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소방서 예방안전과장 이성곤] 최근 화재 발생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겨울철에는 특히 전기화재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각 소방서에서 전기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예방 조치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2024년 소방청 화재 통계에 따르면, 총 37,614건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그 중 50%는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나타났다. 이 통계는 우리 사회에서 화재 예방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특히 부주의를 제외한 발화 요인 중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은 28%로 전기화재이며, 이는 과거에도 지속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해왔다. 이러한 전기화재는 주로 절연 열화, 트래킹, 입착 손상, 층간 단락, 미확인 단락 등으로 발생하며, 이들 원인은 대부분 아크(스파크)에 의해 촉발된다. 전기화재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이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 또한, 겨울철 난방기구 사용 증가와 함께 발생 위험이 높아지며, 전기 안전 점검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즉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전기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아크 차단기의 보급이 필수적이다. 2022년부터 아크 차단기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으며, 이는 전기화재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아크 차단기는 전기 회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아크를 감지하여 즉시 전원을 차단함으로써 화재를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전기화재 예방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각 개인이 전기 안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 화재를 줄이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작은 관심을 더하고 더 큰 안전을 바라볼 수 있듯, 전기화재 예방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경산소방서 예방안전과장 이성곤
[경산소방서장 한창완] 최근 경산지역에서 주택과 컨테이너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인명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주택화재는 일상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며, 최근 10년간 통계에 따르면 전체 화재건수의 약 18%를 차지하고 있고, 인명피해는 약 4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통계는 주택화재로 인한 인명피해의 위험성이 타 화재에 비해 월등히 높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택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시민들의 화재예방 안전수칙 준수 및 노력과 관심이 중요함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소방시설법 제10조 시행 이후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가 의무화되면서 주택화재 발생률이 1.5% 감소하고, 주택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10% 줄어든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시민들의 작은 관심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경산소방서는 새해를 맞아 주택화재 예방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소방서에서는 화재예방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화재예방 캠페인도 진행하고 있다. 이는 주택화재의 위험성을 알리고, 안전 수칙을 준수하도록 유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주택화재의 주요 원인인 부주의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시민들이 화재 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안전한 생활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주택화재 예방을 위한 우리 모두의 세심한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 소방시설을 제대로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등 시민들의 관심과 소방서의 노력이 결합된다면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관심이 큰 안전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산소방서장 한창완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인간은 기초적인 인지 자료라 하면 알고리즘이라 할 것이고 메커니즘은 작동하는 원리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에 기초와 유기반응은 어떤 경우에든 반응과 인지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엄존하는 지구에서 살아야 하기에 적응을 위한 함수 즉 자기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병이 생겨 병원에 Admission(입원)해서 수술 같은 것을 받게 되면 Dr가 하는 일은 반응을 알아본다. 일차적 수순이 바로 반응이며 다음 순으로 넘어간다. ] 지구란 늘 자전하기를 반복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생존해야 하는 관계라 둥근 지구 안에 교차하면서 이런 적용의 원리로써 작동될 때, 복잡한 인지기능에 따라 반응과 대응을 하며 일의 시작을 하는 것이다. 인간 심리학, 또는 전문 심리학 연구는 하지 않았지만 정신과 병원에서 근무를 약35년을 근무하다 보니 <어깨너머 3년이란 말이 있듯이 정신질환자(精 神 疾 患 者)란망상, 환각,사고(思考)나 기분의 장애 등으로 인하여 독립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중대한 제약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어느 정도의 반응이 통계라고 하면 인간사의 일은 이러한 중대한 사례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지와 작동이 안 되고 침묵한다면 인간이라 볼 수 없기에 상대가 알 수가 없는 것이나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반복적으로 행동 반응이 나온다면 마침내 부딪침이 되는 것이다. 즉 잘못을 인지하고일이 있을 때 즉각 반응하는 일은 다음 수순을 생략하는 일면이 있다고 보기에 상황에 따라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산속으로 들어와 귀 산을 하여 가끔 시골에서만 발생하는 일들과 자주 마주치곤 한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다른 논에 물을 막고 자기의 논에 물을 받으면 심각하게 서로 다툼이 생기고는 한다. 이런 자기 아집과 이기주의가 시골에서는 심심찮게 보고 산다. 