면, 화재의 약 40%는 가스 누설로 인한 것으로 매달 가스 밸브와 전기 회로를 점검하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로, 화재경보기를 각 층과 침실에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배터리를 교체하고 작동 여부를 확인하여 조기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통계에 따르면, 화재경보기가 설치된 주택에서는 화재로 인한 사망률이 약 50%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로, 적절한 종류와 개수의 소화기를 보관하고, 화재 발생 시에 대처할 방법을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연습해야 한다. 특히 주방에는 K급 소화기 배치를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소화기를 보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매우 저렴하다. 화재 발생 시 신속, 정확한 대응은 화재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가정 내에서 화재 발생 시 대응할 수 있는 계획을 미리 세우고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경산소방서에서 실시하고 있는 ‘공동주택 피난계획 수립하기에 캠페인’을 예로 보면 공동주택 내에 있는 대피 공간과 집 안에 대피 시설 등을 파악하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피난계획을 세워봄으로써, 화재 발생 시 효과적으로 대처하여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이 꺼진 후에도 전기 장치가 연결된 상태로 방치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전기 장치의 오랜 사용은 과열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장치는 즉시 전원을 차단하고 안전한 장소에 보관해야 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예방법은 우리의 주택 환경에서 안전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활 속 작은 예방이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 가족 구성원 모두 주택화재 예방에 힘쓰도록 하자.
by 노상균 대구.경북 취재본부장[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유신 장군 동상은 두 군데에 있다. 한 곳은 서울 남산공원 백범광장이고, 다른 한 곳은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두 곳 모두 크기가 비슷한 청동상인데 원래의 색깔을 찾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애국선열들의 상(像)은 1960년대 초엽 국가 단위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세우게 되었다. 프로젝트에 미술대학생들이 참가해 1964년에 애국선열들의 석고상 37기를 제작했다. 설치 장소는 서울 광화문과 남대문 사이 도로 옆이었다. 이 석고상들은 비바람에 때 묻고 훼손되었다. 훼손된 석고상을 보수하기 위해 이한상(李漢相)은 1966년 제1회 5∙16 민족상 산업 부분 장려상 수상자로 받은 상금 50만 원을 서울신문사에 맡겼다. 마침 도시계획에 따라 석고상이 철수되자 그가 서울신문사에 낸 기탁금이 위인들의 동상(銅像) 건립에 기폭제가 되었다. 서울신문사에서는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를 발족하고 당시 김종필(金鍾泌) 공화당 총재가 위원회의 총재를 맡았다. 위원회에서 모금 활동을 벌여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서울, 수원, 대전 등지에 15기의 동상 건립이 추진되었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6번째로 세워졌다. 서울 남산공원은 남산(270.8m)을 중심으로 꾸며진 공간이다. 처음은 1897년에 문을 연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이었다. 남산공원에는 위인들의 동상이 여러 기가 있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남산공원 북서쪽 백범광장의 조금 한적한 곳에 있다. 백범광장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은 당시 국회의원 김성곤(金成坤)의 헌납으로 1969년 9월 시청광장 앞에 건립한 동상이다. 백범광장으로 옮기게 된 연유는 서울 지하철 1호선 굴착공사 때문이다. 백범광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군데에서 갈 수 있다. 지하철 회현역에서는 4번 출구로 나와 남산공원으로 약 300m 걸어 가면 김유신 장군 동상이 나타난다. 백범광장은 남산의 관문으로 성곽이 복원되어 오솔길이 나 있어 고즈넉하다. 5월인데 주위는 싱그러운 나무들이 산소를 뿜어내는지 상쾌하다. 오솔길 곳곳에 있는 벤치가 운치를 더해 준다. 넓은 잔디밭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시멘트 포장 지면 위에 화강암으로 사각형 기단을 만들고 다시 화강암으로 높이 쌓은 좌대 위에 세웠다. 장군 동상은 북쪽을 향해 힘찬 모습을 취하고 있다. 동상의 전체 높이는 기단과 좌대를 합쳐 11.3m이다. 조각은 개성 출신 김경승(金景承)이 했다. 김유신 장군이 타고 있는 말의 두 뒷다리를 좌대 위에 고정했고 두 앞발을 위로 쳐들어 힘찬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말의 꼬리는 달려갈 때의 모습처럼 수평으로 물결 형태로 표현했다. 김유신 장군은 투구와 갑옷 차림에 왼손에는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힘차게 잡고 오른손에는 허리에 찬 칼을 내뽑아 들고 호령하는 모습이다. 칼은 어떠한 적군도 무찌를 기세이다. 이제는 지하철 1호선 공사가 끝난 지도 꽤 오래되었다. 많은 시민이 볼 수 있는 자리로 이전하여 김유신 장군의 호국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경주 황성공원은 경주시민의 휴식처이자 힐링 공간인 근린공원과 문화공원으로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심공원이다. 경주시립도서관 등 각종 문화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주차장 바로 옆에는 6∙25 참전과 월남전 참전 명예 선양비가 우뚝하다. 공원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산책길 옆으로는 맥문동의 고향처럼 군락지를 조성했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공원의 남동쪽 나지막한 봉우리에 있고 계단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이곳의 김유신 장군 동상도 새로 제작했다. 1970년 여름에 태풍 빌리가 불어닥쳐 동상의 칼에 금이 갔다. 경상북도에서는 보완 계획을 세웠고 때마침 1973년 발굴된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말다래와 말안장 가리개 등의 말갖춤을 보고 고증해 제작했다고 한다. 1975년 경주에 간 박정희 대통령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을 보고는 당시 김수학 경북도지사에게 방향을 바꿔 세우도록 하여 북쪽을 향하게 1977년에 준공했다. 북쪽에는 북한이 있다. 북한과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것 같아 공감이 간다. 이 동상의 좌대 옆면에 게시한 건립문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중략) 삼국통일의 주역이신 김유신 장군의 위훈(偉勳)을 오늘에 되새기며 온 겨레의 호국 정신을 일깨우고 조국의 평화통일 과업을 이룩해 나가는 (생략)’이라는 글귀가 있다. 아직도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어 평화통일을 못 이루고 있다. 