물론 한발 양보하면 되지만 1년 농사를 풍년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사태라 여기면서도 시기가 지나면 수확이 적게 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경우가 자주 일어나 앞집 옆집 뒷집 모두 서로 대화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회적 동물이라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겪어본 터라 이해는 하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골구로 물꼬를 대면 되는 일을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 기류를 보면서 내가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도시나 시골이나 모두가 같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일이 심각하게 발생되었을 때 아무런 반응이 없이 지나가는 경우와 반응하는 경우는 다음에도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필자 옆 밭이 하나 있는데 10월 지금쯤 우사에서 쇠똥을 잔뜩 받아놓고 몇 날 지나니 그야말로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여 문을 열 수 없는 지경임에도 극심한 공해를 말하는 사람들이 없다. 시골의 풍경이라 하지만 사람이란 인내의 한계가 있는 법 이것을 놓고 확연히 다른 차원의 행동이기 때문에 필자가 살며시 그분을 만나 사정을 하고 나니 그제야 밭을 덮어 놓는다. 그러니까 행위의 반복을 그냥 넘기게 되면 모든 사람이 피해가 갈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아마 도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소송이 걸리지 않았을까? 서로가 합리적으로 풀 수 있는 것을 알고리즘과 메커니즘의 반응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나오는 경우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무튼 존재는 존재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이 반응할 기회가 제공되며 반복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합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지를 주무로서 미리 피해를 막을 수 있고 예방의 조치가 수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존재를 너무 드러낸다면 상대방이 반감을 가질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또한 존재를 너무 감추다 보면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둘의 사이에서 오고 가는 고민을 소화시키는 일로 일상이 지난다. 물론 살아간다는 일에 있어 당연히 피할 길 없는 수순이라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행동이라는 점에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실이라 - 사는 것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이 정확한 답안이라는 제시는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신들의 말조차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말로 포장되기 때문에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그로 인하여 자기에 위치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말의 근거로 인하여 장구한 설전이 나타난다. 예로 어느 경전이 수학적인 답안으로 이루어진다면 존립의 근거가 모호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여지가 많은 개입의 자리가 있는 것이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신은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는 모순이기 때문에 끝없는 분쟁과 싸움의 빌미를 제공한 신의 실수라고 해야겠다. 침묵이 금이라면 결국은 인간의 모순에 대한 변명이고 이 변명은 결국 다기(多岐)한 갈래로 말의 포장을 일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신은 지속적 실수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신은 인간의 곁을 떠나면 이미 존재가 없다는 것도 인간의 야비하고 교활한 행동양식이다. 신을 만든 인간의 지혜가 신의 발목에 잡혀 함정에 빠지는 영악한 도 물론이지만 - 결국 나는 인간관계에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 체념의 문을 열어 놓고 살아야겠다. 오는 사람은 반기며 가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는 일로 정리되고 내 모습 그대로 하루하루희망을 섞어 역사를 쓰면서 지내야 하는 것이 정답이라 한다면 방법이 없지 않는가? 사실 젊은 날의 몰랐던 일들이 나이가 익어갈수록 알게 되는 상대의 차이가 왜 그렇게 크게 보이는지를 생각하면 사는 일에 해답이 없는 모호한 숲이 고독하게 보이는지는 아직도 물음표이다. (?) 있어야 할 것은 점차 없어지는 것으로 변하는 것도 필연으로 느끼고 사는 것이 불편한 일이있을지라도 또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이치가 당연한 논리라 한다면 편린(片鱗)을 쫓아가는 것이 보상이라면 보상이라고 해야겠다. 허긴 지금에 와서 전체를 조감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일부만 떼어서 검토하는 일은 필자의 허물로 가리면서 더욱 삼삼한 환경의 대응을 기대하면서 논지를 접는다. 이 같은 언덕을 얼마나 넘을지는 모르겠으나 행복이나 희망의 추구가 보편적인 가치로 꿈꾸는 데서 알고리즘, 메커니즘의 반응을 휴머니즘의 주조로 삶의 가파름을 넘어가려는 마음이 여리다 해도 계절의 순환에서 내 모습이 향기로 승화하려는 발상이려니 하며 꿈과 연결되는 필자의 글이 묘미가 있고 탄력적이지 않을까 한다. 작은 마을에서 작가 입네 하며 죽은 듯이 사는 것이 소망 일진대 마을을 위해서라도 알고리즘과 메커니즘의 반응일지라도 말이다. 2024. 03.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베스트셀러 필자 저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사)가야연구원 원장 김성문] 단석산은 신라 화랑들의 숨결이 잠들고 있다. 유적지 답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하늘이 청명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단석산으로 출발! 경주시 건천 단석산에는 신라 시대 화랑들의 수련장이 있던 신선사(神仙寺)와 국선 화랑인 김유신이 신검으로 바위를 잘랐다는 단석바위(斷石岩)가 유명하다. 자동차는 어느덧 경부고속도로 건천 톨게이트이다. 단석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우중골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벌써 송선2리 우중골 계곡을 지나고‘오덕선원’도 지났다. 5분 정도 더 올라가니 단석산‘산불감시초소’에 간이 주차장이 있다. 신선사까지는 사륜구동 자동차만 올라가는 좁고 가파른 산길이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가야 한다. 길옆은 이른 봄이라서 나무들이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준비가 한창이다.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낸 회색 청설모 한 마리가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상수리나무 밑으로 재빨리 내려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도토리를 어디에 두었지? 한참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낙엽 속에 있는 도토리 한 알을 앞발로 입에 넣고 초당 10번쯤 오물오물하는 것 같다. 인기척을 알고도 그냥 도토리를 물고 눈알을 굴리며 쳐다본다. 천진난만하고 겁이 없다. 약 1시간 정도 올라가니 노란빛이 많은 돌에 세로로 쓴 신선사라는 간판 글씨는 색다른 느낌을 준다. 간판에서 신선사까지는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 염불 소리가 지난 가을 남아 있는 단풍잎 사이로 퍼진다. 법당과 요사채만 있는 아담한 사찰이 서향인데 햇빛을 받아서 온화한 느낌을 준다. 새소리와 녹음된 염불 소리뿐이고 산사는 조용하고 평화롭다. 법당에도 부처님만 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절 남쪽 가까운 거리에 큰 바위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발길을 유혹한다. [▲신선사 간판 글씨] 우와! 경주 석굴암 같은 바위굴이다. 