황성공원의 김유신 장군 동상도 백범광장 김유신 장군 동상과 대동소이하게 경주 출신 조각가 김만술(金萬述)이 제작했다. 황성공원에 세워진 김유신 장군 동상의 높이는 기단과 좌대를 합해 9.7m이다. 동상의 말은 뒷다리 두 개와 앞다리 왼쪽을 좌대 위에 고정했다. 앞 다리 오른쪽은 기역자로 들어 올리고 있다. 말의 꼬리는 달려갈 때의 모습처럼 수평으로 물결 형태로 표현했다. 신라인의 힘찬 기상을 대표하는 김유신 장군은 투구와 갑옷 차림에 왼손에는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힘차게 잡고 오른손에는 칼을 빼 들고 호령하는 모습이 백범광장과 같다. 칼은 화랑들의 늠름한 기백을 묘사한 느낌이다. 황성공원은 경주에 있다. 경주는 김유신이 진천에서 태어나 15세에 와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라 위해 생활한 곳이다. 그의 동상을 보면서 그의 정신을 기릴 수 있다. 위인들의 동상은 동양의 문화가 아니다.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영웅을 칭송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문화이다. 서양인들이 세운 동상은 주로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광장이다. 광장은 서양인들의 토론 문화의 장소이기도 하므로 자연히 그들이 세운 동상을 잘 볼 수가 있다. 우리도 이왕에 동상을 세우려면 여러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세우면 좋겠다. 서울 백범광장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을 여러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장소로 옮겨지기를 바란다. 현재까지도 김유신 장군의 호국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피어나고 있다. 김유신의 향기가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기원한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기고문] 경산소방서 예방안전과장 이성곤] 최근 몇 년 동안 주택화재로 인한 피해가 증가하면서, 안전한 주거 환경 조성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화재는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에게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심각한 사고로 특히, 화기의 사용이 많은 설 명절에는 화재예방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가정에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안전 수칙과 대책을 준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먼저, 주택 내에는 화재 경보기와 소화기를 설치해야 한다. 화재 경보기는 화재 발생 시 조기 경보를 제공하여 대피에 도움을 주며, 소화기는 화재 진압에 필수적인 장비로, 적절한 위치에 비치되어야 한다. 전기와 가스 사용 시에도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 오래된 전기 콘센트나 소모된 전선은 화재 발생 위험이 크므로 주기적인 점검과 교체가 필요하다. 가스 사용 시에는 가스 누출을 감지할 수 있는 경보기를 설치하고, 가스 사용 후에는 반드시 밸브를 닫아야 한다. 대피 계획 수립도 중요한 요소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화재 발생 시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대피 계획을 수립하고 주기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이웃과의 협력을 통해 대피 공간과 방법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다. 안전한 사용 습관을 갖는 것도 화재 예방에 있어서 중요하다. 주택 내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가열기구를 사용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는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주택화재는 예방 가능한 사고이다. 안전 수칙을 준수하고 대책을 마련하여 우리 가정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함께 안전한 생활 환경을 만들어 가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편안한 주거 환경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을 위한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신라 문무대왕 김법민은 외삼촌인 김유신(흥무대왕)과 함께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에는 바위섬, 네 면에 수로가 나 있는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다. 봉길리 앞바다 조약돌 위에 앉아 저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니 문무대왕의 위업을 떠 올리게 한다. 김법민은 626년에 태종무열대왕과 문명왕후 사이에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25세 때는 진덕여왕의 명으로 비단에 수놓은 오언 율시의 「태평송」을 당나라 고종에게 바치는 일을 담당했다. 「태평송」은 주변 국가를 모두 복속시켜 위세를 떨친 당나라의 위대한 문무의 힘과 통치력을 예찬한 내용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노린 신라의 야심적인 외교의 시다. 당나라 고종은 태평송에 만족해하고 김법민을 태부경(太府卿)으로 임명해 돌려보냈다. 태부경은 당나라의 태부시(太府寺)의 장관으로서 황제의 재화와 보물의 수장을 관장했다. 아버지인 태종무열대왕은 왕자들의 관등을 높이고 29세인 김법민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가 된 지 6년째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당나라 내주(萊州)에서 내려온 소정방 군사를 아버지의 명으로 덕물도(덕적도)에서 맞이하는 역할을 했다. 660년 7월 13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의자왕은 측근을 거느리고 밤에 웅진성으로 달아나고,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과 대좌평 천복(千福) 등이 나와 항복했다. 김법민은 부여융을 꿇어앉히고 지난날 의자왕이 신라의 대야성 전투에서 자기 누이를 억울하게 죽인 것을 꾸짖은 것으로 보아 동기간 인정이 듬뿍 느껴진다. 661년 6월에 태종무열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김법민은 36세의 나이로 신라 제30대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에서 숙위하고 있던 동생 김인문(金仁問)과 유돈(儒敦) 등이 돌아와, “소정방이 수군과 육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므로 문무왕께서도 군사를 일으켜 호응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에 문무왕은 7월 17일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20여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소정방 군사에 호응하기 위해 출발했다. 8월에 문무왕이 장수들과 함께 현재 경기 이천시로 비정하는 시이곡정(始飴谷停)에 도착했을 때 백제의 잔당들이 현재 대전 대덕구 계족산성으로 비정하는 옹산성(甕山城)에 모여 길을 막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무왕은 군사들을 보내 전멸시켰다. 10월에는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왕경으로 돌아갔다. 황제의 조칙은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했고, 여러 빛깔의 비단 5백 단(段)을 증여받았다. 김유신 대장군은 군사들을 쉬게 하고 시이곡정에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나라 유덕민(劉德敏)이 칙지를 가지고 왔다.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명령이었다. 명령을 들은 문무왕은 662년 1월에 김유신과 김인문 등 아홉 명의 장군에게 명해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석과 조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명했다. 소정방은 군량을 얻자 날씨가 몹시 춥고 얼어붙을 지경이라서 곧 싸움을 그만두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듬해 4월에는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이미 당나라는 신라를 자기의 부용국으로 삼았고 이후에 침략할 뜻이 있었다. 665년 8월에는 당나라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 문무왕이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을 했다. 문무왕과 부여융은 백마의 피를 입에 발라 다시는 싸우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신라와 백제가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고 한 약속이었다. 666년, 41세가 되었다. 4월에 문무왕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했다. 그러자 7월에 당나라 고종은 신라군이 평양에 모이도록 했다. 이듬해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당나라 이적(李勣)의 군대를 기다렸다. 두 달 후 이적이 평양성 북쪽 200리에 도착해 대나마 강심(江深)을 시켜 문무왕에게 군사 동원 기일을 독촉하자, 문무왕이 현재 황해도 수안인 장새(獐塞)에 도착했을 때 이적(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문무왕의 군사도 돌아왔다. 이적이 왜 돌아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당나라에서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668년 6월 12일 유인궤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숙위하던 김유신의 장남 김삼광과 함께 현재 경기 화성군 남양면 지역인 당항진에 도착했다. 나당연합군이 9월 21일 평양성을 에워싸자, 고구려 보장왕은 찬란한 역사를 뒤로하고 항복했다. 문무왕은 외모가 뛰어났으며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재위 기간 중 큰 업적이 있고 난 후 에는 군사들에게 음주의 시간을 준 것으로 보아 신라 때도 군사들에게 음주는 금지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길조라 생각하는 흰 까치, 흰 매를 지방에서 바쳤다니 신라시대부터 희귀 새가 있었다. 부인들에게도 중국식 의복을 입도록 했고, 당나라 음악도 배우게 한 것은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재물과 토지를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했다. 이 조치는 사원 등의 지나친 토지 모음을 제한하고, 귀족들의 사유재산이나 토지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한 669년 2월 21일 새벽 이전까지 죄를 범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죄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두 풀어준 것은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살 기회를 부여했다. 문무왕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배포가 큰 정치를 실현했다고 본다. 문무왕은 21년간 재위하다가 681년 7월 1일, 56세(당시 문무대왕비문)로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했다. 문무왕은 평상시에 지의법사에게 자기가 죽은 후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임종 10일 후 서역(인도)의 법칙에 따라 불로 태워 장사 지내고 장례 절차를 검약하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여러 신하가 문무왕의 유언대로 동해 어구의 큰 돌 위에 장사 지냈다. 2001년 KBS 문무대왕 수중릉 조사 때 대왕암의 십자형 수로와 대왕암 안쪽을 인공적으로 깎아서 다듬은 흔적까지 발견했다. 그러나 부장품은 없었다. 바닷물이 동쪽 수로로 들어와 서쪽 수로로 잘 빠져나가도록 만들었다.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대왕암을 성지로 만들고자 외양을 다듬었다고 한다. 문무대왕은 왕자로 탄생해 태자로 책봉을 받았고, 태자 시절에도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웠다. 왕이 된 후로도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직접 전장을 누볐다.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가 조용해지니 수중릉이 더 눈앞으로 다가온다. [문무대왕암 수중릉 내부(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이성(異性)에 대한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 남성 위주의 우월주의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라지고 이성에 대한 가치관도 평등주의로 바뀌고 있다. 현대 사회는 육아도 같이, 가사도 같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남녀 구분 없이 담당한다. 이성 간의 접촉 행위도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개방적이다. 신라시대 때는 양성평등이 잘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제2대 남해 차차웅의 여동생 아로 공주가 혁거세 거서간 시조 묘의 제사장을 맡아서 제사를 주관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조직한 청소년 단체의 우두머리를 여성으로 하여 원화(源花)라 불렀다. 원화인 준정(俊貞)이 같은 원화인 남모(南毛)를 죽인 후로는 화랑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남성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신라에는 여성 왕인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으로 세 사람이나 있었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남성 우월과 남존여비 사상으로 남녀를 엄격히 구별했다. 남녀는 일찍부터 분리되어 하는 역할이 달랐다. 남자는 주로 바깥일이고, 여자는 집안일이었다. 또한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남자와 여자는 일곱 살 때부터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다. 성인이 되어도 부부가 거처하는 방은 사랑채와 안채를 따로 두어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남녀를 평등한 위치에서 보고자 한다. 생활 장소의 구분도 없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육체적으로 남성과 구분되는 여성은 여성이라는 자아 정체감으로 순종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육체의 문도 순결이 지상목표로 인식되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쩌다가 육체의 순결을 잃었다 하더라도 정신적인 순결을 잃지 않았다면 괜찮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오래전 캐나다에서 생활할 때의 일이다. 