높이가 30m인 암석이 ‘ㄷ’자형으로 생겨 석실을 만들고 있는 것을 상인암이라 부른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북쪽 바위벽에는 여래상을, 동쪽 바위벽에는 보살상을, 남쪽 바위벽에는 보살상과 명문(銘文)을 조각했다. 이 마애불상군은 국보로 지정됐고, 신라 최초 석굴 사원으로 전문가들은 인정한다. 명문은 서기 1969년『한국일보』가 주관한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이 석굴의 본래 이름이 신선사임이 밝혀졌다. [▲단석산 중악 석굴] 신선사의 내력을 더 알고 싶어 주지 스님을 찾았다. 거실에 있는 주지 스님은 80세가 넘어 보인다. 따뜻하게 맞이해 준다. 정감이 간다. 주지 스님은“신라 시대 화랑들의 수련 장소로 이용했던 곳으로 그들이 석실을 만들고 불상을 새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석굴사원을 만든 것”이라 한다. 이 석굴이 신선사라는 것을 스님께 들어 더 깊이 알게 됐다. 화랑들이 부처님께 기도하며 심신을 단련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한창 혈기 왕성한 화랑들의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한 숨결이 들린다. 김유신은 17세 때, 고구려, 백제, 말갈이 신라를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이 북받쳐 적도들을 평정할 뜻을 가지고 홀로 이곳 석실로 들어와 하늘에 고하고 맹세하니, 나흘 후 홀연히 한 노인이 거친 베옷을 입고 나타나, “나는 신령이다. 이곳은 독충과 맹수가 들끓어 두려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무슨 연유로 왔느냐?”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근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방술을 일러 주십시오.”라고 유신은 요청한다. 계속 요청하니, 신령은 이윽고 비법을 주면서,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고 의롭지 못한데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 라고 하면서 곧 떠나 버린다. 유신이 따라가니 신선은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오색 빛만 찬연했다. 석굴에서 유신은 가지고 간 검(劍)에 신(神)의 힘을 얻었고, 시험 삼아 그 칼로 큰 바위를 자르니, 그 잘린 돌이 쌓여 산과 같았다. 그때의 돌이 아직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단석사(斷石寺)라 했다는 기록이 1669년 민주면 등이 집필한『동경잡기』에 전하고 있다. 단석사는 지금 터만 남아 있다. 칼로 자른 바위인 단석암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스님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내가 젊을 때는 등산객과 함께 단석이 있는 곳에 가서 설명도 하고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동이 불편하여 직접 같이 가지는 못하고 위치를 묻는 등산객에게는 설명해 주고 있다.” 라고 한다. 설명을 듣고 자른 바위를 보기 위해 단석산 정상을 지나 동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길은 꼬불꼬불하고 가파르다.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지면서 진달래 군락지가 있고 정상이 코앞에 와 닿는다. 드디어 해발 827.2m인 단석산 정상이다. 정상석 표지석 옆에 갈라진 바위가 있다. 이것은 김유신이 시험 삼아 자른 바위가 아니다. 자른 바위는 단석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비좁은 등산로를 따라 약 1km쯤 내려가면 오른쪽 가파른 곳에 강원도 추암 촛대바위처럼‘송곳바위’로 알려진 바위가 우뚝하게 솟아 있다. 이 바위가 잘생긴 단석바위이다. [▲단석산 단석바위] 단석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광경은 이른 봄이라 나뭇잎이 없어 가시거리가 꽤 멀다. 바위 밑은 낭떠러지다. 설화로 전해오는 단석사는 터만 보인다. 단석사의 옛 모습을 생각하면서 다시 정상으로 올라왔다. 저 멀리 건천읍 시가지와 금척리 고분군이 눈앞에 있다. 정상에는 몇몇 등산객이 갈라진 바위에서 기념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그들은 이 바위를 단석바위로 잘못 알고 있다. 장황한 내 설명을 들은 후에야 단석바위가 동쪽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곳으로 향한다. 단석산 정상 표지석 옆에 있는 한시(漢詩) 한 구절인,‘화랑이 남긴 흔적 계곡 중에 가득하고’를 음미하면서 산 중허리에 있는 신선사 법당에 다시 들렀다. 부처님은 그 당시 화랑들의 수련 모습을 아는 듯 밝은 미소를 보낸다. 미소 속에 화랑들의 숨결도 함께 느껴본다. 청년, 청소년 화랑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수련했던 역사의 현장에서 1,500여 년 전 그들이 남긴 자취에 취했다. 김성대 기자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이천시청 기업지원팀장 엄태성] 1월인가 싶더니 벌써 2월 정월대보름을 넘어섰다. 최대명절인 설도 지났으니 당분간 큰돈이 들어갈 일은 없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한국의 독립의사를 세계에 알린 3.1절이 코앞이고 직장인의 지갑이 가장 얇아질 가정의 달은 두 달 뒤인 5월이다. 최근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들이 세계 경제가 연착륙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그것을 믿는 서민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2024년 갑진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직장인의 월급은 자기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미리 빠져나간다. 지갑이 투명하기 때문이다. 피 같은 돈이 지갑에 들어오기도 전에 세금으로 떼인다. 심지어 들어옴과 동시에 마이너스다. 비록 납세의 의무가 국민의 의무이긴 하나 직장인들은 대체로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떼이고 카드 대금까지 빠져나갔는데 다시 다음 달 카드 대금이 쌓여있다. 요즘 서넛이 점심을 먹으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직장 밖에서보다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직급이 높든 낫든 체감경기에 민감하다. 정말 어쩌다 친구들에게 밥 산다고 자랑질이라도 하면 결국엔 이상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그래도 공무원이 제일 편하고 자기가 내는 세금으로 월급 꼬박꼬박 탄다고 빈정거린다. 이럴 땐 화도 나지만 그러려니 하고 참는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받는 것도 사실이고 누가 더 세금을 많이 내는지 이야기해봤자 돌아오는 핀잔을 감당하기에 우리 사회에서 공무원에 대한 인식이 너무 저조하기 때문이다. 딸이 셋이다 보니 지출 비용이 만만치 않다. 각종 생활비에 주택 임차료, 학비와 교통비, 경조사 금 등 그래도 피자와 치킨 떡볶이 시켜놓고 파티도 하고 가족 생일이라도 있는 달이면 신나게 삼겹살 외식도 하며 만족하게 살고 있다. 만족한다기보다 돈에 맞추어 그냥저냥 산다. 국가와 사회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 적극적으로 써먹는 중이다. 누구나 서글픈 일이 있을 때도 있고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 어둑어둑해지면 왠지 심란해지고 답답해질 때도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들어야 하고 무언가 콱 막힌 느낌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가족의 얼굴과 표정이 이 모든 것을 꺾어버린다는 것이다. 명절 다음날인 지난 13일 우리 딸 셋이 할머니와 겨울 여행을 떠났는데 라디오 방송을 탔다. 황정민의 뮤직쇼에 소개됐는데 내 동생이 라디오에 사연을 올렸고, 그날 바로 소개가 된 것이다. 벼르고 별러 세송이가 각자 모은 돈으로 강원도 여행을 간 것이다. 할머니가 키워서 그런지 유독 할머니를 따르고 좋아한다. 세송이 이름이 황정민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할머니와 아이들의 환한 모습도 라디오로 보내져 황정민 아나운서의 예쁜 말로 소개됐다. 