동네 축구장에서 학생들의 친선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축구장은 숲속에 있었고 온통 잔디밭이었다. 숲속 분위기마저 쾌적하고 시원했다. 관람 벤치에서 잠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영화 같은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치열하게 싸우는 축구 경기가 마음을 흥분시킨 탓일까, 벤치에 앉아 있는 젊은 남녀가 부둥켜안고 키스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리고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경기 도중 틈틈이 고개가 저절로 그들에게로 돌아갔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두 사람의 키스는 간헐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 단계로 보아 생식기에 해당하는 나이로 보였다. 그들은 성욕이 한창 왕성한 시기이다. 나의 유교적 이성 문화 관념에서는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외국인의 자유로운 이성 개방 문화에 호기심을 느끼며 축구 경기를 계속 보았다. 이긴 팀이 진 팀에게 아주 정답게 인사를 하고 포옹도 한다. 키스하던 남녀도 경기가 끝나자 언제 키스했느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남녀의 표정에는 행복감이 넘쳐 보였다. 그들의 행위는 단순히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지 않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체가 서로 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도 언제부터인가 자유스러운 키스 문화가 상륙했다. 가로수 밑, 시원한 그늘, 구석진 곳, 버스정류장 등에서 남녀가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누구도 관심 없다는 듯이 지나친다. 그들을 보는 나의 시선도 한층 부드러워진다. 오히려 정다워 보인다. 언제부터 내가 이토록 이성에 대하여 관대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남과 여의 평등사상이 가슴속에 녹아 있는 탓일까? 노출된 장소에서 행해지는 남녀 간의 키스도, 포옹도 때에 따라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다. 캐나다의 이혼문화도 이성 간의 인격을 존중하고 있었다.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가정에 홈스테이한 친구의 경험담은 이성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이 가정에는 혼인 안 한 딸만 셋이 있었다. 큰딸은 재혼 안 한 아버지와 함께 살고, 둘째와 셋째 딸은 초등학생이라서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가정이었다. 친구는 아버지와 큰딸이 사는 가정에 홈스테이하고 있었다. 이혼한 부인이 재혼해 사는 가정과 친구의 홈스테이 가정과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매주 주말이면 어머니와 함께 사는 두 딸은 토요일 오전 아버지 집에 와서 일요일 저녁에 가고, 큰딸은 토요일 오전 재혼한 어머니 집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일요일 저녁에 오는 상황이었다. 현재 한국에도 이혼한 가정이 많다. 자녀가 있다면 양육은 부부가 공동 책임을 지고 자녀가 바람직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환경이 기대된다. 이혼한 가정의 남과 여의 평등은 남편이 이혼한 부인에게 남성이라는 우월성을 떠나야 평등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을 한다. 캐나다의 이혼한 남편은 자기가 싫으면 얼마든지 다른 남자와 재혼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모습이다. 친구와 나는 캐나다의 이혼한 가정에 관해 종종 토론을 벌이곤 했다. 아무래도 내가 남과 여를 바라보는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자랄 때부터 남성 위주의 우월감이 있었다. 남녀는 평등하니 서로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함에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성에 대해 기울어진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비로소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우월주의를 버리기로 했다. 요즈음은 이성의 활동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생활하고 있다. 오늘날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여성들이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여성이 사회에서 대등한 남과 여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인식과 함께 국가적으로 남녀평등 정책이 더 강화될 때, 여성들도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바로 설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남과 여가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누리는 날을 꿈꾼다.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필자]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오 작가] 조삼모사라는 고사성어는 현대에 이르러 변덕이 심하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에 착안하여 조보모진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조보모진은 아침에 보수였다가 저녁에는 진보로 그 사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초스피드 시대에 걸맞은 사상개념이다. 그만큼 현대사회에서는 초고속 유연성을 요구하고 유연한 사고와 사상을 소유하는 사람이 크게 주목받는 시대인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상을 보수와 진보로만 바라본다면 이를 두고 흔히 양극화 사고라고도 하는 이분법적 사고이다. 서로 완전히 반대되고 상호배타적인 두 가지 대안만 고려되는 사고방식으로 흰색이냐 검은색이냐 등 이분법적으로 형성하는 범주적 세계관을 제공한다. 한 가지 공통점은 바로 권위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부 아니면 전무인 사고가 사회에 만연되어 있을 때의 위험성을 살펴보자. ▲첫째, 사회가 극심한 양극화 현상에 빠진다.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재고하지 않으므로 틀리더라도 팔을 비틀어 접근 방식을 달리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는 2010년 소득 불평등이 OECD 국가 중 최하의 수준이 되었고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고용, 사회 계급 간 격차로 위화감이 커졌는데 여기에다가 양극화 현상이 더해져 사회적 위기감이 극에 달하였다. 오로지 자기 진영만 위해 싸우고 상대 진영은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좌절감에 빠져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어느 사람이 두 가지 선택만 인식하게 되면 그것이 절대적인 완벽함이든, 재앙이든 둘 중의 하나로 나타나게 된다. 