지난 10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작년 근로소득세 수입은 59조 1천억 원으로 전년보다 1조 7천억 원(3.0%)으로 10년간 2.7배 넘게 증가해 전체 세수(총 국세 344조 원)의 17.2%를 차지했다. 법인세(-23조 2천억 원), 양도소득세(-14조 7천억 원), 부가가치세(-7조 9천억 원), 교통에너지환경세(-3천억 원) 등 세수가 감소하는 와중에 근로소득세만 늘어났다. 5년간 근로자 임금이 17.6% 오를 때 근로소득세 부담은 70.6%나 증가한 것이다. 적어도 물가 오르는 만큼만이라도 월급 좀 올려주면 좋겠다. 그래야 아이들 치킨도 사주고,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친구들에게 밥도 한 번 사고. 뭐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로지 나의 관점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가정에 충실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들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가족을 생각하며 버티고 있다. 비록 지갑은 두툼하지 않아도‘돈이 없지 가오가 없을까?’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청송소방서 예방안전과 소방교 조욱] 잦은 눈·비소식과 더불어 추운 날씨로 난방용품의 사용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최근 다수의 주택 화재 발생으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증가 함에 따라 범도민적인 화재 예방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하여 주택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몇 가지 사항을 당부하고자 한다. 첫째, 문어발식 콘센트 사용을 자제하고 기구를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항상 플러그를 뽑아 두어야 한다. 장시간 난방기 사용 시 주변 복사열로 인한 열축적으로 화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전기매트 위에 두꺼운 이불이나 요를 깔아놓고 사용하는 것도 금물이다. 특히 라텍스 재질은 열에 약하고 인화성이 높으므로 함께 사용하면 안 되고 전기장판은 보관 시 접지 말고 말아서 보관해야 한다. 전기는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에너지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사용하거나 안전의식 없이 사용하게 되면 누전이나 단락 과부하 등으로 화재가 일어날 수 있다. 전기는 누전차단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테스트 버튼을 통해 확인하고 자주 차단기가 떨어진다면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전기안전점검을 받아야 한다. 둘째, 가스로 음식물을 조리할 땐 자리를 비우면 안되고, 특히 장시간 조리를 해야 하는 곰국이나 빨래를 삶을 때 자리를 비워 화재가 나는 경우가 많아 주의가 요구된다. 또한 가스를 다 사용한 다음에는 가스밸브와 중간밸브를 잠그고 수시로 가스가 새는지 확인해야 한다. 셋째, 단독경보형 감지기를 설치하고 소화기를 비치해야 한다. 또한 피난통로에 물건을 쌓아 놓지 않는다. 소화기는 화재발생 초기에 소방차 1대의 효과를 본다고 할 정도로 안전 필수품이다. 그리고 단독경보형감지기는 화재 시 열 또는 연기를 자동으로 감지해 자체에 내장된 음향장치의 경보음을 울려 화재를 조기에 알려주는 소방시설로 수면 중이거나 노약자 및 거동불편한 사람이 화재발생을 조기에 인지해 신속한 대피를 가능하게 한다. 전기, 가스, 담뱃불, 기름 등 가정에서 편리하게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화재나 대형참사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한번 더 사용법을 익히고 한번 더 철저하게 점검해서 우리 모두 주택화재예방에 힘써야 할 것이다.
by 노상균 대구.경북 취재본부장[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유신은 화랑 출신이다. 화랑의 15세 풍월주였던 김유신(흥무대왕)은 굴이 있는 곳에서 수련했다는 기록이 명문(銘文) 또는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화랑도는 소년들로 이루어졌고 곱상한 남자들이었다. 『삼국사기』 「진흥왕 37년」 조를 보면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불렀다. 그를 따르는 낭도의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겼으며 산과 강을 찾아 멀리까지 다녔다.’ 라고 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신라 전역에 있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돌아다니며 수련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홍주암 전경] 화랑조직의 유래는 진흥왕 37년인 576년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미 화랑 사다함이 562년에 대가야를 멸할 때 활동한 기록이 『삼국사기』 「사다함」 조에 전하고 있다. 아마도 576년 이전에 청소년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역사적으로 진흥왕 시대는 신라의 영토가 함경남도, 경기도, 경상남도 등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신라는 통치해야 할 백성들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서 새로운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화랑들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화랑도의 최고 지도자는 『삼국유사』에 국선(國仙)이라 불렀으나 『화랑세기』에서는 풍월주라 불렀다. 화랑도 조직은 화랑 아래에 평민부터 하급 귀족으로 구성된 낭도(郎徒)가 있었다. 낭도의 숫자는 수십 명 이상부터 수천 명까지 있었다. 화랑과 낭도로 이루어진 단체를 향도(香徒)라 부르기도 했다. 김유신은 15세에 외조모인 만호부인의 부름을 받고 진천에서 왕경으로 와서 용화향도를 이끌었다. [원효굴 내부] 화랑은 낭도들과 함께 신라 영토의 사랑 정신을 기르고 굴에서 심신을 수련했다. 화랑들이 수련한 굴은 모두 천연 석굴로서 크기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 굴은 모두가 자연의 조건이 명당의 위치이고 수련하기에는 적합한 공간이다. 화랑들이 굴에서 수련한 증거는 점말동굴과 단석산 중악석굴에 있다. 이들 굴 벽면에 있는 명문(銘文)에 의해 신라시대 화랑들이 수련했거나 다녀간 곳으로 확인되었다. 김유신과 관련한 수련굴로 전해지는 곳은 경주 단석산의 중악석굴, 팔공산의 중악석굴, 충북 옥녀봉의 장수굴, 충북 용두산의 점말동굴, 경북 팔공산의 원효굴, 경북 장육산의 육장굴 등이다. 중악석굴이 두 군데이나 단석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중악이었고, 팔공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중악이라 불렀다. 김유신이 수련하면서 난승으로부터 비법을 받은 곳은 단석산 중악석굴이다. 팔공산에는 원효굴이 두 군데이다. 한 곳은 비로봉 바로 밑에 자그마한 석굴이 있고, 동남쪽 기슭에는 조금 큰 굴이 있다. 2월 중순인데 산책하기에 좋은 기온이라서 조금 큰 굴에 가 보았다. 원효굴은 깎아지른 절벽 바위 사이에 자연으로 생성된 굴이다. 일찍이 김유신 장군과 원효대사가 수련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이 굴에 부처님을 모셨다고 불굴(佛窟)이라 불렀다. 현재는 불굴 바로 아래에 사찰을 짓고 불굴사라 한다.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인 690년에 창건했다. 이 절은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8에 있다. 청통와촌 톨게이트를 나와 서쪽 대구, 갓바위 방향으로 약 7km를 달리면 불굴사 입구에 도착한다. 불굴사 입구 전까지 2km는 길이 완만한 경사이다. 불굴사 경내가 조용하다. 원효굴은 불굴사 마당에 들어서서 종무소 옆을 지나 무척 높고 길다란 돌계단 길로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돌계단을 보수하는 중이라 적멸보궁 뒤로 철제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원효굴이 있는 바위에 두 개의 큰 기둥을 세우고 암자를 짓고 홍주암(紅珠庵)이라 부른다. 홍주암의 가람은 온통 붉은색의 옷을 입혔다. 1976년 원효굴 내부를 수리하던 중 신라시대로 추정하는 청동 불상 1점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홍주는 붉은 구슬로 태양을 뜻한다. 불굴사가 있는 지대는 음기가 센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암자를 짓고 양기의 상징인 홍주라 한 것 같다. 홍주암은 거대한 암석 덩어리와 한몸을 이루고 있다. 암석 절벽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말없이 천년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원효굴로 오르는 돌계단 좌우에 쌓은 돌탑들은 다녀간 사람들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돌계단 끝 왼쪽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홍주암이라 음각으로 했다. 좀 더 들어가면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원효굴(元曉窟)이라는 한자 현판이 나타난다. 원효굴을 감싸고 있는 홍주암에는 여러 가지 시설이 있다. 복잡한 부대 시설이 김유신의 흔적을 지워 버린 듯하여 아쉽다. 나는 어린 화랑 김유신의 모습을 애써 상상해 본다. 조망이 좋은 이곳에서 심신 수련하면서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김유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상이 늠름해 보인다. 굴 앞으로 보이는 조망은 정신을 한곳에 모을 수 있을 정도로 집중된다. 저 멀리 보이는 산과 들이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굴은 협소하나 조망은 한없이 넓다. 원효굴에 누군가 켜 놓은 촛불은 자신을 태우면서 굴 안을 밝혀주고 있다. 촛불은 켠 사람의 소망을 부처님께 전하고 있는 듯이 조용히 타 오르고 있다. 잠시 후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어디선가 물소리가 난다. 바위틈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암벽에 아동제일약수(我東第一藥水)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 물을 먹으면 소화 불량과 신장염에 좋다고 안내되어 있다. 김유신의 장군수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니 한 모금 마신 물이 에너지를 충전한 것 같다. 현재의 원효굴은 옛 정취를 찾기는 어렵다. 심신 수련은 몸과 정신을 하나로 생각하면서 수련하면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한다. 수련이 실패되는 경우는 몸과 정신을 분리하기 때문이라 한다. 김유신은 몸과 정신을 하나로 모았기에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사성어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란 말이 있다. 몸과 정신을 한곳에 모으면 못 이루는 일이 없으리.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박기형 경산소방서장] 민족 대명절 설이 지나고 부쩍 따뜻해진 날씨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난다. 자연스럽게 난방기구의 사용이 줄었지만, 여전히 주택화재의 위험은 많은 곳에서 도사리고 있다. 특히 콘센트 사용 부주의나 향초, 음식물 조리 시 부주의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한 사고가 많은 만큼 항상 주택화재 예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겨울철은 사계절 중 특히 화재 발생 건수가 많고 그에 따른 인명피해 비율도 높은데, 이번 겨울(23년 11월 ~ 24년 2월)은 전년 대비 화재 건수는 약 7% 정도 하락하였지만 반대로 인명피해는 24% 증가세를 보였다. 이는 주거 시설 화재 비율의 증가로 인한 현상으로 특히 추운 날씨에 따른 난방기구의 사용 및 부주의 등의 원인이 37%로 가장 많았고, 고령자나 거동 불편자의 피해가 가장 컸다. 부주의로 인한 화재가 많은 만큼 다음과 같은 겨울철 주택화재 예방 안전 수칙을 알아놓으면 화재 발생률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첫째로, 가정 내 가스 및 전기 시설을 정기적으로 점검하여 누설과 과부하를 방지해야 한다. 통계에 따르면, 화재의 약 40%는 가스 누설로 인한 것으로 매달 가스 밸브와 전기 회로를 점검하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로, 화재경보기를 각 층과 침실에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배터리를 교체하고 작동 여부를 확인하여 조기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통계에 따르면, 화재경보기가 설치된 주택에서는 화재로 인한 사망률이 약 50%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로, 적절한 종류와 개수의 소화기를 보관하고, 화재 발생 시에 대처할 방법을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연습해야 한다. 특히 주방에는 K급 소화기 배치를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소화기를 보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매우 저렴하다. 화재 발생 시 신속, 정확한 대응은 화재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가정 내에서 화재 발생 시 대응할 수 있는 계획을 미리 세우고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경산소방서에서 실시하고 있는 ‘공동주택 피난계획 수립하기에 캠페인’을 예로 보면 공동주택 내에 있는 대피 공간과 집 안에 대피 시설 등을 파악하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피난계획을 세워봄으로써, 화재 발생 시 효과적으로 대처하여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이 꺼진 후에도 전기 장치가 연결된 상태로 방치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전기 장치의 오랜 사용은 과열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장치는 즉시 전원을 차단하고 안전한 장소에 보관해야 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예방법은 우리의 주택 환경에서 안전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활 속 작은 예방이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 가족 구성원 모두 주택화재 예방에 힘쓰도록 하자.
by 노상균 대구.경북 취재본부장[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유신 장군 동상은 두 군데에 있다. 한 곳은 서울 남산공원 백범광장이고, 다른 한 곳은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두 곳 모두 크기가 비슷한 청동상인데 원래의 색깔을 찾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애국선열들의 상(像)은 1960년대 초엽 국가 단위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세우게 되었다. 프로젝트에 미술대학생들이 참가해 1964년에 애국선열들의 석고상 37기를 제작했다. 설치 장소는 서울 광화문과 남대문 사이 도로 옆이었다. 이 석고상들은 비바람에 때 묻고 훼손되었다. 훼손된 석고상을 보수하기 위해 이한상(李漢相)은 1966년 제1회 5∙16 민족상 산업 부분 장려상 수상자로 받은 상금 50만 원을 서울신문사에 맡겼다. 마침 도시계획에 따라 석고상이 철수되자 그가 서울신문사에 낸 기탁금이 위인들의 동상(銅像) 건립에 기폭제가 되었다. 서울신문사에서는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를 발족하고 당시 김종필(金鍾泌) 공화당 총재가 위원회의 총재를 맡았다. 위원회에서 모금 활동을 벌여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서울, 수원, 대전 등지에 15기의 동상 건립이 추진되었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6번째로 세워졌다. 서울 남산공원은 남산(270.8m)을 중심으로 꾸며진 공간이다. 처음은 1897년에 문을 연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이었다. 