만사가 그러하듯 결과는 과정이 빚어낸다고 보면 끊임없는 좌절의 상태로 또는 완벽한 성공의 상태로 살아가다가 최종결과가 나오는 것인데 중요한 게 그 과정이다. 전혀 유연성이 없이 곧은 한 길로만 고집했을 경우 그 결과는 참담해진다. 아니 큰 실패라는 성과표를 받게 된다. ▲셋째, 포플리즘의 리스크를 간과한다. 포플리즘은 흔히 정치인이 즐겨 사용하는 대중에 대한 인기영합주의로 정치적 목적이 강하다. 재원 마련이나 지속성에 대한 고민 없이 과격한 정책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이분법적 사고를 대입해 보면 자기 진영의 포플리즘은 마치 하늘을 찌를 듯 위대하게 보이지만 상대 진영의 포플리즘은 땅속으로 처박듯이 무시해 버린다. 즉 대중심리에 빠져 내포된 리스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이 사회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분법적 사고의 위험성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을까? 세상을 살다 보면 누가 보아도 수많은 길과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이분법적 사고에 묶여 두 가지만 한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어느 누가 “나는 여당이 싫지는 않다”라는 말을 ‘그러면 여당을 좋아하는 것이구나’로 단정 짓는 게 이분법적 사고이다. 결국 이러한 사고는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고 선입견을 유발해 문제해결을 방해한다. 이렇듯 유익하지 않은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 길은 제일 먼저 선입견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 그리하면 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다음은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이다. 복잡성을 인정하고 상대의 다양한 시각을 포용한다면 자기 자신이 한없이 유연해진다. 마지막으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개척한다는 각오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인생을 더불어 행복하게 영위하려는 기치를 내뿜어야 하는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출하면 곧바로 조보모진으로 이어진다. 탈출과 동시에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맛보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바로 조보모진이 얼마나 중요하고 훌륭한 처세술인지 깨닫는다. 높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라. 물줄기는 처음에 힘차게 쏟아져 내려오다가 큰 바위를 만나 빙그르르 돌아서 흐르지만, 물량도 줄고 속도도 줄었다. 계속하여 아래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나뭇가지, 돌덩어리, 인간이 해 놓은 장애물 등 갖가지 암초에 부딪히고 넓은 물길이 갑자기 좁아져 물량과 속도가 현저히 급감하게 된다. 그동안 많이 유실되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물은 똑바른 길로 내려오다가 굽이굽이 돌아내려 온다. 그렇게 여러 곳에서 내려온 물은 어느 한 곳에서 만나더니 어느덧 시냇물이 되어 따스한 햇볕을 받고 유유한 자태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래를 편다. 여기까지 당도한 물! 얼마나 위대한 여정인가? 아직 종착지는 아닐지라도 높은 계곡에서 출발하여 시냇물이 된 이 물이야말로 진정한 조보모진의 실천자가 아니겠는가? 조보모진의 실천을 위해 자기의 사상 나이를 계산해 보면 좋다. 사상 나이를 셈해 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자기 자신이 평소 지향하고 생각한 관점, 판단, 사상을 예로 들어 경우의 수를 살펴보고 보수와 진보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아니면 언제든 혼용인가를 판단하여 더 많이 치우친 쪽으로 결정지으면 된다. 세대별 분류를 해 보면, 조보모진, 즉 아침에 보수였다가 저녁에 진보로 바뀌면 30대 이하이다. 오보를 내진, 즉 오늘은 보수였다가 내일 진보로 바뀌면 40대이고 중도파, 즉 보수도 좋고 진보도 좋다면 50대이다. 소신파, 즉 나는 보수다, 진보다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은 60대이고 골수파, 즉 깊이 빠져 자기 진영만 인정하는 사람은 70대 이상이다. 사상 나이는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다. 내가 아는 지인 중 한 분은 70대인데 사상 자체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 다 섭렵하신다. 이런 분은 분명 50대 이하이다. ‘얼쑤! 통쾌한 세상’이란 책을 보면 우리나라가 명실공히 세계 10대국 선진국에 들기 위해서는 보수니, 진보니 용어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답답하면 그런 주장이 나오겠는가? 인심 좋고 살기 좋은 우리나라가 유독 정치 분야만 극도의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미래의 먹거리 창출과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보수다 진보다 이런 사상싸움과 패거리 싸움만 일삼으니 그 누가 실망하지 않겠는가? 진정한 세계 선진국 10대국 안에 들기 위한 길은 하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위정자 중 60대 이상은 한 명도 빠짐없이 퇴출당하여야 한다. 여기서 나이는 사상 나이이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우리나라 정치를 싸움판으로 둔갑하여 이 지경으로까지 침몰시킨 죄를 물어 두 번 다시 얼굴을 내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이 나라의 위정자들은 20대~50대로 이뤄진 최상의 조합으로 탄탄한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이들은 무슨 일이든지 합리적으로 해결책을 도출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기득권 세력들이 하루아침에 신진세력에게 자리를 물러주는 게 쉽지 않아 보이지만 우리 사회가 새로운 사상운동이 활발해지고 국민투표가 강력한 무기로 표출되면 지금부터 3년 안에 실현되리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선 아무래도 조보모진의 열풍이 강하게 불어야 할 것 같다. 한반도가 조보모진의 열풍에 휩싸이게 되면 그 파급력은 대단할 것이다. 국민의 뼛속까지 시리게 만든 보수와 진보 간, 눈만 뜨면 싸우는 행태가 사라지고 만나기만 하면 언제 싸웠던 적이 있었나? 하면서 서로 칭찬을 못 해 안달이 나고 상대가 내놓은 제안에 대해 손뼉을 쳐가며 찬성하는가 하면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고 웃음소리가 국회의사당 천정을 무너뜨릴 정도로 크게 들린다. 이런 분위기가 사회적 분위기로 옮아 붙어 국가의 운영이 최적의 상태로 된다. 어느덧 전 세계 국가 중 국제적 영향력 행사 5위 안에 들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위정자들을 모두 사상 나이 50대 이하로 교체하고 싶은데 그들의 나이를 어떻게 알 수 있나? 라는 의문이 든다. 이것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조보모진이 사회의 유행어가 되고 위정자들의 교체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 발 빠른 언론사에서 회심의 정보를 발표한다. 현재 정치지도자, 미래의 정치를 꿈꾸는 자, 각 분야의 대표자 등 사회 각 층의 인사들에 대해 사상 나이를 분석하여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 이런 정보를 보고 판단하는 것은 투표권을 가진 국민의 몫이다. 