남산공원에는 위인들의 동상이 여러 기가 있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남산공원 북서쪽 백범광장의 조금 한적한 곳에 있다. 백범광장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은 당시 국회의원 김성곤(金成坤)의 헌납으로 1969년 9월 시청광장 앞에 건립한 동상이다. 백범광장으로 옮기게 된 연유는 서울 지하철 1호선 굴착공사 때문이다. 백범광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군데에서 갈 수 있다. 지하철 회현역에서는 4번 출구로 나와 남산공원으로 약 300m 걸어 가면 김유신 장군 동상이 나타난다. 백범광장은 남산의 관문으로 성곽이 복원되어 오솔길이 나 있어 고즈넉하다. 5월인데 주위는 싱그러운 나무들이 산소를 뿜어내는지 상쾌하다. 오솔길 곳곳에 있는 벤치가 운치를 더해 준다. 넓은 잔디밭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시멘트 포장 지면 위에 화강암으로 사각형 기단을 만들고 다시 화강암으로 높이 쌓은 좌대 위에 세웠다. 장군 동상은 북쪽을 향해 힘찬 모습을 취하고 있다. 동상의 전체 높이는 기단과 좌대를 합쳐 11.3m이다. 조각은 개성 출신 김경승(金景承)이 했다. 김유신 장군이 타고 있는 말의 두 뒷다리를 좌대 위에 고정했고 두 앞발을 위로 쳐들어 힘찬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말의 꼬리는 달려갈 때의 모습처럼 수평으로 물결 형태로 표현했다. 김유신 장군은 투구와 갑옷 차림에 왼손에는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힘차게 잡고 오른손에는 허리에 찬 칼을 내뽑아 들고 호령하는 모습이다. 칼은 어떠한 적군도 무찌를 기세이다. 이제는 지하철 1호선 공사가 끝난 지도 꽤 오래되었다. 많은 시민이 볼 수 있는 자리로 이전하여 김유신 장군의 호국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경주 황성공원은 경주시민의 휴식처이자 힐링 공간인 근린공원과 문화공원으로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심공원이다. 경주시립도서관 등 각종 문화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주차장 바로 옆에는 6∙25 참전과 월남전 참전 명예 선양비가 우뚝하다. 공원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산책길 옆으로는 맥문동의 고향처럼 군락지를 조성했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공원의 남동쪽 나지막한 봉우리에 있고 계단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이곳의 김유신 장군 동상도 새로 제작했다. 1970년 여름에 태풍 빌리가 불어닥쳐 동상의 칼에 금이 갔다. 경상북도에서는 보완 계획을 세웠고 때마침 1973년 발굴된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말다래와 말안장 가리개 등의 말갖춤을 보고 고증해 제작했다고 한다. 1975년 경주에 간 박정희 대통령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을 보고는 당시 김수학 경북도지사에게 방향을 바꿔 세우도록 하여 북쪽을 향하게 1977년에 준공했다. 북쪽에는 북한이 있다. 북한과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것 같아 공감이 간다. 이 동상의 좌대 옆면에 게시한 건립문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중략) 삼국통일의 주역이신 김유신 장군의 위훈(偉勳)을 오늘에 되새기며 온 겨레의 호국 정신을 일깨우고 조국의 평화통일 과업을 이룩해 나가는 (생략)’이라는 글귀가 있다. 아직도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어 평화통일을 못 이루고 있다. 황성공원의 김유신 장군 동상도 백범광장 김유신 장군 동상과 대동소이하게 경주 출신 조각가 김만술(金萬述)이 제작했다. 황성공원에 세워진 김유신 장군 동상의 높이는 기단과 좌대를 합해 9.7m이다. 동상의 말은 뒷다리 두 개와 앞다리 왼쪽을 좌대 위에 고정했다. 앞 다리 오른쪽은 기역자로 들어 올리고 있다. 말의 꼬리는 달려갈 때의 모습처럼 수평으로 물결 형태로 표현했다. 신라인의 힘찬 기상을 대표하는 김유신 장군은 투구와 갑옷 차림에 왼손에는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힘차게 잡고 오른손에는 칼을 빼 들고 호령하는 모습이 백범광장과 같다. 칼은 화랑들의 늠름한 기백을 묘사한 느낌이다. 황성공원은 경주에 있다. 경주는 김유신이 진천에서 태어나 15세에 와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라 위해 생활한 곳이다. 그의 동상을 보면서 그의 정신을 기릴 수 있다. 위인들의 동상은 동양의 문화가 아니다.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영웅을 칭송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문화이다. 서양인들이 세운 동상은 주로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광장이다. 광장은 서양인들의 토론 문화의 장소이기도 하므로 자연히 그들이 세운 동상을 잘 볼 수가 있다. 우리도 이왕에 동상을 세우려면 여러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세우면 좋겠다. 서울 백범광장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을 여러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장소로 옮겨지기를 바란다. 현재까지도 김유신 장군의 호국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피어나고 있다. 김유신의 향기가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기원한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기고문] 경산소방서 예방안전과장 이성곤] 최근 몇 년 동안 주택화재로 인한 피해가 증가하면서, 안전한 주거 환경 조성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화재는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에게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심각한 사고로 특히, 화기의 사용이 많은 설 명절에는 화재예방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가정에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안전 수칙과 대책을 준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먼저, 주택 내에는 화재 경보기와 소화기를 설치해야 한다. 화재 경보기는 화재 발생 시 조기 경보를 제공하여 대피에 도움을 주며, 소화기는 화재 진압에 필수적인 장비로, 적절한 위치에 비치되어야 한다. 전기와 가스 사용 시에도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 오래된 전기 콘센트나 소모된 전선은 화재 발생 위험이 크므로 주기적인 점검과 교체가 필요하다. 가스 사용 시에는 가스 누출을 감지할 수 있는 경보기를 설치하고, 가스 사용 후에는 반드시 밸브를 닫아야 한다. 대피 계획 수립도 중요한 요소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화재 발생 시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대피 계획을 수립하고 주기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이웃과의 협력을 통해 대피 공간과 방법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다. 안전한 사용 습관을 갖는 것도 화재 예방에 있어서 중요하다. 주택 내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가열기구를 사용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는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주택화재는 예방 가능한 사고이다. 안전 수칙을 준수하고 대책을 마련하여 우리 가정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함께 안전한 생활 환경을 만들어 가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편안한 주거 환경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을 위한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신라 문무대왕 김법민은 외삼촌인 김유신(흥무대왕)과 함께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에는 바위섬, 네 면에 수로가 나 있는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다. 봉길리 앞바다 조약돌 위에 앉아 저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니 문무대왕의 위업을 떠 올리게 한다. 김법민은 626년에 태종무열대왕과 문명왕후 사이에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25세 때는 진덕여왕의 명으로 비단에 수놓은 오언 율시의 「태평송」을 당나라 고종에게 바치는 일을 담당했다. 「태평송」은 주변 국가를 모두 복속시켜 위세를 떨친 당나라의 위대한 문무의 힘과 통치력을 예찬한 내용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노린 신라의 야심적인 외교의 시다. 당나라 고종은 태평송에 만족해하고 김법민을 태부경(太府卿)으로 임명해 돌려보냈다. 태부경은 당나라의 태부시(太府寺)의 장관으로서 황제의 재화와 보물의 수장을 관장했다. 아버지인 태종무열대왕은 왕자들의 관등을 높이고 29세인 김법민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가 된 지 6년째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당나라 내주(萊州)에서 내려온 소정방 군사를 아버지의 명으로 덕물도(덕적도)에서 맞이하는 역할을 했다. 660년 7월 13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의자왕은 측근을 거느리고 밤에 웅진성으로 달아나고,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과 대좌평 천복(千福) 등이 나와 항복했다. 김법민은 부여융을 꿇어앉히고 지난날 의자왕이 신라의 대야성 전투에서 자기 누이를 억울하게 죽인 것을 꾸짖은 것으로 보아 동기간 인정이 듬뿍 느껴진다. 661년 6월에 태종무열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김법민은 36세의 나이로 신라 제30대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에서 숙위하고 있던 동생 김인문(金仁問)과 유돈(儒敦) 등이 돌아와, “소정방이 수군과 육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므로 문무왕께서도 군사를 일으켜 호응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에 문무왕은 7월 17일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20여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소정방 군사에 호응하기 위해 출발했다. 8월에 문무왕이 장수들과 함께 현재 경기 이천시로 비정하는 시이곡정(始飴谷停)에 도착했을 때 백제의 잔당들이 현재 대전 대덕구 계족산성으로 비정하는 옹산성(甕山城)에 모여 길을 막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무왕은 군사들을 보내 전멸시켰다. 10월에는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왕경으로 돌아갔다. 황제의 조칙은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했고, 여러 빛깔의 비단 5백 단(段)을 증여받았다. 김유신 대장군은 군사들을 쉬게 하고 시이곡정에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나라 유덕민(劉德敏)이 칙지를 가지고 왔다.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명령이었다. 명령을 들은 문무왕은 662년 1월에 김유신과 김인문 등 아홉 명의 장군에게 명해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석과 조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명했다. 소정방은 군량을 얻자 날씨가 몹시 춥고 얼어붙을 지경이라서 곧 싸움을 그만두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듬해 4월에는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이미 당나라는 신라를 자기의 부용국으로 삼았고 이후에 침략할 뜻이 있었다. 665년 8월에는 당나라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 문무왕이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을 했다. 문무왕과 부여융은 백마의 피를 입에 발라 다시는 싸우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신라와 백제가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고 한 약속이었다. 666년, 41세가 되었다. 4월에 문무왕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했다. 그러자 7월에 당나라 고종은 신라군이 평양에 모이도록 했다. 이듬해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당나라 이적(李勣)의 군대를 기다렸다. 두 달 후 이적이 평양성 북쪽 200리에 도착해 대나마 강심(江深)을 시켜 문무왕에게 군사 동원 기일을 독촉하자, 문무왕이 현재 황해도 수안인 장새(獐塞)에 도착했을 때 이적(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문무왕의 군사도 돌아왔다. 이적이 왜 돌아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당나라에서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668년 6월 12일 유인궤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숙위하던 김유신의 장남 김삼광과 함께 현재 경기 화성군 남양면 지역인 당항진에 도착했다. 나당연합군이 9월 21일 평양성을 에워싸자, 고구려 보장왕은 찬란한 역사를 뒤로하고 항복했다. 문무왕은 외모가 뛰어났으며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재위 기간 중 큰 업적이 있고 난 후 에는 군사들에게 음주의 시간을 준 것으로 보아 신라 때도 군사들에게 음주는 금지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길조라 생각하는 흰 까치, 흰 매를 지방에서 바쳤다니 신라시대부터 희귀 새가 있었다. 부인들에게도 중국식 의복을 입도록 했고, 당나라 음악도 배우게 한 것은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재물과 토지를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했다. 이 조치는 사원 등의 지나친 토지 모음을 제한하고, 귀족들의 사유재산이나 토지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한 669년 2월 21일 새벽 이전까지 죄를 범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죄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두 풀어준 것은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살 기회를 부여했다. 문무왕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배포가 큰 정치를 실현했다고 본다. 문무왕은 21년간 재위하다가 681년 7월 1일, 56세(당시 문무대왕비문)로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했다. 문무왕은 평상시에 지의법사에게 자기가 죽은 후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임종 10일 후 서역(인도)의 법칙에 따라 불로 태워 장사 지내고 장례 절차를 검약하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여러 신하가 문무왕의 유언대로 동해 어구의 큰 돌 위에 장사 지냈다. 2001년 KBS 문무대왕 수중릉 조사 때 대왕암의 십자형 수로와 대왕암 안쪽을 인공적으로 깎아서 다듬은 흔적까지 발견했다. 그러나 부장품은 없었다. 바닷물이 동쪽 수로로 들어와 서쪽 수로로 잘 빠져나가도록 만들었다.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대왕암을 성지로 만들고자 외양을 다듬었다고 한다. 문무대왕은 왕자로 탄생해 태자로 책봉을 받았고, 태자 시절에도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웠다. 왕이 된 후로도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직접 전장을 누볐다.