이제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이 무엇인지 자명해진다. 우리는 모두 자고 나면 보수다 진보다 싸우는 대신 조보모진을 외치며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조보모진을 숭상하고 우러러보며 실천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다. [*작품 2권 : 21세기를 이끄는 사람 끌려가는 사람, 얼쑤! 통쾌한 세상]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신라 태종무열대왕인 김춘추는 흥무대왕인 김유신이 있었기에 왕이 되고 백제를 멸할 수 있었다. 경주 통일전에 봉안된 태종무열대왕의 표준영정 앞에서 그가 활약한 모습을 떠올린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에서 김춘추를 보았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김용춘(金龍春)이고, 김용춘은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라궁주(寶羅宮主)로 딸 고타소를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다음 부인은 김유신의 둘째 누이 문희로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문명부인의 아들은 김법민(金法敏), 김인문(金仁問), 김문왕(金文王), 김노차(金老且), 김인태(金仁泰), 김지경(金智鏡), 김개원(金愷元)이고 딸 김지소(金智炤)을 낳았다. 김유신의 첫째 누이 보희는 김춘추의 후궁인 영창부인이다. 영창부인의 아들(서자)은 김지원(金知元), 김개지문(金皆知文)이다. 또 다른 서자(庶子)로 김차득(金車得), 김마득(金馬得)이 있고 서녀(庶女)는 5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춘추의 딸로 알려진 요석공주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풍월주일 때 부제(副弟)로 있었으나 보종과 염장에게 양보하고 나중에 풍월주가 되었다. 그는 풍채가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백제의 영특한 왕으로 알려진 의자왕은 재위 2년째인 642년에 윤충(允忠)을 시켜 신라의 대야성을 점령하게 했다. 당시 대야성 군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고, 그의 부인은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였다. 윤충은 김품석이 항복했는데도 부부를 죽여 사비성으로 보냈다. 이 사실을 들은 김춘추는 충격을 받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사람이 앞을 지나가도 깨닫지 못했다고 하니 딸의 내외를 잃은 슬픔은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러한 일로 김춘추는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니, 고구려 보장왕은 김춘추에게“죽령은 본래 고구려 땅이니 죽령 서북쪽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어 주겠다.”라고 하자, 김춘추는 “임금의 명을 받고 왔는데 사신을 위협하고 겁박하니 그 밖의 사항은 모르겠나이다.” 라고 했다. 보장왕은 김춘추의 말이 불손하다고 오히려 별관에 감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김유신에게 명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했다. 김유신의 군사가 고구려 남쪽 국경에 들어서자, 보장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김춘추를 돌려보냈다. 그 후 김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임명받아 군사의 힘을 길렀다. 647년 1월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 648년 김유신은 힘을 기른 압량주 군사로 백제에 빼앗긴 대야성을 도로 찾았다. 김유신은 사람을 시켜 백제 어느 장군에게 제의했다. “대야성 군주였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 김 씨의 유해가 너희 나라 감옥에 묻혀 있다. 지금 너희 나라 비장 8명이 잡혀 땅바닥을 기면서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제 살던 언덕으로 향하는 뜻을 생각해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너희가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보내어 살아 있는 8명의 목숨과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 의자왕은 중상(仲常) 좌평으로부터 김유신의 말을 전해 듣고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파내 나무함에 넣어 보냈다. 이것을 본 김유신은,“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들 무성한 수풀에 아무런 영향이 없고, 티글 하나 더한다 한들 태산에 아무런 보탬이 없도다.”하면서 곧 8명을 살려 보냈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김유신과 여러 신하가 2관등인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했으나, 알천이 굳게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오늘날 덕망이 춘추공 만큼 높은 사람이 없다. 실제로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제할 영웅호걸이라 할 만하다.” 마침내 춘추공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니,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지 2년, 655년 봄에 고구려와 백제 및 말갈의 연합군에 의해 신라는 북쪽 영토를 빼앗겼다. 그러나 3월에 당나라 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 중랑장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물리쳤다. 10월에 왕의 딸 김지소(金智炤)를 김유신에게 시집보냈다. 김춘추가 왕이 된 지 7년, 660년 3월에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다. 무열왕에게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돕게 했다. 5월에 무열왕은 김유신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났다. 6월에 현재 경기 이천시에 있었던 군단인 남천정(南川停)에 이르렀다. 소정방은 현재 산둥성 내주(萊州)에서 출발하니 많은 배들이 천리에 꼬리를 달았다. 태자 김법민이 덕물도로 가서 소정방을 맞이했다. 소정방은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 도착해 무열왕의 군사와 합해 사비성을 무찌르겠다고 했다. 태자가 돌아와 소정방의 군대가 매우 성대하고 세력이 강하다고 하자 무열왕은 기쁨에 차서 김유신 대장군, 김품일과 김흠순 장군 등에게 명해 정예 5만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했다. 무열왕은 현재 경북 상주시 백화산 고성으로 비정하는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렀다. 백제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피해 있었으나 7월 18일 웅진성에서 나와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무열왕은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금돌성에서 사비성으로 와서 군관인 천복(天福)을 시켜 당나라에 소식을 전했다. 무열왕은 백제가 멸하자 661년 5월에 압독주를 대야(합천)로 옮기고, 6관등인 아찬 종정(宗貞)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에는 현재 익산시 지역에 있었던 대관사(大官寺)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현재 익산시 금마면 지역인 금마군(金馬郡)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보나 되더니, 무열왕은 603년에 탄생하여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묘호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했다. 태종무열대왕이 없어서도, 흥무대왕이 없어서도 삼국통일이 되었겠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두 사람이 의좋게 생활하면서 서로가 욕심부리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해 한평생 몸 바쳤다. 온화하고 위엄있는 태종무열대왕의 영정을 바라보니 그의 호국정신에 고개가 숙어진다. [태종무열대왕 표준영정 경주 통일전]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흠순(金欽純)은 김유신(흥무대왕)의 아우이다. 그는 자녀를 많이 두었고 가정적인 성품을 가진 장군이다. 화랑으로서 풍월주가 되었고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생애는 여러 사서(史書)에서 볼 수 있다. 김흠순의 혼인 이야기를 보자. 그는 화랑의 네 번째 지위인 전방화랑이 되자, 지위 높은 화랑들에게 인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때마침 정자 안에서 여가를 보내고 있는 ‘보리’ 풍월주에게 인사했다. 그때 보리 풍월주의 딸 보단낭주(菩丹娘主)가 남동생과 함께 정자 아래 연못가에 놀고 있었다. 김흠순은 보단의 아름다운 자태가 신선 같아 보였다. 그는 첫눈에 마음이 끌려 보단에게 흠모하는 눈빛으로 한참 동안 보다가 갔다. 며칠 후 보리 풍월주를 배알(拜謁)하고는 사위가 되기를 청했다. 보리 풍월주는 김흠순의 의기(意氣)를 장하게 여겨, “남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여색이다. 네가 내 딸을 사랑하면서 더 극진히 사랑하는 첩을 많이 두지 않는다면 사위가 될 수 있다.” 김흠순은 그리하겠다고 맹세하므로 보리 풍월주가 보단을 김흠순에게 시집보냈다. 김흠순은 보단의 재주와 미색이 뛰어나고, 정숙한 덕을 잘 갖추었기 때문에 기쁨에 넘쳤다. 정사(政事)도 보단의 의견을 많이 듣고 참조했다. 아들만 일곱을 낳았는데 부모를 닮아서 모두 영민하고 용감했다. 김흠순은 늘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나라에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내조의 덕이라 말했다. 그는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집에 들러서 보단하고 말을 나누고 다시 떠났다. 형인 김유신과는 대조적이다. 김유신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까지 나라에 충성했다. 김흠순은 나랏일로 외지에 있을 때가 많았다. 보단은 원망하지 않고 집에서 무사하도록 기도했다. 그러다가 김흠순이 돌아오면 온 집안이 시끌벅적하고 화기애애한 잔치 분위기였다. 660년, 63세 때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김흠순은 장군 품일(品日)과 함께 대장군 김유신을 도와 백제 계백(階伯) 장군의 5천 결사대와 7월 9일 황산(黃山)벌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신라군은 네 번 싸워 모두 패했다. 이때 김흠순은 화랑인 아들 반굴을 불러 적진으로 홀로 들어가 싸우도록 명했다. 반굴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적진에서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를 본 신라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계백의 결사대를 물리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흠순이 65세~66세 때는 660년 백제 멸망 후 잔당들이 부흥 운동을 일으키자 다른 장군들과 함께 모두 토벌했다. 71세 때인 668년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관등이 각간(角干)에 올라 있었다. 김흠순은 각간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군단의 지휘관인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그는 항상 김유신을 도왔다. 이때 김유신 장군은 대당대총관으로 본국에 머물러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 정벌 이후,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취하므로 당나라 고종이 격노했다. 그러나 당나라와 애초 약정에 의하면 신라가 백제 고토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잘못은 당나라에 있었다. 그런데도 문무왕은 669년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波珍飡) 양도(良圖)를 당나라에 보내 사죄하도록 했다. 당나라에서는 두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당나라는 신라가 사죄함을 생각해서 이듬해 김흠순은 서라벌로 보내고, 양도는 억류당해 감옥에서 죽었다. 사신을 억류하고 죽도록 한 당나라는 신라와 전쟁을 선포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670년에 당나라 오골성을 선제공격하므로 7년간의 나당전쟁이 있었으나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 김흠순은 젊어서 술을 좋아했다. 항상 보단부인이 손수 술을 담가 다락 위에 저장해 두었다가 내주곤 했다. 어느 날 김흠순이 술을 찾자, 보단이 다락에 올라가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김흠순은 이상하게 여긴 후 다락에 올라가 보니 큰 뱀이 술독에 빠져 있었고, 보단은 놀라서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김흠순이 보단을 업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그 후로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보리 풍월주가 김흠순의 술 이야기를 듣고는 아내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하니 가히 딸 둘을 줄 만하다고 하여 보단의 동생 이단(利丹)도 김흠순에게 시집보냈다. 이단은 3녀 2남을 두었다. 자매가 한 남편을 섬기는데 서로가 투기하는 일 없이 화목하게 지냈다. 김흠순은 재물이 부족하면 항상 ‘염장’ 풍월주에게 구했다. 염장은 김흠순의 인품을 보고 딸들을 김흠순의 아들들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보단은, “염장은 여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내니 가풍이 손상될까 걱정됩니다.” 김흠순은 여색을 좋아함은 남자의 본성이니, 나 또한 보단이 아니었다면 마땅히 염장처럼 되었을 것이라 했다. 셋째 아들 반굴 외에는 모두 염장의 딸과 혼인했다. 김흠순의 아들 중 넷째 원수(元帥), 여섯째 원선(元宣), 아홉째 원훈(元訓)은 모두 중시(中侍)가 되었다. 중시는 오늘날 국무총리 지위와 같다. 김흠순 장군은 여러 번 전쟁을 겪었으나 패한 적이 없었다. 군사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680년 2월 보단부인과 함께 천상계로 올라가니 수(壽)가 83세였다. 그때 보단부인은 남편보다 두 살 아래였다. 자손(子孫)이 백 명에 이르고 조문하는 사람이 만 명을 헤아렸다니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경주 통일전 경내에 있는 화랑정]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서현은 신라에서 공을 세운 장군이다. 김서현의 아버지는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양왕의 둘째 왕자 김무력 장군이고 아들은 김유신 장군이다. 