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가 조용해지니 수중릉이 더 눈앞으로 다가온다. [문무대왕암 수중릉 내부(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이성(異性)에 대한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 남성 위주의 우월주의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라지고 이성에 대한 가치관도 평등주의로 바뀌고 있다. 현대 사회는 육아도 같이, 가사도 같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남녀 구분 없이 담당한다. 이성 간의 접촉 행위도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개방적이다. 신라시대 때는 양성평등이 잘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제2대 남해 차차웅의 여동생 아로 공주가 혁거세 거서간 시조 묘의 제사장을 맡아서 제사를 주관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조직한 청소년 단체의 우두머리를 여성으로 하여 원화(源花)라 불렀다. 원화인 준정(俊貞)이 같은 원화인 남모(南毛)를 죽인 후로는 화랑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남성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신라에는 여성 왕인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으로 세 사람이나 있었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남성 우월과 남존여비 사상으로 남녀를 엄격히 구별했다. 남녀는 일찍부터 분리되어 하는 역할이 달랐다. 남자는 주로 바깥일이고, 여자는 집안일이었다. 또한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남자와 여자는 일곱 살 때부터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다. 성인이 되어도 부부가 거처하는 방은 사랑채와 안채를 따로 두어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남녀를 평등한 위치에서 보고자 한다. 생활 장소의 구분도 없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육체적으로 남성과 구분되는 여성은 여성이라는 자아 정체감으로 순종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육체의 문도 순결이 지상목표로 인식되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쩌다가 육체의 순결을 잃었다 하더라도 정신적인 순결을 잃지 않았다면 괜찮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오래전 캐나다에서 생활할 때의 일이다. 동네 축구장에서 학생들의 친선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축구장은 숲속에 있었고 온통 잔디밭이었다. 숲속 분위기마저 쾌적하고 시원했다. 관람 벤치에서 잠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영화 같은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치열하게 싸우는 축구 경기가 마음을 흥분시킨 탓일까, 벤치에 앉아 있는 젊은 남녀가 부둥켜안고 키스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리고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경기 도중 틈틈이 고개가 저절로 그들에게로 돌아갔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두 사람의 키스는 간헐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 단계로 보아 생식기에 해당하는 나이로 보였다. 그들은 성욕이 한창 왕성한 시기이다. 나의 유교적 이성 문화 관념에서는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외국인의 자유로운 이성 개방 문화에 호기심을 느끼며 축구 경기를 계속 보았다. 이긴 팀이 진 팀에게 아주 정답게 인사를 하고 포옹도 한다. 키스하던 남녀도 경기가 끝나자 언제 키스했느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남녀의 표정에는 행복감이 넘쳐 보였다. 그들의 행위는 단순히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지 않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체가 서로 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도 언제부터인가 자유스러운 키스 문화가 상륙했다. 가로수 밑, 시원한 그늘, 구석진 곳, 버스정류장 등에서 남녀가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누구도 관심 없다는 듯이 지나친다. 그들을 보는 나의 시선도 한층 부드러워진다. 오히려 정다워 보인다. 언제부터 내가 이토록 이성에 대하여 관대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남과 여의 평등사상이 가슴속에 녹아 있는 탓일까? 노출된 장소에서 행해지는 남녀 간의 키스도, 포옹도 때에 따라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다. 캐나다의 이혼문화도 이성 간의 인격을 존중하고 있었다.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가정에 홈스테이한 친구의 경험담은 이성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이 가정에는 혼인 안 한 딸만 셋이 있었다. 큰딸은 재혼 안 한 아버지와 함께 살고, 둘째와 셋째 딸은 초등학생이라서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가정이었다. 친구는 아버지와 큰딸이 사는 가정에 홈스테이하고 있었다. 이혼한 부인이 재혼해 사는 가정과 친구의 홈스테이 가정과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매주 주말이면 어머니와 함께 사는 두 딸은 토요일 오전 아버지 집에 와서 일요일 저녁에 가고, 큰딸은 토요일 오전 재혼한 어머니 집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일요일 저녁에 오는 상황이었다. 현재 한국에도 이혼한 가정이 많다. 자녀가 있다면 양육은 부부가 공동 책임을 지고 자녀가 바람직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환경이 기대된다. 이혼한 가정의 남과 여의 평등은 남편이 이혼한 부인에게 남성이라는 우월성을 떠나야 평등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을 한다. 캐나다의 이혼한 남편은 자기가 싫으면 얼마든지 다른 남자와 재혼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모습이다. 친구와 나는 캐나다의 이혼한 가정에 관해 종종 토론을 벌이곤 했다. 아무래도 내가 남과 여를 바라보는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자랄 때부터 남성 위주의 우월감이 있었다. 남녀는 평등하니 서로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함에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성에 대해 기울어진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비로소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우월주의를 버리기로 했다. 요즈음은 이성의 활동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생활하고 있다. 오늘날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여성들이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여성이 사회에서 대등한 남과 여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인식과 함께 국가적으로 남녀평등 정책이 더 강화될 때, 여성들도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바로 설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남과 여가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누리는 날을 꿈꾼다.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필자]
by 수원본부장 손옥자