장군은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살았다. 금관가야 후예로서 신라를 위해 목숨 바친 김서현과 그의 부인 만명을 양산 취서사에 있는 영정각에서 만났다. 김서현은 그의 아들 김유신(흥무대왕)의 비석에 보면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라고 했다. 소연(逍衍)이 그의 자(字)인지, 아니면 서현(舒玄)이 고친 이름인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김유신 상」 편에 따르면, 김서현은 길에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자 첫눈에 반했다. 숙흘종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동생이다. 그 후 김서현이 현재 충북 진천군인 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로 가게 되었다. 만명이 함께 떠나려 하자 숙흘종은 비로소 김서현과 딸이 사귄 것을 알았다. 숙흘종은 만명을 별채에 가두어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 그러나 갑자기 별채의 문에 벼락이 떨어져 구멍이 뚫렸다. 지키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 흩어졌다. 만명으로 봐서는 기회였다. 만명은 그 구멍으로 황급히 빠져나가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김서현과 만명의 사랑 이야기를 볼 때, 두 사람은 용감했다. 운명이 아니었던가 싶다. 신라 왕실의 숙흘종이 자기 딸과 김서현의 혼인을 반대한 이유는 김서현이 진골의 신분이기는 해도 가야계였기 때문이다. 김서현도 신라는 골품제 간 혼인이므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서는 신라계 진골과 혼인할 수 없었기에 길거리에서 만명을 유혹한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 의하면, 김서현은 화랑에 들어가 화랑 조직의 네 번째 지위인 전방화랑을 거쳐, 세 번째 지위인 우방대화랑이 되었다. 이후 28세 때인 591년에는 풍월주(국선 화랑) 바로 아래 지위인 부제(副弟)가 되었다. 부제는 대체로 풍월주의 지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김서현은 풍월주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풍월주는 되지 못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만명의 어머니인 만호부인은 김서현의 어머니인 아양 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아 만명이 김서현과 관계 맺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김서현과는 계통이 달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결과 화랑 조직에 영향력을 가진 만호부인은 김서현을 부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집안 간의 좋지 않은 관계로 자녀가 피해를 보거나 혼인을 못 하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 김서현은 신라 진흥왕이 설치한 현재 경남 합천의 대량주 도독이 되어 백제 방어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그 후 대량주 도독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 등장한다. 그는 대량주를 642년 백제에 빼앗기면서 부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648년 김유신 장군에 의해 대량주를 탈환하면서 김품석 부부의 유해도 찾았다. 김품석이 대량주 도독이 되기 전 어느 시점에 김서현은 현재 경남 양산의 양주 총관이 된 것으로 파악 된다. 언제 총관이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양산 총관일 때 여러 차례 백제가 신라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그 기세를 꺾어 영토를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따라 신라 변방의 백성은 농사와 양잠의 일을 편안히 하였다고 『삼국사기』 에 기록하고 있다. 629년 김서현이 66세가 되었을 때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김용춘과 함께 대장군으로 명하여 현재 충북 청주 지역에 있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했다. 수많은 고구려 군사를 참살하고 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올린 후 김서현은 역사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낭비성 전투에서 신라 제25대 진지왕계를 대표하던 김용춘과 가락계를 대표하던 김서현이 대장군으로서 함께 참가한 사실은 두 가문의 정치적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양자가 친교를 맺어 두 가문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군사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양산 취서사(鷲棲祠)와 울산 은월사(隱月祠)에는 김무력 장군과 김서현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취서사에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이 취서사 바로 옆에 있다. 바라보아 왼편에 대도독 김서현지상(大都督金舒玄之像)이 있고, 오른편에 소판부인 만명지상(蘇判夫人萬明之像)이 있다. 취서사와 은월사에는 후손들이 매년 음력 9월에 제향을 올린다. 취서사 영정각에 있는 김서현과 만명부인 영정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한다. 영정의 크기는 부부 각각 가로 56.1cm, 세로 78.3cm이다. 이 영정은 원래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리 신기북정고분군중 제10호분인 양산 부부총 인근에 있는 존영각(尊影閣)에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사당이 훼손되었고, 한 무속인이 이들 영정을 수습하였다. 그 후 가락양산시총친회에서 회수하여 진품은 양산시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사본을 취서사 영정각에 봉안했다. 김서현의 관등은 3관등인 소판(蘇判)을 거쳐 1관등인 각간(角干)까지 이르렀다. 관직은 만노군 태수를 거쳐 대량주 도독이었다. 특별 관직으로 대량주 백성의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져 위로하는 것을 총괄하는 안무대량주 제군사(按撫大梁州諸軍事)가 되었다. 그 후 양주 총관을 거쳐 66세에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김서현은 564년에 출생했고 사망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 김서현의 무덤은 양산시 북정리고분군에 있는 부부총으로 추정하며, 1963년 사적 93호로 지정되었다. 김서현 장군은 가야계와 신라계라는 틈바구니 속에서 30세 경에 혼인했다. 595년에 만명부인은 만노군에서 김유신을 낳았다. 만노군은 지금의 진천군이다. 그 후로 만명부인은 2남 흠순, 1녀 보희, 2녀 문희, 3녀 정희를 낳았다. 김서현 부부는 김유신과 김흠순 장군, 문명왕후 등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신라 변방에서 나라를 위해서 큰 공도 세웠다. 부부는 서로가 사랑하면서 힘을 합칠 때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이 있는 영정각 문을 살며시 닫는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 부인 영정(촬영 2018. 8. 20)]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